<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제목을 봤을 때 무엇이 맞고 틀리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맞고'와 '틀리다'보단 '지금'과 '그때'가 보다 중요하게 느껴졌다.
두 개의 지금 혹은 두 개의 그때. 결국 지금이라서 맞고,
그때라서 틀린 것. 이것은 결국 옳고 그름의 문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을 옳고 그른
것으로 판명해주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언제나 지금은 맞지만 언젠가 그때는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시간이라는 마술적 흐름에 관한, 굉장히 사소한
발견의 깊이.
완전히 분절된 데칼코마니 형태의 출발점에서 제각각 시작되는 두 개의 이야기. 홍상수
감독 특유의 대구 구조를 개별화시킨 두 영화는 하나의 시작을 품었으나 두 개의 우주로 분리된다. 아마
홍상수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새로운 전형으로 구별될만한 작품일지도. 개인적으론 <옥희의 영화> 이후로 또 한번의 전환점이라 생각했다. 하나의 시점으로 분리시킨 두 가지 삶의 체험. 정말 놀라운 영화적
경험. 사소한 일상의 톤으로 길어 올린 마술적 리얼리즘. 나는
이 영화에 어떤 찬사도 아끼고 싶지 않다. 놀랍다는 말도 부족하다.
정재영은 두 사람 몫을 하며 영화의 너비를 확장하고, 김민희는 한
사람으로서 영화의 경계를 만든다. 두 개의 정재영과 하나의 김민희가 이 영화의 대구를 완성한다. 두 방향으로서 완전한 하나의 영화. 이 영화가 놀라운 건 영화라는
체험이 삶을 어떻게 예언하는가, 삶을 어떻게 반추하는가, 정반대의
방향성을 지닌 두 가지 질문에 합당한 답을 모두 해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현재는 언제나 옳게 합리화되고, 과거는 언젠가 틀려서 부끄러워진다. 그래서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하지만 우린 언제나 지금을 사는 인간이다. 부끄럽지 않고 배길 수가
없다. 그게 당연하다.
“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서울을 통과할 거다. 그리고 집으로.” 하지만 알 사람은 안다. 그 작자가 결코 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서울을 통과하지 않을 것을. 홍상수의 열두 번째 장편 <북촌방향>은 어느 영화감독의 서울상경기를 그리는, 여전히 찌질한 굴레를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남자의 궁색한 일상을 그리는 또 한번의 수기다. 도돌이표처럼 되돌아가는 동선 속에서 메트로놈의 리듬처럼 반복되는 일상, 홍상수 감독은 비슷하지만 명확히 다른 대구의 거울을 통해서 거듭되는 우연의 체감을 통해서 의미를 얻어나가는 ‘생활의 발견’을 또 한번 이룬다. 하지만 <옥희의 영화>에서부터 느껴지던 싸늘한 냉소가 <북촌방향>에서도 예사롭지 않게 감지된다. 여전히 제 버릇 개 못 주듯 자신의 다짐이 무색하게 일상에 치근덕거리는 남자의 일상적인 소비는 더 이상 연민이나 추억으로 언급될 수 없는 싸늘한 한기로 둘러쳐진다. <옥희의 영화>와 <북촌방향>은 홍상수의 겨울영화다. 계절이 겨울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고드름처럼 얼어붙은 냉소가 선명한, 북서풍 고기압성 결말, 더 이상 희희낙락하게 방관할 수 없는 그 남자들의 겨울이 예사롭지 않다.
<어떤 방문>은 매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기획하는 ‘디지털 삼인삼색’의 2009년 판본이다. 일본의 가와세 나오미와 한국의 홍상수, 필리핀의 라브 디아즈가 참여한 이번 시리즈는 방문이란 소재를 최소한의 공통분모로 둔, 세 감독의 시선과 역량이 차별적으로 반영된 세계관의 합집합이나 다름없다. 가와세 나오미의 <코마>와 홍상수의 <첩첩산중>, 라브 디아즈의 <나비들에겐 기억이 없다>까지 세 단편을 나열한 단편 옴니버스 <어떤 방문>은 그만큼 작품간의 감상적 편차가 큰 작품인 셈. 세 작품 중 유일하게 핸드헬드가 적극 활용된 가와세 나오미의 <코마>는 전반적으로 느슨하게 진행되는 이야기 흐름 끝에 멜로적 심상이 깊게 걸리는 작품으로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아무래도 세 편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영화라 할만한 홍상수의 <첩첩산중>은 홍상수의 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여자의 시점과 나레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특이점을 제외하면 여지 없는 홍상수 작품이다. 얽히고 설키는 남녀관계 속에서 속물적 본성과 이중적 태도가 수다스럽고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소동극은 말 그대로 홍상수스럽다. 마지막으로 가장 지난한 감상을 부를 만한 라브 디아즈의 <나비들에겐 기억은 없다>는 척박한 필리핀의 현재적 세태를 반영하듯 롱테이크와 흑백필름의 질감을 통해 지독하게 건조한 정서를 화면에 담아냈다. 디지털이라는 매체적 속성에 대한 탐구와 하나의 소재를 다양한 양식으로 완성한 감독들의 개별적 세계관에 흥미를 느낀다면 수집하고 목격할만한 체험이라 할만하다. 물론 말 그대로 그 반대편에 놓인 관객에겐 일종의 고문이 될 확률도 배제할 수 없겠지만.
영화에서 주로 면 티셔츠 한 장만 입고 등장하는데 생각보다 몸이 탄탄해 보이더군요. 사색적인 이미지 때문인지 특별히 운동을 좋아할 것 같진 않은데 나름대로 꾸준한 자기관리를 하는 거 같습니다. 혹시 나중에 케이블에서 보실 기회가 있으면 <얼굴없는 미녀>다시 한번 보세요. 제 몸이 ‘괘안습니다’. (웃음) 기대하시는 분들은 별로 없겠지만 평상시에 유산소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웃음) 오히려 <잘 알지도 못하면서>하면서 술 많이 먹고 그래서 좀 망가졌죠. 사실 <얼굴없는 미녀>때는 감독님께서 일부로 몸을 만들라고 주문도 하셨고, 그래서 그때는 정말 좋았었죠. 사실 지금 몸이 좋아 보인다는 것도 원체 저에게 기대를 안 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몸 좋으신 분들이 들으면 웃기고 있네, 그럴 걸요. (웃음)
사실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는 마치 배우들에게 기본적인 설정만 알려주고 알아서 풀어낸 상황을 그냥 카메라에 담아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습니다. 마치 배우들을 방목시켜놓고 그냥 카메라로 따라잡은 느낌이죠. 하지만 사실은 상당히 치밀하게 영화를 찍는다고 하시더군요.
예. 절대 아니에요. 예를 들면 처음엔 저도 원체 자연스러운 느낌이라 상황만 약간 주어지고 애드립의 느낌으로 연기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안 그랬어요. 아주 디테일한 것까지 다 찍으시면서도 자연스러움을 완벽하게 만드시는 분이시죠.
