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작품을 선택한다. 하지만 모든 선택이 훌륭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이왕이면 훌륭한 작품을 선택하고 싶은 게 배우의 마음이다. 아니면 아예 스스로 만들어버리던가.
최근 국내에서도 배우 출신 감독들의 활동 소식이 심심찮게 들린다. 꾸준히 단편 연출을 해오다 첫 장편 연출작 <마이 라띠마>의 개봉을 앞두고 있는 유지태와 최근 연출 데뷔작 촬영을 마친 하정우, 연출 데뷔작을 촬영 중인 박중훈 등이 그렇다. 일찍이 <오로라 공주>로 호평을 얻었고 <용의자 X>로 주목을 받았던 방은진이나 <요술>과 <복숭아나무>의 감독으로 화제를 모은 구혜선도 마찬가지다. 과연 한국에서도 배우 출신의 거장 감독이 탄생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왜 배우들은 감독을 꿈꾸는가? 이건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
영화는 감독이 꾸는 꿈이다. 물론 감독 혼자 꿈꾼다 하여 완성되는 것이 영화란 말은 아니다. 감독이 꿈꾸는 몽타주와 미장센에 숨을 불어넣고자 충실히 복무하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존재할 때 그 꿈은 생명을 얻는다. 각각의 컷처럼 나뉜 스태프들의 재능을 하나의 작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 붙이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연출력이 바로 이런 재능이다. 감독의 할 일이란 그런 것이다. “어릴 때는 극 안에서 배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극의 청사진은 감독의 것이란 생각이 들면서 연출에 매력을 느꼈다.” 김지운 감독의 말이다.
스크린이 도화지라면 감독은 화가이고 배우는 붓이다. 배우는 감독의 의도대로 움직여줘야 한다. 훌륭한 배우들은 자기 역할을 확실히 인식한다. 완벽하게 작품의 일부로서 투신하고, 때때로 작품의 빈틈마저 메워버린다. 작품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탁월하게 반응한다. 자신의 동선과 리액션을 물론이고 조명의 위치와 카메라의 움직임까지도 계산한다. 훌륭한 배우일수록 훌륭한 감독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실제로 찰리 채플린부터 워렌 비티, 우디 앨런, 로버트 레드포드, 멜 깁슨 등, 훌륭한 배우가 훌륭한 감독으로 성장한 사례는 적지 않다. 그런 명배우들이 감독의 자리를 탐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사실 배우 입장에선 자신보다 함량이 떨어지는 감독의 카메라 앞에 설 때만큼 곤욕스러운 일도 없을 거다. 그런 경우의 수가 늘어날수록 차라리 카메라 뒤에 서고 싶다는 욕망도 커질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그런 예가 있다. 80세가 넘은 지금도 작품 경력을 늘려나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젠 배우라기 보단 감독의 인장이 더욱 선명해 보인다. 그는 일찍이 웨스턴 무비의 아이콘이란 명예를 멍에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더 낡아서 그 권좌에서 나가떨어지기 전에 다른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는 촬영 현장에서 배우 이상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였다. 자신이 어떤 영화를 만드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감독들에 의해서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가 망가지는 꼴을 번번히 목격하게 된 그는 직접 제작사를 차리고 끝내 메가폰까지 잡았다. 그리고 히치콕을 연상시키는 스릴러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0)와 함께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역사가 시작됐다.
