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특유의 동화적인 낭만을 품은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은 사랑스럽다는 단어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시킨다.
<겨울왕국>은 동화적인 세계관을 빌려서 특유의 낭만적인 해피엔딩을 구축하는데 능한 디즈니의 장기가 여실히 반영된 애니메이션입니다.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모티프로 둔 작품이죠. 하지만 원작과 기본적인 설정 자체가 다르며 이야기 양상도 완전히 판이한 작품입니다. 일종의 ‘참고작’에 가깝다고 볼 수 있죠. <겨울왕국>에선 사악한 ‘눈의 여왕’이 등장하지도 않고, 남매에 가까운 소년과 소녀 대신 자매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어둡고 우울한 원작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죠. 디즈니 특유의 낙관적인 낭만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입니다.
사실 선악의 구별이 뚜렷하고 결말에 대한 예감이 명확하다는 점에서 이야기적인 흥미가 뛰어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습니다. 하지만 캐릭터의 개성이 뚜렷하고 스크린을 채우는 이미지의 완성도가 그런 결점을 보완해주고 있죠. 특히 살아있는 눈사람 캐릭터인 올라프의 등장은 <겨울왕국>이란 작품을 보다 훌륭하게 이끌어내는
. 개인적으론 최근작 중에선 <겨울왕국>보다 <라푼젤>이 보다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라푼젤>보다 <겨울왕국>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훌륭한 뮤지컬 넘버를 만들어내는데 일가견이 있었던 디즈니의 저력을 보여주는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말이죠. <겨울왕국>의 OST는 역대 디즈니 클래식의 사운드트랙 가운데서도 손에 꼽을 만한 수작으로 회자될 겁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위키드>에서 초록 마녀 역을 맡은 이디나 멘젤의 킬링 넘버 ‘ Let It Go’는 이 작품이 지닌 최고의 자산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이 들 정도이지요.
무엇보다도 <겨울왕국>에서 흥미로웠던 건 디즈니가 자신의 세계관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공주와 개구리>(2009)부터 <라푼젤>(2011) 그리고 <겨울왕국>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성공적인 결과물을 연이어 내놓고 있는 지난 몇 년간의 디즈니는 낙천적인 해피엔딩의 강박을 넘어서 ‘지금’이라는 시제에 어울리는 감각과 철학을 반영한 작품들을 거듭 발표하고 있죠. 어쩌면 디즈니가 인수한 픽사의 브레인이었던 존 래세터를 디즈니의 총괄 책임자로 임명한 것이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동력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겨울왕국>은 익히 예상되는 왕자와 공주의 러브스토리로 극을 밀고 가지 않습니다. 특히 눈에 빤히 보인다고 믿었던 결말을 아주 살짝 비틀면서 대단히 참신한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죠. 디즈니 특유의 낭만적인 정서를 배반하지도 않고요. 자신의 세계를 참신하게 보존해냅니다. 그래서 <겨울왕국>의 결말은 정말 좋은 작법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공주와 개구리> 이후로 디즈니에선 대단히 운명에 함몰되지 않는 진취적인 여성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 역시 흥미롭습니다. 21세기의 디즈니가 찾은 마법의 비결은 여성이 아닐까 싶어요. 공주가 아니라 말이죠.
저는 지금까지도 초등학교 시절에 극장에서 <라이온 킹>을 봤던 기억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제 손을 잡고 직접 극장에 데려가셨죠. 아마도 어린 아들에게 보여줄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셨나 보죠. 그래서 만약 지금 저에게 어린 아들이나 딸이 있었다면 그 아이들의 손을 잡고 <겨울왕국>을 보러 갔을 겁니다. 좋은 작품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지만 분명 좋은 추억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면 착한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니까요. <겨울왕국>만큼 사랑스러운 결정을 지닌 작품을 아이들과 함께 볼 기회도 드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그래비티>를 보고 난 사람들은 마치 우주에 다녀온 것 같았다. 우주를 그린 영화는 많았지만 <그래비티> 같은 우주 영화는 없었다. 하지만 당신이 다녀온 그 우주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지난 10월 17일 <그래비티>가 개봉된 이후로 지금까지 세상은 <그래비티>를 본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는 것 같다. 혹은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그래비티>를 본 사람과 그럴 수 없었던 사람으로. <그래비티>의 감독 알폰소 쿠아론이 입체적인 사운드 시스템을 갖춘 돌비 아트모스(Dolby Atmos) 상영관에서 <그래비티>를 관람하길 적극 추천한 덕분에 서울에 단 두 개밖에 없다는, 돌비 아트모스 시스템이 완비된 상영관의 예매율이 천정부지로 치솟기도 했다. 영화를 즐기는데 있어서 보다 나은 영사 방식이나 사운드 시스템을 찾아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래비티>의 경우엔 그와 유사하나 다른 욕망이 읽힌다. <그래비티>를 정의할 때 한결 같이 동원하는 단어는 ‘체험’이다. 그러니까 아이맥스 상영관이나 돌비 아트모스 상영관이 <그래비티>를 좀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선택적 방법이 아니라 <그래비티>를 ‘제대로 볼 수 있는’ 필수적인 방법, 즉 최적화된 시스템이라고 인정한다는 것. 사실 모든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 체험의 산물이다. 여기서 체험은 두 종류로 나뉜다. 현실에서 결코 할 수 없는 비현실에 대한 체험과 현실에서 경험할 기회를 얻지 못한 현실적인 행위나 감정에 관한 체험. 그렇다면 우리는 <그래비티>를 통해서 무엇을 체험했을까?
