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가 되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그것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처럼 따져 묻지 않는다. 그건 마치 누군가의 아들이나 딸이 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실 대항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이 공명정대하고 명확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따져 물어야 한다. 하지만 역시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피곤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바로잡겠다고 나설 때엔 그만한 각오가 필요한 법이다. 어쨌든 아나키스트, 즉 무정부주의자란 말은 있어도 무정부인, 비국가인이란 말은 없지 않은가.
<남쪽으로 튀어>는 오쿠다 히데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둔 작품이다. 그리고 원작처럼 어느 아나키스트 아버지와 그의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소설과 달리 아들의 1인칭 시점 대신 객석의 시점과 동일한 3인칭 시점으로 영화를 목격하게끔 만든다. 국민 같은 거 하지 않겠다며 주민등록증은 찢어버린지 오래이고, 당연히 세금도 내지 않는 최해갑(김윤석)은 <남쪽으로 튀어>의 핵심이다. 그는 이 영화가 존재하도록 이끄는 필요조건 같은 존재다. 무정부주의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연출하는 그는 한량과도 같지만 불의 앞에선 불처럼 뜨겁다. 그럼에도 최해갑 못지 않은 운동권 경력을 자랑하는 그의 아내 안봉희(오연수)는 그의 이상을 응원하는 강력한 아군이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이런 면모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하지만 미워하진 않는다.
<남쪽으로 튀어>는 일종의 계몽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 같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우화다. 최해갑의 삶은 객석을 찾은 관객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생경한 태도에 가까울 게다. 이는 단순히 캐릭터가 지닌 고차원적인 이상만이 아니라 현실적인 태도로서 드러나는 삶의 방식이 그렇다. 누구나 불만을 가질 수 있지만 결코 실행할 수 없는 행위들을 최해갑은 한다. 불합리한 시스템의 오류를 순응하며 편하게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달아난다. 엄밀히 말하자면 최해갑이 선택하는 삶의 방식이란 자립에 가깝다. 투쟁이나 싸움이라기 보단 체제로부터의 독립이자 현대적인 사회제도로부터의 자립을 의미한다.
<남쪽으로 튀어>는 사실 그러한 삶이 행복하다고 설득할 수 있다면 보다 나은 영화다. 하지만 영화가 그럴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때때로 그러한 삶이 국가관에 길들여진 대부분의 삶보다 나아 보이고 행복하게 다가오는 풍경들이 목격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태도를 제시하고 권유하기 보단 일종의 전시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치열한 현실감보단 현실성을 염두에 두고 그린 이상에 가까워 보인다. <남쪽으로 튀어>가 계몽적인 영화라기 보단 우화에 가깝다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에 밀착하는 대신 현실을 연상시키는 어떤 상황들을 수집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기워 넣는다. 수집된 상황들은 대부분 권력화된 정책과 제도 안에서 발생하는 갖은 불합리들이다. 최해갑은 이에 저항한다. 그 저항은 대부분 통쾌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영화는 웃고 있지만 사실상 씁쓸한 이야기다. 영화는 나름대로 긍정적인 인상을 유지하지만 영화가 전시하는 비극의 강도는 사실상 현실의 파괴력을 따라잡지 못한다. 쉽게 말하자면 <남쪽으로 튀어>는 현실보단 이상으로 기운 영화다.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캐릭터의 결기를 지켜보는 재미는 유쾌하지만 사실상 영화가 제시하는 청사진이란 그리 희망적인 인상이 아니다. 현실에서 얻어지는 무력감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감상 또한 영화와 완벽하게 밀착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쪽으로 튀어>는 대한민국 국민 엄밀히 말하자면 서민들의 불만과 분노의 뿌리를 살피는 진단으로서 유효하다. 좀처럼 명확한 출처를 규정하기 어려워서 막연하게 분노를 삭히고 현실에 수긍하듯 살아가는 당신에게 어떤 근거들을 제시한다. 선동하기 보단 자각하게 만든다. 물론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자각해온 이들에겐 빤한 난장처럼 보일 가능성도 농후하지만.
확실히 캐릭터를 보는 재미가 쏠쏠한 영화다. 범상치 않은 존재감을 지닌 아나키스트 최해갑을 연기하는 김윤석의 캐릭터 소화력과 담담하고도 결연하게 최해갑을 내조하는 안봉희를 소화해내는 오연수의 의외성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역 배우들의 기똥찬 연기는 물론. 이처럼 저마다 살아있는 캐릭터들은 영화가 다루는 날선 소재와 논조를 유쾌하게 중화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영어 유치원의 원장으로 일하는 연희(김윤진)는 부유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딸로 인해 걱정을 멈추기 어렵다. 딸이 희귀한 혈액을 지닌 탓에 좀처럼 이식이 가능한 심장을 찾기가 쉽지 않기에 그녀의 걱정은 나날이 커져만 간다. 어느 날, 딸이 입원한 병원에 뇌사 상태에 가까운 중년의 여성이 실려 오고, 그녀의 혈액형이 딸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된 연희는 심장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한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 휘도(박해일)의 등장과 함께 기대는 불안으로 뒤바뀐다. 어머니에 대한 반발심에 사로잡힌 채 양아치 같은 삶을 살던 휘도(박해일)는 뒤늦게 어머니의 진심을 알게 되고 그녀를 살리고자 모든 방법을 동원하려 한다. 그리고 연희는 이를 막고 딸을 살리기 위해 모종의 결심을 하기에 다다른다.
