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세계적인 해안 관광지 코파카바나, <코파카바나>에서는 그 코파카바나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코파카바나를 사랑하는 한 여인이 등장한다. 중년을 넘긴 나이에도 소녀처럼 해맑은 성격을 지닌 그녀는 좀처럼 감당하기 쉽지 않은 산만함과 무책임함으로 주변인들에게 본의 아닌 민폐를 끼치는 통에 딸 에스메랄다(롤리타 샤마)의 결혼식조차 참석할 수 없는 신세로 전락한다. 자신을 처량하게 만드는 가난을 극복하고,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로부터 멀어져 혼자가 되기 위해 그녀는 새로운 삶을 계획한다. 프랑스 국경을 넘어 벨기에에서 콘도 이용권을 파는 영업직 사원일을 시작하기로 한 것. 엘리자베스, 그러나 스스로 바부(이자벨 위페르)라고 지칭하는 그녀는 그렇게 뒤늦은 독립을 꾀한다.
변변한 직장 하나 없는 가난한 싱글맘인 바부는 어른으로 성장했지만 어른다운 성숙한 일상을 꾸리지 못하는 여인이다. <코파카바나>는 어쩌면 한 여인의 삶을 비추는 성장드라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인물을 고난의 린치로 몰아가며 성장을 강요하거나 그런 변화를 드라마틱하게 포장하지 않는다. 인물의 일상적인 변화를 쫓으며 사건들에 주목하지만 그 사건들은 인물의 심리를 쉽사리 바꾸지 못한다. 바부가 꿈꾸는 여유로운 이상향 코파카바나처럼 이 영화는 쉽게 꺾이는 인물의 의지와 심리적 변화를 삶의 성찰로 연계시키는 여느 성장드라마들과 달리 스스로의 방식으로서 삶을 돌파해나가는 한 여인의 낙관을 지지한다. 물론 이는 무책임한 방관이 아니다.
자신의 방식으로 삶의 돌파구를 찾아나가던 여인이 역시 스스로 선택한 자선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드라마틱한 아이러니를 깨닫게 만든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낙관으로 삶에 올인하는 그녀가 이를 통해 삶을 역전시키는 과정은 다소 극화된 아이러니이지만 되레 통쾌하다. 완전한 기회를 쥔 상태에서도 자신의 삶을 안전하게 꾸릴 줄 모르는 여인의 삶을 지켜본다는 건 아슬아슬한 일이지만 영화는 그녀의 선의를 관객에게 노출시킴으로써, 그리고 그 진심을 성의껏 관찰함으로써 그녀의 삶을 응원하게 만든다. 또한 그녀가 겪어나가는 삶의 아이러니를 매끄러운 서사에 녹여냄으로써 거부감 없는 감상을 이끌어낸다.
무엇보다도 이런 감상을 가능케 만드는 건 바부를 연기하는 이자벨 위페르다. 다소 과장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적절한 여유를 안고 극을 걸어나가는 그녀는 때때로 나이를 잊은 듯 발랄하면서도 오랜 경험에 기반한 관록이 무엇인가를 증명하듯 바부를 연기한다. 냉정과 격정 사이에서 감정적인 기복이 큰 캐릭터를 연기해온 누벨바그 여신 이자르 위페르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만들지만 씩씩하고 낙천적으로 삶 위로 부유하듯 살아가는 여인을 연기해내는 <코파카바나>에서의 그녀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이자벨 위페르의 존재감은 <코파카바나>를 완성하는 이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자벨 위페르의 관록은, <코파카바나>의 낙관은, 정처 없는 삶에 작은 위로를 얹는다. 케세라세라, 어떤 식으로든 삶은 그리 향하기 마련이다. 당신의 꿈이 오롯이 놓여 있는 그곳으로.
영어 유치원의 원장으로 일하는 연희(김윤진)는 부유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딸로 인해 걱정을 멈추기 어렵다. 딸이 희귀한 혈액을 지닌 탓에 좀처럼 이식이 가능한 심장을 찾기가 쉽지 않기에 그녀의 걱정은 나날이 커져만 간다. 어느 날, 딸이 입원한 병원에 뇌사 상태에 가까운 중년의 여성이 실려 오고, 그녀의 혈액형이 딸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 연희는 심장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한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 휘도(박해일)의 등장과 함께 기대는 불안으로 뒤바뀐다.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에 사로잡힌 채 양아치 같은 삶을 살던 휘도(박해일)는 뒤늦게 어머니의 진심을 알게 되고 그녀를 살리고자 모든 방법을 동원하려 한다. 그리고 연희는 이를 막고 딸을 살리기 위해 모종의 결심을 하기에 다다른다.
