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각각의 층위를 이루며 퇴적된 지층처럼 인생 또한 찰나의 경험이 켜켜이 쌓인 세월로 축적된다. 저마다의 인생 안에서도 선택과 도전을 거친 삶은 귀감이 되어 빛나기 마련이다. 바로 리암 니슨이 그렇다.
아일랜드 밸리미나 출신의 리암 니슨은 어려서부터 큰 체격을 지닌 탓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가 권투에 입문한 계기도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9살의 나이에 올 세인츠 유소년 클럽에서 권투를 수련하기 시작한 니슨은 킬러 본능이 없다는 지적을 듣는 가운데서도 뛰어난 체격 조건을 기반으로 6년 뒤, 북아일랜드 헤비급 유소년 챔피언으로 등극한다. 올림픽 출전을 희망할 정도로 열의가 대단했던 소년이 17세가 되던 해에 링을 등져야 했던 건 펀치드렁크 때문이었다. 꿈을 상실을 견디기엔 이른 나이였지만 결과적으로 니슨은 링에서 내려옴으로써 새로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배우로서 처음 무대에 오른 니슨의 나이는 11살이었다. 영어 선생님의 제안으로 교내 연극에서 주연을 맡았던 니슨은 점차 연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17세 당시, 자신에게 주연을 맡겼던 그 영어 선생님이 조직한 슬레미쉬 극단에 입단한다. 아마추어 배우 지망생들로 이뤄진 이 극단은 전지역의 수많은 드라마 페스티벌에 참여하며 공연을 펼쳤다. 니슨은 <Philadelphia, Here I Come>을 공연한 Larne Drama Festival에서 호평을 얻었고 결국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니슨은 배우로서의 삶에 완전한 확신을 갖지 못했다. 19살이 되던 1971년, 벨파스트의 퀸즈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려 했지만 1년도 안되어 다시 벨리메나로 돌아와 기네스 공장에서 지게차를 몰았다. 당시 샘 하나라는 이름을 지닌 노인과 함께 일했던 니슨은 말 한마디 걸지 않는 그를 두려워했으나 어느 날, 그는 니슨에게 충고를 던졌다. “애송이, 여기 오래 머물러 있지마. 네 삶을 찾아가.” 당시 니슨은 업무가 끝나면 틈틈이 벨파스트의 극단을 찾아가 연기를 리허설하곤 했으며 슬레미쉬 극단에서의 활동에도 꾸준히 참여했다. 심지어 그 해에 <Pilgrim's Progress>(1979)에 출연하며 생애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하는 기회도 얻었다. 하지만 니슨은 연기를 사랑함에도 여전히 배우로서의 삶을 확신하지 못했다. 뉴캐슬에 있는 세인트 마리스 사범 대학에 진학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니슨에게 자신의 운명을 깨닫게 만드는 또 한번의 계기였을 뿐이다. 다시 벨파스트로 돌아온 니슨은 배우로서 본격적인 경력을 쌓아나가기 시작한다. 두 번의 타협에 실패한 뒤에서야 비로소 배우로서의 삶을 받아들인 것이다.
리릭 극단의 오디션에 통과한 니슨은2년에 걸쳐 극단과 함께 투어를 돌았다. 다양한 연기적 경험을 쌓아나가던 니슨은 투어 기간 동안 곳곳에서 영국군과 아일랜드 무장단체의 대치를 지켜볼 수 있었다. “나는 북아일랜드에서 자랐다. 덕분에 폭력과 그 폭력의 결과들을 직접 목격하며 사건들 속에서 살아왔다. 그건 언제나 내게 끔찍하고도 매혹적인 일이었다. 그건 정말 어떻게 분노가 삶을 잡아먹을 수 있는지에 관한 직감이었으니까.”
