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연단 위에 선 목사가 외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할지어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지어다!” 하지만 곧 자신의 제의복을 벗어버린 목사는 냉소적으로 뇌까린다. “X까고 있네.” 주영수(김명민)는 신실한 믿음을 지닌 목사이자 다정한 가장이었다. 하지만 그의 다섯 살 난 딸이 유괴당한 후, 돌아오지 못하자 그의 삶은 급변한다. 그의 삶을 지탱하던 믿음과 책임감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파괴된 사나이>는 제목 그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산산조각 나듯 부서져 버린 어느 사내에 대한, 혹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파괴된 사나이>는 부성에 관한 이야기이자 복수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형식적으로는 유괴영화이면서도 좇고 좇기는 범죄수사물의 궤적이 확인된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은 중의적인 동시에 기시적이다. 딸을 유괴한 <그놈 목소리>에 절규하며 동분서주하던 아버지는 <올드보이>처럼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대상을 향해 접근해 나가고, 당당하게 제 정체를 밝힌 범인을 <추격자>가 되어 뒤좇는다. 부성을 자극하는 유괴영화라는 점에서 <그놈 목소리>를, 자신의 삶을 파괴한 진범의 정체를 추적한다는 점에서 <올드보이>를, 후더닛 구조를 포기한 스릴러라는 점에서 <추격자>가 연상된다.
중요한 건 조합의 결과다. 물론 <파괴된 사나이>로부터 연상되는 이 장르영화들의 형태는 장르적 정형으로서의 기본적 골격을 선점한 영화들의 후발 주자로서 당연히 겪을 수 밖에 없는 필연적 기시감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무엇과 닮았다’가 아니라 그 ‘무엇’ 자체로서의 완성도에 놓여 있다. 말 그대로 유괴영화든, 체이스 영화든, 혹은 총합적인 스릴러가 됐든, 그 자체로서 완성도를 이룬다면 흠이 될 이유는 없다. <파괴된 사나이>는 그 지점에서 온전히 실패한 작품이다. 영화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무엇을 하고자 했던 것인지, 가늠조차 못하는 것처럼 맥락을 짚지 못한다. 마치 딸을 찾아 중구난방처럼 헤매는 아버지의 모습처럼 <파괴된 사나이>는 구심점이 없는 사연들을 엮어 넣은 것처럼 플롯이 제각각이다.
덕분에 극이 진행될수록 논리적인 설득이 무마되고 이는 낭비적인 신을 양산하는 가장 큰 원흉으로 발전한다. 예를 들자면 범인의 잔혹함을 과시하기 위해 등장하는 신은 사실 영화가 스스로 논리적 구조의 형성을 포기한 가운데 어떤 설득력을 장치하기 위한 강박을 느끼게 만든다. 이는 결국 러닝타임의 낭비다. 이는 <추격자>와 단적으로 비교가 가능한 지점인데, <추격자>는 시작부터 어떤 논리적 귀납에 대한 개연성 자체를 짓누른 채 감정적 충돌과 사연의 확장을 통해 인과를 축적해 나가는 영화라면 <파괴된 사나이>는 시작부터 뚜렷한 인과를 품고 있었음에도 그 인과에 대한 논리적 전진보다도 형태의 확장에만 치중한다. 덕분에 구조는 헐거워지고, 불필요한 장식들만 늘어나는 꼴이다. <파괴된 사나이>는 장르적 기시감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용서는 없다>와 함께 올해의 과유불급 스릴러로 꼽혀도 좋을만한 작품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나쁘지 않다. 김명민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면서도 절박한 심정의 아버지를 연기하는 김명민은 언제나 그렇듯 기능적으로 뛰어난 연기를 소화한다. 특히 처음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엄기준은 잔인무도한 사이코패스 성향의 살인마로서 클리셰적인 톤을 선보이지만 그 자체로서 호연을 펼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문제는 역시 그 열연을 연기쇼처럼 전락시키는 영화의 흐름이다. <파괴된 사나이>에서 축을 이루는 두 배우의 연기는 시작부터 끝까지 능숙한 기능적 흉내처럼 보이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배우의 연기적 톤의 문제라기 보단 그 연기를 보필해야 할 영화의 흐름이 연기를 잘 흡수하지 못한 채 겉도는 덕분이다. 배우들이 안간힘을 쓸수록 연기와 연출 사이의 괴리감이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진짜 ‘파괴된 사나이’는 영화 속에서 열연을 펼치는 배우들이거나 혹은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파괴된 사나이>는 제목 그대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산산조각 나버린 어느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그놈 목소리>처럼 절규하는 아버지는 <올드보이>처럼 영문을 모른 채, 자신을 괴롭히는 범인을 <추격자>처럼 좇는다. 후더닛 구조를 포기한 스릴러라는 점에서 도전적인 작품이지만 결과물은 지극히 실패에 가깝다. 좀처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것마냥 맥락의 가닥을 잡지 못하는 영화 속에서 배우들의 열연은 연기쇼와 같은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있다는 인상마저 든다. 지나치게 의욕만 앞선 장르적 기시감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용서는 없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올해의 과유불급 스릴러로 꼽힐만한 작품이다.
