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로
꼽히는 케이트 윈슬렛은 그럼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진화를 거듭하는 배우다. 그녀는 여전히 배우로서의
삶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어줄 작품을 찾고 있다.
“나는 열셋 혹은
열네 살 때부터 항상 실제보다 나이를 더 먹은 것처럼 느꼈다.” 영국 출신으로 11세 무렵부터 연기를 배운 케이트 윈슬렛은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그녀의
연기 데뷔는 13세가 된 1991년 영국의 TV시리즈물을 통해서 이뤄졌다. 스크린 데뷔작도 10대가 지나기 전인 17세에 찾아왔다. 지금은 할리우드의 대가가 됐지만 한때 B급 장르물의 대가로서 악명이
자자했던 피터 잭슨의 <천상의 피조물>(1994)이
바로 그것이었다. 끔찍한 실화를 밑그림으로 삼고 있지만 광기적인 판타지로 채색된 이 영화는 비현실적인
망상에 사로잡힌 두 소녀의 기괴한 우정이 끝내 한 소녀의 어머니를 살해하기까지의 내용을 그리고 있는데 여기서 친구의 엄마를 살해하는데 조력하는
폴린 역으로 등장하는 윈슬렛은 나이에 비해 조숙한 외모만큼이나 섬뜩한 연기력으로 눈길을 끌었고,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했다. 조부모와 부모 그리고 삼촌까지 극단에서 활동하는 배우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배우로서의 삶은 어쩌면 운명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에겐 확실히 타고난 유전자가 있었던 것 같다.
윈슬렛은 제인 오스틴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이안 감독의 <센스
앤 센서빌리티>(1995)에서 연기한 마리안 대시우드 역을 통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는
영예를 얻었다. 그러니까 10대가 지나가기도 전에 케이트
윈슬렛은 배우로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영광에 근접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윈슬렛에게 있어서
그건 이른 경험이라기 보단 시작에 가까웠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 이후로 윈슬렛은 시대극의 경력을 이어나갔고,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해냈다. 19세기 영국에서 대담한 주제를 소설로 담아냈던 토마스 하디가 남긴 마지막 소설을
영화화한 <쥬드>는 종교적인 관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19세기 영국을 배경에 둔 비극적인 러브스토리다. 자신의
사촌을 사랑하게 된 여인 수를 연기한 윈슬렛은 애절한 사랑을 가로막는 시대적 한계를 절감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여인의 가련하고도 강인한 표정을
완벽하게 체화해냈다. 한편 같은 해에 공개된 <햄릿>(1996)에서는 그 유명한 오필리어를 연기한다. 아버지를 잃고
미쳐버린 뒤 끝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오필리어의 광기에 압도적인 페이소스를 입히는데 성공했다. <타이타닉>(1997)에서도 비극과 대면하는 여인의 세계관은 거듭 이어졌다. 필연적인
비극을 향해 항해하는 배 위에서 자신이 꿈꾸는 삶과 사랑을 선택하는 열정적인 여인 로즈를 연기했다. 윈슬렛은
그렇게 비극적인 운명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여인으로서의 운명을 연기하는데 능했다. 혹은 능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윈슬렛이 연기한 여성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시대적 편견이나 관습을 견뎌내야 하거나 평범한 삶에 깃든 내밀한
욕망을 향해 손을 뻗는 경우가 많았고 그때마다 케이트 윈슬렛은 고요하면서도 강인하고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대혁명
이후로 도래한 삼엄한 공포정치 속에서 금기시된 음란소설에 탐닉하며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여인 마들렌으로 분한 <퀼스>(2000)와 무료한 삶에 찾아온 예기치 못한 불륜에 빠져드는 여성 사라를 연기한 <리틀 칠드런>(2006), 제2차 세계대전의 광풍 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독일의 첩자로 내몰리게 된 여인 한나를 연기한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2008)
그리고 안온하게 위장된 권태로운 삶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듯 살아가는 여인 에이프릴로 등장한 <레볼루셔너리 로드>(2009)까지, 이 모든 작품에서 윈슬렛은 저마다 다른 환경에 놓인 각기 다른 여인을 연기하면서도 결국 ‘나’라는 존재 혹은 ‘나’라는 여성에 대한 자문을 거듭한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 혹은 자신이
알고자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시대적 금기의 담을 넘거나 위장된 삶 너머로 시선을 돌린다. 이는
근작인 <레이버 데이>(2013)에서 또한 마찬가지다. 공황장애로 인해 세상과 자신의 삶을 분리시키며 유일한 가족인 어린 아들에게 기대며 살아가는데 우연히 맞닥뜨린
탈옥수로 인해 기이한 방식으로 삶을 회복해 나간다. 불안하고 예민한 심리에 묶여 깊게 침전해있던 여성으로서의
욕망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올라 그녀에게 현실적인 의지를 부여한다. 금새 꺼져버릴지라도 가장 밝게 빛나는
한 순간을 위해 타오르는 성냥과도 같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의 가련한 슬픔과 강인한 의지가 동시에 전해진다. 윈슬렛은
바로 그런 배우였다.