<심장이 뛴다>는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듯 좇고 달아나는 연희와 휘도의 관계를 통해 스릴러 장르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영화로부터 서스펜스가 발견되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 이는 당연하다. <심장이 뛴다>는 모정이라는, 고전적으로 신파로서의 감정을 끌어올리는데 유용한 소재를 취하며 이야기의 근본을 이룬 작품이다. 그만큼 장르적인 쾌감보다는 드라마틱한 감정선이 보다 와 닿는 영화인 셈이다. <심장이 뛴다>의 특이점은 그 지점에서 나온다. 각자 딸과 어머니를 살리고자 고군분투하는 어머니와 아들의 갈등은 결코 중첩될 필요 없었던 두 삶이 우연한 계기로 만나 필연적인 관계로 거듭난다는 과정을 다이나믹한 추격전과 심리전의 양상으로 그려나간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심장이 뛴다>는 이런 특이점을 단점으로 몰고 가는 영화다. <마더>와 같은 심정으로 <세븐 데이즈>를 수행하는 엄마를 본다는 건 분명 절박한 감정으로 발전해야 할 터인데 <심장이 뛴다>에서는 좀처럼 그런 어머니의 행위나 감정이 모성이라는 진심으로 와 닿지 못한다. 일찍이 <마더>에서 보여준 것처럼, 본능에 가까운 어미의 본능이란 결코 이성적인 범주 안에서 해석될 수 없는 것임에 틀림 없다. <심장이 뛴다> 역시 모성을 광기에 가깝게 묘사해낸다. 문제는 모성의 절박함을 드러내는 어미의 모성이 지독하다기 보단 지나치게 보인다는 것이다.
단지 타인의 심장을 훔쳐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면모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과정을 묘사해내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면모라는 것이 때때로 상대를 이기고자 하는 승부욕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동시에 아들의 감정 변화도 이해될 뿐, 깊게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어머니의 진심을 깨닫게 된 양아치가 뒤늦게나마 어머니를 위한 무언가를 하려 든다는 상황 자체는 온당하다. 문제는 그가 취하는 방법론이 딸의 심장을 구하려는 엄마만큼이나 비상식적이며 딱히 설득력 있는 과정 안에서 연출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인물의 심리 상태에 대한 납득은 더디고 상황에 대한 설득력도 무디며 영화가 의도하는 모든 결과적 감상도 얕아진다. 모성과 효도를 정신병처럼 착각한 듯한 비정상적인 추격전을 지켜보는 기분이란 불쾌함과 멀지 않은 것이다.
아이의 심장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엄마와 죽어가는 어머니의 뒤늦은 진심을 확인한 망나니 아들이 술래잡기라도 하듯 좇고 달아난다. <심장이 뛴다>는 모성을 광기에 가깝게 묘사해내며 그 광기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상황의 진전을 통해 극적인 파고를 얻어내고자 하는 스릴러다. 마치 <마더>와 같은 심정으로 <세븐 데이즈>를 수행하는 엄마를 보는 기분이랄까. 문제는 그것으로부터 지독한 모성도, 뜨거운 긴장감도 얻어낼 수 없다는 것. 모성과 효도를 정신병으로 착각한 비정상적인 추격전을 지켜보고 있자니 되레 성질이 뻗친다.
<친정엄마와의 2박 3일>은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반영한 방송 작가의 소설을 동명 그대로 극화한 연극이다. 중요한 건 이 결과물이 말 그대로 ‘자전적 경험을 반영한 소설’이란 점이다. 자신을 반영한 주인공일 뿐, 작가와 주인공은 같은 사람이 아니다. 실제 자신의 경험을 투영했을 뿐, 소설이 묘사하는 주인공의 경험은 (그 원작을 본 누구라도 알 수 있듯이) 현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두고 있을 뿐, 다른 형태로 변주된 결과다. <친정엄마와의 2박 3일>은 각색이란 형태로서 실제를 허구로 창작해낸, 경험의 조작에 의한 산물이다. 목적은 분명하다. 당신을 울리는 것. <친정엄마와의 2박 3일>은 어머니와 가난이라는 페이소스의 이중주를 통해 당신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신파다. 그 의도는 스크린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친정엄마> 역시 신파다.
