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 사회의 계급은 사회지도층을 일컫는 ‘알파’와 늑대 사회의 하층민이나 다름없는 ‘오메가’로 구분된다. 케이트는 알파고, 험프리는 오메가다. 험프리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는 케이트와 달리 험프리 눈에는 케이트가 김태희고 전도연이다. 하지만 케이트가 험프리에게 관심을 가진다 해도 그건 단지 사회지도층의 윤리이자, 일종의 선행으로 끝나야 할, 오래된 늑대 사회의 계급적 운명론이다. 어쨌든 <알파 앤 오메가>는 늑대 종족을 구분하는 두 계급의 대표자로 등장하는 케이트와 험프리의 모험과 로맨스를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대부분의 관객에게 생소한 개념이겠지만 이 작품에서 내세우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늑대 사회의 계급은 단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늑대 사회는 세 계급으로 자신들의 우열을 구분하는데 그 순열에 따르면 알파, 베타, 오메가로 나뉜다. <알파 앤 오메가>는 계급의 양 극단을 지칭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계급적 배타성을 통해 늑대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 즉 늑대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출한다. 물론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설정이 그러할 뿐, 이 애니메이션이 셰익스피어의 그것(을 기대하기도 쉽지 않지만 어쨌든 그것)처럼 절절한 로맨스의 비극 따위를 연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이 작품의 골자는 간단하다. 계급적 차이로 인해 이루어질 수 없는 두 쌍의 늑대가 있고, 그들 중 낮은 계급에 속하는 수컷이 암컷을 짝사랑하지만 사회지도층의 윤리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암컷은 수컷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종족의 미래를 위해 사랑하지 않는 이웃 늑대 부족의 사회지도층 수컷과 백년가약을 맺고자 한다. 하지만 그리 된다면 이야기는 재미없어지는 법, 갑작스런 인재에 휘말려 험프리와 케이트는 자신들의 보금자리에서 먼 곳으로 떠나가게 되고 그곳에서 두 사람의 진정한 관계가 재정립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이건 늑대 사회로 위장한, 계급적 신분차를 뛰어넘는 남녀의 로맨스물이다. 중간중간 골자로 코믹한 설정들이 끼어드는 로맨틱 코미디인 셈이다. 결국 중요한 건 이 애니메이션이 그 빤한 설정들을 불식시킬 만큼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나 탁월한 발상의 전환을 지니고 있느냐는 물음에 답변할 수 있는가라는 지점일 것이다. 하지만 <알파 앤 오메가>는 이에 충실한 답변을 내놓을 수 있는 근거가 빈약한 작품이다. 픽사와 드림웍스가 매년 타이틀 매치를 벌이고, 유니버셜 스튜디오와 같은 몇몇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이 다크호스처럼 떠오르기도 하는 전세계 애니메이션의 링에 등장한 라이온스 게이츠의 <알파 앤 오메가>는 어떤 특이성이나 기발함을 발견하기 어려운, 소위 요즘 날고 긴다는 애니메이션 작품 가운데 가장 몸값이 떨어지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람 흉내 내는 늑대들과 몇몇 동물들이 등장하는 광경은 드림웍스 캐릭터들의 실패적인 아류처럼 보이고, 그들이 구사하는 유머란 다소 지나친 표현을 빌리자면 어디서 웃어야 할지 타이밍을 맞추기가 어렵다. 사실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그 역할이 무엇인지 감을 잡기가 어려울 만큼 낭비적이며 전반적인 스토리텔링 역시 불필요한 사연을 늘려나간다는 인상을 넘을 만한 감상을 얻기 어렵다. 어드벤처로서 추천할만한 시퀀스를 찾는다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물론 3D의 입체감을 활용하겠다는 야심만으로 그득해 보이는 몇몇 시퀀스는 입체안경의 쓸모를 재확인시켜주겠지만 그게 최선은 아니다. 한 가지 의미를 짚어본다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라이온스 게이츠의 애니메이션 사업을 위한 첫 번째 발걸음으로서의 쓴 유산이 될 것이라는 조언 정도가, 그게 최선의 칭찬이 될 것 같다. 물론 <알파 앤 오메가>를 (사실상 이 리뷰 따위가 필요 없는) 순수한 아동들을 위한, 동화적인 교육용 애니메이션 정도로 여긴다면 앞선 박한 언어들 따위는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만.