<심장이 뛴다>는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듯 좇고 달아나는 연희와 휘도의 관계를 통해 스릴러 장르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영화로부터 서스펜스가 발견되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 이는 당연하다. <심장이 뛴다>는 모정이라는, 고전적으로 신파로서의 감정을 끌어올리는데 유용한 소재를 취하며 이야기의 근본을 이룬 작품이다. 그만큼 장르적인 쾌감보다는 드라마틱한 감정선이 보다 와 닿는 영화인 셈이다. <심장이 뛴다>의 특이점은 그 지점에서 나온다. 각자 딸과 어머니를 살리고자 고군분투하는 어머니와 아들의 갈등은 결코 중첩될 필요 없었던 두 삶이 우연한 계기로 만나 필연적인 관계로 거듭난다는 과정을 다이나믹한 추격전과 심리전의 양상으로 그려나간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심장이 뛴다>는 이런 특이점을 단점으로 몰고 가는 영화다. <마더>와 같은 심정으로 <세븐 데이즈>를 수행하는 엄마를 본다는 건 분명 절박한 감정으로 발전해야 할 터인데 <심장이 뛴다>에서는 좀처럼 그런 어머니의 행위나 감정이 모성이라는 진심으로 와 닿지 못한다. 일찍이 <마더>에서 보여준 것처럼, 본능에 가까운 어미의 본능이란 결코 이성적인 범주 안에서 해석될 수 없는 것임에 틀림 없다. <심장이 뛴다> 역시 모성을 광기에 가깝게 묘사해낸다. 문제는 모성의 절박함을 드러내는 어미의 모성이 지독하다기 보단 지나치게 보인다는 것이다.
단지 타인의 심장을 훔쳐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면모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과정을 묘사해내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면모라는 것이 때때로 상대를 이기고자 하는 승부욕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동시에 아들의 감정 변화도 이해될 뿐, 깊게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어머니의 진심을 깨닫게 된 양아치가 뒤늦게나마 어머니를 위한 무언가를 하려 든다는 상황 자체는 온당하다. 문제는 그가 취하는 방법론이 딸의 심장을 구하려는 엄마만큼이나 비상식적이며 딱히 설득력 있는 과정 안에서 연출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인물의 심리 상태에 대한 납득은 더디고 상황에 대한 설득력도 무디며 영화가 의도하는 모든 결과적 감상도 얕아진다. 모성과 효도를 정신병처럼 착각한 듯한 비정상적인 추격전을 지켜보는 기분이란 불쾌함과 멀지 않은 것이다.
아이의 심장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엄마와 죽어가는 어머니의 뒤늦은 진심을 확인한 망나니 아들이 술래잡기라도 하듯 좇고 달아난다. <심장이 뛴다>는 모성을 광기에 가깝게 묘사해내며 그 광기에서 비롯된 극단적인 상황의 진전을 통해 극적인 파고를 얻어내고자 하는 스릴러다. 마치 <마더>와 같은 심정으로 <세븐 데이즈>를 수행하는 엄마를 보는 기분이랄까. 문제는 그것으로부터 지독한 모성도, 뜨거운 긴장감도 얻어낼 수 없다는 것. 모성과 효도를 정신병으로 착각한 비정상적인 추격전을 지켜보고 있자니 되레 성질이 뻗친다.
이쑤시개 꼬나 물고 바바리 코트 휘날리며 쌍권총 손에 들고 폭풍 킬샷 날리던 주윤발의 <영웅본색>은 홍콩 느와르의 전설이다. 하얀 비둘기 날리며 홍콩 느와르의 간지를 창출해낸 오우삼의 <영웅본색>은 홍콩이라는 지정학적 입지를 특유의 장르적 분위기로 승화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시대를 선도하는 작품이었다기 보단 그 시대적 공기와 함께 호흡함으로써 얻어진 훈장과 같은 장르나 다름없다.
1986년작인 <영웅본색>은 오늘에 이르러 분명 낡은 추억과 같은 유물이나 그것이 자신의 시대 안에서 이룬 성취는 분명 간과할 수 없는 매력임에 틀림없다. 오우삼의 <영웅본색>을 리메이크한 송해성의 <무적자> 속에 담긴 <영웅본색>의 흔적이란 그래서 조금 낯설다. <영웅본색>의 캐릭터 구도를 이어받은 새로운 얼굴들, 그리고 그들이 펼쳐 보이는 유사 이미지의 액션은 <영웅본색>에 빚진 것임에도 그 뉘앙스와는 조금 동떨어진 것들처럼 보인다.
<영웅본색>이 그러했듯이 <무적자> 또한 범죄 조직의 비정함에 맞서는 수컷들의 의리를 앞세워 카타르시스를 자극하는 액션 느와르를 표방한 작품이다. 팽배한 물질주의와 대륙으로의 반환을 앞둔 공황적 심리가 어지럽게 뒤엉킨 홍콩의 입지를 사내들의 느와르적 정서로 연동한 <영웅본색>은 시대에 깃든 아이러니한 정서를 낭만적인 기운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자신만의 멋을 입힌다. <무적자>는 탈북자라는 신분과 부산이라는 지정학을 통해 <영웅본색>의 국산화를 시도하고 보기 좋은 젊은 배우들의 캐스팅을 통해 혈기를 보충한다.
<무적자>는 스토리텔링의 흐름 안에 있어서 눈에 띄는 결점이 발견되는 영화가 아니다. 인과관계는 적절하며 관계 설정의 변주와 갈등의 양상에서도 큰 흠이 드러나지 않는다. 부산을 근거지로 연출한 느와르적 풍광도 근사하다. 다만 그 내러티브의 흐름을 흔드는 울림이 약하다. 강한 의리와 애틋한 형제애로 묶인 원작의 인물들이 펼쳐내던 감정들을 고스란히 끌어안은 <무적자>의 인물들은 감정의 이입을 이끌어내기 보단 그 감정적 상태를 거듭 설명하고 이해시키려는 것만 같다. 다단한 플롯을 통해 복합적인 감정선을 구축했으나 감정의 진전이 더디고 끝에 다다라 닿는 폭발력이 약하다.
