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질 액션스타의 시대는 갔다. 꽃미남과 짐승남이 공존하는 메트로섹슈얼의 시대 속에서 남성성을 어필하는 방식도 변하고 있다. 여자를 정복하는 마초의 시대에서 벗어나 여심을 사로잡는 남자들의 비결이 궁금하다면, 기억하라. 그래도 제 여자에겐 따뜻하겠지.
<트로이>
호메로스의 고전 대서사시 <일리야드>의 무대가 된 트로이 전쟁을 스크린에 옮긴 <트로이>는 서로 눈이 맞아 정분이 나버린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나의 도주로부터 발단이 된 트로이 전쟁을 그린 블록버스터 전쟁서사극이다. 하지만 <트로이>는 고전적인 웅장함을 자랑하는 전쟁영화이기 전에 안드로겐의 욕망이 낳은 트라우마와 딜레마 속에서 펼쳐지는 아드레날린의 대서사시다. 아름다운 여인에게 매혹 당한 왕자, 자신의 여인을 빼앗긴 채 복수심에 불타는 왕, 이를 빌미로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려는 또 다른 왕, 그리고 그 전선 속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자신의 야심을 드러내는 전사 등, <트로이>는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던 남성성의 승부욕이 경합하는 거대한 전장이다. 무엇보다도 무적의 영웅 아킬레우스 신화만큼이나 <트로이>가 주목한 것은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였다. 무분별한 야심의 각축장 속에서도 트로이를 사수하는 임무에 충실하던 명장 헥토르의 처연한 죽음은 <트로이>를 지켜보는 여성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007 카지노 로얄>
“본드, 제임스 본드”이 대사는 자신의 성과 이름이 2어절로 구성됐음을 굳이 친절하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제임스 본드는 이 대사를 통해 사열종대 앉아 번호로 연병장 두바퀴는 될 본드걸들을 양산해왔다. 전세계가 사랑한 스파이 <007>의 제임스 본드는 거듭되는 시리즈 속에서 첩보의 정석보다도 작업의 정석을 설명할 때 보다 익숙한 캐릭터로 변질되어 갔다. 그러나 21번째 시리즈 <007 카지노 로얄>과 함께 6대 제임스 본드로 선정된 다니엘 크레이그는 점차 호색해지던 <007>시리즈에 낯선 남자의 향기를 불어넣었다. 원조 제임스 본드였던 숀 코네리의 터프함을 연상시키는 다니엘 크레이그는 제임스 본드에게 강인한 남성성을 부여한다. 무엇보다도 다니엘 크레이그는 시리즈 최초로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는 제임스 본드라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대단한 여성 편력으로 세상 모든 남성들의 부러움을 사던 제임스 본드는 거칠지만 내 여자에게만 따뜻한 남자로 거듭나며 낡아가던 클래식에 뉴타입의 전기를 마련했다.
<록키 발보아>
자신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종종 손님들에게 영광의 시절을 이야기하는 록키는 링과 멀어진 지 오래인 퇴물 복서일 뿐이다. 하지만 새롭게 떠오른 젊은 챔피언은 노장의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든다. 90년대를 호령하던 액션스타 실베스터 스탤론의 프랜차이즈 <록키>시리즈의 5번째 시리즈로부터 무려 10년이 지난 뒤에 등장한 속편 <록키 발보아>는 시대를 호령하던 액션스타였지만 뒤안길에 선 실베스터 스탤론의 자전적 삶을 떠올리게 만든다. 단순히 근육질 스타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실베스터 스탤론의 록키가 복싱만 아는 바보가 아니었듯 <록키>시리즈는 각본가이자 연출가로서 스탤론이 지닌 재능의 총아와 같은 작품이다. 실베스터 스탤론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한 <록키>시리즈는 결국 <록키 발보아>를 통해 퇴물 액션배우로 낡아가던 그에게 회심의 크로스 카운터가 됐다. 자신이 사랑하던 애드리안의 무덤가에서 쓸쓸히 지난 날의 록영광을 회고하는 록키의 모습은 근육 속에 감춰져 있던 감성과 열정이 우리가 록키에게 열광을 보냈던 이유였음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300>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을 기초로 프랭크 밀러가 완성한 그래픽노블 <300>은 제3차 페르시아 전쟁의 하이라이트로 알려진 테르모필레 협곡 전투를 무대로 둔 작품이다. 이를 영화화한 잭 스나이더의 <300>은 실존적인 역사적 사건을 음울한 잿빛톤의 필터를 씌운 실사로 완성하며 환상적인 마초 판타지를 완성해냈다.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져야 한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스파르타 전사들은 팬티 한 장에 망토 걸친 헐벗은 몸이라도 스파르타식 식스팩 하나면 남자의 패션이 완성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한다. 동시에 그 식스팩이 단지 몸짱 화보를 찍기 위한 전시용이 아닌,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한 생존의 수단임을 증명하는 실전용임을 증명하는 스파르타 전사들은 마초 가족주의에 대한 환상을 이두박근의 두께만큼이나 증강시키는데 성공했다. 짐승남의 어원이 스파르타에 있었던 것인가 의심하게 만드는 그들은 진정한 남자의 매력이 4주 완성 식스팩에 있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하는 진정한 쾌남이다.
