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슬>,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둔 이 영화는 비극을 전시하며 공분의 엔터테인먼트를 판매하는 대신 관객을 증인석에 앉히고 당시의 정황을 묵묵하게 환기시킨다. 끔찍한 비극의 한가운데에 내몰렸음에도 얼마나 참혹한 상황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순진한 이들의 인상을 거듭 목격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암담한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의외로 웃음을 자아내는 순간들이 적잖게 존재하지만 머리가 거꾸로 곤두서듯 질겁할만한 순간들 또한 가감 없이 나열되고 제시된다. 잔인하고 흉악한 이미지를 전시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정말 이 세계가 지나온 진짜 역사라는 절망감 때문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 흉악한 시절이 제대로 된 위로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욱 참혹하다. <지슬>은 짐승의 계절로부터 물어뜯긴 이들을 위해서 그 후손이 직접 바치는 위령제다. 죽은 자도, 죽인 자도 말이 없고, 후손들만 운다. 언제까지 비극을 방치할 것인가.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제주 4.3 사건도.
<지슬>의 영상은 컬러로 촬영한 뒤 흑백으로 전환했다는데 그 깊은 감도가 여전히 갈무리되지 못한 채 시대 속을 떠돌며 오늘까지 전전하는 시대의 영혼을 보는 인상이었다. 한편 거의 외국어에 가깝게 들리는 제주도 방언을 자막으로 읽는 기분이 묘했다. 제주도가 한 몸과 같은 영토임에도 외딴 방처럼 고립된 공간이란 느낌이 적잖게 들었다. 그런 곳에서 벌어진 참극이니, 얼마나 징했겠소. 사방팔방 이어진 광주에서도 그랬는데. 안 그러오?
<007 스카이폴>은 제임스 본드 탄생 50주년을 맞이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지난 50년 동안 제임스 본드는 전 세계가 사랑한 스파이로 살아남았다. 물론 마티니 잔만 기울이며 시간을 보낸 게 아니다.
제임스 본드는 영국의 자존심이다. 올해 개최된 런던올림픽 개막식에서 영국 여왕을 보좌하는 임무를 수행한 것도 제임스 본드였다. <007 스카이폴>은 개봉 첫 주 북미 박스오피스 1위에 랭크됐고 878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역대 시리즈 중 개봉 첫 주 최고 스코어를 기록했다. 국내에서도 2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영화를 관람했다. 평단과 관객의 평가도 찬사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역동적인 듯 적막하고, 모던한 듯 클래식하다. 새로운 에너지와 고전적인 멋이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전통을 통해서 현재를 살아 나가는 제임스 본드는 여전히 마티니 잔을 기울이지만 이제 더 이상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철부지만은 아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졌기 때문이다.
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큰 타격을 입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제임스 본드였다. 자유 진영의 평화를 위협하는 공산 진영에 맞선다는 명목으로 전 세계를 왕래하며 한도 초과 걱정 없는 카드를 긁어대고 마티니 잔을 기울이다 미녀들에게 작업을 걸던 그는 새로운 적을 찾기 위해 구인 광고라도 내야 할 지경이었다. 2002년 미국의 전 대통령 조지 부시는 이라크, 이란, 북한이 악의 축이라 천명했다. 제임스 본드가 솔깃할 만한 삼지선다형 문항이었다. 21세기 최초의 시리즈 <007 어나더데이>에서 간택된 악의 축은 북한이었다. 냉전의 막차에 가까스로 탑승했지만 연비가 최악이었다. 완성도만큼이나 성적도 참담했다.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었던 제작진은 그제야 심각해졌다.
<본 아이덴티티>와 <본 슈프리머시>의 성공은 <007>시리즈를 더욱 낡아 보이게 만들었다. 제이슨 본은 제임스 본드처럼 총부리를 잡고 폼만 잡거나 어쭙잖게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다. 저돌적으로 달리고 과감하게 부딪히며 효과적으로 타격했다. 그리고 고뇌했다. 누구를 위하여 그들을 죽였나. 기억상실로 과거를 잃어버린 제이슨 본은 과거의 기억을 수집하며 맞닥뜨린 살인의 추억 앞에서 자기반성을 거듭하고 자신을 지휘했던 CIA에 책임을 묻고자 전진한다. 영화 속 스파이들이 더 이상 폼 나는 자유투사 코스프레로 연명할 수 없음을 체감하게 만들었다.
