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 리치의 <셜록 홈즈>는 아서 코난 도일의 원작팬들에게는 이단에 가까운, 혹은 막연하게나마 지적인 영국 신사 이미지의 탐정 아이콘 셜록 홈즈를 연상하고 있을 대부분의 관객들에게도 낯선 인상이었을 것이다. 차분하면서도 치밀하게 정보를 수집해하가는 추리력의 대가라기 보단 호전적으로 주먹을 날리며 본능에 가까운 인지력을 통해서 사건을 예견해나가는 셜록 홈즈는 캐릭터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를 넘어서는 이질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영화화된 <셜록 홈즈>는 코난 도일의 소설을 빌린 스핀오프라고 이해했을 때 보다 쉽게 받아들여질 만한 결과물이다. 실질적으로 영화의 원안이 된 건 각본에 참여했던 리오넬 위그램의 코믹북이기도 했다.
<셜록 홈즈>는 원작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가상의 캐릭터 블랙우드(마크 스트롱)를 셜록 홈즈에 대적하는 악으로 설정하며 고전적인 추리물을 거대한 음모론의 세계로 확장해낸다. 사교 집단의 수장으로서 국가의 안위까지 위협한다는 블랙우드는 셜록 홈즈에게 액션 히어로로서의 활약상을 덧씌우기 위한 수단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가 구상한 세계관의 스케일에 비해서 그 대칭점에 놓인 블랙우드의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미약하여 그 세계관 자체가 낭비가 되는 맹점이 발견된다. 하지만 셜록 홈즈와 왓슨(주드 로)을 버디무비의 구도로 세워 넣으며 위트와 활기를 불어넣으며 캐릭터로서의 매력을 어필하는데 성공했다. <셜록 홈즈: 그림자 게임>은 전작에서 얻어낸 가능성, 즉 새롭게 재해석된 캐릭터의 활약상을 보다 구체화하는데 성공한 인상이다.
조커의 등장을 알리는 <배트맨 비긴스>의 엔딩처럼 <셜록 홈즈>에서도 코난 도일의 원작에서도 소개되는 셜록 홈즈의 숙적 모리아티(자레드 해리스)의 등장을 예고하며 엔딩 크레딧을 올린다. 이 속편에서 모리아티는 악의 위압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무턱대고 벌려 놓은 인상이 강했던 <셜록 홈즈>의 세계관에 비해서 보다 확장된 전세계적인 음모론을 메우고도 남을 만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괴짜 기질의 천재로 그려지는 셜록 홈즈가 종잡을 수 없는 활력을 구축하는 것과 반대로 차분한 카리스마로 극을 지배하는 모리아티의 존재감은 극 전반에 적절한 서스펜스를 새겨넣으며 영화의 음모론적 세계관을 보다 근사하게 정착시킨다. 셜록 홈즈와 왓슨은 모리아티가 설계한 체스판을 어지럽히고 분쇄하는 모종의 말처럼 움직이는데, 팽팽하게 맞붙는 셜록 홈즈와 모리아티의 대비가 흥미롭다. 자레드 해리스의 중후한 연기 또한 인상적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셜록 홈즈와 주드 로의 왓슨 듀오는 전작만큼이나 활력적인 버디무비의 위트를 자아내고, 가이 리치 특유의 스타일리시로 치장된 액션 시퀀스는 인상적인 순간을 포착해낸다. 특히 중후반부에 고속 촬영으로 묘사되는 숲 속 추격 시퀀스는 이번 속편에서 가장 유려하게 회자될만한 한 수다. 물론 셜록 홈즈라는 내피보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외피가 선명하게 눈에 띄는 이 시리즈는 예측불가능한 배우의 가능성이라는 장점과 캐릭터 본연의 매력이 상실된 단점을 여전히 고스란히 끌어안고 있다. 다만 암묵적인 로맨스의 노스텔지어와 후반부의 반전적인 상황을 통해서 자기 희생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야생마와 같은 캐릭터의 성숙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발전적이다. 또한 이질적인 캐릭터의 형태도 두 편의 시리즈를 거듭하며 좀 더 익숙해지는 형세다.
이성적인 추리물의 세계관을 감각적인 액션과 활극적인 캐릭터의 구도로 팽창시킨 이 시리즈는 보다 공고해진 자기 논리를 통해서 본격적인 프랜차이즈로서의 진정한 동력을 얻어냈다. 캐릭터에 관한 프롤로그 같았던 전편에 비해서 <셜록 홈즈: 그림자 게임>은 진정한 출발점이라 불릴 만한 속편인 것이다.