<어 리틀 카오스>(2015)를
통해 오랜만에 시대극으로 돌아온
그녀는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의 분수 디자인을 맡기 위해 경쟁하는 정원사 사빈 역을 맡았다. “사빈느와 나 사이엔 닮은 점이 많다고 느꼈다. 그녀는 일생 동안
큰 슬픔과 어려움을 여러 번 이겨냈고, 내 삶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녀가 그 모든 슬픔과 어려움을 극복했다는 사실에 있어 존경심이 든다. 그녀는 슬픔을 질질
끌고 가지 않았으며, 세상이 그녀를 불쌍히 여길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단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매우 긍정적이고 흥이 많다. 시대극에서 이러한 캐릭터를 많이 만날 순 없지.” 사빈은 윈슬렛이 연기했던 시대극 속의 여자들과는 또 다른 목표를 제시했다. 한편 <타이타닉> 이후로
대작 출연을 고사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상업영화 출연 경력이 드물었던 그녀는 최근 SF시리즈물인 <다이버전트>(2014)와 <인서전트>(2015)에 연이어 출연하며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그녀 스스로 새로운 경력의 필요성을 느낀 것일까?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은 독립영화를 하겠다는 의식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절대 그렇지 않다. 모든
작품 이후에 항상 얼마나 다른 걸 보여줄 수 있을지를 고려한다. 내게 도전이 될 수 있는지, 영감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지금보다 내 직업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인지 말이다.” 그녀에게 상업적인 할리우드 대작이 도전이 되고, 영감을
줄만한 때가 된 것이다. “사실 나는 상당히 운이 좋다. 오직
나 자신을 위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불평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비범한 것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매우 흥미롭고, 도전적이며, 창조적인
자극을 주는 일을 끊임없이 해왔다.” 윈슬렛은
실패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경력을 좀처럼 쌓지 않았다. 이미 이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 중 하나로 꼽히지만
그녀의 전성기는 아직도 지나지 않은 것 같다. 아직도 그녀는 길을 찾고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배우로서의 삶을 더욱 사랑하게 만드는 도전과 영감의 길 위에서, 케이트 윈슬렛이라는 이름으로.
마카오 출장을 다녀온 아내의 감기 증상이 심각하다. 남편은 지독한 감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쓰러진 아내는 곧 죽음을 맞이한다. 역시 감기 증세가 발병했던 아들도 일순간 세상을 떠났다. 죽은 건 아내와 아들뿐만이 아니었다. 전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각국 정부와 보건기구는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할 수 있는 건 발병의 근원지를 찾고 환자들을 격리 수용시키는 것뿐,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지 못한다. 그 가운데 어떤 이는 정부의 음모를 선동하고 나서고, 급속도로 확산되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요동치던 불안은 결국 거대한 폭동으로 이어진다.
전염(contagion)은 신체의 접촉이나 공기 중의 확산을 통해서 침입한 바이러스가 사람의 몸을 숙주로 삼는 과정을 의미한다. <컨테이젼>은 제목 그대로 전염에 관한 이야기다. 순식간에 숙주가 된 인간의 몸을 점령하고, 신체를 무력화시킨 뒤,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그리고 숙주와 접촉하거나 근접한 또 다른 숙주들에게 빠르게 침투하는 정체불명의 전염병에 의해 유린당하는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다. 만약 영화를 본다면 당장 어딘가 자신의 손이 닿고 있다는 것마저, 혹은 주변의 누군가가 기침을 하는 것마저 신경을 쓰일 정도로 예민한 경계심이 들지도 모른다. 그만큼 <컨테이젼>이 묘사해내는 정황이 현실적 감각을 자극할 만큼의 리얼리티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컨테이젼>은 질병과 맞서 싸워나가는 이들의 극적인 사연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정체불명의 적에게 습격을 당하듯 형체조차 파악하지 못한 바이러스의 전염으로 삽시간에 무너진 인간의 면역 체계가 공포와 불안으로 확대되어 이성의 면역 체계를 무너뜨리고 이 세계의 시스템이 유린당하는 과정을 대단히 사실적으로 포착하듯 연출해낸 작품이다. 담담한 시선으로 일관된 이 영화는 마치 다양한 채널을 동원해서 이 세계를 동시간에 관찰해낸 누군가의 시점숏으로 수집되고 정리된 리포트를 보는 것 같다. 홍콩과 일본, 미국, 영국 등 서로 동떨어진 그 세계 위에서 저마다의 사연이나 임무를 안고 움직이는 다양한 인물들은 이 거대한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의 스케일을 대변한다.