한편 ‘제2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수식어를 얻은 벤 애플렉은 지난 2007년 스릴러 <가라, 아이야, 가라>로 감독 데뷔한 뒤 호평을 얻었고 주연까지 겸한 범죄물 <타운>(2010)을 통해서 호평뿐만 아니라 흥행까지 이끌어냈으며 실화를 바탕으로 둔 최근작 <아르고>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함으로써 대가의 기질을 드러냈다. 그는 말했다. “배우라는 커리어도 이어가고 싶다. 감독이란 연출 기회를 얻지 못하면 쉽게 잊혀지는 법이니까.” 한때 <굿 윌 헌팅>(1997)의 각본 작업을 하며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을 드러냈던 그에겐 졸작 액션 블록버스터에 연이어 출연하며 배우로서 바닥을 쳤던 시절이 있었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듯이 어쩌면 벤 애플렉에게 감독으로서의 길은 스스로의 연기 경력을 확보하기 위한 마지노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벤 애플렉이 <아르고>로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소감을 발표할 때 그 뒤엔 조지 클루니가 서있었다. 그는 <아르고>의 제작자였다. 조지 클루니 역시 성공적인 배우 출신 감독이다. 폴리테이너로도 유명한 그답게도 근작인 <킹메이커>를 비롯해서 <굿 나잇 앤 굿럭> <컨페션> 등 시대적인 호흡이 돋보이는 정치적 소재의 작품들을 연출해왔고 좋은 평가를 얻어왔다. 결국 배우가 감독이 됐을 때 최고의 장점이란 최소한 자신보다 실력 없는 감독의 지시를 받을 필요가 없고, 배우로서의 경력을 확보할 기회 또한 마련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명심할 건 성공적인 족적을 남긴 배우가 성공적인 족적을 남기는 감독으로 살아남는 경우가 대부분이란 사실. 물론 성공한 배우만이 꼭 성공한 감독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훌륭한 배우일수록 훌륭한 감독이 될 가능성이 보다 큰 건 사실이다. 산수를 잘하는 사람이 수학을 잘할 가능성이 보다 큰 것처럼.
비범한 시작과 달리, 벤 애플렉은 소모적이고 낭비적인 경력 속을 겉돌았다. 하지만 재능은 그가 망가지는 것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야 비로소 그는 진정한 삶의 궤도에 오르고 있다.
두 살 차이가 났음에도 벤 애플렉은 맷 데이먼과 유년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부모의 이혼과 아버지의 알코올 의존증을 지켜보던 어린 애플렉이 데이먼을 만난 건 다행이었다. 보스턴에서 레드삭스 팀의 저지를 입으며 우정을 쌓아온 두 사람은 서로에게 배우로서의 꿈을 고무시키는 대상으로 자리하며 성장해왔다. PBS의 미니시리즈에 출연한 애플렉이 아역배우로서 이른 경력을 쌓았지만 그 이후에도 그는 데이먼과 같은 고등학교를 진학하며 배우로서의 담금질에 동행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스쿨타이>(1992)로 동시에 영화계에 진입한다.
애플렉과 데이먼의 공동각본작이자 공동출연작인 구스 반 산트의 연출작 <굿 윌 헌팅>(1997)은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보다 남다른 작품일 수 밖에 없다. 타고난 천재였으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된 교육도 받을 수 없었던 청년 윌과 그의 자기 방어적 오만과 결핍적인 심리를 치유하는 심리학 교수 션의 관계가 두드러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중 하나는 애플렉의 몫이었다. “내 생애 최고의 날이 언제인지 알아? 내가 너희 집 골목에 들어서서 네 집 문을 두들겨도 네가 없을 때야. 안녕이란 말도 없이, 작별의 인사도 없이, 단지 떠났을 때.” 공사장에서 맥주를 홀짝이던 척키가 자신의 재능이 놓일 자리를 명확하게 분간하지 못하는 윌에게 던지는 이 대사들은 거친 만큼 심금을 울리는 것이었다. 작품은 큰 성공을 거뒀고, 두 사람의 손에는 오스카 각본상이 쥐어졌다.
<굿 윌 헌팅>은 두 사람의 경력에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준 작품이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비로소 홀로 자신의 경력을 쌓아나갈 출발점을 만들어준 작품이었다. <굿 윌 헌팅>이후로 애플렉은 마이클 베이의 SF블록버스터 <아마겟돈>(1998)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이클 베이의 작품답게 평단으로부터 융단폭격에 가까운 비아냥을 들었지만 역시 전세계적인 흥행성적을 기록한 이 작품은 애플렉에게 할리우드 흥행배우라는 수식어를 안겼다. 다소 심심하게 들리는 이 훈장은 그의 입지가 가파르게 변하고 있음을 알리는 바로미터였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로도 말이다.