<셜록 홈즈: 그림자 게임>은 전작에서 얻어낸 가능성을 보다 확실하게 구체화하는데 성공한 인상이다. 셜록 홈즈의 숙적으로 알려진 모리아티 교수가 등장하는 이번 속편은 전편에 비해서 그럴 듯한 긴장감이 조성된다. 가이 리치가 벌려 놓은 영화 속 세계관의 스케일에 비해서 홈즈가 상대하는 악의 위압감이 부족해 보였던 전작에 비하면 이번 작품에서 홈즈가 대적하는 모리아티는 보다 확장된 음모론적 세계관을 메우고도 남을 존재감을 드러낸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셜록 홈즈와 주드 로의 왓슨 듀오가 발생시키는 버디무비의 위트는 여전히 활력적이고, 가이 리치 특유의 스타일리시로 치장된 액션 시퀀스는 인상적인 순간을 포착해낸다. 이성적인 추리물의 세계관을 감각적인 액션 블록버스터로 변주한 이 시리즈는 보다 공고해진 세계관을 마련한 이번 속편을 통해서 본격적인 프랜차이즈로서의 진정한 출발 동력을 얻어냈다.
금속슈트를 입은 히어로.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는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과 같은 대부호지만 고뇌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 쓴 가면 아래에서 철저하게 신분을 감추는 브루스 웨인과 달리 토니 스타크는 과감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혀낸다.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나 <엑스맨>의 뮤턴트들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할 이유도 없다. 그는 부유하며, 똑똑하고, 외향적이다. 타인의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는 것을 즐길 줄 아는, 무대 매너가 대단한 셀레브리티의 전형에 가깝다.
토니 스타크에게는 히어로로서의 대단한 사명감이 없다. 물론 <아이언맨>에게도 ‘능력’과 ‘책임’의 알고리즘은 작동된다. 그러나 그것이 올가미 같은 숙명이 아닌 삶의 유희를 이루는 기반처럼 활용된다는 점에서 특이점이 발견된다. 토니 스타크는 ‘평화란 적보다 더 큰 힘을 가졌을 때 가능하다’는 선친의 말을 신봉하는 사내다. 그에게 힘이란 평화유지라는 혜택을 통해 얻어내는 유명세의 권위, 혹은 그 자체만으로도 자신의 이상을 구축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의 체제나 다름없다. 히어로로서의 의무와 개인의 정체성 안에서 고민을 거듭하는 기존의 히어로물과 <아이언맨>시리즈를 구분하게 만드는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아이언맨2>는 이런 인물의 성격을더욱 적극적으로펼쳐 보인다. 자신이 아이언맨임을 밝히는 토니 스타크의 모습에서 끝났던 전편의 서사를 이어받은 후속편은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만한 아이언맨 슈트를 국가에 귀속시키라는 의회의 요구를 맞받아친다. 심지어 대중의 앞에 서서 자신의 존재를 과감하게 어필한다. ‘세계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 나 때문이라고 말하진 않겠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도 모자라, 이를 통해 인기와 영합하는 셀레브리티 히어로는 분명 이례적인 것이었고, 여전히 이례적이다. 이를 통해 <아이언맨>은 금속슈트를 입은 히어로의 액션 이상으로 특별한 묘미를 장착시킨다.
성공한 히어로물, 더 넓게 말하자면 액션 블록버스터가 시리즈로 거듭나는 건 당연한 관례가 됐다. 애초에 기획 단계부터 흥행을 목표로 두고 그 이후의 계획을 설정해내는 근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제작 행태를 보자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새로운 시리즈들은 어김없이 스케일의 확장이라는 엔터테인먼트의 양적 팽창울 통해 새로운 시리즈로서의 의미를 획득한다. <아이언맨2> 역시 새로운 시리즈가 확장을 통해 새로운 흥미를 유발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예기치 않게 변경된 캐릭터를 논외로 둔다 해도) 새로운 등장인물들은 서사의 너비를 넓히고 개연성을 확대시킨다.