<컨테이젼>은 극적인 감정을 고양시키기 보단 스크린 너머에서 펼쳐지는 현실을 그저 바라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가히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정보적이고, 체계적으로 진전되는 극적인 양상은 영화 속의 현실과 영화 밖의 현실을 분리시킬 수 없을 정도로 사실적인 리얼리즘을 전달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인해 죽어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넘어서 아노미에 가깝게 사회의 체계가 붕괴되고 급속도로 혼란에 빠져드는 정국의 형태가 묘사되는 광경은 그만큼 공포스럽고 충격적인라 할만하다. 포석을 두듯 세계 곳곳에 놓인 인물들을 통해 전세계적인 상황을 수집해나가는 편집술이 힘을 발휘해나가는 가운데 그 얼굴을 자처하는 스타 배우들이 본래의 인상을 지우듯 평범하고 착실하게 제 역할을 해나가는 모습이 극적인 논리와 설득에 기여한다. 다양한 인물의 시선을 통해서 거대한 스케일을 구축하는 소더버그 특유의 연출력과 편집술은 슈퍼 캐스팅이라 불릴 만한 출연진 리스트를 평범한 그 세계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며 보다 생생한 현실 감각을 끌어낸다.
영화가 시작되는 건 발병 두 번째 날부터다. 발병 135일째가 돼서야 마감되는 서사의 뒤를 잇는 건 바로 그 모든 현상의 시작점이었던 발병 첫 날의 사연이다. 결코 극적일 수 없는 충격과 공포의 정황의 시작을 이 모든 카오스의 끝에서 드러내는 방식은, 그리고 그 방식을 넘어서 그 진실 자체는 충격이랄 것 없이 그저 그 초현실적인 진실을 체감하게 만든다. 한편으로 거대한 혼돈으로 치닫던 인간 사회를 목도한 뒤에서야 전달되는 진실은 냉소적인 블랙코미디의 여운을 남길만한 것이기도 하다. <컨테이젼>은 결국 인간이 어찌할 수 없었던 거대한 현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붕괴되고 다시 회복하는가를 살피는, 사회적 면역 체계에 관한 생생한 리포트다. 전염병은 하나의 수단에 가깝다. 그로부터 야기되는 공포가 인간의 이성을 어떤 방식으로 마비시키고 사회의 붕괴가 어떤 방식으로 진전되는가에 대해서 주목해야 한다. <컨테이젼>의 공포는 바로 그 우리가 지닌 이 세계에 대한 신뢰, 즉 사회적인 면역 체계가 무너질 때 발생하는 재앙을 주목하게 만든다는 것,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안전성을 의심하게 만든다는 문제제기, 바로 그 지점에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어딘가에 손이 닿는 것조차 신경 쓰였다. 그만큼 영화가 묘사하는 정황이 현실적인 감각을 자극할만큼 뛰어나다는 의미다. 다채로운 시선의 채널을 오가며 거대한 스케일을 구축하는 소더버그 특유의 편집술이 힘을 발휘하는 가운데 곳곳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스타 배우들이 각각의 세계를 튼튼하게 잇는 이음새 역할에 충실하다. 극적이기 보단 지나치게 현실적이라 되레 놀라운 결말이 인상적이다.
결벽적인 화이트 칼라가 지배하는 정돈된 식탁과 책상 위로 시선이 미끄러져 나간다. 그리고 그 공간만큼이나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남자가 시야로 들어온다. 그의 눈빛은 때때로 공허하다. 그 남자의 시선에 놓인 초점이 종종 현재가 아닌 과거로 맞춰진 탓이다. 유년시절의 한 페이지가 투명한 창 너머의 광경 기억 너머에서부터 소환된다. 그리고 그 기억은 15세 시절의 열병과 함께 찾아온 기이한 러브스토리에서 출발한다.
