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와의 2박 3일>은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반영한 방송 작가의 소설을 동명 그대로 극화한 연극이다. 중요한 건 이 결과물이 말 그대로 ‘자전적 경험을 반영한 소설’이란 점이다. 자신을 반영한 주인공일 뿐, 작가와 주인공은 같은 사람이 아니다. 실제 자신의 경험을 투영했을 뿐, 소설이 묘사하는 주인공의 경험은 (그 원작을 본 누구라도 알 수 있듯이) 현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두고 있을 뿐, 다른 형태로 변주된 결과다. <친정엄마와의 2박 3일>은 각색이란 형태로서 실제를 허구로 창작해낸, 경험의 조작에 의한 산물이다. 목적은 분명하다. 당신을 울리는 것. <친정엄마와의 2박 3일>은 어머니와 가난이라는 페이소스의 이중주를 통해 당신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신파다. 그 의도는 스크린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친정엄마> 역시 신파다.
사실 (대한민국 안에서) 모정이라는 소재를 중심에 둔 과거지향적인 영화들은 대부분 신파로서 기능한다. 그리고 모정이라는 소재가 끊임없이 복기될 수 있는 건 그 소재를 관통하는 감정이 관객 대부분에게 경험적인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까닭이다. 때때로 그 범위는 가족 전반으로 확장되기도 하지만 페이소스를 폭발시키는 뇌관은 대부분 엄마의 몫이다. 엄마란 전통적인 가족의 구조 안에서 피해자의 형태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 실제로도 그러했으며, (혹은 여전히 그런 경우가 다반사이기도 하고,) 그와 유사한 환경에서 자라난 관객들의 지난 경험을 환기시키고 이를 통해 해묵은 감정을 발효시킨다. 가난과 모정이 결합된 실존적 체제의 신파가 그와 유사한 경험을 지닌, 혹은 그와 유사하게 여겨지는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 관객에게 공감대를 부여한다.
가난과 모정의 결합은 그 경험적 공감대를 품고 있을 관객들에게 일종의 노스텔지어로 작동되기 마련이다. <친정엄마>에서의 엄마 또한 마찬가지다. 모정은 가난에 등을 맞댄 채 등돌린 자식을 향하고, 가부장제의 폭력 안에서 버틴다. 다 자란 자식은 뒤늦게 이를 회상한다. 그리고 관객은 본다. 지난 시절의 경험이 환기된다. 통증이 밀려온다. 현재시제에서 출발하던 영화는 한 차례 긴 호흡의 플래쉬백을 거쳐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소설이건, 연극이건, 원작을 접한 관객에게 유효하지 않지만 그 플래쉬백은 모종의 의도를 감추고 있다. 물론 그것이 딱히 놀랄만한 반전적 비밀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은 감정을 응축시키기 위한 일종의 도움닫기 구실을 한다. 경험의 환기를 통해 감정을 축적한 뒤, 이성의 둑을 무너뜨리고 감정을 폭발시킨다.
<친정엄마>에서 중요한 건 서사보다도 인물이다. 사실상 원작 소설이나 희곡이 그랬던 것처럼, <친정엄마>의 시나리오에서 어떤 비범한 형태를 찾아보기란 어렵다. 그저 모정과 가난이 뒤섞인 신파라는 구별점 외에 특이점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무대 위에 올려진 연극이 유효할 수 있었던 건 이를 연기해내는 배우의 역량에 있었다. 희곡에서 반복적으로 활용하는 플래쉬백은 배우에게 있어서 끊임없는 감정의 널뛰기를 요구하고 감정적 몰입의 단절을 꾀한다는 점에서 좋은 희곡의 형태로 완성됐다고 평하기 어렵다. 그만큼 배우의 역량에 따라서 무대의 완성도는 질적으로 달라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강부자의 연기는 그것을 가능케 한다. 결과적으로 희곡이 온전히 배우의 연기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영화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강부자의 그것만큼이나 김해숙의 연기는 <친정엄마>가 보유한 뚜렷한 자원이다. 김해숙의 연기는 신파의 요소들을 수집해 일방적으로 공급하듯 재단한 서사의 너비 안에 찰기를 불어넣는다. 박진희는 차분하고 또렷하게, 자신이 머금고 뱉어내야 할 감정의 공급과 수용에 능하다. 하지만 때때로 그 감정적 교류 속에서는 과잉의 흔적이 발견된다. 이는 시나리오와 디렉션의 문제다. 사실 <친정엄마>가 묘사하는 모성애는 그것이 지나치게 극화된 양식 안에서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다는 인식을 부여한다. 엄마의 희생을 부각시키면서도 그 희생이 이루는 공적인 감정적 환기만 이룰 뿐, 당사자의 내면을 살피지 않는다. 이는 결과적으로 원작 자체가 당사자의 심정보다도 외부적인 관찰자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1인칭 시점의 감상적 결과물에 불과한 까닭일지도 모른다. 배우들의 연기는 이런 단점들로부터 눈을 돌리게 만들지만 완벽하게 메워지지 않는다. 보다 단명해진 서사의 흐름이나 관계의 변주는 눈여겨볼만하지만 그 감정의 쓰임새까지 인상적인 것은 아니다.
<친정엄마>는 흘러간 옛 노래처럼 낡은 영화다. 하지만 모성은 낡기 보단 깊게 우러나는 것이다. 누구나 엄마의 자식일 수 밖에 없는 만큼 각자 형태는 다를지라도, 서로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감정적 부채를 뒤늦게 깨닫고 마음에 지운 채 살 수 밖에 없다. <친정엄마>를 통해서 눈물샘의 자극을 느끼는 관객이라면 그건 자신의 마음에 얹혀진 부채의 너비를 뒤늦게 발견한 탓일 게다. ‘엄마 때문에 못 살겠다’는 대사만으로도 그 마음에 박아넣었던 경험들이 환기된다. 결국 그런 감정이 돌아와 개인의 마음을 찌른다. 결과적으로 <친정엄마>는 모성의 위력을 빌려 개개인의 감수성을 착취하지만 그 마음에 박힌 상처까지 들여다 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작품이다. 어쩌면 애초에 자식의 눈으로 재구성한 엄마의 드라마란 점에서 한계는 명확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식은 결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니까.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사실 애기 가지려고 쉬고 있었다. 그래서 살도 쪘고, 여러모로 홍보하기 적절한 시기는 아닌데 홍보하러 다닐 사람이 별로 없어서. (웃음)
아무래도 <날아라 펭귄>이 인권위 영화인 덕분에 인터뷰 중에 영화 외적인 질문이 많았을 것 같다.
내가 사교육 열풍에 관련된 영화를 찍었다고 해서 거기에 대한 혜안이나 결론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런 게 있다고 해도 사견에 불과하지 않나. 내게 어떤 집행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담이야 나눌 수 있지만 그런 질문을 받게 되면 아무래도 대답하기 버겁다. 엄마로서 어떻게 자식을 교육할 거냐, 물으시는데 사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 지금 낳아본 적도 없고, 일단 그냥 엄마나 됐으면 좋겠는데. (웃음) 계속 그런 질문을 받았는데 나도 내가 아직 어떤 엄마가 될진 모르겠다. 대충 넘기듯 대답하고 있긴 한데 대답하기 어려운 부분인 거 같다. 워낙 큰 문제이기도 하고, 내가 아직 현실로서 맞닥뜨린 부분도 아니니까.
어쩌면 <날아라 펭귄>을 통해 간접경험을 얻었다고 봐도 되겠다.
그렇지. 처음 들어본 단어가 많았다. ‘선행학습’.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선행학습을 해야 된다고 말한다는 엄마들 얘기는 처음 들어봤다. ‘태글리쉬’ 이런 용어도 처음 들어봤고. 정말 아빠 말대로 민족의 혼이 담긴 우리나라 운동을 왜 영어로 가르치니? (웃음) 어쨌든 그렇게 알게 된 것들이 있다. 물론 <날아라 펭귄>이 굉장히 새로운 문제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고 주변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라서 많이 공감하면서 찍을 수 있었다.
아이를 낳는 건 최근에 와서 결심한 문제인가?
그 전엔 일을 하면서 출산까지 겹치는 것이 버거울 거 같아서 피했는데 요즘엔 낳아봐야겠다 싶어지더라. 그래서 남편한테 “낳을까요?” 물으니까, “예. 낳읍시다.” 해서 결정했다. (웃음)
아무래도 예정에 없던 작품을 한 셈인데.
계획했던 작품은 아니었지. 드라마 하는 와중에 굉장히 어려운 과정을 겪고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됐다. 캐스팅도 안되고, 제작비도 없는 상황이라 같이 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하게 됐다. 주말 드라마는 일주일에 5일 정도 촬영하고 이틀 정도 쉬니까 그때마다 가서 촬영했다.
체력적인 부담은 없었나?
있었지만, 사실 드라마에서 내 분량이 조금 적어서. (웃음) 무엇보다 마음의 부담이 없었고 스트레스도 별로 없었다. 그냥 연기하기 전에 약간의 긴장감이나 의심들이 조금 있었지만 내게 압박을 줄 만큼은 아니었지. 오히려 현장이 즐거워서 가고 싶고, 가면 편안했다. 촬영 준비할 때 옆방에서 쪽잠을 자더라도 재미있고 그랬다.
<날아라 펭귄>은 사실 옴니버스적 형태에 가까운 영화다. 결국 주부이자 직장인으로서 가정과 회사를 배경으로 한 두 가지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셈인데 그 두 환경은 본인에게 생소한 풍경이 아니었을까.
우리나라 회식 문화를 겪어본 적이 없다. 영화 현장에도 어른들이 있지만 직장의 상사와 부하의 관계는 아니니까, 그런 상황을 잘 이해할 순 없었다. 게다가 영화 하는 여자들은 담배도 많이 피니까 회의할 때 보면 위 아래 막론하고 다 꺼내 물잖아. 부장님 있다고 담배 못 피우고 이런 거 없지. 그래서 그런 모습이 생소하긴 했다. 그래도 배우들이 전부 돈도 받지 않고 좋은 마음으로 모여서 그랬는지 찍을 때마다 분위기가 좋았다.
에피소드가 변하면서 주연에서 조연으로 비중이 이동된다. 같은 인물이지만 다른 역할을 하는 셈인데 그 와중에서도 캐릭터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게 중요했을 것 같다.
사실 처음엔 감독님께서 조금 걱정하셨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는 유명한 사람이 조연 캐릭터로 나오니까 관객 입장에선 뭔가 해주길 바랄 수도 있고, 앞선 에피소드와 캐릭터가 연결돼야 할 텐데 완전히 분리된 환경에서 캐릭터를 어떻게 연결시켜 보여줄 것인가에 대해 걱정하시는 것 같더라. 그런데 좋은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하게 된 거 같다. “요즘 애들은 진짜 용감하다.”, “과장님, 한잔 하세요.” 이런 대사들이 원래 대본에 있었던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커트하면서 상황을 정리할 수 있게 나오더라. 물 흐르듯이 분위기가 흘러가서 재미있었다. 게다가 누구 하나가 애드립을 쳐도 거슬리지 않았다. 자기 캐릭터에 맞게 적재적소에서 소박한 애드립을 치고 개인적인 욕심으로 균형을 깨뜨린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고맙더라.