일단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비티>를 대단히 사실적인 영화로 인식하는 것 같다. 실제로 알폰소 쿠아론은 <그래비티>를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게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러니까 하이퍼 리얼리즘의 영화를 추구했다는 것. <그래비티>는 프리프로덕션(Pre-production) 단계에서 100% 프리비즈(Pre-visualization)’을 거쳤다. 프리비즈란 전반적인 영화의 비주얼을 계획하고 그 실현 방법을 디테일하게 구성하는 방식인데 비주얼 전반의 연출 계획을 세세하게 설계하는 사전 작업에 가깝다. 일종의 도면 작업인 셈. 하지만 ‘당장 애니메이션으로 발표해도 상관없을’ 결과물을 원했던 알폰소 쿠아론의 요구에 의해서 <그래비티>의 프리비즈는 집을 짓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프리비즈 단계에서 100%에 가까운 CG 작업으로 완벽한 비주얼을 구축한 것. 그리고 배우들은 집에 들어가듯, 완벽하게 구축된 이미지 안에서 철저하게 동선이 통제된 채 연기했다. 그렇게 연기한 배우들의 이미지를 화룡점정처럼 찍어 넣는 방식으로서 <그래비티>는 완성됐다. <그래비티>의 주인공이 우주라고 일컫는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알폰소 쿠아론의 구상에서 <그래비티>의 우주는 관객들에게 그저 밤하늘을 바라보듯 멀게 느껴져선 안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자신이 놓여 있다고 느껴지는 공간이어야 했다. 실제로 산드라 블록은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매일 같이 10시간 정도의 시간을 수많은 LED 패널로 둘러싸인 ‘라이트 박스(Light Box)’라는 특수한 세트에서 갇히듯 연기해야 했는데 이를 두고 제작진은 라이트 박스가 마치 산드라 블록의 새장 같다며 ‘샌디의 새장(Sandi’s cage)’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주에서 고립된, 그리고 끝내 홀로 남겨진 스톤 박사의 외로움은 실제 배우의 감정이 이입된 결과인 셈이다. 그리고 라이트 박스 안에서 세트의 벽에 지구나 국제우주정거장(ISS) 등 배우가 바라보는 시야에 해당되는 우주의 이미지를 투사함으로서 배우에게 우주라는 공간성을 인식시키고자 했다. 배우의 시점을 관객과 동일하게 만들었다. 이는 곧 배우들의 시점을 관객의 시야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이나 다름없다. <그래비티>는 이런 인물이 바라보는 시점을 대변하는 시점숏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객석의 중력을 무력화시킨다. 스크린 밖이 아니라 안에서, 영화에 동참하고 있다는 착시와 착각을 부추긴다. 게다가 진동과 저주파음 그리고 기습적인 묵음 효과를 교차시킨 사운드 전략을 통해서 공기가 없어서 음파의 전달이 불가능한 우주에서의 청각적 체험을 극대화시킨다. 시각과 청각이라는 공감각적인 체험은 <그래비티>를 지극히 현실적인 영화로 둔갑시켰다.
