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만족하지 못할수록 과거를 그리워하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했다. 21세기의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보단 과거에 대한 낭만을 논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다. 그만큼 현실이 팍팍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90년대엔 새로운 시대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미래의 청사진에 대해서 그리곤 했다. 그만큼 풍요로운 꿈을 꾸던 시대였던 것이다. 1997년 IMF사태 발발 이후로도 그나마 뉴 밀레니엄이라는 허수 같은 단어에 열광했다. 하지만 2000년대를 넘어오며 점차 미래에 대한 꿈은 저물기 시작했고 팍팍해지는 현실이 가속화되면서 이젠 그나마 90년대에 경험했던 풍요로운 시대에 대한 낭만을 향해 틈나는 대로 응답하라 외친다. 팍팍한 현실을 견디기 위해 과거의 유산을 마약처럼 삼킨다. 90년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마냥 즐길 수 없는 건 그래서다. 곰팡이 핀 낭만에 열광한 뒤에 씹히는 현실이란 여전히 퍼석퍼석하다. 나아갈 길이 없다. 갈 길은 먼데 갈 곳이 어딘지 모르겠으니, 그저 그리움만 쌓이네.
이용주 감독의 두 번째, 사실은 진짜 첫 번째 영화 <건축학개론>이 완공되기까지, 그 긴 기다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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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이 다시 찾아온다는 건 일종의 판타지다.
판타지지.
첫사랑은 언제였나?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아직도 연락한다.
진짜?
학교 다닐 때 모임에서 만난 친구라서 아직도 연말에 망년회할 때 본다.
당신이 좋아했다는 걸 아나?
우린 사귀었으니까.
아~!
난 승민이 같은 경험은 없다. 결국은 사귄다, (웃음)
실제로 건축 일을 했다던데.
대학 졸업 후 4년 정도 설계사무소를 다녔다. <건축학개론>은 오래 전부터 준비한 작품이다. 기획 당시만 해도 영화인의 정체성보다 건축인의 정체성이 상대적으로 컸다. 사실 건축일 할 때 주택 한 채를 설계해보고 싶었다. 결국 못했지. 주택 프로젝트가 흔치도 않았다.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의 대사처럼 그런 의뢰를 받을 위치도 아니었고.
주택?
여러 건물을 설계했지만 주택이 가장 쉬운 듯 어렵다. 설계사무소도 안 하려고 한다. 공력은 오피스 짓는 것과 비슷한데 돈이 안되니까. 주택은 사실 모든 설계사들의 꿈이다.
‘구성원을 이해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짓고자 하는 건축주가 건축가에게 의뢰하면 건축가가 그 사람의 취향에 맞춰주는 게 건축이다. 그러니 상대방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오피스나 관공서 같은 건물은 여러 사람이 사용하니까 개인의 취향이 반영되면 오히려 반칙이다. 주택에는 개인의 취향만 존재한다. 그러니 그 사람을 정말 잘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서 집주인이 문 열고 들어가자마자 욕실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면 흔하지 않은 방식이라 해도 그렇게 해야 된다. 그에 따른 모델을 제시하는 게 순서다.
<건축학개론> 시나리오는 언제부터 썼나?
2003도였다.
꽤 오래 걸렸다.
너무 장대했다. (웃음) 한 세 번 엎어졌나. 첫 제작사에서는 캐스팅이 안됐다. 다음에는 캐스팅이 됐지만 제작이 안됐고, 또 다른 곳에서도 비슷했고. 사실 <불신지옥> 이후에도 미련이 남아서 시작했다가 한번 더. (웃음) <건축학개론>과 30대를 보냈다. 애초에 미련을 버렸으면 진작 입봉했을 거라 생각도 했다. 주변에서도 많이 말렸다. 괜히 시간 날리지 말라고. 결국 해냈다고 표현하는 건 이상하고, 다시는 이렇게 오래 걸리는 작업은 하지 않겠다는 교훈은 얻었다. 개인적인 집착이 빚어낸 비극인데, 다행히도 영화를 찍어서 마무리됐다. 10년 걸려서 할 일은 아니었다. 순진했으니까 할 수 있었던 거다.