우연한 만남은 소년에게 관음의 기억을 남겼고, 그 기억은 욕망을 소환했으며 결국 사랑을 잉태했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이하, <더 리더>)는 일반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용납되기 힘든 로맨스로부터 시작되는 물음이다. 자기 나이의 두 배수가 넘는 성숙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어느 소년의 사연과 그 사연을 통해 도달하게 될 어떤 깊은 물음이 불명확한 전후반 구조의 서사로서 서로를 보좌한다.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스티븐 달드리의 <더 리더>는 소설의 시야를 확보하되 초점을 달리했다. 사물에 밀착하듯 섬세한 1인칭 시점을 통해 인물의 심리를 선명하게 묘사하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전지적 시점의 관조적 이미지를 통해 기저의 심리를 의문스럽게 추적한다.
어린 마이클(데이빗 크로스)과 한나(케이트 윈슬렛)의 관계는 만남에서부터 이별까지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남길 정도로 기연에 가깝다. 성숙한 여인의 육체를 관음하다 욕망하게 된 소년과, 생동감 있게 성장하는 소년의 육체를 탐닉하는 여인의 관계란 굴절된 에로티시즘의 정욕처럼 아슬아슬하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출발한 관계를 로맨스로 정착시키는 건 소년의 책이다. 책 읽어주길 원하는 여인은 소년의 낭독을 전희처럼 즐기다 몸을 섞곤 한다. 육체적 관능에서 정신적 교감으로 발전한 소년과 여인의 관계는 위태롭게 휘말리면서도 정적인 추억을 쌓아나간다. 어느 여름처럼 격정적이면서도 풍요로운 로맨스는 소년에게 열병이 일어나듯 시작되고 이내 사라진다.
육체적 관계를 통해 또래보다 이른 경험적 성숙을 마친 마이클은 덕분에 평생을 허무에 시달린다. 멜로는 <더 리더>를 관통하는 큰 맥락이다. 하지만 그 멜로에 방점을 찍은 건 아니다. 세심한 문체만큼 감성적인 접근이 돋보이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좀 더 건조한 방식의 시선을 드러내며 의문을 거듭 전진시킨다. 화자의 시선 내부에 놓인 것들을 손 끝으로 어루만지듯 세심하게 묘사하던 원작과 달리 영화의 시선은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비추되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 관계가 빚어낸 감정의 후천적 형태조차도 불분명하다. 어떤 수단에 불과하다 말할 수 없지만 실상 그 관계의 정체가 <더 리더>의 중추는 아니다. 그 멜로는 심오한 물음에 도달하기 위한 편린과도 같다.
한나의 감정적 기복에 대한 근본을 깨닫지 못한 마이클은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 법대에 진학한 뒤 재판을 방청하기 위해 찾은 법정에서 그 진실을 목도한다. <더 리더>의 본질적 물음이 뚜렷한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건 그 지점이다. 윤리에 대한 물음과 반문이 첨예하고 노련하게 이어진다. 마이클과 마찬가지로 (원작을 접하지 않은) 관객 역시 그 지점에서 그 비밀을 보다 선명하게 자각하게 되는데 이런 덕분에 그 상황이 발생시키는 딜레마를 마이클과 함께 공유하게 된다. 무지에서 비롯된 범죄적 행위로 처벌의 대상이 된 한나의 죄를 경감시켜줄 유일한 단서를 마이클은 알지만 그것을 뱉어낼 수 없다. 이유는 자신의 내면과 외면에 각기 존재한다. 진실을 발설하지 못하는 마이클의 심리적 기저에 놓인 진심은 한나의 그것과 같다. 수치심은 마이클을 함구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로 인한 내부적 갈등을 통해 홀로 침식된다.
