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 자리도 알고 난 자리도 안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건 없어졌고, 없어야 할 것이 굴러다녔다. ‘내 집’에선 상상할 수 없던 일이 결혼 후 ‘우리 집’이 생기면서 벌어졌다.
“사람을 갑자기 바꾸려고 그러면 안돼. 그냥 서로 맞춰서 살아야지.” 장모님께선 신신당부하셨다. 하지만 인내심이 바닥을 치는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아내는 종종 ‘조커’ 같았다. 집안 곳곳을 무질서하게 어지럽혔다. 여기가 신혼집인지 고담시인지 구별할 수 있을 때 무찔러야, 아니, 바로잡아야 했다. 질서를 확립해야만 한다. 복면을 쓸 필요까진 없었다. 대신 단호하게 언어를 던져야 했다. “외출하고 돌아와서 가방은 제발 식탁 의자에 던져두지 말라니까.” 그렇게 옥신각신한 이후에도 어김없이 그녀의 가방은 주문이라도 받을 사람처럼 식탁 의자에서 발견됐다. 종종 쇼파에서도 목격됐다. 목탁을 두드리며 반야심경이라도 읊는 마음으로 그 무질서를 견뎠다. 사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내로 업데이트 되기 전, 그러니까 여자친구 버전이었던 당시에 그녀가 혼자 살던 집에서도 이런 풍경을 적잖이 목격했으니까. 사실 낯익은 그림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정리라는 단어와 멱살이라도 잡은 양 생활하는 누나를 보며 자랐고, 덕분에 여자와 정리라는 단어는 강남구와 캘리포니아주처럼 요원한 관계임을 암기해 왔다. 문제는 그것이 더 이상 남의 집 불구경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사람들이 종종 착각하는 한가지 개념을 정리해보자. 간혹 청소와 정리를 동일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가슴을. 정확한 의미부터 짚어보자. 청소의 사전적 의미는 ‘더럽거나 어지러운 것을 쓸고 닦아서 깨끗하게 함’이며 정리는 ‘흐트러지거나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을 한데 모으거나 치워서 질서 있는 상태가 되게 함’이다. 그러니까 바닥에 널브러진 지갑이나 옷 따위를 치우고 나서 우리가 ‘바닥을 깨끗하게 했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간단히 정의해서 날 잡고 하는 게 청소라면 언제라도 그러하듯이 해야 하는 게 정리다. 그리고 다음 문장은 밑줄 쫙. 청소를 하겠다고 정리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그냥 정리하지 않는 사람이란 말씀. 청소를 위한 정리란 말 그대로 청소 직전의 일상적인 행위 중에 불가피하게 어질러진 것을 치운다거나 청소기 헤드에 걸릴만한 것들을 임시적으로 옮기는 하등의 행위일 뿐이지 약속된 위치에 두지 않은 것들을 몰아서 제 자리로 되돌려 보내는 노동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건 청소가 아니라 온전히 정리에 관한 것이다. 솔직히 청소는 주기적인 노동일 뿐이지 일상적인 습관이 아니니까. 중요한 건 정리가 되지 않는 상태에선 청소도 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물론 항상 정리하지 않는 사람이 깔끔하지 않은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깔끔한 상태를 좀처럼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정리가 안된 상태에선 청소도 힘드니까, 결국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고.
정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정리의 대상이 되는 물건의 위치를 지정해주는 것이다. 자주 쓰는 물건과 그렇지 못한 물건을 구별하고 위치가 얼마나 자주 바뀔 것인지 그 가능성을 탐색한 뒤 물건의 용도와 어울리는 동선을 생각해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옷방에 국자를 두지 않고, 부엌에 옷걸이를 걸지 않는 이치랄까. 물론 이처럼 명확한 경우엔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만 공간의 특성에 딱 떨어지지 않는 물건들도 존재하기 때문에 고민이 필요하다. 집마다의 구조적인 특성에 기반한 노하우도 요구된다. 스스로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대체 그건 어디 있는 거지?’ 당장 필요한 무언가가 약속된 위치에 놓여있지 않아서 생기는 혼선에 익숙하다면 정리를 못하는, 어쩌면 안 하는 쪽인 셈이다. 아내를 비롯해서 몇몇 여자들이 가끔 핸드백이나 가방을 뒤적거리며 핸드폰을 찾는 모습을 보는데 그때마다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 작은 가방에도 작게나마 별도의 주머니가 있는데 굳이 그 핸드백 안의 잡동사니들 속으로 핸드폰을 묻어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리곤 매번 겨우내 핸드폰을 발굴한다. 그때마다 핸드폰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긴장하기도 하면서. 문제는 실제로 잃어버렸음에도 잃어버린 건지 모르고 뒤늦게 그 상황을 파악하는 순간도 존재한다는 것. 정리란 물건의 공간을 확정 짓는 동시에 공간의 용도를 명확히 가져가는 일이다. 단지 집 안에서만 쓸모 있는 기술이 아니다. 정리가 필요한 건 비단 ‘집 구석’만은 아니니까.