<건축학개론> 시나리오에 흥미를 지닌 사람이 많지 않았나.
많았다. 하지만 엄한 제작자가 흥미를 가지면 시간을 투자해야 하니까 나도 고생한다. 제작 능력도 없으면서 시나리오 좋다고 덤벼드는 사람 많거든. 처음에는 시나리오 좋다 하면 감격했다. (웃음) 그 생활을 3~4년 하니까 순수해질 수가 있나. 누군가 세팅을 해야 가능하다는 걸 그때 깨달았지.
어쨌든 찍었다.
명필름 심재명 대표님께서 우연히 시나리오 보시고 하자 하셨다. 만약 심대표님이 아니었으면 안 했다. 처음에는 시나리오 좋다 하면 감격하고 그랬다. 하지만 제작 능력도 없으면서 시나리오 좋다고 덤벼드는 사람 많거든. 여러 제작사를 전전하면서 투자도 안되고, 캐스팅도 안되고, 그런 꼴을 한두 번 봤어야지. 게다가 <불신지옥>으로 입봉했지만 흥행에서 망한 감독이라 그 이후에도 힘들었다.
<불신지옥>에 대한 평가는 좋았는데.
어리둥절하더라. 그때는 입봉 자체가 목표였다. 영화 감독 되려고 이 판 들어와서 10년을 보냈는데 영화 한편 못 찍고 주저앉느니, 은퇴하더라도 영화 한편은 찍어야지 싶더라. 약간 변질된 느낌이지만 사실 영화판에 그런 케이스가 많다. 멜로는 A급 배우가 붙여줘야 비로소 투자가 되는데, A급 배우는 입봉 감독과 하지 않으려 하고, 캐스팅 트라우마가 생길 지경이었다. 그래서 캐스팅 부담이 덜한 장르로 접근했다.
공포 영화가 감독들의 입봉 수단이란 말도 있지.
옛날에는 그랬지만 요즘은 공포가 워낙 안되니까. 나 역시 쉽게 입봉했다 말할 수 없고. 아는 후배가 한다 그러면 말릴 거다.
장르물에 도전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다른 멜로 영화 각색에 참여한 적도 있었는데 제대로 써본 건 <건축학개론> 하나였다. 작가나 감독이란 타이틀을 달고 멜로 외에 다른 걸 쓸 수 있을지 두렵더라. 그래도 입봉하려면 뭔가 쓰긴 써야 했고, 다른 걸 해보고 싶기도 했다. 멜로는 감정극이니 상황극을 해볼까 생각하면서 시작했다. 두렵기도 했지만 쓰면서도 재미있었고,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불신지옥>이 짓기 위해 지은 집이라면 <건축학개론>은 짓고 싶은 집인 셈이다. 초고와 영화 사이의 차이가 궁금하다.
현재 부분이 많이 달라졌다. 과거는 비슷하다. 10년간 각색하면서 현재를 다루는 게 힘들었다. 시작할 때가 서른 넷이었고, 지금이 마흔 넷이니까, 나이 먹으면서 생각이 많이 달라지더라.
여자 때문에 울어본 적 있나?
물론. 얘가 사귀자는데 왜 싫다는 거지? 속상해서 많이 울었다. (웃음)
연애는 얼마나 했나?
많이 했다. <건축학개론>은 일종의 반성문이다. 대학 시절 소개팅하고 다섯, 여섯 번 봐도 안 맞으면 헤어진다. 그 헤어지는 형식에 대한 비겁함이랄까. 예를 들어서 여자가 연락을 기다리는데, 연락 안 해주면 그대로 페이드 아웃. 굉장히 비겁한 거지. 어릴 때는 더더욱 그렇고. 그에 대한 반성?
90년대 학번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영화였다. 90년대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가득하다.
내가 90학번이다. 사실 영화의 배경인 96년도에는 취업해서 직장 생활하고 있었다. 대학 입학할 때 주변에 컴퓨터 있는 친구도 없었고, 삐삐 같은 것도 없었다. 대학교 2학년 즈음 노래방 생기고, 클럽 생기고 그랬다. 급격하게 디지털화되면서 IT라는 단어도 처음 생기고, 인터넷은 좀 나중인가. 중고등학교 시절보다 뭔가 빠르게 변했다. 90년대를 특별하게 생각한다기 보단 그 시절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많다. 그 시대를 관통한 한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접근한 셈이다.