<본 아이덴티티>의 속편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 사이에 등장한 <007 카지노 로얄>은 시리즈의 전통에서 최대한 달아났다. 6대 제임스 본드로 선정된 다니엘 크레이그는 최초의 금발 제임스 본드라는 점에서부터 튀었다. 지적인 화이트칼라 선배들과 달리 그의 강인한 외모와 근육질 체격엔 블루칼라 노동자의 터프함이 배어 있었다. 전통적인 시리즈의 팬들은 금발의 제임스 본드를 강력한 반발로 맞이했다. 그리고 지금 <007 카지노 로얄>은 시리즈 사상 최고로 손꼽히는 걸작으로 회자된다.
<007 카지노 로얄>은 일종의 ‘제임스 본드 비긴스’다. 흑백 영상의 오프닝 시퀀스는 첫 공적 살인을 지시받은 제임스 본드가 이를 수행하고 ‘00’이란 살인면허를 허가받는 과정을 비춘다. 이어지는 타이틀 시퀀스를 지나 등장하는 건 고층 빌딩이 건축되는 공사장 한가운데를 상하좌우로 관통하는 스피디한 추격신이다. 뛰고 구르고 나는 가운데서 치고받는 제임스 본드는 과거의 선배들보다 제이슨 본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인상이었다. 실제로 <본> 트릴로지의 액션감독인 댄 브래들리가 <007 카지노 로얄>의 액션을 설계했다. 처음부터 새로운 제임스 본드에 대한 의지가 명확했던 것이다.
출발점에 선 제임스 본드는 새로운 경로에 주목했다. <007 카지노 로얄>은 제임스 본드를 순정적인 러브 스토리로 밀어 넣는다. 진정한 사랑을 깨달은 제임스 본드는 연인을 위해 상관에게 이메일로 사직서를 제출하기에 이른다. 새로운 삶을 꿈꾼다. 그러나 결국 이야기의 결말부에 이르러 그녀의 배신을 직감하고, 그녀를 뒤쫓다 의문의 조직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위기에 빠진 그녀를 구하고자 고군분투하지만 끝내 눈앞에서 참회하다 죽음을 맞이한 그녀의 주검을 안고 눈물을 흘린다. 그녀의 배신과 죽음이 자신을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인과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그 모든 상황을 설계한 이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제임스 본드가 차가운 도시 남자로 거듭난 것도 이런 과정의 결과임을 설득한다.
<007 퀀텀 오브 솔러스>는 바로 그 복수에 관한 영화다. <007 카지노 로얄>과 <007 퀀텀 오브 솔러스>는 하나의 맥락으로 묶인 최초의 연작이란 점에서 또 한 번 새로웠다. <007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제임스 본드는 공적인 임무와 사적인 복수 사이를 방황한다. 그가 몸담은 영국 첩보 조직 MI6 또한 혼란스럽다. 냉전시대의 적은 이념만큼이나 실체가 명확했지만 새로운 시대에서 적의 화장법은 보다 교묘해졌다. 이익에 따라 행동하기에 선악을 자유자재로 갈아입는다. 거대한 첩보 조직의 실체가 되레 명확하다. 새로운 시대는 유물 취급을 당하는 조직의 미래를 근심하게 만든다.
제임스 본드는 단독 드리블로 조직의 한계를 극복하고 적의 실체를 따라잡아 파헤친다. 때때로 조직의 압력을 받고 카드가 끊기는(!) 불상사까지 인내하면서 공적인 의무와 사적인 복수를 자신의 방식으로 해결하고 응징하며 존재감을 어필한다. <007 카지노 로얄>과 <007 퀀텀 오브 솔러스>가 시리즈의 한계로부터 탈출하고 이탈하는 작품이라면 <007 스카이폴>은 다시 한 번 전통을 회복하고 건축하는 작품이다. <007 스카이폴>은 추락하고 가라앉는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로 시동을 건다. 역사 속으로 수장된 대영제국의 영광만큼이나 MI6의 활동 또한 마냥 자유롭지만은 않다. 쇠락의 기운이 여실하다. 제임스 본드의 기력도 예전 같지 않다. 조직 내에 수혈되는 젊은 피들이 보다 선명하다. 그 와중에 강력한 적이 등장한다.