<포스 오브 네이처>(1999)부터 <서바이빙 크리스마스>(2004)까지, 애플렉이 출연한 수많은 작품 가운데 애플렉에게 배우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부여한 작품은 현저히 드물다. 일찍이 애플렉과 두 번의 작업 경험이 있는 인디영화 감독 케빈 스미스의 <도그마>(1999)에서 맷 데이먼과 의기투합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작품들은 범작 혹은 그 이하의 수준에 머물렀다. 마이클 베이의 전쟁 블록버스터 <진주만>(2001)이나 한때 연인이었던 기네스 펠트로우와 함께 한 로맨스물 <바운스>(2001)는 끔찍한 평가에 시달렸고, 마블 코믹스 원작의 안티히어로물 <데어데블>(2003)이나 필립 K. 딕의 소설을 원작으로 둔 오우삼의 SF액션물 <페이첵>(2003)은 그의 경력에 새롭게 찍힌 얼룩과 같았다. 역시 과거 애인 사이였던 제니퍼 로페즈와 함께 한 로맨틱 코미디 <갱스터 러버>(2003)나 <서바이빙 크리스마스>(2004)와 같은 가족코미디는 웃음거리나 다름 없는 대우를 얻었다. 2003년 골든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애플렉은 <페이첵>과 <갱스터 러버>, <데어데블>까지 무려 세 편의 영화로 최악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뒤, 그 멍에를 뒤집어쓰는데 성공했다.
사실 2002년도 작품인 <썸 오브 올피어스>와 <체인징 레인스>는 애플렉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그 수많은 범작들 가운데 보기 드물게 쓸만한 경력이었다. 현실적인 정치적 스릴러였던 두 작품 속에서 공통적으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로 등장했다. 애플렉의 이력을 새롭게 반전시킨 <할리우드랜드>(2006)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실화를 통해 할리우드의 추악한 이면을 그린 이 작품에서 애플렉은 클라크 켄트에 이은 2대 슈퍼맨을 연기했지만 자살로 생을 마감한 조지 리브스로 등장한다. 이는 할리우드 스타로서 화려한 인지도를 쌓아가면서도 경력과 연기적 비난에 직면했던 애플렉의 과거를 연상시키는 대목이기도 했다. 제63회 베니스영화제 경쟁작으로 출품된 이 작품으로 애플렉은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쥔다. 자신의 본심을 감춘 정치인으로 출연한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2009)에서의 연기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이런 사례와 무관하지 않다.
일찍이 짧은 단편물을 만든 경험이 있다지만 애플렉의 연출 선언은 파격적이었다. 그가 선택한 첫 연출작은 오늘날 미국 스릴러 문단을 대표하는 데니스 루헤인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곤 베이비 곤>(2007)이었다. 의심 어린 시선 속에서 친동생 케이시 애플렉과 모건 프리먼 등을 캐스팅해서 완성한 이 작품은 완연한 극찬을 얻어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보스턴 출신인 애플렉이 지니고 있는 지역적 커뮤니티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다 매력적이다. 이는 척 호건의 범죄소설을 각색한 두 번째 연출작 <타운>(2010) 역시 관통하는 특성이다. 뉴욕을 터전으로 둔 범죄물의 장인 마틴 스콜세지의 시선을 비롯해서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와 휴머니티의 감수성을 품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철학을 연상시키는 그의 연출작들은 작품 보는 눈이 없는 배우로 취급 당하던 애플렉의 과거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사라진 소녀의 행방을 추적해 나가는 과정 끝에서 놀라운 질문을 던지는 <곤 베이비 곤>은 제도적 정의와 배치되는 인간적인 선택의 딜레마를 그리는 가운데,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유려한 시선으로 조망하는 서정적인 스릴러다. 반대로 <타운>은 늪과 같이 개개인의 발목을 잡고 있는 지역 사회 내의 범죄적인 전통 속에서 새로운 삶을 갈망하는 한 인물의 고뇌를 불안하게 응시하면서도 그 갈망을 끝내 응원하고 구원하는 하이스트 무비다. 근작인 <타운>은 장르적인 클리셰들을 적극적으로 동원한 애플렉의 자기실험에 가깝다. 이 두 작품만으로 애플렉은 거장으로서의 가능성까지 넘보는, 비범한 면모를 새롭게 덧씌우는데 성공했다.
물론 애플렉은 여전히 연기적 가능성을 인정 받는 배우다. 토미 리 존스와 케빈 코스트너, 크리스 쿠퍼 등 관록 있는 노장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컴퍼니 맨>(2010)에서 애플렉은 하루 아침에 고액연봉자에서 실업자로 내려 앉은 가장을 연기한다. 이 영화로 그는 그 동안 얼마나 소모적인 작품 속에서 낭비적으로 활용됐는가를 스스로 증명한다. 자신만만한 샐러리맨이 실업의 고통과 가장으로서의 위기를 겪다가 다시 재기해나가는 과정은 마치 애플렉의 과거와 현재의 대비만큼이나 실감나는 것이었다. 슈퍼히어로의 고뇌나 영웅적인 면모를 흉내내기 보단 실존적인 고민을 연기할 때, 애플렉은 더욱 돋보이는 배우다. 과거 그는 자신의 경력을 돌아보며 이와 같이 말했다. “내 재능들은 때때로 과용됐고 또한 오용됐다. 나로 산다는 건 쉽지 않다.” 이제 모든 것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애플렉은 다시 진정한 궤도에 오르고 있다.