촌스럽지만 반갑더라.
5년 전만 봐도 촌스러운데 10년이면 엄청나지. 10년 동안 <건축학개론> 준비하면서 어떤 습관이 생겼다. 예를 들어서 지금 드림콘서트 보면 되게 촌스럽다. 최근에 98년에 데뷔한 핑클 멤버들 메이크업이나 헤어스타일 본적 있나? (웃음) 시간이 그렇다. 그래서 정겹기도 하고.
처음 컴퓨터를 가진 건 언제인가?
94년도? 입대하기 전에 교양수업을 듣는데 교수님이 리포트를 워드로 제출하라는 거다. 손으로 쓰면 안 된다나? 학교 앞에 손으로 쓴 리포트를 타자 쳐주고 출력해주는 인쇄소 비슷한 게 있어서 돈 주고 맡겼다. 짜증났지. “이런 걸 왜 해?” 막 이러면서. 그런데 군대 다녀오니까 죄다 컴퓨터로 하더라.
다른 건 몰라도 삐삐는 정말 유물 같더라.
그런 첨단기기가 시간의 척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서 예전에 내 친구가 시티폰 쓸 때는 웃기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웃기잖아. 나는 사실 삐삐를 안 좋아했다. 카페에서 ‘호출하신 분!’ 부르고 그러면 되게 이상해 보였다.
옛날 물건들 가진 거 있나?
알바해서 처음 산 CDP가 아직 있다. 그런 거 모아놓는 편이다. 시절에 대한 추억이기도 하고, 버리긴 아깝다. 지금도 작동되고.
손 탔던 물건 못 버리는 편인가?
그런 건 아닌데 부피만 크지 않으면 기념이 될만한 물건은 두고 본다. 대학 다닐 때 갖고 다니던 학생수첩도 아직 갖고 있다. 그 당시 썼던 전화번호부 보면 내가 예전에 친하게 지낸 사람들도 떠오르고. 자주 보진 않지만 그 정도는 남겨뒀다. 큰 건 너무 짐이고.
영화 준비하면서 자주 꺼내봤겠다.
개봉하고 영화 내리면 정리 좀 할거다. 너무 오랫동안 그 짓을 했더니 지겹다. (웃음) ‘기억의 습작’도 못 듣겠다.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은 원래 좋아하던 곡인가,
좋아했지. 시나리오 쓸 때부터 염두에 뒀던 곡은 아니다. 시나리오를 만지면서 곡도 계속 바뀌다가 나중에 ‘기억의 습작’이 어울려 보였다. 노래도 좋고.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더라. 김동률 씨가 대학 과후배거든. 만나본 적이 없다. VIP시사회에 잠깐 왔다던데 인사도 못했다. 나나 그 친구나 건축도 안 하는데 학과 선후배가 무슨 소용이냐.
조정석의 재수생 연기가 압권이다. 주변에 재수했던 친구는 없었나?
내가 했다.
재수할 때 연애했었나?
난 모범생이었다. (웃음) 연애하면 대학 떨어진다고 믿고, 공부만 했다.
재수까지 해서 연대 건축공학과에 갔다. 원래부터 건축을 좋아했나?
고3때 연대 건축과 썼다가 떨어졌다. 그림 그리기 좋아하고, 성격도 약간 꼼꼼하고, <건축학개론>에서 승민은 엄마한테 이사 가자고 조르지 않나. 본인이 사는 공간에 불만이 있는 거다. 나도 그랬다. 오래된 중복도식 아파트였는데 내 방은 창이 밖으로 나지 않고 복도로 나있었다. 창에 대한 갈증이 많았지. 어릴 때 어머니한테 그런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시더라. 집을 그저 부가가치,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생각하신 거다. 그런 불만은 그저 사치였다. 나는 공간의 질이 대단히 중요했다. 그래서 건축과에 간 거 같다.
어디 살았나?