컴퓨터 프로그램 하나로 전 세계 경제와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적의 존재란 바로 자신과 동일한 일을 했던 예전의 동료다. <다크 나이트>의 투페이스처럼 변절해 버렸고, 조커처럼 무모해서 공포스럽다. 21세기의 정세에 걸맞은 무정부적인 악인의 출연은 제임스 본드가 오늘날에도 살아남아야 할 이유를 대변한다. <007 스카이폴>은 그런 제임스 본드의 생존을 도울 팀을 재정비하는 작업이다. 앞선 두 전작이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에 깃든 냉전의 때를 씻어내는 작업이었다면 <007 스카이폴>은 그 과정에서 벗어 던졌던 전통의 품위를 재단하고 착용하는 작업이다. 다만 그것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클래식으로서 재단된 것이어야 한다.
<007 카지노 로얄>은 시리즈 최초로 MI6의 국장인 M으로 여배우 주디 덴치를 캐스팅하며 파격을 새겼다. <007 스카이폴>은 랄프 파인즈를 통해서 다시 전통을 복원한다. 시리즈 초기에 M의 비서로 제임스 본드에게 지령을 전달하는 캐릭터 머니페니를 부활시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제임스 본드가 60년대에 유행했던 좁은 라펠의 수트를 착용한 것도 어쩌면 의도적이다. <007 골드핑거>(1964)에 등장했던 에스턴 마틴 DB5에 앉아서 차량 전면에 탑재된 기관총을 난사하는 이벤트마저 등장한다. <007 스카이폴>은 지난 두 편의 전작이 구축했던 새로운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 위에 다시 시리즈의 전통을 건축하는 ‘제임스 본드 라이즈’다.
하지만 굳이 왜 제임스 본드가 태어난 고저택에서 <나홀로 집에> 같은 결전을 벌이는 것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 고저택을 ‘스카이폴’이라고 명명한 건 일종의 고의다. 추락을 상징하는 곳에서 태어난 제임스 본드가 그 운명을 스스로 박살내 버리고 결국 살아남는 과정은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다. 그가 말한 새로운 취미 즉 ‘부활(Resurrection)’인 셈이다. 그렇게 다시 태어난 제임스 본드는 새롭게 정비된 팀원들과 함께 다시 세계를 구하러 나아간다. 잘 알려졌다시피 다니엘 크레이그는 계약상 두 편의 시리즈에 재탑승할 예정이다. 마티니 잔을 채울 준비는 끝났다. 그리고 그는 말할 것이다. 본드, 제임스 본드.
때가 되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그것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처럼 따져 묻지 않는다. 그건 마치 누군가의 아들이나 딸이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실 대항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이 공명정대하고 명확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따져 물어야 한다. 하지만 역시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피곤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바로잡겠다고 나설 때엔 그만한 각오가 필요한 법이다. 어쨌든 아나키스트, 즉 무정부주의자란 말은 있어도 무정부인, 비국가인이란 말은 없지 않은가.
<남쪽으로 튀어>는 오쿠다 히데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둔 작품이다. 그리고 원작처럼 어느 아나키스트 아버지와 그의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소설과 달리 아들의 1인칭 시점 대신 객석의 시점과 동일한 3인칭 시점으로 영화를 목격하게끔 만든다. 국민 같은 거 하지 않겠다며 주민등록증은 찢어버린지 오래이고, 당연히 세금도 내지 않는 최해갑(김윤석)은 <남쪽으로 튀어>의 핵심이다. 그는 이 영화가 존재하도록 이끄는 필요조건 같은 존재다. 무정부주의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연출하는 그는 한량과도 같지만 불의 앞에선 불처럼 뜨겁다. 그럼에도 최해갑 못지 않은 운동권 경력을 자랑하는 그의 아내 안봉희(오연수)는 그의 이상을 응원하는 강력한 아군이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이런 면모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하지만 미워하진 않는다.
<남쪽으로 튀어>는 일종의 계몽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 같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우화다. 최해갑의 삶은 객석을 찾은 관객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생경한 태도에 가까울 게다. 이는 단순히 캐릭터가 지닌 고차원적인 이상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태도로서 드러나는 삶의 방식이 그렇다. 누구나 불만을 가질 수 있지만 결코 실행할 수 없는 행위들을 최해갑은 한다. 불합리한 시스템의 오류를 순응하며 편하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달아난다. 엄밀히 말하자면 최해갑이 선택하는 삶의 방식이란 자립에 가깝다. 투쟁이나 싸움이라기 보단 체제로부터의 독립이자 현대적인 사회제도로부터의 자립을 의미한다.