아무래도 그런 애드립을 잘 받아주는 상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을 것 같다.
누구라도 이 작품에 좋은 걸 해야겠다 싶었을 거다. 그러니 상대방이 충분히 납득할만한 상황을 연출하려 했을 테고. 사실 개인적인 분량이나 캐릭터에 대한 욕심으로 나오는 애드립은 다 알거든. 전체 흐름을 깨니까. 다들 진짜 직장 동료들처럼 궁합이 잘 맞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매번 상을 잘 차려주는데 궁합이 잘 맞아야지. (웃음) 우리가 개런티는 못 받아도 밥상은 잘 받는다면서 항상 즐겁게 촬영했고 그런 분위기에서 어깃장 놓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최근에 홍상수 감독님의 <하하하>에도 노 개런티로 출연했다고 들었는데.
전부 감사패만 받았다. 물론 통영에서 촬영할 때 숙박이나 숙식은 제공해줬지. 그거 말고는 받은 건 없었다. 돈이 너무 없으셔서 안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웃음)
작품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은데.
홍상수 감독님에겐 영화를 만드는 자신만의 완벽한 시스템이 있다. 작품에 대한 신뢰도 신뢰지만 그런 독창적인 시스템을 경험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작품 자체가 <하하하>잖아. 한 여름의 흥겨움 같은 거랄까. 그런 기분으로 한 달을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했다. 물론 슛 들어가니 술도 세게 먹어야 했고 가볍지만은 않았지만.
사실 홍상수 감독님 영화가 겉보기엔 가볍게 찍은 것 같지만 상당히 계산적이고 집요하게 촬영된다고 들었다. 현장에서 아침마다 대본을 주신다. 물론 그게 미루고 미루다가 방송 전날 주는 드라마 쪽대본 같은 건 아니고. 이건 매일 아침마다 정해진 시간에 나오는 거니까 조급하거나 불안하지 않다. 아침마다 쓰시는 건데 매일 하나씩 받을 때마다 너무 놀랍다. 앞뒤의 엮임, 짜임, 구성, 뒤깎기, 이런 것들이 너무 절묘하다. 그래서 지금 대사 하나를 다르게 하고 싶다가도 다음에 이게 어떻게 연결될지 모르고 내가 발견하지 못한 연결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감독님이 써준 대사 하나하나가 굉장히 중요하게 다가오고 그 상황 속 행동들에 신중하게 접근하게 된다. 카펫 짜는 거 보면 그냥 착착착 짜는 거 같지만 정교한 그림이 나오잖아. 그런 느낌이다. 마치 슥슥 찍는 거 같은데 그 안에 짜여짐은 정말 깜짝 놀랄 만큼 정교하지.
예전에 김태우 씨와 유준상 씨를 인터뷰했는데 비슷한 말을 하더라. 아침마다 대본 받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가슴이 두근두근 거릴 정도로 설렌다. 뭐가 나올까, 이러다가 딱 나오면 제일 먼저 받아가지고 정말 푹 빠질 정도로 반해서 그걸 싹 빨아들이고 싶어진다. 그날 그날 재미가 있다.
마치 재미있는 연재소설 다음 편을 기다리는 기분일 거 같다. <날아라 펭귄>도 이야기가 재미있더라. 인권위에서 만든 영화라는 선입견을 가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나는 다른 사람이 봐도 재미있어 할까 걱정되더라. 너무 여러 인물이 나오고 클라이막스가 확실한 것도 아니라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시사 반응이 좋은 거 같다. VIP시사 때는 아무래도 다 영화에 애정을 갖고 오신 분들이 오시니까 호의적일 수 있지만 뒤풀이에서 새벽 2시 반까지 얘기가 끊이지 않는 거다. 집안 얘기는 하지 않던 사람들도 자기 자식 얘기, 부모 얘기, 요즘 교육문제 얘기, 이런 이야기로 자리가 파할 줄 모르더라. 사실 뒤풀이 분위기를 보면 그 영화를 점칠 수 있는데 분위기가 참 좋더라. 그래서 약간 헷갈린다. 이 영화가 이렇게 재미있나, 이 분위기로 보면 되게 재미있는 건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하나 이상씩 공감할만한 지점이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이번에 임 감독님한테 사람들이 왜 이렇게 여자들이 전부 다 드세냐고 했다던데. (웃음) 남자들이 다 안쓰러울 정도로. 그래서 내가 농담으로 “감독님은 지금까지 영화에서 항상 남자 편이었잖아요.” 막 이랬다. (웃음) 옛날에는 남자다움이 한 가지 모습이었다면 요즘 남자들은 돈만 벌어와선 안되고 다양한 걸 요구 받고 그만큼 다양한 대처가 필요하지 않나. 그래서 남자들도 어려움이 많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식 교육이나 이런 측면에 대해서는 대부분 엄마들의 파워가 센 것 같기도 하고.
“요즘 엄마들이 문제야.” 라는 대사를 할 때 재미있었다.
자기가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서 그렇지, 우리는 누구나 인권문제에 있어서 가해자이기도 하고 피해자이기도 하다. 내가 나도 모르게 어떤 사람의 인권을 침해한 적 있고, 내가 침해당하고도 모를 수 있는 거다. 사실 조금만 신경 쓰고 배려하면 서로 존중해줄 수 있는 부분인데 그걸 못하다 보니까 집단적으로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엄마가 악착같이 그려지지만 사실 아이만큼이나 엄마의 삶도 고단하다.
엄마도 자기의 다른 모든 것들을 접고 아이에게 올인하는 거니까. 그래서 부부의 인권도 이야기를 만들어서 넣어야 된다는 말이 있었다. 예를 들어서 남편이 자기랑 방에 들어가서 자자 그러는데 와이프는 계속 애만 잡고 늘어지고, 둘째를 낳자는데 둘째 교육비는 어떻게 감당하냐면서 아내가 남편과 잠자리를 거부한다던가, 이런 부부의 인권문제도 넣어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 그런데 그러자니 얘기가 너무 길어지니까 줄였지.
요즘처럼 육아가 힘든 일이 된 시절도 없는 것 같다. 지금 애를 낳기로 결심한 마당에 두렵진 않나? 정말 어려운 일 같다. 그냥 눈 딱 감고 한번 낳아보는 거지, 그런 생각 다하면 못 낳을 거다. 많은 것들이 변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결혼으로 환경이 좀 변하더라도 서로 잘 맞춰서 배려하면 기존의 자신을 많이 바꾸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 그런데 아이를 낳는다는 건 기존의 나를 엄청나게 바꿔야 되는 일이다.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환경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변화 없인 낳을 수도, 키울 수도 없을 것 같다. 그 변화가 두렵기도 하고, 정말 보통 일이 아닌 거 같아서 무섭다는 생각도 든다.
친구분이나 지인들 가운데 엄마가 된 사람도 많을 텐데.
많지. 친구들, 선배들.
그런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종종 괴리되는 기분을 느낀 적은 없었나?
엄마들끼린 너무나 중요한 문제라서 밤이 새도록 얘기한다. 정보를 주고 받고, 받아 적고, 그리고 또 한참 또 얘기하고, 자기 자식 한탄하다가, 공교육 환경 욕하기도 하고. 난 그런 대화에 끼지 못하고 그냥 옆에서 맥주나 마시거나 안주나 만들어주고 그랬지. 그런데 나 역시도 많이 들어왔던 부분이라 그런 걸 무시할 순 없다.
아직은 실감나지 않는 일이겠지만 자식을 어떻게 기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나마 해본 적은 없나?
자세히는 안 해봤다. 그냥 음악도 좋아하고, 책도 좋아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아니면 너무 경쟁관계에 매달리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정도? 만약 아빠 닮으면 음악 좋아하고 엄마 닮으면 책 좋아하겠지. 우리 둘 다 누군가를 이기거나 1등이 되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까 아이도 그렇게 컸으면 좋겠다. 이 정도만.
막상 아이를 기르다 보면 욕심이 커질 수도 있을 텐데.
막상 닥쳐보면 모르는 거니까. (웃음)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해서 남편인 장준환 감독과 많은 상의를 한 건가?
이 험난한 세상에 아이를 낳는 게 잘하는 짓이냐, 이런 얘기부터 시작해서 몇 명을 낳을 것인지도 생각했다. 유명한 사람의 아이로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부담주진 않을까 싶어서 아이한테 좀 미안하기도 하고. 그리고 그렇게 불리는 것 자체가 이상하기도 하다.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했지.
아이를 낳고 배우로서의 활동에 제한이 생길 수도 있다.
이미 워낙 제한이 많았기 때문에. (웃음) 애 낳기 전에 이미 애 엄마 역할도 많이 했고, 여러 가지를 했기 때문에 하기 나름이지, 뭐.
멜로영화 주인공으로서 기회도 확연히 줄어들지도 모른다.
사실 나한테 로맨스의 주인공이라고 생각되는 정통 멜로도 별로 없었잖아. 그런데 이젠 좀 해보고 싶더라. 예전엔 욕심도 없었다. 그런 작품보단 다른 작품이 좋았고. 그런데 이제는 사랑을 알 거 같기도 하고, 물론 완전히 아는 건 아니겠지만 내가 생각하던 20대 초반의 설레고 앞뒤 모르는 사랑이 사랑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 같다. 이젠 누군가를 너무 사랑해서 가슴 아파하는 그런 표현들을 할 수 있겠다고,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앞으로 1년은 쉬려고 하니까 모르겠네. (웃음) 오히려 나이가 들어서 30대 중반이 되니까 멜로가 생각이 난다.
성숙한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을 꿈꾸나 보다.
사랑에도 깊이가 있겠지. 사랑은 늘 철없는 거고, 늘 이기적인 거라지만 이렇지 않을 수도 있는 다른 사랑?
결혼은 스스로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줬다고 생각하나?
글쎄, 사실 결혼하고도 계속 일을 했고, 내가 살던 환경에서 계속 살게 됐으니까 그렇게 큰 변화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내가 하도 결혼 안 한다 그래서 최대한 변화 없게 했나? (웃음) 물론 이런 생각은 든다. 결혼하고 나서 아직까진 웃는 시간이 더 많았고, 다른 사람들도 내가 더 부드러워진 거 같다고 얘기하는 거 보면 결혼하길 잘됐네 싶어진다. 그리고 노인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노인문제?