무대에 오른 니슨을 눈여겨 본 존 부어맨은 자신이 연출하는 <엑스칼리버>(1981)에 그를 캐스팅했다. 니슨은 <엑스칼리버>에서 동료배우로 출연한 헬렌 미렌과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이는 니슨에게 새로운 구심점이 된다. 당시 인상적인 경력을 쌓아나가던 여배우 헬렌 미렌의 인맥이란 당시 초짜 신인에 불과했던 니슨에게 금광과도 같았다. 미렌과의 5년에 걸친 연애는 니슨의 세계관을 푸아그라처럼 부풀어오르게 만들었다. 롤랑 조페의 <미션>(1986)에서 만난 로버트 드니로도 니슨에게는 남다른 인연이었다. 드니로는 니슨을 자신이 사는 LA로 초대한 뒤, 친분이 있는 캐스팅 디렉터에게 니슨을 소개시킨다. 결국 니슨은 당시에 기획된 TV시리즈 1회 분량에 출연하게 된다. 하지만 드니로의 권유에 호기롭게 LA로 이주한 니슨은 인상적인 필모그래피 대신 단조로운 연애 경력만 권태롭게 이어나갈 뿐이었다.
1992년, 비로소 전성기가 찾아왔다. 유진 오닐의 작품을 뮤지컬로 옮긴 <안나 크리스티>를 통해 생애 처음으로 뮤지컬에 출연한 니슨은 그 해 토니상을 수상한다. 또한 대배우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의 딸인 나타샤 리차드슨을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가장 빛나는 이력을 마련해준 스티븐 스필버그를 만나게 된다. 무대에서의 연기를 본 스필버그는 낯선 신인을 기용한다는 제작사의 반발을 무릅쓰고 <쉰들러 리스트>(1993)에 그를 캐스팅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는 니슨에게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쉰들러 리스트> 이전까지 나는 영화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영향력을 지녔다고 믿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쉰들러 리스트>를 통해서 생각이 달라졌다. 이 영화와 함께 전세계를 돌면서 이미지의 영향력을 온 몸으로 체감했기 때문이다.”
베니스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마이클 콜린스>(1996)로 연기력을 인정받지만 니슨은 딱히 주연을 고집하지 않았다. 영화사이트 IMDB의 그의 트레이드마크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그의 캐릭터는 종종 일찍 죽거나 영화에서 사라지지만 소년들은 니슨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가르침에 의지하며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간다.” 예년에 비해 근래에 가벼운 영화들을 선택하고 있다는 말도 있지만 최근 <테이큰>(2008)에서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버지의 모습이나 <클로이>(2009)에서 위태로운 듯 끝내 흔들리지 않은 남편의 모습은 니슨의 진중함을 반영하는 작품이란 점에서 남다르지 않다. 단지 그가 지금 보다 여유로운 가치관 속에서 영화적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즐길 준비가 된 것은 아닐까. 그의 전성기는 이제 시작이다.
(Box) 이언 페이슬리, 영감의 원천
“그는 6피트보다 큰 남자가 그저 열변을 토하며 전도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실로 아름다운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연기였다는 게 아니라 그것 또한 대단한 연기이고 마음을 뒤흔든다는 것이다.” 리암 니슨이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건 기이하게도 개신교 지도자인 이언 페이슬리다. 니슨은 자신만큼이나 체격이 큰 페이슬리가 자신과 대조적일 만큼 공격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것에 자신을 비추며 연기적 영감을 얻었다.
아만다 사이프리드는 혜성처럼 등장했다. ‘맘마미아!’를 외칠 만큼 스스로에게도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사이프리드는 ‘깜짝 스타’가 아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사이프리드의 현재는 스스로를 갈고 닦은 노력의 보답이다.