사회지도층 공주로 태어났지만 마법의 금발을 타고난 덕분에 기구한 운명 속에서 성장한 소녀 라푼젤, 그녀는 자신을 유괴한 탐욕스런 여인 고델을 어머니로 알고 그녀의 반협박적인 모성애 연기에 속아 높은 탑 속에서 갇히듯 자라났다. 덕분에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긴 금발만큼 자라난 라푼젤의 성에 수배를 피해 달아나던 도적 플린이 침입하고 우연히 그를 붙잡게 된 라푼젤은 그가 지닌 보물을 숨긴 뒤, 자신의 소원과 맞바꾸자는 제안을 한다.
그림형제의 고전동화 <라푼젤>을 각색한 디즈니의 50번째 애니메이션 <라푼젤>은 묵은 영광 속에서 고성처럼 낡아가던 ‘디즈니 캐슬’의 새로운 리노베이션을 선언하는 작품과 같다. 지난 2009년, 그림형제의 <개구리 왕자>를 각색한 <공주와 개구리>로 셀애니메이션 명가의 저력을 21세기에 증명한 바 있는 디즈니는 <라푼젤>을 통해서 CG애니메이션에서도 디즈니가 통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물론 <라푼젤>은 디즈니가 처음으로 시도한 CG애니메이션이 아니며 <볼트>를 통해 이미 자신들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라푼젤>은 고전동화의 현대적 각색이라는, 디즈니의 전통적인 스토리 양식을 새로운 애니메이션의 기법 안에 녹여내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픽사의 수장 존 라세터는 디즈니의 전통적인 양식에 새로운 감각을 수혈해내며 디즈니를 새로운 시대로 이끌어냈다.
고전동화의 텍스트를 밑그림 삼아 다채로운 캐릭터를 세워 넣고, 위트 있는 활기로 덧칠된 디즈니 애니메이션 특유의 활기는 <라푼젤>에서도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러브스토리와 권선징악이라는 두 개의 요소는 여전하되, 새롭게 각색된 고전동화의 현대적인 운용이 돋보인다. 개성 있는 캐릭터들의 마련은 아기자기한 위트와 어드벤처로서의 활기를 더하는 탁월한 수단이다. 캐릭터의 매력이 애니메이션의 매력을 좌우하는 가장 큰 열쇠임을 생각한다면 <라푼젤>의 캐릭터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 작품의 성과를 증명하는 단서나 다름없다. 기존의 디즈니 애니메이션들과 같이 <라푼젤> 역시 다양한 노래와 춤으로 극적인 감정들을 고조시키며 흥겨운 볼거리를 만들어낸다.
<라푼젤>은 분명 디즈니라는 타이틀 안에서 빤히 읽혀지는 것들을 품은, 전형적인 디즈니 클리셰다.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날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언제나 상투성과 전형성 안에서 줄타기를 한다. <라푼젤>은 후자에 가깝다. 누구나 알만한 이야기라는 이해를 넘어서는 건 누구나 알지만 바라고픈 이야기라는 감동이다. <라푼젤>은 픽사와 드림웍스의 시대에서도 빤하다 못해 낡아 버린 듯한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가치가 여전히 지속될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불식시키는 답변이다. 사랑스러운 캐릭터와 아름다운 러브스토리, 디즈니의 인장이 뚜렷한 <라푼젤>은 바로 그 이름에 걸린 기대에 어울리는, 최상품의 감동으로 채워진 디즈니의 새로운 고전이다. 누구나 바라는 그 감동, 그것이 바로 디즈니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가치이며 <라푼젤>에 바로 그것이 있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기 직전인 한 행성에서 부모의 기지로 우주선에 탑승한 한 아이가 탈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바로 옆 행성에서 탈출한 또 다른 아이와 평행선을 그리며 우주를 비행하다 함께 지구에 불시착한다. 비슷한 운명을 타고난 두 아이는 판이한 외모만큼이나 대립적인 성장기를 보내고 결국 최고의 적수로 자라난다. 초능력을 통해 온갖 사랑을 독점하며 자란 ‘훈남’ 아이는 메트로시티의 영웅 ‘메트로맨’이 되고 ‘비호감’이었던 아이는 메트로시티의 악당 ‘메가마인드’가 되어 끊임없이 맞선다.