<내 사랑 내 곁에>를 띄운 건 김명민이지만 방점을 찍는 건 분명 박진표 감독이다. 김명민의 헌신과 하지원의 백업이 조화를 이룬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배우들의 공헌도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대사의 함량 미달이다. 지나치게 많은 대사량을 보유한 동시에 관객의 감수성을 훼손할 정도로 직설적인 대사로 감정을 자꾸 설명하려 든다. 특히 후반부 백종우(김명민)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독백신은 지나친 오용이다. 합의되는 것처럼 급작스럽게 진전되는 로맨스를 깎아지른 절벽마냥 드러내며 출발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감정을 진전시키기보단 변이하듯 전시한다. 쉽게 웃고 쉽게 울다가도 곧잘 정색한다. 마치 신파지만 신파로서 기능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듯 비극적 감수성에 발을 담그다 이내 달아난다. 사랑과 죽음을 무게중심으로 둔 플롯을 평행선처럼 대치시키며 멜로적 감수성을 확보해나간다. 일종의 평행선처럼 대치한 두 플롯이 각자 감정의 영역을 확보하며 이야기의 영역을 확대해나가지만 좀처럼 접목되지 못한 채 별개의 영역을 맴도는 두 플롯은 <내 사랑 내 곁에>의 감정을 분열시켜나간다.
루게릭병에 걸려 사지가 굳어가는 남자와 시체 닦는 여자의 로맨스. 죽음과 밀접한 두 사람의 연애는 끝내 눈물을 부르고 말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내 사랑 내 곁에>가 자아내는 멜로적 감수성의 출처는 사랑이 아니라 죽음이다. 루게릭병에 걸린 종우(김명민)의 육체와 정신이 질병에 잠식되어가는 수순을 그려나가는 과정이 사랑의 언약과 운명적 파기보다도 인상적이다. 무기력한 희망을 역설하기 보단 비극의 실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의 운명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삶에 대한 성찰이 예기치 않게 스며드는 작품이다. 극단적으로 체중을 감량하며 연기에 임하는 김명민의 헌신을 통해 확보한 진정성도 이에 기여한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죽음을 앞두고 피로한 삶에 체증을 느끼는 인물의 얼굴을 마주할 때가 사랑에 대한 속삭임이나 처절한 고백보다도 와 닿는, 로맨스보단 타나토스적 멜로다.
불치병에 걸린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 결말은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남자는 죽을 것이고, 여자는 망자가 된 연인 생각에 눈물지을 것이 빤하다. 결국 그 눈물을 얼마나 식상하지 않게 포장하고 그 수위를 어떻게 조절하느냐, 가 <내 사랑 내 곁에>의 관건인 셈. (궁극적으로 비극을 연출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라 할만한) 로맨스를 도입부에서부터 급작스럽게 밀어붙이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쉽게 웃고 쉽게 울면서도 곧잘 정색하는 영화다. 좀 더 농익을만한 감정들이 인위적인 수순에 의해 절제되고 감정적 고양을 차단당하며 인색할 정도로 얕은 수위의 감정을 허락 받는다.