보스턴의 찰스타운은 가족사업처럼 범죄가 대물림 되는 도시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더그 맥레이(벤 애플렉)도 은행 강도를 저지르다 검거되어 교도소에 수감된 아버지와 같이 역시 범죄의 길로 발을 들인지 오래다. 선택의 여지 없이 은행강도의 길로 들어선 그는 자신의 삶이 인생의 수렁에 빠져들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지만 발을 빼고 다른 길을 걷는 것 역시 덫과 같은 관계들 때문에 자칫하다 발목이 날아갈 판이라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순탄치 않은 삶에 특별한 인연이 찾아온다. 은행강도 중 현장에 있던 여자 부지점장 클레어(레베카 홀)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 그 사랑이 맥레이에게 어떤 결심을 도모하게 만든다.
저명한 범죄소설작가 데니스 루헤인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가라, 아이야, 가라>를 연출한 벤 애플렉의 감독 데뷔는 성공적이라는 수사를 동원해도 좋을 결과였다. 4살 소녀의 실종을 통해 격발되는 미스터리 범죄물인 이 작품은 사회의 온갖 모순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동시에 이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던지는 원작의 세계관을 인상적으로 포착하며 배우 벤 애플렉의 연출력에 대한 의문을 완전히 집어 던지게 만든 수작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다시 유명한 범죄소설작가 척 호건의 <PRINCE OF THIEVES>를 자신의 두 번째 연출작으로 선택한 벤 애플렉의 하이스트 무비 <타운>은 전작과 일관된 태도가 발견되는 동시에 또 다른 그의 연출적 시도가 동원된 작품이다.
보스턴 출신의 벤 애플렉이 보스턴을 주무대로 삼는 데니스 루헤인과 척 호건의 작품을 차례대로 선택한 건 분명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단 두 편의 영화를 만든 벤 애플렉을 거장의 반열로 올리는 건 성급한 일이겠지만 그가 만든 두 작품은 마치 뉴욕의 거장 마틴 스콜세지와 같은 길을 보스턴에서 걷겠다는 신념을 선언하는 야심처럼 보인다. 사회적인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동시에 그 부조리 속에 놓인 어느 개인의 본성을 끌어내는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적 시선은 벤 애플렉이 연출한 두 편의 작품에서 엿보인다. 또한 이 모든 현실적 관점이 휴머니즘을 기초로 한 드라마로 유려하게 풀어낸다는 점에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흔적을 의심하게 만든다.
전작과의 우열을 논하자면 <타운>은 <가라, 아이야, 가라>보다 더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꺼려지는 작품이다. 하지만 <타운>은 전작에 비해 보다 생동감이 넘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영화의 초반과 후반부를 장악한 사실적인 총격신의 연출 덕분일 것이다. 특히 후반부에 등장하는 총격신은 현장에 위치한 3자의 시선을 빌려 사건을 중계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부여할 정도로 빼어난 연출력을 선사하고 있다. 또한 사건의 중심에 놓인 갱단의 평범한 일상을 정적하게 비추던 카메라가 같은 방식으로 담담하게 범죄 현장을 중계할 때, 하나의 시선에 놓인 정보의 차이로 인해 파격적인 감상이 도모된다. 연속적인 삶의 일상 속에서 분리된 일상을 넘나드는 갱단의 이야기는 이런 연출 방식을 통해 보다 현실적인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타운>은 문제의식을 던지는 전작과 달리 보다 적극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다. 범죄의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인물에 대한 연민을 강요하기 보단 그 인물의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이 빚어내는 파국을 조명하고 아이러니한 심정을 고스란히 객석의 여운으로 승화시킨다. 스토리의 운용면에서 인위적인 장치적 설정들이 드러나긴 하지만 <타운>은 무리 없이 흐르는 인과를 설득시키는 작품이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스토리 라인 속에서 드라마틱한 감정적 여운과 공정한 사회적 현실에 대한 의식을 남긴다는 점에서 <타운>은 좋은 각색물의 수준을 넘어선 수작이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에서 또 한번 자신의 재능을 입증해낸 벤 애플렉은 자신이 연출한 전작이 결코 우연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해내는데 성공했다.
