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를 추스르지 못하는 남자는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스스로 파괴한다. 그로 인해서 주변의 모든 것으로부터 스스로 동떨어진다. 그에게 세상은 거대한 쓰레기통과 같다. 패악을 자행하는 이들은 역겹고 그들에게 복무하듯 살아가는 약자들의 무기력도 꼴사납다. 그 분노의 뿌리는 개인적인 사연에 닿아 있다. 그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는 상실의 뿌리가 그의 화를 부추긴다. 메울 길이 없다. 그런 어느 날, 한 여인을 만났다. 울화가 치민 채로 들이닥쳤던 어느 가게의 한 구석에서 무너져있던 그에게 그녀가 말을 걸었다. 조셉(피터 뮬란), 한나(올리비아 콜맨)를 만나다.
서로에게 이방인이었던 두 남녀의 만남은 모든 인연과 마찬가지로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된다. 좀처럼 자신의 화를 이기지 못하던 조셉은 그 모든 화를 스스로 감내하듯 받아들이는 한나를 만나 새롭게 거듭나기 시작한다. 한나에게 마음을 열어나가던 조셉은 그녀의 미소 뒷면의 극악한 현실을 대면하게 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종종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해내야 할 무언가를 생각하게 된다.
<디어 한나>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한 남녀에 관한 사연이다. 자신의 삶을 채우던 절반의 희망을 잃어버린 조셉은 남은 자리에 절망을 한 가득 채우며 살아간다. 자신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는 폭압으로부터 자유롭길 갈망하는 한나는 매일 같이 그 무기력한 현실을 체감하며 살아간다. 그들에게 삶이란 언제부턴가 요원해진 단어였다. 두 사람은 거칠고 성기게 조우하지만 결국 애틋하고 절실하게 서로를 당긴다. 거대한 결핍으로 자라난 가시를 세우던 남자와 끔찍한 폭력의 공허에 시달려 텅 빈 삶에 움츠려 들던 여자는 서로를 통해서 가시를 꺾고, 몸을 세운다.
두 남녀의 만남, 비극 속에서 샘솟는 희망의 여지, 이는 사실상 암담한 터널 같은 여정을 앞두고 있다. 영화는 어줍잖게 희망이나 긍정을 논하지 않는다. 지독한 비극에 내몰린 이들에게 어쩌면 지극히 당연할 수 밖에 없는 범위의 선택을 담담하게 내민다. 그래서 더욱 충격적이다.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라는 희망만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비극의 질곡으로 인물을 내려 보낸다. <디어 한나>는 비극을 외면하지 않음으로써 희망을 직시하는 영화다. 운명적인 태도로서 희미한 긍정으로 비극을 덮는 대신, 그 비극을 돌파하는 방식으로서 비극을 극복해낼 수 있음을 직시한다.
어쩌면 충격적인, 허나 지극히 그러할 수 밖에 없는 결말부의 한 대목에 다다른 대부분의 관객들은 무너져 내린 마음을 쓰다듬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비극이라기 보단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디어 한나>는 비극을 뛰어넘기 위해서 맞불 같은 비극을 선택한 여인의 용기와 그 용기를 북돋아준 한 남자의 새로운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끔찍하게 처연하지만 아연하게 아름다운, 마음을 후려갈기는 힐링 무비다.
건축설계를 하는 승민(엄태웅) 앞에 대학교 1학년 시절 알고 지냈던 동창 서연(한가인)이 찾아온다. 불쑥 나타난 그녀는 대뜸 제주도에 집 한 채를 지어달란다. 난색을 표하던 승민은 결국 이를 수락하게 되고 두 사람이 재회한 현재로 인해서 과거의 승민(이제훈)과 서연(수지)이 그들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삐삐로 소식을 전하고, 무스로 머리를 넘기고, 펜티엄 1기가 메모리가 대단하게 느껴지던, 90년대에 그들은 만났었다.
<건축학개론>은 그 누구라도 결코 지나쳐버릴 수 없었던 첫사랑이라는 아릿한 기억에 관한 소묘다. 무엇보다도 첫사랑을 환기시키는 로맨스물의 제목이 <건축학개론>이라니, 생경하지만 그만큼 강렬하다. 건축과 로맨스의 상관관계는 대학 새내기 남녀의 인연이 건축학과의 건축학개론 수업을 함께 듣게 되면서 설계된 데서 비롯된다. 태어나서 줄곧 서울에서 살았던 승민과 대학 진학으로 인해서 제주도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서연은 서울 전도에서 한 점을 차지하는 정릉에서 만나 인연으로 거듭난다. 완벽하게 남이었던 두 남녀는 ‘건축학개론’의 수업을 함께 듣고, ‘정릉’에서 사는 덕분에 남이 아닌 관계로 발전한다.
