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낭만이란 단어로 수식하기가 무색해진 건 정확히 IMF 금융위기 이후부터였다. 사회 전반의 경제 구조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취업난이 가속화되고 지독한 스펙 경쟁이 일반화됐다. 고학점은 기본이고 아마 그 시절 즈음부터 토익 고득점이 필수적인 요건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으며 해외유학이나 해외연수 경험이란 이력서에 꼭 들어가야 하는 항목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고로 부익부 빈익빈이 본격적으로 교육적 환경에까지 적용되는 상황이 본격적으로 가속화됐다.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은 라면 먹고 금메달 땄다는 헝그리 복서 이야기처럼 낡아갔다. 강남 기반의 서울 부유층 자제들의 서울 명문대학 입학률이 점차 높아지며 교육을 통한 사회 계급 상승을 노릴 수 있는 확률도 낮아지기 시작했다. 가난을 극복하기 힘든, 부자들을 위한 사회로서의 채비가 갖춰지기 시작했다는 것.

 

최근 고대에서 시작된 안녕하십니까?’ 대자보를 통한 20대의 정치적 목소리 찾기는 대단히 흥미로운 사건이다. 사실 정치적 이념에 대한 논쟁 자체가 무력화된 20대가 정치화된 건 필연적으로 이명박 덕분(?)이다. 사실상 20대의 경제적인 무력화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고삐에 잡히듯 끌려가던 10대와 20대의 불안이 분노로 발화되기 좋은 시점이 이명박 정부 시절이었던 거다. 그 징후는 촛불 시위 당시 교복소녀들의 등장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치적 이념이 증발된 21세기에서 10대와 20대가 광장의 집회에 동참한다는 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욕망 혹은 본능을 읽게 만드는 대목이었으며 그 분노의 대상이 명확하게 자신들에게 어떠한 것도 해주지 않는 기성세대, 더 나아가선 자신들과 하등의 관계가 없이 어른들의 목소리에만 귀 기울이는 인상의 정부와 사회에 대한 발언권을 획득하고자 하는 필연적인 방향성이었던 것. 나아갈 광장이 마련됐으니 나아가는 건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고.

 

한때 정치적인 관심도 없고 투표도 하지 않는 ‘20대 개새끼론이 고개를 들기도 했지만 어쨌든 기성세대가 개판으로 만들어놓은 사회적 인프라의 최대 피해자는 현재의 10대와 20대다. 고학력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입학금과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그 외에도 다양한 스펙 요건을 채우기 위한 비용이 요구되는 가운데서 은행에선 학자금 대출로 금리 장사를 하고 있다. 이 모든 상황에서 정작 피해의 당사자들을 위한 발언권이 전혀 없다는 상황에 대한 답답함이 광장으로의 출연을 유도했고, 정치적인 발언이야말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식임을 깨닫게 된 것. 물론 세대 전반을 관통하는 화두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세대 내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은 곧 다수의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를 통해서 세대론의 새로운 규정을 가능하게 만들 움직임이 발생할 가능성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정치적인 이념보다도 실리적인 필요에 의한 정치적 정체성의 확보란 점에서 대학가 대자보 릴레이를 통한 20대의 정치적, 사회적 발언은 대단히 중요한 징후로 보인다. 이는 우리 사회의 무책임하고 비인간적인 교육적 시스템 안에서 좌절을 부르는 인본주의적인 가치관 확보를 청년 세대 스스로의 고민을 통해서 일부나마 복원할 수 있다는 희망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자보를 통해서 스스로 되돌아봐야 할 것은 청년 세대가 아니라 현재 30대를 포함한 예비 기성세대 이상의 기성세대군이다. “안녕하십니까?”라고 묻는 청년 세대의 물음에 답변해야 할 의무는 질문을 하는 그들 자신이 아니라 바로 어른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 안녕하지 않기를 바란다. 고로 당신의 안녕을 묻고 싶다. 응당 그래야한다. 안녕을 묻는 20대의 안녕하지 못함을 지켜보는 나는 안녕하지 못하겠다. 그런데 당신은 "안녕하십니까?" 당신이 대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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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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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가나에의 추리소설 <고백>은 아이를 잃게 된 미혼모 선생 유코가 학생들이 모인 교실의 종업식 자리에서 밝히는 충격적 고백을 통해 시작되는 이야기다. 독백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일인칭 시점의 서술로 일관되는 소설의 구어체는 유코의 시점에서 출발해서 그녀의 고백 속 사건과 관련된 세 명의 학생과 한 명의 학부모의 시점을 갈아탄 뒤, 다시 유코의 시점으로 갈무리된다. 충격적인 진실을 담고 있는 내용에 비해 비교적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는 소설의 화법은 사건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이전에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해부하도록 유도한다. 동시에 단지 교훈적인 메시지에 접근하기 보다는 복수극이라는 장르적 목적에 충실한 결말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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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성장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성숙해지는 건 아니다. 성장이 신체적인 발육과 성징을 통해 이뤄지는 선천적 변이라면 성숙이란 사회적인 체계를 통한 교육과 학습으로서 완성되는 후천적 변화다. 아이들은 어른을 동경한다. 성장이 자신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고, 스스로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 성장 너머로 자신의 꿈이 자연스레 안착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어른들은 시간을 뒤돌아본다. 때때로 아이였던 지난 날을, 좀 더 명확하게는 그 시절의 꿈을 그리워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유년 시절 꿈꾸던 미래의 청사진과 자신의 현실 사이의 거리를 체감하게 되는 일이다. 성장만으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해지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되레 그 성장과 함께 그 꿈들이 그 시절에 머물러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길이라며 현실을 합리화시킨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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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터넷에 떠돌아다닌다는 모 중학교 졸업식 뒤풀이 사진을 봤다. 이를 건네 준 지인은 충격적이라 했다. 물론 충격적인 사건은 맞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딱히 그것이 비정상적인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딱히 놀랍지 않다는 말이다. 아이들은 어른을 보고 자란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보고 배우는 팔 할의 과정은 학교에서 이뤄진다. 교육적 현실이 비참할 때, 아이들의 현실은 끔찍해지고, 결국 우리 사회가 처참한 꼴을 면치 못한다. 요즘 아이들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요즘 우리네 현실이 그래서 그런 것뿐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고금의 진리처럼, 어른들의 나쁜 짓을 아이들은 그리도 쉽게 잘 배울 뿐이다. 상식과 윤리를 가르치지 않는 세상에서 아이들은 보다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행동을 매우 자연스럽게 해나갈 것이다. 고로 당신이나 나는 혀를 차며 손가락질할 자격이 없다. 적어도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어른이라면 이를 보고 기막혀 하기 보단 슬퍼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만큼 이 시대가, 이 사회가, 이처럼 슬프고 비참한 꼴로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이게 보편적인 정서는 아니겠지. 하지만 대부분의 병폐는 극단의 꼴로 드러나는 법이다. 우리 사회의 극단은 이미 갈 때까지 가고 있다. 그것이 당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할 때 이는 보다 처참해질 것이다. 당신과 무관하다 믿었던 그 사실이 언젠가 당신의 아들과 딸의 현실이 되어 그 처참한 상황을 직접 마주하고 싶지 않다면 보다 현명해져야 할 것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 부정할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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