원래 나는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짐에 불과한 것들을 구별해서 최대한 신속하게 버리는 편이기도 하다. 방의 면적엔 한계가 있었고 넘치는 잡동사니들을 수납할 만한 공간의 견적을 파악해서 채워 넣는데 이골이 났다. 문제는 그런 덕분인지 빈 공간에서 어떤 강박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신혼집을 방문한 몇몇 지인은 말했다. “신혼집이 아니라 이미 몇 년 정도 살아온 집 같은데?” 그러니까 무언가 꽉 채워진 공간 같다는 인상을 주는 건 아내보단 내 욕심이 반영된 결과다. 처음 신혼집으로 이사하던 날부터 집정리의 윤곽이 잡혀가던 3일 간 공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주도했던 건 아내가 아니라 나였다. 지금도 무언가 자리를 잡아야 할 가구가 생기면 으레 자리를 지정하는 건 아내보단 나다. 물론 의견을 교환하고 수렴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고민하고 선택하는 건 주로 내 몫이 됐다.
아무래도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가 되듯이 더 많이 정리하는 쪽도 약자가 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빨래가 마르면 당장 치워야 속이 편한 쪽이 전전긍긍하다가 빨래를 걷게 된다. 설거지도 마찬가지이고, 청소 역시 그렇다. 그러다 보니 살짝 억울해지는 순간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정리 페티쉬라도 있는 것마냥 정돈된 이미지로부터 쾌감을 느낄 때도 있다. 어쩌면 이건 피곤한 강박일지도 모른다. 규칙을 정하고 따르길 설득하며 실태를 확인하는 쪽이 자연스레 더욱 피로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 딱히 정리에 신경 쓰지 않는 아내가 편해 보이기도 하고. 물론 아내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식탁 의자나 쇼파에서 아내의 가방이나 핸드백을 보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고, 집 안을 떠돌아다니던 물건들이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물건의 가짓수가 늘고 있으니까. 반대로 내가 무장해제되는 순간도 생기는데 ‘포기하면 편해’라는 진리를 새삼 깨닫는 순간도 있다고나 할까. 노력하는 속도가 빠를지, 포기하는 속도가 빠를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애초에 정리는 내 몫이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적당히 발만 맞춰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결국 우린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닫는 과정이 필요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건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장점이 될 수도 있더라. 각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역할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나쁜 일이 아니다. 게다가 보다 인정받는 일이 있다면 생색도 낼 수 있기도 하고. 가끔 머슴처럼 살고 있다는 기분은 그저 착각이겠지. (응?)
직장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경쟁력이 있다고 말했다. 어느 여자 상사가 그랬다. 듣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결국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글래스 실링(glass ceiling)’이라는 숙어가 있다. 직역하자면 ‘유리 천장’이란 뜻이지만 ‘여성이나 어떤 집단이 높은 지위로 올라서지 못하도록 막는 장벽’이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차별은 뿌리 깊은 전통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통용되고 유전자적으로 세습되면서 때론 교묘하게 역할의 분리처럼 강요되는 차별적인 유전자가 사회 도처엔 여전하다. 어쩌면 굳건한 남성성의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여성의 공성전과 남성의 수성전은 현대 인류사의 한 단면을 차지하는 그림일지도 모른다.
성경에 따르면 야훼는 에덴동산의 외로운 독거남을 위해서 그의 늑골 하나를 여성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란 남자에게 있어서 뼈를 내어준 존재라 할 수 있겠다. 탈무드에선 남자가 여자에게 끌리는 것이 남자가 잃어버린 늑골을 되찾고자 하는 본능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기도합시다, 는 훼이크고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남성은 항상 여성을 ‘소유’하고자 했다. 그래도 된다고 믿었다. 아니, 믿을 것도 없이 그랬다. 전쟁에서 여성이 전리품처럼 여겨진 것도 그래서다. 전쟁이 지배하던 역사의 주인공이 남자였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 건 어쩌면 야만의 시대가 끝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위치에 서있는가. 남자만 지배하는 시대가 끝났을 뿐 남자가 지배하는 시대가 끝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서론이 거창했다. 어쩌면 거창한 핑계를 대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남자다. 군대도 다녀왔다. 대한민국에서 사회생활하기 최적화됐다고 여겨지는 ‘남자 직원’ 중 하나다. 무슨 자신감이냐고? “군대문화에서 익힌 계급적인 충성심이 강하다.” “군대 경험을 통해서 상하 관계에 익숙해서인지 무언가 지시를 내리면 일단 부딪혀 보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여자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정확하게는 ‘여자 상사’로부터. 지금부터 인용되는 말들은 모두 여자 상사들로부터 얻은 답변이다. 여기서 말하는 여자 상사란 직장 내에서 최소한의 결정 권한이 있는, ‘팀장’급 이상의 직책을 지닌 여자들이다. 물론 당사자들은 모두 무기명으로. “누런 소가 일을 잘하오? 검은 소가 일을 잘하오?”라고 묻는 황희 정승의 질문에 밭 갈던 농부가 굳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타산지석 삼았다. 그 농부가 왜 그랬는지 모른다면 검색하길 요망하며 본론으로 다시 정주행.