시어머니를 모시는데 시어머니 연배가 80세가 넘으셔서 나한테는 할머니나 다름없다. 그런데 노인문제는 정말 개인의 문제가 아닌 거 같더라.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적 문제인데 너무 개인적으로만 해결하고 있는 것 같다. 사회적으로 같이 고민했으면 좋겠더라. 육아나 교육도 그렇듯이 노인문제도 같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아무래도 공공의 영역에서 해결돼야 할 사안들마저 개인들에게 떠맡겨지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가 많은 것 같다.
이런 생각도 해봤는데, 나라에서 시립, 공립유치원 많이 만들잖아. 유치원을 만들 때 법적으로 노인시설도 같이 만들게 하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허가를 안 내주는 거지. 아침에 애들이 유치원에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버스 타고 갔다가 오후에 같이 오는 거다. 프로그램 따로 하더라도 밥은 같이 먹고. 그럼 애들이 뭘 먹는지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볼 수 있고, 애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도 충분히 볼 수도 있을 테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그 영화 뭐였더라.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근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
거기 보면 양로원이랑 유치원이 같이 있는 시설이 나온다. 그걸 보고 ‘내가 생각하던 게 저건데! 저런 게 정말 만화에 나오다니 일본은 저런가?’ 생각했다.
교육학과를 전공했다.
맞다. 그런데 교육학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서. (웃음) 내 손으로 레포트를 써본 적도 별로 없고.
교육학 전공자가 연기를 하게 된 경위가 궁금한데.
다들 의아해한다. ‘사카모토 준지’라고, <KT>라는 영화를 만든 일본 감독을 만난 적 있는데 그 분도 교육학과 출신이라더라. 그 분도 교육학과 출신을 영화계에서 만나기가 어렵다면서 놀라던 게 기억난다. (웃음) 사범대 나온 사람만의 특징이 있는데 처음부터 교사가 되려고 마음먹고 온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제도에 순응을 잘한다. 도덕, 법률, 규범을 어기는 사람도 별로 없고 성향적으로 착하다. 그래서 MT같은 데 가서도 놀아도 밀가루에 찹쌀떡 넣어서 빼먹고, 2인 3각 게임 경기하고, 이러고 논다. 덕분에 문과대나 다른 과 사람들이 보면 우릴 애 취급하면서 되게 비웃고. (웃음) 분위기가 좀 다르긴 하지. 그런데 나는 입학하자마자 연극반이며 국악반이며 하는 게 많았다. 다른 공부들에 관심이 더 많다 보니까 대학생활에서 그런 게 주가 됐고, 교육학이 부가 됐지.
만약 전공대로 직업을 선택했다면 <날아라 펭귄>에 나오는 회식 문화를 경험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을 텐데.
학교 회식도 만만치 않다더라. 거기도 나이별로 쫙 이렇게, (웃음)
<태왕사신기>로 드라마 데뷔를 했는데 당시 연기적 논란이 많았다. 사실 지금까지 작품 활동하면서 그런 경우는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당황스럽지 않았나?
그때는 뭐, 경황이 없었지. 현장 자체도 경황이 없었고. 매일 대본도 바뀌고, 어떻게 흘러갈지도 모르고, 그래도 온에어(on air)는 100% 이뤄져야 하니까 촬영은 해야 됐고, 그렇게 쉼 없이 넘어갔다. 후반에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까지 같이 작업하느라 바빴지. 사실 <태왕사신기>현장은 보통의 드라마 현장이나 영화 현장과도 달리 좀 특별했다. 박상원 선생님 말에 따르자면 제3의 현장이랄까. “네가 지금 드라마를 경험하고 있는 게 아니다.”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 말 듣고 나니까 ‘난 드라마를 해보려고 한 건데 억울하네’ 생각되더라. (웃음)
<내 인생의 황금기>를 통해 다시 한번 브라운관 연기에 도전했다. 끝까지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적응할 때까지 해볼 거다. (웃음) 아직 내가 좋아하는 작품, 나랑 잘 맞는 작품을 못 만났다고 생각해서 그럴 수도 있고. <내 인생의 황금기>때 감독님이 나한테 그러시더라. 남들 드라마 30년 하면서 겪을만한 안 좋을 일들을 어떻게 드라마 두 편에서 다 겪어보냐고. 이럴 정도로 일도 많고, 탈도 많았다. 어쨌든 내가 선택한 거니까 이렇게 겪다 보면 나중에 좋은 날 오겠지. 아마 또 하게 될 거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든 그 작품에 대해서 미리 알 수 있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 사실 정보를 많이 안 주거든. 늘 바뀔 수 있는, 제대로 되지 않은 정보만 주고. 그래서 내가 미리 좋아하는 마음을 듬뿍 담을 수 있는, 마음 붙이려고 뒤늦게 노력하지 않고 시작부터 애정을 듬뿍 갖고 시작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났으면 좋겠다.
드라마 현장에서 얻은 신선한 자극은 없었나.
있었지. 신선한 자극이라기 보단 약이 되는 부분이랄까. 선생님들께서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시면서 도와주시기도 했고, 가르쳐주시기도 했고. 덕분에 선생님들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건 6개월 동안 일주일에 5일씩 어떤 작품에 출근하듯이 레이스 하나를 끝냈다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나한테는 큰 경험이었다.
연기 잘한다는 남자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왔는데, 항상 상대배우의 연기를 눙치듯 연기한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어느 영화 메이킹에서 보니까, ‘모건 프리만’이 그랬던가? 연기의 본질은 리액션이라고. 내 연기는 상대 배우에 따라서 편차가 큰 거 같다. 이건 상대방 탓은 아니고, 내가 상대방을 많이 탄다고 해야 될까? 만약 10번 슛을 들어간다고 하면 그때마다 상대방의 연기가 변하지 않아도 내 리액션은 계속 변할 거다. 감독님들도 나한테 그런 얘기 정말 많이 한다. 내 샷이 아니어도 변할 때가 있다고. 상대방이 어떻게 하든 내 분량을 따먹을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걸 잘 못한다. 맥을 놔버리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그게 내 단점이다.
그만큼 상대의 기운에 따라 어떤 능동성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기대되는 면도 있지 않을까.
그 기운에 굉장히 좌지우지되는 거 같다. 조금 덜 그래도 될 거 같은데, 그걸 조절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아직 거기까진 기술이 없나 보다. 앞으로 더 좋아지겠지.
사실 남들보단 당사자니까 민감하게 느껴지는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연기파 배우라고 인정받지 않나. (웃음)
누가 그러더라. 연기파 배우 그게 얼마나 웃긴 말이냐고. 요리파 주방장? 이런 말과 똑같다고. (웃음) 주방장은 당연히 요리를 해야 되는 거고, 배우는 당연히 연기를 해야 되는 거잖아. 연기파 배우란 말이 그만큼 웃긴 말이라고 누가 써놓은 글을 보면서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라고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그만큼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10년 정도 매년마다 한 작품 이상씩은 작품 활동을 해왔는데 아무래도 애를 낳고 나면 지금보단 자중하게 될 공산이 크겠다.
쉬면서 한번 앞으로의 10년도 한번 생각해봐야지. 대학졸업하고 스물여섯에 시작해서 한 10년 했으니까 서른 여섯부터는 다시 좀 생각을 해봐야겠다. 이걸 계속 할건지 말 건지도 생각해보고, (웃음) 계속하면 어떻게 할건지 고민해보고.
지난 시절을 자주 돌이켜보나?
많이 돌이켜보진 않는데 그런다 해도 정말 좋은 기회가 많았으니까 아쉬움이 남거나 그렇진 않을 거 같다. 별다른 욕심은 없다. 많은 작품을 하지 못하더라도 좋은 작품을 만나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좋은 작품 한편 하면 그 작품을 준비하고, 촬영하고, 후반 작업하고, 홍보하고, 개봉하는 몇 달 동안 계속 그 작품의 영향을 받는다. 작품 자체나 그 작품을 함께 한 사람들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나중에 또 어디서 상영이 돼서 누군가 그 영화를 보면 피드백도 많이 오게 된다. 아무리 큰 상을 받아도 순간이다. 즐거운 것도 순간이다. 그런데 좋은 작품을 만나면 그 작품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오랜 시간 동안 나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그게 진짜 소중한 거 같다.
연기자로서 살아오는 과정 속에서 뒤늦게 얻은 깨달음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에 대한 변화를 느낄 때가 있나?
옛날엔 이렇게 생각했다. 프리(프로덕션) 때 준비하고, 슛 가면 연기하고, 홍보 끝나면 쉬어야 된다고. 그런데 그게 아닌 거 같다. 난 촬영할 때가 제일 즐겁고 행복하니까 그때 제대로 노는 거고, 촬영하지 않을 때 일해야 되는 거 같더라. 준비하는 일. 좋은 작품을 만나기까지 준비를 게을리 하면 안되겠단 생각이 이제서야 좀 든다. 그 전에는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나 모르겠다. 무조건 쉬어야 되고, 심지어 제발 날 그냥 방치해줬으면 하는 생각까지 했다. 하긴 작품을 하면서 나를 너무 괴롭혔으니까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촬영할 때가 진짜 재미있게 노는 순간이란 걸 알았고, 더 재미있게 놀 순 없겠더라. 그러니까 이젠 그 사이에 열심히 준비하고, 준비가 됐을 때 좋은 작품을 만났으면 좋겠다.
이제 당분간은 아이 생각만 해야 할 텐데, 아이는 딸이 좋겠나, 아들이 좋겠나? (웃음)
나는 아무나 괜찮은데 시어머니께서 아들을 바라시니까 삼신 할머니께서 참조해주셨으면 좋겠다. (웃음)
편모 아래 자란 딸은 어려서부터 제 어미 속을 썩이는데 이골이 났다. 남다른 글솜씨로 작가를 지망하는 애자(최강희)는 공부도 잘하지만 땡땡이도 잘 치는, 고무공처럼 튀는 아이다. 비만 오면 학교는 나 몰라라 부산 앞바다로 뛰쳐나간다. 출석일수가 모자라 졸업을 할 수 없다는 선생님의 경고에 엄마(김영애) 속만 까맣게 탄다. 애자 역시 저보다 제 오빠에게 극진한 정성을 쏟는 어머니가 야속하기만 하다. 공부도 못하는 제 오빠는 유학까지 보내주면서 유학 가고 싶다고 보채는 자신에겐 되레 역성인 엄마가 미덥기만 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성년이 돼서도 애자는 여전히 엄마 속을 태운다. 시집갈 나이가 지났는데도 좀처럼 시집갈 생각은 없고 작가가 되겠다며 허송세월만 보내는 것 같은 딸래미를 보는 엄마는 속이 탄다.
