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보자> 단상

cinemania 2014. 9. 29. 22:34

<제보자>는 상당히 괜찮은 영화였다. 힘 있는 이야기의 흐름도 좋고, 연출의 완급 조절도 탁월했으며 새삼스레 재확인하는 박해일의 연기력과 주변 캐릭터들의 호응도 상당히 좋은 영화였다. 국내에서도 두고두고 회자될만한 언론 영화 한 편을 갖게 됐다는 점에서도 성과라면 성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두고두고 아쉬울 만한 기분이 남는 건 결말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결국 방송 보도를 통해 줄기세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정황들을 전달하고 신기루 같은 업적에 갇혀서 의심하지 못했던 사회를 각성시키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데 그 이후로 영화는 어딘가 안이해 보일 정도로 재빠르게 낙관적인 표정으로 도취된 방송국의 분위기 안에 매몰돼버리듯 영화를 끝내버린다. 사실상 황우석 사태의 핵심은 황우석이 스스로 자신의 사기 전과를 고백한 이후에도 그를 추앙하는 이들로 인해 끊임없이 불거지던 줄기세포 신앙에 있었다. 그리고 이런 무조건적인 믿음의 방식은 그 이후로도 한국 사회 곳곳을 잠식하던 크고 작은 사건의 중심부에서 발견되는 기이한 현상이기도 했다. 심지어 최근의 세월호 사태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제보자>는 부정한 사실을 폭로한다는 쾌감에 도취되어 진실을 웅변하지 않고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겹고 괴로운 싸움이 될 수 있는가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 있는 작품이다. 게다가 그 맞은 편에서 선의 탈을 쓰고 사회를 유린하는 악인의 내면이 꼭 악해서 그런 것만은 아닐 수 있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악인이라고 해서 악한 것만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라도 조건만 맞아 떨어지면 선인을 자처하며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구태의연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새삼 환기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딘가 안이한 결말이 되새김질 할수록 아쉽다.

 

<제보자>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 방송사 밖에서 촛불시위를 하는 시민들을 보며 줄기세포의 존재를 추적하던 PD는 말한다. “처음으로 저 사람들이 무서워지려고 하네요. 진실을 말하면 모두 다 내 편이 될 줄 알았는데.” 황우석 사태 이후로 PD수첩은 3년 뒤 다시 벼랑 위로 내몰렸었다. 광우병 사태 당시였다. 진실이 드러난다 해서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는 자의 입은 아직도 외롭고 고단하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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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맞고 사망한 부랑자 시신이 발견된 이튿날, 하원의원 스티븐 콜린스(벤 애플렉)의 여비서가 지하철역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이 덕분에 스티븐과 여비서의 섹스 스캔들이 불거지고 무기회사를 상대로 한 청문회에서 공격적인 질문을 던지던 스티븐의 발언권이 상실될 처지에 놓인다. 하루 차이로 발생한 두 죽음은 그저 동떨어진 두 개의 점처럼 접점이 없는 개별적 사건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를 취재하던 보스톤 글로브의 기자이자 스티븐의 친구인 칼 매카프리(러셀 크로우)는 두 사건을 연결하는 단서를 발견한다. 연결고리가 없는 두 사실을 관통하는 진실이 직감된다.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이하, <플레이>)는 거대한 음모를 추적하는 기자의 이야기다.

 

뛰어난 취재력을 자랑하는 베테랑 기자 칼 매카프리와 혈기왕성한 신예 여기자 델리 프라이(레이첼 맥아담스)는 진실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사건의 취재를 밟아나간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노크가 번번히 무산되거나 박대 당하는 와중에도 진실을 향해 접근해가는 취재과정이 호기롭게 묘사된다. 때때로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까지 연출되며 스릴러적 긴장감을 더한다. <플레이>는 스릴러적 구조를 통해 긴장감을 끌어당기는 동시에 전문직 드라마로서의 지적인 묘미를 더한다. 영화의 중추는 분명 거대한 집단의 이기에 대항하는 개인의 윤리적 저항을 곧잘 이야기하는 토니 길로이의 각본이다. 음모론에 갇힌 진실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고 믿어지는 결말 직전, 영화는 진실의 맹점을 자각하고 왜곡된 진실의 남은 한 꺼풀마저 벗겨내며 논의를 한 차원 더 발전시킨다. 진실을 추구하는 건 정의를 위해서지만 정의에 대한 집념은 때로 진실을 향한 시야를 가린다. 기자는 자신이 작성한 기사를 송고하기 직전까지 진실에 대한 의심의 끈을 놓쳐선 안 된다. 정의라고 믿어지는 부분조차도 의심해야 한다. <플레이>는 거대한 자본의 알력과 권력의 위협에 대항해 사선을 넘어서까지 결백한 진실을 얻어내려는 기자의 직업윤리를 흥미롭게 그려낸다. 찌라시가 득세하고 가십이 넘쳐나는 시대에 완전한 진실을 향해 부지런히 발품을 파는 기자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경종을 울린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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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의 구세주

 

스타에 관한 말들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 말엔 옥석이 없다. 그저 실체가 묘연한 사연 속에 스타가 있을 뿐이다. 스타가 있으니 말이 이어진다. 그저 스타를 위시한 말이 떠돌 뿐이다. 그 사이에서 스타가 살고 있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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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까맣게 울렁거리는 도입부 화면이 너무도 유명한 그 신비로운 시그널과 함께 브라운관을 메우면 마냥 가슴이 설렜다. ‘미드란 유행어도 없던 그 때 그 밤에, 한국어로 더빙된 멀더와 스컬리를 만나는 건 일종의 의식과도 같았다. 매 번마다 아리송하지만 강렬한 충격을 남기고 고이 떠나는 엔딩에 사무쳐 TV가 있는 마루를 떠나지 못했다. 지금처럼 다시 보기도 없던 시절이라 다음날 학교에서 만난 친구와 어제 봤던 그 장면의 전율을 언어로 되새김질하는 게 소일거리였다. 어느덧 그 시절을 지나왔고, 멀더와 스컬리도 <엑스파일>과 함께 세상을 등졌다. 역시나 울렁거리는 화면 속에서 신비롭게 흩날리던 시그널로 안녕을 고했다.

좀더 나이를 먹고 나니, 멀더와 스컬리만큼이나 세상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아졌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물음표로 가득 차 있었다. 수준 이하의 음모 앞에서 무력해져야 하는 현실이 때론 두렵다. 차라리 그것이 UFO나 외계인처럼 도무지 알 수 없는 비현실적인 것들에 대한 물음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는 믿고 싶다’. 그 주문은 누굴 위한 것이었나. 그 화면 너머에서 알게 모르게 이지러지던 진실의 그림자는 누구를 향해 달아나고 있었나. 그 시절, 가늠할 수 없는 화면 너머의 초현실은 차라리 천박한 권력적 음모가 난무하는 현실보다 거룩한 것이었다. 진실의 벽을 넘어가고자 분투하는 멀더와 스컬리와 함께 난 하나의 세월을 넘어왔다. 그곳에 무엇이 있었나. 나는 믿고 있었나. 그들이 보고자 했던 것을. 저 너머에 진실이 있다. 나는 넘고 싶다. 그리고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을 위해, 그리고 나는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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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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