분야마다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여자 상사들은 직장 내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에 비해서 직장 내에서의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사원 시절엔 조금 생각이 달랐다고 한다. “옆에서 볼 땐 답답하고 줄서기에만 급급해 보여서 한심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팀장이 되고 보니 상사에 대한 충성심이 깍듯하고 다른 팀으로부터 주요 정보를 수집해오는 정보력도 있다.” 여자들은 보통 남자들을 정치적이라고 말한다. 정치는 관계를 형성시킨다. 관계는 바로 정보망이다. 정보가 패처럼 돌려진다. 좋은 패는 아무 곳에서나 펴는 게 아니다. 이기고 싶은 상대 앞에서 펴는 거다. 인정받고 싶은 상대에게 던져야 한다. 그러니 동료들은 몰라도 상사는 알게 돼있다. 그 패를 확인하게 되는 쪽은 상사일 테니, 그 정치적인 관계로부터 얻어지는 정보의 장점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저 동료 여자들이 한심해 여기는 단합회장에선 은밀하게 정보가 오고 간다.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일 때도 남자들은 대놓고 반대하거나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들은 즉각적으로 반대의견을 표한다. 표정 관리도 잘 안 되는 편이라 일을 주는 입장에선 부담을 느낄 때가 있다.”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골목대장 놀이를 하는 게 남자다. 유전자적으로 서열을 나누고 패를 가르는 게임에 능하다. 어쩌면 군대는 그런 본능을 보다 구체적으로 계발시키는 조직일지도 모른다. 속된 말로 ‘까라면 까는’ 일상에 2년간 체류하다 보면 방사능에 피폭당한 사람처럼 상명하달 방식의 수직적인 조직 체계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게임상에서 일단 클리어해야 하는 스테이지처럼 느껴지는 거다. 상사에 대한 복종심도 존재하겠지만 당장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정복하겠다는 욕망도 적지 않을 거다. 뭐, 남자는 단순한 동물이기도 하고.
“남자들은 큰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여자들은 당장의 흥미에 이끌려서 프로젝트를 기획하거나 아이템을 개진하는데 그러다 보면 논리에 막히는 경우도 있고 큰 관점에서 허술한 측면이 발견된다. 남자들은 아무래도 직간접적인 경험이나 디테일한 가능성을 깊게 파고드는 편이라 무언가를 추진할 때 더뎌 보이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보다 안전성을 확보하는 경우가 많아서 신뢰하게 된다.” <화성에서 온 여자, 금성에서 온 남자>에서 남자는 목적을 성취할 때 만족을 느낀다고 했고, 여자는 누군가와 자신의 느낌을 공유할 때 만족을 느낀다고 했다. 남자는 결과적인 완성을 추구한다. 여자는 그 순간의 흥미를 인정받길 바란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먼저 딴 것도 여자였다. 선악과를 권하는 여자를 믿고 역시 한 입 물었던 남자는 여자와 함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애초에 리스크 있는 거래는 피하라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부동산 교훈극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이 모든 장점들이 남자들의 뛰어난 경쟁력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야근시키는데 무리가 없다는 건 과연 장점인가? 지시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언제나 현명한가? 무조건적인 안정만을 추구하는 것이 사업에서 유리한가? 이 모든 장점들을 빛내주는 건 남자들 자신일까, 그 장점을 요구하는 사회 혹은 조직문화의 분위기일까?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남자의 성비가 여전히 높은 만큼 남자들에겐 좀 더 많은 선배가 있기 마련이고, 남자들 특유의 선후배 문화에 적응한 사람들에게 유리한 조건이 갖춰지는 것 같다. 아무래도 여자들에게 애초에 불리한 경쟁이다.” 그러니까 출발점이 다르다는 말이다. “아무래도 여자들은 결혼이나 육아 문제로 경력이 단절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잠재적으로 여자들에게 지속적인 중요 업무를 맡기는 걸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큰 것 같다.” 출발선도 다르지만 트랙의 조건도 차별적이란 말이다. 아이러니한 건 그런 열악한 조건 속에서 ‘상사’의 위치까지 오른 여자 상사들이 남자의 경쟁력을 인정하는 현실이다. 어쩌면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를 남성보다도 치열하게 습득한 여자만이 그 유리 천장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조직의 논리를 합리화하는 건 아닐까.
반대로 어느 남자 상사는 말한다. “여직원들은 빨리 이해할 줄 알아서 편하다.” 어쩌면 남자와 여자는 서로 자신에게 없는 것을 경쟁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결국 성별의 차이가 경쟁력의 차이라고 느껴지는 환경을 진단해야 한다. “남자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건 여자들에 대한 경계심리가 있는 거다. 관료적이고 계급적인 시스템 말이다. 결국 남자든 여자든 편하게 일하면서도 저마다의 책임감을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남녀의 장점이 편안하게 수용되는 사무실의 풍경은 당장 요원해 보인다. 현실적으론 지금의 직장에서의 최적화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최선의 경쟁력일 것이다. 하지만 그 경쟁력이 조직을 진보시키기 보다 조직에서의 생존에 유용한 것이라면 과연 그 경쟁력을 존중해야 할까. 한국 사회에서 남자들의 경쟁력이란 어쩌면 그런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건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성별이 아니다. 언젠가 당신이 누군가의 상사가 됐을 때 당장 시도할 수 있는 그 무엇에 관한 고민일 거다.