하지만 <그래비티>는 몇 가지 사실을 왜곡시킨 영화다. 일단 영화 속에서 조지 클루니가 연기한 코왈스키는 우주에서 우주배낭 추진체(MMU)를 타고 자유 자재로 유영한다. 그는 그 추진체를 타고 우주미아가 될뻔한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를 구출하며 국제우주정거장까지 그녀를 끌고 간다. 이는 모두 허구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KARI)의 김해동 박사에 따르면, 나사(NASA)의 우주인들이 착용하는 우주복엔 모두 추진장치가 달려있다. 다만 잠깐 동안의 이동이 가능한 소량의 연료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만한 장거리 유영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견해다. 물론 코왈스키가 타고 다니는 배낭식 추진장치가 영화를 위한 설정이었다면 이야긴 달라진다. 하지만 허블망원경 주변부에서 국제우주정거장(ISS)으로 그리고 중국 우주정거장 텐궁까지 다다르는 여정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추진장치나 소유즈만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엔 세 지점의 자전 궤도가 지나치게 멀고 궤도의 접점에서 마주칠 확률도 희박하다. 이 영화의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중요한 설정들이 모두 허구인 것이다.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영화적 오류들에 대한 예시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비티>는 나사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영화다. 실제로 촬영 현장엔 나사와 연결되는 직통전화가 있었고, 산드라 블록은 촬영 중 의문이 생기면 시간을 가리지 않고 수화기를 들었다. 결국 세계 최고의 우주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은 우주 영화가 사실(fact)대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건 그 비사실적인 결과물이 고의라는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그래비티>의 거짓말을 통해서 놀라운 사실(reality)적인 체험을 할 수 있게 됐다. 결국 영화의 사실성에 대한 전제 조건은 현실의 복제가 아니란 말이다. <그래비티>라는 영화적 체험이 위대한 건 이 영화가 주는 체험적인 쾌감이 숭고한 감동으로의 착지를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테크놀로지의 생존 방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 우선시돼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이 영화가 하고 있다고 본다.” 김지운 감독의 말처럼 진화한 테크놀로지의 과시도 중요하지만 테크놀로지의 진화가 어떤 영화적인 감동을 더해줄 수 있는가라는 고민이 더욱 중요하다. <그래비티>는 ‘놀라운 거짓말’로 ‘믿을 수 없는 감동’을 전한다. 무중력의 우주를 체험하게 만들지만 결국 두 발 딛고 살아야 하는 현실의 의지를 고취시킨다. 용기를 준다. 결국 <그래비티>가 증명하는 건 기술의 진보가 영화의 발전을 촉매할 순 있지만 영화의 발전의 절대적 조건일 수 없다는 교훈이다. 한편 미국의 라이브쇼 <SNL>에서 <그래비티>의 오류 하나를 지적했는데 내용인즉슨, 조지 클루니가 저렇게 오랜 시간 동안 동년배의 여성과 대화를 나눌 리 없다는 것. 이야말로 정말 날카로운 지적 아닌가?
파격적인 동성애 영화로 알려진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그 어떤 멜로보다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러브스토리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지독한 멜로물입니다. ‘이별을 통한 소녀의 성장통’이란 식으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건 영화가 끝날 무렵까지 그 이별이 성장으로 해소되기 보단 통증으로 내려앉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델(아델 엑사르코풀로스)은 길에서 마주쳤던 엠마(레아 세이두)와의 우연한 재회를 통해서 예상하지 못했던 체험들을 거듭해나갑니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것은 물론 아티스트로서의 미래로 나아가는 엠마와 그 주변부의 삶에 종속되기 시작하면서 삶이 예상 밖의 궤도를 돌게 되는 셈이죠.
단순히 성정체성을 깨닫는다는 것 이상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삶의 저편으로 나아가버리는 셈이에요. 결과적으로 아델에게 있어서 엠마와의 이별이란 감정적인 단절뿐만 아니라 경험적인 기회와의 단절로도 이해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죠. 그만큼 이별이라는 진통은 아델의 삶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절망이자 비통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자신이 보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삶의 저편까지 나아가 그 일상에 익숙해질 무렵 다시 원점으로 튕겨져 추방돼버린 셈이니까요.
배우들의 연기가 대단히 좋습니다. 특히 아델 역을 맡은 아델 엑사르코풀로스는 전반적으로 영화의 서사와 함께 인상이 변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줄 정도인데 이별 이후의 감정적 진폭을 드러내는 후반부의 연기는 정말 연기가 아니라 실제라고 믿어질 만큼의 감정적 몰입도를 보여줍니다. 충동적인 계기로 맞닥뜨린 이별에 의한 심적인 고통이 스크린 밖으로도 절절하게 전이되는 기분이죠. 게다가 그 반대편에 선 엠마 역을 맡은 레아 세이두는 거대한 감정적 파고를 형성하는 매개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이별 이후에 남게 되는 애틋함 같은 감정의 끈을 놓지 않음으로써 극적인 페이소스를 극한으로 끌어올립니다. 두 배우의 화학작용 자체가 이 영화의 감정을 입체적인 구조로 이끌어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 영화가 화제가 된 건 대단히 수위가 높은 여성간의 섹스신이 긴 분량으로 등장한다는 점이었죠. 그런데 대단히 적나라해서 한편으론 담담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은밀하고 농염한 연출을 위한 카메라 앵글이 동원되기 보단 사물을 관찰하듯 평범한 프레임 안에서 행위가 목격되는 인상입니다. 오히려 저는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무언가를 먹을 때 보는 이의 욕구를 건드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토마토 파스타를 너무나 맛있게 먹는 장면에선 입 안에 침이 고이는 느낌이기도 했죠. 색욕보다도 식욕이 강렬하게 느껴진다니 좀 묘하지 않습니까? 그건 아마 이 영화가 섹스신을 특별한 영화적 체험처럼 위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동성애라는 소재는 이 영화의 주요한 키워드가 될 뿐, 서사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사안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결말부에서 묘사되는 찰나의 엇갈림을 보면서 ‘운명’이란 단어에 설득 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뒤바꿀 수 없는 결과를 등 뒤에 두고 터벅터벅 걸어가야 하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끄덕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델의 뒷모습을 비추는 엔딩시퀀스의 롱테이크에서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건 그래서입니다. 그 너머의 삶에 대해서 염려하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걸어가길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이죠. 그렇게 그 너머를 살아가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요. 사실 저는 원작의 비극적인 결말보다도 영화의 결말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죽음에 대한 연민보다도 이면의 생에 대한 호기심이 지워지지 않는 여운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한편 영화에선 프랑스의 전인적인 교육 환경을 목격할 수 있는데 학생들이 등록금 인상을 반대하는 가두 시위를 하는 신에서 '민영화를 반대한다!'는 대사가 나올 땐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물론 불법시위라는 목적을 앞세운 과격한 진압 장면 같은 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건 비단 저뿐만이 아닐 것이라고, 문득 생각하게 되네요.
