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세계적인 해안 관광지 코파카바나, <코파카바나>에서는 그 코파카바나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코파카바나를 사랑하는 한 여인이 등장한다. 중년을 넘긴 나이에도 소녀처럼 해맑은 성격을 지닌 그녀는 좀처럼 감당하기 쉽지 않은 산만함과 무책임함으로 주변인들에게 본의 아닌 민폐를 끼치는 통에 딸 에스메랄다(롤리타 샤마)의 결혼식조차 참석할 수 없는 신세로 전락한다. 자신을 처량하게 만드는 가난을 극복하고,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로부터 멀어져 혼자가 되기 위해 그녀는 새로운 삶을 계획한다. 프랑스 국경을 넘어 벨기에에서 콘도 이용권을 파는 영업직 사원일을 시작하기로 한 것. 엘리자베스, 그러나 스스로 바부(이자벨 위페르)라고 지칭하는 그녀는 그렇게 뒤늦은 독립을 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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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유치원의 원장으로 일하는 연희(김윤진)는 부유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딸로 인해 걱정을 멈추기 어렵다. 딸이 희귀한 혈액을 지닌 탓에 좀처럼 이식이 가능한 심장을 찾기가 쉽지 않기에 그녀의 걱정은 나날이 커져만 간다. 어느 날, 딸이 입원한 병원에 뇌사 상태에 가까운 중년의 여성이 실려 오고, 그녀의 혈액형이 딸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 연희는 심장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한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 휘도(박해일)의 등장과 함께 기대는 불안으로 뒤바뀐다.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에 사로잡힌 채 양아치 같은 삶을 살던 휘도(박해일)는 뒤늦게 어머니의 진심을 알게 되고 그녀를 살리고자 모든 방법을 동원하려 한다. 그리고 연희는 이를 막고 딸을 살리기 위해 모종의 결심을 하기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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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뛴다> 단평

cinemania 2010. 12. 24. 09:16

아이의 심장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엄마와 죽어가는 어머니의 뒤늦은 진심을 확인한 망나니 아들이 술래잡기라도 하듯 좇고 달아난다. <심장이 뛴다>는 모성을 광기에 가깝게 묘사해내며 그 광기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상황의 진전을 통해 극적인 파고를 얻어내고자 하는 스릴러다. 마치 <마더>와 같은 심정으로 <세븐 데이즈>를 수행하는 엄마를 보는 기분이랄까. 문제는 그것으로부터 지독한 모성도, 뜨거운 긴장감도 얻어낼 수 없다는 것. 모성과 효도를 정신병으로 착각한 비정상적인 추격전을 지켜보고 있자니 되레 성질이 뻗친다.

 

(무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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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엄마와의 2 3>은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반영한 방송 작가의 소설을 동명 그대로 극화한 연극이다. 중요한 건 이 결과물이 말 그대로자전적 경험을 반영한 소설이란 점이다. 자신을 반영한 주인공일 뿐, 작가와 주인공은 같은 사람이 아니다. 실제 자신의 경험을 투영했을 뿐, 소설이 묘사하는 주인공의 경험은 (그 원작을 본 누구라도 알 수 있듯이) 현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두고 있을 뿐, 다른 형태로 변주된 결과다. <친정엄마와의 2 3>은 각색이란 형태로서 실제를 허구로 창작해낸, 경험의 조작에 의한 산물이다. 목적은 분명하다. 당신을 울리는 것. <친정엄마와의 2 3>은 어머니와 가난이라는 페이소스의 이중주를 통해 당신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신파다. 그 의도는 스크린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친정엄마> 역시 신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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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모 아래 자란 딸은 어려서부터 제 어미 속을 썩이는데 이골이 났다. 남다른 글솜씨로 작가를 지망하는 애자(강희)는 공부도 잘하지만 땡땡이도 잘 치는, 고무공처럼 튀는 아이다. 비만 오면 학교는 나 몰라라 부산 앞바다로 뛰쳐나간다. 출석일수가 모자라 졸업을 할 수 없다는 선생님의 경고에 엄마(김영애) 속만 까맣게 탄다. 애자 역시 저보다 제 오빠에게 극진한 정성을 쏟는 어머니가 야속하기만 하다. 공부도 못하는 제 오빠는 유학까지 보내주면서 유학 가고 싶다고 보채는 자신에겐 되레 역성인 엄마가 미덥기만 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성년이 돼서도 애자는 여전히 엄마 속을 태운다. 시집갈 나이가 지났는데도 좀처럼 시집갈 생각은 없고 작가가 되겠다며 허송세월만 보내는 것 같은 딸래미를 보는 엄마는 속이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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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마더>

도화지 2009. 6. 2. 08:29

엄마가 <마더>를 봤다. 같이 보고 온 누나는 기분이 더럽다고 했다. 괜히 봤다고 했다. 궁금한 건 엄마 쪽이었다. 밥을 먹다가 물었다. 엄마는 영화에서 그 엄마가 이해돼? 설거지를 하던 엄마가 고개를 돌리더니 답했다. 그럼 당연하지. 게다가 아들이 좀 모자라잖아. 물론 알고 보니까 아들이 완전히 멍청한 건 아니더라만. 결말이 좀 기분 나쁘게 보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지. 약간 벙졌다. , 역시 그렇더란 말이냐. 물론 그렇다고 유치하게 그럼 내가 그러면 엄마도 그럴 거야, 따위의 간지러운 대사는 날리지 않았다. 어쨌든 까놓고 말해서 영화를 보고 뭔가 그럴 싸한 소릴 지껄였지만 정작 내가 어미의 심정을 어찌 알겠냐. 자기 배 아파서 낳은 자식 없는 수컷에게 모성이란 일종의 판타지고 영원히 알 수 없는 안드로메다의 정서다. 부성과 모성은 천지간의 차이를 둔 다른 세계관이란 말이지. 엄마들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더라. , 도저히 알 수 없는 세계다. 과연 <마더>를 만든 봉준호는 알고 만든 거냐. 물론 <마더>는 봉준호라는 수컷의 한계도 분명 포함된 세계겠지. 어쨌든 엄마의 답변이 놀라웠다. 영화가 놀라운 게 아니라 그런 어미들의 본능이 놀라웠다. 그니까 그만큼 우리 엄마들이 끔찍한 보호 본능을 짊어진 탓에 자기 삶을 뭉개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구나, 싶어서 숭고한 심정까지 들더라. 진짜 그렇게 끔찍할 정도로 헌신적인 세계관을 품고 아무렇지 않게 제 새끼 먹일 밥을 지어가며 살고 있는 거다. 밥을 꾸역꾸역 넣고 있는 와중에 이 밥알에 깃든 모성을 씹어 삼키는 기분이 들었다. 누나도 나중에 제 새끼를 낳으면 <마더>가 이해될까.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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