기본적으로 배우들의 연기는 기능적으로 나쁘지 않다. 다만 그것이 말 그대로 기능적인 수준에 그치기 때문에 정서적 공감대를 이룰만한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다고 할까. 젊은 배우들의 갈등과 이해로 도모되는 <무적자>의 감정선은 강렬한 혈기가 존재하나 이를 녹록하게 묵혀줄 관록이 눈에 띄지 않는다. 표독스러운 눈빛과 멋스러운 자태가 공존하지만 그것들을 진짜로 승화시킬 내공이 부재한다. 나름대로 대단한 물량공세를 자랑하는 피날레의 액션신은 나름의 볼거리를 이루지만 그 상황 위를 날고 뛰는 인물들의 감정선은 객석과의 거리감을 좁히지 못한 채 자신들만의 정서적 연대에 빠져드는 것 같다고 할까. 이미 낡은 것이 된 원작의 영광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무적자>는 딱히 인상적인 작품이 아니다. 원작의 본색은 물론 자신의 본색조차 얻어내지 못한 범작에 불과하다. 존경심을 표하기 이전에 자립심부터 챙기고 볼일이랄까.
이쑤시개를 꼬나 문 주윤발의 쌍권총을 추억하든, 비둘기 날리며 홍콩 느와르의 간지를 창출해낸 오우삼을 추억하든, <무적자>안에서 변주된 <영웅본색>의 흔적이란 조금 낯선 것이다. 송해성 감독은 원작의 결점이 드라마적 정서에 놓여있다고 진단했으며 내러티브를 보완하며 이런 결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처럼 보인다. <무적자>는 적절한 인과관계로 이뤄진 스토리텔링의 영화로서 부족함이 없다. 동시에 관계 설정의 변주나 부산의 풍광을 배경으로 둔 느와르적 연출도 인정할만하다. 다만 울림이 약하다. 형제애와 의리를 내세운 원작의 인물들이 품은 정서들을 고스란히 끌어 안은 채 이를 거듭 설득시키고자 노력한다. 의도는 관철됐으나 성공적이라 말하긴 어렵다. 다단한 플롯을 지니고 있지만 진전이 더디고 끝에 가 닿는 폭발력이 약하다. 개인차가 있지만 배우들의 연기는 나쁘지 않다. 다만 그들이 입은 혈기왕성한 간지를 보필해줄 관록의 빈자리가 뚜렷하다고 할까. 박하게 평가될 영화는 아니지만 딱히 인상적이라 말하기 어려운 범작이랄까. 그 와중에도 국내에서 보기 드문 기관총질은 조금 흥미로운 정도.
전직 형사였던 강태식(설경구)은 좋은 말로 하자면 ‘범죄연구소’, 속된 말로 하자면 ‘흥신소’나 다름없는 사무실을 운영하는, 일명 해결사다. 모텔의 불륜 현장을 급습해서 사진을 찍고 증거를 제공함으로써 대가를 얻는 그의 일상적인 활약(?)을 펼쳐 보이려던 어느 날, 그는 예상치 못한 국면을 맞이하고 그것이 스스로에게 엄청난 덫이 될 것임을 직감한다. 그리고 곧 그것이 자신의 과거와 깊게 연루된 일임을, 동시에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이런 덫을 풀어놓고 자신을 조종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그 음모의 핵심을 찾아 나선다.
일단 류승완이 기획하고 정두홍이 무술감독을 맡았다는 점만으로도 <해결사>는 분명 호쾌한 액션을 기대하게 만드는 영화임에 틀림없지만 일단 그런 기대감을 품은 어떤 이가 있다면 그 방향을, 혹은 그 기대감의 정도를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해결사>는 ‘액션’영화로서의 오락적 기능성만큼이나 액션‘영화’로서의 이야기적 완결성에도 공을 들인 작품이다. 음모에 휘말려 누명을 쓴 전직형사의 고군분투를 그린 <해결사>는 시종일관 복잡하게 꼬인 음모론의 플롯 안에서 위기를 벗어나고자 애쓰는 인물의 활약상을 전시하는 영화다. 하지만 <해결사>는 단순히 그 활약상을 묘사하기 위해 이야기를 최소의 수단으로 삼으려 들지 않는 영화다.
개인에게 얽힌 음모의 실체가 실상 이 사회 전반에 걸친 부패와 폐악의 범위로 확장되는 것임을 알게 될 때, 인물이 얻게 될 충격은 곧 관객에게 전이돼야 할 문제의식으로 발전될만한 것이다. 실제로 <해결사>는 현실정치를 직시하고 풍자하려는 의도가 역력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복잡하게 꼬인 음모론의 플롯이 명쾌하게 해결되는 클라이맥스로 점철될 때 그리고 그것이 정치적 풍자의 의미를 더할 때, 쾌감은 분명 배가될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해결사>는 풍자라는 작품의 의미적 성취와 함께 말 그대로 이야기로서의 완결성 안에서도 분명한 파급력을 얻어낼 수 있는 구조적 특성을 지닌 영화이기도 한 셈이다.