뱀파이어들이 등장하는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좀처럼 목을 물지 않는다. 매혹적인 이미지로 이빨을 드러낼 뿐이다.
‘영원히 산다’라는 말을 뒤집어 봅시다. ‘영원히 죽지 못한다’라고 생각해봅시다. 영원히 산다는 건 그만큼 권태롭고 지겨운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두 존재가 있습니다. 사람이란 단어를 굳이 수정한 건 두 존재가 뱀파이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단히 오래된 존재처럼 말하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1세기 남짓의 경험만이 가능한 인간과 달리 그들은 수 세기 동안 인류의 역사를 살피며 살아왔습니다. 아니, 살아남았습니다. 언제, 어떤 연유로 뱀파이어가 됐는지 몰라도 태초부터 그들의 삶엔 낮이 없었던 것만 같습니다. 매우 평온하지만 은밀하고 때때로 아슬아슬한 그들만의 밤을 수 세기 동안 버텨왔습니다.
일단 뱀파이어라는 소재가 주는 장르적인 기대감을 품고 상영관을 찾았다면 대단히 곤란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짐 자무쉬가 연출한 영화라는 사실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애초에 그런 종류의 기대감을 품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단히 서정적인 리듬감과 시적인 묘사로 특유의 미학적인 시선을 견지해온 짐 자무쉬의 뱀파이어물에서 장르적인 공포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낯선 것이니까요. 그리고 짐 자무쉬 특유의 미학적인 방식은 이 영화가 주목하는 뱀파이어들의 영속성과 맞아떨어지는 측면도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나른한 분위기 속에서 고상하고 우아하게 소모되는 뱀파이어들의 평범한 일상은 때때로 대단한 블랙코미디의 자질을 느끼게 만들기도 하고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Only Lovers Left Alive>라는 시적인 문장은 생각보다 절박하고 짓궂은 제목입니다. 특히 느슨하게 풀려있던 영화의 흐름을 강하게 확 당기는 듯한 결말부 덕분에 이 영화 자체가 대단히 악랄하고 재기발랄한 농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살아남는다’라는 절박한 감정과 직접적인 행위의 중의성을 한번에 깨닫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한편으론 뱀파이어들이 ‘인간 따위가’란 식으로 계급적인 우월성을 드러낼 때 그들이 지닌 고매한 정신이 느껴지지만 인간 세계에 기대서 자신의 삶을 연명해나가는 일상을 거듭 목격하다 보면 멸종을 앞둔 동물의 자존심을 보는 것과도 같은 아이러니가 느껴집니다.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낡아 버린 귀족 가문의 풍경 같기도 하고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됐다고 할법한 존재들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살아왔다고 생각하면 그 자체가 대단한 아이러니이기도 하죠.
나이트신으로만 점철되어 낮은 조도의 색채감으로 채워진 영화의 풍경은 그만큼 정적입니다. 어둠과 어둠을 밀어내는 조명들로 채워진 영화의 몽환적인 풍경과 비현실적인 색감 자체에서 시간의 흐름을 지워버린 듯한 근사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물들만큼이나 영속성을 지닌 듯한 소품들로부터 반시대적인 낭만 같은 것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백미는 캐스팅입니다. 틸다 스윈튼은 그냥 뱀파이어를 섭외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아요. 특유의 신비감과 중성적인 매력이 더해져서 영화의 비현실성을 강화하는 도구적인 역할도 해내고 있다는 인상도 들고요. 반대로 톰 히들스턴은 뱀파이어로서 ‘생존’과 ‘생활’이라는 현실적 화두를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 캐릭터의 조합이 영화 자체의 시공간에 입체적인 감상을 부여하도록 이끄는 것도 같고요. 서사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미아 바시코브스카와 안톤 옐친은 캐릭터의 쓰임새나 표현력이 적절합니다. 결말부에 다다라 비장한 페이소스와 역설적인 냉소를 품게 만드는 존 허트의 존재감도 탁월하고요. 완벽하다고 칭송해도 모자랍니다. 기꺼이 목을 내주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랄까요.
