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경찰이자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가던 스티브 러셀(짐 캐리)은 교통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긴 뒤, 결심한다. “이제부터 내가 원하는 삶을 살 거야!” 그 원하는 삶이란 그의 진짜 정체성, 즉 동성애자로서의 삶이다. 커밍아웃을 결심하고 가장으로서의 위장된 삶을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누리던 러셀은 게이로서의 삶이 대단한 수입을 필요로 함을 깨닫게 되고 그 포기할 수 없는 삶을 위해 갖가지 사기를 구상하고 실행하며 성공한다. 하지만 결국 러셀은 사기 행각이 드러나 감옥으로 향하는 처지에 놓이지만 그 감옥에서 자신의 운명적인 상대를 만나게 된다.
너무나도 유명한 고유명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제목이지만 <필립 모리스>는 그 익숙한 고유명사와 무관한 또 다른 고유명사로서의 의미를 품고 있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실화를 바탕으로 둔 영화임을 거듭 강조하는 <필립 모리스>는 능수능란한 사기꾼이자 탈옥수였던 러셀의 활약상(?)을 다룬 러브스토리(!)다. 여기서 필립 모리스는 바로 그 러셀이 사랑했던 남자의 이름, 말 그대로 필립 모리스(이완 맥그리거)인 것. <필립 모리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사기꾼이자 탈옥수인 러셀의 실화적 삶을 다룬 극영화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대부분의 영화가 그러하듯이, <필립 모리스> 역시 그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진짜 사연을 바탕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흥미를 자아내는 작품이다. 다양한 사기와 탈옥 전력을 지닌 남자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흥미 본위의 이야기로서 유효한 것만은 아니다. <필립 모리스>는 케이퍼 무비와 같은 활기로 사건을 전진시키고 축적된 서사의 정보를 밑천으로 그 결말에 다다라 숙성된 성장드라마와 깊은 로맨스의 정서를 끌어내는 작품이다.
물론 <필립 모리스>가 실제 인물의 행위를 재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일종의 연출적 과장 혹은 비약이 가미된 것은 분명하다. 특히 짐 캐리 특유의 연기적 특성은 실제 인물의 행위 자체의 진실성과 무관하게 캐릭터를 극적인 방식으로 포장하고 있으며 이는 <필립 모리스>의 분위기나 뉘앙스를 지배하는 절대적 특성으로 발전된 것처럼 보인다. 또한 게이 로맨스물로서 두 커플을 묘사하는 방식 혹은 배우들의 연기방식은 동성애자에 대한 특정한 편견이 고스란히 활용됨으로서 대상을 희화화시키고 있다는 혐의에서도 일부나마 자유롭지 않다.
이는 <필립 모리스>가 인물보다는 사건 자체에 초점을 맞춘 전기적 재현 영화라는 증거에 가깝다. 그만큼 영화가 앞세운 실제 인물의 행적은 서사적으로 사실적이되 행위적으로는 과장돼 있으나 왜곡되지 않았다. 또한 <필립 모리스>는 <캐치 미 이프 유 캔>과 같은 작품을 떠올리게 만드는데 그것은 인물을 둘러싼 시대적 분위기 덕분이다. 실제 사건이나 인물을 스크린에 옮겨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겠지만 인물의 범죄행각이 그 시대에서 발견되는 틈새를 파고든 영악한 결과인 덕분이란 점에서 그렇다. 또한 인물의 현재가 그들의 어떤 과거적 결핍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결말부에 다다라 일순간 깊은 감정적 여운을 남기는 클라이막스를 연출하기도 하지만 <필립 모리스>는 분명 유쾌하고 활달한 영화다. 어떤 동정심조차도 거부하려는 것처럼 이 영화는 비극적이라 말할 수도 있는 그 결말 너머에서도 유쾌한 감정을 잃지 않는다. 이는 역시 짐 캐리라는 배우로부터 생산된 기질이 영화에 적극적으로 반영된 결과나 다름없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전무후무한 사기탈옥극이자 퀴어 로맨스물인 <필립 모리스>는 소재 자체의 가능성이 배우의 특성에 필터처럼 걸러져서 완성된 작품인 셈이다. 물론 <필립 모리스>의 백미는 영화가 끝난 뒤 몇 줄의 자막이 전해주는 진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소년은 빈 손이다. 그의 손을 잡아줄 사람조차 만나지 못했다. 소년이 가진 거라곤 빈 주먹 뿐이었고, 이를 통해 얻은 건 소년원 경력 뿐이다. 그리고 19살이 된 소년은 이제 교도소로 발을 들인다. 사회에서도 혼자였던 소년은 교도소에서도 홀로 살아가야 한다. 아니, 살아남아야 한다. <예언자>는 6년형을 선고 받고 교도소에 갇힌 소년 말리크(타하 라임)의 성장을 다루는 범죄 영화이자 갱스터 무비다. 무엇보다도 <예언자>에서 두드러지는 건 장르적 중후함보다도 현실적인 리얼리즘을 기반으로 만들어내는 비범한 전형에 있다.