중요한 건 시리즈를 거듭하는 어느 히어로 무비가 그러하듯이새로운 적의 등장과 함께 주연 캐릭터가 맞서야 할 필연적인 위기를 그린다. <아이언맨2>에서 아이언맨은 내외적인 위협에 당면한다. 러시아의 물리학자 아이반 반코(미키 루크)는 (아이언맨의 슈트에 활용되기도 하는) 원자로 기술의 도면을 스타크 기업에 강탈당했다는 한을 안고 쓸쓸히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고, ‘위플래시’를 개발해 그를 위기에 빠뜨린다. 동시에 스타크 기업의 경쟁사 CEO인 저스틴 해머(샘 록웰)는 토니 스타크를 넘어서기 위해 그를 몰락시킬 궁리를 한다. 가장 큰 적은 토니 스타크의 몸에 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중금속 팔라듐을 사용한다. 이는 몸에 치명적인 중독 현상을 일으키고 이로 인해 토니 스타크는 슈트를 입을 때마다 죽음과 근접해간다.
새롭게 등장한 적과 사투를 벌이고, 이전에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핵장치로 인해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토니 스타크는 그럼에도안티히어로의 길을 걷지 않는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생존에 대한 고민으로 대체되지만 이는 히어로를 비범하게 수식하는 가치관이나 의식을 형성하는 계기로 작동되기 보단 말 그대로 고비로서 장착될 뿐이다. 무엇보다도 <아이언맨2>는 마블 엔터테인먼트의 장기적 계획을 위한 밑그림으로서 도구화되고 있다. <아이언맨>의 쿠키에서 닉 퓨리(사무엘 L. 잭슨)를 등장시키며 마블 코믹스의 슈퍼 히어로 열전이나 다름없는 <어벤져스>에 대한 팁을 남겼던 사례는 <아이언맨2>에서 보다 노골적으로 확장되고 적극적으로 그 계획을 홍보한다. 특히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의 등장은 그 캐릭터의 비중과 무관하게 시리즈의 밑바탕을 다지기 위한 포석으로서 보다 유용하다. 물론 <어벤져스>에 대한 특별한 기대감이 없는 관객에게 이는 불필요한 사족이자 시리즈로서의 일관성을 해치는 요인처럼 읽힐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근본적으로 <아이언맨2>는 단지 시리즈의 속편으로서뿐만 아니라 제작사의 미래를 위한 또 다른 시작점에 가깝다. 그만큼 시리즈 자체로서의 야심을 벗어난 사족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를 테면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와 같은- 그만큼 시리즈 자체로서의 서사적 내밀함이 전작에 비해 조금 부실해졌음을 지적할만하다. 하지만 캐릭터의 종이 늘었음에도 저마다 적당한 쓸모를 자랑하며 액션은 보다 강화됐고, 볼거리는 충만하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개성은 여전히 영화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가 걸친 금속슈트의 약발은 유효하다. 게다가 (불가피하게 배우가 교체된) 토니 스타크의 친구 제임스 로드 중령(돈 치들)은 아이언맨의 동료 워 머신으로 거듭나며 액션의 묘미를 두 배로 키운다. 다만 화려한 등장이 주는 기대감에 비해 졸속적으로 퇴장하는 듯한 미키 루크만큼은 다소 아쉽다.
새로운 적이 등장했고, 위기는 필연적이다. 하지만 <아이언맨2>는 안티히어로의 길을 걷지 않는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생존에 대한 고민으로 대체되고, 가문의 영광에 대한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 더욱 강건한 의식으로 개척된다. 전작에 비해 화끈한 볼거리의 비율이 줄어들고 서사적 무게가 늘어났다는 점이 팬덤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미지수지만 여전히 눈이 즐겁고, 새롭게 추가된 캐릭터들은 적절한 쓰임새를 자랑한다. 시리즈로서의 야심은 단순한 확장보단 발전적 경로를 확보해냈다. 슈트의 약발은 여전히 대단하다.
둥근 챙이 앞뒤로 달린 디어스토커를 쓰고, 어깨를 덮은 긴 케이프가 인상적인 인버네스 코트 안에 단정한 라운드 슈트를 갖춰 입은 채 중후한 파이프 담배를 물고 한 손엔 지팡이를 쥔, 우리가 생각하는 셜록홈즈의 모습. 1887년 아서 코난 도일의 ‘주홍색 연구’에 처음 등장한 이래로 세기를 초월해 고전적인 추리문학의 아이콘이 된 셜록홈즈는 19세기와 20세기 사이 영국을 배경으로 활약하는 셜록홈즈는 아서 코난 도일의 고전추리소설 ‘셜록홈즈’시리즈의 셜록홈즈란 분명 그런 남자다. 세련되고 지적인 이 영국탐정은 그가 등장하는 원작소설을 굳이 접하지 않은 이에게조차 그 이미지를 어필할 정도로 시대를 뛰어넘어 장르적인 아이콘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구축했다.