조셉 고든 레빗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잡고, 주연까지 맡은 <돈 존>은 보통 물건이 아니다.
매일 밤 친구들과 함께 클럽을 찾으며 여자를 찾는 남자가 있다. 최상등품의 고기를 고르듯이 점수를 매기고, 최고등급이라고 생각되는 여자에게 작업을 걸고, 춤을 추다가 집으로 가서 섹스를 즐긴다. 그에게 이는 일종의 게임이나 다름없다. 1회용품을 소비하듯이 자연스럽고 거리낌 없이 원 나잇 스탠드를 즐기고, 다음날이 되면 새로운 상대를 찾는다. 도돌이표 같은 밤이 반복된다. 하지만 그 어떤 여자와의 잠자리도 그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다. 그를 위한 환상 속의 그녀는 따로 있다. 클릭 몇 번이면 만날 수 있는 포르노 배우들을 보며 자위를 하는 것이 그 어떤 여자와의 잠자리보다도 그를 만족시킨다. 그런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새로운 여자가 나타났다.
<돈 존>은 할리우드의 미래로 꼽히는 영민한 배우 조셉 고든 레빗의 각본, 연출, 주연작이다. ‘돈 존(Don Jon)’이란 제목의 모티프가 된 건 스페인 귀족 가문의 전설적인 바람둥이 돈 주앙(Don Juan)이라고 한다. 돈 주앙은 카사노바와 달리 자신이 만나는 여자들로부터 혐오를 샀는데 여자를 노골적인 정복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돈 존>의 존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만족할 수도 없는 잠자리를 전전하는 건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자존감의 정복을 위해서다. 그를 충족시켜주는 상대는 인터넷의 포르노 사이트에 널려있다.
‘포르노 중독자’라는 캐릭터의 특성은 인터넷 시대의 폐해를 연상시키지만 <돈 존>은 궁극적으로 관계의 일방성을 지적하고 수긍하게 만드는 영화다. 존에게 있어서 진짜 섹스를 위해 거쳐야 하는 스킨십과 전희의 과정이란 그저 결과를 위한 노동에 가까운 반면, 포르노를 보며 자위하는 것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만족스럽다. 쾌감이란 결과에 닿기까지의 과정이 간편하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가 바바라(스칼렛 요한슨)에게 끌리는 것 또한 쉽게 섹스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점차 존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그 변화는 존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일방적인 관계에 탐닉하던 남자는 자신을 매료시킨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투신함으로써 일방적인 관계의 허무를 깨닫는다. 간편하고 합리적인 방식의 쾌감이 ‘가짜’임을 깨닫는다.
<돈 존>은 계산된 연출 방식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반복적인 패턴을 지닌 존의 일상을 도돌이표 같은 동선과 공간 묘사, 행위를 통해서 묘사하는데 이 패턴에 미세한 변화를 삽입함으로써 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별다른 설명 없이도 효과적으로 이해시킨다. 과감한 인서트컷을 삽입하거나 빠른 컷의 전환으로 두 개의 신을 연결하는 교차 편집 등 편집 방식이 현란하게 느껴지는 신도 더러 있는데 때때로 과장되거나 넘치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재기발랄하고 영리하게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킨다. 무엇보다도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에서 소모될만한 소재를 군살 없는 성찰로 승화시킨 성장드라마로 완성해낸 재능이 놀랍다. 과감하면서도 감복할만한 결말로 다다르는 이야기 방식도 탁월하다. 실로 주목할만한 연출 데뷔작이다. 조셉 고든 레빗, 역시 보통 물건이 아니다. 참고로 중반부에 놀라운 카메오가 등장하니 기대할 것.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뛰어난 이야기꾼의 영화다. 물론 흥미로운 이야기밖에 없는 영화라는 말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공항에서 손짓을 이용해서 대화를 나눈다. 여자는 남자를 마중 나간 모양이다. 친밀한 사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차 앞좌석엔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두 사람의 재회가 이혼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는 끝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같다. 그 끝에서 과연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카메라와 함께 이야기의 문턱을 넘게 되는 순간부터 영화는 예상 밖의 이야기 범위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는 이야기의 운용 방식만으로도 흥미진진한 영화다. 이혼을 앞둔 부부의 입장을 핵심으로 그와 연관된 주변부의 입장을 끌어들이며 극의 너비를 확장해나간다. 단순명확해 보이던 사안이 점차 복잡한 양상으로 확대된다. 평범해 보이던 사연이 주변 인물들의 내밀한 감정과 충돌하고, 그로 인해서 예기치 않게 불거지고 밝혀지는 진실들로 인해서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된다. 평면적인 일상의 기류에 입체적인 변곡점이 형성되고 점진적으로 이야기의 절정이 형성된다. 감독 아쉬가르 파라하디는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도 명확해 보이는 사연의 끝으로부터 가늠하기 힘든 이야기의 방향성을 살핀 바 있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역시 마찬가지다. 끝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영화는 끝을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굴러나간다. 그 예측하기 힘든 방향성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이 영화의 묘미에 가깝다.