<남쪽으로 튀어>는 사실 그러한 삶이 행복하다고 설득할 수 있다면 보다 나은 영화다. 하지만 영화가 그럴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때때로 그러한 삶이 국가관에 길들여진 대부분의 삶보다 나아 보이고 행복하게 다가오는 풍경들이 목격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태도를 제시하고 권유하기 보단 일종의 전시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치열한 현실감보단 현실성을 염두에 두고 그린 이상에 가까워 보인다. <남쪽으로 튀어>가 계몽적인 영화라기 보단 우화에 가깝다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에 밀착하는 대신 현실을 연상시키는 어떤 상황들을 수집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기워 넣는다. 수집된 상황들은 대부분 권력화된 정책과 제도 안에서 발생하는 갖은 불합리들이다. 최해갑은 이에 저항한다. 그 저항은 대부분 통쾌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영화는 웃고 있지만 사실상 씁쓸한 이야기다. 영화는 나름대로 긍정적인 인상을 유지하지만 영화가 전시하는 비극의 강도는 사실상 현실의 파괴력을 따라잡지 못한다. 쉽게 말하자면 <남쪽으로 튀어>는 현실보단 이상으로 기운 영화다.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캐릭터의 결기를 지켜보는 재미는 유쾌하지만 사실상 영화가 제시하는 청사진이란 그리 희망적인 인상이 아니다. 현실에서 얻어지는 무력감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감상 또한 영화와 완벽하게 밀착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쪽으로 튀어>는 대한민국 국민 엄밀히 말하자면 서민들의 불만과 분노의 뿌리를 살피는 진단으로서 유효하다. 좀처럼 명확한 출처를 규정하기 어려워서 막연하게 분노를 삭히고 현실에 수긍하듯 살아가는 당신에게 어떤 근거들을 제시한다. 선동하기 보단 자각하게 만든다. 물론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자각해온 이들에겐 빤한 난장처럼 보일 가능성도 농후하지만.
확실히 캐릭터를 보는 재미가 쏠쏠한 영화다. 범상치 않은 존재감을 지닌 아나키스트 최해갑을 연기하는 김윤석의 캐릭터 소화력과 담담하고도 결연하게 최해갑을 내조하는 안봉희를 소화해내는 오연수의 의외성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역 배우들의 기똥찬 연기는 물론. 이처럼 저마다 살아있는 캐릭터들은 영화가 다루는 날선 소재와 논조를 유쾌하게 중화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많이 하지. 내가 몇 년 전에 다신 연기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처럼.” 4년 전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랜 토리노>가 배우로서 출연하는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 말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그런 선언을 거짓말로 둔갑시킨 작품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에서 메가폰을 잡은 건 로버트 로렌즈다. 그의 첫 연출작이다. 로버트 로렌즈는 긴 시간을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함께 했다. <블러드 워크> <미스틱 리버> <밀리언 달러 베이비> <그랜 토리노> 등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품을 제작하고 기획하며 파트너로서 긴 시간을 공유해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다시 카메라 앞으로 불러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덕분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평범한 드라마다. 늙어가는 한 남자와 그 주변인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비범성의 여부와 무관하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상만으로 유사하게 읽히는 작품이 있다. <그랜 토리노> 말이다. <그랜 토리노>와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늙어감에 관한 영화다. 노인에 관한 영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얼굴을 빌린 두 노인은 완고하다. 자기 고집을 좀처럼 꺾지 않는다. 물론 <그랜 토리노> 쪽의 노인이 보다 그렇다. 어쨌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최근 배우로서 남긴 인상이란 그런 것이다. 두 영화 속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신의 캐릭터와 밀착하는 건, 마치 그의 전기적인 캐릭터처럼 보이는 건 당연하다.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처럼 어차피 그 역시 늙어가는 처지니까.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결국 어떤 퇴물에 관한 영화다. 오랫동안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로 일해온 거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점차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구단주의 주변엔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망주를 발굴하는 스카우트 일을 이어나가기엔 그가 너무 늙었다고 말하는 이가 생겼다. 무엇보다도 그의 방식이 낡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그 일에 매진한다. 노구를 끌고 먼 길을 운전해간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낡아가고 있다.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치명적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딸 미키(에이미 아담스)는 자신의 중요한 커리어를 뒤로 밀어내고 아버지의 길을 따라 나선다. 오랫동안 반목하고 지냈던 부녀는 그 길을 함께 하며 갈등과 화해를 경험한다.