출신성분으로 할리우드 배우를 소개하는 건 새삼스런 일이다. 다만 그 출신성분이 유명세를 탔다는 사실에서 다른 의의를 읽어야 한다. 맷 데이먼도 마찬가지다. 하버드 출신이란 그의 과거는 할리우드 배우로서의 경력을 첨언하는 수식어로서의 의미에 불과하다.
“본드는 항상 1960년대의 가치관에 밀접해 있었다. 마이크 마이어가 자신의 스파이물 <오스틴 파워>로 부자가 되는 오늘날 세계에서 그건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맷 데이먼의 코멘트처럼 이제 <007>의 제임스 본드는 낡은 유산이다. 그 빈 자리를 채운 건 다름 아닌 하이퍼 리얼리즘 안티히어로 제이슨 본이다. <007>시리즈로 대변되던 기존의 스파이물과 달리 체지방 비율을 줄여버린 <본>시리즈의 담백함은 실로 신선한 것이었다. 심지어 21세기와 함께 마초적 환골탈태를 시도한 <007>시리즈가 <본>시리즈를 벤치마킹했다는 추측엔 부인할만한 여지가 없다.
<본>시리즈는 스파이물의 전통적인 컨벤션을 뒤엎은혁신이었다.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건 제이슨 본, 그리고 맷 데이먼이었다. 묵묵한 인상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차분함, 낭비가 없는 동작의 신속 정확함, 단단한 육체에 비견되는 비범한 두뇌, 그리고 묵직한 양심적 고뇌까지, 맷 데이먼은 작은 제스처부터 커다란 동선까지 제이슨 본을 이루는 자질 그 자체였다. 양미간을 찌푸리다 쉴새 없이 내달리는 제이슨 본은 분명 섹시한 물건이었다. 질주와 고뇌의 <본>트릴로지를 완성하던 맷 데이먼은 다른 한 편에서 유쾌한 무용담으로 또 하나의 트릴로지를 키우고 있었다. 가볍고 유쾌한 캐릭터가 즐비한 <오션스>시리즈에서 맷 데이먼은 조지 클루니, 브래드 피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두개의 트릴로지 이후, 맷 데이먼는 완전히 다른 입지를 구축했다.
2007년, 전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입을 올린 배우 35인으로 꼽힌 맷 데이먼은 같은 해 ‘피플’지가 선정한 ‘살아있는 가장 섹시한 남자(Sexist men alive)’로 선정됐다. “나는 매우 낮은 위치에 있었다. 브래드 피트, 조니 뎁, 그리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같은 배우들이 지나쳐 보낸 대본이 남아야 오디션을 볼 수 있을 만큼.” 이제 오래된 문장처럼 낡아버렸지만 맷 데이먼의 말처럼 그의 과거는 분명 그랬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흥미를 갖는 아이였고 그것이 여전히 그의 삶을 유지시키고 있다.” 맷 데이먼의 어머니 칼슨 페이지의 말대로 맷 데이먼은 어려서부터 특별했다. 칼슨 페이지는 8살의 어린 맷 데이먼이 그에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저는 제가자라면무엇이 되길 바라는지알아요.” 어머니는 이미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궁금하다는 듯 물었고 대답은 명확했다. “배우요.” 이 일화만으로도맷 데이먼이 4년간 다니던 하버드 대학을 그만 두고 배우로서의 진로를 결정했다는 사실에 수긍이 갈만하다. <스쿨 타이>(1992)와 같은 청춘물로 경력을 시작한 맷 데이먼은 <제로니모>(1994)에서 큰 배역을 거머쥐며 청운의 꿈을 품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그는 단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커리지 언더 파이어>(1996)에서 아편에 중독된 군인을 연기하기 위해 100일 동안 40파운드의 체중을 감량해야 했다. 훗날 이에 대해 맷 데이먼은 말했다. “내 심장이 오그라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한가지 확실한 지혜를 얻었다. “건강을 지불할만한 경력이나 꿈이 아닌 이상그건가치있는 것이 아니다.” <굿 윌 헌팅>(1997)은 거기서 시작됐다.