예나 지금이나 애자는 엄마에게 ‘눈엣가시 같은 년’이다. 하지만 눈엣가시 같아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자식’을 나 몰라라 할 순 없다. 평행선과 같은 거리감을 두고 좀처럼 다가서지 못하는 모녀는 특별한 계기와 함께 서로에게 마음을 기울여나간다. 서울에 홀로 사는 애자가 잠결에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다 엄마의 앓는 소리를 듣게 된 후, 득달 같이 엄마가 사는 부산으로 내려가게 될 때, 애자의 마음에 침잠(沈潛)해있던 진심이 동요를 일으킨다.
<애자>는 좀처럼 서로의 본심에 접근하지 못하던 모자의 오랜 갈등 속에 잠재돼있던 애틋한 속내를 드러내고 이로써 심금을 울리는 가족 신파다. 서로에게 모진 말을 던지며 뒤돌아 서다가도 다시 서로를 향해 뒤돌아보게 되는 가족의 진심을 비춘다. 모정을 연출하고 죽음으로 방점을 찍는 <애자>는 분명 강력한 파토스를 전달하고 마는 영화다. 비극적 피날레를 예감하게 만드는 중반부부터 페이소스를 축적해나가다 그 끝에 다다라 어김없이 강력한 신파적 에너지를 분출한다. <애자>는 분명 모정과 죽음을 가로지르며 눈물로서 방점을 찍는 영화다. 켜켜이 쌓아나간 감정의 둑을 무너뜨린 뒤 눈물의 방류를 요구한다.
그렇지만 <애자>는 주체할 수 없는 페이소스를 넘쳐내며 관객을 비극적 심상으로 밀어 넣는 최루성 신파와 거리를 둔 작품이다. 애자의 학창시절을 발랄하게 묘사하는 도입부처럼 <애자>는 심심찮게 캐릭터의 개성을 적극 활용한 가족적 코미디를 연출하며 신파를 가늠하기 어려운 생기를 감지하게 만든다. <애자>는 가족코미디와 멜로드라마를 이어 붙인 영화처럼 전후반부의 양상이 다른 작품이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온도차는 신파적 형태로 귀결되는 <애자>의 전반적인 감정이 절제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 동시에 전후반부의 감정적 대비 속에서 결과적인 감정을 더욱 짙게 물들이는 보색적 효과를 낳는다. 물론 때때로 상황에서 지나치게 엇나가는 코미디가 안일하게 동원되어 감정의 수순을 방해하는 경우가 눈에 띄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애자>가 연출하는 웃음과 눈물의 수위는 안정적인 편이다. 무엇보다도 색채가 다른 두 정서의 융화를 통해 결정을 이루는 클라이맥스가 감정적 자극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상황적 이해를 더한다는 점에서도 탁월하다.
<애자>에서 중요한 건 비극의 주체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그 연민을 깨닫는 이의 변화다. 고통을 맞이하는 자에 대한 동정만큼이나 이를 지켜보는 자가 뒤돌아 흘리는 눈물의 심정이 마음을 울린다. 엄마와 원수처럼 지내던 딸이 엄마의 죽음을 직감하고 그 삶을 좀 더 연장하려 할 때, 모녀는 자신의 마음 속에 묵혀둔 진심을 일거에 방출한다. 무엇보다도 결말부에서 죽음을 묘사하는 형태는 <애자>에서 가장 인상적인 면모다. 죽음을 통해 궁극적인 감정적 고양을 이루는 <애자>는 죽음을 선택하는 방식을 통해 비범한 면모를 드러낸다. 감정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과감한 선택을 이행한다. 누군가의 생을 이어나가기 위해 애쓰는 자는 그 삶이 계속되는 동안 끝을 체감할 수 밖에 없다. <애자>는 죽음에서 모든 감정을 방출하기 보다 그 순간을 이겨내고 그 너머의 삶을 비춘다. 엄마의 빈 자리에서 슬픔을 이겨내고 제 삶을 채워나가는 딸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본다.
누군가의 자식이자 누군가의 부모가 될 모두에게, 좀 더 범위를 좁히자면 누군가의 딸이자 누군가의 엄마가 될 여자들에게, 엄마란 이름은 쉽게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고 마는 것이다. 마음에 없는 말을 던지고, 뒤돌아 후회하는 건 대부분의 부모와 자식 사이를 채우는 관성적인 버릇과 같다. 특히 가족을 위해 헌신하면서도 정작 당신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한국적 모정을 공유하고 있을 이 땅의 대부분은 <애자>와 같이 모성애를 담은 영화의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당할 수 밖에 없다. 엄마는 신파다. <애자>는 그런 현실적 감정을 스크린에 옮겨 담는다.
무엇보다도 두 배우의 어울림은 <애자>를 빛내는 가장 큰 수훈이다. 추와 같은 무게를 얹는 김영애와 풍선처럼 분위기를 띄우곤 하는 최강희는 <애자>에서 적절한 균형을 이룬다. 갈등과 화해로 나아가는 모녀의 감정적 소통은 두 배우의 앙상블을 통해 진심을 확보한다.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이야기를 하는 동시에 감정의 진전 역시 예상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애자>에서 중요한 건 그 뻔한 이야기에 얼마나 진한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캐릭터의 관계변화를 통해 현실성을 얻고 진정성마저 확보하는 <애자>에서 두 배우는 확실하게 제 임무를 수행했다.
방금 홍보사 직원분과 대화하는 걸 듣게 됐는데 예능프로에 출연하셨다는 거 같더군요.
예. <야심만만>. 내가 그런 데도 다 출연하고, 이런 일도 있네요. (웃음) 나이 얘기가 나오길래 나는 몇 년 있으면 연금 나온다 그러니까 다들 넘어가더라고요. (웃음) 사실 저는 쇼크를 줄이기 위해서 계속 스스로 입력시켜요. 곧 60이다, 이렇게.
예능프로에 출연하는 모습은 뵌 적이 없었던 거 같은데요.
처음이에요, 처음. 만약 제가 일기라도 썼다면 일기장에 적어둘 텐데 일기를 안 써서. (웃음)
시사회 무대인사 때 많이 긴장돼 보이시던데요.
너무너무 긴장됐어요. (웃음) 제가 요즘 청바지를 많이 입고 다녀서 굽이 낮은 신발을 많이 신어요. 그런데 오랜만에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걷는데 막 넘어질 거 같더라고요. 그리고 원래 잘 떨어요. 사람 있는 곳에 갈 때 좀 많이 긴장해요. 카메라는 안 무섭지만 사람은 좀 무서워해요. 시사회 무대에 나가는 것도 처음이었고, 그렇게 많은 기자 분들 앞에 서보는 것도 처음이었거든요. 그리고 3년 만에 연기를 하는 거잖아요. 3년 만에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 떨렸는데 그 많은 기자 분들 앞에서 시험치고 시험점수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거 같아서 너무 무섭더라고요. “쟤 연기 왜 저래?” 이런 소리 들을까 봐.
선생님 정도의 오랜 경력이면 그런 자리에 서는 것쯤은 대수로운 문제가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본인에겐 떨리는 순간이었나 보네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나 봐요. 그런데 안 그래요. 아이 낳을 때마다 힘든 건 마찬가지에요. 작품도 똑같아요. 그 인물이 나한테 들어올 때까지, 내게 익숙해질 때까진 굉장히 많이 고통스러워요. 다른 욕심은 없어도 이건 있어요. 내 자존심. 김영애 그러면 “그래, 연기 잘 하지.” 이런 칭찬을 듣고 싶어요. 예를 들어서 <애자>에서도, “그래, 엄마는 김영애니까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 이런 칭찬 듣고 싶은 거죠. 적어도 제가 하는 역할만큼은 제가 최고라는 소릴 듣고 싶어요. 그리고 그걸 제 자신도 인정할 수 있어야 되고 남한테도 인정받고 싶죠. 그게 좀 강해요.
홍기선 감독님께서 그러셨죠. <애자>의 어머니 역할은 처음부터 김영애 씨 몫이었다고요.
그건 아니었어요. (웃음) 찍다 보니까 저한테 정들어서 그렇게 마음이 바뀐 거지 처음엔 아니었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찍으면서 그러더라고요. “야, 엄마 아니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 그런 거죠. 지금 와서 보니까 김영애가 아니고선 생각이 안 된다는 거죠. 모든 사람들에게 바로 그런 말을 듣고 싶어요. “그래, 김영애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 칭찬을 들어야 비로소 만족할 수 있는 건가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족하긴 쉽지 않죠. 어려워요. 저는 모니터 잘 하지 않아요. 모니터 잘 하지 않는 배우로 알려졌거든요. 모니터 하기 싫어요. 제 연기가 만족스럽지 않으니까. 왜 얼굴이 저렇게 밖에 안돼. 저 정도 깊이 밖에 없어. 자꾸 이렇게 되요. <애자>도 1차 편집본 봤을 때 굉장히 실망했어요. 좀 더 폭넓고 깊이 있는 표현이 나올 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까 한심했죠. ‘야, 여태 60여 년을 살아오고서도 너한테 나타나는 게 그것밖에 안되니’ 싶더라고요.
<애자>에서도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많았나 보네요.
그럼요. 만족스러운 부분이 얼마나 되겠어요. 단지 내가 어떻게 했던 지간에 칭찬이 듣고 싶은 거죠. (웃음) 그래도 그게 제 능력이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그 다음은 능력 밖이니까 포기해야죠. 그래서 그렇게 떨리는 거고, 평가 받는다는 게 무서워지는 거에요.
3년 정도 연기를 중단하셨던 공백이 끼치는 영향이 있던가요?
처음에는 집중력이나 순발력이 많이 떨어지고 예전 같지 않아서 굉장히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한달 동안 굉장히 많이 힘들었죠. 눈 혈관도 터지고, 체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원체 힘들었던 시간이기도 했고. 그 감각을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영화적인 시스템이 과거에 왕성하게 활동하시던 때와 많이 달라졌잖아요. 이번 <애자>현장에서도 많은 차이를 느끼셨을 것 같은데요.
요즘 젊은 주연 배우들이 영화를 하고 나면 텔레비전을 많이 기피하죠. 왜 그런지 이해가 갔어요. 일단 영화는 작품이 완전히 나와있는 상태에서 제작되지만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같은 경우는 쪽대본 들고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잖아요. 한국영화가 모든 시스템에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해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한국영화가 하는 영화들마다 손님이 많이 들어서 계속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오랜만에 영화에 출연한 만큼 현장 분위기를 느끼는 것도 오랜만이었을 것 같은데요. 어쩌면 그 새로운 분위기를 통해 신선한 자극을 느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예. 그랬어요. 그래서 행복했고요. 난 우리 감독님을 참 잘 만난 것 같아요. 자칫하면 제가 구닥다리 배우처럼 될 수 있었던 부분을 참 많이 다듬어줬죠. 신인 감독이지만 많은 걸 집어줬어요. 제가 감각을 찾는데 굉장한 도움이 됐죠. 강희처럼 마음이 통할 수 있는 후배를 만나서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던 거 같고요.