정릉 토박이인 승민처럼 38년을 동부 이촌동에서 지내면서 초중고 다 나왔다. 지금은 떠났지만 다시 돌아오고 싶다. 어릴 때 뛰어 놀던 공간들을 보면 기억이 살아난다. 사실 다른 동네에서 사는 게 여전히 이상하다. 어머니는 아직 거기 산다.
동네친구도 많았겠다.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동네에 사는 동창들이 많았지. 지금도 연락하고 지낸다. 얼마 전에도 이촌동에서 모였는데 난 바빠서 못 갔다. 한 친구 전화로 일곱 명이 돌아가면서 인사하더라. (웃음) 12년을 한 동네에서 복작복작하던 친구들이니 유대감도 깊다. 초중고등학교를 같이 졸업하고 같은 대학까지 간 친구도 있으니까. 맨날 만나서 농구하고, 레코드점 가서 LP사고, 서로 판 빌려 듣고, 옛날 기억이 선하다. 이촌동은 아파트가 많은 동네인데, 그 아파트들을 보면 여긴 누구네 집이란 식으로 인식된다. 여전히 거기 사는 친구도 많다.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았고, 건축 회사에서 근무했다는 점에서 승민과 닮았다. 개인적인 경험이 캐릭터에서 반영된 것 같다.
맞다. 게다가 승민이처럼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랑 둘이 살았고, 어머니께서 장사도 오래하셨다. 집에 대한 불만도 그렇고, 승민이에겐 내가 녹아있다.
“정릉이 어떤 왕의 능인지 알아?”라는 영화 속 대사 때문에 찔리더라.
대부분 모를 걸. 왕이 아니라 비의 능이지. 별 의미 없지만.
건축학개론 수업 장면에서 교수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건축의 시작은 자기 동네를 아는 데서 시작된다.” 수업 중 들었던 말인가?
내 생각이다.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처럼 지도에 루트를 그리는 건 대학 다닐 때 실제로 친구들과 스터디에서 했던 일이다. 교통지도를 분해해서 전도만한 지도로 조합했는데 나름 재미있다. 통학로나 친구집으로 가는 노선을 지도에 그려보면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길이 다시 보인다.
되는 면이 있다. 일종의 도면화 작업? 그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공간을 재발견하는 느낌이 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에게 고향은 어디일까. 처음 시나리오 구상할 때, 화두는 이거였다. 고향이라 하기에 서울은 너무 넓은 것 같다.
듣고 보니 그렇다.
승민은 태어나면서 한곳에 정착해 살았기 때문에 새로운 공간에서 독립을 꿈꾸는 친구라면 서연은 이 동네 저 동네 부유하다가 정착을 꿈꾸는 친구다. 둘의 만남은 성장통이다. 결국 그 이후에 승민의 공간이 넓어진다면 서연은 비로소 고향에 정착하는 셈이다.
정릉을 배경으로 선택한 이유는?
서울의 한 동네에 오래 살았다는 설정에 어느 동네가 어울릴까 생각하니 정릉이 그렇더라. 내가 원한 건 명확한 구획이 있는 동네였다. 강남은 구획이 안 된다. 길 하나 건너면 다른 동네가 되고, 서로 모르고 사는 사람도 많고. 예를 들어서 이촌동은 한쪽이 한강, 한쪽이 철길, 이런 식으로 완전히 구획화됐다. 마치 섬 같은 여의도처럼. 강북에는 그런 동네가 많다. 그래서 바운더리에 대한 인식도 강하다. 한 가지 더 좋았던 건 정릉에 버스 종점이 많다는 거다. 도시의 끝처럼 보였다. 영화에서 나오는 710번 버스는 정릉에서 개포동으로 이어지는, 서울 강남북을 가로지르는 황금노선이다. 예전에 비슷한 소재로 단편도 찍었었다.
어떤 내용인가?
내가 타는 버스의 반대 방향 종점은 내게 가장 먼 곳이다. 그 당시 동부 이촌동에 38번 버스가 있었는데 월계동은 우리 집 방향의 반대쪽 종점이었다. 30년을 넘게 한 동네에 살면서 38번 버스를 타고 항상 노선도를 봐왔는데 어느 순간 그 월계동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서른 넘어서 버스 타고 종점까지 혼자 가면서 단편을 찍었다.
