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다. 마약 운반 혐의로 2년간 프랑스의 교도소에 억류됐다는 한국인 여성에 관한 실화 말이다. 어쨌든 2006년 한 TV 시사프로그램을 통해서 알려진 이 기구한 사연은 여론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이 여론을 통해서 그녀의 귀국에 결정적인 계기가 만들어졌다. 이 사건의 보도가 환기한 것은 국가 기관의 어이 없는 작태였다. 국민의 안전을 보호한다던 외교통상부 산하의 주불대사관에서 이국에서 범죄 혐의로 조사를 받는 자국민을 외면해버린 진실은 국내 여론을 뜨겁게 달궜다. 그녀를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만든 것도 그 여론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대단히 비극적인 사연을 담고 있는 영화다. 영화를 보는 동안 절절하고 속이 끓는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 감정의 발화점이 되는 건 바로 전도연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 전도연은 심장과 같다. 그녀의 연기를 통해서 객석 곳곳으로 피가 돌듯이 오롯한 심정이 전달된다. 특히 영화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카리브해 질주 신에서 전도연의 얼굴은 삼라만상 같다. 공터 같은 표정에서 역설적으로 모든 감정이 느껴진다. ‘연기력’이란 기능적인 단어로 그녀의 연기를 설명하길 꺼려지게 만든다. ‘경지’라는 단어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그리고 그 대단한 연기로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문장을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한다. 정말 좋은 배우다.
단점이 없는 영화는 아니다. 때때로 신과 신의 이음새에서 성급한 인상이 느껴지기도 하고, 할말이 너무 많아서 넘치는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순간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길>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해내는 영화다. 이야기의 바탕이 된 실화와 가공된 허구를 재단하고 접목해서 영화적인 언어로서 현실적인 공감대를 쥐어준다. 인물의 고난을 전시하며 눈물샘을 자극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고난을 가혹하게 여겨야 할 이유를 추적하고 제시한다. 그리고 현실을 환기시킨다. 어쩌면 당신이 공감하는 건 단순히 영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집으로 가는 길>에 공감한다면 그건 우리가 속한 이 사회에 대한 불안이 반영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권력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사회와 국가가 영화적 비극을 완전하게 보완한다. 이건 희극인가, 비극인가.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 팀(돔놀 글리슨)은 여자에게 지극히 인기가 없는 남자입니다. 하지만 진실된 사랑을 꿈꾸는 남자이기도 하죠. 그런 팀은 만 20세가 된 날 아버지(빌 나이)로부터 “우리 가문의 남자들은 만 20세가 되면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는 비밀을 전해 듣습니다. 그리고 팀은 이 능력으로 여자를 사로잡겠다고 다짐합니다.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이란 여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시간으로 여기는 거죠. <어바웃 타임>이 시간여행을 다루는 방식이란 이처럼 사소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목이 ‘타임’이란 단어를 동원하고 있는 건 단지 시간여행을 다루고 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팀은 자신의 시간을 거듭 되돌리며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고 더 나은 기회를 얻는 방향으로 삶을 가다듬으며 자신이 꿈꾸던 미래로 나아갑니다. 사랑스러운 여인 메리(레이첼 맥아담스)를 만나서 그토록 꿈꾸던 연애를 하고 가정을 꾸립니다. 이처럼 순조롭고 평탄한 과정은 그가 아버지가 되는 순간부터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시간을 되돌려서 자신의 행위를 수정하고 다른 결과로 나아갔을 때 발생하는 오차는 그 시절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식의 존재 여부에 변수를 만들어버린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죠.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는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너무나 간단하게 되돌릴 수 있는 것이라 믿었던 시간의 무게가 비로소 느껴집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에 대한 절실함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우린 시간 속에서 이별과 상실을 경험합니다. 피할 수 없죠. 그 덕분에 추억을 품을 수 있다는 건 시간이 낳은 아이러니일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 지난 시간들이 언제나 오늘이었고, 지금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바웃 타임>이란 제목은 그 지금에 깃든 모든 순간들을 의미합니다. 결국 <어바웃 타임>은 돌아가고 싶은 과거보다도 소중한 지금에 대한 송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바웃 타임>을 완벽한 영화라고 말할 순 없지만 당신이 사랑할만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래서입니다. 완벽하지 않았던 과거를 그리워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대문호 코맥 매카시가 쓰고 거장 리들리 스콧이 연출한 <카운슬러>를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리들리 스콧이 연출하고, 마이클 패스벤더와 카메론 디아즈, 하비에르 바르뎀, 브래드 피트, 페넬로페 크루즈가 출연하는 영화가 있다니, 기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카운슬러>라는 영화를 기대한 건 살아있는 현대문학의 거장 코맥 매카시가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집필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코맥 매카시는 대단히 하드보일드한 문체를 구사하며 황량한 풍경에 황폐한 정서를 담아내는데 능하면서도 대단히 비정한 여운을 남기는 작가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 대부분을 좋아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건 미국 서부시대의 야만을 관통한 <핏빛 자오선>이다.