영화는 원작과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지만 다른 방향의 의미를 더욱 공고히 다진다. 원작과 뉘앙스가 달라진 결말은 영화만의 독자적 의미를 구축하기 위한 첨언과도 같다. 비밀을 유지하는 것과 고백을 털어놓는 것 사이엔 상실의 통증과 기억의 배려가 잔존한다. 그 사이에서 온전히 살아남는 건 죄의식이다. 자신의 낭독 행위가 한나의 삶을 치유하기 위한 절대적 수단이었음을 직감한 마이클은 그 일화에 얽힌 비밀을 보존함으로써 그녀를 배려하지만 동시에 그 법정의 공모 속에 동참한다. 역사가 잉태한 죄의식이 개인에게 전이돼서 세대의 장벽을 넘어서는 일련의 상황을 목격할 때 홀로코스트적인 상처가 목격된다. 죄의식의 유전과 이로 인한 동통이 깊게 감지된다. 침묵의 시선으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마이클은 그로부터 시간이 지난 후 다시 한번 낭독을 시작한다. 그리고 한나는 언어를 읽고 쓰기 시작한다. 자신을 몰락시킨 무지로부터 해방된다.
시대적 광기에 천착했다 뒤늦게 그 무게를 짊어지게 된 운명만큼이나 타인의 삶에 얹혀진 운명을 뒤늦게 깨닫고 그와 함께 침전해버린 이의 운명 역시 가엾고 모질다. 결국 한나는 깡통에 돈을 남겼고, 유대인 생존자의 딸은 깡통만을 소유한다. 돈은 문맹재단에 전달되고 마이클은 고백을 결심한다. 자신의 비밀 속에서 반평생을 허무로 견뎌온 마이클은 결국 한나의 기억을 자신의 후세대에게 물려준다. <더 리더>는 운명의 과업을 극복하지 못한 인간들이 새로운 삶을 염원해나가는 방식을 담담하게 비춘다. 묵직한 질문들이 때때로 버겁게 다가오지만 냉정하듯 주시하는 영화의 시선엔 깊은 배려가 포착된다. 물론 역사적인 기록은 세대를 넘어 전승되고 죄의식은 보존된다. 단지 과거에 대한 단죄만큼이나 중요한 건 새로운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더 리더>는 엄중한 기록을 바탕으로 새겨진 역사 속에서 휩쓸려간 개인의 삶을 통해 그 물음을 정중하게 제시한다. 마치 온 몸을 연기적 자재로 활용하는 듯한 케이트 윈슬렛의 열연은 그 물음을 보좌하는 훌륭한 주석이다. 무엇보다도 그 질문을 외면하지 말 것. 우리에게도 역시 아픈 역사는 존재하므로.
슬럼독 오스카네어(Oscarnaire)! 현지시각으로 2월 22일 오후 5시경, 미국 LA 코닥극장에서 제81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거행됐다. 사회를 맡은 휴 잭맨은 화려한 뮤지컬 무대로 포문을 열며 시상식의 열기를 띄웠다. 그러나 이날 시상식의 주인공은 단연 <슬럼독 밀리어네어>였다.
지난 골든글러브에서 4관왕을 차지했던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이어진 아카데미에서도 저력을 발휘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8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벌어들이며 제81회 아카데미에서 가장 큰 수익을 올렸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경쟁이 치열했던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8관왕에 오르며 최고의 영예를 안았다. 13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도 3관왕을 차지했다. 하지만 주요부문에선 단 한차례도 호명을 받지 못하며 체면을 구겼다. 숀 펜과 히스 레저에게 각각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안겨준 <밀크>와 <다크 나이트>는 2관왕에 오르며 실속을 챙겼다. 이미 수상이 예정된 것처럼 보였던 히스 레저의 이름이 남우조연상에 호명되는 순간, 코닥 극장에 자리한 전 참석자가 기립박수로서 고인의 영예를 추대했다. 수상식은 가족의 대리 수상으로 이뤄졌다.