가이 리치가 연출한 <셜록홈즈>는 우리가 잘 알거나, 혹은 잘 알지 못해도 그럴 것이다 생각하는 셜록홈즈의 이미지와 거리를 둔 작품이다. 아서 코난 도일의 원작소설과 함께 리오넬 위그램의 코믹스북을 참고해 제작했다는 가이 리치의 <셜록홈즈>에서 셜록홈즈(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활발한 두뇌활동 못지 않게 근육을 움직이길 즐기는 사내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추리력을 통해 이성적으로 사건의 꼬리를 좇는 아서 도난 코일의 셜록홈즈와 달리 <셜록홈즈>의 셜록홈즈는 주먹질도 불사할 정도로 다혈질이며 호전적인 본능을 감추지 못하는 마초적 사내다. 물론 아서 도난 코일은 일찍이 그의 셜록홈즈 시리즈 초기작에서 그가 검도나 권투에 능하다고 기록한 바 있다. 하지만 <셜록홈즈>에서 셜록홈즈는 분명 원작의 그것을 통해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한 움직임을 선사한다.
궁극적으로 <셜록홈즈>는 신사적인 영국의 탐정 아이콘을 고전적 세계관의 히어로 캐릭터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이다. 이를 테면 고전 소설의 캐릭터 자체를 영화적으로 리메이크해버린다고 할까. 원작 팬이라면 그것이 불순하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셜록홈즈>는 신사적인 영국의 고전아이콘의 많은 부분을 새롭게 인식시킨다. 사실상 <셜록홈즈>는 셜록홈즈를 셜록홈즈라 쓰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 읽는다. 셜록홈즈의 이름을 빌렸을 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배우의 특성이 적극적으로 캐릭터의 기반을 이룬다. 심지어 원작에서 등장하지 않는 기괴한 악당 블랙우드(마크 스트롱)를 등장시키는 것에서부터 원작의 재현이 아니라 원작의 영화적 차용이라 불려도 좋을 자질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셜록홈즈의 단짝인 왓슨(주드 로)과의 관계를 그리는 방식에서도 다를 바 없다.
<셜록홈즈>는 추리극이라기 보단 액션활극에 가까운 버디무비로 완성됐다. 셜록홈즈와 왓슨과의 관계를 그려나가는데 러닝타임의 절반 가량을 할애하는 <셜록홈즈>는 사건의 해결과정에 주목하는 추리적 묘미보다도 인물의 관계를 그려내는 드라마적 감정이 돋보이는 영화다. 동시에 셜록홈즈의 유일한 연인이라 추측되곤 했던 아이린 애들러(레이첼 맥아담스)를 등장시키며 그의 순애보적 감정마저 묘사하는 <셜록홈즈>는 간접적으로 유추되던 캐릭터의 감정적 단서마저도 적극적인 사건의 형태로서 구체화시킨다. <셜록홈즈>의 셜록홈즈는 현장에 자리한 미세한 단서들을 통해 사건을 따라 걷는 영민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사건보다 앞서 달리는 행동파 탐정이다.