부조리극의 양상 자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고, 그 복잡다단한 이야기 흐름만으로도 감정적인 진통이 명확하게 다가온다.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는 뛰어난 이야기꾼에게 가능한 화술과 작법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만드는 작품이다. 물론 단지 그런 이야기 구조에 대한 흥미만을 안겨주는 작품은 아니다. 결말부에 다다라 영화는 명확한 결말을 묘사하는 대신 카메라를 두고 떠나버리듯 롱테이크 기법의 엔딩 시퀀스를 제공한다. 이는 단순해 보이던 도입부 상황과 대비적인, 어떤 것도 불확실해진 결말부의 상황 자체를 아이러니한 여운으로 각인시킨다.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던 상황들의 내면엔 감당하기 힘든 비밀과 켜켜이 쌓인 오해들이 존재했고 그렇게 방치된 비밀과 오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당사자들의 삶을 휩쓸어 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의 진실을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 진실을 알았다는 판단일지도 모른다는 여운으로 가닿는다. 인물로부터 시선을 거두지 않는 엔딩 시퀀스의 이미지는 그래서, 그렇게 마음을 진동시킨다.
<변호인>은 노무현에 관한 영화이되, 노무현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노무현이란 말을 통해서 환기되고 복기되는 영화인 것 같다. 이 시대의 첨예한 갈등 한복판에 <변호인>이란 영화가 놓여있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제작 초기부터 그리고 영화가 개봉된 지금까지도 <변호인>에 관한 말의 8할도 여기서 비롯됐다. <변호인>이 ‘노무현에 대한 영화’라고 알려지면서 이 영화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정치적인 영화로서 인식된다. 하지만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인 시절의 영화라기 보단 고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인 시절에 변호를 맡았던 부산 학림 사건, 흔히 말하는 ‘부림사건’에 관한 영화로서 설명할 때 보다 명확해지는 작품이다.
‘부림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평범한 독서모임을 운영하던 대학생들이 빨갱이 조직원으로 몰리면서 강제 연행되어 악랄한 고문을 당하고 강제적인 자백을 실토한 뒤 재판에 회부됐고 이미 정해진 각본의 결말을 향하듯 일방적인 분위기로 강행된 재판 속에서 노무현을 비롯한 당시의 변호인단 3인이 조작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불공정한 재판에 항의했지만 부당한 형 집행이 이뤄졌다. 당시 구속된 22인 중에선 부산지역의 대학생을 비롯해서 교사와 직장인들도 포함돼있었는데 개중의 몇몇은 재판 당일에서야 처음 대면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권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서 활용했던 대국민 빨갱이화 조작 사건, 이른바 용공 조작 사건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이 바로 이 부림사건이다.
<변호인>이란 영화가 부림사건을 관통하며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국민과 국가의 관계란 일방적으로 충성을 바쳐야 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 “국민이 곧 주권이다.” 그만큼 국가라는 거대한 울타리를 사유화가 가능한 권력으로 인식하고 이를 남용하는 무리의 부조리한 행위에 대한 고발, 그것이 <변호인>의 주제의식에 가깝다. 사실 <변호인>이 공적인 사건을 환기시키는 묘사의 방식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다고 말하긴 조금 망설여진다. 다만 기본적으로 어긋나있지 않으며 명확한 정황을 되짚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선 나름대로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발화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엿보인다. 어쩌면 폭압적이고 몰염치한 권력의 시대에서 선악의 구도가 명백한 탓에 그 균형 자체를 담아낸다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대에 죄를 물을 순 없겠지만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에 대한 이해도 필요한 건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제대로 작동시키는 건 송강호라는 배우 자체의 존재감이다. 아마 <변호인>은 올해 개봉된 <더 테러 라이브>, <집으로 가는 길>과 함께 배우의 연기력이 영화의 완성도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를 논하기 적절한 사례로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지난 12월 18일에 개봉된 <변호인>은 개봉 첫 주에 약 500여 개의 스크린을 확보했고 관객 170만 명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개봉 전부터 개봉관 확보에 대한 걱정을 비롯해서 흉흉한 소문이 돌았던 영화였다. 개봉 전부터 영화에 관해서 할말이 많은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 영화였다. 개봉 전부터 포털사이트의 평점에선 양극화된 싸움이 한창이었다. 1점 아니면 10점. 절대적인 지지와 절대적인 반대가 맞서는 극단적인 대치 상황. 영화에 대한 감상과 무관한 자기 선언. 이는 바로 우리 사회의 갈등 국면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바로미터나 다름없다.