단언컨대 <카운슬러>만큼 비정한 작품을 보기도 힘들 거다. 이 영화는 당신이 ‘설마 그렇게까지?’라고 생각하는, 혹은 이상의 결말로 나아간다. 일말의 자비심도 없다. 그것이 이 영화를 비범하다고 여길 수 있게 만드는 핵심이기도 하지만 <카운슬러>는 날카롭지만 핵심을 찌르는 영화처럼 보이진 않는다. 이 영화엔 대단히 중후하고 의미심장한 대사들이 등장하는데 궁극적으론 설계돼 있다고 하는 것이 맞다. 예를 들자면, 이 영화를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카메론 디아즈가 연기하는 말키나의 대사. “정확한 사실엔 온도 따윈 없는 거야.” 이 대사에 빗대어 말하자면 <카운슬러>는 온도가 없는 영화 같다. 영화 자체가 어떤 감정을 품도록 유도하지 않는다는 말. 물론 강렬한 서스펜스와 스릴이 예감되는 스토리의 복선과 파괴적인 이미지들이 존재하는 영화다. 덕분에 영화적이라기 보단 문학적인 비범함이 느껴지는 대목이 많다. 감정의 발화점이 존재하지만 끊는 점이 없다. 밑바닥에서부터 서서히 가열되는 열기가 느껴지지만 서서히 끓어오르기 보단 순간적으로 증발해버리는 듯한, 액화가 아닌 기화되는 느낌의 영화랄까. 영화는 파괴적인 이미지를 묘사하지만 그 이상으로 참담한 심정으로 가닿는 건 단지 그 이미지 때문이 아니다. 한치의 자비심이 느껴지지 않는 비정함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다는 와닿는 순간들이 너무나 평범한 낯빛으로 칼을 찌르듯 밀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비정함 자체가 일상 같아서 그 세계에서 두 발 딛고 살아남는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 두려움이 <카운슬러>에 있다.
그리고 이 비정한 세계관을 굴려나가는 배우들은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감을 좁혀서 관객의 목을 쥐는 듯한 박력과 긴장을 주입하는데 특히 감정이란 것을 온전히 추출해낸 듯한 말키나를 연기하는 카메론 디아즈가 대단히 인상적이다. 다만 <카운슬러>는 리들리 스콧의 영화라기 보단 코맥 매카시의 영화처럼 보이는데 그래서 영화보단 문학으로서 보다 인상적인 순간들이 엿보인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풍광들은 영화의 직접적으로 묘사로 소품화되기 보단 소설의 구술을 통해서 상상할 때 보다 인상적일 것도 같다는 감상이 남는다. 덕분에 코맥 매카시의 원작 시나리오가 굉장히 보고 싶어진다. 리들리 스콧보단 코맥 매카시의 인장이 강해 보이는 작품이랄까. 어쨌든 <카운슬러>를 보고 나면 멕시코라는 나라의 근처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완벽하게 휘발될지도 모른다. 길을 가던 남자와 툭 부딪혔더니 목을 죄어 들어오는 올가미가 걸려들어와 목이 날아갈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한숨이 절로 나와서 땅이 꺼져도 이상할 것 같지 않다.