만약 셜록홈즈가 아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배우에 호감을 지닌 관객에게 <셜록홈즈>는 즐길만한 캐릭터적 묘미를 품은 오락영화로서 유용하다. 또한 <셜록홈즈>의 원작을 접하지 못한 관객에게 셜록홈즈의 원형은 딱히 중요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면에서 <셜록홈즈>는 가이 리치의 스타일보다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공이 팔 할인 작품이다. 첨언하자면 왓슨을 연기하는 주드 로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조합이 이루는 캐릭터적 재미가 큰 맥락을 이루는 작품이다. 그러나 <셜록홈즈>는 캐릭터의 매력을 보좌하는 내러티브의 묘미가 탁월하다 말하기 어려운 영화다. 특히 셜록홈즈가 상대하는 블랙우드는 <셜록홈즈>에서 마치 셜록홈즈의 탐정적 활약을 그리기 위해 단순하게 배치된 소비적 악당처럼 보인다. 동시에 사건의 해결방식에서도 셜록홈즈의 능력은 다소 과장돼있다. 이성적인 방식의 추리를 차분히 따라잡기 보단 본능적인 감각에 의지해 움직이는 셜록홈즈의 모습은 실로 파격적이라기 보단 안이하다. 만약 추리극의 형태로서 <셜록홈즈>를 기대한 관객이라면, 그 이전에 셜록홈즈라는 본래적 이미지에 호감을 느끼고 영화에 접근했을 관객이라면 배신감을 안고 상영관을 나서게 될 정도로 <셜록홈즈>는 분명 셜록홈즈의 이미지를 배반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마치 <배트맨 비긴즈>의 결말이 조커의 등장을 암시하며 끝나는 것처럼 <셜록홈즈>의 결말도 (셜록홈즈의 최대 숙적인) 모리아티 교수의 등장을 암시하며 끝난다. 히어로 캐릭터로 재생산된 셜록홈즈는 자신의 성공을 장담하듯 차기 시리즈의 제작마저도 가시화시킨 셈이다. 고전적인 탐정을 히어로로 탈바꿈한 시도 자체를 불순하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아서 도난 코일의 셜록홈즈가 가상의 캐릭터인 이상, 가이 리치의 셜록홈즈가 제시하는 새로운 가상성을 거부할 이유는 없으니까. 다만 그것이 그만큼 효과적인 가치를 품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캐릭터 시리즈를 위한 습작처럼 보이는 <셜록홈즈>가 딱히 성공적이라 말하긴 어렵다. 물론 새로운 시리즈를 통해 이를 만회할 수 있다면 <셜록홈즈>는 그 시리즈의 방아쇠로서 재평가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시리즈를 위한 가장 훌륭한 밑천이란 점에서도 이 가능성은 적지 않은 설득력을 품고 있다.
삶은 악보가 없는 연주와 같다. 저마다의 일상으로 마디를 채우고, 삶의 악절을 이룬 뒤, 종래엔 하나의 악보로서 인생을 거둔다. 소나타처럼 단정하게 저마다의 멜로디를 보존하는 개인의 삶은 콘체르토(concerto)와 같은 긴장과 이완의 협주적 관계로서 세계의 하모니를 이루기도 하며 어느 누군가는 거대한 심포니처럼 웅장한 울림을 전하고 영원을 산다. 저마다의 인생은 이 세계의 악장을 이루는 크고 작은 악절이다. 멜로디이며, 리듬이고, 하모니다. 그 삶에 준비된 악보는 없다. 누구나 텅 빈 오선지와 같은 시간을 제 삶으로 채워나간다. 누구나 <솔로이스트 The Soloist>로서 삶을 연주해나간다.
2005년 4월 17일, LA타임즈엔 ‘2현으로 세상을 소유한 바이올린 주자(Violinist Has the World on 2 Strings)’라는 헤드라인의 칼럼이 실렸다. ‘포인트 웨스트(POINTS WEST)’를 연재하는 인기칼럼니스트 스티브 로페즈의 글이었다. LA의 ‘펄싱 스퀘어(Pershing Square)’공원에 있는 베토벤 동상 주변에서 들려오는 ‘베토벤 소나타’를 쫓아간 ‘스티브 로페즈(Steve Lopez)’는 2현밖에 남지 않은 고물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나다니엘 안소니 에이어스(Nathaniel Anthony Ayers)’를 만났다. 그 뒤로 스티브는 나다니엘에 관한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도시의 거리 정책에 대한 의견을 쏟아냈다. 결국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고 도시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LA타임즈 기자이자 인기칼럼니스트인 스티브 로페즈(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정신적 질환으로 인해 줄리어드 음대를 중퇴하게 된 거리의 악사 나다니엘(제이미 폭스). 스티브 로페즈가 나다니엘에 관해 연재한 칼럼을 엮어 전기적 소설로 각색한 동명원작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솔로이스트>는 실화와 영화의 협연이다. 단조와 같은 삶 속에서 피로와 권태를 느끼는 스티브는 전환을 위한 쉼표를 갈망한다. 도돌이표와 같은 착란에 갇힌 나다니엘에겐 새로운 삶을 위한 마침표가 필요하다. 나다니엘을 위해 헌신적인 원조를 마다하지 않는 스티브는 나다니엘을 통해 드라마틱한 기사 소재가 아닌 진짜 삶을 정화시키는 감동을 얻는다. 나다니엘은 스티브의 진심을 통해 점차 세상에 마음을 열어나간다.
