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훈 다운로드 사태를 보면서 생각한 건 사실 그런 잘못을 하는 사람이 지천에 널렀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손쉽게 자신이 다운로드 받아서 본 영화가 어쩌고 저쩌고 쉽게 얘기한다. 불법 다운로드를 받은 주제에 정말 아무런 죄의식 없이 말하고, 언급한다. 불법으로 받은 게 아니라는 위장조차 하지 않는다.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응당 그래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일 게다. 사실 살다 보면 불법 다운로드를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된다는 게 아니다. 다들 매사 일거수 일투족을 칼 같이 공정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갖지 않고서야 타인의 잘못된 선택을  일분일초 단위로 가르치고 훈계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정도는 깨닫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잘못한 게 자랑은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까 최소한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지 잘 알지도 못한 다고 자랑해선 안된단 말이다. 김장훈 다운로드 사태에서 배울 건 바로 그 점이다. 유명하지 않다고 해서 잘못된 행위를 저지르지 않고 사는 건 아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유명하지 않다고 해서 잘못해도 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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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를 이제야 읽었다. 읽어 내려가며 속도가 붙으니 멈출 수가 없었다.  마음 속에 서리가 앉았다가 천불이 나서 죄다 증발했다가 이를 몇 차례 반복하고 나서 책장의 끝에 다다르니 재 같은 감상이 마음 아래 수북이 쌓였다. 마음 한 구석에서 시리게 얼어붙었던 결정이 끝내 뜨겁게 타버린 재의 형상으로 남아서 흩날려버릴 것 같아 무엇이라도 써서 기록하고 싶었다.

 

5 18일은 문득 잊고 살다가도 그 날이 오면 되새길 수 밖에 없는 그런 날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 부모님을 따라 내려간 광주에서 초, , 고를 졸업했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에 처음 들었던 전라도 사투리는 지금도 선명하다. “아따, 너 말 이상하게 한다잉.” 나는 표준어를 쓰는 이방인이었다. 어쨌든 그 친구들은 나와 함께 자랐고, 나 역시 조금씩 사투리가 점차 자연스러워졌을 무렵이 된 중학교 1학년 시절, 5.18을 보게 됐다. 유치원, 여중, 남중, 여고, 남고, 전문대까지,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꽤나 커다란 학원에 속해 있었고 우리는 종종 350원짜리 육개장 컵라면과 150원짜리 자판기 음료수를 사먹기 위해서 대학교 매점을 드나들었다. 그날도 어느 날과 같이 대학교 매점에 들어섰다. 그리고 벽을 봤다. 그날은 5 18일이었다.

 

어쩌면 얼굴이었으리라. 그러니까 그건 얼굴이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는 폭력의 흔적들이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벽을 메우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검지를 엄지손가락에 대고 둥글게 말았을 때만큼의 크기의 사진들이었는데 내 키만큼 높고, 열 걸음쯤 옮겼을 때 끝에 닿을 만큼 넓게 상하좌우로 쭉 나열돼 있었다. 일그러지고 뭉개진 형상들마다 한때 누군가의 체온이 돌고 감정을 담았을 얼굴의 잔상이 미세하게 남아있었다. 그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살벌한 예감에 뒷골이 서늘해진다는 말을 체감했다. “, 글쎄. 사람을 탱크로 밀어버렸당께!” 이미 귓바퀴를 돌아 들어와 흩어졌던 어느 노인의 언성이 메아리처럼 가슴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들이 좀처럼 흩어지지 못하는 연기처럼 매캐하다고 느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원망에는 굴뚝이 없었다. 그래서 아마 노인의 삶도 매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에게도 아궁이가 생겼다. 5 18일에 대해 뚜렷하게 자각하기 시작했다. 직접적으로 겪어보지 못한 내게도 그것은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의문이 됐다. 대체 왜 그랬을까?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어린 시절 매년 5월 즈음이 되면 광주 곳곳에선 최루탄이 터졌다. 충장로나 금남로 시내에서 터진 최루탄 냄새가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두암동의 우리 아파트 창문까지 와 닿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 주변을 지나기라도 한다면 목을 켁켁거리기 일수였지만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연례행사 같은 것이라서 되레 그런 기억이 과거형으로 저물어 아득해졌음을 문득 체감했을 땐 그렇게 됐음이 되레 생소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20대가 되어 광주를 떠나 서울로 다시 올라왔을 무렵에 5.18에 관한 사회적 인식은 조금 변한 것도 같았지만 여전히 노인은 굴뚝을 찾지 못했을 것 같았다. 때때로 '폭도'란 식의 무지한 언변을 뱉어내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건 그들을 탓해봤자 무력해지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건 내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그 이야기가 서울에선 손쉽게 생소해진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한 끔찍한 역사를 안고 사는 사람들의 영토가 있다는 것, 억울했다. 화가 났다. 슬펐다. 달랠 길이 없었다. 굴뚝이 없는 아궁이처럼 타 들어가는 속을 안고 그 시절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는 이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었다.