공간에 대한 호기심이 남다르다.
사실 서울에서 가보지 못한 동네가 많지 않나? 서울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서울에 관심이 없다. 심지어 어떤 동네에 대해서 비하하기도 하고. 심지어 강북을 두려워하는 강남 사람도 있다. 그런 것들이 내 호기심을 당긴다. 시나리오에 그런 생각이 반영됐다. 과거가 거시적인 공간이라면, 현재는 미시적인 공간. 과거의 인물들은 도시를 돌아다니고 교외까지 나가며 경험을 확장하지만 현재의 인물들은 공간으로 파고 들듯 기억으로 들어간다. 느껴질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제주도 풍경이 너무 멋지더라. 어디인가?
서귀포 위미리. 명필름과 제작 합의한 다음에 제일 먼저 집 알아보러 내려갔다. 열 군데 부동산을 돌면서 찾았다. 영화에 어디가 적합할지 보러 다니고 결정한 다음에는 그에 맞춰서 시나리오 각색했다.
제주도에서 증축된 집은 실제로 지었나?
처음 나온 벽돌집은 진짜 집이고 증축되는 건 세트다. 설계하는데 두 달 반 걸렸다. 그런데 명필름에서 진짜로 공사 들어간다. 다만 영화 속 디자인과 똑같이 지을 수 없어서 세트 디자인을 했던 구준회 소장이 다시 설계하는 중이다. 거의 끝났다더라. 5월에 시작해서 가을에 완공 예정이다.
<살인의 추억> 연출부에서 경험을 쌓았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봉준호 감독과 같은 대학 출신이다. 1년 차이 학번이던데, 원래 아는 사이였나?
전혀 몰랐다.
연대 영화 동아리가 유명하다.
한번 가입했다가 이상해서 나왔다. (웃음) 난 사진부였다. 조선희 사진작가가 동기다. 이번 포스터도 선희가 찍었다. 벌써 22년지기다. 서클 선배 감독도 한 명 더 있네. 임상수 감독님. (웃음)
건축학과 출신이니 만큼 세트 제작에 관심이 많겠다.
당연하지. 나는 미술감독 두 명 달라 그런다.
건축일은 왜 그만 뒀나?
재수까지 해서 건축과를 갔고, 그만 두리라 상상한 적도 없었다. 대학 졸업하고 설계 사무소에 들어갔는데 척박한 현실을 각성했다. 내 성향 탓이겠지만 ‘이렇게 못살겠다’는 생각했지. 건축은 좋은데 건축 현장이 불합리하게 느껴져서 싫었다. 회사 생활 2년 즈음 됐을 때부터 흥미가 떨어지면서 겉돌았다.
그럼 영화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는?
컴퓨터에 관심이 생겨서 사진도 찍고 했으니 혼자 관련 책을 사서 포토샵 공부하고, 일러스트레이터 해보고, 이런 낙으로 살았는데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인 ‘프리미어(Premiere)’를 손댄 게 화근이었다. (웃음) 재미를 붙이다가 결혼을 앞둔 절친한 과동기를 위해서 결혼식에 상영할 영상을 편집해줬다. 어릴 때 사진 스캔 받고, 그걸 동영상으로 편집하면서 음악도 깔고, 나중에는 영상 파일을 CD로 구워서 친구한테 보여주고, 그게 내 인생의 첫 시사였다. (웃음) 그러다가 영화를 찍으면 어떨까 해서 아까 말한 단편을 찍었고, 한겨레 문화센터 등록하고, 그러다가 결국 영화하겠다 마음 먹었지.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 포기하기가 쉬웠나?
사실 건축설계사들은 이직이 심하다. 2년 정도 다니면 자연스레 직장을 옮긴다. 그런데 옮기자마자 IMF가 터져서 선배들 잘리는 거 보니 정나미 떨어지더라. 나는 언제 잘릴까 싶고. 앞으로 그 일을 계속 한다는 게 요원하게 느껴졌다. 봉급도 더럽게 짜니까. (웃음) 솔직히 그래서 영화도 엄두가 안 났지.
