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만족하지 못할수록 과거를 그리워하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했다. 21세기의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보단 과거에 대한 낭만을 논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다. 그만큼 현실이 팍팍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90년대엔 새로운 시대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미래의 청사진에 대해서 그리곤 했다. 그만큼 풍요로운 꿈을 꾸던 시대였던 것이다. 1997년 IMF사태 발발 이후로도 그나마 뉴 밀레니엄이라는 허수 같은 단어에 열광했다. 하지만 2000년대를 넘어오며 점차 미래에 대한 꿈은 저물기 시작했고 팍팍해지는 현실이 가속화되면서 이젠 그나마 90년대에 경험했던 풍요로운 시대에 대한 낭만을 향해 틈나는 대로 응답하라 외친다. 팍팍한 현실을 견디기 위해 과거의 유산을 마약처럼 삼킨다. 90년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마냥 즐길 수 없는 건 그래서다. 곰팡이 핀 낭만에 열광한 뒤에 씹히는 현실이란 여전히 퍼석퍼석하다. 나아갈 길이 없다. 갈 길은 먼데 갈 곳이 어딘지 모르겠으니, 그저 그리움만 쌓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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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정의롭다는 말은 언제나 부도수표 같고, 보수가 정의롭지 않다는 말은 그저 편안한 도피일 뿐이다. 어느 쪽인가는 늘 중요하지 않다. 어느 쪽이든 맞는 얘기를 하느냐가 관건이지. 나는 진보이기 때문에, 나는 보수이기 때문에라는 행동강령 따위는 개똥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그건 그저 정치가들이 자기 편을 손쉽게 끌어모으기 위해 동원하는 말장난일 뿐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일상에서 진보라고 말하면서도 보수적으로 군다.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자신만 모를 뿐이다. 그저 '진보' 혹은 '보수'라는 신앙을 통해서 그 자리에 안주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러니 언제라도 그 프레임을 벗어던지고 최선을 다해서 옳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정의는 대부분 지고, 아주 가끔씩 이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그 확률을 높일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 중요한 건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오른손도, 왼손도, 두뇌의 명령을 따르고 있음을 잊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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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리는 이렇다. '필요 이상의 돈이나 물건을 쓰거나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함.' 그런 의미에서 재벌가의 딸이 기백만원, 기천만원짜리 옷을 입고 다니는 건 물질적인 개념에서 사치가 아닐 수 있다. 돈이 이마에서 튀는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뭔들 못하겠어. 세상을 멸망시키는데 돈지랄하는 게 아니라면야 있는 이들의 소비수준을 사치라고 말하는 입은 결국 무색해지기 마련이다. 쓸 수 있어서 쓰는 건 죄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재벌 2세가 누리는 화려한 생활이 마땅한 소비이고 정당한 권리인가라는 물음에 닿았을 때 문제의식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상그룹이라는 재벌가의 딸인 임세령이 몸에 걸친 의류의 가격대를 듣고 혀를 찰 것이다. 관련 기사를 써대는 찌라시들이 즐비한 것도 그런 반응을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임세령이라는 사람이 대체 누구이길래, 저런 자격을 갖추고 있단 말인가'라는 의문은 '그의 아버지가 그룹 회장이기 때문에'라는 '은수저 물고 태어난 아이'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임세령의 소비는 정당하다. 하지만 그 소비를 손가락질하는 손의 심정도 이해한다. 돈이 있는 사람의 정당한 소비를 옹호하면서 그에 대한 질시의 여론을 무작정 비판하는 건 그저 손쉬운 일이다. 빈부 격차가 극대화되고, 부의 재분배가 가로막힌 사회에서 '재벌가의 손녀가 몇천만원 짜리 코트를 입는 게 잘못이야?'라고 일갈하는 건 그저 속편한 비판이다. 문제의 본질은 정당한 소비가 아니라 정당한 소비 이면에 자리한 부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에 있기 때문이다.

 

조현아의 땅콩 회항 사태가 생각 이상의 파장을 몰고 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평범한 사회 구성원이 돈 있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생각 이상으로 공격적이다. 재벌가라는 호화로운 장벽이 위태롭게 흔들리자 필사적으로 성문을 두들기고 고함을 지른다. 한국의 부자들은 대부분 부의 축재에 있어서 윤리적 의심을 피해갈 수 없다. 대부분이 부동산 투기와 원자재의 독점 매입을 통한 이윤 창출을 통해서 지금의 부를 축적했고, 독재 정권의 슬하에서 노동의 착취를 보장 받으며 더욱 비대해졌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는 건 일찌감치 짓눌렸고, 여전히 신음하고 있다. 게다가 나날이 상승하는 사회적 비용을 방관하는 정치적 세력들은 빈부 격차에 계급성을 부여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임세령을 향한 손가락의 저변엔 비윤리적 축재의 역사가 존재한다. 부자가 의심 받는 사회라니, 얼마나 불행한가.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열광하는 사회의 저변엔 가난한 다수의 불만이 도화선처럼 깔려 있다. 게다가 임세령과 같은 재벌가의 후예들을 손가락질하는 대상들은 가진 것 없이 증오까지 끌어안고 있다. 결국 그 손가락들은 정작 자신들이 손가락질하는 대상보다 가까운 주변의 손가락들과 부딪혀 싸우거나 기형적인 집단 논리로 번져나갈 것이다. 사회적인 갈등을 야기시키는 건 결국 부의 대물림을 손쉽게 허하고, 빈부 격차의 확대를 방관하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에서 비롯된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으면 억울해지는 사회란 얼마나 불행한가. 그 불행이 개개인의 무지 탓이라고 몰아가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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