가끔은 잘 만들어줘서 고마운 영화가 있습니다. <소원>이 그렇습니다. <소원>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그것도 끔찍한 실화이지요. 비극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기획된 영화들은 그 현실을 담보로 삼아서 관객의 공분을 이끌어내고 소비하기 쉬운 형태로 기획되곤 합니다. 영화가 사건을 묘사하는 방식과 그 사건에 대한 인물들의 분노를 발화시켜서 관객들의 마음을 들끓게 만드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당사자들의 통증에 대한 공감은 쉽게 무마됩니다. 아마 당신은 그런 영화들 앞에서 여러 번 끓어올랐을 겁니다. 하지만 끓는 점을 지나면 증발하게 되는 법이지요. 그런 종류의 분노는 상영관을 나와서 쉽게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그 분노는 당사자들을 위한 위로보단 영화적 소비를 권장하는 전략에 가깝기도 합니다. 일종의 스포츠 경기에서 비롯되는 흥분과도 유사합니다.
<소원>은 주인공인 소원이가 참담한 사건을 겪게 되는 과정의 전후를 살핍니다. 소원이만큼이나 그 주변인들이 어떻게 슬픔을 공유하고 아픔에 공감하며 비극을 견뎌내고 삶을 회복해나가는지 담담하게 지켜봅니다. 당사자들의 분노나 고난 자체에 감정을 이입하는데 집중하며 객석을 달구는 그 비극을 딛고 살아가고자 손을 맞잡은 이들의 표정에 온기를 담아내고자 노력합니다. <소원>이 끊임없이 눈물샘을 자극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기 때문이죠. 덕분에 비극적인 상황이 더욱 명확하게 다가오니까요. <소원>이 좋은 영화라고 장담하는 건 그래서입니다.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감을 좁히는, 그 통증이 당신 주변의 누군가의 것임을 깨닫게 만드니까요. 그 통증과 슬픔을 공유할 수 있도록 창을 열어줍니다. 그리고 깨닫게 만듭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한다는 것이야말로 그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아갑니다. 서로의 손을 맞잡고 생을 다짐하는 개개인이 만들어낸 온기를 차갑게 식히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약자들을 보호해야 할 법정주의의 안이한 공정성이라는 것임을 목격하게 만듭니다. 아동성범죄에 대한 취약한 진짜 사회를 환기시킵니다.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합니다. 당신이 그 방향을 목격하고 기억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우리 이야기니까요.
지구의 구체 일부의 이미지로 가득 채워진 아이맥스 스크린의 압도적인 시각적 자극과 반비례하듯 청각적 자극을 완벽하게 말소시키는 적막함으로부터 <그래비티>는 시작된다. 우주로부터 날아온 시점숏을 통한 시각적 체험과 함께 음파를 전달할 공기가 없다는 청각적 체험이 동시에 진행된다. ‘우주를 보고 있다’가 아니라 스크린 속의 ‘우주에 포함돼있다’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경이로운 우주의 풍광 속에 잠재된 공포가 그 신비를 목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직구처럼 달려드는 순간부터 <그래비티>가 그리는 진짜 우주를 목격할 수 있다. 무중력, 무산소, 무기압이라는 ‘무’의 바다에 빠진 한 점 같은 인간의 처절한 사투를 보고 있노라면 무기력이라는 단어의 공포가 생생하게 환기된다. 우주 그 자체가 괴물처럼 느껴진다.