자신이 원하는 컷을 얻기 위해선 몇 번이고 집요하게 반복해서 테이크를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지독하신 분입니다. (웃음) 예를 들면 다른 영화 같은 경우 뒤에서 누가 쳐다봐서 거슬렸다 싶으면 바로 ‘커트’, 그런데 그냥 ‘오케이, 괜찮아, 여기서 잘라 쓰면 되니까’, 보통 이렇게 되는데 홍 감독님 영화에선 2분, 3분, 5분 롱테이크 가는 도중에 마지막이라도 누가 지나가면서 어색하게 쳐다 봤다, 그러면 ‘다시’. 용납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홍 감독님 영화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어요. 홍감독님 영화에 원체 원신 원컷이 많고 만약 영화에서 리얼리티가 느껴지지 않으면 영화를 보다가 빠져나올 수 밖에 없게 될 거에요. 그러니까 감독님도 완벽을 기하기 위해 굉장히 치열하고 꼼꼼한 방식을 고수하시기 때문에 현장에서 그렇게 독하게 하실 수 밖에 없는 거 같아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홍상수 감독님과 함께 한 세 번째 작업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방식에 익숙해졌겠지만 아무래도 처음엔 어느 정도 적응이라고 할만한 시간이 요구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그렇죠. 그런 방식으로 영화를 찍는 감독은 별로 없잖아요. 그러니까 궁금하기도 하고 사실 두렵기도 하죠. 배우가 아닌 누구라도 궁금할 수 있을 텐데, 그게 배우입장이라면 더욱이나 그렇겠죠. 근데 해보니까 괜찮더라고요, 그 방식이. (웃음)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받아본 것도 아니고 매일 같이 당일 분량의 대본을 전달되는 감독의 영화에 참여할 수 있는 건 어느 정도 작품의 결과에 대한 잠재적 신뢰가 있기에 가능한 과정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전부터 제가 워낙 홍상수 감독님 팬이었기 때문에 이미 그런 확신이나 믿음은 있었던 셈이죠. 그런데 사실 그런 방식에 대한 믿음이 있고, 없고의 문제보다 오히려 새로운 기대가 있었어요. 그 방식은 좋고 나쁘고,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냥 다른 것인 셈이죠. 다른 영화나 다른 감독님과의 방식과는 다른 거에요. 그렇다고 그게 꼭 옳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게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고, 그건 그냥 그 감독, 혹은 그 사람만이 지닌 성격인 거죠. 물론 그게 또 모든 방식에 적용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건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거죠. 전반적으로 크게 볼 땐 그 감독님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지만 그 감독님의 믿음과 별개로 특별히 보자면 그건 그냥 그 감독님의 방식이었던 셈이고, 저는 그 사람하고 하기로 했으니 그 방식에 따라야 되는 거죠.
결과적으로 그 방식의 첫 번째 지지자는 배우가 되는 셈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 가운데 가장 호화로운 캐스팅을 자랑하는 영화입니다. 그냥 출연하는 배우들만 봐도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더군요. (웃음) 더욱 놀라운 건 그 모든 배우들이 노 개런티로 출연했다는 점이죠. 그럼에도 그런 보기 드문 상황이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라서 자연스럽게 수긍되는 느낌도 있더군요.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정말 죄송한 말씀을 드리자면, 저는 노 개런티라는 게 그만 이슈가 됐으면 좋겠어요. 사실 이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홍상수 감독님이니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겠죠. (웃음) 그런데 홍상수 감독님이 매번 노 개런티로 배우들을 출연시킨 건 아니거든요. 일단 감독님께서 이번 제작 여건에 대한 상황을 얘기해 주셨고, 안 주는 게 아니고 못 줄 상황에 놓였다는 걸 충분히 이해했고요. 물론 그런 이해만으로 다 출연할 순 없는 거잖아요. 만약 모든 감독님께서 저한테 오셔서 좋은 작품이니까 이해해달라고 해도 다 이해할 순 없는 거잖아요. 저는 그 이전부터 홍 감독님을 존경하는 팬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홍 감독님과 두 번 작품을 하면서 얻어진 믿음이 플러스됐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겠죠.
단지 인정적인 문제에서 노 개런티를 선택했다기 보단 분명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가 배우에게 주는 어떤 보상이 있기 때문이 가능했다는 이야기겠죠.
어쨌든 전 그런 이해와 감독님에 대한 믿음이 합쳐졌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제가 ‘넌 왜 그냥 하기로 했니’ 이렇게 물어보진 못해서 다른 분들은 어떻게 결정했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말하지 않아도 대충 다 아시지 않을까. (웃음) 그냥 저랑 별반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은 드는데 그건 제 예상이니까 제가 대신 답변할 순 없는 거고요. 다만 저는 이제 노 개런티 얘기는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 이제 앞으론 노 개런티라고 해서 안 한다 그러면 그 감독님들은 ‘내 작품이 싫은가?’ 그럴 거 같아. (웃음) 그리고 어느 개인적인 작품을 한 배우가 아니라 어느 한 작품을 한 배우의 입장에서 노 개런티란 부분이 너무 이슈가 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거 같아요. 어쨌든 좋은 사람들의 뜻이 맞아서 찍은 좋은 영화가 영화로서 이야기되는 게 아니라 그런 이슈를 통해서 이야기될 거 같아서요. 그걸 숨기려는 건 아니고 이젠 알려질 만큼 알려졌으니까요. 그냥 작품으로 인정을 받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 있어요. 사실 제가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물론 전체적으론 대단한 일이긴 하죠. 돈을 줘도 그 배우들이 이렇게 다 모일 수도 없잖아요, 사실.
구경남은 겉으로 봤을 땐 소심하고 마음이 약해 보이지만 때때로 다혈질이고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표정으로 드러내곤 한다는 점이 재미있었습니다. 혼자 꿍꿍이 짓 다하고, 일 있다 그래 놓고 방에 가서 퍼 자고. (웃음)
사실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 속 캐릭터들은 너무나도 일상적인 배경 안에 놓여있다 보니 캐릭터 자체가 마치 배우의 본래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혹시 연기하는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너무나 자신 스스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게 아닌가라고 느껴본 적은 없습니까?홍상수 감독님의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출연작에서 제가 연기하는 모습 속에 제 안에 있는 것들이 조금씩 나오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그렇다곤 말씀 드릴 수 없어요. 사실 홍 감독님의 영화에선 저 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굉장히 리얼하게 연기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측면도 있겠죠. 물론 배우들의 힘도 있겠지만 감독님께서 그렇게 잘 만들어내시는 거라고 생각해요. 감히 더 나아가보자면 홍 감독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그래, 그래, 하고 끄덕일 수 있을만한 공감대를 끌어내시는 것이기도 하겠죠. 저는 항상 주어지는 대로 하는 것뿐인데 그게 유독 홍 감독님 영화에서 많이 보이고, 저뿐만 아닌 다른 배우들도 그렇잖아요. 그건 홍 감독님에게 김상경이면 김상경, 김태우면 김태우, 그들 안에 있는 걸 끌어내는 힘이 있으심과 동시에 그걸 배우의 이미지와 잘 조화시켜서 마치 그 사람이 원래 그런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공형진 씨는 원래 코믹한 연기를 잘 하는데 이번에 보면 다르잖아요. 영화 속 캐릭터를 보고 ‘저게 진짜 공형진 아니야?’. ‘저게 진짜 정유미 아니야?’ 그럴 수 있다면 그건 사실 감독님의 힘이 큰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저는 더 많이 죽여서 연기한 거에요. 저는 원래 구경남보다 더 찌질해요. (웃음)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의 구경남은 마치 빨랫줄과 같은 인물입니다. 나머지 인물이 빨래처럼 걸렸다 걷혀도 구경남은 항상 거기 있으니까요. 전체적인 맥락을 관통하는 인물이지만 이야기의 중심을 장악하는 캐릭터는 아닌 셈이죠. 사실 전체적인 이야기에서 배제되지 않는 인물이지만 감정의 중심을 장악하는 캐릭터가 아니란 점에서 마치 영화의 배경과 같은 인물이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볼 때 구경남이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건 나중에 고순을 만나서 마지막으로 능동적으로 움직일 때뿐이에요. 그 외에는 정말 말 그대로 구경하는 남자에요. 구경남이란 이름 자체가 개인 욕망인 셈이죠. 물론 어쩌면 다른 배우가 구경남을 연기했다면 빨랫줄 같지만 부각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더 잘 했을지도 모르죠. 그런 면에서 저는 그럴 능력이 안 됐던 것 같고요.
