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 사회의 계급은 사회지도층을 일컫는 ‘알파’와 늑대 사회의 하층민이나 다름없는 ‘오메가’로 구분된다. 케이트는 알파고, 험프리는 오메가다. 험프리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는 케이트와 달리 험프리 눈에는 케이트가 김태희고 전도연이다. 하지만 케이트가 험프리에게 관심을 가진다 해도 그건 단지 사회지도층의 윤리이자, 일종의 선행으로 끝나야 할, 오래된 늑대 사회의 계급적 운명론이다. 어쨌든 <알파 앤 오메가>는 늑대 종족을 구분하는 두 계급의 대표자로 등장하는 케이트와 험프리의 모험과 로맨스를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대부분의 관객에게 생소한 개념이겠지만 이 작품에서 내세우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늑대 사회의 계급은 단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늑대 사회는 세 계급으로 자신들의 우열을 구분하는데 그 순열에 따르면 알파, 베타, 오메가로 나뉜다. <알파 앤 오메가>는 계급의 양 극단을 지칭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계급적 배타성을 통해 늑대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 즉 늑대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출한다. 물론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설정이 그러할 뿐, 이 애니메이션이 셰익스피어의 그것(을 기대하기도 쉽지 않지만 어쨌든 그것)처럼 절절한 로맨스의 비극 따위를 연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이 작품의 골자는 간단하다. 계급적 차이로 인해 이루어질 수 없는 두 쌍의 늑대가 있고, 그들 중 낮은 계급에 속하는 수컷이 암컷을 짝사랑하지만 사회지도층의 윤리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암컷은 수컷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종족의 미래를 위해 사랑하지 않는 이웃 늑대 부족의 사회지도층 수컷과 백년가약을 맺고자 한다. 하지만 그리 된다면 이야기는 재미없어지는 법, 갑작스런 인재에 휘말려 험프리와 케이트는 자신들의 보금자리에서 먼 곳으로 떠나가게 되고 그곳에서 두 사람의 진정한 관계가 재정립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이건 늑대 사회로 위장한, 계급적 신분차를 뛰어넘는 남녀의 로맨스물이다. 중간중간 골자로 코믹한 설정들이 끼어드는 로맨틱 코미디인 셈이다. 결국 중요한 건 이 애니메이션이 그 빤한 설정들을 불식시킬 만큼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나 탁월한 발상의 전환을 지니고 있느냐는 물음에 답변할 수 있는가라는 지점일 것이다. 하지만 <알파 앤 오메가>는 이에 충실한 답변을 내놓을 수 있는 근거가 빈약한 작품이다. 픽사와 드림웍스가 매년 타이틀 매치를 벌이고, 유니버셜 스튜디오와 같은 몇몇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이 다크호스처럼 떠오르기도 하는 전세계 애니메이션의 링에 등장한 라이온스 게이츠의 <알파 앤 오메가>는 어떤 특이성이나 기발함을 발견하기 어려운, 소위 요즘 날고 긴다는 애니메이션 작품 가운데 가장 몸값이 떨어지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람 흉내 내는 늑대들과 몇몇 동물들이 등장하는 광경은 드림웍스 캐릭터들의 실패적인 아류처럼 보이고, 그들이 구사하는 유머란 다소 지나친 표현을 빌리자면 어디서 웃어야 할지 타이밍을 맞추기가 어렵다. 사실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그 역할이 무엇인지 감을 잡기가 어려울 만큼 낭비적이며 전반적인 스토리텔링 역시 불필요한 사연을 늘려나간다는 인상을 넘을 만한 감상을 얻기 어렵다. 어드벤처로서 추천할만한 시퀀스를 찾는다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물론 3D의 입체감을 활용하겠다는 야심만으로 그득해 보이는 몇몇 시퀀스는 입체안경의 쓸모를 재확인시켜주겠지만 그게 최선은 아니다. 한 가지 의미를 짚어본다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라이온스 게이츠의 애니메이션 사업을 위한 첫 번째 발걸음으로서의 쓴 유산이 될 것이라는 조언 정도가, 그게 최선의 칭찬이 될 것 같다. 물론 <알파 앤 오메가>를 (사실상 이 리뷰 따위가 필요 없는) 순수한 아동들을 위한, 동화적인 교육용 애니메이션 정도로 여긴다면 앞선 박한 언어들 따위는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만.