<그래비티>는 몇 가지 전복적인 흥미를 던진다. 일단 탈출이라는 단어의 방향성을 뒤튼다. <그래비티>는 지구로부터 우주를 향해서가 아니라 우주로부터 지구를 향한 탈출극처럼 보인다. 그 결말부에서 <쇼생크 탈출>의 엔딩컷이 떠오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편으론 우주의 경이적인 이미지보다도 사운드 전략이 <그래비티>에서 우주를 체험시키는 방점 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산소와 무기압은 직접 체험할 수 없지만 완벽한 묵음 상태를 통해서 무음 상태의 우주를 재현하는 적막함이 아이맥스 스크린을 채우는 우주의 풍경과 맞물려 진짜 우주에 떠있다는 공감각적인 체험을 극대화시킨다. 중력 안에서 완성된 영화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무중력의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배우의 움직임과 생물처럼 부유하는 카메라의 시점숏 또한 <그래비티>의 우주를 생생하게 체험하도록 유도한다. 우주라는 공간성의 신비를 벗기고 공포라는 감각을 주입하는 것 역시 뼈가 시리도록 신선하다.
열연을 펼치는 산드라 블록도 대단하지만 이 숨막히는 우주적 재난에서 산소 같은 위트를 공급하고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을 선사해내는 조지 클루니의 존재감도 형형하다. 무엇보다도 <그래비티>는 이토록 거대하고 적막한 재난이 생명과 인생이라는 두 개의 ‘생’을 구원하는 우주적인 감동으로 나아간다는 데에서 보다 훌륭한 가치를 품고 있다. 다시 그 생을 목격하고 싶다.
1. 왕십리 아이맥스 3D로 <그래비티>를 봤다. 우주에 다녀온 기분. 우주 혹은 무중력 그 자체가 이길 수 없는 괴물 같다.
2.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광활한 시점숏과 적막함이 아이맥스 스크린을 가득 메우며 시작되는 오프닝 시퀀스는 경이로운 무중력 세계의 신비를 순식간에 공포로 둔갑시켜버리는데 정말 숨이 막히고 어지러운 기분을 체험했다. 그 이후로 그 우주에 함께 떠 있는 듯한 기분.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대단한 서스펜스와 스릴을 부여하는데 이리와, 이런 건 처음이지, 라고 손짓하는 느낌이랄까.
3. <더 문>이 잠깐씩 생각나긴 했다. 모노드라마에 가까운, 광활한 우주에서의 고립감. 하지만 <그래비티>는 우주라는 공간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생생하게 이입시킨다. 덕분에 우주에 가보고 싶다는 기분이 짜게 식는 기분도. 결국 집 나가면 고생이다. 블록버스터급 '홈 스위트 홈' 교훈극이랄까.
4. <피라냐>가 생각나기도 했다. 이게 무슨 쌩뚱맞은 소리냐 싶겠지만 보면 안다.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미친듯이 달려들어서 온갖 것들을 해체하는데 딱 그런 공포심이 느껴진다.
5. 이만큼이나 광활한 시점숏은 본적이 없다. 이 영화는 직접적인 배우들의 시점숏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지만 그 배우들을 향한 카메라의 시선마저도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지극히 '생물 같은' 시점숏이 활용된다. 실제로 가끔씩 배우들이 카메라를 고의적으로 의식하는 인상을 주는 컷도 등장한다. 어쨌든 덕분에 우주라는 광활한 공간에 '갇혀 있다'는 긴장감이 배가되는 느낌. 실제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거대한 우주를 표류한다는 건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공간에 갇히는 것이라고 느낄 수 밖에 없는데 것인데 지금까지 경험하고 보고 들었던 그 어떤 공포스러움보다도 공포스러운 기분을 체험한 기분.