하지만 이는 <해결사>라는 결과물 안에서 딱히 이로운 선택처럼 보이지 않는다. 장르적 재미를 넘어 정치적 풍자까지 끌어안고자 한 내러티브의 야심은 되레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성취하지 못한 채 되레 산만한 인상을 남긴다. 엄밀히 말하자면 <해결사>에서 가장 기대하고자 한 스트레이트한 활극 액션은 지나치게 의미에 매달린 영화의 야심에 매몰된 것처럼 보이며 궁극적으로 그 야심 또한 그 의미에 근접해내기 보단 극의 흐름에 있어서 발목을 잡는 낭비적인 욕심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해결사>는 클라이맥스의 쾌감이 부재한다. 음모를 뒤집어 쓴 인물이 끝내 이루는 건 단순한 폭력적 응징에 불과하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설경구라는 주연 배우 탓일지 몰라도) <공공의 적>을 연상시키는 엔딩이기도 한데 두 영화의 결말이 클라이맥스라는 용어 안에서 대조군을 이루는 건 말 그대로 중심인물의 능력과 한계에 대한 태도 덕분일 것이다. <공공의 적>이 강철중이라는 인물의 활약을 거칠지만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해시키는 반면 <해결사>에서 강태식의 활약이란 고작 처음부터 끝까지 타인의 룰렛 안에서 돌고 돌다가 운 좋게 타인의 도움에 구제받는 식이다. 음모에 빠진 인물의 감정이 명확하게 해결되지 못할 때 영화의 클라이맥스도 부재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이 영화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라는 방점을 고민하지 못한 채 어떤 이야기적 구성에 지나치게 공을 들인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을 자아낸다.
주연배우들이 주도하는 액션신은 배우들의 육체적 노고가 느껴질 뿐, 탁월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이는 사실 <해결사>에서 가장 아쉬운 측면이 될 것이다. 적어도 액션을 통해 어떤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는 건 <해결사>가 해결하지 못한 가장 큰 결점이 될 것이다. 최근 <아저씨>와 같이 특별한 성과라 추켜세워도 좋을 만한 액션신을 연출하는 영화들 사이에서 <해결사>의 액션은 어떤 스타일도 어필하지 못한다. 특히 후반부의 카체이싱은 대단히 공허하다. 몇몇 조연배우들은 대사나 행위를 통해 간헐적인 웃음을 제공하지만 이는 영화의 공백을 메울만한 거리가 아니다. 이야기는 버겁고, 액션은 무디며, 디테일은 부족하다. 무엇보다도 대체 <해결사>라는 제목을 단 이 영화에서 해결사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것은 가장 큰 의문이랄까.
고명한 피리를 불며 요괴를 잠재우던 표은대덕은 다른 세 신선의 실수로 요괴에게 피리를 빼앗긴 뒤,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세상으로 사라진다. 세 신선은 세상에 뛰쳐나온 요괴들을 잡기 위해 사라진 표은대덕과 피리의 행방을 좇고, 이를 위해 도사 화담(김윤석)에게 도움을 청한다. 신선들과 함께 요괴를 좇던 화담은 그 과정에서 전우치(강동원)와 맞닥뜨리게 된다. 설화적인 프롤로그를 밑그림으로 판타지의 자질을 채색해나가는 <전우치>는 이를 통해 토속적 비현실성을 현대적 시대상 안으로 이입해 나간다. 실존인물이라 전해지기도 하는 고전소설 ‘전우치전’의 신묘한 주인공 전우치를 발체해 현대적 배경에 이입한 <전우치>는 전통적인 영웅 캐릭터의 뼈대에 현대적 서사라는 살을 붙이며 ‘한국형 히어로무비’의 유형을 제시한다.
욕망이란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서로를 밟고 올라서려는 캐릭터들의 아귀다툼을 그려낸 최동훈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전우치> 역시 저마다의 욕망으로 맞부딪히는 인물들의 격돌을 그린다. 하지만 최동훈의 지난 두 전작이 복마전이었다면 <전우치>는 각축전이다. 두 전작이 저마다의 욕망을 향해 내달리던 캐릭터들의 힘겨루기였다면 <전우치>는 욕망을 안은 캐릭터의 롤러코스터다.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의 캐릭터들은 욕망의 패를 감추고 상대의 패를 읽어내기 위한 수싸움을 벌인다. 그들은 복마전의 말판 위에 놓여있다. 그 말판을 설계한 최동훈 감독은 능수능란하게 주사위를 굴리듯 캐릭터들의 일진일퇴를 연출하며 다채로운 캐릭터의 묘미를 한껏 활용한다. 비중의 크고 작음과 무관하게 캐릭터들의 개성을 드세게 살리고 이를 통해 영화의 스타일마저 단단하게 동여맨다. 두드러지되 모나지 않는 캐릭터 영화를 완성해냈다. <전우치>를 향한 팔 할의 기대감도이를 겨냥한다. 나열된 배우들의 이름을 읽어내려 가는 것만으로도 감상에 대한 군침을 돌게 만드는 <전우치>는 궁극적으로 이를 조율할 최동훈의 캐릭터 조율 실력을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인 물건처럼 보일만한 작품인 셈이다.