영웅질도 딴지를 거는 악당이 있어야 인정 받을 수 있듯, 악당질도 가로 막는 영웅이 있어야 할만한 법이다. <메가마인드>는 영웅이 사라진 도시에서 활개치다 스스로 심심해졌음을 깨닫게 된 악당의 딜레마를 그린다. 관심 받고 싶어서 악명을 떨쳤지만 그 관심을 부각시켜줄 영웅질이 없으니 악당은 자연스레 초조해진다는 것이 <메가마인드> 속 악당의 면모다. 분명 순진한 이야기다. 진짜 악당이 아닌, 관심을 얻기 위해 악당을 흉내 내는 법을 익힌 이의 사연이 결국 <메가마인드>의 본체인 것이다. 이는 교육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교훈적 메시지로 연결된다. 칭찬 받고 자라지 못한 아이는 어떻게 비뚤어지는가에 관한, 장난끼 가득한 우화라고 할까.
물론 <메가마인드>는 그리 심각하지도, 진지해질 생각도 없는,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위트적인 작품이다. 다양한 히어로 무비의 메타포들을 잔뜩 끌어들인 뒤, 그 평면적인 이미지들을 전시하고 그 안에 담긴 패러다임들을 가볍게 조리한다. 또한 <슈퍼배드>와 같이, 영웅의 활약상을 묘사하고 숙명에 가까운 고독한 심리를 포착해내는데 초점을 맞춘 슈퍼히어로 무비의 최근 경향을 위트 있게 패러디하는, 안티-안티히어로물에 가깝다. ‘모태 영웅’ 슈퍼맨과 ‘스킨헤드’ 악당 렉스 루터를 연상시키는 <메가마인드>의 메트로맨과 메가마인드는 히어로 무비의 컨벤션이나 다름 없는 이미지를 입고서 히어로 무비의 패러다임을 전복시킨다.
천부적으로 영웅 기질을 타고난 아이와 반대로 강력한 비호감의 기운을 풍기는 아이는 영웅과 악당으로 자라나 각자 유명세를 떨친다. 셀리브리티와 같은 만인의 영웅 메트로맨의 인기와 자신이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님을 깨닫고 인생 방향을 악당으로 전향한 메가마인드의 악명은 대조적인 동시에 협조적이다. 영웅과 악당이라는 이분법적 관계의 교묘한 공존 체제를 풍자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이를 유머로서 승화시키는데 주력한다는 점에서 유쾌하다. 동시에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몰라도 사랑 받고 태어난 아이가 세상의 평화에 이바지한다는, 단순하지만 명확한 교훈을 전달한다. 특유의 과장된 연출로 익살스러운 위트를 던지는 동시에 넘치지 않는 감동을 수확해내는 드림웍스의 방법론이 또 한번 통했다.