애니(크리스티나 리치)와 폴(저스틴 롱)은 서로를 향한 애정에 균열을 느끼는 권태기 커플이다. 특히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듯 매사에 무기력을 느끼는 애니는 그 관계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다. 그런 가운데 타지로 발령을 받은 폴은 저녁식사 자리를 주선한 뒤, 애니에게 이런 사실을 통보하며 서로에 대한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보려 한다. 그러나 폴의 말을 자르고 성급히 모든 상황을 단정지은 애니는 극단적으로 반응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요한 복음에 등장하는 죽은 나사로의 부활을 빗대어 명명된 ‘나자루스 신드롬’, 즉 사망선고가 내려진 환자가 소생하는 현상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애프터 라이프>는 생과 사의 경계를 조명하는 미스터리다. <애프터 라이프>가 인간의 죽음을 다룬 영화는 여타의 영화들과 차별화를 주장한다면 그 근거는 생사의 경계를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의 딜레마를 그리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사망이 선고된 애니가 장의사 엘리엇(리암 니슨)과 대화를 거듭하며 자신의 생을 주장하지만 엘리엇은 끊임없이 그녀의 죽음을 각인시키며 그녀를 설득시켜 나가고, 애니의 죽음과 엘리엇의 정체를의심하는 폴은 그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다.
<애프터 라이프>는 의심을 자아내는 인물의 행위와 확신이 부족한 상황을 거듭 나열함으로써 미스터리를 강화시키고 서스펜스를 구축해 나가려 한다. 모호한 생과 사의 경계에 대한 불확실성을 토대로 이야기의 불완전성을 설득해내려 한다. 하지만 <애프터 라이프>는 그 불확실성과 불완전성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 짓지 못한다.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는 애니와 그녀의 죽음을 설득하는 엘리엇의 관계 사이에는 특별한 긴장감이 없다. 단지 어떤 의문이나 의심이 개입될 뿐이다. 이는 곧 이 영화의 미스터리가 딱히 인상적인 수준의 흥미를 보장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배우들은 제각각 나름의 역할을 해내지만 모호한 이야기의 흐름을 결코 구제해내지 못한다.
동시에 완벽하게 설명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소재를 품은 이 영화의 불확실성은 이야기의 불완전성을 설득해내지 못한다. <애프터 라이프>는 이야기의 불충분한 완결성을 소재의 불확실함으로 핑계를 삼으려는 작품처럼 보인다. 의심의 단서를 곳곳에 흩뿌려놓고 그 어떤 의문 하나 해소하지 못한다. 마치 자신이 설계한 미로 안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면서 스스로 그 구조의 대단함을 설명하는 꼴이랄까. 시종일관 거듭되는 의문스런 상황의 전시가 두 인물의 지루한 대화 속에서 고단하게 지속될 때, 감상은 덧없는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의 그것처럼 길을 잃은 채 공허해진다. 제로섬 게임처럼 얻을 것이 없는 결말은 안이하고 어리석은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를 치장하는가를 드러내는 예시에 가깝다. 마치 심장이 정지한 이의 심장박동 그래프처럼 기승전결에는 어떠한 클라이맥스도 없다. 마치 맥박이 뛰지 않는 이야기 같다고 할까.
<사랑해,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로부터 배어나는 낭만적 기운을 로맨틱한 에피소드와 연결한 기획적 옴니버스다. 파리를 배경으로 18편의 옴니버스를 직조한 20명의 감독들은 저마다의 상상력을 통해 파리라는 도시의 환상성을 부추긴다. 사실상 <사랑해, 파리>는 파리라는 도시의 고유적 낭만성을 증명하기 이전에 긴 세월 동안 환상성을 구축한 도시가 로맨스라는 감정을 얼마나 탁월하게 보좌할 수 있는가를 증명한 작품이나 다름없다. <사랑해, 파리>에 이어 새로운 낭만도시 프로젝트의 제작에 착수한 엠마뉘엘 벤비히가 <뉴욕, 아이러브유>로 뉴욕을 새로운 로맨틱 시티로 낙점한 것도 그 도시를 동경하는 이들의 환상을 등에 업은 것이나 다름없다.