강동원이 연기하는 전우치는 매력적이다. 시대적 배경의 변화에도 곧잘 넉살 좋게 어울리는 전우치는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캐릭터처럼 과장된 제스처와 표정으로 비현실적 이미지를 축적하면서도 현실적 괴리감을 능숙하게 돌파해나간다. 단순히 그 캐릭터의 표현적 존재감만으로도 장르적 가능성이 구축되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문제는 그 주변부다. 중심에 박힌 캐릭터의 모양새는 명확하지만 그 주변부에 놓인 캐릭터들은 구심점이 흐리고 쓸모를 명확하게 얻지 못한 채 방치되거나 전시된다. 유해진의 초랭이는 적당한 수준의 위트를 자아내고 사연의 전환점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쓸모를 지닌다. 전우치를 상대하는 화담을 연기하는 김윤석의 표현력은 적절하나 선악의 기질적 변화를 설득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일방적이라 캐릭터 자체에 대한 흥미가 반감된다. 동시에 임수정이 맡은 서인경은 지나치게 장치적이며 세 신선은 <전우치>에서 제 구실 자체가 무력한 낭비에 가깝다. 특별출연으로 이름을 올린 백윤식과 염정아만큼의 설득력도 없다. 제 역할을 설득하지 못하는 캐릭터들은 그저 자리만 지킨다. <전우치>에선 최동훈의 장기라 할만한 캐릭터영화로서의 리듬이시종일관 엇박자로 삐걱거린다. 그저 캐릭터를 볼모로 서사적 노선을 거침없이 돌파해나갈 뿐이다.
현대도시를 배경으로 둔 무협판타지라는 점에서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연상시키는 <전우치>는 전자보다 적극적으로 토속적 설화를 차용한다는 점에서 보다 한국적인 판타지 장르로서의 토대를 마련했다 할만한 작품이다. 십이지신상을 모티브로 구상된 듯한 요괴들의 디자인이나 설화를 바탕으로 직조된 스토리는 판타지라는 외래장르와 보다 어울리는 장르적 접목을 시도했다 할만한 지점이며 어느 정도 성과를 인정받을 만한 구석이 발견된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감을 구사하는 액션신을 따라잡기엔 숨이 차게 느껴지는 앵글의 잔상이 시야를 가리며 감상적인 묘미를 반감시키지만 전반적인 액션신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앵글은 공간감에 있어서 탁월한 시야와 반경을 제공한다. 심중한 여운을 남기고, 유연한 위트를 담아낸 대사들의 순발력도 빼어나다.
다만 그 요소들이 잘 어울리지 못하고 저마다 독립적인 빼어남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보인다는 게다. 마치 저마다의 음을 지닌 음표들이 악보로서 오선지에 배열된 채 화음을 이루지 못하고 제 음을 고집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기분 사이로 끼어드는 일말의 아쉬움을 떨쳐내긴 어렵다. 너무 많은 것을 쥐고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많은 것들을 흔들어 섞지 못해서 문제인 셈이랄까. 음표만 나열한다고 악보가 나올 리 없는 것처럼.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는 욕망이라는 게임판을 달리는 캐릭터들의 암투를 그린다. 최동훈의 장기는 상대의 패를 읽고 훔치는 다양한 캐릭터들을 다루는 능수능란함에 있었다.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면서도 전체적인 극의 분위기를 단단하게 여미는 캐릭터들의 조화는 최동훈의 장기를 여실히 증명했다. 그런 면에서 <전우치>는 핵심적인 기대감을 배반하는 작품이다. 강동원이 연기하는 전우치는 꽤나 쓸만하다. 그 존재감과 표현력만으로도 하나의 장르적 가능성을 보게 되는 기분마저 든다. 다만 주변부의 캐릭터를 다루는 손맛이 무뎌졌다. 구심점이 흐린 인물들이 쓸모를 명확히 얻지 못한 채 방치되거나 전시되고 그만큼 숫적인 산만함만 어지럽게 감지된다. 최동훈의 장기라 할만한 캐릭터영화로서의 장점을 만끽할 수 없다는 점에선 분명 아쉽다.
하지만 <전우치>는 최동훈이란 이름에 얽힌 기대감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르적 토대의 구축이란 점에서 성과가 발견되는 작품이다. 현대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무협판타지라는 점에서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연상시키는 <전우치>는 토속적 설화를 적극 활용하며 캐릭터를 완성하고 스토리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한국적이란 의미를 강하게 어필해낸다. 십이지신상을 모티브로 둔 요괴들의 디자인이나 설화를 바탕으로 직조된 스토리는 판타지라는 외래장르의 국산화란 이름에서 보다 어울리는 형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품는다. 지나친 속도감을 두르고 묘사되는 액션신이 시각적인 묘미를 반감시키지만 공간감을 구축하는 앵글의 포착력은 탁월하다 평할만하다. 심중한 여운을 남기고, 유연한 위트를 담은 대사들의 순발력도 빼어나다. 문제는 그 요소들이 잘 어울리지 못한 채 저마다 독립적으로 장기자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제자리를 찾지 못한 음표들이 악보로서 연주되지 못하고 제 음만 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기분 사이로 끼어드는 아쉬움을 떨쳐내기 어렵다.
공민왕의 비사와 연관된 이 모든 설정은 연상에 의거하되 직접적으로 대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실재를 가리지 않되 허구로서의 자질을 설득하기 좋은 태도다. <바람의 화원>나 <미인도>가 그랬듯, <쌍화점>역시 암암리에 입에서 입으로 유통되던 비사(秘史)를 허구적 양식에 입각해 가공한 뒤 스크린에 유통한다. 실체가 불분명한 비사만큼 흥미로운 소재도 없다. 가공도 자유롭고 관음적 욕망이 소비를 유발한다. 누군가의 일기장을 열어보고 싶은 심리와 비슷하다. 그 일기의 주인이 많은 관심을 유발할수록 구매욕은 상승하기 마련이다. 권력의 중심에서 수많은 비밀을 잉태했을 왕실의 비사는 이야깃거리로 적절하다. 치명적일수록 매력적이다.