어느 날,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피라미드를 훔친 범인의 정체를 두고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스스로 세계 최고의 악당이라 자부하는 그루의 뚜껑도 열렸다. 사실 자신의 비열함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한 그루가 저지르는 악행이란 카페에서 자신의 앞에 선 이들을 얼음으로 얼리기, 주차된 차 사이로 끼어들어 도로 어지럽히기, 길 가는 꼬마 울리기 등과 같이 사소한 것들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루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다. 바로 달을 훔치는 것. 달을 훔치고 나면 세상 모든 이들이 자신의 악행을 널리 인정해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
수요가 늘어나면 공급도 따라 늘어나기 마련이다. 매력적인 슈퍼히어로의 수요가 올라갈수록 그에 상응할만한 능력을 지닌 슈퍼악당들의 공급도 따라야 한다. 영웅보다도 매력적인 악당이 늘어간다는 건 단지 우연이 아닌 셈이다. <슈퍼배드>는 그런 세태에 힘입어 기획된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히어로의 망토 끝자락 따위조차 구경할 수 없는 이 작품은 오로지 누가 누가 더 나쁜 놈인가를 경쟁하는 천진난만한(?) 악명 배틀을 아기자기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슈퍼배드>는 단지 악당 캐릭터들의 활약상을 왁자지껄하게 전시하는 액션 코미디로서의 카타르시스에 주력하고 마는 작품이 아니다.
달을 훔쳐내겠다는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라이벌 벡터가 강탈한 축소 광선 무기를 탈환해야 하는 그루는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쿠키를 파는 세 소녀를 입양해서 벡터의 집에 위장 잠입시킨다. 자신들을 거두어줄 부모를 찾던 세 소녀와 단지 작전을 위해 아이들을 입양한 그루의 불협화음은 점차 묘한 가족애로 거듭나고 그 사이에서 그루도 점차 변화를 거듭한다. <슈퍼배드>의 서사를 간략히 설명하자면 애정결핍의 트라우마를 품은 악당의 가족주의적 성장을 다룬 드라마다. 이 지극히 빤한 설정은 <슈퍼배드> 안에서 묘한 의외성을 발휘하는 요소이자 결정적인 감동적 찰나를 빚는 유효한 자질로 작동한다. 애니메이션 특유의 분위기 안에서 과장된 설정을 마음껏 악용하며 웃음을 빚어내는 가운데서도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감수성은 <슈퍼배드>를 단순한 일회성 유희로 몰락시키지 않는다.
대부분의 훌륭한 애니메이션이 그러하듯이, <슈퍼배드> 역시 귀엽고 아기자기한 캐릭터를 통해 승부수를 던진다. 무엇보다도 <슈퍼배드>에서 눈에 띄는 건 좀처럼 종의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미니언’이다. 캐릭터의 정체에 대한 일말의 설명도 없이 시종일관 다용도(?)적인 쓰임새를 자랑하는 이 미니언들은 <슈퍼배드>의 소소한 재미를 책임지는 일종의 수식어 캐릭터나 다름없다. 익살스럽거나 귀여운 주요 캐릭터들의 공백을 메우는 동시에 천진난만하면서도 장난끼 넘치는 활력을 자랑하는 미니언들은 어떤 식으로든 활용이 가능한, <슈퍼배드>의 슈퍼 길티 플레저로서 작품의 개성을 드러내는 가장 탁월한 무기로서 기능한다.
추억이 애틋한 건 그 지나간 기억으로부터 여전히 느껴지는 체온 때문일 게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당연스럽게 흘러가고, 그 시간 안에서 우린 스스로 모른 채 많은 것들을 흘리고 뒤돌아 줍지 못한 채 떠밀려 나간다. <토이 스토리 3>는 바로 그 잃어버린 시간에 관한, 즉 추억들에 대한 애틋한 드라마다. 세 번째 속편에 다다른 이 시리즈는 언제나 그렇듯 주인에게 버려질까 전전긍긍하는 장난감들의 좌충우돌 활극을 그린다. 1999년, 그러니까 21세기 전에 나온 전편과 10년이 넘는 격차를 두고 거듭된 세 번째 속편이지만 <토이 스토리 3>는 어느 속편들처럼 새삼스럽거나 안이한 기획물이 아니다.