어떤 인물의 감정을 부각시키기 위한 수식어로서의 연기를 선호하는 게 아닐까 생각도 해봤습니다. 많은 작품에서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관철시키기보다도 상대의 감정을 중시하는 인물로 등장했던 것 같거든요. 배려가 많거나 소심한 느낌이죠. 심지어 <키친>이나 <내 청춘에게 고함>에서는 아내의 불륜에 충격을 먹으면서도 쉽게 화내지 못하는 캐릭터이기도 하죠. 곧잘 사과를 하기도 하고요. 이번 작품에서도 혼자 속으론 별 생각을 다하면서 쉽게 번번히 사과하잖아요. (웃음)
아무래도 전반적으로 제가 감정을 드러내기 보단 받는 스타일의 배우라서 그럴지도 모르죠. 사실 그건 작품에 따라서 틀린 거죠. 예를 들면 <해변의 여인>같은 경우는 괴상한 짓을 하는 작은 역할이었고 오히려 거기서 도와주는 것처럼 연기했는데 운이 좋아서 영평상 남우조연상까지 받았죠. 물론 어떤 상을 받았느냐,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영화 안에서 자기역할을 충실한 배우가 좋은 배우가 아닐까 싶어요. 역할의 위치나 비중에 대한 욕심이나 부담은 없어요. 아무래도 조화를 중시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작품에 녹아 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긴 해요. 다만 다음에 다른 캐릭터를 할 기회가 되면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야겠죠.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은 마치 저 인물이 홍상수 감독의 심리를 대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은연 중에 자의식을 때때로 속물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솔직하게 드러내 보이곤 합니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는 그렇게 읽혀도 좋을 만큼 절묘한 대사들이 많았어요. 특히 제주도에서 학생의 질의에 대한 답변하는 구경남은 마치 홍상수 감독님의 대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죠. 아까 말했던 2백만도 진짜 홍상수 감독님 속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재미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모든 생각이 홍상수 감독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얻는 착각일 지도 모르겠죠. (웃음)
이번에 인터뷰할 때 그런 질문들을 너무 많이 하시는 거에요. 생각해보니까 그럴 수 있을 거 같은 거에요. 일단 구경남이 예술영화감독이고, 질문들의 상황을 고려하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싶은 거죠. 사실 배우 입장에서는 영화를 찍는 동안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지금 찍고 나서 하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고 나니,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은 거죠. 하지만 지금 돌아가서 다시 찍는다 해도 그건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 같아요. 역할을 하면서 ‘이건 홍상수 감독님하고 다르나? 이건 맞지 않나?’ 이런 건 제 입장에서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거니까요. 실제로 전혀 의식도 못했고요.
홍상수 감독님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작업을 했던 배우로서 이런 생각이 어떻게 들릴지 궁금합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감독님은 그렇지 않거든요. 제가 아는 홍 감독님은 죽었다 깨어나도 2백만을 꿈꾸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웃음) 다만 그에 대한 대답을 해보자면 홍상수 감독님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죠. 다들 감독님 머리에서 나온 캐릭터잖아요. 저 뿐만 아니라 공형진 씨 역할이나, 유준상 씨 역할 안에도 감독님이 녹아있을 수 있겠죠. 글을 쓴 사람이 자신의 캐릭터에 녹아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겠죠. 그러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 홍 감독님은 구경남 같은 사람일 수도 있고, 구경남은 감독님이 아닌 사람일 수도 있죠. 감독님을 닮았겠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게 지금 제가 돌이켜 생각해본 답이에요. 어쩌면 그 전부터 홍상수 감독님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모두 그랬던 거 같아요. 감독님의 모습에서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의 마음이 담겨있는 거 같기도 하고.
KBS공채 탤런트 시험에 합격해서 연기자로 데뷔했습니다. 하지만 배우로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준 건 영화 쪽이었죠. 필모그래피만 보자면 마치 방송 매체보단 영화를 선호하는 배우라는 인식을 줄 정도로 꾸준히 영화로 활동해왔습니다.
저는 원래 연극과 출신이에요. 사실 제 얼굴로 영화나 드라마에 나온다는 건 생각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어요. (웃음) 일단 배우로서 솔직히 영화가 매력 있긴 하죠. 다만 편견은 없어요. 의도해서 그런 건 전혀 아니고요. 그냥 공교롭게도 영화 쪽에 좋은 작품이 들어오다 보니까 최근 9년 정도 계속 맞물려서 영화만 찍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뿐이죠. 기회가 되면 드라마뿐만 아니라 연극도 다시 하고 싶고요. 작년엔 SBS에서 했던 4부작 드라마 <도쿄, 여우비>에도 출연했고, 졸업하고 처음으로 예술의 전당에서 안톤 체홉의 <갈매기>를 공연하기도 했잖아요. 물론 이런 건 있을 수 있어요. 영화와 드라마 사이에서 결정을 해야 될 때 영화 쪽으로 약간 기울 순 있겠죠. 왜냐면 그건 다른 게 아니라 영화는 배우로서 준비할 시간도 많고 환경적으로 유리한 부분이 있으니까요. 다만 그렇게 구분 지어서 생각했던 적은 없는 거 같아요.
사실 드라마보다 영화나 연극이 좀 더 배우에겐 안정적으로 느껴지는 게 당연할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준비과정이 어느 정도 안배된다는 점에서 말이죠. 모든 배우가 사실 좀 그렇지 않을까요. 기자님이 기사를 쓰셔도 시간이 있고 정보를 알고 쓰는 게 아무래도 편한 것처럼요. 물론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도 기본적으로 해내야 하는 게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겠죠.
말씀하신 것처럼 작년 말에 안톤 체홉의 <갈매기>를 공연했습니다. 오랜만에 서는 무대였는데 긴장되진 않던가요?
무대에 너무 오랜만에 서서 약간 긴장되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그런 건 없더라고요.
졸업 이후로 첫 연극이었는데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나름대로 오랜만에 귀향한 기분도 들지 않았을까 싶고요.
좋았어요.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기엔 프로로서 보여준 게 없으니까, 어떤 의미로는 처음 했다고 봐도 되겠죠. 물론 학교 때 쉬지 않고 연극을 했지만 그건 학교 때 했던 거니까 프로로서 처음 했다고 볼 수 있는 거에요.
러시아 출신 연출가인 ‘유리 부투소프’의 작품이었고 ‘트레플레프’를 연기했던 것으로 아는데 원래 희곡의 형태에서 변주를 가미한 파격적인 공연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3막에서 원작과 달리 ‘트레플레프’의 내면을 과격하게 드러내는 장면이 삽입됐다고도 하더군요. 오랜만에 선 무대에서 어떤 에너지를 얻진 않았을지 궁금하군요.