<건축학개론>은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첫사랑이라는 한 순간에 대한 송가다. 그 배경이 되는 90년대의 풍경은 그 기억을 보다 아련하게 수식하는 미장센이다. 21세기에 이르러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들, 존재하나 점점 밀려나가는 것들 혹은 꾸준히 외면 받듯 주변에 자리하는 것들. “죽은 걸 되살려주는 거잖아.” 영화 속 대사처럼 <건축학개론>이 환기하는 건 우리가 지나온 혹은 지나쳐버린 어느 시절에 대한 기억이다. 영화 곳곳에 깨알 같이 박혀있는, 장치된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자리하며 그 시절의 공기를 채운 그 이미지들은 결국 그 시절의 한 기억을 완벽하게 재생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영화에 복무한다. 단지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지키고 재현함으로써 기억의 환기를 부추긴다는 것.
첫사랑이라는 필연적 비극을 그린 이 영화는 감정을 건축적으로 착실히 쌓아나간다. 호기심에서 시작되어 설렘으로 번지고, 애절하다가 문득 두려워져 끝내 피지 못하는 첫사랑의 기억. 그리고 10여 년을 훌쩍 넘긴 남녀가 각자의 사연을 안고 서로에 대한 인연을 증축해나가며 그 시절에 완성하지 못했던 감정의 도면을 다시 한번 따라가는 순간의 아릿함과 그 끝에서 마주할 아련함.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이라는 인류 공통분모의 기억을 통해서 노스탤지어의 공감을 한껏 자극하는 영화다. 다만 감상적이거나 이상적이지 않은, 현실적인 설계와 이성적인 시공으로 완성한 현재의 멜로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과연 그럴까. 하지만 확실히 “우리 모두는 분명 누군가를 첫사랑했다.” 사랑 받을 수 없었던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사랑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누구나 그렇게 ‘기억의 습작’을 품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습작을 넘겨 새로운 기억을 그려낸다. 그렇게 쌓이고 쌓여 인생이 되고 삶이 된다. 우린 수많은 기억의 습작을 지나오고 지나치며 현실을 살고 있다. 그러니 누구라도 그 시절이 그리울 수 밖에. 현실은 언제나 완벽을 바라기에 치열하고, 과거는 그만큼 관대하게 기억된다. 그 그리움은 결국 현실에서 취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영원히 머문 시절로 보존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는 이별한 과거를 여운처럼 돌아보며 현실을 버틴다. <건축학개론>은 그 애잔한 노스탤지어를 향한 성숙한 인사다. 사랑할 수 없었던 과거를 되새기며 현실을 지키고자 사랑한다. 그 시절의 사랑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영화는 그 아련한 기억을 통해서 현실을 되짚게 만든다.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는 신용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파산을 방조하는 사회의 방치 속에서 파멸하고 유령이 되어버린 어느 개인이 위장을 통해서 삶을 갱신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끝내 괴물이 되어버린 것을 발견하게 되는 미스터리 추리물이다. 이는 단지 일본 내의 문제가 아닌 자본주의 신용 사회로 접어든 한국의 문제이기도 한데, 변영주 감독의 <화차>는 이에 대한 서술을 간결하게 다듬고 미스터리 추리물이라는 장르적 밀도를 높이는데 각색을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캐릭터 설정과 관계에 작은 변주를 가하지만 전반적으로 원작도 살고, 영화도 사는 인상이다. 자욱한 미스터리의 지배력이 느껴지는 가운데, 결말부에 다다라 보다 강도 높은 서스펜스의 정곡을 찔러 넣고 끝내 페이소스의 잔해를 드러낸다. 과감한 각색과 심도 있는 연출이 돋보인다. 끔찍하고, 처참하며, 처연하다.
브라이언 셀즈닉의 <위고 카브레>를 영화화한 마틴 스콜세지의 <휴고>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움직이는 영상 수준이었던 영화에 예술적인 숨결을 불어넣은 진정한 영화의 창시자 조르주 멜리에스에 관한 영화다. 3D영화라는 현대적인 매체를 통해서 영화의 기원이 된 뤼미에르 형제의 그 영상을 비롯한 무성영화의 레퍼런스들을 목도하는 건 대단히 놀라운 체험이다. <휴고>는 강요에 가까운 예찬 대신 영화에 대한 애정과 경의를 담아 당신을 영화라는 세계로 인도하려 한다. 3D영화로서 최상의 기술적 완성도를 자랑하고, 텍스트와 삽화로 이뤄진 원작을 영화로서 승화해내는 이 작품이 영화라는 예술 자체에 대한 오랜 역사를 성실하게 기술하는 동시에 그 자체의 의미를 온전히 전달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영화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고전의 발굴과 복원 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며 끊어진 영화의 역사를 이어나가는 마틴 스콜세지는 <휴고>를 통해서 영화 그 자체를 오마주한다. 거장의 진심에 경의를 표한다.