빤한 이야기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나 늙어가고, 퇴물이 된다. 빠른 구속을 자랑하며 자신만만하게 직구를 뿌리던 영건도 어느 순간 정교한 제구와 볼컨트롤에 기대어 맞춰 잡는 노장이 돼야 한다. 새까만 후배가 자신의 마운드에 올라와서 자신을 불펜으로 밀어내는 과정을 언젠가 감내해야 한다. 사람들은 젊다는 것에 투자하길 꺼리지 않는다. 반대로 늙었다는 것에 포기하는 것도 당연하다 믿는다. 관록이나 지혜라는 말은 다 풀려버린 두루마리 휴지의 중심을 지키고 있던 봉처럼 유용하게 느끼질 않는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는 그런 노인의 지혜와 관록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빤한 선악 구조를 내세운다. 패기만만한 젊은 야심가의 빤한 수를 장외로 날려버린다. 역전타가 선명하게 예상되는 구조다. 그럼에도 이 빤한 경기를 종종 비범하게 지켜보게 만드는 건 타석에 들어선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이글거리는 눈빛과 타 들어가는 듯한 음성, 80세가 넘은 나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 정도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박력은 대단하다. 주름 하나마다 박력이 새겨진 기분이다. 그런 차원에서 그는 우리가 아는 병약한 노인들과 조금 다른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런 인물이 자신의 분야에서 퇴물로 내몰리는 상황을 본다는 건 그래서 더욱 슬픈 일이기도 하다. 육체의 노쇠와 함께 반비례하게 축적되는 경험 속에서 익어가는 지혜를 팔 곳이 없다. 퇴물이 되어 세상으로부터 퇴장한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여겨진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에서의 거스 또한 그런 전철을 밟고 있다. 하지만 그런 처지를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증명해낼 뿐이다. 아직 자신의 지혜는 쓸만한 것이라고. 거스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공을 쳐내는 배트 소리로서 구질과 배트 스피드를 파악해낸다. 거짓말같다.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결국 오랜 세월을 그 현장에서 자리하고 지켜본 전문가의 관록이 만들어낸 유산이다. 거짓말 같은 그 연륜은 결국 세월을 소모하지 않고선 얻을 수 없는 어떤 노인만의 능력이다. 그리고 그 노인은 결국 이를 증명한다. 영화 속에서만큼은.
모든 노인이 깊은 지혜와 연륜을 품고 살지 않는다. 중요한 건 결국 자신의 경험 안에서 인생이 무르익어간다는 사실일 거다. 결국 퇴물이 되어 세상의 뒷방으로 밀려날 때 그런 가치나마 손에 쥐고 있지 못하면 다시 세상으로 떠밀려나올 기회마저 상실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나 <그랜 토리노>는 결국 노인들에 대한 영화라기 보단 어떤 노인에 관한 영화다.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온 이에 관한 이야기다. 단지 늙어간다는 것을 노스탤지어로 치환하지 않는다.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건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그는 결코 초라한 노인의 얼굴로 관객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여전히 박력이 넘치는 인상으로 노인에 대한 일방적인 편견에 마주선다. 퇴물이 되어가는 과정 또한 묵묵하게 살아간다. 마치 원래 알았다는 듯이, 그리고 끝내 퇴물로서 멋지게 살아가는 과정을 제시한다.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와 같이 빤한 드라마에 비범한 인상을 새겨 넣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상엔 노인을 위한 변명은 없다. 그것이 그 지혜와 연륜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여생을 지켜보고 싶게 만든다. 마치 이 빤한 드라마를 신중하게 지켜보게 만드는 것처럼.
솔직히 촌스럽다. 웃기고 울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찰나가 그런 정황 속으로 끼어들어가도 될 거라 판단한 연출적 감이 기가 막힌다. 말 그대로 그냥 웃기고 울리는 순간을 나열하면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촌스러움이 <타워>를 붕괴시키는 한방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와 완성도 높은 CG가 이런 단점을 상쇄시킨다. 거대한 주상복합주택의 화재 안전성은 현재에도 여러 차례 제기되고 있는 문제라 CG의 완성도로 인해서 보다 현실적인 공포로 치환된다. 고의적인 악역의 설정도 눈에 빤하지만 우리네 일상에서 마주치는 파렴치한들의 수준이 그만한 것이라 딱히 뭐라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어쨌든 인재에서 비롯된 거대한 재난의 수순은 인정할만하다. 재난의 이미지는 완벽하고 그 안의 끔찍한 그림도 여럿이라 붕괴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결말부까지의 참혹함은 진짜처럼 와 닿는다. 다만 한강 너머에서 바라보이는 여의도의 타워 스카이는 사실 누가 봐도 9.11의 유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같아서 남의 비극을 상업의 도구로 활용한 것 같다는 일말의 거부감도 든다. 그 이미지를 권유할 마음도 없지만 말릴 마음도 없다.