지난 두 편과 마찬가지로 <토이 스토리 3>에서도 스토리텔링의 요건을 이루는 건 버려지길 두려워하는 장난감들의 활극이다. 다만 한 가지 다른 건 다른 장난감에 밀려나거나, 부서져서 버려지는 신세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 영원히 폐기되는 것. 이유는 바로 자신들의 주인인 앤디가 더 이상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않는 나이로 자라버렸기 때문이다. <토이 스토리 3>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대단한 극적 몰입도를 발생시킨다. 픽사가 제작했던 지난 작품 <업>이 극 초반부에서 젊은 남녀가 만나 함께 늙어가다 사별하기까지의 과정을 대사 한 마디 없는 몽타주 신으로 탁월하게 재생시켰던 것과 같이 <토이 스토리 3>의 오프닝 시퀀스는 몽타주를 활용하며 앤디의 성장과 그 성장을 함께 했던 장난감들의 추억을 환기시킨다. 이는 전편들을 경험하지 못했던 관객들을 위한 배려로서 손색이 없는 동시에 지난 전작을 추억하는 관객들에게는 훌륭한 선물이나 다름없다.
<토이 스토리 3>에서도 탁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이야기다. 언제나 그렇듯, 혹은 최근 들어 더욱 대단한 성과를 자랑하는 것처럼 픽사는 또 한 번 올해의 이야기를 완성했다. <토이 스토리 3>는 또 한 번 픽사의 장기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우연의 연속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또 한 편의 완전한 스토리를 창작해냈다. 픽사가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링에 대단한 극찬을 부여할 수 있는 건 단지 뛰어난 내러티브를 완성할 줄 아는 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픽사의 스토리는 체온을 품고 있다. 넉살스러운 캐릭터들은 능수능란한 유머를 구사하며 활기를 더하다가도 끝내 눈시울을 붉히게 만드는 사랑스러운 찰나를 발견하게 만든다. 진짜 ‘감동’의 결정을 아로새긴다. 그리고 <토이 스토리 3>는 픽사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결정이다.
우디와 버즈를 비롯한,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그 장난감들의 모험담에는 인간의 희노애락이 모두 담겨 있는 동시에 실로 형형하게 구현된 그 감정들을 응집시켜 이룬 압도적인 클라이맥스가 존재한다. <토이 스토리 3>에서 내러티브의 흐름은 결코 안주하거나 자만하는 법이 없다. 유머 감각이 뛰어난 캐릭터들은 때때로 만만찮은 서스펜스로 관객을 일순간 끌어들이고 결국 좀처럼 외면할 수 없는 페이소스로 관객을 빠뜨린다. 두 번째도 아닌, 세 번째 시리즈인 <토이 스토리 3>는 ‘전편보다 나은 속편이 없다’는 속설을 실로 무색하게 만드는 문제작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영역을 넘어서 감히 영화사 안에서도 가장 훌륭한 트릴로지로서 손꼽힐만한 시리즈랄까. 심지어 <토이 스토리 3>는 픽사의 창작 비결이 마법이 아닐까 호들갑 떨고 싶게 만들 정도로 보는 이를 벅차오르게 만드는 감동의 진경으로 인도한다. 감동의 결정을 품은 이야기의 정수를 선사한다.
최근 몇 년 사이 픽사가 만들어낸 작품들은 하나 같이 걸작이었다. <라따뚜이> <월-E> <업>까지, 매년 1편씩 걸작을 만들어내겠다는 각오라도 품은 것인양 대단한 이야기와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을 완성해 왔다. 사실 <토이 스토리 3>는 픽사의 아이디어 뱅크라 할 수 있는 존 라세터, 앤드류 스탠튼, 피트 닥터 등 지난 시리즈를 완성해낸 주역들이 한 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만든 야심작이기도 하다. 마치 자신들의 지난 추억을 꺼내들듯이, 그리고 자신들에게 지금의 영광에 다다르게 한 일등공신과도 같은 작품을 새롭게 닦아 내듯 정성스럽게 이야기를 직조하고 캐릭터를 어루만졌다. 대부분의 속편들이 창작자들의 무신경한 태도 속에서 흉물스럽게 망가지는 것과 달리 픽사의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보물 위에 쌓인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내고 닦아내듯 정성을 다해 완벽한 속편을 완성했다. 장담하건대, 적어도 당신이 <토이 스토리 3>를 보게 된다면 그 사연의 끝에서 적어도 두 번은 울컥할 것이다.