1985년 생인 사이프리드는 1995년, 9살의 나이에 연기에 입문했다. 자신이 거주하던 펜실베니아주 앨렌타운에 있는 시빅 극장에서 연기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11살 때 즈음, 몇몇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고 아역 모델로서 활동을 해나갔다. 그리고 17살까지, 모델로 활동하면서 5년에 걸쳐 꾸준하게 브로드웨이 보이스 트레이닝에게 발성 훈련을 받았다. 이는 훗날 사이프리드가 “어린 나이에 배우로서의 삶을 꿈꾸긴 했지만, 그 꿈이 실현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고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사이프리드는 일찍이 다양한 TV시리즈를 통해서 경력을 수집해 나갔다. 아역 시절 크레디트에 오르지 못했던 작품을 제외하면 그녀에게 공식적인 경력이라고 할만한 작품은 2000년부터 2001년까지 고정 출연했던 TV쇼 <As the world turns>였다. 2002년부터 2003년 사이에는 ABC의 <All my children>에 고정으로 출연했다. 사이프리드의 스크린 데뷔작은 그 다음 해 선보인 <퀸카로 살아남는 법>이다. 이 작품에선 ‘플라스틱’이라 불리는 백치스러운 소녀 카렌을 연기한다. 애초에 사이프리드는 카렌의 퀸카 친구 역할로 오디션에 참여했지만 레이첼 맥아담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하지만 사이프리드를 눈 여겨본 프로듀서는 그녀에게 카렌 역을 제안했다. 데뷔작은 흥행했고,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이후 그녀에게 ‘진정한 의미’를 부여한 작품은 바로 <나인 라이브즈>(2005)였다.
<나인 라이브즈>를 연출한 로드리고 가르시아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콜롬비아의 대문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아들이다. <나인 라이브즈>는 서로 다른 아홉 편의 단편으로 이뤄진 옴니버스 영화다. 아홉 여성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 이 영화는 로빈 라이트 펜, 글렌 클로즈, 홀리 헌터와 같은 ‘진짜’ 여배우들의 리스트만으로도 이목을 집중시킨다. 특히 사이프리드에게 시시 스페이섹(<케리>의 여주인공)과의 만남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처음엔 겁을 먹었지만 더 이상 그녀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너무 환상적이었다. 그녀와 함께 작업할 수 있어 기쁘다.” 사실 <나인 라이브즈>에서 사이프리드는 단 일곱 테이크만에 촬영을 끝냈지만 분명 그녀에겐 남다른 작품이다. 로드리고는 사이프리드를 생각하며 사만다를 구상했고, 로드리고의 제안은 그녀에게 선물과도 같은 영광이었다. 로드리고는 이미 사이프리드의 재능을 직관적으로 깨닫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에 앞서 2004년, 사이프리드는 UPN의 TV시리즈 <베로니카 마스>의 타이틀롤 캐릭터 오디션에 참가한다. 하지만 역할은 크리스틴 벨의 차지였다. 사이프리드는 베로니카의 ‘절친’으로 기억되는 릴리 케인을 연기한다. 일찍이 살해당한 릴리는 베로니카의 기억을 통한 플래시백 시퀀스에서만 등장했지만 첫 시즌에서 미스터리의 핵심적인 단서나 다름없는 역할이었기에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게 된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베로니카 마스>에 출연하는 사이, 사이프리드는 <하우스 M.D>나 <로 앤 오더: 성범죄 전담반> <CSI 라스베가스> 등과 같은 TV시리즈에서 게스트로 등장해 얼굴을 알렸다.
2006년은 사이프리드에게 특별한 해였다. 그 해 사이프리드는 HBO가 새롭게 기획한 TV시리즈 <빅 러브>에 출연하기로 결정한다. 일부다처제를 신봉하는 몰몬교 집안의 가풍에 저항하는 장녀 사라 역할을 맡은 사이프리드의 연기는 2006년 3월 12일 첫 방송 이후로 3시즌에 걸쳐 2009년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2009년 12월, 사이프리드는 HBO와 새롭게 거듭될 시즌에서의 출연 의사를 약속했지만 계획은 2011년까지 미뤄졌다. 당시 그녀는 <맘마미아!>(2008)의 성공 이후, 수많은 영화 제작사들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는 상태였고 스케줄의 조율이 쉽지 않았다. 지난 해 사이프리드는 <300>(2006)과 <왓치맨>(2009)을 연출한 잭 스나이더의 신작 <서커 펀치>(2011)의 히로인 역할을 맡기로 결정했지만 결국 스케줄 문제로 하차해야 했다.