강풀 작가의 <26년>은 사연이 많은 소재를 장르적인 그릇에 담아서 그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영화는 원작에 비해서 호흡은 짧게 가져가야 하니 각색은 불가피하고, 실사화라는 표현적인 제한도 존재한다. 특별한 재해석 능력을 보여준다면 모를까, 원작의 의미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고자 한다면 본전 찾기도 쉬운 작업은 아니다. <26년>은 그런 제약들을 뛰어넘은 영화적 성취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긴 어렵다. 압축된 초반 서사는 성기고, 변주된 일부 캐릭터는 비효율적인 경우가 발견된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뜨거운 감정이 차고 넘친다. 어떤 식으로든 1980년 5월 18일에 대한 감정이입에서 자유롭기 힘든 탓이다. 어떤 식으로든 냉정하게 보기 힘들다. 보는 내내 울화가 치민다. 미치도록 죽이고 싶어진다. 영화를 영화 자체로 보기 힘들게 만드는 이 놈의 현실이 문제다. 영화 하나가 짊어진 사연이 뭐 이리 무겁고 언제까지 애달파야 하냔 말이냐.
고담의 흑기사 배트맨이 돌아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극장으로 모였다. 말들을 쏟아냈다. 우린 이 고독한 영웅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나? 아니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 것 아닐까?
이제 고담은 부패한 악의 소굴이 아니다. 사람들은 말한다.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전쟁은 끝났다고. 배트맨이 경찰견에 쫓겨 어둠 속으로 달아난 것도 벌써 8년 전 일이다. 고담의 정경유착을 뿌리 뽑고자 했던 청렴한 검사 하비 덴트를 죽인 악당임을 자처한 배트맨은 더 이상 고담의 밤거리를 굽어살피지 않는다. “오래 살아남아서 악당이 되거나 죽어서 영웅이 되거나.” 그 자신이 보존하려 했던 고담의 백기사 하비 덴트의 그 대사처럼, 살아남은 배트맨은 악당이 됐고, 내부자의 배신으로 악당 투페이스로 변절한 하비 덴트는 결국 죽어서 영웅이 됐다. 우리는 <다크 나이트>의 결말 앞에서 엄숙한 물음을 삼킬 수 밖에 없다. 과연 우리는 진짜 영웅을 보존할 수 있는 존재들인가? 그건 마치 유대인의 손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서사와 유사하지 않은가? 이처럼 엄숙한 히어로 무비는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다.
<다크 나이트>에 열광했던 팬덤이 다시 <다크 나이트 라이즈>라는 이름 앞에 줄을 선 건 당연하다. 북미 개봉 첫 주에 극장 총기 난사사건이라는 흉악한 암초에 걸려 주춤했지만 3주 연속 북미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수성하며 전세계 7억불 이상의 수익을 거두고 있다. 국내에서도 550만 명 이상의 관객이 배트맨의 부활을 목격했다. 아이맥스 카메라로 포착한 광활한 도시 풍광 아래에서 펼쳐지는 선악의 대결, 고독한 신념으로 분투하는 영웅의 피로한 고뇌, 조커 그리고 멀리 떠나버린 히스 레저……<다크 나이트>의 진풍경을 경험한 이들에게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이미 신앙이고 복음이었다. 혼돈을 즐기는 조커에 맞서다 끝내 고담을 지키고자 영웅의 지위를 버리고 은둔한 배트맨은 압도적인 파괴력을 지닌 강적, 베인에 맞서서 또 한번 고담을 구원해야 한다. 그 무용담 앞에서 다시 한번 관객들이 모여든다. 하지만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서사는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 그리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까지, 이 트릴로지는 유년 시절 고담 뒷골목에서 부랑자의 손에 죽음을 맞이한 부모를 목격한 한 소년이 어른이 돼서도 그 분노를 이기지 못해 박쥐 코스튬을 입고 고담의 밤거리를 활보하다 진짜 삶을 회복하기까지의 서사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배트맨의 복귀를 겨냥한 제목이자 제 삶을 완전히 내려놓았던 사내가 그 삶을 어떻게 다시 일으키는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배트맨 비긴스>에선 어린 브루스 웨인이 실수로 우물에 추락해서 자신에게 날아든 박쥐 떼에 질겁하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우물을 탈출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브루스 웨인은 숱하게 악몽을 꾼다. 그 순간으로 거듭 되돌아간다. 고담의 악인들에게 공포의 상징이 될 이미지를 구상하던 중, 집안에 날아든 박쥐를 통해서 모티브를 얻는 건 필연이다. 