여러 가지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작품이었어요. 일단 배우로서 연기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었죠. 그리고 주변의 많은 분들이 무대를 해야 배우로서 재충전할 수 있게 되고 재충전을 떠나서 많은 걸 정비하게 된다고 했는데 그런 말씀들이 맞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더욱이나 ‘유리 부투소프’라는 좋은 연출가를 만나서 너무 많은 걸 배웠어요. 제가 원래 사실주의 연극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원래 형태를 완전히 태워서 새로운 걸 창조하는 형식이 놀라웠죠. 예를 들면 우리가 국한해서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작품이나 인물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형태로 보여주는 거에요. 이렇게 연극이란 매체를 통해서 배운 것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얻은 것도 많고 오랜만에 그런 훈련이 계속 필요하다는 것을 많이 느꼈어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도 있었고, 내가 너무 게을렀던 건 아니었는지 생각도 하게 됐고요. 여러 방면에서 좋은 기회였죠.
홍상수 감독님이 아침마다 당일 촬영분량의 대본을 집필하는 건 자신의 갱신된 생각을 최종적으로 갈무리하는 하나의 의식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형태적으론 마치 드라마 쪽대본과 비슷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스토리가 밀려가고 시간에 쫓기는 가운데 버겁게 마감되는 경우에서 드라마 쪽대본이 난무하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문제가 되기도 하고요. 드라마 쪽대본과 홍상수 감독님의 대본은 형태가 비슷할 뿐 전혀 다른 과정에서 탄생한 결과물이죠. 그만큼 배우에게 전해지는 안정감이나 신선함도 다를 것 같고요.
전혀 다르죠. 드라마에서 쪽대본은 시간이 없는 상태에서 전해지거든요. 좀 과장되게 이야기하면 전쟁이 터지지 않는 이상, 3일 뒤 방송이 나가야 되는 상황을 전제로 완성되는 거죠. 일단 지금 작품의 내용을 분석하거나 토론할 시간도 없이 그저 대본의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외워서 얘기하고 넘기고 넘겨야 하는 상황에서 쪽대본이 나오는 거에요. 내가 지금 너무 과장되고 격하게 얘기했나요? (웃음) 쉬운 얘기로 드라마 작가는 인물의 다음 스토리를 전하는 거지만 홍 감독님의 대본은 계속 쌓여가는 인물의 상태를 통해 관찰된 결과를 가져가셨다가 되돌려 주시는 거에요. 그래서 이에 대한 토론을 충분히 하고 내가 불편한 점을 얘기하면 그걸 반영해서 짧든 길든 리허설도 충분히 하고 상황이 완성됐을 때 촬영에 들어가죠. 만약 그게 오늘 완성될 수 없다면 내일 다시 찍어도 되는 거고요. 물론 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웃음)
구경남이 양치질을 할 때 ‘이번에는 꼭 2백만이 볼 영화를 만들고 말 거다’라는 독백이 내레이션 됩니다. 구경남의 속내가 드러나는 장면이라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이기도 하죠. 사실 김태우 씨는 상업영화부터 독립영화까지 영역을 구분하지 않고 폭넓게 활동하는 배우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의 흥행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배우처럼 인식되는 느낌도 있고요. 그런데 혹시 구경남처럼 ‘이번엔 2백만이 볼 영화에 출연하고 말 거다’라는 생각이 들 때는 없었나요? (웃음)
저는요, 없었던 게 아니라 그런 영화에 출연을 해왔어요. 지금 말씀하신 흥행영화라는 건 장르영화에 해당될 텐데, <키친>도 그렇고, <기담>도 그렇고, <리턴>도 그렇고, 심지어 <얼굴 없는 미녀>도 그렇고, 다 흥행성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고 출연을 결정했어요. 다만 그런 영화들이 이제 흥행되지 않다 보니까 자꾸 홍 감독님 영화나, <사과>라던지, <내 청춘에게 고함>이나, <버스 정류장>같은 영화가 부각되고 저는 약간 예술적인, 마치 영화제 가는 영화를 하는 사람으로 인식됐지만 저는 지금까지 계속 흥행할만한 장르영화를 쭉 골라오면서 하고 있거든요. 물론 제가 출연한 전체적인 작품 가운데 후자 쪽의 편수가 좀 많이 눈에 띄고 그래서 그렇게 보이는 것도 있지만 꼭 의도적인 행보는 아니었거든요. 다만 생각했던 것보다 관객이 덜 들다 보니까 그런 이미지로 보이는 것 같아요.
몇 년 사이에 출연했던 <기담>이나 <리턴>과 같은 영화는 확실히 흥행이 요구되는 영화였던 거 같습니다. 어떤 시스템의 문제로 인해 흥행이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고요. 그럴 땐 흥행 자체에 대해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흔히 얘기하는 작가주의 영화나 예술 영화도 관객이 많이 든다면 좋겠지만 어쨌든 그런 영화 같은 경우엔 제가 관객이 들 거다라고 생각해서 결정하는 건 아니니까요. 이번엔 장르영화니까 좀 많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관객이 드는 게 제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기도 하죠. 다만 그걸 기준으로 고르는 건 아니에요. 제 기준으론 좋은 시나리오라서 택한 거니까요. 질문하신 대로 그런 욕망이 있다고 말하기 전에 이미 전 그렇게 해왔지만 그게 잘 안된 거에요. 말 그대로 그런 욕망은 있고요. 다만 그건 욕망으로 되는 부분이 아니니까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 2백만이 넘겠죠. (웃음)
간지러운 표현일지 모르지만 상당히 해맑게 웃는 편입니다.
영혼이 맑아서. (웃음)
영화에서도 그렇게 웃다가 돌연 정색하는 표정이 재미있더군요. 마치 인물의 양면성이 표정으로 드러나는 느낌이랄까요. 속으로 부글부글 끓는 것 같은데 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경우가 많았던 거 같습니다. 안팎의 온도차가 다르다고 할까요. 그래서 때때로 소심하거나 나약해 보이기도 하지만 캐릭터의 욕망을 숨기기 좋은 표정을 대변한 적도 있었죠. <얼굴없는 미녀>에서도 자신의 욕망을 안으로 숨긴 채 은밀하게 진전시키려는 인물이었고, 사실 유일하게 악역이라 할만한 <리턴>에서도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캐릭터였으니까요. 어쩌면 감독들이 김태우라는 배우에게 있어서 끌어내고자 하는 모습이 종종 그런 이중성에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음, 글쎄요. 제가 그런 것 까지는 모르겠지만 두 가지가 있는 거 같아요. 결국 이미지가 배우의 캐릭터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지금처럼 포괄적으로 그 배우가 갖고 있는 이미지를 통해 감독님들이 캐스팅을 결정할 순 있겠죠. 다른 이미지를 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쓰실 수도 있고요. 하지만 반대로 제 부족일 수도 있어요. 제가 그걸 좀 다른 시각이나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저란 사람의 어떤 한계 때문에 그런 식으로밖에 표현이 안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저는 그 두 가지가 함께 작용했을 거라 생각해요.