대작 뮤지컬 <맘마미아!>의 영화화 관건은 두 가지였다. 무대 위의 정교한 세트를 대신할 진짜 장관과 ‘아바’의 명곡과 안무를 온 몸으로 소화할 배우들. 무엇보다도 <맘마미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모녀, 도나와 소피를 책임질 배우로 누가 지목될 것인가는 희대의 관심사였다. 그런 의미에서 도나 역의 메릴 스트립이 기대를 부추기는 ‘느낌표’였다면 소피 역의 사이프리드는 의심을 낳는 ‘물음표’였다. 하지만 오디션에서 ‘I Have a Dream’을 완벽하게 소화한 사이프리드를 본 제작진은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리스의 스포라데스 제도를 병풍 삼아 펼쳐진 배우들의 가무는 전 세계적인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오래 전부터 갈고 닦은 목소리로 아바의 명곡을 재현한 사이프리드 역시 ‘기회’를 놓치지 않은 셈이다.
<맘마미아!> 이후 최근 2년 사이, 사이프리드는 무려 네 편의 작품에 이름을 올렸다. 근작 <디어 존>(2010)을 비롯해, 지난 해에는 세 편의 작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내가 한 순간에 등장했다고 말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이 모든 작품이 동시에 공개됐기 때문일 뿐이다.” 이 모든 작업은 2~3개월 간격을 두고 순차적으로 진행됐지만 대중에겐 순서를 다투듯 등장했다. 현재 사이프리드가 얼마나 ‘핫’한 배우인가를 증명하는 사례다.
아톰 에고이안의 <클로이>에서 타이틀롤을 맡은 그녀는 매혹적인 페로몬을 발산한다. 순수하고 발랄한 소녀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 던진다. 심지어 옷조차 벗어버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숨막히는 뒤태를 드러낸 그녀는 단호하게 결심했다. “단지 옷을 벗는 건 어렵지 않지만 베드 신만큼은 대단한 도전이었다.” 그녀는 그 도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클로이>가 리암 니슨과 줄리안 무어라는 걸출한 배우들을 출연시킨 영화임에도 온전히 사이프리드를 위한 영화처럼 보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클로이>는 사이프리드를 감싸고 있던 순수한 소녀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걷어내고 그녀에게 잠재된 성숙한 매력을 과감하게 끌어냈다.
사이프리드는 <디어 존>에서 직접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며 자신이 작사한 노래로 또 한번 가창력을 뽐낸다. 사실 그 연주는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즉흥적인 제안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사실 그 연주는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즉흥적인 제안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그는 내가 무언가를 연주하길 원했고, 나는 그저 내가 아는 곡을 연주했다. 그런데 가사가 평소보다 더 잘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 곡을 스튜디오 녹음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부른 ‘Little House’는 사실 아일랜드의 유명한 싱어송라이터 데미안 라이스의 미완성곡이다. “나는 실제 데미안 라이스가 사는 곳에서 지난 가을과 이번 4월에 함께 작업했다. 우리는 <디어 존>을 위한 노래를 결코 끝내지 못했지만 나는 데미안 라이스와의 작업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차기작 <레터 투 줄리엣>(2010)의 개봉을 기다리는 사이프리드는 현재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원작을 영화화 하는 <A Woman of No Importance>(2011)와 글렌 클로즈와 올랜도 블룸이 출연한 브로드웨이 연극 <The Singular Life of Albert Nobbs>를 영화화 한 로드리고의 신작 <Albert Nobbs>(2011)를 비롯해 이미 세 작품의 출연을 결정지었다. 내년부터 시작될 <빅 러브>의 새로운 시즌에도 출연을 재개한다. “지난 해에 내가 볼 수 있었던 대본의 대부분은 나쁜 것이었지만 그 중에 몇몇 괜찮은 것이 있었다면 올해에는 정말 훌륭한 몇몇 대본들 사이에 수많은 나쁜 대본들이 들어왔었다. 만약 당신이 정말 훌륭한 대본을 받았거나 그런 제의가 들어오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제법 괜찮은 위치에 서 있는 셈이다.” 스스로의 말처럼, 그녀는 지금 제법 좋은 위치에 서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자신의 가능성을 만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