어느 날, MP3가 식상해졌다. LP로 음악을 듣고 싶어졌다. 턴테이블이 갖고 싶어졌다. 21세기에 말이다.
일렉트로니카 듀오 다프트 펑크가 복고적인 신시사이저 사운드로의 회귀를 표방하며 올해 발표한 신보는 LP로도 발매됐다. 이 LP는 미국에서만 30만장이 넘게 판매됐다. 뮤즈, 레이디 가가, 비디 아이, 마룬 5, 데이비드 보위, 메탈리카 등 현재 전세계 음악산업의 최전선에서 언급되는 현재진행형의 뮤지션들은 끊임없이 LP 제작과 발매에 공을 들여왔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선 끊임없이 LP가 제작됐고, 스테디셀러와 베스트셀러가 공존했다. 한편 지난 4월 10년 만에 정규 앨범 19집 <Hello>를 발표한 조용필의 신보는 LP로도 발매됐다. 그런데 여기서 다프트 펑크의 LP와 조용필의 LP 사이에 어떤 흐름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믿겠는가?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지금 LP는 전세계 음악산업의 새로운 화두다. 미국의 음반판매량을 집계하는 닐슨 사운드스캔(Nielsen SoundScan)에 따르면 지난 2009년 미국 내에서 LP는 25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1991년 이래로 최대 수치를 기록했고, 매년마다 판매량을 갱신하며 지난해에만 460만장이 판매됐다. 2008년부터 시작된 ‘레코드 스토어 데이’가 끼친 영향력도 적지 않다. 매년 4월 셋째 주 토요일에 미국 전역의 독립 레코드점들이 참여하는 이 행사엔 특별한 음악 관련 아이템이나 희귀 LP들이 판매되고 다양한 뮤지션들의 공연이나 이벤트가 개최된다. 이를 벤치마킹한 것이 바로 한국의 레코드페어다.
올해로 3회를 맞이한 레코드페어는 LP 리스너들을 위한 축제다. 올해까지 1만 명 이상의 관객이 레코드페어를 찾았고, 매년마다 관객이 늘어나는 추세다. 대부분은 LP를 제대로 접한 적도 없는 2~30대라고 한다. 이는 현재 국내에서의 LP 수요계층을 막연하게 짐작할 수 있는 바로미터다. 올해 레코드페어에선 이상은의 <공무도하가>를 비롯해서 미선이, 이이언, 조원선 등 몇몇 뮤지션의 명반들을 LP로 한정수량 재발매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런 기획이 가능해진 건 국내에 8년 만에 설립된 LP 공장, LP 팩토리 덕분이다. LP 팩토리의 대표 이길용은 공연기획사에서 다양한 해외 아티스트들의 내한공연을 주관하던 중, 그 아티스트들이 LP로도 앨범을 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장성을 파악했다. 장기적으로 국내에서의 시장 개척 가능성을 타진했고, 개인적인 애정을 더한 결과 LP 팩토리의 설립이 이어졌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한국을 덮친 것마냥 미국에서의 LP 시장 확대가 한국의 LP 부활을 부추기는 것만 같다. 조용필의 <Hello>가 LP로 제작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물론 아직 국내에서의 LP 제작은 미지근한 수준이다.
국내에서 싱글 앨범이나 미니 앨범 발매가 일반화된 건 음악시장이 음원 다운로드 위주의 구조로 재편됐기 때문이다. 곡 단위로 음악을 소비하는 시장에서 자본과 시간을 투자해서 다량의 곡을 담은 정규앨범을 발매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국내 실정에서 CD에 비해서 단가가 10배까지 치솟는 LP로 싱글 앨범이나 미니 앨범을 발매할 이유는 더욱 없다. 그만큼 LP 제작 기회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LP에 대한 수요는 확실히 증가하고 있다. 휴대용 턴테이블인 ‘아리아 판 USB 턴테이블’을 수입한 ‘스카이디지탈’의 마케팅 담당자는 지난 3개월 사이에 이 제품이 2천여 대가 판매됐다고 전했다. 스카이디지탈은 컴퓨터 주변 기기를 판매하는 회사였지만 해외에서의 턴테이블 시장이 활성화되는 걸 눈여겨보고 직접 수입과 유통을 계획했다. 7만원대의 저렴한 가격대를 지닌 만큼 들을 만큼 들어본 이들보단 LP에 막 입문하는 이들에게 적합한 제품이다. 무엇보다도 LP음을 MP3 음원으로 변환시키는 기능이 있다는 점에서 MP3 사용이 익숙한 젊은 세대에겐 보다 매력적이었고, 결국 먹혔다. LP에 대한 젊은 층의 수요가 짐작되는 대목이다.
LP를 사용한 경험이 없는 젊은 리스너들은 LP를 새로운 매체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음반사들은 그들이 지갑을 열도록 적극적으로 구애한다. 요즘 해외에서 발매되는 LP 케이스엔 MP3 다운로드 쿠폰이나 CD가 동봉됐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CD를 사더라도 파일 형태의 음원으로 변환해서 MP3 플레이어에 담아 듣는 이들이 음원 다운로드 대신 굳이 CD를 사는 건 그 물리적인 형태를 소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CD보단 보다 크고 선명한 커버 이미지를 지닌 LP가 부르는 소유욕이 더 클 수밖에 없다. 게다가 CD나 음원까지 제공한다니 혹할 수밖에 없다.