 

<소년이 온다>를 읽으면서 내가 마주했던 중학교 1학년 시절의 그 벽을 떠올렸다. 누군가에겐 이 소설이 그 벽과 같은 체험이리라. 물론 누군가에게 이 소설은 그저 끔찍하고 과장된 비극적 허구이리라. 하지만 권력의 첨탑 아래 짓뭉개진 얼굴의 반석 위에서 우린 서있고, 살아있다. 살고 있다. 살아서 살고 있다. 소설을 읽으며 나는 나의 무력감과 비루함을 연신 체감하고 되삼켰다. 만약 내가 그 시절에 태어나 광주에 있었다면 과연 나는 총을 매고 누군가를 대신해 내 목숨을 바쳐 순수한 양심을 헌화할 것이라고 다짐하며 기꺼이 행동할 수 있었을까. 나의 양심은 과연 광주에 있었던 그 도청에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 시대적 불의에 저항했다고 평가되는 누군가일 수 있었을까. 나는 대답할 수가 없다. 대답할 수 없어서 고통스러웠다. 여전히 끔찍한 역사는 제 자리를 맴돌고 있고, 뭉개진 얼굴들은 위로를 얻지 못한 채 그 벽 위에 서있다. 나는 여전히 그 벽 앞에 서있다. 5 18일은 올해에도 올 것이다. 그리고 또 지나갈 것이다. 아마도 나는 그 벽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미안하고 불안하기만 한 양심으로 그 벽 앞을 맴돌다 다시 한번 뒤돌아 서서 모른 체 1년을 보낼 것이다. 벌써부터 무력해진 마음이 타 들어간다. 연기가 자욱하다.

 

<소년이 온다>는 좋은 책이다. 이 책을 보고 목격해주길 바란다. 그 벽 앞에 서주길 바란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518일이 통감할 수 역사가 되길 바란다. 사람이 죽었다. 그날 사람을 죽였고, 사람이 죽었다. 그것을 함께 슬퍼하고 분노했으면 좋겠다. 왜 그랬을까?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 벽 앞에서, 함께 묻고, 함께 화를 내줄,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어찌해도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어찌할 수 없는 물음을 던지며 살아가야만 한다. 그럼으로써 산 자의 삶은 더욱 살아갈 만한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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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석 작가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그를 안다. 나는 그를 격하게 아낀다. 그의 작품을 아낀다. 그가 이 세상에 빛과 소금 같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이고, 만들어낼 사람이라고 장담하고 확신한다. 그가 트위터에서 올린 글은 실망스러웠다. 본질적으로 그가 구사한 언어가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언어에는 정확히 구사돼야 할 자리가 있고, 상황이 있다. 그게 아니었다. 실수였다. 하지만 나는 실수라는 말로 그런 상황을 온전히 덮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실수는 최규석 작가가 앞으로도 쭉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일 수밖에 없다. 사과를 했건, 그 사과가 명문이건 간에 그렇다.