“내가 공무원 출신 아입니까!” 그렇다. 원래 그 남자, 최익현(최민식)은 밀수업자들에게 삥이나 뜯는 부산 세관이었다. 물론 혼자 해먹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팀원들의 비리 행위에 총대를 메고 옷을 벗을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밀수업자들의 필로폰을 입수한 그는 건달과 손을 잡고 이를 일본에 유통해서 한몫 챙기길 시도한다. 그래서 만난 것이 바로 부산의 내로라는 주먹 최형배(하정우)다. 그리고 경주 최씨 충렬공파 최익현은 직감한다. 그가 자신보다 항렬이 낮은 집안 사람임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렇게 그는 세력을 자랑하는 건달 두목의 대부가 된다. 1980년대의 일이었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는 노태우 전대통령이 선포한 ‘범죄와의 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품이다. 그러니까 ‘범죄와의 전쟁’은 그저 영화의 시대상을 짐작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동원된 것에 가깝다. 부산을 배경으로 둔 건달들의 행태를 그린 작품이기는 하나 이 작품을 단순히 갱스터 무비,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조폭 영화라고 정의하긴 아쉽다. 1980년대, 한국의 근현대사를 헤쳐온 아버지들 가운데 오늘날 일가를 이룬 어느 아버지의 진창 같은 일대기를 조명하는 영화라는 쪽이 보다 유력하다. 족보가 인맥이 되던 시대, 요즘의 관점에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시대의 틈새에 손과 발을 끼워 넣고 매달리며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오르는 법을 배운 한 남자가 어떻게 한 시대를 관통해왔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세관에서 밀수업자 삥을 뜯었다가 조직에서 팽 당할 위기에서 밀수된 필로폰을 빼돌려 독립한 최익현은 최형배를 만나 그의 대부 노릇을 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져든다. 최형배가 지닌 건달의 가오가 자신의 것이기도 한 것처럼 형님으로 군림하려 한다. 하지만 최익현의 가오는 곧잘 무너진다. 나름대로 곧잘 흉내를 낼 뿐, 흉내 이후에 보여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건달의 세계에 출입하지만 결국 건달의 세계를 겉도는 반달, 즉 일반인도 건달도 아닌 박쥐 같은 존재가 된다. 영화의 코미디 감각도 이 부근에서 살아난다.
경주 최씨 충렬공파의 종친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건달 두목의 대부를 자처하게 된 한 남자가 그 세계에 뛰어들어 벌이는 로비 행위는 오늘날 스크린 너머에서 이 행위를 지켜보게 될 관객에게는 좀처럼 진지해지기 힘든 우스꽝스러운 콩트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검사의 수사망을 압박하고자 동원하는 인맥이 종친회에서 만난 노인의 친척 검사이며 그것도 모자라서 빽이 될만한 종친들을 찾아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해나가는 최익현의 모습은 그야말로 코미디다. 또한 당대의 시대에서 나름의 가오를 잡으며 살아가던 건달 최형배와 그 무리들에게 뒤섞인 최익현의 앙상블은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을 보는 것마냥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다 결국 피를 본다. 그들 사이에 어떤 선악의 관점은 필요하지 않다. 어울리지 않는 공생관계에서 빚어지는 어설픈 합리는 때때로 웃음을 야기하지만 덕분에 종종 살벌하게 얼어붙는다.