사랑스럽다는 말을 부끄럽지 않게 만드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창작자들에게 전할 수 있는 건 그저 고맙다는 말이다. 픽사의 작품이, <토이 스토리 3>가 바로 그렇다.
픽사가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링에 대단한 극찬을 부여할 수 있는 건 단지 뛰어난 내러티브를 완성할 줄 아는 능력 때문이 아니다. 픽사의 스토리에는 체온이 있다. 대단히 능수능란한 유머를 구사하면서도 끝내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고야 마는, 진짜 ‘감동’의 결정을 품고 있다. <토이 스토리 3>는 픽사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결정이다. 전편을 뛰어넘는 속편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속설을 2편도 아닌, 3편에서 다시 한 번 무색하게 만드는 결과물을 보고 있노라면 이걸 뭐라 해야 하나, ‘픽사’의 재능은 창작이 아닌 마법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랄까. <토이 스토리 3>는 애니메이션의 영역을 넘어서 감히 영화사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트릴로지의 완결편이자 가장 멋진 피날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걸작이다. 하긴 최근 몇 년 사이 픽사가 만들어낸 애니메이션은 하나 같이 걸작이었다. 사랑스럽다는 말을 부끄럽지 않게 만드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창작자들에게 전할 수 있는 건 그저 고맙다는 말이다. 픽사의 작품이, <토이 스토리 3>가 그렇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전편인 <슈렉 3>는 <슈렉>시리즈의 명성을 죄다 깎아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단지 시리즈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강박과 캐릭터의 인기에 온전히 기대버린 듯한 성의 없는 완성도는 지난 두 편의 전작이 일궈낸 성과의 발목을 잡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슈렉 포에버>는 어딘가 의심스러운 작품이다. 단지 <슈렉 3>의 속편이란 점만으로도 <슈렉 포에버>는 시리즈의 배수의 진이나 다름없다. 전편의 실패를 만회할 것이냐. 하지만 <슈렉 포에버>는 다른 의미의 승부수를 던졌다. 시리즈의 피날레, <슈렉 포에버>는 시리즈의 마지막을 공언한 작품이다. 이는 비장한 결의의 일종이거나 모종의 비겁한 변명이다. 물론 판단은 작품의 완성도에 달렸다.
<슈렉 포에버>는 더 이상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전시용 괴물이 되어버린 듯한 슈렉의 불만스런 일상을 비춘다. 자신을 빼닮은 세 아이와 사랑하는 아내 피오나, 그리고 언제나 자신의 곁을 지키는 친구 동키와 장화 신은 고양이, 슈렉은 이들과 함께 매일 같이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아니, 적어도 다른 사람들 눈에 행복하게 보일 것 같은 일상을 버틴다. 결코 변하지 않는 매일은 쳇바퀴 돌듯 찾아오고, 안락한 삶은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 된다. 그러니까 슈렉이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의 권태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점차 프리하고 와일드한 지난 날의 일상이 그리워진다. 그리고 그에게 단 하루나마 그 일상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다시 한번 냉정하게 말하자면 <슈렉 포에버>는 더 이상 이 시리즈가 원래의 아이덴티티를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증거처럼 보인다. 그리고 스스로 시리즈의 마지막을 선언한 지금의 입장에서는 마치 고백처럼 이해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시리즈 안에서 성공적인 결과물이었다 평할 만한 <슈렉>과 <슈렉 2>는 기존의 디즈니 월드로 대변되는 착하고 순수한 동화적 패러다임을 전복시키는 패러디 세계관이 뚜렷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의 위트나 유머와 연동됨으로서 시리즈만의 확실한 가치를 어필했던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슈렉 3>를 비롯해 <슈렉 포에버>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그 세계관의 온전한 상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앞선 두 편과 달리 그 뒤를 잇는 두 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특징은 애초에 <슈렉>이 패러디하던 세계관이 온전히 껍데기만 남겨졌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자신이 패러디했던 세계관에 대한 독설은 사라지고, 그 알맹이가 사라진 껍데기들이 체스판의 말처럼 움직이며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물론 <슈렉 포에버>에서도 여전한 건 활기 넘치는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 그 자체다. 슈렉은 여전히 슈렉이다. 하지만 <슈렉>은 여전히 <슈렉>이 아니다.