사실 (대한민국 안에서) 모정이라는 소재를 중심에 둔 과거지향적인 영화들은 대부분 신파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모정이라는 소재가 끊임없이 복기될 수 있는 건 그 소재를 관통하는 감정이 관객 대부분에게 경험적인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까닭이다. 때때로 그 범위는 가족 전반으로 확장되기도 하지만 페이소스를 폭발시키는 뇌관은 대부분 엄마의 몫이다. 엄마란 전통적인 가족의 구조 안에서 피해자의 형태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 실제로도 그러했으며, (혹은 여전히 그런 경우가 다반사이기도 하고,) 그와 유사한 환경에서 자라난 관객들의 지난 경험을 환기시키고 이를 통해 해묵은 감정을 발효시킨다. 가난과 모정이 결합된 실존적 체제의 신파가 그와 유사한 경험을 지닌, 혹은 그와 유사하게 여겨지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 관객에게 공감대를 부여한다.
가난과 모정의 결합은 그 경험적 공감대를 품고 있을 관객들에게 일종의 노스텔지어로 작동되기 마련이다. <친정엄마>에서의 엄마 또한 마찬가지다. 모정은 가난에 등을 맞댄 채 등돌린 자식을 향하고, 가부장제의 폭력 안에서 버틴다. 다 자란 자식은 뒤늦게 이를 회상한다. 그리고 관객은 본다. 지난 시절의 경험이 환기된다. 통증이 밀려온다. 현재시제에서 출발하던 영화는 한 차례 긴 호흡의 플래쉬백을 거쳐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소설이건, 연극이건, 원작을 접한 관객에게 유효하지 않지만 그 플래쉬백은 모종의 의도를 감추고 있다. 물론 그것이 딱히 놀랄만한 반전적 비밀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은 감정을 응축시키기 위한 일종의 도움닫기 구실을 한다. 경험의 환기를 통해 감정을 축적한 뒤, 이성의 둑을 무너뜨리고 감정을 폭발시킨다.
<친정엄마>에서 중요한 건 서사보다도 인물이다. 사실상 원작 소설이나 희곡이 그랬던 것처럼, <친정엄마>의 시나리오에서 어떤 비범한 형태를 찾아보기란 어렵다. 그저 모정과 가난이 뒤섞인 신파라는 구별점 외에 특이점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무대 위에 올려진 연극이 유효할 수 있었던 건 이를 연기해내는 배우의 역량에 있었다. 희곡에서 반복적으로 활용하는 플래쉬백은 배우에게 있어서 끊임없는 감정의 널뛰기를 요구하고 감정적 몰입의 단절을 꾀한다는 점에서 좋은 희곡의 형태로 완성됐다고 평하기 어렵다. 그만큼 배우의 역량에 따라서 무대의 완성도는 질적으로 달라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강부자의 연기는 그것을 가능케 한다. 결과적으로 희곡이 온전히 배우의 연기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영화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강부자의 그것만큼이나 김해숙의 연기는 <친정엄마>가 보유한 뚜렷한 자원이다. 김해숙의 연기는 신파의 요소들을 수집해 일방적으로 공급하듯 재단한 서사의 너비 안에 찰기를 불어넣는다. 박진희는 차분하고 또렷하게, 자신이 머금고 뱉어내야 할 감정의 공급과 수용에 능하다. 하지만 때때로 그 감정적 교류 속에서는 과잉의 흔적이 발견된다. 이는 시나리오와 디렉션의 문제다. 사실 <친정엄마>가 묘사하는 모성애는 그것이 지나치게 극화된 양식 안에서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다는 인식을 부여한다. 엄마의 희생을 부각시키면서도 그 희생이 이루는 공적인 감정적 환기만 이룰 뿐, 당사자의 내면을 살피지 않는다. 이는 결과적으로 원작 자체가 당사자의 심정보다도 외부적인 관찰자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1인칭 시점의 감상적 결과물에 불과한 까닭일지도 모른다. 배우들의 연기는 이런 단점들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들지만 완벽하게 메워지지 않는다. 보다 단명해진 서사의 흐름이나 관계의 변주는 눈여겨볼만하지만 그 감정의 쓰임새까지 인상적인 것은 아니다.
<친정엄마>는 흘러간 옛 노래처럼 낡은 영화다. 하지만 모성은 낡기 보단 깊게 우러나는 것이다. 누구나 엄마의 자식일 수 밖에 없는 만큼 각자 형태는 다를지라도, 서로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감정적 부채를 뒤늦게 깨닫고 마음에 지운 채 살 수 밖에 없다. <친정엄마>를 통해서 눈물샘의 자극을 느끼는 관객이라면 그건 자신의 마음에 얹혀진 부채의 너비를 뒤늦게 발견한 탓일 게다. ‘엄마 때문에 못 살겠다’는 대사만으로도 그 마음에 박아넣었던 경험들이 환기된다. 결국 그런 감정이 돌아와 개인의 마음을 찌른다. 결과적으로 <친정엄마>는 모성의 위력을 빌려 개개인의 감수성을 착취하지만 그 마음에 박힌 상처까지 들여다 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작품이다. 어쩌면 애초에 자식의 눈으로 재구성한 엄마의 드라마란 점에서 한계는 명확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식은 결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니까.