스티브와 나다니엘의 관계에 망원경을 들이미는 동시에 그들의 개별적 삶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솔로이스트>는 현실에서 얻은 상처를 치유하는 두 사람의 관계를 묘사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 관계적 묘사방식에서 현실적 실화를 스크린에 옮겨 넣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얻어내기 어렵다. 형태적으로 관계를 묘사해나가지만 재현적 이미지 이상의 정서적 감흥에 도달하지 못한다. 제인 오스틴 원작의 <오만과 편견>과 이언 매큐언 원작의 <어톤먼트>와 같이 영국작가들의 텍스트를 풍요롭고 섬세한 이미지로 전환해낸 조 라이트의 감수성 어린 재능도 <솔로이스트>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섬세한 문체를 예민한 영상으로 치환하고 풍요로운 문장을 풍부한 색채에 반영하며 조 라이트의 감각을 비범하게 드러내던 전작들과 달리 <솔로이스트>는 또렷하고 선명한 이미지가 주류를 이룬다. 물론 콘트라베이스 현을 포착하는 클로즈업 광각 샷과 함께 베토벤의 관현악을 듣는 나다니엘의 심상을 빛의 파동으로 치환한 환상적인 장면과 같이 예민한 시선과 풍요로운 감각을 드러내 보이긴 하나 전반적으로 <솔로이스트>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이미지는 그 드라마만큼이나 평이한 결과물에 가깝다.
현실은 때로 영화보다도 영화 같은 감동을 선사한다. 그건 <솔로이스트>가 재현해낸 실화 역시 마찬가지다. 스크린은 단지 현실의 감동을 반영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현실이 이뤄낸 감동의 본위가 스크린에 얼마나 충실히 반영되고 있는지, 혹은 스크린이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발췌해내고 있는지가 주요한 관점으로서 감상을 지배하게 된다. 물론 영화의 끝에 다다라서야 뒤늦게 그 사연의 실체가 된 현실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것이 실화라는 정보를 미리 접하지 못한 관객에게) <솔로이스트>는 허구적 사연을 감상하고 있었다고 판단한 관객의 착시를 보다 강렬한 감상으로 이끌어낼 가능성이 다분한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끝에 걸린 현실성의 환기가 <솔로이스트>에서 가장 강렬한 대목이다. 영화보다도 영화 같은 현실을 통해 완성된 영화라는 점이 <솔로이스트>에 강한 방점을 남긴다. 이는 결론적으로 <솔로이스트>가 부여하는 영화적 감동이 뒤늦게 체감하는 현실에 대한 환기보다 놀라운 의미를 선사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동시에 두 인물의 관계와 함께 개별적 인물의 고독과 혼란을 묘사하는 영화는 두 영역에 놓인 정서를 적절히 다스리지 못하고 저마다 방치하듯 선을 벌려나가는 느낌을 준다. 덕분에 내러티브의 집중력이 응집되지 못해 감상을 흩뜨리고 있다는 인상을 느끼게 만든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제이미 폭스는 호연을 펼친다. 하지만 순차적인 수순을 따르듯 전개되는 드라마 속에서 두 배우의 연기 역시 평범함을 더하는 요소처럼 나열되는 것만 같다. <솔로이스트>는 영화를 뛰어넘는 현실의 가치를 방증하는 작품에 불과하다. 딱히 부족한 인상을 남기는 건 아니지만 특별한 인상을 남기는 것도 아니다. 영화의 말미에 다다라 스티브 로페즈와 나다니엘 안소니 에이어스의 근황을 전하는 자막이 영화적 재현보다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실화적 유산을 넘어서지 못한 재현적 한계의 사례로서 유용해 보인다. 마치 원곡의 울림에 도달하지 못하는 연주력을 선보이는 관현악단의 공연을 보는 것만 같다. 다만 에사 페카 살로넨의 지휘 아래 베토벤 심포니를 연주하는 LA 필하모닉의 공연은 어떤 영화적 얼개와 별개로 좋은 부록의 역할을 한다. 만약 현재에도 그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두 인물의 실제적 모습을 보고 싶다면 LA타임즈 홈페이지에 있는 스티브 로페즈의 칼럼을 검색해볼 것. 칼럼과 함께 첨부된 동영상 너머의 실제적 삶은 재현이 넘볼 수 없는 감동을 전달한다.