이상과 다른 현실을 헤매던 맷 데이먼은 비로소”왜 내가 여기 앉아있지?”라는 생각을 품었고, “내영화를 만들자”고 결심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굿 윌 헌팅>이었다. 유년시절부터 절친했던 벤 애플렉과 함께 각본을 써내려 간 <굿 윌 헌팅>은 할리우드의 언저리를 맴돌던 두 배우를 온전히 다른 궤도로 올려 보냈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역시 하버드 영문과 출신답게 작가적 재능이 있었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그는 자신의 대본에 투영된 재능에 미래를 걸 생각이 없었다. “각본을 쓰는 건 말할 수 있는 내 길을 말하고 시스템을 비틀 수 있는 기회였다.” 같은 해 벤 애플렉과 함께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각본상을 휩쓴 맷 데이먼은 그 기회를 배우로서의 입지를 구축하는데 소진했다.
<굿 윌 헌팅>의 세트장에서 만난 스티븐 스필버그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에 맷 데이먼을 캐스팅했다. 비로소 오디션에서 벗어나 러브콜을 얻었다. 이윽고 안소니 밍겔라의 <리플리>(1999)에서 살인마 톰 리플리를 연기하며 연기적 보폭을 넓혔다. 문제작 <도그마>(1999)에서 벤 애플렉과 다시 손을 잡은 뒤 구스 반 산트의 <게리>(2002)에선 각본가로서 역량을 발휘했다. “마치 어떻게 망가져도 상관없다는 듯 일했다.” 안소니 밍겔라의 말처럼 맷 데이먼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쉬지 않고 돌파해 나갔다. 정작 맷 데이먼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나는 그저 할 수 있을 만큼 한 것뿐이다.”
<본>시리즈와 <오션스>시리즈가 승승장구하는 가운데서도 맷 데이먼은 배우로서 자신이 어떤 이력을 쌓아나가야할지 판단이 명확했다. “마틴 스콜세지가레오나르도와 함께 보스턴으로 가서할 일이 있다고 했을 때,나는 무조건 예스였다.” <디파티드>(2006)를 결정할 당시 맷 데이먼에게 출연료 협상은 딱히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도 그에게 흥미로운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기회란 점이 주요했다. “빌 모나한의크레딧이 있는각본이라면을 통해 진짜 연기할만한 것이다.” 맷 데이먼은 자신의 가치가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잘 아는 배우다. 로버트 드니로가 연출하고 연기까지 한 <굿 셰퍼드>(2006)에서 그와 함께 출연한 맷 데이먼은 한 토크쇼에 로버트 드니로와 함께 출연해 이와 같이 말했다. “로버트 드니로와 함께할 수 있었던 이후로 나는 분명 더 나은 배우가 됐다고말할 수 있게 됐다.”
근래 공개된 스티븐 소더버그의 블랙 코미디 <인포먼트>(2009)에서맷 데이먼은 14kg가까이체중을 늘렸다. 소더버그의 <인포먼트>가 맷 데이먼에게 ‘건강을 지불할만한 경력과 꿈’으로서 인정받은 셈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빅터스>(2009)와 폴 그린그래스의 <그린 존>(2010)에 주연배우로 이름을 올린 맷 데이먼은 최근존 쉐인의 서부극 <진정한 용기>(1969)를 리메이크하는 코엔 형제의 신작 출연을 확정지었고,게이 피아니스트 ‘리버라치’의 실화를 다루는 스티븐 소더버그의 차기작에서 마이클 더글라스와 동성애 연기에 도전할 결심을 굳혔다. 폴 그린그래스의 연출이 무산됐다지만 맷 데이먼의 제이슨 본도 여전히 건재하다. “만약 내영화가 상영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맷 데이먼의 영화는 멈추지 않는다.
“배우들은 안전한 선택을 성공의 수단으로 삼는다. 나는 절대 그와 같은 길로 가길 원치 않는다.”오래 전 자신의 말처럼 맷 데이먼은 결코 평범한 길을 걷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청년기를 거쳐 비로소 모두가 바라는 배우로 성장했다. 동시에 그는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세상을 구하고 있다.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 돈 치들 등과 함께 설립한 자선단체기구를 통해 아프리카의 수질 개선과 식수 공급에 앞장서고 있으며 지난 해엔 오마바를 지지하는 연설을 통해 매케인 진영을 초토화시키며 진정한 팍스 아메리카나(?)를 실천했다.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고 시도하기 보다 당신 스스로를 위한 일을 해야 한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제 꿈을 실현한 맷 데이먼은 이제 세상을 구한다. 그는 진정 차가운 두뇌와 뜨거운 심장을 지닌 하이퍼 리얼 히어로다.