편모 아래 자란 딸은 어려서부터 제 어미 속을 썩이는데 이골이 났다. 남다른 글솜씨로 작가를 지망하는 애자(최강희)는 공부도 잘하지만 땡땡이도 잘 치는, 고무공처럼 튀는 아이다. 비만 오면 학교는 나 몰라라 부산 앞바다로 뛰쳐나간다. 출석일수가 모자라 졸업을 할 수 없다는 선생님의 경고에 엄마(김영애) 속만 까맣게 탄다. 애자 역시 저보다 제 오빠에게 극진한 정성을 쏟는 어머니가 야속하기만 하다. 공부도 못하는 제 오빠는 유학까지 보내주면서 유학 가고 싶다고 보채는 자신에겐 되레 역성인 엄마가 미덥기만 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성년이 돼서도 애자는 여전히 엄마 속을 태운다. 시집갈 나이가 지났는데도 좀처럼 시집갈 생각은 없고 작가가 되겠다며 허송세월만 보내는 것 같은 딸래미를 보는 엄마는 속이 탄다.
예나 지금이나 애자는 엄마에게 ‘눈엣가시 같은 년’이다. 하지만 눈엣가시 같아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자식’을 나 몰라라 할 순 없다. 평행선과 같은 거리감을 두고 좀처럼 다가서지 못하는 모녀는 특별한 계기와 함께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여나간다. 서울에 홀로 사는 애자가 잠결에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다 엄마의 앓는 소리를 듣게 된 후, 득달 같이 엄마가 사는 부산으로 내려가게 될 때, 애자의 마음에 침잠(沈潛)해있던 진심이 동요를 일으킨다.
<애자>는 좀처럼 서로의 본심에 접근하지 못하던 모자의 오랜 갈등 속에 잠재돼있던 애틋한 속내를 드러내고 이로써 심금을 울리는 가족 신파다. 서로에게 모진 말을 던지며 뒤돌아 서다가도 다시 서로를 향해 뒤돌아보게 되는 가족의 진심을 비춘다. 모정을 연출하고 죽음으로 방점을 찍는 <애자>는 분명 강력한 파토스를 전달하고 마는 영화다. 비극적 피날레를 예감하게 만드는 중반부부터 페이소스를 축적해나가다 그 끝에 다다라 어김없이 강력한 신파적 에너지를 분출한다. <애자>는 분명 모정과 죽음을 가로지르며 눈물로서 방점을 찍는 영화다. 켜켜이 쌓아나간 감정의 둑을 무너뜨린 뒤 눈물의 방류를 요구한다.
그렇지만 <애자>는 주체할 수 없는 페이소스를 넘쳐내며 관객을 비극적 심상으로 밀어 넣는 최루성 신파와 거리를 둔 작품이다. 애자의 학창시절을 발랄하게 묘사하는 도입부처럼 <애자>는 심심찮게 캐릭터의 개성을 적극 활용한 가족적 코미디를 연출하며 신파를 가늠하기 어려운 생기를 감지하게 만든다. <애자>는 가족코미디와 멜로드라마를 이어 붙인 영화처럼 전후반부의 양상이 다른 작품이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온도차는 신파적 형태로 귀결되는 <애자>의 전반적인 감정이 절제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 동시에 전후반부의 감정적 대비 속에서 결과적인 감정을 더욱 짙게 물들이는 보색적 효과를 낳는다. 물론 때때로 상황에서 지나치게 엇나가는 코미디가 안일하게 동원되어 감정의 수순을 방해하는 경우가 눈에 띄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애자>가 연출하는 웃음과 눈물의 수위는 안정적인 편이다. 무엇보다도 색채가 다른 두 정서의 융화를 통해 결정을 이루는 클라이맥스가 감정적 자극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상황적 이해를 더한다는 점에서도 탁월하다.
