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적인 인기와 명성을 얻은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영국에서 살지 않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와 줄리엣 역시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태어난 선남선녀다. 그리고 베로나는 실존하지도 않았던 셰익스피어의 희곡 속 인물들의 덕분에 실존의 전통을 얻었다. <레터스 투 줄리엣>은 바로 그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남긴 실물적인 전통을 소재로 둔 현대적 로맨스물이다.
뉴욕의 출판잡지사에서 팩트체킹, 즉 기사에 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근거를 조사하는 기자인 소피(아만다 사이프리드)는 자신의 글을 쓰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개업을 앞둔 약혼자와 함께 이탈리아 베로나로 여행을 떠나지만 다양한 음식과 와인에 정신이 팔린 약혼자와 떨어져 자신만의 일상을 보내던 중, 줄리엣에게 자신의 구애상담을 전하는 편지 이벤트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줄리엣의 비서들이라 불리며 그 편지에 답장 업무를 행하는 이들과 함께 누군가의 절실한 구애에 선의의 거짓말을 답신하던 중, 50년이 지난 편지를 발견하게 되고 이에 답장을 보낸 뒤, 예상치 못한 방문을 맞이하게 된다.
<레터스 투 줄리엣>은 허구적인 로맨스를 통해 현실적인 이벤트를 발생시킨 베로나의 관습을 이어받은 허구적인 로맨스다. 셰익스피어의 허구로부터 발생한 문화적 전통이 <레터스 투 줄리엣>의 기반이 됐다는 사실은 허구와 실재의 전이와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식상하듯 흥미로운 지점이다. 물론 이는 영화 외적인 문제다. 단지 <레터스 투 줄리엣>이라는 결과물을 놓고 말하자면 이런 접근은 사족이다. 이 영화는 새로운 화두를 던지는 로맨스물이라기 보단 진정한 사랑을 논하는 전형적인 로맨스물들의 궤 안에 놓인 또 하나의 낭만적 일탈극일 따름이다.
이는 어떤 지적의 의미가 아니다. <레터스 투 줄리엣>이 품은 전형성이 영화를 해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레터스 투 줄리엣>은 자신의 사랑이라고 믿었던 이와의 여정 속에서 결핍을 겪게 되는 여인이 우연과 필연의 경험 끝에서 새로운 결심을 품게 된다, 라는 일종의 판타지를 허구적인 세계 위에서 적절한 낭만을 곁들이며 담백하게 진전시켜 나간다. 덕분에 <레터스 투 줄리엣>은 운명이라는 단어가 발생시키는 환상성과 함께 그 특별한 성격 자체의 전형성을 동시에 설득시키는 작업으로서 적당한 성공을 불렀다 말할 수 있는 동시에 장르적 기성품으로서 제값을 해내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가 되는 동시에 그 허구적 명성을 실제적인 전통으로 승화시킨 베로나의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피렌체 인근에 자리한 시에나 와이너리의 풍요로운 자연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음미하기 좋은 식단처럼 풍성한 시각적 만찬이나 다름없다. 동시에 아만다 사이프리드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이루는 신구의 조화는 영화의 균형감각을 이루는 자질과도 같다. 딱히 새롭거나 빼어난 영화라 추켜세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허구적인 환상과의 타협은 적절하며 기본적인 현실성을 망각하지 않는다. 마치 허구로부터 새로운 현실적 가치를 창출해낸 베로나의 오늘처럼 환상과 현실의 접점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며 타협을 성사시킨 느낌이랄까.
아만다 사이프리드는 혜성처럼 등장했다. ‘맘마미아!’를 외칠 만큼 스스로에게도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사이프리드는 ‘깜짝 스타’가 아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사이프리드의 현재는 스스로를 갈고 닦은 노력의 보답이다.