18편의 에피소드마다 명확한 구획을 나눈 <사랑해, 파리>와 달리 <뉴욕, 아이러브유>는 각 단편의 시작과 끝을 이어 붙이며 마침표의 영역을 지워버렸다. 주가 되는 단편 사이마다 다리 역할을 하는 짧은 전환점(transition)을 삽입하고 이를 통해 사연을 쉼 없이 이어나간다. 그만큼 매 순간의 감정을 음미할 여유가 줄어든 반면, 다음 작품에 몰입할 대비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산만한 인상을 줄 확률도 적지 않다. 매 단편마다 적확한 마침표를 찍어내듯 경계를 둔 <사랑해, 파리>보단 보다 불친절한 형태로 완성된 <뉴욕, 아이러브유>는 뉴욕이라는 도시의 번잡함을 영화적 구성 그 자체로 승화해버린 것마냥 번잡한 영화인 셈이다.
그럼에도 <뉴욕, 아이러브유>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부르는 동경심의 너비만큼이나 풍요로운 로맨스의 만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각적인 영상미를 자랑하는 이와이 슌지를 필두로 11명의 감독이 만들어낸 로맨틱한 상상을, 그것도 다채로운 배우들의 얼굴을 빌려 뉴욕의 사랑담을 그려내는 과정을 지켜본다는 건 일면 의미 있는 일이다. 작품마다의 편차를 떠나 뉴욕이라는 도시를 모티브로 삼은 러브스토리의 향연을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감흥이 배어난다. 특히 감각적인 영상미와 함께 황홀한 충격을 선사하는 세자르 카푸르와 고전적 무게감 속에서도 섬세한 감정적 울림을 전달하는 이와이 슌지의 단편은 <뉴욕, 아이러브유>안에서 단연 빼어난 감상을 부여한다. 그 밖에도 장난끼 넘치는 반전을 품은 브렛 라트너와 이반 아탈의 작품, 그리고 수다스럽지만 귀여운 노부부의 애틋한 감정을 깊게 전달하는 조슈아 마스턴의 영화 또한 꽤나 인상적이다. 감독으로 데뷔한 나탈리 포트만의 깔끔한 연출력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좋은 관심사가 될만한 지점이다.
번잡한 뉴욕의 교차로를 건너듯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단편적 상상력을 따라잡는 건 그만큼의 집중력을 요하기에 피곤한 감상을 부여할지 모른다. 동시에 옴니버스의 특성상 작품마다의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도 일종의 맹점이 될만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뉴욕, 아이러브유>는 그 다채로운 감각과 다양한 상상력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먹음직스러운 만찬이라 해도 좋을 작품이다. 어느 도시에서나 만남과 이별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사랑해, 파리>와 <뉴욕, 아이러브유>는 특별한 도시의 로맨스라기 보단 어느 도시를 배경으로 둔 특별한 로맨스적 일화의 총망라에 가깝다. 떨리는 찰나의 이끌림도, 담담한 영원의 엇갈림도, 낮과 밤을 아우르며 도시를 떠돌다 그 거리에 낭만을 켜켜이 채워나간다. 낭만을 먹고 자란 도시는 전인류적 동경을 끌어안고 그 환상을 품에 안은 채 또 다른 낭만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뉴욕, 아이러브유>는 도시를 위한 낭만의 헌사라기 보단 유려한 도시를 풍경으로 낭만을 증명하는 작업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새로운 낭만은 또 다른 도시로 전파된다. 아마도 인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사랑을 꿈꾸는 도시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질서정연하게 정사각형의 대오를 갖춘 원색들로 알록달록하게 채워진 스크린이 만화경처럼 빙글빙글 돈다. 서로의 경계로 스며들 듯 가늘게 늘어지면서도 제 영역을 교묘히 유지하는 원색들의 회전. 정의할 수 없는 황홀경은 제 이름을 지닌 원색들로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스피드 레이서>는 그 황홀경을 선사하는 도입부처럼 실체가 존재하나 실로 환상에 가까운 것이다. 만화의 색상으로 구현한 실사의 세계, <스피드 레이서>는 새로운 물감을 통한 모사가 아닌 새로운 터치로 창조해낸 유례없는 가상이다.