6.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통해서만 가능한 영화들은 때가 되면 더러 등장하는데 그 발전을 영화적 표현력의 진화로 승화시키는 영화들은 아주 가끔 등장한다. <그래비티>가 그런 영화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그래비티>의 전후로 나뉠 것이다. 기술적으로도 표현적으로도 훗날 <그래비티>를 연상시킨다라고 할만한 영화들이 나올 것이다. 물론 아이맥스 상영 방식이 아닌 일반 상영관에서도 이런 관점이 유효할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오히려 일반 상영관에서 <그래비티>를 한번 체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7. <그래비티>를 통해서 경이로운 기술적 체험을 우선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말 지극히 영화적이라 더욱 놀라운 작품. 우주라는 거대한 괴물로부터의 탈출극이 장르적인 카타르시스를 책임지는 가운데서도 전형적인 휴머니즘과 멜로적인 감수성의 결정을 선사하며 영화적인 중력을 선사한다. 기술적 체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 진보를 영화적 표현력의 진화로 끌어올린다.
8. 사운드 전략이 대단하다. 도입부에서 설명하듯 음파를 전달할 공기가 없는 우주의 특수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적막함과 웅장함의 극단적인 음의 이동과 전개가 서스펜스를 촉진시키고 극대화시킨다.
9. <프로포즈>(2009)로 재기에 성공하며 그 해에 <블라인드 사이드>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했을 때, 정말 산드라 블록이 좋아졌는데 <그래비티>를 보면서 아, 정말 좋은 배우로 자리잡았구나 생각했다. <그래비티>의 조지 클루니를 보면서 <밀양>의 송강호가 생각났다. 산드라 블록을 지지하는 조연이자 영화적 장치로서의 임무에 완벽하게 복무한다. 실제 등장 배우가 온전히 둘에 불과한 이 영화에서 조지 클루니는 생각보다 일찍 퇴장함에도 불구하고 천연덕스럽게 복선을 세우고, 광활한 우주를 메울만한 감정선의 스케일을 넓히고, 방점까지 찍어낸다. 정말 훌륭한 배우다. 멋있다.
10.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3번 정도는 더 보고 싶다. 아니, 목격하고 싶은 것일지도. 지금이어야만 가능한 일은 해도 해도 아깝지 않다.는 기분이 짜게 식는 기분도. 결국 집 나가면 고생이다. 블록버스터급 '홈 스위트 홈' 교훈극이랄까.
스티브 잡스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아론 소킨이었다. <소셜 네트워크>와 <머니볼>의 각본가 아론 소킨만이 스티브 잡스의 양면성을 근사한 스토리에 녹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무나 해서는 안될 이야기였다. 스티브 잡스라는 이름 자체의 유명세가 그것을 특별한 아이템처럼 둔갑시키니까. 반대로 말하자면 식상하다는 말이지. 이미 925페이지에 달하는 전기까지 출간된 마당에 스티브 잡스가 얼마나 천재적이었고 한편으론 괴팍하고 독선적이며 외로운 사람이었고, 이런 식의 블라, 블라, 블라는 곤란했다. 스티브 잡스라는 사람의 인생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을 관통하고 그의 시점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예상 밖의 이야기를 길어올릴 수만 있다면 정말 괜찮은 결과물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얘기를 한다는 건 이미 눈치챘겠지만 <잡스>가 그런 관점에서 실패한 영화라는 말이다.