물론 서사적으로 <슈렉 포에버>는 극명한 실패의 사례라고 해도 좋을 <슈렉 3>보다 나은 완성도를 품고 있다. 시리즈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그 시작점과 연결된 에피소드를 착안하며 나름의 전개적 논리를 마련한 것도 발전적이다. 하지만 이는 애초에 <슈렉>이라는 시리즈의 아이덴티티를 회복할 수 있는 결과물이 아닌, 혹은 그럴 가능성조차 희박해보이는 기획이다. 동화적 세계관의 껍데기를 엮어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함으로서 스스로 동화가 되려는 것처럼 보이는 <슈렉>을 본다는 건 자신의 앞선 전력을 온전히 망각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슈렉은 그렇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따위가 <슈렉>이 할 수 있는 해피엔딩이었던 것일까. 그나마 다행인 건 <슈렉 포에버>가 시리즈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제 슈렉이 돌아왔다, 는 변명 따위로 끌려나온 슈렉의 어색한 모습은 더 이상 보지 않아도 좋다는 말인 게다.
프랑스 알프스 지대에 위치한 아기자기한 마을 안시는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그리고 매년 6월, 안시에는 전세계 애니메이션과 특별한 손님들이 모인다. 애니메이션의 칸영화제라고 불리는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은 1956년, 칸국제영화제의 애니메이션 비경쟁부문 행사로 시작됐다. 1960년에 안시에 둥지를 트며 본격적인 집들이를 시작한 페스티벌은 전세계 애니메이션 산업의 도래지로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리고 오는 7일부터 12일까지, 안시에서 올해 50주년을 맞이하는 페스티벌의 특별한 손님 맞이가 펼쳐진다.
‘픽사(PIXAR)’가 늘 수준 이상의 성적을 유지하는 모범생이라면 ‘드림웍스(Dreamworks)’는 머리는 뛰어나지만 때때로 노력이 부족해서 열등한 모습을 드러내곤 하는, 게으른 우등생 같다. 마치 ‘좋은 예’와 ‘나쁜 예’가 뚜렷하다고 할까.드림웍스의 신작 <드래곤 길들이기>는 그 중에서도 좋은 예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버크섬은 바이킹 부족의 고향이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자신들의 가축을 약탈하고 목숨을 노리는 용과 맞서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강인하고 용맹한 전사가 되는 건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꿈이자 업이었다. 부족 내에서 가장 용맹한 전사로 통하는 바이킹 족장 스토이크는 용을 괴멸시키기 위해 그들의 거주지를 찾아내길 원한다. 하지만 그 전에 더욱 더 큰 고민은 그의 아들 히컵이다. 도무지 전사와는 거리가 먼 체격과 성격을 지녔음에도 아들은 용과 맞설 수 있다고 주장하며 번번이 사고만 치니 말이다. 하지만 어느 날, 스토이크의 고민은 말끔히 해결된다. 약골이라 용과 맞서기 어려울 것이라 믿었던 아들이 그 누구보다도 용을 다루는 재능이 대단하다는 것. 하지만 덕분에 히컵에게는 아버지가 모르는 고민이 하나 생긴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드림웍스라는 브랜드의 네임밸류 안에서 잉태된 기존의 작품들과 다른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슈렉>시리즈의 성공 이후로 드림웍스 애니메이션들은 의인화된 캐릭터들의 활약상에 초점을 맞춰 왔다. 동물의 탈을 썼을 뿐, 인간이나 다름없는 캐릭터들의 활동을 통해 위트를 건져내는 방식으로서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은 유효했다. 하지만 <드래곤 길들이기>는 명확하게 인간과 자연의 대비를 그리는 작품이다. 