한편 골든글로브에서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독점했던 케이트 윈슬렛은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로 노미네이트 된 오스카 여우주연상 부문까지 석권하는 파란을 이어나갔다.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페넬로페 크루즈 역시 수상자로서 연단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월-E>로 장편 애니메이션 상을 차지한 픽사 스튜디오는 <라따뚜이>에 이어 오스카 2연패에 성공했다. 외국어영화상은 일본의 <굿’바이>에게 돌아갔다. 그 밖에도 <공작 부인: 세기의 스캔들>이 의상상에 호명됐다. 유난히 많은 수작들이 쏟아진 이번 아카데미 역시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대작보단 작품성 위주의 작품들을 선별했다. 지난 해와 마찬가지로 연기 부문에 호명된 배우들의 다국적성도 눈에 띈다. 무엇보다도 비 할리우드 영화인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최고 수혜자로 선정됐다는 점에서 최근 오스카의 보수적 취향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는 설에 무게가 실릴 전망이다. 한편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비롯한 아카데미 노미네이트 작품들이 개봉 중이거나 개봉 예정인 만큼 아카데미의 선구안을 국내 극장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81회 아카데미 수상작 리스트
작품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감독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대니 보일 남우주연상 <밀크 Milk> 숀 펜 여우주연상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케이트 윈슬렛 남우조연상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히스 레저 여우조연상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Vicky Cristina Barcelona> 페넬로페 크루즈 각색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사이몬 뷰포이 각본상 <밀크 Milk>더스틴 랜스 블랙 편집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크리스 디킨스 촬영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앤쏘니 도드 맨틀 미술감독상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도널드 그레이엄 버트, 빅터 J. 졸포 의상상 <공작부인: 세기의 스캔들 The Duchess> 마이클 오코너 분장상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그렉 캐놈 음악상(Original score)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A.R. 라만 주제가상(Original song)“Jai Ho” from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A.R. 라만, 굴자 음향상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리차드 킹 음향효과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이안 태프, 리차드 프리케, 레슐 푸커티 시각효과상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에릭 바바, 스티브 프리그, 버트 달튼, 크레이그 바론 장편애니메이션 상 <월-E WALL-E> 장편다큐멘터리 상 <맨 온 와이어 Man on Wire> 단편다큐멘터리 상 <스마일 핑키 Smile Pinki> 단편애니메이션 작품상 <작은 육면체의 집 La Maison en Petits Cubes> 단편영화 작품상 <토이랜드 Spielzeugland> 외국어영화상 <굿, 바이 Departures> 일본
좋은 집과 좋은 직장, 평온한 삶과 순탄한 일상. 누구라도 행복하다고 믿을만한 인생. 하지만 그 인생의 주인공은 그 삶이 실로 괴롭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사는 헐리 부부의 삶이 그렇다. 이웃에겐 동경의 대상이지만 실상 그네들의 삶은 반복되는 일상에 닳고 닳아 낡은 벽지처럼 빛 바래간다. 삭막한 현재와 달콤한 과거를 대비시킨 프롤로그는 무너져버린 삶의 근원이 자리한 좌표를 예감하게 한다. 파리에서의 삶을 꿈꾸던 달콤한 연인은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권태로운 부부가 되어 살아간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이하, <레볼루셔너리>)는 안온한 삶으로부터 비롯된 깊은 권태의 그림자가 드리운 현실이라는 거짓말이다.
너나 같이 비슷한 양복과 타이를 매고 먼 거리의 시내까지 기차로 출근하는 샐러리맨의 틈바구니에 낀 프랭크 윌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청소와 빨래를 하고 집 앞으로 쓰레기통을 끌고 나오다 비슷한 너비로 줄 지어 선 쓰레기통이 집 앞마다 늘어선 적막한 거리를 지켜보는 에이프릴 윌러(케이트 윈슬렛)는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금실 좋기로 소문난 젊은 부부다. 하지만 실상 윌러 부부의 삶은 매일같이 보이지 않는 갈등으로 점화되어 폭발 직전에서 다다르듯 위태롭다. 끔찍한 삶의 권태를 견디지 못하는 에이프릴은 점점 예민해지고 이를 견디지 못하는 프랭크 역시 지쳐간다. 질식 당할 것 같은 권태에 짓눌리던 윌러 부부의 삶을 반전시키는 건 오래된 언약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모든 것을 버리고 파리로 날아가는 것. 해묵은 약속을 현실로 소환하려는 에이프릴의 권유는 프랭크의 승낙으로 이어지고 이는 고요한 수면처럼 평온한 삶 속에서 위태롭게 침잠되던 부부의 삶을 끌어올려 숨을 불어넣는다.
1950년대 미국 중산층의 삶을 통해 시대를 지배하던 지독한 권태를 풍자한 리처드 예이츠의 동명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레볼루셔너리>는 텍스트의 행간에 놓인 여백까지 여운의 이미지로 승화시키듯 세심하고 첨예하다. 사랑하는 연인에서 부부가 되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이 모든 순조로운 과정이 실상 스스로를 얽매는 거대한 속박이 되었음을 깨닫는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과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뒤늦게나마 자신들이 공허하고 희망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현실이라는 감옥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한 부부의 삶은 부풀어오르지만 이내 다시 예민하게 서로를 찌르고 결국 터져나간다. 굴레를 맴돌듯 정해지듯 뻔한 일상을 돌고 도는 단조로운 삶 속에서 희망과 절망의 경계를 헤매던 부부는 자신들도 모르게 서로를 천천히 침식해나간다. <레볼루셔너리>는 그 차분하고 예민한 과정을 적나라하게 응시하면서도 차갑게 냉소하지 않는다.