미국이나 유럽 심지어 일본에 비해서 아직 국내 LP 시장의 성장세는 더딘 편이다. 하지만 수요는 분명 존재한다. 서울의 한 백화점에선 한 달에 2대 이상 판매가 어려웠던 턴테이블이 조용필의 신보가 LP로 출시된 이후로 한 달에 20대 이상 판매됐다고 한다. 결국 공급의 문제다. LP를 갖고자 하는 욕망은 음악을 소유하는 재미가 어떤 것이었는지 다시 깨닫게 만드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음원을 아무리 채워 넣어도 손바닥만한 MP3 플레이어가 결코 충족시켜줄 수 없었던 허기에 대한 자각. 하지만 LP의 재조명이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된 회귀적인 현상은 아닐 거다. 오히려 전진이라 할만하다. 디지털 시스템의 편의가 결코 채워줄 수 없는 정서적 포만감에 대한 경험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위한 자산이다. 물론 LP를 음악의 미래라고 말할 순 없을 거다. 하지만 확실한 건 LP가 지금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현재진행형의 음악으로서.
가까운 지인들에게 결혼 소식을 알린다. 그럼 대부분 공식처럼 날짜를 묻는다. 나는 번번히 그 공식을 깨는 답변을 했다. “그런데 결혼식을 하지 않기로 했어.” 어떤 식으로든 놀라워하고, 두 가지 혐의를 추궁한다. 설마 속도 위반? 아니면 신부가 재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미안하진 않았다. 혹자는 밑도 끝도 없이 나를 질책했다. “지금이라도 생각 바꾸고 결혼식해라. 신부가 평생 너 원망할걸.” 하지만 저는 그러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이 모든 과정을 수용했다. 결혼식 없는 결혼을 제안한 건 당시의 여자친구 그러니까 지금의 아내였고, 이를 수용한 건 당시의 여자친구 아버지 그러니까 장인 어른이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동의했고 부모님의 동의를 얻는 것 또한 어렵지 않았을 뿐이었다. 때는 3월이었다.
어차피 형식이 중요해지지 않은 만큼 여행 경비를 아낄 수 있는 비성수기에 신혼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생각보다 빨리 신혼집을 계약했고, 신혼여행에 골몰하다가 하와이행 항공 티켓을 예약했다. 동행인도 생겼다. 현지 가이드이자 드라이버 역할에 지원한 지인에겐 신혼여행 술친구라는 옵션까지 있었다. 신혼여행에 가져갈 짐이 없어서 사람까지 가져가냐고 우려하는 이들이 8할이었지만 우리에겐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정말 멋진 선물까지 받았다. 깜짝 이벤트로 현지의 신부님을 섭외해서 바다가 보이는 공원에서의 결혼식을 마련해준 것. 나는 한국에서부터 귀띔을 받고 작전에 동참했지만 아내는 전날까지도 까맣게 몰랐다. 나는 그저 장난 같은 이벤트일 거라 생각했다. 추억이나 만들자는 심산이었지. 맥가이버 가발을 쓴듯한 백인 신부님이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정복을 입고 나타난 신부는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으로 경건한 마음을 이끌어냈다. 웨딩드레스나 턱시도를 입지도 않았고, 결혼행진곡도 없었지만 사랑을 맹세하고, 영원을 약속했다.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 결혼은 장난이 아니니까. 애초에 장난이 아니어야 했다. 그걸 깨닫게 해준 지인에겐 지금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신혼여행을 다녀왔지만 결혼 일정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원고는 썼는데 취재가 남은 것마냥 이상한 일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결혼식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단지 누구나 아는 ‘결혼식’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사실 결혼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제의는 내게 대단히 솔깃한 것이었다. 결혼식은 넥타이를 매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번거롭고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갖춰야 하는 격식이었다. 하객을 받는 쪽이나, 찾아오는 하객이나, 서로에게 피로한 일이리라. 그러니 서로의 고충을 덜어주는 이 결정이란 얼마나 합리적인 결정인가. 오산이었다. 소식을 전할 때마다 의외로 서운함을 전하는 벗과 지인들의 마음을 읽게 됐다. “뭔가 해주고 싶은데”라는 말을 듣게 될 때마다 지나치게 야박한 삶을 살아온 것인가 인생을 되돌아봤다. 남들 하듯 결혼식은 하지 않더라도 친척들과 지인 일부를 모시고 식사 자리라도 마련해야 한다는 장인 어른의 말엔 일리가 있었다.