고려 말, 왕의 호위무사 ‘건룡위’가 있었다. <쌍화점>은 그 집단에 대한 설명에서 출발한다. 원나라의 내정간섭은 고려의 왕실의 정통성에 관여할 정도로 극심했다. 고려왕은 원나라의 요구에 따라 원나라공주를 왕후로 맞아야 했다. 게다가 고려의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원나라에 기대는 외척세력이 많았고 그만큼 왕을 암살하려는 시도도 끊이지 않았다. 왕은 자신을 보위할 건룡위를 조직한다. 건룡위는 왕의 취향을 반영한 어린 미소년들로 이뤄져 집단적으로 육성된다. 건룡위의 수장 홍림(조인성)과 왕(주진모)은 단순한 신하와 군주의 관계가 아니다. 단지 호위무사로서 왕의 보위를 책임지는 정도가 아니라 10년 넘게 왕의 잠자리까지 함께 한 반려자에 가깝다. 어려서 원나라에서 고려로 온 왕후(송지효)는 그들의 관계를 지켜보는 외부인처럼 껄끄럽다. 그 삼각관계는 실상 고려에 알력을 행세하는 원나라의 외세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시대적 정치와 개인적 욕망이 얽혀 이뤄진 삼각관계는 인물들의 행위와 심리를 퍼즐처럼 엮으며 복잡한 함수관계로 뻗어나간다. 구도로만 이해하자면 홍림과 왕의 관계는 애정의 합의처럼 시작된다. 그러나 사실 이는 권위에 의한 일방적 소유에 가깝다. 홍림은 유년시절부터 스스로를 왕의 남자로 인식하고 왕을 위한 헌신적 충정이 모든 행위의 기반이라 믿는다. 오해가 형성되는 건 이 지점이다. 홍림의 본심은 공적인 업무를 거듭하기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왕은 홍림에게 사적인 진심, 즉 그의 말을 빌리자면 연모한다. 사적인 감정과 공적인 업무에 대한 오해가 형성된다. 홍림이 연모의 대상에 눈뜨게 되는 계기는 감정의 변화도, 변절도 아니다. 자신에게 본래 주어진 수컷의 기질에 눈뜨게 되는 것에 불과하다. 마치 사료만 먹던 개가 고기 맛을 알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비단 홍림의 사정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린 나이에 고려로 건너와 왕후가 됐건만 왕은 왕후를 여성으로 품은 적이 없다. 생식적인 강압에 의한 홍림과 왕후의 동침이 궁극적으로 에로스의 양상으로 발전하는 과정의 설득력은 그로부터 발생한다. 사랑을 얻지 못한 자들이 미숙한 방식으로 사랑을 도모한다. 그 사이에서 권위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소유하던 왕은 고립된다. 홍림과 왕후 역시 각자의 위치에서 갈등을 빚는다. 삼각관계의 위기는 여기서 비롯된다.
삼각관계를 조절하는 권한은 왕에게 있었고 홍림과 왕후는 그 권한을 충분히 인지한 채 명령에 따른다. 이는 일종의 게임과 같다. 왕의 조종에 따라 홍림과 왕후는 캐릭터처럼 움직인다. 그러나 게임 도중에 캐릭터는 자각한다. 스테이지를 구성하던 왕의 권한이 무시되기 시작한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본성을 자각한 인물의 심리가 흔들리다 못해 거침없이 출렁이기 시작한다. 인물들의 반목은 은밀하면서도 섬세하게 이뤄지다 점차 적극적인 행위로 진전된다. 관계의 변화를 짐작한 인물들은 의도와 다른 말을 주고 받으며 오해의 골을 깊게 파내려 간다. 끝내 갈등이 형성되다 애정은 증오로 발전되고 파국이 형성된다. 결국 자신의 본심을 가리지 못한 인물들의 욕망이 거친 구조의 위기 상황을 점진적으로 이루고 부순다. 파격적이라 할만한 정사씬들도 인물의 감정적 파고를 설득력 있게 전시한다. 연기적 테크닉이 부족함을 드러내면서도 홍림의 캐릭터는 유약한 듯하면서도 강직한 조인성의 표정에 어울린다. 특히 섬세한 듯 히스테릭한 왕의 이중적인 심리를 연기하는 주진모는 적절한 위엄을 드러내고 송지효 역시 육체적 발로에 의해 서서히 변모하는 왕후의 심리적 추이를 설득력 있게 연기한다. 분명 흥미로운 이야기다. 배우들의 연기도, 캐릭터도 적절하다.
정치적 파국으로 빚어진 인물관계의 변화 속에서 사유화된 갈등 양상이 도출된다. 그 지점에서 이야기의 너비가 축소된다. 왕의 권한 아래 안정적으로 결착된 삼각 관계가 흔들리는 건 고려왕실의 후사문제를 빌미로 한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에 대한 위기 때문이다. 퍼즐구조로 뒤엉키는 인물 간의 심리 변화는 결국 그 정치적 발화에서 비롯된다. 그 거대한 알력이 개개인의 심리전 양상으로 전이되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 배경이 됐던 정치적 위기는 쉽게 무마된다. 실상 시대상과 맞물려 공민왕을 연상시키는 왕의 정치 노선에 얽힌 갈등이 구체적으로 묘사될 것까진 없지만 시대적 배경을 통한 정치적 사유의 가능성이 인물 관계의 갈등으로 사유화되는 과정에서 이야기의 규모가 협소해지는 양상이다. 극 전체를 주무르던 거대한 정치적 야심이 증발한 가운데 치정극이 거칠게 거듭 반복된다. 사연의 너비가 좁아진 것에 비해 재생시간은 지나치게 길다. 형태가 다를 뿐 비슷한 양상의 갈등이 자가분열하듯 절정에 이르지 못하는 위기를 반복적으로 되풀이한다.