사실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해왔지만 일관적인 이미지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아까 말했듯이 약간 자신의 속내를 좀처럼 내밀지 못하는 소심한 이미지 같은 경우도 그렇고요. 마치 그게 김태우 씨의 성격과 연관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죠.
저는 매번 다른 역할, 다른 배역, 다른 나이, 다른 직업의 인물을 만들어 내는 건데, 그게 또 제 안에서 나오니까 비슷한 부분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 성격이 꼭 <버스, 정류장>이나 <사과>에서 나오는 인물 같진 않거든요. 구경남도 그렇고. 사실 저한테는 아까 말씀 드린 그런 영화에서의 이미지가 없거든요. 좀 과장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건 사실 제 반대적인 부분인 거죠. 제가 만들어낸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면 좋지만 매번 비슷비슷하다는 건 반대로 제게 뭔가 잘못된 문제가 있다는 것이기도 하겠죠.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사실 캐릭터가 항상 동일해 보이는 건 아니에요. 파격적인 변화를 연기하는 배우도 있지만 디테일한 차이를 통해 꾸준한 성격을 드러내는 배우의 연기가 잘못됐다고 말할 순 없죠. 그리고 그게 캐릭터와 어긋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결론적으로 그게 장점인지, 단점인지에 대해선 별로 신경을 안 쓰는 편이에요. 왜냐하면 제 생각엔 영화마다 그 캐릭터처럼 보이는지가 중요하니까요. ‘왜 구경남을 저렇게 연기하지’라고 하시면 정확히 문제가 되고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되지만 그 인물로 느낀다면 신경 쓸 필요가 없겠죠. 다만 ‘구경남이 김태우랑 좀 비슷하지 않아?’ 이러는 건 제 능력 밖의 일이니까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로 다음에 깡패를 한번 연기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제가 만약 다음에 코미디를 몇 편하면 예전엔 먹물이미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너무 코믹하고 가벼운 쪽으로 가는 게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그게 누군가를 의식해서 코미디를 한 건 아닐 거란 말이에요. 어느 날 자연스럽게 악역을 한다 해도 그걸 잘 해내는 게 중요한 거지, 어떤 이미지를 의식할 필요는 없는 거 같아요. 캐릭터에 충실한 게 장기적인 면에서 중요한 거죠. 평생 연기한다고 생각하면 당장 조급할 이유도 없고요. 이 작품에서 이 인물이 되는 게 저한테 중요할 뿐이지, 어떤 이미지에 국한된다거나 변화가 없다라는 건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거 같아요. 만약 저에게 변화를 기대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제가 일부로 피하는 게 아니니까 다음에 기회가 왔을 때 잘 하겠다고 말씀 드리고 싶고, 제 나름대로는 항상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거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말씀 드리고 싶어요.
자신의 연기에 대해서 많이 곱씹으며 후회하는 편인가요? 아니면 쉽게 털어내는 편인가요?
후회를 잘 안 하는 편이긴 해요. 예전에 어떤 선배가 배역에서 빨리 빠져 나오는 것도 배우로서 굉장히 큰 덕목중의 하나이고 장점이다 그러더라고요. 저는 촬영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첫 촬영 들어가기 전에 고민을 좀 하느라 그 전까지 너무 힘들어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리고 촬영하면서부터는 편해지고 촬영 끝나면 굉장히 빨리 잊는 편이죠. 대체적으로 그런 거 같아요. 그런데 그런 건 사실 후천적으로 노력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수도 있죠. 빨리 잊어야지 한다고 빨리 잊는 건 아니거든요.
“정말 몰라서 들어가고 그게 발견이어야 합니다.” 이런 구경남의 대사처럼 이번 영화는 배우에겐 몰라서 들어가는 과정이었고 그게 발견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너무나 일상적이라 오히려 생소한 발견을 주는 경우도 많죠. 그 발견은 일차적으로 홍상수 감독의 몫이자 관객의 몫이 됩니다. 배우에게도 어떤 발견의 몫이 있을까요?
역시나 다른 배우들은 모르겠지만, 저는 없어요. 만약 시나리오가 있는 작품을 했다면 지금 같은 질문에서 답변할 수 있는 말이 많았을 거에요. 제가 이런 캐릭터를 했지만 막상 찍으면서 이런 발견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이번엔 더욱이나 트리트먼트도 없던 작품이라 오늘 찍을 내용도 모르고 하면서 한편의 영화를 쌓은 셈이거든요. 그래서 할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로 저는 이번 작품에서 캐릭터를 생각해본 적도 없었어요. 돌아본 적도 없고요.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가능할까요?
맞는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저희가 이렇게 마주보고 앉아 있는데, (옆자릴 가리키면서) 어쩌면 이렇게 앉아있었을지, (빨대를 잡으면서) 제가 콜라를 이렇게 마실지, (손을 입에 가져다 대는 행동을 따라 하면서) 지금 기자님이 이렇게 하실지, 순간순간 모르면서 쌓여가는 거잖아요. 그리고 어쨌든 한 시간 정도 인터뷰가 지나서 그걸 영화처럼 보면 저희가 어떤 인물이 돼있는 거 아닐까요. 저한테 기자님이 어떤 인물이 되고, 결국 지금 상황은 영화가 돼있는 거죠. 이번엔 그런 마음이었던 거 같아요. 지금처럼 하는 건데 그게 두 시간 전에 알게 됐던 거죠. 그걸 통해서 연기하고, 그게 하루씩 쌓여서 영화가 되고. 그게 두려울 거 같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가 사는 게 그렇잖아요. (사진 기자를 가리키면서) 지금 웃으면서 사진을 찍는 이런 상황들은 그냥 날것으로 오는 것처럼, 이렇게 만나고 쌓여서 어떤 인물이 저한테 그 인물로 구축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하루마다 주어진 상태에서 그날의 구경남을 쌓고 그 다음날엔 그 전날에 쌓였던 구경남과 합쳐져서 또 하루가 연장되고, 그런 식으로 구축된 인물이었거든요. 결국 발견이라는 건 우리가 어떤 인물을 지난 다음에 오는 건데 이번엔 그럴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거죠. 감독님 안에서는 어떤 인물이 그런 식으로 발견돼서 새롭게 쌓아주실 수 있는 거고, 관객은 그 새롭게 쌓여가는 형태를 쭉 볼 수 있지만 막상 그 인물을 연기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 상황에만 충실하게 되거든요. 내 스스로에게 쌓이는 발견의 개념이 아닌 거죠.
어떤 전체적인 캐릭터를 예상하고 들어간 뒤의 변수를 발견하고 수집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 상황 자체에서 매번 존재하고 빠져 나오는 일회적 작업의 연속이었기 때문일까요?
지금 저와 이렇게 앉아있는 것도 인생에 있어서 어느 한 부분을 쌓고 계시는 거겠죠. 그런데 사실 항상 생각하는 대로 뭔가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어쩌면 누군가와 싸울 수도 있고, 어떤 분과 웃으면서 술을 마실 수도 있고, 그렇게 그냥 살면서 쌓이는 거잖아요. 인생에 있어서 발견이란 건 어느 일정한 시간을 돌았을 때 본인에게 구축된 것을 알게 되는 거죠. 하지만 이번에 구경남은 그런 식의 접근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냥 하루하루마다 구경남으로 쌓여가는 것에 불과했죠. 그래서 제가 지금 돌아봤을 때 구경남이 어떤 인물인 거 같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게 저한테 중요한 의미가 아닌 거에요. 관객들은 구경남을 보면서 어떤 걸 생각하고 그 안에서 뭔가를 발견하겠지만 저는 그냥 감독님께서 생각하시는 걸 표현하는데 중점을 뒀으니까요.