최종적인 결혼 일정은 결국 신혼여행을 다녀온지 한 달이 지나서야 완료됐다. 종로에 있는 한옥 레스토랑을 대관했고, 초대자 명단을 작성했다. 장소 여건상 초대 인원을 제한해야 했고 초대할 명단의 우선순위를 가린다는 건 생각보다 미안한 일이었다. 결혼식은 그저 필요악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결혼식’을 하지 않은 건 지금 생각해도 좋은 선택이었다. 다만 중요한 건 ‘결혼’이지 ‘식’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저 당사자들만의 일이라 생각했지만 그 당사자들을 아끼는 사람들이 진심을 전달할 마땅한 기회를 얻지 못해서 섭섭해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야박함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내 삶을 채우는 수많은 존재들을 인식했다. 그로부터 살아갈 힘을 얻었다. 에너지를 선물 받았다. 아내는 그날 우리를 찾아온 이들에게 줄 꽃을 마련했다. 입구에서 한 송이씩 꽃을 쥐어줬다. 더 이상 내 삶이 아니었다. 우리 삶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날 나는 많이 웃었고, 행복했다. 잘 살아보고 싶다고 기도했다. 용기를 얻었다. 진심으로 고맙다. 그 진심들을 잊지 않고 살겠다. 그리고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이 글은 미괄식이다.
네이버에서 웹드라마를 시작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그동안 다양한 저널의 기사를 배급하고, 자체적인 콘텐츠를 제작하며 포털사이트의 유사 미디어 역할을 주도했던 네이버가 멀티미디어의 영역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그렇다. 당장 이런 야심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릴 단계는 아니지만 4일만에 재생수 100만을 돌파했다는 점에서 이는 성공적인 테스트베드로서 결과적 가치가 있다. 신사업 동력이 필요한 네이버 입장에선 대단히 흥미로운 데이터 결과가 될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언론사의 종편 진출과 CJ의 미디어 장악은 네이버에게 있어서도 좋은 전례가 되지 않을까 싶다.
파격적인 동성애 영화로 알려진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그 어떤 멜로보다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러브스토리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지독한 멜로물입니다. ‘이별을 통한 소녀의 성장통’이란 식으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건 영화가 끝날 무렵까지 그 이별이 성장으로 해소되기 보단 통증으로 내려앉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델(아델 엑사르코풀로스)은 길에서 마주쳤던 엠마(레아 세이두)와의 우연한 재회를 통해서 예상하지 못했던 체험들을 거듭해나갑니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것은 물론 아티스트로서의 미래로 나아가는 엠마와 그 주변부의 삶에 종속되기 시작하면서 삶이 예상 밖의 궤도를 돌게 되는 셈이죠.
단순히 성정체성을 깨닫는다는 것 이상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삶의 저편으로 나아가버리는 셈이에요. 결과적으로 아델에게 있어서 엠마와의 이별이란 감정적인 단절뿐만 아니라 경험적인 기회와의 단절로도 이해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죠. 그만큼 이별이라는 진통은 아델의 삶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절망이자 비통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자신이 보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삶의 저편까지 나아가 그 일상에 익숙해질 무렵 다시 원점으로 튕겨져 추방돼버린 셈이니까요.
배우들의 연기가 대단히 좋습니다. 특히 아델 역을 맡은 아델 엑사르코풀로스는 전반적으로 영화의 서사와 함께 인상이 변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줄 정도인데 이별 이후의 감정적 진폭을 드러내는 후반부의 연기는 정말 연기가 아니라 실제라고 믿어질 만큼의 감정적 몰입도를 보여줍니다. 충동적인 계기로 맞닥뜨린 이별에 의한 심적인 고통이 스크린 밖으로도 절절하게 전이되는 기분이죠. 게다가 그 반대편에 선 엠마 역을 맡은 레아 세이두는 거대한 감정적 파고를 형성하는 매개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이별 이후에 남게 되는 애틋함 같은 감정의 끈을 놓지 않음으로써 극적인 페이소스를 극한으로 끌어올립니다. 두 배우의 화학작용 자체가 이 영화의 감정을 입체적인 구조로 이끌어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 영화가 화제가 된 건 대단히 수위가 높은 여성간의 섹스신이 긴 분량으로 등장한다는 점이었죠. 그런데 대단히 적나라해서 한편으론 담담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은밀하고 농염한 연출을 위한 카메라 앵글이 동원되기 보단 사물을 관찰하듯 평범한 프레임 안에서 행위가 목격되는 인상입니다. 오히려 저는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무언가를 먹을 때 보는 이의 욕구를 건드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토마토 파스타를 너무나 맛있게 먹는 장면에선 입 안에 침이 고이는 느낌이기도 했죠. 색욕보다도 식욕이 강렬하게 느껴진다니 좀 묘하지 않습니까? 그건 아마 이 영화가 섹스신을 특별한 영화적 체험처럼 위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동성애라는 소재는 이 영화의 주요한 키워드가 될 뿐, 서사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사안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결말부에서 묘사되는 찰나의 엇갈림을 보면서 ‘운명’이란 단어에 설득 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뒤바꿀 수 없는 결과를 등 뒤에 두고 터벅터벅 걸어가야 하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끄덕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델의 뒷모습을 비추는 엔딩시퀀스의 롱테이크에서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건 그래서입니다. 그 너머의 삶에 대해서 염려하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걸어가길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이죠. 그렇게 그 너머를 살아가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요. 사실 저는 원작의 비극적인 결말보다도 영화의 결말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죽음에 대한 연민보다도 이면의 생에 대한 호기심이 지워지지 않는 여운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한편 영화에선 프랑스의 전인적인 교육 환경을 목격할 수 있는데 학생들이 등록금 인상을 반대하는 가두 시위를 하는 신에서 '민영화를 반대한다!'는 대사가 나올 땐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물론 불법시위라는 목적을 앞세운 과격한 진압 장면 같은 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건 비단 저뿐만이 아닐 것이라고, 문득 생각하게 되네요.