모친상을 당한 종우(김명민)와 장례대행사에서 일하는 지수(하지원)가 만나 곧 연인이 되는 과정은 감정선의 설득력을 배려하지 않은 것마냥 급작스럽다. <내 사랑 내 곁에>는 감정의 무르익음을 설명하며 감정선의 설득력을 획득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마냥 멜로의 시작을 무뚝뚝한 단면처럼 잘라내듯 내보인다. 그 이후로 농밀하게 진전되는 로맨스는 비극적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환경을 외면하듯 생기 있게 그려진다. 전후반부의 감정적 격차를 통해 신파적 깊이를 우려내는 <너는 내 운명>과 마찬가지로 <내 사랑 내 곁에> 역시 전후반의 감정적 격차를 두드러지게 나타내며 감정선을 조절한다.
감정이란 것이 매번 설득력 있는 서사를 담보로 서서히 우러나는 것이 아님을 인지한다면 급작스런 감정적 변화를 선보이는 서사적 흐름에 설득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 역시 무의미한 일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내 사랑 내 곁에>가 선택한, 본질적으로 박진표 감독이 선택한 감정의 급변이 그 방식의 활용면에서 효율적인가를 의심해볼 여지는 있다. 그것이 박진표식 멜로라는 이름으로 이해되기 이전에 그런 감정적 절제가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발생한다. 직접적인 대사와 나레이션 독백까지 동원하며 감정을 직접 실어 나르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스크린 밖에 놓인 관객의 감정이 무르익기를 차분히 기다리지 못하는 영화다. 관객 스스로가 그 감정선에 들어서기 전에 스크린은 감정을 뚝뚝 떨어뜨리다 일거에 방류한 뒤 곧잘 표정을 바꿔버리고 지난 감정을 탈색시킨다.
최루성 신파를 지양하고자 하는 의도였다면 어느 정도 인정할만한 방식이지만 그 의도 내에서도 거둬내야 할 감정적 수긍이 있었다면 그 방면에서는 실패한 형식이다. 멜로적 감수성을 통해 승부수를 띄우는 <내 사랑 내 곁에>가 눈물을 자아내는 멜로의 상투성을 포기한 건 도전적이나 그 의도 안에서 숙성시켜야 할 감정적 키를 조절하지 못했다는 건 역시나 식상한 일이다. 동시에 로맨스와 죽음에서 비롯되는 멜로적 감수성이 유기적으로 연계되기보단 별개적으로 괴리되는 인상이다. 마치 평행선을 달리는 감정처럼 서로 마주선 두 형태의 멜로적 플롯을 끝내 이어 붙이지 못한 <내 사랑 내 곁에>가 죽음과 사랑이라는 두 개의 커다란 맥락을 접목시키는데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말해도 될 것이다.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인상적이라 할만한 지점은 루게릭병에 걸린 종우(김명민)의 육체와 정신이 질병에 잠식되어가는 수순을 설득력 있게 그려나가는 과정에 있다. 현실적인 좌절감을 외면하기 위해 비극을 외면하고 희망을 연기하던 인물들이 비극의 무게에 무기력하게 짓눌리는 희망의 실체를 발견하는 순간, 삶은 좌절로 급격하게 내려앉는다. 무기력한 희망을 역설하기 보단 비극의 실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인물들의 운명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내 사랑 내 곁에>는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삶에 대한 성찰이 예기치 않게 스며드는 작품이다. 극단적으로 체중을 감량하며 연기에 임하는 김명민의 헌신을 통해 확보한 진정성도 이에 기여한다.
<내 사랑 내 곁에>를 부각시키는 건 김명민의 헌신이겠지만 방점을 찍는 건 분명 박진표 감독이다. 김명민의 헌신과 하지원의 적절한 백업이 조화를 이루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배우들의 연기적 공헌과 별개로 그들이 던지는 대사에 이질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전적으로 대사의 함량 때문이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지나치게 많은 대사량을 보유한 동시에 종종 관객의 감수성을 훼손할 정도로 직설적인 대사로 감정을 설명하려 든다. 특히 후반부 백종우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독백신은 명백한 오용이다. 신파로서 지나친 감정적 고양을 자제하려 한 의도는 존중할만하나 그 의도 안에서도 실패의 흔적이 역력하다. <내 사랑 내 곁에>는 죽음을 앞두고 피로한 삶에 체증을 느끼는 인물의 얼굴을 마주할 때가 사랑에 대한 속삭임이나 처절한 고백보다도 와 닿는, 로맨스보단 타나토스적 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