1985년 생인 사이프리드는 1995년, 9살의 나이에 연기에 입문했다. 자신이 거주하던 펜실베니아주 앨렌타운에 있는 시빅 극장에서 연기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11살 때 즈음, 몇몇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고 아역 모델로서 활동을 해나갔다. 그리고 17살까지, 모델로 활동하면서 5년에 걸쳐 꾸준하게 브로드웨이 보이스 트레이닝에게 발성 훈련을 받았다. 이는 훗날 사이프리드가 “어린 나이에 배우로서의 삶을 꿈꾸긴 했지만, 그 꿈이 실현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사이프리드는 일찍이 다양한 TV시리즈를 통해서 경력을 수집해 나갔다. 아역 시절 크레디트에 오르지 못했던 작품을 제외하면 그녀에게 공식적인 경력이라고 할만한 작품은 2000년부터 2001년까지 고정 출연했던 TV쇼 <As the world turns>였다. 2002년부터 2003년 사이에는 ABC의 <All my children>에 고정으로 출연했다. 사이프리드의 스크린 데뷔작은 그 다음 해 선보인 <퀸카로 살아남는 법>이다. 이 작품에선 ‘플라스틱’이라 불리는 백치스러운 소녀 카렌을 연기한다. 애초에 사이프리드는 카렌의 퀸카 친구 역할로 오디션에 참여했지만 레이첼 맥아담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하지만 사이프리드를 눈 여겨본 프로듀서는 그녀에게 카렌 역을 제안했다. 데뷔작은 흥행했고,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이후 그녀에게 ‘진정한 의미’를 부여한 작품은 바로 <나인 라이브즈>(2005)였다.
<나인 라이브즈>를 연출한 로드리고 가르시아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콜롬비아의 대문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아들이다. <나인 라이브즈>는 서로 다른 아홉 편의 단편으로 이뤄진 옴니버스 영화다. 아홉 여성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 이 영화는 로빈 라이트 펜, 글렌 클로즈, 홀리 헌터와 같은 ‘진짜’ 여배우들의 리스트만으로도 이목을 집중시킨다. 특히 사이프리드에게 시시 스페이섹(<케리>의 여주인공)과의 만남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처음엔 겁을 먹었지만 더 이상 그녀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너무 환상적이었다. 그녀와 함께 작업할 수 있어 기쁘다.” 사실 <나인 라이브즈>에서 사이프리드는 단 일곱 테이크만에 촬영을 끝냈지만 분명 그녀에겐 남다른 작품이다. 로드리고는 사이프리드를 생각하며 사만다를 구상했고, 로드리고의 제안은 그녀에게 선물과도 같은 영광이었다. 로드리고는 이미 사이프리드의 재능을 직관적으로 깨닫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에 앞서 2004년, 사이프리드는 UPN의 TV시리즈 <베로니카 마스>의 타이틀롤 캐릭터 오디션에 참가한다. 하지만 역할은 크리스틴 벨의 차지였다. 사이프리드는 베로니카의 ‘절친’으로 기억되는 릴리 케인을 연기한다. 일찍이 살해당한 릴리는 베로니카의 기억을 통한 플래시백 시퀀스에서만 등장했지만 첫 시즌에서 미스터리의 핵심적인 단서나 다름없는 역할이었기에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게 된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베로니카 마스>에 출연하는 사이, 사이프리드는 <하우스 M.D>나 <로 앤 오더: 성범죄 전담반> <CSI 라스베가스> 등과 같은 TV시리즈에서 게스트로 등장해 얼굴을 알렸다.
2006년은 사이프리드에게 특별한 해였다. 그 해 사이프리드는 HBO가 새롭게 기획한 TV시리즈 <빅 러브>에 출연하기로 결정한다. 일부다처제를 신봉하는 몰몬교 집안의 가풍에 저항하는 장녀 사라 역할을 맡은 사이프리드의 연기는 2006년 3월 12일 첫 방송 이후로 3시즌에 걸쳐 2009년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2009년 12월, 사이프리드는 HBO와 새롭게 거듭될 시즌에서의 출연 의사를 약속했지만 계획은 2011년까지 미뤄졌다. 당시 그녀는 <맘마미아!>(2008)의 성공 이후, 수많은 영화 제작사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는 상태였고 스케줄의 조율이 쉽지 않았다. 지난 해 사이프리드는 <300>(2006)과 <왓치맨>(2009)을 연출한 잭 스나이더의 신작 <서커 펀치>(2011)의 히로인 역할을 맡기로 결정했지만 결국 스케줄 문제로 하차해야 했다.