코미디가 감상의 리듬을 좌우하는 가운데, 노스텔지어로 가오를 잡다가도, 서슬 퍼런 서스펜스가 때때로 쑥 들어온다. 무엇보다도 이는 영화를 쥐고 흔드는 최민식의 위력적인 연기 덕분이다. 껍데기 같은 자신의 존재를 포장하고자 안간힘을 쓰던 사내가 한 순간 쫄아서 무너지는 광경, 희극과 비극을 아우르는 최민식의 연기는 가히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아우르는 필요조건이다. 반대로 하정우는 최민식이 좌우로 흔드는 영화의 중간중간에 쐐기를 박아 넣으며 순간적인 긴장감을 불어넣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입증한다. 일종의 충분조건이랄까. 조진웅과 마동석을 비롯한 전체적인 캐스팅에는 어떠한 거품도 없다. 다들 자신의 위치에서 적절한 그림이 되어 무언가를 해낸다. 무엇보다도 조직의 2인자 박창우 역할을 맡은 김성균과 검사로 등장하는 곽도원은 각각 발굴이며 발견이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는 결국 한 남자가 구시대의 구멍난 체계를 혈연이라는 담합과 치열한 생존본능을 앞세워 유린하고 착복하며 끝내 생존하여 자신의 일가를 이루는 과정을 살피는 시대극에 가깝다. 가진 것 없이 가문의 이름으로 삶을 연명하던 껍데기 같은 사내는 그 껍데기를 통해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고 끝내 그렇게 키워낸 후손을 알맹이 삼아서 끝내 껍데기를 채운다. 이는 곧 현재 한국에서 중산층 이상의 일가를 이룬 오늘날의 아버지들이 자행한 가족사 세탁의 뿌리를 들추고 살피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두 전작을 통해서 리얼리즘적인 연출적 장기를 드러낸 윤종빈 감독은 탁월한 시대 묘사와 서사적 배열을 통해서 현실 같은 영화를 만들어냈고, 배우들은 또렷한 연기로 그 시대적 공기를 채워냈다. 우스꽝스럽게 처연하고, 신랄하게 저린, 그 마지막 인상은 여전히 우리 삶을 좌우하고 있는 어느 아버지들이 채운 알맹이를 감싼 껍데기를 추적한다.
일본의 한 지방 중학교에 부임한 국어 교사 미카코(아야세 하루카)는 남자배구부 고문을 맡게 된다. 나름의 열의를 갖고 훈련을 지도하려는 그녀와 달리 배구의 경험조차 없는 다섯 명의 부원들은 그저 새로운 여자 선생님이 고문으로 왔다는 사실에 그저 희희낙락이다. 이에 배구 연습에 대한 열의를 심어주고자 미카코는 지역 대회에서 1승을 하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아이들은 이에 가슴을 보여달라는 발칙한 제안으로 응수한다. 수락도 거절도 하지 못하고 어물쩡 넘어가게 된 그녀와 달리 아이들의 열의는 나날이 불타오르고, 이를 지켜보는 미카코는 보람을 느끼면서도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야동’ 제목이나 됨직한 <가슴 배구단>은 <몽정기>와 <워터 보이즈>를 적절히 배합시킨 듯한 청춘 스포츠 코미디물이다. 자전거 페달을 밟아 속도를 내며 공기 중에서 가슴의 감촉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 성적인 호기심이 팽배한 10대 중학생들의 미워할 수 없는 덜 떨어진 행태를 지켜보는 재미와 그런 아이들을 나름의 열정과 애정으로 돌보며 한층 성숙시켜나가는 여교사의 화학 작용이 바로 이 영화의 본체인 것. 예측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 스토리텔링을 진전시켜나간다는 점에서는 지극히 빤하지만 의도대로 기승전결을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는 정직하다.
<가슴 배구단>은 가슴을 보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불타오르는 소년들과 이를 지도하는 선생의 딜레마가 그 자체로 코믹한 소동극이기도 하지만 그들 모두의 성장과 성숙을 다룬 성장극이기도 하다. 가슴을 보겠다는 열의로 배구에 매진하던 소년들은 점차 향상되는 자신들의 기량을 통해서 성취감을 얻어가고 단순한 수단으로 여기던 배구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또한 자신의 과오에 대한 강박을 떨치지 못했던 미카코 역시 아이들을 지도하던 중 불거진 오해로 인해서 다시 한번 비슷한 상황을 맞이하지만 결국 이를 이겨내고 진정한 삶의 의지를 얻게 된다.
순진한 소년들의 정서만큼이나 순수한 영화의 정서는 마냥 선하다기 보단 선한 이들로 이뤄진 정서적 합리를 제시한다. 강스파이크를 노리며 크게 휘두르는 절정을 연출하는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하고 기분 좋은 웃음으로 리시브를 받아 올린다. 물론 그만큼 결정타가 없다는 인상도 들지만 결코 경기를 내주지 않는 안정적인 운영력이 돋보이기도 한다. 일본 청춘 코미디 특유의 낙관이 지배하는 인상도 들지만 그로 인해서 발생하는 유쾌한 웃음이 귀엽고 깜찍해서 외면할 수 없다. 이 영화로 일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아야세 하루카의 귀여운 매력도 영화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는 주요한 요소 중 하나다. 특히 가슴에 배구공을 넣고 유쾌하게 손을 흔드는 소년들의 안녕은 인상적인 여운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