용과 대립하는 인간들의 세계관을 통해 두 대상 간의 교감을 그린다는 점에서 자연과 인류의 경계가 중첩적이던 전작과 뚜렷하게 다른 지향점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드래곤 길들이기>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아바타>의 대단한 흥행 이후로 전세계적인 현상으로 확산되고 있는 3D영상의 구현이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아바타>이후로 스크린에 가장 탁월한 3D영상을 구현하는 작품이라 자부할만한 작품이다. 물론 두 작품 사이에 간극은 있다. 실사를 바탕으로 구현한 <아바타>의 3D영상과 달리 <드래곤 길들이기>는 기본적으로 CG애니메이션의 툴을 바탕으로 제작된 3D영상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두 작품의 완성도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드래곤 길들이기>는 분명 <아바타>이후로 3D영화라는 포맷 안에서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좋을 작품임에 틀림없다. 3D기술을 볼거리로서 충분히 활용하는 동시에 단순하고 명료한 스토리에 적절한 감동적 요소를 삽입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작품 자체에 대한 감상적 몰입도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드림웍스의 전작인 <몬스터 vs 에이리언>이 습작과 같은 3D애니메이션이었다면 <드래곤 길들이기>는 완성형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드래곤 길들이기>는 드림웍스의 메인 프랜차이즈였던 <슈렉>시리즈의 뒤를 잇는 포스트 드림웍스 시리즈로서 빈자리를 채울만한 작품이라 단언해도 좋다. 이미 새로운 시리즈 제작에 착수한 <쿵푸팬더>처럼 <드래곤 길들이기>의 시리즈 기획 역시 이미 공표된 상태다.다만 그 동안 드림웍스가 시리즈를 거듭하며 작품의 완성도를 유지하지 못했던 전례들을 생각해본다면 불안한 예감이 동반되는 것도 사실이다. 데뷔에 성공한 캐릭터를 밑천으로 삼아 방향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무작정 서사적 레일만 깔고 전진해나가듯 시리즈를 거듭하는 방식은 <쿵푸팬더>와 <드래곤 길들이기>를 통해 새로운 국면 전환에 성공한 드림웍스가 고민해야 할 지점이라 할만하다.
물론 차후의 고민을 떠나서 현재의 성과, 즉 <드래곤 길들이기>는 상당히 인정받을만한 성과에 가깝다. 명확한 기승전결로 이야기의 줄기를 뚜렷하게 세우고, 교감과 성장이라는 테마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통해 명료한 감동마저 거둔다. 또한 다양한 디자인과 개성을 캐릭터와 순발력 있는 위트를 통해 탁월한 오락적 재미를 더한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오락영화로서의 평형감각과 기술과 연출의 균형감각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사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대한 큰 스크린을, 3D상영관을 찾길 권한다. 지갑을 열수록 재미는 극대화될 것이다.
픽사가 늘 수준 이상의 성적을 유지하는 우등생이라면 드림웍스는 재능은 뛰어나지만 게으른 우등생 같다. <드래곤 길들이기>는 다행히도 드림웍스의 ‘좋은 예’에 해당한다. 가능하다면 최대한 지갑을 열어라. 가장 큰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3D 입체영상으로 관람할 때 만족도는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감동과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교과서적인 작품이라 추천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