자신의 공포를 악인들의 공포로 전이시킨다는 건 일종의 복수심에 가깝다. 한편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이 법적 체제로서 정당하게 악인을 심판하고자 하는 하비 덴트의 이상을 지지하는 건 고담의 법 체제 확립을 통해서 고단한 자경단 노릇을 그만 두고 진짜 자신의 삶을 되찾고픈 욕망 때문이다. 그가 브루스 웨인으로만 존재하지 않는 이상, 함께할 수 없다 말한 레이첼과의 관계 때문이다. 하비 덴트는 이상이고, 레이첼은 현실이다. 결국 조커의 계략으로 이상도 현실도 지키지 못한 배트맨은 악당이 되어 사라지고, 가면을 벗은 브루스 웨인은 은둔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제목 그대로 고담의 흑기사 배트맨이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그린다. 단지 전편에서 사라진 배트맨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조커의 광기로부터 구해낸 고담에서, 하비 덴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은폐하고 스스로 악당이 되길 자처하며 악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수감할 수 있는 하비 덴트 법의 기틀을 마련한 배트맨은 그 비틀린 공권력으로 제압할 수 없는 악당의 출연과 함께 세상에 등장한다. 그리고 완전히 부서진다. 현란한 전술과 압도적인 힘으로 악당들을 제압하던 배트맨은 베인 앞에서 샌드백처럼 얻어맞다 끝내 허리가 부서져 일어서지 못한다. 객석에 앉은 당신은 배트맨과 함께 구타당하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건 스크린 속 허구이고 그 너머의 절망이지만 객석까지 비통한 공기가 흐르는 건 자신들의 강력한 아군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절망적인 목격이자 체험이기 때문이다.
브루스 웨인이 베인에 의해서 감금되는 감옥은 마치 그가 유년 시절 추락했던 우물을 닮았다. 브루스 웨인이 그 곳을 기어올라야 하는 건 고담을 유린하는 베인을 막아서기 위해서지만 결국 그곳이 자신이 홀로 기어오를 수 없었던 유년시절의 우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끌어올려준 아버지도 없는 그 지하 감옥에서 그는 허리에 묶인 끈 하나에 의지한 채 벽을 잡고 기어오르다 떨어지고 다시 기어오른다. 물론 브루스 웨인의 허리가 완벽하게 회복되는 광경 앞에서 그가 평소에 어떤 칼슘 보조제를 먹었는지 의아할 수 있음을 간과하지 않겠다. 어쨌든 이 모든 서사에서 중요한 건 그 행위에 깃든 상징적 의미다. 결국 브루스 웨인은 소돔과 고모라가 된 고담으로 되돌아온다. 전쟁을 시작한다. 예정된 수순대로 고담을 구하고자 허리를 펴고 기어오른 배트맨의 역전극이 펼쳐진다. 그러나 그 서사의 끝자락에는 보다 성스러운 결말이 대기 중이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처럼, 도시를 살리고자 스스로 제단에 오르듯 날아오르는 배트맨은 성배가 된다. 비로소 죽어서 영웅이 된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 슈트를 벗으며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와 헤어진다. 자신과 닮은 누군가에게 그 지위를 물려주며, 강력한 상징의 허물을 벗고 진짜 삶을 찾는다.
굳이 <다크 나이트>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몇 가지 의문을 남기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3부작의 관점에서,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탁월한 마침표를 찍는 수작이다. <배트맨 비긴즈>는 배트맨이라는 가상의 아이콘에 하이퍼 리얼리즘을 장착했다. 슈트의 제작 과정까지 합리적인 인과를 설계하는 방식은 때때로 편집증적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존재 가능한 영웅의 형상을 설득하며 이 트릴로지가 바로 우리 세계와 맞닿은 거울상이라 설득한다. 놀란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모티브가 된 두 작품을 수 차례 언급했다.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런던과 파리를 오가는 한 남자의 기구한 러브스토리를 묘사한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와 마천루의 위용을 자랑하는 대도시 내부에 잠재된 비인간적인 억압과 착취를 그린 프란츠 랑 감독의 디스토피아 SF <메트로폴리스>. 어느 개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절망 속에서 놀란은 간절한 희망을 추출해냈다.