최강희 씨처럼 김영애 씨도 젊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이 얼마나 돌이켜지실진 모르겠지만 그런 젊은 배우들을 보면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이켜보는 경우는 없나요?
그런데 환경이 너무 다르니까. 저는 몇 십 년 동안 혼자서 대본보고, 의상 구하고, 현장 가고, 메이크업까지 다 했어요. 그 당시엔 누구나 다 그럴 수 밖에 없었고. 지금은 제작 분위기가 너무 좋아졌잖아요. 나 혼자 옛날 생각이나 한다고 뭐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 세상이 변하면 변하는 대로 세상을 따라가면 되죠. 가끔 과거 얘기하는 분들 많잖아요. 그런데 사실 저는 제 성격 탓이기도 하겠지만 옛날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아요. 지나간 얘기 별로 안 해요. 이젠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으로 내 인생에 어떤 일들이 있을 건가가 궁금하지,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아요. 심지어 전 제 작품을 하나도 소장하고 있지 않아요. 심지어 사진도 별로 정리해놓은 게 없어요. 그런 건 흥미가 생기지 않아요.
1971년에 데뷔한 이후로 지난 38년간,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수많은 족적을 남겨오셨는데요. 특히 7~80년대엔 정말 많은 영화에 출연하셨잖아요. 1년에 4~5편씩 나온 경우도 있고요. 엄청난 다작배우였던 시절이 있습니다.
제가요? 전 기억 잘 못해요. (웃음) 제가 주인공을 무지 많이 하긴 했죠. 그런데 기억나는 건 몇 작품 밖에 없어요. <설국>하고 <겨울로 가는 마차>?
임권택 감독님 작품에도 3편이나 출연하셨죠.
<왕십리>도 했고, 그랬었어요. 그랬네.
고영남 감독님 영화에도 여러 번 출연하셨더군요.
고영남 감독님은 특히 절 예뻐하셨어요. (웃음)
78년도에 개봉된 <절정>으로 영화기자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맞아요. 너무 오래 전 일이지만 그때 영화에서 갈비뼈가 다 드러나게 몸을 있는 대로 웅크렸던 기억이 나네요. 가슴 보이는 게 뭐 그리 부끄럽다고 힘들어했는지 몰라. 사실 제 가슴이 좀 약한 편이거든요. (웃음) 물론 그때는 그런 게 굉장히 큰일이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그 외에 좀 야한 영화도 꽤 했었어요. 베드신 있는 거. 그러다 아이를 낳았고 아이가 크면서 비디오샵이 한참 유행했죠. 아이가 2~3살 때, 걔 손을 잡고 만화영화를 빌리러 다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얘가 커서 엄마가 야하게 나오는 그런 영화를 보면 어떻게 하지?’ 사실 그런 생각 때문에 그때부터 갑자기 영화를 끊은 거에요.
아무래도 어머니 입장에서는 걱정이 될만한 일이겠죠.
지금 생각해보면 별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데 말이에요. 작품에 대한 자신만 있다면 대단한 일은 아니죠. 이건 예술에 속하는 분야고, 엄마 일이라고, 이렇게 설명하면 되는데 그때는 거기까지 생각이 갈 수 없었죠. 하여튼 아이가 이 영화를 보면 안되겠단 생각만 들었어요. (웃음)
세월을 보내고 나니 지난 시절에 느꼈던 어려움이 작게 느껴질 때가 있으시나 봅니다.
지금은 이제 그렇게 대단한 일도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에요. 모르겠어요. 폭풍을 헤치고 나오면 웬만한 작은 파도는 무섭지 않잖아요.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사실 작년 동안 개인적인 신변에 큰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경험들도 힘들었던 당시를 지나 지금에 이르게 되니 다르게 보이는 지점이 있을 것 같은데요.
전 작품을 할 때마다 힘들다고 느끼는 건 매번 똑같아요. 그리고 굳이 연기를 떠나서라도 사람이 살아가며 겪는 어려움이나 힘든 시간들을 헤치고 나오면 그게 다 나를 키우는, 나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주는, 내 폭을 넓혀주는 거름이 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해요. 젊어 고생은 돈으로 사서라도 한다고 하잖아요. 그런 믿음이 있어요. 힘든 결혼을 해서 오랜 시간 힘들게 살았고, 또 한번의 결혼을 했죠. 그리고 최근 2년 동안 두 번의 큰 일을 겪으면서 정말 힘들었어요. 지옥 같았죠. 지옥이 다른 게 아니고 이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힘든 시간을 넘겼지만 그런 것들이 지금 와서 보면 좀 더 나를 겸손하게 하고, 더 너그럽게 만든 게 아닌가 싶어요. 나를 둥글게 만들고, 또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이 더욱 감사하고 행복하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라는.
아까 말씀하신 대로 90년대 이후로는 영화 출연 편수가 현저하게 급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영화는 안 한다고 소문이 났대요. 사실 그건 아니거든요. 단지 제가 너무 바빠서 영화까지 눈을 돌리기엔 시간이 없었을 뿐이에요.
영화제작 환경변화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예전 영화 풍토는 제작 시스템을 비롯해서 모든 것들이 지금하고 많이 달랐죠. 그런데 그런 것들이 제 성격하고도 잘 안 맞았나 봐요. 제가 굉장히 낯을 가려서 사람을 잘 못 사귀거든요. 40년 가까이 이 일을 하면서도 이쪽에서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은 별로 없어요. 5사람도 안 되니까요. 제가 얼마나 폐쇄적인지 아시겠죠? 그래서 만났다가 몇 달 있다 헤어지고, 또 새로운 사람 만나고, 이런 환경에 적응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영화를 멀리 하게 됐고 텔레비전을 바쁘게 하게 되니까 영화까지 넘볼 여유가 없더라고요.
연기적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배우라는 일도 사람과 부딪히는 일이니까요. 그 환경에 익숙하지 않으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그만큼 그걸 극복하는 게 중요했을 것 같고요.
저는 드라마도 하는 사람하고만 많이 해왔어요. 제가 좀 틀에 매이거나 구속당하기 싫어하는 편이기도 하고 굉장히 폐쇄적이라 사람을 사귀기 어렵거든요. 제가 상처를 워낙 많이 받기 때문에 남한테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 아예 사람 만날 생각을 안 해요. 그러니까 카메라 렌즈 안에선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연기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실제 자신의 모습과 차이를 느낀 적이 있나요?
그런데 모든 인물은 김영애에서 출발해요. 다른 배우들도 그렇겠지만 제가 하는 모든 역할엔 제가 들어있어요. 다만 그게 얼마만큼의 부분을 차지하느냐의 문제겠죠. 그래서 배우들마다의 색깔이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고두심 씨가 임백무를 연기했다면 저와 또 다르게 표현됐을 거에요. 김자옥 씨가 했으면 또 달랐을 거고요.
일단 <애자>를 보는 어떤 관객이라도 자식으로써 어머니를 생각하게 될 것 같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른이 된 후에도 엄마 앞에서는 어리광을 부리게 되는 것 같아요. 결국 엄마 앞에서는 다 애인 거죠. (웃음)
누구나 다 누군가의 자식이고 여자라면 누군가의 딸이거나 엄마니까요. 그리고 우리 감독님이 시나리오부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부분들을 예리하게 잘 집어냈어요. 사실 저는 VIP시사회 때 영화를 처음 봤거든요. 그런데 제대로 볼 수가 없었어요. 편집순서를 바꿨다던지, 속으로 ‘어머, 왜 저건 잘려나갔지? 원래 다음 대사는 뭔데’ 이런 생각만 하다 보니 몰입할 수 없었죠. (웃음)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감독님이 누구보다 예뻤어요. 사랑스럽고. (웃음)
최종 편집본은 그때 처음으로 보신 건가 보죠?
예. 그 전엔 편집 방향도 정해지지 않았을 때 1차 편집된 미완성본을 40인치 모니터로 봤죠. 기술 시사는 전날 새벽 2시에 했대요. 그날 오전부터 계속 스케줄이 있었으니까 그건 볼 수도 없었죠.
아무래도 시나리오가 만족스러웠으니까 영화를 선택하신 거겠죠?
시나리오를 받았을 땐 제가 굉장히 힘들었던 시간이었어요. 그때는 그걸 벗어나지 못했었죠. 이혼 사실도 알려지지 않았을 때 선뜻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그저 그 시나리오가 너무 재미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거죠.
어쩌면 어머니로서의 공감대도 작품 선택에 일조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너무나 잘 알 수 있고, 그만큼 쉽지만 내 이야기 같았어요. 제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작품성도 있어야 하지만 재미도 있는 이야기에요. 이 시나리오는 그 두 가지 면에서 모두 저한테 괜찮다고 생각하게 해줬어요. 이걸 제대로 표현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좋은 영화가 나올 거라 판단했죠.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라고 느꼈던 장면이 있습니다. 부산에 내려온 애자와 어머니가 TV를 보고 같이 앉아있다가 티격태격하게 되고 결국 애자가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가버리잖아요. 그때 짐 싸서 방을 나가는 애자에게 어머니가 한마디 하죠. “김치 가져가, 이년아!” (웃음)
그게 우리가 너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잖아요. 저희 어머니도 그러셨고. 그런데 어떻게 남자가 그런 걸 쓸 수 있었나 몰라요.
남자라서 모녀간의 정에 대해 완전히 이해한다 말할 수 없지만 <애자>는 모녀 간의 정서를 잘 표현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일 가깝고 닮아있으면서도 원수 같은 관계죠. (웃음)
아무래도 아들보단 딸이 어머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입장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나이 들면 딸하고 엄마가 더 친해져요. 동질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실 작품 속에서 어머니라는 캐릭터를 연기하시기 이전에 이미 실생활에서 어머니로서 살아가고 계시죠. 그래서 아무래도 어머니로서 느끼는 감정이 캐릭터의 감정으로 이입되는 느낌을 얻은 경우는 없으셨을지 궁금하네요.
저는 연기할 때 그렇지 않아요. 오직 그 상황만 생각하죠. 지금까지도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에요. 제 개인적인 감정을 연기에 담지 않아요. 단지 김영애가 표현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하죠. 물론 촬영하는 기간 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요. 우리 엄마한테 나는 이렇게 했다고, 강희하고 수다를 참 많이 떨었죠. 마음은 그런데 실제론 잘 안 된다고. 강희도 저한테 하는 것처럼만 하면 자기 엄마도 좋아하실 거래요. 하지만 잘 못하잖아요. 강희뿐만 아니라 다 그래요. 그런 얘기는 많이 했죠. 하지만 연기할 때 저는 오직 최영희로 돌아가서 그것만 생각해요. 연기하는 순간엔 그런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갈 여지가 없어요.