인물의 갈등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지만 나아가기 보단 제자리를 도는 양상이다. 정해진 결말에 할애되는 러닝타임이 길다. 구조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야기가 결말을 거듭 반복하는 인상이다. 2시간 20여분을 넘기는 러닝타임이 길게 느껴지는 건 이야기의 결함 때문이 아니다. 형태만 변화된 인물간의 갈등 구조가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 지나치게 반복적으로 거듭되는 까닭이다. 위기와 절정이 수 차례 반복되는 이야기를 통한 감상이 권태를 유발한다. 모든 과정엔 명백한 사연이 있으나 지나치게 연속적이다. 기승전결이 확실한 이야기임에도 결말을 망설이는 이야기는 끝내 허무한 마침표를 피로하게 남기고 사라진다. 천산대렵도에 대한 사족마저도 그저 허무를 더할 따름이다. 초반의 공격적 기세가 긴 러닝타임 속에서 오버페이스처럼 무너지는 형세다.
시어머니는 말한다. ‘남편 군대 보내놓고 노래가 나오나?’ 친아버지도 말한다. ‘한 번 시집갔으면 죽어도 그 집 귀신이다.’ 순이(수애)는 그저 묵묵히 듣는다. 남녀의 관계질서가 군대의 위계질서만큼이나 일방적이던 시대상이 순이를 둘러싼 언어들만으로도 뼈저리게 감지된다. 사랑하지 않는 남녀가 부부라는 이름으로 맺어지는 것이 대수롭지 않던 시절, 순이는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를 즐겨 부르곤 한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 순이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절절한 가사는 순이의 현실과 지극히 동떨어진 낭만이라 기이하다. 베트남으로 향하는 순이의 ‘남편 찾아 삼만리’ <님은 먼곳에>는 순이가 즐겨 부르는 ‘님은 먼 곳에’가 대변하는 그녀의 본심을 찾아가는 로드무비다. 결말부에 다다르는 순간까지 궁극적 야심을 엄폐한 채 서사를 전진시키는 <님은 먼곳에>는 남아선호사상과 가부장제가 사회와 가정의 기저를 완벽하게 억누르던 대한민국 사회로부터 멀리 떨어진 베트남에서 남근 지배적 체제의 졸렬함을 착실하게 구현함으로써 그것의 정곡을 찌른다.
밴드가 꾸려지고 공연이 펼쳐진다는 공통분모덕분에 <님은 먼곳에>는 일찌감치 <라디오 스타>와 <즐거운 인생>의 계보를 잇는 이준익 감독의 음악3부작이란 꼬리표를 달았다. 물론 굳이 그 수식어를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다. 원래 이준익 감독의 영화에서 유희는 행위로써 작동하는 궁극적인 주제의식이나 다를 바가 없으며 <님은 먼곳에>에서도 그 기능성은 중시된다. 하지만 동시에 그 유희적 행위, 즉 연주와 무대의 기능성이 내포하는 방향성을 염두에 둔다면 <님은 먼곳에>는 마땅히 전자들과 다른 지점에 서 있는 작품으로 구분돼야 온당하다. <님은 먼곳에>의 무대는 <라디오 스타>나 <즐거운 인생>이 꿈꾸는 것과 상반된 지점에 놓여있다. 다만 동전의 양면처럼 동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라디오 스타>와 <즐거운 인생>에서 무대가 이루는 정서적 효과란 비루한 현실로부터 남성들을 차단함으로써 그들을 위무하는 속성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으로 현실에 선을 긋는 것일 뿐, 현실은 고스란히 그네들의 삶에 다시 적용된다. <님은 먼곳에>의 무대 역시 남성들을 위한 것이다. 남성성으로 무장된, 혹은 남성성이 강제된 군인 신분의 남자들 앞에서 홍일점의 밴드가 무대에 오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 무대가 남성들을 위한 여성성의 소비에 주력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무대는 지난한 현실에 갇힌 남성들을 도피시키는 환각제로서 기능하기보단 그들을 둘러싼 현실을 환기시키는 각성제로서 작동한다. 도처에 깔린 죽음의 부호들에 짓눌리거나 혹은 때로 그것에 무감각해진 남성들에게 그 무대는 일시적으로 위안을 주지만 동시에 자신들이 얼마나 참혹한 현실로 끌려왔는가라는 대명제를 각성시키는 계기로서 이뤄지는 것이다.
그 무대는 그 자리에 존재하는 남성들 스스로가 채워 넣을 수 없는 유희의 결핍성을 충족시키는 외부자들의 자리다. <라디오 스타>와 <즐거운 인생> 혹은 <왕의 남자>와 <황산벌>에서 발견되는 유희의 작용방향이 그것을 작동하는 주체를 위한 위무적 기능으로서 되돌아오는 것이었다면 <님은 먼곳에>에서 그 기능성은 외부를 향한 것이며 그 주체는 오로지 무대의 홍일점인 순이로부터 발산되는 것이다. <님은 먼곳에>에서 이뤄지는 무대의 유희는 남성들에게 철저히 결핍된 것이며 그들이 이룰 수 없는 궁극의 판타지다. <님은 먼곳에>에서 베트남에 상주하는 한국남성들은 무대의 주체가 될 자격을 상실한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로할 수 있는 여지가 없음을 잘 안다. 그들이 베트남에 도착하는 순간, 그들에겐 스스로를 치유할 수 없는 속죄양이 발생한다. 폭력을 안고 개입한 외부자의 참전행위는 결과적으로 그 대열에 들어선 (한국)남성들에게 죄의식을 부여한다. 스스로를 척박하게 밀어 넣는 환경에 대항하는 유희는 그 땅에서 결코 이뤄질 수 없다. 그들의 목적은 베트콩 대장의 말처럼 ‘돈을 버는 것이기’ 때문이다. 환전의 가치와 양심을 교환한 남성들의 졸렬한 역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남성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죄의식의 수렁에 내몬 셈이다.