뱀파이어들이 등장하는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좀처럼 목을 물지 않는다. 매혹적인 이미지로 이빨을 드러낼 뿐이다.
‘영원히 산다’라는 말을 뒤집어 봅시다. ‘영원히 죽지 못한다’라고 생각해봅시다. 영원히 산다는 건 그만큼 권태롭고 지겨운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두 존재가 있습니다. 사람이란 단어를 굳이 수정한 건 두 존재가 뱀파이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단히 오래된 존재처럼 말하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1세기 남짓의 경험만이 가능한 인간과 달리 그들은 수 세기 동안 인류의 역사를 살피며 살아왔습니다. 아니, 살아남았습니다. 언제, 어떤 연유로 뱀파이어가 됐는지 몰라도 태초부터 그들의 삶엔 낮이 없었던 것만 같습니다. 매우 평온하지만 은밀하고 때때로 아슬아슬한 그들만의 밤을 수 세기 동안 버텨왔습니다.
일단 뱀파이어라는 소재가 주는 장르적인 기대감을 품고 상영관을 찾았다면 대단히 곤란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짐 자무쉬가 연출한 영화라는 사실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애초에 그런 종류의 기대감을 품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단히 서정적인 리듬감과 시적인 묘사로 특유의 미학적인 시선을 견지해온 짐 자무쉬의 뱀파이어물에서 장르적인 공포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낯선 것이니까요. 그리고 짐 자무쉬 특유의 미학적인 방식은 이 영화가 주목하는 뱀파이어들의 영속성과 맞아떨어지는 측면도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나른한 분위기 속에서 고상하고 우아하게 소모되는 뱀파이어들의 평범한 일상은 때때로 대단한 블랙코미디의 자질을 느끼게 만들기도 하고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Only Lovers Left Alive>라는 시적인 문장은 생각보다 절박하고 짓궂은 제목입니다. 특히 느슨하게 풀려있던 영화의 흐름을 강하게 확 당기는 듯한 결말부 덕분에 이 영화 자체가 대단히 악랄하고 재기발랄한 농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살아남는다’라는 절박한 감정과 직접적인 행위의 중의성을 한번에 깨닫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한편으론 뱀파이어들이 ‘인간 따위가’란 식으로 계급적인 우월성을 드러낼 때 그들이 지닌 고매한 정신이 느껴지지만 인간 세계에 기대서 자신의 삶을 연명해나가는 일상을 거듭 목격하다 보면 멸종을 앞둔 동물의 자존심을 보는 것과도 같은 아이러니가 느껴집니다.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낡아 버린 귀족 가문의 풍경 같기도 하고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됐다고 할법한 존재들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살아왔다고 생각하면 그 자체가 대단한 아이러니이기도 하죠.
나이트신으로만 점철되어 낮은 조도의 색채감으로 채워진 영화의 풍경은 그만큼 정적입니다. 어둠과 어둠을 밀어내는 조명들로 채워진 영화의 몽환적인 풍경과 비현실적인 색감 자체에서 시간의 흐름을 지워버린 듯한 근사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물들만큼이나 영속성을 지닌 듯한 소품들로부터 반시대적인 낭만 같은 것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백미는 캐스팅입니다. 틸다 스윈튼은 그냥 뱀파이어를 섭외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아요. 특유의 신비감과 중성적인 매력이 더해져서 영화의 비현실성을 강화하는 도구적인 역할도 해내고 있다는 인상도 들고요. 반대로 톰 히들스턴은 뱀파이어로서 ‘생존’과 ‘생활’이라는 현실적 화두를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 캐릭터의 조합이 영화 자체의 시공간에 입체적인 감상을 부여하도록 이끄는 것도 같고요. 서사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미아 바시코브스카와 안톤 옐친은 캐릭터의 쓰임새나 표현력이 적절합니다. 결말부에 다다라 비장한 페이소스와 역설적인 냉소를 품게 만드는 존 허트의 존재감도 탁월하고요. 완벽하다고 칭송해도 모자랍니다. 기꺼이 목을 내주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랄까요.
조셉 고든 레빗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잡고, 주연까지 맡은 <돈 존>은 보통 물건이 아니다.
매일 밤 친구들과 함께 클럽을 찾으며 여자를 찾는 남자가 있다. 최상등품의 고기를 고르듯이 점수를 매기고, 최고등급이라고 생각되는 여자에게 작업을 걸고, 춤을 추다가 집으로 가서 섹스를 즐긴다. 그에게 이는 일종의 게임이나 다름없다. 1회용품을 소비하듯이 자연스럽고 거리낌 없이 원 나잇 스탠드를 즐기고, 다음날이 되면 새로운 상대를 찾는다. 도돌이표 같은 밤이 반복된다. 하지만 그 어떤 여자와의 잠자리도 그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다. 그를 위한 환상 속의 그녀는 따로 있다. 클릭 몇 번이면 만날 수 있는 포르노 배우들을 보며 자위를 하는 것이 그 어떤 여자와의 잠자리보다도 그를 만족시킨다. 그런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새로운 여자가 나타났다.