<변호인>을 관통한 스크린 밖의 관객들의 감상은 과거에 대한 안타까움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 안에서 영화에 대한 신뢰와 지지가 보다 단단해지는 인상이다. <변호인>에 대한 감상의 방향이 실화 자체가 지닌 가혹함에 대한 분노 이상으로 작금의 현실에 대한 호소나 공감으로 확장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아닌 하나의 상징으로서 권장하거나 부정해야 될 무언가가 돼버린 인상이다.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 간의 싸움 안에서 <변호인>은 뜨거운 감자가 되는 것 같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변호인>에 대한 관람 여부를 선거 운동하듯 알리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는 건 시대적인 정의 그리고 보편적인 상식에 가깝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 영화를 ‘노무현에 관한 찬양’이라며 힐난한다. 한편에선 우리가 꼭 봐야할 영화라며 호소한다. 한편에선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면 종북세력이 된다. 한편에선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몰락에 기여하는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호도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그저 한편의 영화가 아니다. 지금 현실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증명하기 위한 필사적인 도구인 셈이다. 자신의 블로그에 <변호인>에 관한 리뷰를 남긴 영화평론가 이동진을 향해서 비판적인 댓글이 달렸다.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인 입장이 없다는 것이 골자였다. 댓글을 남긴 이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드러내야만 하는 것이란 의미일 테다. 그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영화는 그저 영화가 아닌 셈이다.
심지어 다른 한편에선 영화를 관람하지 않고도 싸지를 수 있는 촌평이 쏟아진다. 심지어 ‘공산주의 혁명을 기도했던 반국가 범죄사건’에 대한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위인도 등장했다. 시절이 하수상한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하수상하지 않았던 시절이나 있었는지 눈과 귀를 의심할만한 작태들이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커밍아웃하는 시대에서 <변호인>과 같은 영화가 돋보이지 않고 배길 수나 있을까. 엄밀히 말하자면, <변호인>을 돋보이게 만드는 건 여전히 스스로 불신의 탑을 쌓고 자신만의 국민을 보호하는 공권력이고 그 공권력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과 수익을 보장받는 보신주의자들의 파렴치한 행태에 있다. <변호인>과 그 주변반응을 ‘노무현의 영화’를 두고 벌어지는 갑론을박에 대해서 친노와 일베의 갈등으로 일반화시키는 것 역시 그리 적절한 태도인지는 모르겠다. 이 영화를 둘러싼 공기는 생각 이상으로 포괄적이고 상징적이다. 그냥 이 시대 자체의 양상처럼 보인다.
<변호인>은 어쩌면 누군가의 말처럼 시대를 잘 만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하수상하다 못해서 보고 듣고도 의심할만한 일들이 시시때때로 눈과 귀를 바늘처럼 찌르고 들어온다. 하지만 <변호인>이 잘 만날 시대가 하루 이틀이었나. 아마 한반도에 대한민국이라 칭하는 국가가 세워진 이래로 <변호인> 같은 영화가 개봉하지 못할 만큼 무기력한 시대만 아니라면 이 영화를 흥행시킬 시대는 적지 않았다. 다만 그런 시대가 21세기를 넘어선 지금에서도 머리를 들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놀라울 뿐이다. 민주주의를 천년왕국 정도로 해석했던 이들에겐, 정치라는 것이 대단히 불쾌한 술자리 대화 소재로 인식했던 이들에게도 충격과 각성을 준다고 말하는 시대에서 <변호인>이란 영화는 정말 대단한 흥행 요건을 갖춘 상업영화일수밖에 없다. 이 영화가 시대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시대가 이 영화를 떠받들게 만든다. 시대는 보다 우울해지고 있다. 그만큼 관객은 더 들 것이다. 이것도 다 ‘놈현 탓인가?’ 무서워서 대통령 욕도 하기 힘들어진 작금의 시대 탓이라고 여겨지는 건 그저 오해인가?