가능한 변화들을 역설하지만 실상 변화를 이루지 못하는 자들의 불행을 조소하지 않는다. <레볼루셔너리>는 시대의 기운을 담담하게 바라보면서도 개개인의 특별한 속내에도 세심하게 귀를 연다. 자신들의 안온한 일상에 가득한 건조한 향취를 외면한 채 행복한 척 살아가는 이들의 연기적 삶을 쓸쓸하게 비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행한 삶의 내면을 바라보는 건 정신병자로 낙인 찍힌 존(마이클 쉐넌)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떠나 파리로 가겠다는 윌러 부부의 고백에 수긍하는 건 오로지 그뿐이다. 정상적인 삶을 누리고 있는, 혹은 그렇게 믿고 있는 윌러 부부의 이웃과 프랭크의 직장 동료들은 그것이 비현실적이라 비웃는다. 실상 그 정상인들은 현실에 담보 잡힌 삶 속에서 어떤 의미라도 찾아내길 포기하듯 살아가고 있다. 매 순간마다 감지되는 불행의 신호들로부터 스스로를 무뎌지게 만들고 자신의 현실에 합리를 덧씌워 불행으로부터 매일같이 도피하고 자신을 보호한다. 하지만 그 합리의 방식을 수용할 수 없었던 에이프릴과 이를 지켜보며 함께 괴로워하던 프랭크는 현실을 등지려 하지만 또 다른 현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현실로 다시 침전한다. 천천히 기울다가 순식간에 뒤집혀 침몰해버린 타이타닉처럼 삶이 깊은 나락으로 가라앉는다.
<타이타닉> 이후로 11년만에 호흡을 맞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는 상당히 인상적이다. 고요한 수면에 일렁이는 파문의 흐름을 따라잡듯 섬세한 케이트 윈슬렛은 밑바닥에서 천정까지 차오르는 감정의 영역폭을 깊고 높게 끌어올린다. 이를 보좌하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리액션 또한 훌륭하다. 안단테(andante)처럼 흐르는 <레볼루셔너리>에서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가 크레센도(crescendo)와 같다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는 악센트(accent)와 같다.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가 전체적인 흐름을 좌우할만한 감정의 바다를 이룬다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그 감정의 바다에 격랑을 제공하는 암초와 같다. 두 배우의 조합은 꽤나 이상적인 결과를 낫는다. 정신질환자 존을 연기하는 마이클 쉐넌 역시 비중에 비해 상당히 인상적인 연기를 선사한다.
<레볼루셔너리>의 결말은 단연 비극이다. 그리고 그 파국을 면전에 둔 객석으로 모종의 질문이 던져진다.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 뻔하지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있다. 누구나 그렇듯 삶이 권태롭다 하여 세상을 등지긴 어려운 노릇이다. 하지만 때때로 그 불행의 근본을 마주서야 한다. 거기서 우린 선택한다. 삶을 등지고 전진하느냐, 삶으로부터 뒷걸음질치느냐. 불행 속에서 살아가는 건 삶이 아니다. 살고 있는가, 살아있는가. 전자와 후자는 불과 한 음절의 차이를 두고 있을 뿐이지만 결국 차원이 다른 언어로 읽힌다. <레볼루셔너리>는 자리에 대한 이야기다.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은 자신을 위한 자리인가? 비현실적인 꿈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현실은 행복을 선사하는가? 이건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단지 두려울 뿐이다. 뻔하지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란 그런 것이다. <레볼루셔너리>는 그런 질문을 던지기에 두려운 영화다. 만약 당신이, 혹은 어느 누군가가 이 질문 앞에 두려움을 느낀다면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은 충동 역시 느낄 것이다. 성공의 척도에서 인생을 볼모로 제공한 채 생을 부지하는 현실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면 그건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현실이다. <레볼루셔너리>는 그 평온한 거짓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는 사려 깊은 도발이다.