어떤 전체를 염두에 두거나 그 이후를 생각하기 보단 그 현재에 집중하는 과정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그 전체적인 과정을 연기한 본인에겐 그 서사가 어떤 발견으로 점증되는 과정이 아니었다는 말씀이군요.
예. 그러니까 ‘구경남은 어떤 인물이지?’라고 돌아본다거나, 혹은 영화를 보고 나서 ‘아, 구경남은 저런 인물이었구나.’라는 생각이 저에겐 별로 의미가 될 수 없다는 말이죠. 제가 어떤 시나리오를 받고 싸웠으면 나중에 혼자 이번엔 이런 걸 표현하려고 했지만 하다 보니까 이런 새로운 게 나왔고, 이런 건 좀 덜어야 했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제가 모르는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요. 캐릭터나 영화 자체에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 캐릭터를 돌아본다거나 어떤 인물인지 신경 쓰는데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트리트먼트도 없었고, 이야기의 결말도 어찌될지 모른다면 일단 궁금증은 상당했겠습니다. 오늘 찍을 내용도 전혀 몰랐고, 결말은 커녕 과정도 몰랐으니까요. (웃음) 이건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아니라 ‘알지도 못하면서’였어요. (웃음) 그래서 너무 궁금했고 대본을 받으면 기쁘더라고요. 덕분에 매일 아침 대본을 받았을 때 연재소설 보는 것처럼 낄낄대고 그랬죠. 사실 감독님만 다 알고 가는 이야기니까요. 다만 구체적인 상황들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거죠.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알고 캐스팅을 미리 하셨겠어요.
줄기는 이미 머릿속에 존재하는 가운데 디테일한 가지와 잎을 붙여나가는 셈이군요.
예. 제가 볼 땐 이미 당신의 머릿속엔 다 있는 거죠. 대충 어떻게 만나고, 어떤 일이긴 한데 그에 대한 정확한 대사와 관계를 그 날 아침의 느낌으로 정하시는 거죠.
홍상수 감독과 함께 하는 세 번째 영화였는데 지난 두 번째와 다르게 느껴지는 점은 없었습니까?
가장 큰 건 같은 감독님의 영화지만 내용도 모르고 했다는 게 틀린 점이죠. 아무래도 기존에 했던 영화들 가운데 <생활의 발견>정도가 두 장소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비슷한 측면이 있지만 남자 둘에 여자 하나 정도의 제한된 인물과 제한된 장소의 기본 구조와 달리 이번엔 다른 부분이 많죠. 장소도 와일드하게 펼쳐져 있지만 그 안에서도 다른 내용들이 많잖아요. 영화제 쪽 내용이나 후배들 내용이나, 그 안에서 펼쳐지는 사건의 양상도 다르고. 그런 이유로 굉장히 많은 배우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는 것도 지금까지와 많이 다른 점이었죠. 예전에도 보통 스태프가 많지 않았지만 총 12명의 스태프와 함께 하기도 했고요. 고사 때는 배우 매니저가 스태프보다도 한 3배는 많았던 거 같아요. 스태프라고 해 봤자 감독님 포함 13명이었으니까. (웃음)
제천과 제주도에서 촬영이 이뤄졌으니 마치 단란하게 MT가는 기분이었겠습니다. (웃음)
매 저녁마다 너무 이상한 거에요. 밥을 먹는데 (둘러보면서) “우리 팀 이게 다네?” 이러고. (웃음) 게다가 배우들이 내려오면 손님 접대하듯이 인사하고, 자기 분량 다 찍고 가기 전에 수고했다고 쫑파티하고, 다음 팀 오면 또 그렇게 하고, 그것도 사실 즐겁고 재미있었죠.
마치 안주인 노릇을 한 셈이네요. (웃음)
예. (웃음) 완전히 안주인처럼 ‘오셨어요, 가세요, 수고했어요, 아, 또 오셨어요’. (웃음) 예를 들면 (엄)지원이 같은 경우는 순서대로 찍다보니 올라갔다 다시 내려오곤 했거든요. 그러면, ‘또 왔니, 한번 더 해보자’ 이렇게. (웃음)
예전에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로 칸 영화제에 가신 적이 있죠. 이번에도 칸 영화제에 가실 예정이고요.
지난 번엔 경쟁작으로 갔지만, 이번엔 감독주간으로 간다는 점이 조금 다르긴 하죠.
마치 구경남처럼 여행하는 기분으로 다녀와도 좋겠습니다.
구경남처럼 그러면 삶이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그렇게 좀 스펙터클 했으면 좋겠어요. 너무 심심해. (웃음) 가면 뭐 뻔하죠. 스크리닝하고, 기자시사하고, 감독님이랑 같이 술 마시다 이제 돌아가야 되겠다, 그렇게 돌아오겠죠.
홍상수 감독님 영화를 통해 감독 역할만 두 번 했습니다. 한번은 감독 친구였고요. 혹시 감독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적은 없나요?
에이, 한마디로만 대답드릴께요. 감독 아무나 하나요. (웃음)
“왜 이런 영화를 만드세요? 왜 사람들이 이해도 못하는 영화를 계속 만드시려는 거죠?”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한 장면. 영화학도를 자처하는 학생은 감독인 구경남(김태우)에게 묻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이에 대해서 설명해보자면 마치 이 대사는 그냥 구경남을 위해 마련된 대사만은 아닌 것만 같다. 어쩌면 이 질문은 홍상수 감독 스스로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자승자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음에 나올 대답이 중요하다.
“이해가 안 가시면 안 가는 거죠. 제가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전 그냥 영화 만드는 거고, 그걸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좋은 거겠죠.”급격하게 높아진 언성이 격양된 분위기를 이룬다. 그 뒤로 구경남의 대답이 이어진다. “정말 몰라서 들어가야 하고 그 과정이 발견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수렴하는 겁니다. 체계적으로 미리 가지 않고, 매번 발견하는 겁니다.”누군가는 이 답변이 홍상수 감독의 입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단정할 순 없다. 그냥 관객은 그 상황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거나 나름대로의 입장과 시선을 견지한 채 해석을 시도할 뿐이다. 혹은 그냥 흘려 보내거나. 어쨌든 그 상황의 진심에 대해선 어느 누구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그냥 나름대로의 태도대로 상황을 분석하고 체감할 뿐이다.
2008년 여름, 충청북도 제천에서 뜬금없이 시작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홍상수 감독의 이전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대구와 반복의 형태를 고수하는 영화다. 제천과 제주도라는 공간의 이동을 통해 전후 구조로 나뉘듯 명확히 나열되는 이야기는 때때로 뜬금없고 당황스럽지만 지극히 일상적이라 익숙하면서도 생소하게 인지된다. 기존의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그렇듯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카메라 앵글은 무심하게 던져놓은 시선을 중심인물에게 돌려놓고, 그렇게 상황을 주시하던 카메라는 결정적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인물을 향한 줌업을 반복한다. 그 시야 속에 놓인 인물들은 서로 뒤엉켜 술판을 벌이다 특별한 사연을 만들어내거나 어떤 비밀을 잉태하며 그 과정 속에서 서로의 감춰진 의중이 탐색되기도 한다. 결국 누군가는 흥분해 길길이 날뛰고 그 반대편에 놓인 누군가는 움츠리다 이내 그 자리에서 달아나듯 떠난다.