영화는 시작부터 교도소에 가야하는 말리크의 현실적 처지를 덩그러니 던져놓는다. 그가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길이 없다. 단지 그가 이제 소년원이 아닌 교도소에 가야할 나이가 됐으며 그를 지켜줄 사람도 없고, 그가 가진 것도 없다는 얇은 정보 뿐이다. <예언자>가 소년에게 어떤 운명을 부여할지에 대해서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교도소에 들어서서 알몸으로 검문을 시작하는 말리크의 표정을 마주한 관객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작은 동공에 두려움과 경계심이 터져나갈 것처럼 자리한 말리크의 표정만으로도 그의 교도소 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통제와 억압이 자리한 교도소 안에서는 남몰래 폭력이 자행되고 있으며 권력의 착취는 은밀하듯 공공연하게 이행된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말리크는 그 중심으로 멱살을 잡히듯 끌려들어간다. 선택의 여지란 없다. 단지 생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내던져진 미션을 수행해나가는 수밖에 없다.
<예언자>는 분명 가혹한 현실을 비추는 영화다. 하지만 <예언자>는 예상 외로 그 가혹한 상황에 내던져진 인물을 통해 연민과 같은 감정을 끌어내거나 그 현실로부터 잉태되는 상황으로부터 윤리적인 물음을 도출할 야심이 없는 작품처럼 보인다. 말리크가 처한 가혹한 현실을 다룸에도 그 현실에 어떠한 감정이나 의문을 담아내지 않는다. 단지 말리크라는 소년의 현실을 연출해 던져넣고 그 연출된 현실 속에서 소년이 살아나가는 모습을 비춰낼 뿐이다. 교도소라는 특수한 공간 속에서도 사람들은 관계를 이루고, 그 관계 속에서 소년은 비로소 삶을 배운다. 마치 사회학적인 실험이 벌어지는 교도소의 풍경을 영화적 형식으로 옮겨놓은 듯, 살풍경을 담담한 태도로 응시한다. 흥미로운 건 결과적으로 그런 태도가 <예언자>를 성장드라마로서의 쾌감에 다다르게 만든다는 점이다. 교도소의 살풍경을 응시하면서도 느와르적인 비장감이나 윤리적인 이의를 제기하기 보단 생의 노하우를 수집해나가는 말리크의 성장을 찬찬히 지켜볼 따름이다.
교도소에 수감된 말리크가 형을 마치고 출소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예언자>는 시작과 끝에서 인물의 달라진 표정만으로도 특별한 성장드라마의 묘미를 자아낸다. 아이러니하게도 교도소에서 말리크는 삶의 특별한 계기를 거듭 수집해 나가고 이를 통해 그 동안 꿈꾸지 못했던 미래를 설계하며 삶의 기회를 개척해 나간다. 말리크에게 교도소는 기회의 땅이다. 코르시카 출신 성분의 갱단 보스인 루치아니(닐스 아르스트립)의 눈에 띄어 그에게 살인 지령을 받고 그의 수족처럼 부려지는 말리크는 그로부터 온갖 폭력을 감내해고 생사의 여부가 불확실할 정도로 위험한 임무를 떠안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자립적인 삶의 기반을 마련해 나간다.
사실 <예언자>가 묘사하는 말리크의 성장담은 윤리적으로 옳지 못한 영역에 놓여 있는 것이지만 영화는 이를 미화하거나 혹은 정당화하지 않음으로서 그 논란을 온전히 배제시킨 채 그 서사적 진행에 감상의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감상을 유도한다. 인물의 상황을 전시하면서도 그 상황 속에 놓인 인물의 심리나 감정에 연출적 효과를 배제함으로서 그 자체에 대한 감정적 이입을 차단해낸다. 숏과 컷의 배분에 있어서도 비중의 격차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균등한 시선을 유지하며 차분하게 서사를 전진하는 서사 속에서 잉태되는 역설적인 결과의 연속성에 적절한 설득력을 새겨넣는 것만으로도 집중력 있는 감상을 도모한다. 안정적인 서사의 흐름 속에서도 진전되는 서사를 예측 불가능한 선상으로 밀어넣으며 흥미를 유발하고 지속시켜 나간다. 특히 영화가 부여하는 현장감의 자질은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로부터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대부>를 비롯한 지난 갱스터 고전들이 중후하고 비장한 느와르의 감성과 시대적 징후 등을 끌어안으며 감상의 체중을 묵직하게 이끌어내던 것과 달리 <예언자>는 때때로 경쾌함이 느껴질 정도로 가벼운 중량감을 자랑한다. 되레 긍정적인 기운마저 느껴지는 <예언자>의 결말은 현실적 물음을 따져묻기 보다도 현상적 가치를 이어붙이며 살아온 말리크의 서사로부터 얻어진 일종의 위안에 가깝다. 가진 것 없이 교도소에 들어가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성장한 소년은 이제 스스로 개척한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성큼 걸어나간다. 가혹한 운명을 새로운 삶의 계기로 전환한 소년의 서사는 뒤늦게 역설적인 쾌감을 낳는다. 소년은 위협 앞에 운다. 하지만 소년은 죽지 않는다. 그리고 성장한다. 그 생의 가치란 타인의 평가에 의해서 가늠될 수 없는 비범한 묘미를 품고 있다. 적어도 그 서사를 목격한다면 수긍할 수 밖에 없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