대작 뮤지컬 <맘마미아!>의 영화화 관건은 두 가지였다. 무대 위의 정교한 세트를 대신할 진짜 장관과 ‘아바’의 명곡과 안무를 온 몸으로 소화할 배우들. 무엇보다도 <맘마미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모녀, 도나와 소피를 책임질 배우로 누가 지목될 것인가는 희대의 관심사였다. 그런 의미에서 도나 역의 메릴 스트립이 기대를 부추기는 ‘느낌표’였다면 소피 역의 사이프리드는 의심을 낳는 ‘물음표’였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I Have a Dream’을 완벽하게 소화한 사이프리드를 본 제작진은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리스의 스포라데스 제도를 병풍 삼아 펼쳐진 배우들의 가무는 전 세계적인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오래 전부터 갈고 닦은 목소리로 아바의 명곡을 재현한 사이프리드 역시 ‘기회’를 놓치지 않은 셈이다.
<맘마미아!> 이후 최근 2년 사이, 사이프리드는 무려 네 편의 작품에 이름을 올렸다. 근작 <디어 존>(2010)을 비롯해, 지난 해에는 세 편의 작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내가 한 순간에 등장했다고 말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이 모든 작품이 동시에 공개됐기 때문일 뿐이다.” 이 모든 작업은 2~3개월 간격을 두고 순차적으로 진행됐지만 대중에겐 순서를 다투듯 등장했다. 현재 사이프리드가 얼마나 ‘핫’한 배우인가를 증명하는 사례다.
아톰 에고이안의 <클로이>에서 타이틀롤을 맡은 그녀는 매혹적인 페로몬을 발산한다. 순수하고 발랄한 소녀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 던진다. 심지어 옷조차 벗어버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숨막히는 뒤태를 드러낸 그녀는 단호하게 결심했다. “단지 옷을 벗는 건 어렵지 않지만 베드 신만큼은 대단한 도전이었다.” 그녀는 그 도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클로이>가 리암 니슨과 줄리안 무어라는 걸출한 배우들을 출연시킨 영화임에도 온전히 사이프리드를 위한 영화처럼 보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클로이>는 사이프리드를 감싸고 있던 순수한 소녀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걷어내고 그녀에게 잠재된 성숙한 매력을 과감하게 끌어냈다.
사이프리드는 <디어 존>에서 직접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며 자신이 작사한 노래로 또 한번 가창력을 뽐낸다. 사실 그 연주는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즉흥적인 제안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사실 그 연주는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즉흥적인 제안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그는 내가 무언가를 연주하길 원했고, 나는 그저 내가 아는 곡을 연주했다. 그런데 가사가 평소보다 더 잘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 곡을 스튜디오 녹음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부른 ‘Little House’는 사실 아일랜드의 유명한 싱어송라이터 데미안 라이스의 미완성곡이다. “나는 실제 데미안 라이스가 사는 곳에서 지난 가을과 이번 4월에 함께 작업했다. 우리는 <디어 존>을 위한 노래를 결코 끝내지 못했지만 나는 데미안 라이스와의 작업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차기작 <레터 투 줄리엣>(2010)의 개봉을 기다리는 사이프리드는 현재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원작을 영화화 하는 <A Woman of No Importance>(2011)와 글렌 클로즈와 올랜도 블룸이 출연한 브로드웨이 연극 <The Singular Life of Albert Nobbs>를 영화화 한 로드리고의 신작 <Albert Nobbs>(2011)를 비롯해 이미 세 작품의 출연을 결정지었다. 내년부터 시작될 <빅 러브>의 새로운 시즌에도 출연을 재개한다. “지난 해에 내가 볼 수 있었던 대본의 대부분은 나쁜 것이었지만 그 중에 몇몇 괜찮은 것이 있었다면 올해에는 정말 훌륭한 몇몇 대본들 사이에 수많은 나쁜 대본들이 들어왔었다. 만약 당신이 정말 훌륭한 대본을 받았거나 그런 제의가 들어오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제법 괜찮은 위치에 서 있는 셈이다.” 스스로의 말처럼, 그녀는 지금 제법 좋은 위치에 서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자신의 가능성을 만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