그 다단한 관계 속에서 유일하게 공존하는 건 구경남이다. 그는 제천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내려간 제천과 제주영상위원회의 초청으로 특강을 내려간 제주도의 대칭을 이루는 한 점이다. 그는 영화 속의 모든 현장에 위치함으로서 상황에 개입하기도 하지만 수없이 모이고 흩어지는 인물들의 관계와 상황을 관찰하는 위치를 고수해 나간다. 두 시공간에서 등장하는 각기 다른 인물들은 다른 듯 닮은 풍경 속에서 변형된 닮음의 역할극을 펼쳐나간다. 바뀐 공간 속에서도 어떤 대사들은 동일하게 들려오고 이와 함께 펼쳐지는 상황은 변형된 형태 속에서도 구조적 평행과 대칭을 이룬다. 영화제 심사위원을 맡기 위해 내려간 제천과, 영화 특강을 위해 내려간 제주도는 목적만으로도 대구를 이루는 공간이 된다. 그 안에서 구경남의 영화를 둘러싼 성찬의 고백과 비판적 물음이 뒤바뀌고, 충동적으로 발생한 불미스런 관계가 은밀히 폭로되거나 조심스럽게 감지되며, 우연한 계기를 통해 조우한 절친과 은사를 통해 마주한 그들의 부인을 통해 예상치 못한 소동극을 한차례씩 건넌다.
시공간의 변화와 인물의 교체를 통해 전혀 다른 풍경과 표정들이 발견되지만 어떤 기시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그 공간을 채우는 인물들의 욕망과 허세가 동일하게 드러나는 까닭이다.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거나 잘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는 인물의 심리는 때때로 모호해서, 혹은 지나치게 명확해서 속물적이다. 가장 흥미로운 순간은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 자신과 타인의 이해차가 존재함을 발견했을 때 발생하는 인물의 표정이다. 자신의 영화로부터 ‘인간심리의 이해 기준을 얻었다’고 말하는 평론가의 고백으로 들뜨던 구경남이 ‘왜 사람들이 이해도 못하는 영화를 만드시는 거죠?’라고 당돌하게 묻는 학생의 질문에 달아오르듯 답변을 토해내는 순간, 인물의 표면과 내면의 온도차를 인식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구경남 이외의 다른 인물을 통해서도 발견된다. 스스로가 빛이 됐다고 말하는 유신(정유미)과 이를 두둔하는 부상용(공형진) 앞에서 빈정거리는 구경남에게 유신이 정색하고 부상용이 이런 태도를 뒤따를 때나 오랜만에 은사와 만난 구경남이 은사와 관련된 기억을 고백하던 중 그 기억에 대한 서로의 견해차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사소한 갈등에 직면할 때, 스스로가 충분히 알고 있다는 믿음에 대한 반발이나 이견에 대한 당혹스러움이 인물의 표정을 통해 드러난다.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믿음의 간격을 발견하거나 어떤 사실에 대한 이해차가 끼어들 때, 서로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아는 척한다고 생각되는 상대를 경멸하면서도 멋쩍은 표정으로 순간을 견딘다. 그 상황의 부조리는 때때로 개인의 스트레스로 발전하기도 하며 종종 상대와의 갈등을 발화시키는 계기로 작동된다. 게다가 이는 단지 영화 내부의 인물들에게 국한된 체험이 아니다. 이런 이해차는 영화와 그 외부에 놓인 관객 사이의 체험으로 확장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는 상황에 대한 불확실성이 담보된 결과들이 묘사되곤 한다. 유신과 부상용에게 파렴치한 인간으로 찍혀 달아나는 구경남의 모습에서 관객은 어떤 불미스런 원인을 예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예상은 영화적 상황이 어떤 원인을 통해 발생한 결과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잠정적으로 내려진 결론에 불과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양천수(문창길)의 불순한 동침을 간접적으로 인지한 관객들은 구경남과 고순(고현정)의 밀회를 발견한 조창우(하정우)가 그 사실을 양천수에게 폭로하는 상황 속에서 뻔한 결과를 예상한다면 의외의 대응을 목격해야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뜻밖의 상황 속에서 추출되지 않는 결과를 통해 관객의 오해를 도모하거나 관객의 입장에서 어떤 결과를 예상케 하다 이내 배반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어떤 상황의 단면을 통해 그 상황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결정하는 건 영화 속 캐릭터나 영화 밖 관객이나 매한가지다.
다채로운 인물들의 소동극 사이에서도 눈에 띄는 건 고순이다. 그녀는 제 욕망을 가장 충실히 드러내면서도 그 다양한 삶 속에서 가장 솔직한 내면을 드러내 보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방점도 그녀의 마지막 대사에 찍혀있다.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딱 아는 만큼만 안다고 해요.”스스로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타인에 대해서 잘 아는 듯 참견하고 주장하는 인물들의 난장판 속에서 고순은 유일하게 차분하고 담담하게 자신과 상대를 관통한다. 그리고 정곡을 찌르는 대사를 마친 인물이 화면에서 멀어져 갈 때, 카메라의 시선은 고개를 돌려 먼 바다를 차분히 응시하다 비로소 이야기를 멈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가운데 가장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유쾌한 작품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하나같이 이름값을 자랑하는 배우들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적 체험을 위해 헌신하는 광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놀랍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홍상수 감독은 때때로 자신을 겨냥하듯 자학적인 대사를 삽입하고 이를 밀쳐내듯 또 다른 반박을 맞은편에 세운다. 결과적으로 이런 태도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관객에겐 유쾌한 영화임에도 작가 스스로에겐 수없이 오가는 의심과 고민의 산물로 거듭난 작품임을 거듭 깨닫게 만든다.
홍상수 감독의 9번째 영화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낯익은 풍경을 새롭게 인식하는 그의 새로운 대구적 관찰을 통해서 더욱 여유로워진 시야와 한층 깊어진 관점을 인식하게 만든다. 새삼스럽게 홍상수 감독의 10번째 대구에 어떤 풍경이 놓여있을지 궁금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언제나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낯익은 풍경을 낯설게 전시하며 익숙하듯 새로운 관점을 펼쳐놓곤 했다. 그건 마치 매일 아침마다 정갈하게 당일 분량의 대본을 탈고한다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찍기가 그에게 있어서 ‘정말 몰라서 들어가야 하는 과정이자 그 과정의 발견으로 수렴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결국 홍상수 감독의 9번째 발견인 셈이다. 그리고 여전히 홍상수 감독은 10번째 발견으로 수렴해 나갈 것이다. 마치 꾸물꾸물 기어가는 애벌레처럼 느릿하지만 어디론가 나아가는 그 시선의 새로운 약진이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기대할 수 밖에 없는 건 바로 그런 소소하고 재미난 생활의 발견 덕분이다.