영화 외적인 감정은 철저히 배제한 상태에서 연기에 몰입한다는 말씀 같습니다. 그만큼 쉬운 일은 아닐 거란 생각도 드는데요. 아무래도 무의식적으로 투영될 수 있는 감정을 가려낸다는 건 그만큼 냉철한 감각이 요구되는 일일 테니까요.
제가 다른 사람 앞에서 제 실제 이미지보다 훨씬 단단해 보이거나 강해 보이는 건 제가 제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제가 연기를 제쳐두고 비로소 김영애로 돌아가는 건 오직 저 혼자 있을 때니까요. 정말 힘든 시간에 새벽 2~3시쯤 잠도 못 자고 서럽게 울었던 적이 몇 번 있었어요.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혼자 있을 때는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해요. 그때 비로소 나로 돌아온 거죠. 그 외에는 제 속을 잘 안 들어내고 잘 안 들켜요. 그러니까 생각보다 단단해 보이나 봐요. 그리고 제가 좀 이지적인 이미지로 보인다면서요. (웃음) 사실 전 자식을 걱정시키는 철없는 엄마 쪽에 가까워요. 많이 사랑 받길 원하고, 보호받길 원하고, 굉장히 여리고 상처도 잘 받죠. 그런 저를 잘 내놓지도 않고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기 어려운 편이신가 봐요.
예. 그래서 어리광도 잘 안 부리죠.
갑자기 <황진이>에서 연기하셨던 임백무가 생각나네요. 임백무는 겉으로 독하고 강한 이미지의 캐릭터지만 실은 아픈 사연을 홀로 감당해내는 처연한 캐릭터니까요.
상처가 쌓인, 말하자면 딱지가 두껍게 앉은 사람이잖아요. 예술에 대한 고집도 강하죠, 일에 있어서 완벽함을 추구한다는 점은 저와 많이 닮았어요. 사실 저는 그 인물이 참 싫었어요. 연기하면서 정말 지긋지긋하다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우리 아들이 그 여자가 엄마하고 제일 많이 닮았다고 해서 좀 놀랐죠. 저는 제가 완벽해지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한테도 그걸 요구해요. 예를 들자면 우리 아들한테도 그래요. 그렇게 하기를 원해요. 그렇게 여러 가지 면을 가지고 있는 거 같아요. 제가 사람을 많이 사귀지 못하는 것도 제가 상처받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거에요. 그 상처가 굉장히 오래가고 깊게 가니까요.
1971년에 MBC공채 3기 탤런트로 연기자라는 이름을 얻으셨고, 1973년에 <수사반장>으로 데뷔했습니다. 그런데 연기자라는 직업에 흥미를 갖게 된 경위가 궁금하네요.
(웃음)
?
아니, 갑자기 좀 어이없는 생각이 나서요. 저는 공부가 하기 싫어서 상업학교 원서를 냈고 부산여상을 갔어요. 원래 아버지께선 저한테 사범대학에 가서 선생님이 되라고 하셨죠. 학교 다닐 때 성적은 잘 나왔거든요. 국민학교 때부터 줄곧. 저는 한 2~3일 반짝 공부하면 성적은 상위권에 속할 정도로 잘 나오는 편이었거든요. 10등 밖으로 떨어져 본적은 별로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얼마나 당돌하면 부모 몰래 상업학교 원서를 냈겠어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가라고 하셔서 집에서 쫓겨났고 집에 들어갈 수 없어서 한달 간 이모 집에 있었죠. 고등학교 졸업하고 1년 동안 부산 TBC총무부에서 직장생활을 했는데 너무 재미없고 힘들었어요. 그래서 다시 대학교를 가야겠다 싶어서 재수하려고 하다가 배우가 된 거에요. 탤런트를 뽑는다면서 친척언니가 너 예쁘장하게 생겼으니까 배우 한번 해보라고 원서를 사 오셨고 지원하게 됐는데 정말 돼버렸죠. (웃음) 전 그때까지도 그저 월급 주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사연만 들어보면 애자가 생각나는데요.
좀 대책 없었죠. 고집 세고, 멋대로고, 적당히 영리하고. 사실 제가 이마가 넓어서 콤플렉스가 있거든요. 그런데 아버지가 무서워서 항상 단발머리로 이마 싹 올려서 머리에 핀 꽂고 다니고, 그런 부분에서는 어긋나본 적이 없었지만 마음 속은 제 맘대로였죠. 이미 그 때부터 결혼 안하고 애만 낳아서 살면 어떨까 생각도 해보고. (웃음) 전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장래 희망하면, 현모양처. (웃음) 그러면서도 사춘기 때 아버지가 너무 싫어서 야단치면 눈 똑바로 뜨고 앉아서 대들고, 맞아도 도망가지도 않고. 그래서 엄마, 할머니 속을 엄청 썩혔죠. 부모 입장에서 보면 정말 다루기 힘든 아이 있잖아요. 제가 좀 그랬어요.
아버지께서 엄하셨던 만큼 충돌도 잦았겠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꽉 막힌 분이셨어요. 학교 다니기 전까지 저는 소설책만 너무 좋아하고 천자문은 안 읽는다고 종아리를 맞고 다녔었죠. 한글을 떼고 나서부터 동화책을 그렇게 좋아했고요. 옛날엔 집에 책이란 게 없었어요. 제가 51년생인데 50년대에 전쟁 끝나고 무슨 책이 있었겠어요. 문방구에 몇 권 걸려있는 게 다였죠. 그래서 학교 끝나면 맨날 문방구 앞에 가서 조금한 게 턱 치켜들고 그걸 보고 있었어요. 주인 아저씨가 불쌍하게 보셨는지 그냥 올라와서 읽으라고 할 때까지. 그럼 쪼그리고 앉아서 그걸 보는 거에요. 그 정도로 책을 좋아했어요. 아버지께서 항상 우리를 6시 전에 깨우시고 마당에서 보건체조를 시켰어요. 그리고 나서 방에 들어가서 몰래 소설책을 봤죠. 타고 난 것도 있겠지만 어쩌면 저를 배우로 만든 건 제가 20년 동안 읽었던 책이었던 것 같아요. 거의 소설만 읽었어요. 이제 지금에 와서 알게 된 거지만 소설을 많이 읽으면 좀 현실감이 떨어지게 되는 것 같아요. 배우도 월급 주는 직원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웃음)
아버지께서도 부산 출생이셨나요?
예. 저도 스무 살까진 부산에서 살았고요.
부산 남자 분들이 좀 무뚝뚝하잖아요.
무뚝뚝하고 굉장히 권위적이에요.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한번도, “너 이거 한번 먹어라” 소리해보신 적 없어요. 원체 외동아들로 귀하게 자라서 받을 줄만 알았지, 주는 방법을 모르기도 했고. 어쩌면 기질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전 우리 엄마가 불행하게 살다 돌아가셨다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어머니에 대한 뒤늦은 연민이 깊게 자리잡았나 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엄마한테 참 못되게 굴었어요. 나이 들면서 엄마를 많이 걱정하고 제가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면서도 말은 늘 퉁명스럽고. 어쩌다 전화오면, “(격양된 어조로) 나 바빠! 빨리 얘기해!” 이랬으니까. 그래서 우리 엄마가 사근사근한 제 친구들을 굉장히 부러워했어요. 저도 제 친구 엄마들한텐 사근사근했죠. 문제는 우리 엄마한테 못했던 거죠.
그런데 그렇게 엄한 아버지 입장에서는 배우를 한다는 것 역시 용납될 수 없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말도 안 됐죠! 그런데 저희 고모님께서 저를 아버지께 데려가셔서 말씀해주셨어요.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까 한번 맡겨보시라고, 그랬어요.
친척 분들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군요.
그러게요.
그런데 소설을 좋아하셨다면 혹시 작가를 지망한 적은 없었을까 싶은데요.
그렇진 않았지만 학교에서 몇 번 상은 받았어요. 글짓기 같은 데서.
정말 애자랑 닮은 점이 너무 많은데요. (웃음)
다만 저는 애자처럼 술 먹고 다니거나 그런 건 없었죠. 우리 아버지는 학교 끝난 지 1시간 안에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막 학교에 전화하고 그랬어요. 도서관에서 책 봤다 해도 집에서 공부하면 되지 왜 도서관에서 책을 보냐고 뭐라고 하시고. 전 정말 속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어쩌다 남학생이 쫓아오면 네가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녔으면 그렇게 틈을 봐서 쫓아오냐고, 저만 욕먹고 맞고 그러다 보니까 우리 아버지가 너무너무 싫었어요.
예쁜 게 죄죠. (웃음) 여전히 젊은 시절의 미모가 곱게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친척 분이 배우를 권했던 것도 그 미모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옛날에는 연기력 같은 거 논하지 않고 얼굴이 좀 예쁘장하면 배우 하라는 말 많이 했어요. 어려서부터 전 아이들한테 예쁘단 소리 잘 안 해요. 제가 스스로 예쁘다고 하면 낯 두꺼운 얘기가 되겠지만, (웃음) 사실 제가 그런 소릴 정말 많이 듣고 자랐거든요.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그런 소리를 듣고 자라서 그런지 자만심 같은 게 생기는 거 같아요. 그래서 전 아이들한테 그런 얘기 잘 안 해요.
정말 막연하게 배우가 된 셈인데 막상 연기를 시작하게 된 이후에 현장에서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궁금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학교 다닐 때 영화 본 거라곤 순전히 딱 한 편, <푸른 하늘 은하수>(1986)밖에 없었는데 제가 배우를 하겠다니 얼마나 황당해요. 그런데 저는 장녀라서 책임감이 강해요. 공부를 그렇게 하기 싫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어느 정도 상위권 수준으로 점수를 올려놨던 건 아버지가 무서워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한 탓도 있었죠. 그것도 제가 가진 어떤 책임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일단 뭔지도 모르고 월급 주는 일이라 생각해서 배우가 됐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도로 보따리 싸서 부산에 내려가야 한다면 창피한 일이잖아요. 어떻게든 여기서 붙어있어야 되니까 누구보다 열심히 했죠. 엑스트라를 하더라도 말이에요. 사실 배우가 뭔지 알고 내가 정말 이걸 해야겠다 했던 건 연기를 시작한지 5년이 지난 뒤였어요. 그때서야 비로소 배우가 어떤 건지 알기 시작한 거죠.
연기를 시작한 이후로 5년 뒤에서야 연기자로서 자각했다고 하셨죠. 계기가 궁금합니다.
그냥 하다 보니까 이게 제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일이 재미있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운명을 믿어요. 팔자 같은 걸 믿거든요. 사람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져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단지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죠. 일단 돈은 행복의 척도와 무관하다고 생각해요. 하루 세끼 라면만 먹으면서도 ‘그래. 나는 라면이라도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이럴 수 있고, ‘나는 왜 라면 밖에 못 먹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행복의 척도는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타고난 운명을 믿어요. 아마 태어날 때 제 운명이 이렇게 정해져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죠.