그런데 왜 선택했나?
IMF 터지고 연봉 재협상하면서 초봉 수준으로 월급이 깎여버렸다. 뭔 차이인가 싶더라. 처음에는 방송 PD하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IMF 터지니 PD도 안 뽑더라. 그런데 MBC에서 기습적으로 공고를 냈다. 그때 사무실이 여의도에 있어서 점심 시간에 방송국까지 걸어가 지원서류를 제출하고 일요일에 여의도 중학교에서 시험을 봤다. 떨어졌다. 그것도 언론고시라서 1년은 준비해야 된다더라. 해볼까 했는데 그 해가 응시 자격 나이 제한에 걸리지 않는 마지막 해더라. 역시 불합리하다. (웃음) 그냥 영화하자 했고,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살인의 추억> 후에도 영화를 계속 해야 되는지 고민했다. 봉 감독님이 할 거면 제대로 하라고 하셔서. (웃음)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삶도 생각했다던데.
입봉을 못하니까. (웃음) 다들 내가 쓴 시나리오에 관심을 갖고 사겠다는 사람도 있는데, 연출하고 싶다 하면 다른 말을 한다.
어쨌든 오랫동안 염원하던 작업을 이뤘다. 후련한 기분도 들겠다.
그렇게 말하기엔 너무 장대한 시간이었다. (웃음) 결국 해냈다고 표현하는 건 이상하고, 확실한 건 이제 다시는 이렇게 오래 걸리는 작업은 하지 않겠다는 교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개인적인 집착이 빚어낸 비극인데, 다행히도 영화를 찍어서 마무리됐다. 아무리 좋아하는 이야기라 해도 10년 걸려서 할 일은 아니었다. 상처도 많았고, 창피했지. 순진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거다.
“10년 뒤에 뭘 하고 있을까?”라는 대사가 생각난다. 10년 전에 뭐하고 있었나?
10년 전이면 <살인의 추억> 연출부 시절이다.
그때 10년 후를 생각해봤나?
감독이 되면 좋겠다 생각했다. 아마 그때 2009년도에 겨우 입봉할 걸 알았다면 그만 뒀을 거다. (웃음) 2005년 즈음에는 입봉하리라 생각해서 준비했다가 이 꼴 났다. (웃음)
정말 치가 떨렸나 보다.
나이 서른 넘어서 어머니 집에 얹혀 살며 한 달에 모든 생활을 50만원으로 할 때였으니까. 그건 사는 게 아니다, 친구도 못 만나고, 외출도 못하고, 어머니 걱정도 심해지고, 간혹 만나는 친구들도 술 사주면서 걱정 하고.
어머니 반대도 있었을 텐데.
2년만 해보겠다고 약속해놓고 어겼지. 좀 더 있으면 감독 될 거 같아, 막 이러면서 속이고. 어느 순간 어머니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인정하신 것 같다. 끝까지 마음에 안 들어 하셨다. 입봉하고 나서 비로소 인정하셨지.
그때 반응은 어땠나?
좋아하셨지. 청룡영화제 각본상 받아서 TV 나오니 인정하시더라. 그 전까지는 안 좋아하셨다.
부모님들은 상 받으면 좋아하지.
TV 나오니까. (웃음)
10년 뒤를 생각하나?
한다. 나는 내일, 이번 주, 1년 뒤 어떻게 살지 습관적으로 계획하는 편이다.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더라. 나중에 알았다. 막연하게 10년 뒤도 생각하고 있다. 일종의 바람도 섞여 있고. 건축설계사 하면서 싫었던 건 1년 뒤, 3년 뒤, 10년 뒤 자리가 정해진 느낌이었다. 사실 영화일은 1년 뒤를 예측할 수 없다. 다른 직업도 그렇겠지만 특히 그렇다. 그러니 동기부여가 더욱 필요한 거다. 그래서 힘들지만 그래서 매력 있다.
예상불가능하기 때문에?
실패할 수도 있으니 두렵지만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회사를 다니면 안정적이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제로겠지. 안정적이란 말은 결국 딱 그 정도라는 말이잖아. 어쩌면 답답한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