<애자>에서 중요한 건 비극의 주체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그 연민을 깨닫는 이의 변화다. 고통을 맞이하는 자에 대한 동정만큼이나 이를 지켜보는 자가 뒤돌아 흘리는 눈물의 심정이 마음을 울린다. 엄마와 원수처럼 지내던 딸이 엄마의 죽음을 직감하고 그 삶을 좀 더 연장하려 할 때, 모녀는 자신의 마음 속에 묵혀둔 진심을 일거에 방출한다. 무엇보다도 결말부에서 죽음을 묘사하는 형태는 <애자>에서 가장 인상적인 면모다. 죽음을 통해 궁극적인 감정적 고양을 이루는 <애자>는 죽음을 선택하는 방식을 통해 비범한 면모를 드러낸다. 감정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과감한 선택을 이행한다. 누군가의 생을 이어나가기 위해 애쓰는 자는 그 삶이 계속되는 동안 끝을 체감할 수 밖에 없다. <애자>는 죽음에서 모든 감정을 방출하기 보다 그 순간을 이겨내고 그 너머의 삶을 비춘다. 엄마의 빈 자리에서 슬픔을 이겨내고 제 삶을 채워나가는 딸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본다.
누군가의 자식이자 누군가의 부모가 될 모두에게, 좀 더 범위를 좁히자면 누군가의 딸이자 누군가의 엄마가 될 여자들에게, 엄마란 이름은 쉽게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고 마는 것이다. 마음에 없는 말을 던지고, 뒤돌아 후회하는 건 대부분의 부모와 자식 사이를 채우는 관성적인 버릇과 같다. 특히 가족을 위해 헌신하면서도 정작 당신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한국적 모정을 공유하고 있을 이 땅의 대부분은 <애자>와 같이 모성애를 담은 영화의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당할 수 밖에 없다. 엄마는 신파다. <애자>는 그런 현실적 감정을 스크린에 옮겨 담는다.
무엇보다도 두 배우의 어울림은 <애자>를 빛내는 가장 큰 수훈이다. 추와 같은 무게를 얹는 김영애와 풍선처럼 분위기를 띄우곤 하는 최강희는 <애자>에서 적절한 균형을 이룬다. 갈등과 화해로 나아가는 모녀의 감정적 소통은 두 배우의 앙상블을 통해 진심을 확보한다.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이야기를 하는 동시에 감정의 진전 역시 예상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애자>에서 중요한 건 그 뻔한 이야기에 얼마나 진한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캐릭터의 관계변화를 통해 현실성을 얻고 진정성마저 확보하는 <애자>에서 두 배우는 확실하게 제 임무를 수행했다.
엄마가 <마더>를 봤다. 같이 보고 온 누나는 기분이 더럽다고 했다. 괜히 봤다고 했다. 궁금한 건 엄마 쪽이었다. 밥을 먹다가 물었다. “엄마는 영화에서 그 엄마가 이해돼?”설거지를 하던 엄마가 고개를 돌리더니 답했다. “그럼 당연하지. 게다가 아들이 좀 모자라잖아. 물론 알고 보니까 아들이 완전히 멍청한 건 아니더라만. 결말이 좀 기분 나쁘게 보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지.”약간 벙졌다. 아, 역시 그렇더란 말이냐. 물론 그렇다고 유치하게 그럼 내가 그러면 엄마도 그럴 거야, 따위의 간지러운 대사는 날리지 않았다. 어쨌든 까놓고 말해서 영화를 보고 뭔가 그럴 싸한 소릴 지껄였지만 정작 내가 어미의 심정을 어찌 알겠냐. 자기 배 아파서 낳은 자식 없는 수컷에게 모성이란 일종의 판타지고 영원히 알 수 없는 안드로메다의 정서다. 부성과 모성은 천지간의 차이를 둔 다른 세계관이란 말이지. 엄마들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더라. 아, 도저히 알 수 없는 세계다. 과연 <마더>를 만든 봉준호는 알고 만든 거냐.물론 <마더>는 봉준호라는 수컷의 한계도 분명 포함된 세계겠지. 어쨌든 엄마의 답변이 놀라웠다. 영화가 놀라운 게 아니라 그런 어미들의 본능이 놀라웠다. 그니까 그만큼 우리 엄마들이 끔찍한 보호 본능을 짊어진 탓에 자기 삶을 뭉개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구나, 싶어서 숭고한 심정까지 들더라. 진짜 그렇게 끔찍할 정도로 헌신적인 세계관을 품고 아무렇지 않게 제 새끼 먹일 밥을 지어가며 살고 있는 거다. 밥을 꾸역꾸역 넣고 있는 와중에 이 밥알에 깃든 모성을 씹어 삼키는 기분이 들었다. 누나도 나중에 제 새끼를 낳으면 <마더>가 이해될까. 문득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