배우가 된 과정도 운명적이란 말에 어울리네요. (웃음)
너무 어이없죠? 그래서 사실 제가 이런 얘기 잘 하지 않아요. (웃음) 왜냐면 정말 죽기 살기로 배우가 되려는 사람에겐 모욕이 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시 김영애 씨가 배우로 발탁된 건 김영애 씨의 가능성을 본 사람이 분명 있었기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드는데요.
1970년 10월 달에 입사해서 1971년부터 작품을 했으니까 스무 살에 시험을 봤고 스물 한 살부터 연기를 시작한 거죠. 그때는 로션도 바르지 않을 때였죠. 나중에 들었지만 그때 전 사투리도 썼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뽑힌 건 카메라 페이스가 너무 신선했기 때문이래요.
젊은 시절엔 날카롭고 예민해 보이는 인상이라 캐릭터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측면이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살도 붙었고 늙어서 얼굴이 쳐지거나 주름이 져서 그 날카로움이 좀 깎였지만 예전엔 더 심했죠. 그래서 예전엔 제 얼굴이 참 싫었어요. 연기를 하면서 충분히 얼굴로 감정이 표현됐을 거라 생각하는데 막상 보면 너무 날카롭고 뾰족해서 만들어 놓은 얼굴 같기만 한 거에요. 그런 느낌이 너무 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결국 그 얼굴을 마음에 들어 했던 분들이 김영애 씨를 자신의 작품에 선택했고, 계속적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90년도까지 정말 많은 영화를 찍었던 것일 테고요.
예전에는 보름 만에 만든 영화도 있었어요. <비련의 홍살문>(1979)같은 영화가 그랬죠. 당시엔 스크린 쿼터가 있어서 우수한 국내영화를 하나 만들면 외화를 수입할 수 있게 허가해줬거든요. 그래서 예산도 많이 들이지 않고 보름 만에 찍고 그랬죠. 제가 3박4일을 한숨도 안자고 영화를 찍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많은 밤을 셌던 기간이에요. 저는 굉장히 예민해서 어릴 때부터 방이 바뀌면 잠도 못 잤어요. 낯설면 화장실에 못 가니까 아무 것도 안 먹고 귤 통조림 같은 거나 한두 개 먹고 견뎠죠. 기억나는 게, 한 겨울 산속에서 3박4일간 잠도 안 자고 촬영하다가 밥 먹으러 내려갈 시간이 없어서 밥을 날랐던 때가 있었어요. 구르마 같은 데 앉아서 다 식은 얼음 같은 밥을 먹는데 사람 것인지, 짐승 것인지, 무더기로 쌓인 똥이 아래에 보이는 거에요. 그런데 제가 그걸 보면서도 밥을 먹고 있더라고요. 그냥 ‘저게 여기 있구나’ 그러면서 먹었어요. 저한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죠. 잠을 그렇게 3일 이상 못 자니까 그냥 말갛게 된 느낌? 그나마 그때는 젊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몰라요.
<달려라 울엄마>의 방영이 종료되고 연기를 그만 두겠다 선언하셨던 적이 있었죠. 아무래도 사업적 이유가 일차적이었겠지만 젊었을 때 그렇게 힘들게 매진했기 때문에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아닐까요?
그건 아니에요. 그때 제가 연기를 중단한다고 그랬던 건 두 가지 이유였죠. 첫째는 두 가지 일을 병행할 수 없기 때문이었어요. 두 가지 중 한 가지만 선택해야 했죠. 연기는 저 혼자 그만 두면 돼요. 하지만 그 때 이미 회사직원은 7~80명 정도나 있었던 때였고 김영애 보고 ‘참토원’에 들어온 7~80명의 직원을 제쳐두고 난 이제 힘드니까 그만하겠다 할 수 없었어요. 그때는 그게 너무 힘들고 싫었지만 처음으로 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대한 책임감이나 사명감을 느껴서 그렇게 결정한 것이기도 했고요. 회사가 그렇게 커진 만큼 회사 일에 매달리다 보니까 연기를 제대로 할 수도 없었죠. 제가 제일 싫어하던 짓, 연기를 부업으로 삼는 짓거리를 어느 날부턴가 내가 하고 있더라고요. 게다가 나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스케줄에 피해를 받게 되고, 마음은 콩밭에 놔두고 몸만 와서 대본보고 있고. ‘똥배우’라는 말이 있어요. 우리가 하는 말은 아니고 제작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인데, 어떤 배우를 욕하거나 흉할 때 쓰는 말이죠. 그런데 정말 이러다간 제가 그렇게 불리겠다 싶었죠. ‘쟤 왜 저래’ 소리 들을 거 같더라고요. 또 한 가지는 그때 남편이 제가 배우로 활동하는 걸 너무 싫어했어요. 그래서 연기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어요. 계속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죠.
20대 초반부터 주연급 여배우로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자연스레 어머니 역할을 계속 맡고 계십니다. 어쩌면 그 사이에 스스로가 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 때가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상실감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고요. 그걸 극복해야 하는 시절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많은 걸 포기해야 되는 일이에요. 그냥 주어진 걸 따라갈 수 밖에 없는 일이죠. 그러지 못하면 상처받아요. 그게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나 혼자 우긴다고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결국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리고 기다려야 해요. 그래도 전 운이 좋았던 게 그냥 누구 엄마에 그치지 않고 돋보이는 역할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파도>나, <형제의 강>, <야망의 전설>같이, 누구의 엄마에 그치지 않고 제 목소리를 많이 낸 배우에요. <황진이>도 그렇고, <달려라 울엄마>도 좋았죠. 참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노력도 많이 했고, 한편으로 감사하죠.
지난 38년 동안 배우로 살았습니다. 여전히 배우로서 얻고자 하는 욕심이 남았나요?
한 가지. 어떤 작품에서건 ‘아, 정말 좋은 배우다’, ‘이건 딱 김영애다’, ‘김영애만이 할 수 있다’라는 말을 듣는 것. 단지 그거에요. 어떤 배역을 하고 싶다는 욕심은 없어요.
엄마가 <마더>를 봤다. 같이 보고 온 누나는 기분이 더럽다고 했다. 괜히 봤다고 했다. 궁금한 건 엄마 쪽이었다. 밥을 먹다가 물었다. “엄마는 영화에서 그 엄마가 이해돼?”설거지를 하던 엄마가 고개를 돌리더니 답했다. “그럼 당연하지. 게다가 아들이 좀 모자라잖아. 물론 알고 보니까 아들이 완전히 멍청한 건 아니더라만. 결말이 좀 기분 나쁘게 보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지.”약간 벙졌다. 아, 역시 그렇더란 말이냐. 물론 그렇다고 유치하게 그럼 내가 그러면 엄마도 그럴 거야, 따위의 간지러운 대사는 날리지 않았다. 어쨌든 까놓고 말해서 영화를 보고 뭔가 그럴 싸한 소릴 지껄였지만 정작 내가 어미의 심정을 어찌 알겠냐. 자기 배 아파서 낳은 자식 없는 수컷에게 모성이란 일종의 판타지고 영원히 알 수 없는 안드로메다의 정서다. 부성과 모성은 천지간의 차이를 둔 다른 세계관이란 말이지. 엄마들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더라. 아, 도저히 알 수 없는 세계다. 과연 <마더>를 만든 봉준호는 알고 만든 거냐.물론 <마더>는 봉준호라는 수컷의 한계도 분명 포함된 세계겠지. 어쨌든 엄마의 답변이 놀라웠다. 영화가 놀라운 게 아니라 그런 어미들의 본능이 놀라웠다. 그니까 그만큼 우리 엄마들이 끔찍한 보호 본능을 짊어진 탓에 자기 삶을 뭉개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구나, 싶어서 숭고한 심정까지 들더라. 진짜 그렇게 끔찍할 정도로 헌신적인 세계관을 품고 아무렇지 않게 제 새끼 먹일 밥을 지어가며 살고 있는 거다. 밥을 꾸역꾸역 넣고 있는 와중에 이 밥알에 깃든 모성을 씹어 삼키는 기분이 들었다. 누나도 나중에 제 새끼를 낳으면 <마더>가 이해될까. 문득 궁금해졌다.
경쾌한 멜로디가 선명한 음악과 절묘하게 연동되는 김혜자의 춤사위를 담은 오프닝 시퀀스는 단연 압도적이다. 절망과 안도가 체증처럼 내려앉은 얼굴에선 공유될 수 없을 것 같은 감정의 극단적 너비가 고스란히 발견된다. 휘청거리듯 흐느적거리다 살풀이하듯 리듬을 타며 몸을 들썩이는 팔은 축 져진 듯 늘어지면서도 강약을 맞춘다. 형언할 수 없는 표정과 심정을 유추할 수 없게 중의적인 동작으로 절묘하게 음악과 어울리며 몸을 흔드는 김혜자의 모습은 당혹스럽지만 고요하다. 마치 작은 파문이 일어나기 전의 잔잔한 수면처럼 쨍하고 깨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함이 위태롭게 감정을 동요시킨다. 강렬하면서도 모호한 오프닝 시퀀스는 정서적인 진동을 도모함으로써 뒤따를 이야기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고 긴장과 평온의 중의적 상태 가운데서 몰입을 도모한다.
살인마로 몰린 아들의 결백을 주장하는 어머니를 비추는 이야기. 누구라도 분명 모정이 끓어 넘치는 신파를 예감하기 좋은 문장이다. 하지만 애초에 <플란다스의 개>의 지하실 신에서조차 괴담을 통해 교묘하게 서스펜스를 발생시켰던 봉준호 감독의 작품을 경험한 이라면 절절한 신파로 무장한 작품을 기대할 리 만무하다. 모두가 살인마라고 낙인을 찍은 아들 도준(원빈)에 대해 어머니 혜자(김혜자)는 말한다. “우리 애가 그런 애가 아니거든요.”어미에게 모성은 숙명이다. 이성적 믿음을 판별하는 의식을 거치기 이전에 직관적인 보호본능이 둘러쳐진다. 어미의 본능이란 이성을 통해 가늠하기 어려운 본능의 영역이다. 동물적으로 유전된 습성이다. 숭고한 사명이기 이전에 무거운 십자가다. 그리고 <마더>는 살인사건의 진실과 진범을 추적하는 스릴러이기 전에 어미의 심정을 따라잡는 심리극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부여잡고 울기 보단 타이르고, 진범을 뒤쫓거나, 집요하게 캐묻는다. 아들의 결백을 향해 전진해나간다. 누구도 결코 믿을 수 없다는 신념으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모든 수순을 동원한다. 조금 모자라지만 순박한 아들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머니의 모습엔 헌신적인 페이소스보다 광기에 가까운 컴플렉스가 서려있다. 모성이란 본능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마더>는 서사적으로 나아가나 서정적이며 심리적 밑바닥까지 헤집는 표정으로 감정의 옆모습까지 그려낸다. 암전된 공간과 배경에서 밀려난 여백은 때때로 서스펜스의 은신처가 되며 배우들은 수집된 감정의 개체 수를 가늠할 수 없게 너른 표정을 드러낸다. 특히 김혜자는 <마더>가 김혜자의 얼굴에서 시작됐다는 봉준호 감독의 고백을 온전히 증명한다. 순수한 광기는 맹신으로 나아가 착란에 도달하고 이내 잔인한 절망의 수순으로 돌입한다. 그 모든 과정의 합리가 김혜자의 얼굴을 통해 이뤄진다. 김혜자의 얼굴은 <마더>를 위해 마련된 최적의 자질이자 유일무이한 시작이고 끝이다.