능력 있는 아버지는 부족함 없이 아들을 키웠습니다. 아이는 건강했고, 집안은 화목했으며 문제될 것은 없었죠. 아이의 여섯 살 생일을 앞둔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났던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고, 병원 관계자는 믿을 수 없는 말을 전했습니다. 아이가 바뀌었다는 거짓말 같은 말. 그리고 아이와 함께 했던 지난 6년간의 거짓말 같은 삶. 아버지는 기로에 섭니다. 6년간 함께 했던 정을 선택할 것인가,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유전자를 선택할 것인가. 현존하는 일본의 거장이라 해도 좋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던지는 물음표란 이렇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수면에 물방울을 떨어뜨려 번져나가는 동심원의 파문을 조용히 살피듯이, 무거운 주제를 사소하고 차분한 풍경 속으로 담담하게 떠내려 보냅니다. 그리고 정작 영화는, 엄밀히 말하자면 감독은 그 관계에 대해서 어떠한 할 말이 없다는 것처럼 당사자들의 선택을 객석에서 응시하듯 상황을 그려나갑니다. 이 영화에는 시점숏이란 게 희박합니다. 특정한 인물의 시선을 대변하는 카메라의 시점이란 게 좀처럼 발견되질 않죠. 전지적인 시점에서 이 영화 속의 상황이 중계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고로 사실상 이 영화에 개입하는 존재가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죠. 그리고 영화적 사연에 대한 판단을 극 속의 캐릭터들이 주도하는 상황처럼 그려냄으로써 관객에게도 판단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만 같습니다.
단순히 낳은 정과 기른 정 사이의 갈등을 담아낸 드라마 같지만 영화는 결과적으로 더욱 큰 범위의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객석에서도 어떤 판단에 동참하길 원하면서도 결과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강력하게 어필한다는 말이죠. 이 영화는 생물학적 아버지와 사회적인 아버지 사이에서 후자의 미래 그리고 사회를 보다 존중하고 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대안가족’의 형태라고 할까요. 인간의 갈등을 그리는 개인적인 드라마 같지만 결국 그 사소한 영역의 이야기엔 우주 같은 주의가 담겨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결말부에서 전달되는 거대한 진폭의 감동이 그 강력한 주의를 무의식적으로 환기시키고 증폭시키는 인상마저 듭니다.
물론 이 영화가 주장하는 것이 단순히 아이를 입양하자는 사회운동적인 메시지가 아닐 겁니다. 결국 우리는 사회적인 아버지가 돼야 한다는, 일종의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죠. 저마다에겐 가족이 있고, 가정이 있겠지만 결국 이 사회라는 거대한 공동체에서 우린 다음세대를 위한 어른이 돼야 합니다. 생물학적 부모가 아니라 해도 부모와 같은 온기와 지혜를 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 영화는 그런 어른의 성장을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대단히 감동적이고, 숭고한 이야기이지요. 그리고 이토록 거대한 메시지를 이토록 사소하고 담백하게 해낼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능력일 테고요.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해낼 수 있다는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야말로 진짜 어른이 아닐까 문득 생각하게 되는군요.
<호빗> 시리즈를 이끄는 건 <반지의 제왕>으로 익숙한 피터 잭슨이다. 불가피한 이유로 길예르모 델 토로에게서 메가폰을 넘겨 받았다 해도 <호빗>은 끊임없이 <반지의 제왕>과 비교당할 운명을 타고난 작품이란 것이다. 그리고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는 새로운 트릴로지를 받치는 허리이자 전후를 잇는 다리 역할에 충실해야 할 두 번째 속편이다. 본격적인 서사의 진전이 이뤄진다. 트릴로지의 성패를 쥐고 있는 분수령이 되는 작품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속편 역시 초당 48프레임을 영사하는 하이 프레임 레이트(HFR) 방식으로 제작됐다. 사실 전작인 <호빗: 뜻밖의 여정>에서 HFR은 과욕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서사의 시동을 거는 첫 작품에서 이 특수한 기술이 효율적으로 활용됐다고 말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서사의 주행을 위해서 진로를 설계하는 목적이 강했던 첫 작품에선 액션신의 비중도 적었던 만큼 무언가 특별한 것을 보고 있다는 인상을 부여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역동적인 카메라의 이동을 통해서 공간 전반을 활용하는 몇몇 액션신에선 확실히 HFR의 장점이 부각되는 인상이었다. 스펙터클한 액션신과 이미지의 비중이 늘어난 이번 작품에선 HFR의 장점이 보다 뚜렷해 보인다. 특히 다이내믹한 카메라의 이동과 전방위적인 공간 활용이 빛을 발하는 협곡에서의 추격신은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에서 단연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원작자인 J.R.R 톨킨은 <반지의 제왕>에서 세계관의 자궁 역할을 한 <호빗>의 일부 설정을 수정했다. 피터 잭슨이 톨킨의 <호빗>을 바탕으로 원작과 다른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건 이와 비슷하다. <반지의 제왕>은 톨킨의 원작에 충실한 작품이지만 <호빗>은 오히려 <반지의 제왕>의 프리퀄로서의 목적에 충실하고자 원작을 적극적으로 인큐베이팅해낸다. 원작과의 연관성에 관대해질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는 훌륭한 각색물이자 <반지의 제왕>의 프리퀄로서의 목적을 확실히 달성하는 작품이다. 어떤 면에선 <반지의 제왕>보다도 피터 잭슨의 인장이 보다 확실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기술적 시도와 서사적 의도가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성공적인 트릴로지의 완결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