1967년에 제작된 TV애니메이션 <마하 고고고>는 자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뒤, 미국에서도 <스피드 레이서>란 제목으로 방영되어 센세이션에 가까운 반향을 불렀다.-국내에선 <달려라 번개호>라는 제목으로 방영됨.- (어린 시절 이에 열광했다는) 워쇼스키 형제를 통해 스크린에 재현된 <스피드 레이서>는 영화화된 원작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답습했지만 그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완성했다. <스피드 레이서>는 만화에서나 가능할법한 비현실적 세계관을 영화로 재현한다. 롤러코스터의 노선처럼 아찔하게 높고 가파른 레이싱 트랙 위를 고속 주행하는 레이싱카의 드리프트는 차마 현실적이라 할 수 없는 비정상의 속도를 체감하게 만들지만 그로부터 발생하는 쾌감은 다분히 현실적이다.
카(car)와 쿵푸를 조합해 만들었다는 ‘카-푸(car-fu)’라는 생소한 용어로 명명된 레이싱카의 움직임은 <스피드 레이서>가 선보이는 가장 흥미로운 볼거리다. 마치 운전자의 수족처럼 활용되는 자동차 바퀴의 쓰임새와 재주넘기하듯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차체의 날렵한 움직임은 동물적인 반사신경을 느끼게 한다. 육중한 무게감을 발생시키는 차체의 충돌, 스피디한 질주 속에서 뒤엉켜 회전하는 차량간의 맞물림, 그에 때론 공중으로 붕 떠올라 ‘플라잉 킥’처럼 상대차를 가격하는 움직임은 실로 흥미롭다. ‘이건 그냥 쇠 덩어리가 아니’라는 대사는 <스피드 레이서>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본보기와 같다. 순진무구한 유아적 믿음을 정의로 승화시키는 만화적 가치관을 <스피드 레이서>는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 솔직함은 유치할 만큼 단순한 것이지만 <스피드 레이서>는 이를 명쾌하고 정당한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유채색이 만연한 <스피드 레이서>의 세계는 무채색으로 그늘진 <매트릭스>와 이미지를 그려내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인간의 믿음을 시험하는 시스템의 함정은 존재한다. 시스템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개인의 운명은 <매트릭스>에 이어, (워쇼스키 형제가 제작한) <브이 포 벤데타>에 이어, <스피드 레이서>로 계승된다. 다만 두꺼운 서적과도 같이 진지한 표정으로 일관했던 전자들에 비해 <스피드 레이서>는 막대사탕처럼 달고 가볍다. 팝 아트(pop art)의 색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원색적인 나열이 이루는 <스피드 레이서>의 이미지들은 자극적이라기보단 신선하다. 스피드 레이서(에밀 허쉬)라는 직설적인 이름은 더더욱 그렇다. 가치관의 윤리를 이름 그대로 대변하는 인물들이 <스피드 레이서>에는 유치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존재한다. 직설적인 상징들이 자기 존재를 스스로 명명하는 원색의 세계에서 선악의 대비는 더욱 분명하고 간결한 신념은 한층 명확해진다.
기계문명에 의해 능동적 삶을 말살 당한 인간들이 환각과도 같은 가상체험의 주입 속에서 사육되거나(<매트릭스>), 일원화된 권력 구조의 수호를 위해 개인의 자각을 철저하게 거세하는 전체주의적 강압의 공포에 굴복해야 하는(<브이 포 벤데타>) 현실들에 비해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는 주체로서 개인이 보존된 온전한 현실이란 점에서 <스피드 레이서>는 전자들에 비해 한층 여유롭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거대한 구조적 억압은 소수자아의 정당성을 착취하고 짓누른다. 재능과 노력을 통해 승리가 부여되는 경쟁윤리는 자본의 음모로 훼손되고 정당성으로 위장된 굴절된 가치관의 편법이 사회를 조종한다. 질서를 유린하는 시스템의 은밀한 거래 속에서 개인은 선택을 강요 받는다. 그곳에서 재능의 가치란 탐욕을 위한 도구로서 유용한 것에 불과하다.