총을 맞고 사망한 부랑자 시신이 발견된 이튿날, 하원의원 스티븐 콜린스(벤 애플렉)의 여비서가 지하철역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이 덕분에 스티븐과 여비서의 섹스 스캔들이 불거지고 무기회사를 상대로 한 청문회에서 공격적인 질문을 던지던 스티븐의 발언권이 상실될 처지에 놓인다. 하루 차이로 발생한 두 죽음은 그저 동떨어진 두 개의 점처럼 접점이 없는 개별적 사건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를 취재하던 ‘보스톤 글로브’의 기자이자 스티븐의 친구인 칼 매카프리(러셀 크로우)는 두 사건을 연결하는 단서를 발견한다. 연결고리가 없는 두 사실을 관통하는 진실이 직감된다.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이하, <플레이>)는 거대한 음모를 추적하는 기자의 이야기다.
뛰어난 취재력을 자랑하는 베테랑 기자 칼 매카프리와 혈기왕성한 신예 여기자 델리 프라이(레이첼 맥아담스)는 진실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사건의 취재를 밟아나간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노크가 번번히 무산되거나 박대 당하는 와중에도 진실을 향해 접근해가는 취재과정이 호기롭게 묘사된다. 때때로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까지 연출되며 스릴러적 긴장감을 더한다. <플레이>는 스릴러적 구조를 통해 긴장감을 끌어당기는 동시에 전문직 드라마로서의 지적인 묘미를 더한다. 영화의 중추는 분명 거대한 집단의 이기에 대항하는 개인의 윤리적 저항을 곧잘 이야기하는 토니 길로이의 각본이다. 음모론에 갇힌 진실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고 믿어지는 결말 직전, 영화는 진실의 맹점을 자각하고 왜곡된 진실의 남은 한 꺼풀마저 벗겨내며 논의를 한 차원 더 발전시킨다. 진실을 추구하는 건 정의를 위해서지만 정의에 대한 집념은 때로 진실을 향한 시야를 가린다. 기자는 자신이 작성한 기사를 송고하기 직전까지 진실에 대한 의심의 끈을 놓쳐선 안 된다. 정의라고 믿어지는 부분조차도 의심해야 한다. <플레이>는 거대한 자본의 알력과 권력의 위협에 대항해 사선을 넘어서까지 결백한 진실을 얻어내려는 기자의 직업윤리를 흥미롭게 그려낸다. 찌라시가 득세하고 가십이 넘쳐나는 시대에 완전한 진실을 향해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기자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경종을 울린다.
그토록 많은 연애 지침서가 존재하는 건 그토록 많은 연애 유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뻔한 문장들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는 건 그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다는 반증이리라. 그건 마치 오래된 잠언처럼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싶은 것뿐이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로맨틱 코미디 혹은 멜로처럼 특별한 케이스를 빙자하고 있지만 뻔한 결과론을 담고 있는 게 인지상정. 다양한 커플들의 각기 다른 사연을 버라이어티하게 나열하는 가운데 우연과 필연의 법칙 속에서 엮이고 풀리는 관계를 그려나간다. 주어와 보어의 뉘앙스만으로 감지되듯 남성보단 여성에 대한 편애가 좀 더 강하지만 이는 귀여운 투정처럼 넘어갈만한 문제다. 남성을 여성의 속죄양 취급하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다양한 에피소드가 일관되게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는 건 문제다. 비중 차가 존재하는 각각의 로맨스를 분자 배열한 뒤 충돌시킨 반응의 에너지 값이 생각보다 미약하다. 이름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배우들의 면면보다 나아 보이는 구석이 없다. 사랑에 목매지도 간과하지도 말라는 것, 결론은 누구에게나 뻔한 교훈이다. 중요한 건 진심이었다. 그러나 나열되는 로맨스 속엔 상황에 대한 인지가 존재할 뿐 진심을 전달하는데 인색하다. 그저 질문을 던지고 농담으로 받아 치듯 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