구부정한 걸음, 시선을 끌어당기는 손의 제스처, 스티브 잡스를 연기하는 <잡스>의 애쉬튼 커처는 제법 스티브 잡스처럼 움직이고 말한다. 하지만 끝내 스티브 잡스가 아니라 애쉬튼 커처로 남는 느낌. 이는 배우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이야기의 문제가 더욱 크다고 판단한다. <잡스>는 대단히 밋밋한 영화다. 실화를 바탕으로, 그것도 대단히 흥미로운 인물을 다룬 작품이 결과적으로 대단한 여운을 남기지 못한다는 사실은 일면 놀랍기도. 영화는 잡스가 천재적인 인물이지만 독선적이고 성질이 지랄 맞고 그래서 고립된 인물이지만 결국 성공했다고 나열한다. 조화가 아닌 나열. 마치 전기의 챕터 중간중간을 뭉텅 잘라서 점프시키듯이 이야기를 이어붙이는데 점층적으로 감흥이 상승하는 느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뚝뚝 잘라먹는 기분. 결과적으로 모든 에피소드에 평면 구속당하는 느낌. 그래도 스티브 잡스라는 인물의 흥미를 밑천으로 생각했을 때 <잡스>가 스티브 잡스라는 인물을 재현하는 방식은 최소한의 구경거리는 되는 듯. 애쉬튼 커처가 애써서 스티브 잡스를 따라잡는 것도 그렇고. 코스프레 무비 이상의 감상으로 끌어올리지 못하는 인상은 일면 아쉽지만
아무래도 역시 아론 소킨이었어야 했다. 다행히도 소니 픽쳐스에서 아론 소킨을 영입해서 스티브 잡스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잡스>를 보고 남은 사족. 우리가 아는 천재들은 대부분 성격이 지랄맞은데 생각해보면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지랄 맞은 성격이 아니고서야 멍청한 시스템을 이겨낼 수도 없었겠지. 평범한 다수가 생각하는, 멍청하지만 이래저래 편한 합리로 똑똑한 한 사람의 혁신을 짓누르는 건 어디서나 흔한 일상이고, 그런 시스템 안에서 멸망하는 천재성이 한둘이 아니니까. 착한 천재라는 건 결국 보존하기 힘든 이상일지도.
<폭스파이어>는 혁명이나 테러라는 단어를 연상할 수밖에 없는 영화지만 혁명에 관한 영화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어떤 시절이나 인물에 대한 노스탤지어에 가깝다. 여성의 인권이 길바닥의 깡통 같았던 19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둔 이 영화는 페미니즘적인 가치관으로 무장한 소녀들이 혈기를 발판으로 한데 뭉쳐 조직으로 거듭나고 점차 세를 규합하다 파국으로 닿는 과정을 그린다. 소녀들의 반시대적인 연대가 공격적인 행위로 나아가는 과정은 장악력 있는 교주 아래 모인 신도들의 맹신처럼 자라고, 근본주의적인 집단의 폭력적 특성과 유사하게 닮아간다.
결과적으로 그건 혁명이라기 보단 실패한 혁명이란 이름으로 뭉뚱그려지는 집단적 과격함과 닮아있다. 연대하고 규합하다 분열하고 해체되는, 뜨거운 혈기가 식고 난 이후 남겨진 치기가 분열하는 흔한 과정. 그 끝에 다다르면 그 과정의 입구를 만들었던 결기나 의미는 변질되고 퇴색된지 오래일 뿐. 그리고 <폭스파이어>는 변화와 지속의 틈새에서도 살아남는 기억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 분열과 해체의 끝에서 그 기억과 경험을 공유한 이들은 그 시절을 여운처럼 간직하거나 치부처럼 밀어낸다. 그리고 그 중 누군가는 놀랍도록 일관성을 유지하며 자신의 삶을 더욱 거대한 담론처럼 키운 존재의 흔적을 드러내고 발견하게 만들며 기억을 되짚도록 요구한다.
일찍이 <클래스>로 교실 안에서 벌어지는 선생과 아이들의 논쟁을 통해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통제와 억압을 훈육하려는 교육의 속살을 들춘 감독 로랑 캉테는 보다 폭력적인 시대적 풍경을 제시하고 그 안에 놓인 소녀들의 저항을 유쾌하게 길어 올린 뒤 아찔하게 떨어뜨린다. 그리고 <폭스파이어>는 그것이 허무했다거나 어리석었다고 회고하는 대신 그럼에도 결국 남겨진 삶을 비춘다. 강렬했던 기억이 머물렀던 시간 이후, 그들이 기억하는 것을 살피고 함께 지켜보게 만든다. 당신의 치기나 혈기는 그 시절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어쩌면 격려한다. 그 모든 과정 이후로 어찌됐건 살아가고 있음에 대한, 그리고 누군가는 일관된 삶의 태도로 그 시절에 품었던 가치관을 그대로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살아남는다는 건 결국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의 시대를 보존하는 길이다. 누군가의 기억이란 시대에 대한 증명이니까. 책임도, 의무도 아닌, 그냥 삶이 그렇다. 그래서 그 삶의 끝은 결국 시대의 끝이다. <폭스파이어>는 한 시대의 끝은 결국 당신의 삶에 달려있다고 말하는 그런 영화였다.