이건 어느 영웅에 관한 영화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결국 어찌됐건 가능한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나눠야 한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결말부에서 비행 직전의 배트맨에게 경찰청장 고든은 묻는다. “세상을 구한 영웅이 누군지는 알아야지.” 배트맨은 답한다. “모두가 영웅이야. 어린 아이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며 세상이 끝나지 않았다고 희망을 주는 남자도.” 부모를 잃은 어린 브루스 웨인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며 위로하는 고든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브루스 웨인이 지키고자 했던 고담의 가치는 어쩌면 그런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믿어야 한다. 이 도시에는 배트맨도 존재하지 않기에 더더욱.
팩션 사극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광해군 집권 당대의 아슬아슬한 정치적 조형을 창작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안착시키는데 성공했다. 구중궁궐 내의 정치적 모략의 중심으로 떠밀리며 엄격한 궁의 생활에 적응해나가는 ‘왕의 남자’의 일상은 코믹한 광경을 이끌어낸다. 이 아이러니한 유머가 칼을 품은 <광해>에서 자연스러운 긴장과 이완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아슬아슬한 정치적 조형을 창작적으로 잘 안착시킨 시나리오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때때로 그 합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순간도 존재하나 전반적으로 거슬리지 않는 흐름을 지녔으며 그 틈새를 메우는 건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다. 1인 2역을 오가는 이병헌은 서까래처럼 영화의 지붕을 받치고, 류승룡은 주춧돌처럼 영화를 떠받든다. 김인권과 장광의 연기에는 마음이 간다. 교과서적인 웅변조차 절절하게 소화하는 <광해>는 ‘정치하는 사람’보다도 ‘사람이 하는 정치’가 18세기 조선이나 21세기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절실함임을 잘 알고 있다. 달다가 맵다가 끝내 콧날이 시큰해진다.
<다크 나이트>가 선사한 광활한 충격을 맛본 당신에게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이미 신앙이고 주님일 거다. 무한한 혼돈과 같은 조커를 이겨낸 배트맨은 존재 자체로 파괴이자 절망에 가까운 강적 베인에 맞서 처절하게 짓밟히면서도 또 한 번 일어서서 소돔과 고모라가 될 고담시를 구원해야 한다.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 나이트>를 잇는 트릴로지의 피날레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164분의 러닝타임 안에서 다시 한 번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영웅의 소비 실태를 고민하고 제시한다. 극심한 실업난을 겪고 있는 미국 내 사회에서 월가 시위와 같은 계급적 투쟁이 본격화되고 있는 현실이 적극적인 메타포로 동원된 인상이기도 한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결국 자본과 계급이라는 21세기의 시민사회를 관통하는 히어로계의 <시민 케인>이라 할만하다. 배트맨은 여전히 고뇌의 간지를 풍기고, 베인은 압도적이지만 무엇보다도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훅을 날리는 건 캣우먼이다. 한두 가지 결정적 순간이 전체적인 완성도 안에서 살짝 뒤쳐지는 인상이지만 결말은 가히 복음이 되어 배트맨을 성배로 만들고야 만다. 개별적인 작품의 완성도에서 봤을 때 <다크 나이트>를 넘지 못하는 듯하나 3부작의 관점에서 봤을 때 자기 이야기를 완벽하게 갈무리하는 수작이다. 아이맥스 카메라 촬영분량만 72분에 달하는데 이걸 과연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안보고 배기는 것이 정상일지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광대하고 웅장하며 처절하나 결국 경배할 수밖에 없는, 영웅 대서사시. 과연 이런 3부작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상대적으로 뼈를 드러내며 시작하는 원작의 서사가 강렬한 건 부인할 수 없다. 서사의 축약을 위해 순행으로 전개를 수정한 건지 모르겠지만 가공할 떡밥을 스스로 포기했다는 점에서는 아쉽다. 삼각관계에서 빚어지는 심리적 갈등과 충돌로 발생하는 긴장감은 원작에 비해서 사유화되는 인상인데, 이를 테면 원작은 은교에 대한 두 남자의 감정 발화가 서로에 대한 견제와 의식을 통해서 발전되는 인상인 만면, 영화는 그것이 단순히 나이가 다른 수컷들의 롤리타적 욕망으로 제한하듯 그려진다. 형태는 남아있는데 핵심이 떨어져나갔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이적요 역할의 박해일은 열심히 했다. 톤이 나쁘지도 않다. 다만 70대 노인을 연기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깝게 들리는 성대 묘사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김무열의 서지우는 감정을 좀 절제할 필요가 있는 캐릭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리고 그 어떤 결점과 무관하게 신인 배우 김고은은 지우기 힘든 인상을 남긴다. 동물적인 감각이 느껴지는 신인배우의 출연이란 점에서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