무쇠팔, 무쇠다리,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쇠를 두른 팔, 무쇠를 두른 다리. 무쇠로 만든 인조인간 로봇이 아닌 티타늄 고합금 갑옷을 입은 인간. ‘맨’자 돌림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 <아이언맨>은 코믹스 출신 히어로들의 바통을 이어받은 스크린의 새로운 아이콘이다. 배다른 형제 히어로들과 마찬가지로 <아이언맨>은 세상을 구원하는 ‘맨’으로서의 의무를 스크린에서 성실히 이행한다. 하지만 그는 놀라운 초인이라기보단 유능한 개발자에 가까우며 안티히어로의 고독을 벗어 던진 외향적 히어로다.
선친의 대를 이어 무기회사 스타크 기업(Stark Industry)의 CEO 자리에 오른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재벌2세로서의 부(富)뿐만 아니라 유전자적 자질까지 물려받았다. 미국의 핵미사일 개발에 공헌했다는 부친의 유능함은 어린 나이에 엔진을 만드는 아들의 재능으로 이어졌고 MIT공대를 졸업한 천재적인 과학자로서의 명성은 CEO로서의 사업적 재능과 결탁된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매력에서 비롯된 여성편력을 가십으로 제공하며 셀레브리티 못지 않은 대중적 영향력을 뽐내기도 한다. 하지만 평화란 적보다 더 큰 힘을 가졌을 때 가능하다는 아버지의 말을 신조처럼 여기는 그의 신념이야말로 토니 스타크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화두다.
<아이언맨>은 자신의 배다른 형제 히어로들이 그러했듯, 거대한 스케일에 가득 채운 영상 테크놀로지를 전시하는 블록버스터의 체험을 전시하기 이전에 서사적 설득력을 구성한다. 하지만 <아이언맨>은 그 형제 히어로들과 다른 타입의 캐릭터 구상도를 그린다. 자신의 회사가 개발한 새로운 신무기를 시연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미군기지로 날아간 스타크는 테러범들의 습격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힌다. 생명유지장치를 통해 가까스로 생을 유지한 그는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넣었던 무기가 자신의 회사에서 만든 것임을 알게 된다. <아이언맨>은 냉전 이후, 세계를 장악한 서구와 중동의 분쟁지역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는 <아이언맨>의 정체성이 무엇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적절한 대답이 될만한 것이다.
스타크는 피터 파커(<스파이더맨>)나 브루스 웨인(<배트맨>)보단 (<본>시리즈의) 제이슨 본이나 (<매트릭스>의) 네오를 닮았다. 산업적으로, 혹은 국방적으로나 국가적 수호에 기여하고 있다는 믿음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진실을 목도한 뒤에서야 완전히 전복된다. 이는 초현실적 능력을 지닌 히어로들의 사적 고뇌와 맥락이 다른 사례다. 뉴욕 타임스퀘어를 나는 영웅의 현실적 딜레마(<스파이더맨>)나 돌연변이 유전자를 초인적 능력으로 전시하는 특이성(<엑스맨>), 유년시절에 비롯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정의구현(<배트맨>) 등 기존의 히어로들이 세상을 구원하는 자신의 능력이 되려 세상과 반동되는 형질의 것임에 고뇌하는 것과 다른 맥락이다. 마치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타의 언덕에 오르는 것처럼 인내하던 기존의 영웅담과 달리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는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세상의 오류를 깨닫고 원점으로 돌아가,(<본>시리즈) 자신을 함몰시킨 세계에 대항하고 맞서 싸운다.(<매트릭스>)
물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아이언맨>은 고도화된 이미지 기술을 전시할만한 그릇의 너비를 넓히는 것에 관심이 많다. 이는 애초에 <아이언맨>이 <본>시리즈나 <매트릭스>와 같은 성찰보단 <트랜스포머>와 비견될만한 스펙타클을 지향한 할리우드 오락영화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됐다’는 토니 스타크의 신념은 자신이 만들어낸 폭력의 구심을 척결하겠노라는 결심을 부르지만 그로부터 발생하는 행위는 결국 더 강한 힘을 통한 합리적 수단의 공격력을 갖추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강한 힘을 구사하는 캐릭터의 폭력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캐릭터의 성숙을 끼워 맞추는 수준에 머무른다. –이는 후에 <아이언맨>이 시리즈로 발전한다면 개인적 딜레마로 작용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물론 그것은 단지 영화적인 한계라기 이전에 영화가 인식하는 현실주의적 자괴감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폭력에 비폭력으로 대항할 수 없다는 현실적 자포자기, 혹은 상황을 그렇게 몰고 가는 현세태의 공격성-
거대한 스케일로 관객의 말초신경을 압도하던 블록버스터의 관성적 변화-진화가 아닌-가 무감각해진 시대에서 <트랜스포머>는 육중한 외형을 전시하는 것만큼이나 세밀한 구조변화를 조작하는 것도 유용함을 입증하는 사례가 됐다. <아이언맨>은 이를 응용한 포스트<트랜스포머>다. <트랜스포머>에서 변신로봇의 디테일한 변신과정을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아이언맨>에서 초합금 갑주가 장착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흥미롭다. 마치 유년시절 변신로봇을 조작하던 재미만큼이나 프라모델을 조립하는 재미가 만만치 않았던 것처럼. 또한 인간의 연약한 피부를 금속슈트로 감싼 아이언맨의 대결은 육중한 변신로봇들이 불꽃을 튀며 금속재질의 몸체를 부딪히던 <트랜스포머>와 유사한 이미지를 그린다.