‘그래, 네가 보고 싶은 게 이런 거지?’란 식으로 시작해서 결국 ‘자, 이래도 네가 보고 싶은 게 맞아?’란 식으로 끝난다. 그리고 결론은 결국 다음 기회로. 어쨌든 지난 ‘서’와 ‘파’가 <에반게리온>을 리빌딩한다는 목표 안에서 기존 세계관을 분리하고 재배열하는 작업이었다면 <에반게리온:Q>는 새로운 리빌딩 소스를 장착하는 작업에 가깝다. 다만 기존의 세계관 말미에서 드러났던 안도 히데아키의 분열과 자폐 증세는 막바지로 치닫는 이번 작품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다만 기존 시리즈와 같이 자폭으로 치닫기 보단 확실한 이미지로서 세계관의 종말 혹은 구원을 그려내겠다는 완결적인 의지가 보인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메카닉 떡밥을 줄줄이 날려대면서도 소통의 벽을 쌓은 팬덤에 대한 멸시적인 시선도 엿보인다. 기본 작품과의 궤에서 대단히 벗어나고 있음에도 평행우주와 같은 맥락임을 주장하고 싶게 만들 떡밥도 대거 등장한다. 기존 작품의 세계관을 초월하는 동시에 그 세계관의 관성을 고스란히 품었다. 어쩌면 이번 리빌딩 시리즈에 대한 안도 히데아키의 의지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참고로 Q는 Quickening, ‘되살아나게 하는’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결국 안도 히데아키의 ‘완결보완계획’은 성사될 수 있을까. 결말편이라 알려진 <에반게리온: | |>를기다리는수밖에. 그놈의, 서비스! 서비스!
<킬링 소프틀리>는 오바마의 연설로부터 시작된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아니라 2008년 부시 정권 말기에 공화당의 대선 후보 존 맥케인과 경합을 벌이던 민주당 대선 후보 오바마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이어지는 내내 조지 부시 미국 전대통령이나 오바마, 미국 전 재무부 장관 헨리 폴슨과 같은 정치인들의 연설이나 발언이 심심찮게 귀를 파고 든다. 만약 당신이 브래드 피트가 출연하는 하드보일드한 킬러물 정도를 예상하고 상영관을 찾은 관객이라면 이미 예사롭지 않은 오프닝 시퀀스만으로도 기대가 빗나갔다는 예감이 들지도 모를 일이다.
브래드 피트의 베니스 남우주연상 수상작인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을 연출한 감독 앤드류 도미닉은 조지 히긴스의 1974년작 범죄 소설 <코건의 거래 Cogan’s Trade>을 모티프로 <킬링 소프틀리>를 구상했다고 한다. <코건의 거래>와 <킬링 소프틀리>의 이야기 줄기는 유사하다. 보스턴의 도박장에 들이닥친 강도로 인해서 얻은 손실의 책임자를 가리기 위해서 갱단은 전문적인 해결사 즉 킬러를 고용한다. 문제는 이미 한차례 그 강도질을 벌였다가 용서받았던 이가 갱단 내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해결사로 고용된 킬러 잭키 코건(브래드 피트)의 논리는 이렇다. 도박장을 턴 강도에게 책임을 묻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사태가 반복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이가 있다는 것.
<킬링 소프틀리>의 서사는 2008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경제가 붕괴된 부시 정권 말기의 미국 사회다. <코건의 거래>가 발표된 시기는 미국 경제 공황의 여파가 한창이던 1974년이다. <코건의 거래>가 <킬링 소프틀리>만큼이나 경제적인 위기 상황을 직설적으로 가리키는 작품처럼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원작과 영화는 킬러물이란 장르적 속성을 공정한 거래와 자본주의적인 계급 사회를 은유하는 그릇으로 삼고 있다. 무엇보다도 <킬링 소프틀리>는 확실히 그렇다. 코건은 도박장을 턴 범인만큼이나 그 범죄 행위를 따라 하게 만든 주범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한다. 경제 위기 발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경제범들이 제대로 된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평가됐던 지난 서브 프라임 사태가 연상되지 않나?