<아저씨>
<레옹>의 한국판 꽃미남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아저씨>는 아동매매조직에 납치된 소녀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자의 활약을 그리는 액션누아르다. CG로 그린 듯한 초현실적 몽타주와 슬림한 식스팩으로 뭇여성들의 안구를 정화시키고,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파괴력 있는 액션을 구사하며 뭇남성들의 심장까지 쫄깃하게 만든 원빈이 스스로를 ‘아.저.씨’라고 일컫는 순간, 대한민국 청년 99%는 ‘그래도 내 얼굴 정도면’이라는 오만을 떨치고 스스로 잉여로 전락했다는 수모를 감당해야 했다. 이웃집 소녀를 구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제 목숨을 걸고 사지로 뛰어드는 강인하고 고독한 꽃미남의 활약을 지켜본 당신이 먹지 말고 백날 피부에 양보한들 그의 우월한 유전자를 따라잡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면 쉽게 인정하라. 그대가 그냥 커피라면 원빈이 TOP라는 것을. 만약 원빈 앞에서 눈에 하트가 그려진 애인에게도 너 역시 그냥 커피라고 비아냥 거리며 있을 때 잘하라는 진리의 확률을 실험하고 있다면 그 따위 탐구정신은 그냥 넣어둬. 그 전에 솔로는 일단 눈물 좀 닦고.
‘OB’근육질 마초들이 동창회라도 열 기세로 한 자리에 모여 액션을 펼친다. <익스펜더블>은 단적으로 시대착오적인 촌스러운 기획물이다. 여전히 몸으로 뛰고 발로 구르는 액션물이 멸종한 것은 아니지만 아드레날린과 안드로겐으로 점철된 근육 마초의 시대는 분명 한 물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익스펜더블>의 유효성은 그 ‘한 물 갔음’에서 비롯된다. 한 물 간 역전의 용사들이 패기 대신 관록을 입고 새로운 시대에서 오래된 시절을 되새기게 만든다.
적어도 확신할 수 있는 건 <익스펜더블>의 출연진을 본 사람들 가운데 눈이 동그래진 이와 심드렁한 이의 차이가 세대에서 비롯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주지사 이전에 뭘 해먹고 살았는지 잘 알지 못할 세대에게는 정체불명의 3류 액션물처럼 보일 이 영화가 어떤 세대에게는 초호화 캐스팅이 된다는 역설이야말로 <익스펜더블>의 존재 가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최강의 용병들로 구성된 ‘익스펜더블스’의 리더 바니 로스(실베스터 스텔론)로 출연하는 동시에 이 모든 이야기를 기획하고 메가폰까지 쥔 실베스터 스텔론이 겨냥하는 건 오래 전 그 시절이다. 바로 과거의 영광이 놓여있던 그 시절의 사연 속에 자신들이 설 자리를 만드는 것. 죽여도 싼, 혹은 그렇다고 믿어질 만한 대상을 찾아 생사를 건 활약상을 전시하고 끝내 그들을 처단한 뒤 영웅이 되어 관객의 앞에 늠름하게 걸어나오던 그 시절의 위상을 되살려 보자는 것. <익스펜더블>은 명확하게 그 위치로 노장들을 되돌려 보내고자 하는 눈물 겨운 기획인 셈이다. 그리고 캐스팅만으로도 이미 이 영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질 관객의 팔 할은 그 눈물 겨운 기획에 기꺼이 지갑을 열 준비가 된 이들일 것이다.
하지만 <익스펜더블>은 그 촌스러운 장점을 고스란히 자신의 단점으로 끌어안는 영화다. 단순함 이하의 결점들이 수두룩하게 들어선 이야기는 때때로 노장들의 여운이 담긴 대사에 깃든 낭만들을 희석시키는 동시에 영화의 얄팍한 의도를 적나라하게 들춘다. 결국은 추억의 유무에 따라 관대함의 여부도 달라질 것이다. 단지 그들이 온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용서될 수 있는 관객은 스토리텔링 따윈 필요 없어, 라 할지라도 그 반대의 경우에 <익스펜더블>은 시대착오적인 막무가내 액션물로 낙인 찍힐 가능성도 농후하달까. 이 영화에서 대단한 화력을 전시하는 액션은 그 기대감을 배려하는 일종의 축포나 다름없는 동시에 공갈과도 같다.
동시에 홍보 전단지에 나란히 선 액션배우들의 다양한 면모가 실상 영화에서 일부에게 편중된 형태임을 알게 됐을 때 ‘최강’의 특공대에 대한 기대가 어떤 실망감으로 치환될 것인가라는 예측 또한 변수에 가깝다. 어쨌든 한 시절을 추억하게 만드는 근육질 마초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과거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건 특별한 이벤트다. 다만 그 이벤트 수준 이상의 무언가를 증명하지 못한다는 건 그만큼 씁쓸한 일이다. 결국 자신들이 설 곳이 없음을 스스로 나서서 증명하는 꼴이랄까.
불법체류자 신분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는 동네 주민들은 대한민국 사회의 고질적 단면이다. 대한민국 남자들의 무능력한 마초이즘은 때때로 자신의 영토를 침입한 이방인들에 대한 공격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로니를 찾아서>는 어느 치졸한 마초의 체험을 통해 적나라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극적 재미를 진전시키는 영화다. 인호(유준상)가 뚜힌(로빈 쉐이크)과 함께 로니(마붑 알엄 펄럽)를 찾아 나서는 과정을 그린 영화는 버디무비와 로드무비의 조합을 이룬 휴먼드라마에 가깝다. 사회적 시선을 견지한 극적 연출이 인상적이다. 다만 문제의식을 발견할 뿐 어떤 결론을 주장하지 않는다. 단지 남자의 변화를 관찰할 뿐이다. 인호의 변화는 결국 한국남자들, 더 넓게는 한국사람들의 가능한 변화를 설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정치적 주장보다도 설득력 있는 사연이 귀엽고 즐겁게 전달된다. 물론 인호가 로니를 찾아가는 여정은 일면 무모한 희망처럼 보이고 목적성도 흐릿하다. 하지만 그 여정을 지켜본다는 건 그 무모한 희망에 동참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로니를 찾아서>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동시에 한국어에 유창한 불법체류자 외국인들의 모습은 기이한 구경거리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