레이서 모터스는 가내수공업으로 모든 것이 수급되는 가족기업이다. ‘레이싱은 우리 가족에게 종교와도 같은 것’이란 스피드의 말처럼 그들에게 레이싱은 삶에 있어 가장 숭고한 가치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로 ‘레이싱에서 중요한 건 선수와 경기가 아니라 돈과 권력’이라고 말하는 로열튼 기업의 대표 아놀드 로열튼(로저 앨럼)에게 레이싱은 그저 돈벌이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를 지배하는 건 스피드가 아닌 로열튼이다. 그는 자본력으로 매수한 권력을 통해 레이싱의 배후를 조종하고 이윤을 창출하며 자신의 지위를 굳건히 다진다. 그에게 뛰어난 실력만으로 우승을 거머쥐는 스피드는 위협적 상대이자 포섭의 대상이다. 매트릭스(matrix)의 환각 속에서 진짜가 아닌 안위를 누릴 것인가, 아니면 그를 벗어나 고난을 견디고 진짜 삶을 되찾을 것인가. 스피드는 네오와 마찬가지로 빨간 약과 파란 약의 갈래에 선다.
정신과 육체의 대비. 형형색색한 원색들이 형광빛을 내는 <스피드 레이서>의 트랙은 환상과 실재의 영역 구분이 없을 뿐, 그 현실은 또 다른 매트릭스로 작동한다. 결승지점에 도달하고자 하는 본질적 목표를 잊은 채, 오로지 그를 저지하기 위해 트랙 위에 올라선 수많은 상대에게 둘러싸인 스피드는 그 트랙 위에서 홀로 유일하게 결승선을 바라보고 달린다. 그는 네오처럼 홀로 유일하게 숙명을 짊어졌다. 거대한 기업의 담합은 레이싱을 허상으로 조작한다. 그에 열광하는 관객들도, 그 트랙 위를 달리는 선수들도 하나같이 거짓을 향유하고 영위할 뿐이다. 스피드는 그 안에서 진실을 본다. 매트릭스의 태연한 삶이 결코 안전한 것이 아닌 것처럼 정당한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 트랙 위에서의 승리가 결코 누릴만한 호사가 아님을 안다. 단순히 결승트로피의 명예를 탐욕하는 것이 레이싱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스피드는 그 트랙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하며 이는 끝내 기술의 영역을 뛰어넘은 예술적 경지로 거듭난다.
<스피드 레이서>는 기술적 향연의 범주에 속하는 블록버스터의 체험을 넘어서 예술적 성취를 드러낸다. 자본력의 동원을 통한 CG기술의 진화는 영화의 구현을 발전시키고 이를 통해 오늘날의 영화들은 제각각 거대한 현실을 스크린에 부지런히 전시한다. 관객은 블록버스터를 통해 비현실적인 현실을 대리적으로 체감하고 이를 통해 불가능한 현실을 탐닉한다. 하지만 <스피드 레이서>는 기술을 통한 예술의 창조력이 무엇인가를 증명한다. 단지 변신로봇과 거대괴물이란 허구적 산물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것만이 기술의 본질이 아님을 입증한다. 비현실의 색채를 통해 창조된 <스피드 레이서>의 세계는 예술적이라고 명명되는 가치를 지녔다. 만화적 상상력을 단순히 영화적 형식을 빌려 재현한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해석을 통해 개별적인 작품을 완성시켰다.
자본의 수하로 고용 당하길 거부하는 자신과 가족을 위협하는 거대한 실체에 대항하고자 하는 본능은 분명 숙연한 것이다. <스피드 레이서>가 추궁하는 승리의 실체는 그 모든 부조리의 극복에 있다. 장애물 같은 적을 넘어 결승선을 향해 내달리는 스피드의 질주가 육체적 쾌감을 뛰어넘은 숭고함으로 거듭나는 건 그 때문이다. 우승을 가로막으려는 무리들의 비열한 공작을 이겨내고 결승선을 향해 집념의 페달을 밟는 스피드는 그 상대를 뛰어넘고 결국 속도의 경지마저 뛰어넘고 인간의 한계마저 극복한다. 이는 본질을 수단으로 삼는 이들이 결코 이룰 수 없는 선요한 것이다. <스피드 레이서>가 감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 뛰어난 경지를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경지에 오르는 이의 숭고한 정신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승리에 현혹되지 않고 진실된 경쟁을 믿는 자만이 이룰 수 있는 미학적 가치가 <스피드 레이서>에 존재한다. 예술을 간과하고 상업을 중시하는 이들이 결코 이룰 수 없는 재능과 열정이 스크린에서 황홀하게 빛을 발한다. <스피드 레이서>는 그렇게 블록버스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영화의 신기원은 이렇게 당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