최규석 작가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냐, 라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 왜냐면 나는 그 사과를 받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규석 작가가 왜 나한테 사과를 하냐. 그는 내게 잘못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너는 왜 화를 내는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내가 그를 아꼈기 때문이다. 누가 너더러 그를 아끼라고 하였더냐, 라고 묻는다면 그의 작품이 나로 하여금 그를 아끼게 만들었다고 답하련다. 그렇다. 나는 그의 작품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수도 있는 실수를 그가 스스로 저질렀다는 게 화가 났다. 그의 실수 혹은 오류를 빌미로 그를 땅에 묻고 이 세상으로부터 꺼지게끔 하려는 게 아니다. 그의 사과는 적절했고, 인정할만하다. 하지만 나에겐 그를 용서할 자격이 없다. 그가 구사한 언어의 피해자는 K 대학교에 다닌다는 32마리의 싸가지 없는 어린 수컷놈들이 싸질러 놓은 거지 발싸개 같은 음담패셜의 대상인 여자들일 것이다. 직접적인 대상이 누구였건 간에 그런 패악질을 잔뜩 퍼질러놓은 단톡방을 두고 ‘표현의 자유’라는 개념을 내포한 두둔을 한 건 정말 어리석은 패착이었다. 그건 오만이었다. 내가 뱉은 말은 공정하고 확고하다는 자아의 믿음에서 비롯된 오만한 발언이었다. 폭투에 가까운 실언이었다. 다행인 건 스스로가 그걸 빨리 깨달았고, 빨리 사과했으며 빨리 반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사과를 높이 산다. 그러니 나는 당분간 그의 사과 이후의 태도를 지켜볼 것이다. 물론 내가 아는 최규석의 작품들은 그가 결코 어리석고 패악적인 인물이 아닐 것임을 여전히 믿게 만든다. 최소한 나에겐 그 정도 믿음이 있고, 여전히 그의 작품을 지지하며 앞으로도 그의 작품이 계속되길 염원할 것이다. 고로 그의 사과에 열광하는 무리들의 멱살을 잡고 밀어내고 싶다. 지금은 최규석작가의 사과에 열광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그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나가는 것을 뒤따라가주는 것이 예의다. 그럼으로써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버리려는 무리들로부터 그를 지키고, 그가 스스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끝까지 걸어나갈 수 있도록 지켜줘야 한다. 부디 이번 일이 최규석 작가의 경력을 보다 단단하게 매만질 수 있는 경험이 되길 기원한다. 나는 그의 잘못을 잊지 않고 그의 작품을 계속 지켜볼 것이다. 그것이 진짜 그를 지지하는 독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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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형이 조심스럽게 카톡을 보냈다. ‘페북으로 쌍용차 후원 릴레이를 하는데 다음 타자로 널 지목해서 태그해도 되겠니?’ 그러라고 했다. 1만원을 쌍용차 후원 계좌에 입금하고 응원의 메시지를 남긴 후 관심 있는 지인 두 사람 이상을 추천하면 된다고 했다. 어쩌다 보니 대략 한 달 가까이 시간이 지나서야 기억이 났다. 기억난 김에 입금하고자 했다.

하지만 1만원이 아니라 10만원을 입금하고, 다음 타자는 지목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내가 10명의 후원을 대신했다고 생각하련다. 괜히 누군가를 추천해서 부담을 안겨줄 수도 있고, 이미 다른 방식으로 후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만약 당신이 쌍용차 해고자들에 대한 후원에 관심이 있다면 동참해줬으면 좋겠다. 누군가를 추천하지 않았지만 이 글이 누군가 기꺼이 참여할 수 있는 계기의 창이 되었으면 좋겠다. 저 분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언젠가 내가 혹은 나와 가까운 누군가의 처지가 될 수 있음을 공감하고 기꺼이 저 투쟁을 응원해줬으면 좋겠다.

방법은 어렵지 않다.

[농협 3510598588683 김정우] 계좌에 1만원을 후원하고 응원의 메시지를 남겨주면 된다. 응원의 메시지가 주는 힘도 대단할 것이다. 

우리에겐 지금 거대한 정치적 패악을 뒤바꿀 동력도 필요하겠지만 당장 벼랑으로 내몰린 일상을 구제할 수 있는 온기 또한 절실하다. 그러니 그 온기를 전하고 누군가에게 폼 나게 자랑하시라. 이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전파하고 그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간지 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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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훈 인터뷰

interview 2015. 2. 8. 02:30

거침 없이 말했다. 언뜻 가볍게 들렸다. 하나 곱씹을수록 명확했다. 주지훈은 똑부러지게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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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의 집과 사무실과 가게들이 오픈하우스 서촌이라는 이름을 걸고 문을 열었다. 지난해에 이어서 올해 또 한번, 벌써 두 번째 손님맞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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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LESS BLOSSOM

조선의 왕을 위해 피어났던 궁중채화는 왕실의 몰락과 함께 져버렸다. 하지만 지금 다시 궁중채화가 피어나고 있다. 조선의 임금이 아닌 만인을 향해서, 정성 어린 손끝에서 다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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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USUAL GIFT

자비에 돌란을 기억하라

각본을 쓰고, 연출도 하고, 연기도 하고, 편집도 한다. 그리고 불과 26세의 나이로 전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됐다. 자비에 돌란에겐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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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준 인터뷰

interview 2015. 2. 7. 18:34

for ten years from now

꽃을 피우다

때가 되면 꽃이 피듯이 때가 되면 주목할만한 신인이 등장한다. 10년 뒤, 오늘을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길 기대하는 배우 서강준은 그렇게 내일을 본다. 서서히 만개하는 꽃봉오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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