영화란 무엇인가. 홍상수 감독은, 혹은 그의 영화는 항상 그 고민을 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답다라는 말이 현실적이다라는 말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아니면 얼마나 결부되어 있는지, 그의 영화는 항상 그걸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사실 나는 생각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스크린은 가끔 (혹은 대부분) 현실을 향해 젖혀놓은 창처럼 보인다. 실제로 촬영 순간에 임박해서야 배우에게 대본이 주어진다는 그의 영화작업을 생각해보자면 영화라는 작업이 현실이라는 중력을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밀착해갈 수 있다는 믿음의 소산물 같다는 생각을 품게 만든다.-물론 이것이 숭고하다라는 식의 작위적 수식어로 의미 부여되지 않길 바란다.- 홍상수 감독의 8번째 작품 <밤과 낮>을 보고나니 마치 그의 영화가 너무나 현실 같아서 낯설다는 느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동시에 그것이 영화라는 기교적 장막을 모두 다 걷어내고 나서야 온전한 감상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비취색을 띠는 창호지 재질(같아 보이는) 종이 위에 붓 펜으로 쓰인 듯한 궁서체 프롤로그가 무언(無言)으로 말하듯 <밤과 낮>은 대마초를 피웠다가 들켜 파리로 도피한 국선화가 김영남(김영호)의 34일 간의 수기(手記)다. 3인칭 관찰자 시점 혹은 전지적 작가 시점의 프롤로그가 지나가고 나면 파리 공항에 도착한 김영남의 모습이 등장하고 그로부터 그의 34일간의 고백담이 펼쳐진다. 서사의 영역을 구분하는 날짜가 프롤로그와 마찬가지 형식으로 잠깐 동안 화면을 정적으로 메우고 나면 그의 일기체 내레이션 혹은 그의 일상적 행위들이 그 간격 사이를 채운다. 간격에는 일정한 룰이 없으며 그 간격의 단위도 일정치 않다. 그건 때로 하루가 되기도 하고 이틀이 되기도 한다. 김영남의 독백은 일기체 형식으로 이뤄지지만 그건 왠지 기록된 것이 아닌 것 같다. 마치 기억의 단편을 끄집어 내듯 자신의 기억 속에 담긴 선명한 것들을 차례대로 끄집어 나열한 것에 불과해 보인다. 그래서 그것은 자신이 추억하고 싶어하거나 잊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선명하고 구체적이지만 자신의 무의식 중에 기억났거나 기억나지 않은 것들은 어떤 내레이션을 동반하지도 않거나 그냥 가볍게 뛰어넘어버린다.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밤과 낮>이 엄연히 김영호의 기억에서 끌어들인 수기이며 그의 시점으로 이뤄진 단상들의 조합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홍상수 감독의 전작들은 대부분 그의 시점을 통해 그녀들을 대하거나 감상하고 세상을 관조하거나 살아갔다. 하지만 이를 남성중심적인 태도라고 말하기 석연찮다. 그들은 하나같이 그녀들 앞에서 속물이었을 뿐이니까. 남성을 위한 합리화는 없었다.-물론 그들을 향한 질시가 필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밤과 낮>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밤과 낮>의 시점은 전작들과 미묘하게 다르다. 그건 <밤과 낮>의 일기체 형식의 서사와 관련이 있다. 일기란 지나간 일을 기록하는 행위이며 그 형식을 따르는 <밤과 낮> 역시 지나가버린 과거와 대면하는 회상이란 의미다. 전작들이 현재형의 이야기를 했던 것과 달리 <밤과 낮>은 과거형의 이야기를 하며 이는 전작들과 <밤과 낮>의 형식이 달라진, 혹은 달라져야 했을 근간적 연유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일기체 형식의 서사는 상당히 어울리는 방식으로 느껴진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일상에 대한 퇴고처럼 삶을 대구로 반복하곤 한다. 그렇게 반복되는 삶은 일상의 흐름의 지속 그 자체를 드러낸다. 그 반복적인 일상이 대구로 느껴지는 건 그 일상을 부유하는 인간의 심리가 변모되기 때문이다. 변화는 삶을 채우는 인간의 내부에서 비롯된다. <밤과 낮>은 그 일정한 흐름 안에 담긴 인간의 미묘한 대구적 삶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밤과 낮>의 대구를 이루는 건 시간과 공간의 진리적 변화일 뿐, 행위가 아니다. 이야기 흐름의 양면성을 이루던 주체적 행위는 서사 위를 흐르는 시간의 범주 위에서 흘러가고 그 주변의 영역이 대구를 이룬다. 파리와 서울, 그리고 꿈과 현실. 파리로 도피한 영남의 좌절감이 유정(박은혜)을 만나 기묘한 설렘으로 변모하기까지, 그리고 유정과 사랑에 빠진 뒤 갑작스럽게 서울로 돌아와 성인(황수정)과 재회하기까지, 균등하지 않은 서사의 흐름을 따르는 <밤과 낮>은 일상을 더듬어가는 편린의 기억을 통해 영화의 재현성을 갖춤과 동시에 현실을 반추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현실소통의 언어로 재생된다.
파리라는 지정학은 이질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한국적 소통을 부각시키는 보색적 환경성을 띠고 있다. 이는 시시콜콜한 한국적 풍경을 가득 내포하고 있음에도 타향의 감수성-구체적으로 프랑스-을 연상하게 만들던 전작들을 떠올렸을 때 역설적이다. 이는 홍상수 감독이 에릭 로메르나 장 으스타슈와 같은 누벨바그 양식을 따르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현실을 낯설게 만드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들의 행위는 비현실적이라기 보다 비(현대상업)영화적이다.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 대사나 명확하지 않은 동선은 결벽한 연출력과 거리를 두며 영화적 현실에서 그들은 타자화되어 공간의 기운을 변질시킨다.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이질감의 기운은 공간을 생소하게 만든다. –이는 현실의 모순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브레히트적인 것과 맥락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밤과 낮>은 (본래 홍상수 감독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단순히 국적의 관계에 상정되지 않고 지정학적 중력에서 이탈하던 홍상수식 영화들의 근본적 까닭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밤과 낮>은 홍상수 감독의 변처럼 밤과 낮의 서사가 다른 지구 반대편을 가로지르는 통화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이야기다. 대구적인 시간의 영역 속에서도 공유되는 동 시간대의 삶. 결국 보편적인 삶은 인간의 중력들이 끌어당긴 관계로 이뤄지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기억으로 채워진 서사가 된다. 그 보편적인 삶 속에는 기억나는 서사와 기억나지 않는 서사가 부유한다. 결국 인간의 삶은 특수한 기억으로 의미가 부여되는 보편적인 서사의 일부에 불과하다.
<밤과 낮>은 삶이라는 특이한 서사 위를 흐르는 고유의 시간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한계영역이다. 그 삶 안에는 현실이 있고 동시에 꿈이 있다. 꿈과 현실은 각각 우리의 밤과 낮을 지배하는 또 다른 삶의 영역이며 그 영역 위에 존재하는 우리는 꿈을 꾸거나 현실을 살아가며 그렇게 밤과 낮을 지나 자신만의 기억으로 채워진 특별한 삶을 꾸려나간다. 마치 하늘을 채우는 구름이 매일같이 그 너비를 달리하듯 인간의 삶은 보편적인 시간의 영역 속에서 자신만의 삶을 채워나갈 따름이다. 미묘한 기법의 변화도 눈에 띠지만 <밤과 낮>은 통찰과 직관을 아우르는 화폭의 순수한 역량을 먼저 느끼게 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바로 영화라는 고민에 대한 홍상수 감독의 진심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성의 음부를 ‘세상의 기원’이라 했던 쿠르베처럼 홍상수 감독은 현실의 진솔한 풍경을 영화의 기원이라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