오바마와 부시를 비롯한 정치인들의 연설이나 발언들은 영화의 극적인 상황을 입체적으로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처음으로 인물이 등장하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미국인의 비전을 웅변하는 오바마의 대선 출마 캠페인 연설이 오버랩되는 것부터 영화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형태나 인물의 행위와 맞물릴만한 음성이 마치 주석처럼 따라붙는다. 이는 은유인 동시에 장치적인 위트다. 킬러들의 행위가 자본주의 국가의 행태와 유사하게 어울려 보이도록 설계된 은유인 동시에 인물의 행위를 반어적으로 설명하는 위트의 장착에 가깝다. 이를 테면 카페에서 코건이 남겨놓은 팁을 가로채려는 뚱뚱한 하수인에게 “팁을 내려놔. 이 멍청하고 무능력한 돼지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TV 속의 부시는 말한다. “미국의 노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똑똑하고 유능합니다.”
물론 <킬링 소프틀리>는 하드보일드한 영화다. 도박장 강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레이 피오타가 연기한 마키가 갱단에게 떡이 되도록 맞는 신에서 1인칭과 3인칭을 오가는 시점숏을 통해 사실감 있는 구타 장면을 감상하게 만드는 등 생생한 폭력성을 체감할 수 있는 신이 더러 존재한다. 반면 고속촬영을 통해서 그 폭력성에 극단적으로 반할 정도로 우아하게 완성된 코건의 총격 암살 신은 아이러니할 정도로 우아하다. 흥미로운 건 이 폭력적인 장면의 대립적인 체감이 코건의 의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암살을 생각했을 뿐, 린치를 가하며 책임을 규명하길 원하지 않았던 마키의 구타 신이나 직접 암살을 시도할 의사가 없었던 최후반부의 살인 신의 사실적인 폭력성과 반대로 그가 스스로 계획하고 주도한 중반부의 총격 살인 신은 그야말로 ‘소프틀리’하게 묘사된다. 그가 킬러로서 추구하는 타이틀처럼 말이다. 영화 곳곳에서 들려지는 반어적인 BGM도 흥미롭다. 조니 캐쉬, 케니 레스터 등 평온한 감성이 깃든 고전 팝들이 극의 분위기와 대비될 때 발생하는 아이러니는 지독한 농담 같기도 하다.
브래드 피트의 레더 재킷과 대비될만한 수트 착장으로 일관된 리처드 젠킨스를 비롯해서 제임스 갠돌피니와 레이 피오타 등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은 물론 극 초반을 이끄는 스쿳 맥네어리와 벤 멘델슨 콤비 등 배우들의 열연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그 끝에 다다라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는 브래드 피트와 리처드 젠킨스의 관계는 미국이라는 자본주의 사회를 채운 화이트 칼라와 블루 칼라의 대비적 상징으로 읽히는데 결말부에 다다라 명확하게 정리되는 브래드 피트의 대사를 통해서 이 영화에 첨언된 정치적 코멘트들의 역할이 명징하게 와닿는다.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사가 울려 퍼지는 바에서 펼쳐지는 엔딩신은 인상적이다. “저 자식은 우리가 한 공동체 안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지. 하지만 난 미국에서 살고 있어. 미국에선 저마다 자기 앞가림을 해야 한다고. 미국은 국가가 아니라 그냥 비즈니스지. 그러니까 내 돈을 뱉어내!” 그러니까 이 영화는 미국 영화다. 미국을 까는 것도, 지지하는 것도 아닌, 미국이란 비즈니스 브랜드 그 자체에 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