다만 <트랜스포머>가 별나라에서 날아온 외계 우주인이라는 캐릭터의 서사적 공백을 스펙터클로 대체했던 것과 달리 <아이언맨>은 중반부가 넘어서는 순간까지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캐릭터에 대한 서사에 집중한다. <트랜스포머>에 비해 진지한 접근을 꾀하는 <아이언맨>은 전자에 비해 좀 더 성인적 취향의 스토리텔링을 고수한다. 게다가 포토제닉한 동시에 섹스 어필한 토니 스타크 역시도 성인 취향의 캐릭터에 가깝다는 점에서 <아이언맨>은 <트랜스포머>보다 성인을 배려한 장난감이라 할 수 있다. 스타크가 자신이 개발한 슈트를 장착한 뒤, 고공을 활주하며 내지르는 탄성은 마치 바이크나 스포츠카를 타고 질주하는 것과 비견해 보이기도 한다. 또한 그의 슈트가 업그레이드되는 과정은 바이크나 스포츠카에 옵션을 달거나 혹은 이를 튜닝 했을 때의 흡족함과 유사해 보인다.
물론 의문의 여지는 있다. <아이언맨>에서 첫 번째로 적대화되는 대상은 아프가니스탄의 무장단체로서 이는 유사 ‘알 카에다’의 이미지즘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대상임과 동시에 메카닉 슈트를 입은 토니 스타크에 비해서, 혹은 자신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어떤 이보다도 무지하고 열악해 보인다. 서구와 중동의 대립구도 안에서 이뤄지는 이미지의 단순한 대비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되, 그것이 선악의 대립과 맞물리는 동시에 우열의 이미지로 인식될만한 사안이란 점은 다소 문제가 있다. 물론 <아이언맨>은 그들의 테러행위를 뒤로 돕는 무기회사의 중역 오베디아(제프 브리지스)를 본질적인 악의 축으로 지명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굴과 천막에서 생활하는 아프가니스탄의 무장세력을 처단하고 그 이전에 그들의 살육행위를 전시하는 영화의 태도가 합리적인 폭력을 전시하기 위한 소모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란 혐의를 부른다. 이는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천명하며 끝을 낸 <아이언맨>이 (장차 시리즈로 진행된다면) 해결하지 못한 미성숙의 과제로 고민할만한 것이다.
스타크가 두른 갑옷의 상용화 여부의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고 (난해하지만) 영화가 제시하는 이론적 근거들에 적절히 수긍할 수 있는 이에게 <아이언맨>은 충분히 유희할만한 오락물로서 기능할만하다. 게다가 하이퍼 테크놀러지 공학기술을 자아의 갑옷으로 두른 인공 초인의 면모는 수준 이상은 아니더라도 함량미달은 아니다. 개과천선한 영웅의 면모가 가볍게 그려지긴 하지만 <아이언맨>은 그 직설적인 태도를 애써 심각하게 포장하기보단 확고하게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도 명쾌하다. 현실이 야기시키는 문제의식을 간과하지 않으며 이를 오락적 물량공세로 치환하는 의도는 참신하면서도 정치적으로도 무리가 없다. 이는 여름용 블록버스터가 유지할만한 적절한 평형감각이란 점에서 평가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