<돈 존>은 할리우드의 미래로 꼽히는 영민한 배우 조셉 고든 레빗의 각본, 연출, 주연작이다. ‘돈 존(Don Jon)’이란 제목의 모티프가 된 건 스페인 귀족 가문의 전설적인 바람둥이 돈 주앙(Don Juan)이라고 한다. 돈 주앙은 카사노바와 달리 자신이 만나는 여자들로부터 혐오를 샀는데 여자를 노골적인 정복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돈 존>의 존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만족할 수도 없는 잠자리를 전전하는 건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자존감의 정복을 위해서다. 그를 충족시켜주는 상대는 인터넷의 포르노 사이트에 널려있다.
‘포르노 중독자’라는 캐릭터의 특성은 인터넷 시대의 폐해를 연상시키지만 <돈 존>은 궁극적으로 관계의 일방성을 지적하고 수긍하게 만드는 영화다. 존에게 있어서 진짜 섹스를 위해 거쳐야 하는 스킨십과 전희의 과정이란 그저 결과를 위한 노동에 가까운 반면, 포르노를 보며 자위하는 것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만족스럽다. 쾌감이란 결과에 닿기까지의 과정이 간편하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가 바바라(스칼렛 요한슨)에게 끌리는 것 또한 쉽게 섹스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점차 존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그 변화는 존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일방적인 관계에 탐닉하던 남자는 자신을 매료시킨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투신함으로써 일방적인 관계의 허무를 깨닫는다. 간편하고 합리적인 방식의 쾌감이 ‘가짜’임을 깨닫는다.
<돈 존>은 계산된 연출 방식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반복적인 패턴을 지닌 존의 일상을 도돌이표 같은 동선과 공간 묘사, 행위를 통해서 묘사하는데 이 패턴에 미세한 변화를 삽입함으로써 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별다른 설명 없이도 효과적으로 이해시킨다. 과감한 인서트컷을 삽입하거나 빠른 컷의 전환으로 두 개의 신을 연결하는 교차 편집 등 편집 방식이 현란하게 느껴지는 신도 더러 있는데 때때로 과장되거나 넘치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재기발랄하고 영리하게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킨다. 무엇보다도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에서 소모될만한 소재를 군살 없는 성찰로 승화시킨 성장드라마로 완성해낸 재능이 놀랍다. 과감하면서도 감복할만한 결말로 다다르는 이야기 방식도 탁월하다. 실로 주목할만한 연출 데뷔작이다. 조셉 고든 레빗, 역시 보통 물건이 아니다. 참고로 중반부에 놀라운 카메오가 등장하니 기대할 것.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뛰어난 이야기꾼의 영화다. 물론 흥미로운 이야기밖에 없는 영화라는 말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공항에서 손짓을 이용해서 대화를 나눈다. 여자는 남자를 마중 나간 모양이다. 친밀한 사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차 앞좌석엔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두 사람의 재회가 이혼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는 끝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같다. 그 끝에서 과연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카메라와 함께 이야기의 문턱을 넘게 되는 순간부터 영화는 예상 밖의 이야기 범위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는 이야기의 운용 방식만으로도 흥미진진한 영화다. 이혼을 앞둔 부부의 입장을 핵심으로 그와 연관된 주변부의 입장을 끌어들이며 극의 너비를 확장해나간다. 단순명확해 보이던 사안이 점차 복잡한 양상으로 확대된다. 평범해 보이던 사연이 주변 인물들의 내밀한 감정과 충돌하고, 그로 인해서 예기치 않게 불거지고 밝혀지는 진실들로 인해서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된다. 평면적인 일상의 기류에 입체적인 변곡점이 형성되고 점진적으로 이야기의 절정이 형성된다. 감독 아쉬가르 파라하디는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도 명확해 보이는 사연의 끝으로부터 가늠하기 힘든 이야기의 방향성을 살핀 바 있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역시 마찬가지다. 끝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영화는 끝을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굴러나간다. 그 예측하기 힘든 방향성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이 영화의 묘미에 가깝다.
부조리극의 양상 자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고, 그 복잡다단한 이야기 흐름만으로도 감정적인 진통이 명확하게 다가온다.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는 뛰어난 이야기꾼에게 가능한 화술과 작법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만드는 작품이다. 물론 단지 그런 이야기 구조에 대한 흥미만을 안겨주는 작품은 아니다. 결말부에 다다라 영화는 명확한 결말을 묘사하는 대신 카메라를 두고 떠나버리듯 롱테이크 기법의 엔딩 시퀀스를 제공한다. 이는 단순해 보이던 도입부 상황과 대비적인, 어떤 것도 불확실해진 결말부의 상황 자체를 아이러니한 여운으로 각인시킨다.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던 상황들의 내면엔 감당하기 힘든 비밀과 켜켜이 쌓인 오해들이 존재했고 그렇게 방치된 비밀과 오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당사자들의 삶을 휩쓸어 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의 진실을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 진실을 알았다는 판단일지도 모른다는 여운으로 가닿는다. 인물로부터 시선을 거두지 않는 엔딩 시퀀스의 이미지는 그래서, 그렇게 마음을 진동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