결국 남성들이 상실한 유희의 영토를 수복하는 건 여성, 즉 써니로 이름을 바꾸고 무대에 오른 순이다. 이준익 감독의 전작들에서 비루한 남성의 뒷바라지를 하거나 암묵적으로 그들을 보살피던 모성적 배후는 <님은 먼곳에>에 이르러 자신들을 보호할 유희적 마지노선마저 상실한 남성들을 구원하는 여신으로서 유희마저 구현한다. <님은 먼곳에>는 결국 남성이 어떻게 여성으로부터 구원받아왔는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이준익 감독의) 신파적 지침이다. 베트남에 고립되어 스스로에게 도피처가 될 유희적 행위조차 박탈당한 남성들을 위문하는 순이는 매번 써니로써 무대에 올라 여신으로서 강림하고 그들에게 위안을 안긴다. 하지만 그 유희를 발생시키는 홍일점의 기능성은 때로 그 세계의 폭력성을 온몸으로 체감하는 시선으로서 작동하기도 한다. 눈 앞에서 사살당하는 베트콩 소녀 테러리스트를 바라보면서, 위문공연 중인 부대를 습격한 폭격 현장의 목격을 통해서, 그리고 자신들을 생포한 베트콩들이 미군으로부터 사살당하는 상황을 바라보며 순이는 베트남전의 폭력적 상황을 지켜보는 유일한 (대한민국) 여성의 시선으로써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 과정에서 순이는 위문공연을 통해 한국군의 죄의식을 덜어내고, 정만(정진영)을 비롯한 밴드의 일행을 노래로서 죽음의 수렁으로부터 건져낸다.
살육의 전장에 끌려오거나 스스로 걸어 들어간 남성들은 스스로를 폭력으로부터 방어할 유희적 자격을 상실한 채 끝없는 소모적 일상 속에서 죄의식에 노출될 뿐이다. 순이는 왜 베트남에 갔을까, 라는 질문의 답은 그 지점에 있다. 유일하게 베트남에 한국여성으로서 존재하는 순이는 단순히 그 전쟁을 관찰하는 시점으로써 뿐만 아니라 그 전쟁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그 자리를 지킨다. 순이가 상길을 만나러 가는 여정은 순이를 변모시키고 그녀를 남성의 반려자로 간택된 여성에서 탈피시킨다. 동시에 그녀를 이용해 돈벌이에 나서려던 정만은 그 여정 속에서 목표를 상실하고 점차 자신의 비루한 욕망이 순이의 순수한 갈망과 대비됨을 깨달아가기 시작한다. 유희를 수단으로 삼아 재물을 탐하는 남성의 졸렬한 욕망은 유희를 통해 남성들의 죄의식을 한 꺼풀 벗겨내는 여성의 순수한 진심에 감화되어간다. 비루한 남성들은 자신들의 욕망에 심취되어 스스로의 환경을 파괴하고 권리로부터 이탈하지만 결국 스스로 삭막해진 삶의 테두리를 여성의 풍만한 자비로부터 발견하고 자신의 내적 상처를 감내한다.
궁극적으로 <님은 먼곳에>의 엔딩은 그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이자 도발적인 훈계에 가깝다. 그 돼먹지 않은 상황을 잉태한 남성의 같잖은 체제적 무력감을 여성의 작은 손길로 후려치고 그럼으로써 모든 것을 용서하고 구원한다. 순이의 손바닥은 과거로부터 계승된 남성권위에 종속 당한 채 무력하게 이끌린 비루한 남성성에 대한 질타이자 그 시대에 맞서지 못한 연민을 공유한 동병상련의 반려자를 향한 배려의 손길이다. 치열하게 베트콩과 대치한 군인들의 전장에서 순이는 무릎 꿇은 상길을 내려다보며 구세대의 가치관에 함께 맞서 연대적 미래를 구축하자는 무언의 격려로 그를 감싸안고 있다. 결국 유희가 거세된 남성들의 비루한 욕망의 터전에서 여성은 그들이 스스로 내친 유희를 복원하고 종래엔 구원하고 포용한다. 좀처럼 감정의 형태를 쉽게 드러내지 않아 되려 감정의 깊이를 구현하는 수애의 모호한 표정은 남성들의 적나라한 욕망의 터전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골고타 언덕의 예수처럼 성스러운 포용적 깊이를 드러낸다. 결국 모든 것을 착취함으로써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던 오만한 남성의 욕망은 여인의 작은 손바닥 앞에 무릎을 꿇는다. 남성 우위의 세계관에 사로잡혀 자신의 앙상한 욕망을 합리화시키는데 급급했던 남성들은 결국 깊이조차 짐작할 수 없는 유순하지만 강건한 여인의 자비심 앞에 스스로 용서를 빌고 구원을 얻는다. 그건 마치 자궁처럼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처럼 청명하여 고요하고 아름답다. <님은 먼곳에>는 한 여인의 풍요로운 자비심을 통해 전쟁터에 놓인 비루한 남성성의 군상을 대비시킨다. 이준익 감독의 새로운 전환점도 여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