수없이 흩어진 별개의 지점처럼 인식되는 스토리가 결국 단계적인 복선으로서 재차 의미를 발생시키며 하나의 맥락을 구성하고 이어나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물론 발화점의 온도를 붙이기까지의 시간이 길게 요구된다는 느낌을 얻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온도가 상승한 이후로 이야기는 급격하게 가속을 시작하고 이내 극한까지 내달린다. 전혀 무관할 것 같은 개별적인 지점의 사건들을 하나의 맥락에 놓인 복선으로 꿰어가는 이야기 구조가 탁월하다. 동시에 <마더>는 사실 후더닛(whodunit) 구조의 스릴러에 가까운 형태로 직조된 이야기지만 실질적으론 ‘누구’보단 ‘무엇’에 의문의 무게가 실리는 영화다. 어머니는 진범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따라 걷지만 관객은 끊임없이 아들이 무엇을 보았는가를 주목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어떤 예상과 동떨어진 모자의 전사가 드러나기도 하고,-박카스- 그 관계에 대한 불순한 관점이 동원될만한 중의적 언어가 동원되기도 한다.-잔다- 궁극적으로 (스토리텔러의) 비범한 결단에 가까운 결말의 태도를 확정 짓게 만드는 계기 역시 그 목격에서 비롯된다. 지독한 어미의 본능이 궁극적으로 어떤 자기 파괴의 행위로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그 과정을 이끄는 믿음의 기반이 어떤 진실에 맞닿았고 이를 통해 어머니가 무엇을 결심했는가를 지켜보게 된다는 의미와 같다. 그 결심은 객석에 충격을 전하지만 관객이 비명 지르기 보단 숨을 멎게 만든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작품 가운데서 이례적인 풍경을 선사하는 영화다. 로케이션 비중을 극대화시킨 <마더>의 광활한 풍경은 풍요롭기에 더욱 예민하다. 때때로 혜자의 걸음을 수평선의 구도로 원경으로 찍어낸 광경은 애환적이며 인물을 측면에 밀어 넣은 채 온전히 배경을 삼킨 카메라의 구도는 거대한 배경을 통해 인물의 심리적 소외를 전달한다. 그럼에도 이에 곧잘 상반되게 인물의 얼굴을 스크린에 가득 메워 넣곤 하는 클로즈업은 인물의 역동적인 표정을 포착함으로써 보다 깊고 너른 감정의 영역으로 관객을 밀어 넣는다. 특히 인물과의 거리감을 극단적으로 오가는 구도적 변화는 개별적인 영역에서 좀 더 세심한 관찰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관객의 극적인 몰입을 가중시킨다. 처음으로 2.35:1 와이드 비율의 화면 비를 선사하는 아나모픽 렌즈를 사용했다는 <마더>는 그만큼 풍요롭고 섬세한 풍경을 포착함으로써 그 안에 자리한 인물의 예민한 심리를 더욱 모나게 드러낸다. 특히 대비적인 움직임으로 시작과 끝을 알리는 도입부와 결말부는 <마더>의 입구와 출구로서 잊을 수 없는 이미지를 선사한다. 무엇보다도 음악의 기능성도 간과할 수 없다. <마더>에서 음악은 단순히 감정을 보좌하는 수식어가 아니라 영화의 감정을 온전히 이어주는 접속사와 같다. 오프닝 신을 비롯해 음악과 시퀀스가 함께 어우러지는 광경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마더>에서 음악은 단순히 감정을 보좌하는 수식어가 아니라 영화의 감정을 온전히 이어주는 접속사와 같다.
<마더>는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에 대한 기시감을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답습이라 지적될만한 결과라기 보단 참신한 복기에 가깝다. 직접적으로 가깝게 느껴지는 작품은 <살인의 추억>이다. “살인사건이 얼마만이냐.”라는 대사처럼 한적한 도회지의 형사들은 <살인의 추억>만큼이나 뻔뻔하진 않아도 여전히 직감에 의존해 사건을 마무리 짓는데 급급하며 졸속적인 수사방식으로 무능을 전시한다. 동네 바보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강압적 회유는 되풀이되고 용의자의 바지를 벗기는 지하실은 우스꽝스럽게 등장한다. 범인의 현장검증은 여전히 난장판이다. 그 모든 상황의 총합은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키지만 본질적으로 이는 반대말의 의미로 해석될만한 상황이다. <살인의 추억>의 경찰이 암묵적 합의를 통해 무능을 가리려는 시도를 보인다면 <마더>의 경찰들은 무지의 소산으로 밀어붙인 불확실성의 한계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무능력을 또 한차례 노출한다. 결국 그 반대말의 끝은 <살인의 추억> 못지 않게 무게가 엇비슷한 정서적 허탈감으로 도달한다는 점에서 동일해진다.
<마더>가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구체적인 정황을 지니고 있다면 인물이 공간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심리적 중압감은 간접적으로 <괴물>에 맞닿아있다. 현서를 찾아 괴물의 본거지를 찾아가는 가족과 진범을 찾기 위해 의심스러운 단서의 현장을 몰래 탐색하는 어머니는 각자 자신의 혈육을 구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가족이 어머니 개인으로 축소됐다는 점에서 입체적인 동선이 단선적으로 뚜렷해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공간을 잠입한 어머니의 은폐가 어떤 목격으로 이어지는 상황은 괴물의 본거지인 하수구에 끌려온 현서가 괴물을 피해 하수구 구멍에 은둔하며 괴물을 관찰하는 상황과 비슷한 긴장감을 이룬다. 또한 어두운 음영을 통해 도진이 바라본 것을 관객으로부터 차단시킴으로써 궁극적 단서의 은폐를 확보함으로써 의문의 지속을 유지하고 사각지대의 음산한 서스펜스를 확보한다는 점에서도 출몰의 위협을 물리적으로 구사하던 <괴물>의 기시감을 느끼게 만든다.
사실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은 하나같이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란 점에서 동일하다. 잃어버린 애완견을 찾고,(<플란다스의 개>) 살인마를 수사하고,(<살인의 추억>) 딸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괴물>) 진범을 추적한다.(<마더>) 하지만 끝내 찾지 못한 애완견과 보지 못한 살인마, 그리고 구할 수 없었던 딸을 맞이했던 것과 달리 <마더>는 유일하게 자신이 쫓는 상대를 목격하게 된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그 동네에서 혈혈단신으로 진범을 찾아 나서는 어머니의 본능적 결의는 결국 결실을 이룬다. 어미의 본능만이 유일하게 제 목적을 이룬다. 뒤늦게 자신이 짊어진 어미라는 십자가가 자신을 골고타 언덕으로 이끌어 채찍질하고 못박히게 만들었음을 뒤늦게 체감한다 해도 만신창이가 된 제 심정을 억누르고 제 새끼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이 본디 그 어미의 본능에 걸맞은 숙명이라는 것을 육체적 행위로 증명한다. 동시에 사건의 주변부에 놓인 이미지를 통해 시대와 정치적 풍자를 거두던 야심도 <마더>에선 최대한 배제됐다. 무능한 경찰의 이미지는 <살인의 추억>처럼 시대적 열악함과 정치적 불공정을 겨냥하는 수단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다만 위트의 수단이 되고 사건의 전개를 위한 하나의 조건이 될 뿐이다. 지난 세 편의 전작이 동맥과 정맥 주변부의 모세혈관의 흐름까지 적극적으로 반영한다면 <마더>는 오로지 정맥과 동맥의 흐름을 그린 이야기다. 정맥의 판막을 거쳐 멈춰서면서도 서서히 전진하던 이야기가 비로소 심장을 거쳐 동맥으로 뻗어나가듯 가속적이다.
창문은 <마더>에서 종종 관객과 인물의 거리감을 형성하는 중계 창처럼 활용된다. 관객은 그 창을 통해 영화적 상황으로부터 때때로 분리되어 그 상황의 목격자로서 자리잡아야 한다. 창 너머엔 함께 식사하는 모자의 모습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사건을 비추는 저편의 진실이 걸어나가는 풍경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두 광경은 모두가 진실이다. 백숙을 찢어 아들에게 먹이려는 어머니의 모습도, 창을 따라 걷는 살인자의 얼굴도 거짓이 아니다. 관객은 두 번의 식사광경을 양 끝에 두고 그 가운데 살인의 목격자가 된다. 양 끝의 이미지는 동일하다. 구도까지 일치한다. 하지만 그 풍경은 대비적이다. 더 이상 온전히 같은 풍경으로서 인식되지 않는 생소한 광경이 된다. 하지만 정작 그 창 너머의 모자는 같은 방식으로 삶을 연장해나간다. 모든 것을 감당한 어머니는 구태의연하게 아들을 위해 어미로서의 본능으로 제 부서진 삶을 가다듬고 일상을 반복한다. 아들을 위해 흐르는 오줌을 지우는 것도, 피를 닦아내는 것도 그 어미의 몫이다.
여기서 모성애는 숭고하다거나 찬사를 얻을 영광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평생을 짊어져야 할 어미의 업(業)처럼 피로하고 고통스러운 형(刑)과도 같다. 어미는 결국 괴물이 되어 제 자식을 구하고, 평생 살인의 추억을 한처럼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한다. ‘새끼 잃은 어미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가 십 리 밖까지 진동을 한다.’하지만 정작 어미는 제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냄새를 맡지 못한다. 그저 제 새끼의 체취를 따라 걸어갈 뿐이다. 그리고 감히 그 삶이 어떠하다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건 우리가 모두 다 제 어미의 삶을 밟고 살아온 그 새끼들이기 때문이다. <마더>는 모성애라는 숭고함을 벗겨낸 어미들의 상처와 같은 삶에 바치는 지독하게 순수한 헌사다. 무엇보다도 국민엄마라는 박제 같은 타이틀로 치장된 이미지를 부수고 김혜자가 가늠할 수 없는 표정을 지닌 대단한 배우라는 것을 환기시킨다는 것만으로도 <마더>는 이미 훌륭한 성과로 시작된 작품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