지난 11일 미국 현지시각 8시, 베벌리 힐튼 호텔에서 제6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열렸다. 지난해 작가 노조의 파업에 동참한 배우들의 보이콧으로 인해 사상 초유의 시상식 무산이라는 진통을 겪었던 골든글로브는 올해 다시 아카데미 전초전의 열기를 띄웠다. 그리고 돌아온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풍성한 작품만큼이나 다양한 이변을 연출했다.
대니 보일의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4관왕에 올랐다. 감독상, 각본상, 드라마 부문 작품상, 주제가상까지 쓸어담은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주요부문 석권과 함께 4개의 트로피를 거머쥐는 기염을 토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인도 외교관 출신 작가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했으며 잘 알려지지 않은 인도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작품이다. 지난 해 미국 비평가들의 찬사와 지지를 한 몸에 얻었던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지난 8일 열린 미국 비평가상 시상식에서도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작품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한 바 있다.
지난 해 제65회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레슬러>는 골든글로브 2관왕에 올랐다. 다사다난한 인생 역정을 지닌 미키 루크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레슬러>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노래한 ‘The Wrestler’로 주제가상을 수상하며 2개의 트로피를 가져갔다. 샘 멘데스가 연출한 <레볼루셔너리 로드>로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케이트 윈슬렛은 스티븐 달트리가 연출한 <더 리더>로 여우조연상까지 수상하며 이례적인 겹경사를 맞이했다. 한편 <다크 나이트>에서 괴력적인 연기로 보여준 히스 레저는 남우조연상에 호명되며 고인에 대한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 밖에도 뮤지컬코미디 부분에서는 우디 알렌이 연출한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가 작품상을, <킬러들의 도시>와 <해피 고 럭키>에서 주연을 맡았던 콜린 패럴과 샐리 호킨스가 각각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을 차지했다. 장편애니메이션상은 픽사 스튜디오의 <월-E>가 선정됐다. 이로서 지난 2004년 신설된 이래로 픽사 스튜디오는 <카><라따뚜이>에 이어 <월-E>까지 3번 연속 골든글로브 장편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며 명성을 공고히 다졌다. 외국어영화상엔 이스라엘 출신 감독 아리 폴만의 <바시르와 왈츠를>에게 돌아갔다. 아리 폴만의 실화를 영화화한 이 작품은 최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에 대한 경종을 울릴만한 작품이란 점에서 눈길을 끈다. 지난 해 골든글로브 세실 B. 드밀 평생공로상의 수상자로 선정된 스티븐 스필버그는 1년이 유예 끝에 한해를 건너 미뤄둔 영광을 찾았다.
올해 제6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는 영국 출신 영화인들에게 많은 트로피가 수여됐다. 대니 보일을 비롯해 영국 출신 배우 케이트 윈슬렛과 샐리 호킨스, 아일랜드 출신의 콜린 패럴까지 영국출신 감독과 배우들의 저력이 빛났다. 한편 데이빗 핀처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론 하워드의 <프로스트 VS 닉슨>은 5개 부문 후보로 지명됐으나 한 부문에서도 호명되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반면 지난 해 최고의 화제작으로 기록된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는 남우조연상 단 1개 부문 후보로 올랐지만 히스 레저의 수상으로 일말의 체면을 살렸다. 과연 아카데미 전초전의 결과가 오스카 트로피의 향방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제6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영화부문 수상작
감독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대니 보일 수상 각본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사이먼 뷰퍼이 수상 드라마_작품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선정 드라마_남우주연상 <레슬러 The Wrestler> 미키 루크 수상 드라마_여우주연상 <레볼루셔너리 로드 Revolutionary> 케이트 윈슬렛 수상 뮤지컬코미디_작품상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Vicky Cristina Barcelona> 선정 뮤지컬코미디_남우주연상 <킬러들의 도시 In Bruges> 콜린 패럴 수상 뮤지컬코미디_여우주연상 <해피 고 럭키 Happy-Go-Lucky> 샐리 호킨스 수상 남우조연상 <다크 나이트 Dark Knight> 히스 레저 수상 여우조연상 <더 리더 The Reader> 케이트 윈슬렛 수상 장편애니메이션상 <월-E> 앤드류 스탠튼 수상 외국어영화상 <바시르와 왈츠를> 아리 폴만 수상 음악상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A. R. 라만 수상 주제가상 <레슬러 The Wrestler> 브루스 스프링스틴 ‘The Wrestler’ 선정 세실 B. 드밀 평생공로상 스티븐 스필버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