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공항을 배회하는 남자는 평범한 행색과 달리 눈초리가 심상찮다. 곧 한 여자에게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지던 남자는 곧 접근을 시도한다. 두 번에 걸친 부딪힘은 남녀를 동상이몽의 비행으로 유도하고, 두 사람의 우연적인 혹은 필연적인 인연은 좀처럼 가늠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 안에서 범상치 않은 관계로 발전을 거듭해나간다.
<나잇 & 데이>는 스파이물과 액션, 로맨틱 코미디 등 기존의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의 클리셰들로 총공세를 펼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오락물이다. 그만큼 <나잇 & 데이>는 기존의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의 결핍을 고스란히 떠안은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실수라기 보단 고의적인 의도에 가깝다. 공항 한가운데서 두서 없이 출발하는 오프닝 이후로 급행열차처럼 달려나가는 <나잇 & 데이>의 서사는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쾌감을 상승시키기 위해 마련됐던 수많은 오락영화들의 전략들을 밀고 나가기 위한 레일처럼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나잇 & 데이>는 지능이 떨어지는 할리우드 오락영화들의 야심에 갇힌 영화가 아니라 그 야심들로부터 형성된 어떤 전형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영화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스파이물에서 시작해 로맨틱 코미디로 매듭을 짓는 <나잇 & 데이>는 시종일관 액션과 유머로 범벅이 된 혼합장르물로서 스케일을 자랑하는 작품이다. 오락적 묘미를 극대화시키는 볼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가운데 대단한 물량공세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나잇 & 데이>가 오락이라는 핵심적인 목표를 겨냥할 수 있는 건 영화의 모든 풍경을 배회하는 두 인물로부터 비롯된다. <나잇 & 데이>의 스케일이 영화의 충분조건에 해당된다면 로이 밀러(톰 크루즈)와 준 헤이븐스(카메론 디아즈)는 이 영화의 가능성을 책임지는 필요조건 그 자체다.
<나잇 & 데이>의 로이 밀러(톰 크루즈)는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과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 헌트로부터 고독함과 진지함을 온전히 삭제한 뒤, 그 빈 공간에 낙관과 긍정을 채워넣은 듯한 캐릭터다. 그리고 그 상대역인 준 헤이븐스(카메론 디아즈)는 마치 기억 상실에 걸려 자신의 능력을 잊어버린 <미녀 삼총사>의 나탈리 쿡처럼 보인다. 두 캐릭터는 <나잇 & 데이>의 쾌감을 발생시키는 원천이자 기폭제다. 음모의 중심에 놓인 스파이와 이에 휘말려 동행하게 된 여인은 생명을 위협하는 적들과 긴박한 추격전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감정적 교감을 이뤄나간다. 두 캐릭터가 이뤄내는 사연의 형태보다도 두 캐릭터가 사연의 형태 속에 어떻게 놓여있는가가 먼저 발견된다. 두 캐릭터는 영화의 단점을 가리는 위장막이자 장점을 부각시키는 방점이나 다름없다.
결과적으로 <나잇 & 데이>를 이루는 대부분의 요소란 과거로의 회귀에 가까우며 이는 흔히 말하는 복고의 의미에 가까운 가치를 품고 있다. 사실 두 캐릭터의 만남으로부토 얻어지는 사연들의 대부분은 낭비적이거나 무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잇 & 데이>는 좀 더 천연덕스럽고 뻔뻔한 방식으로서 그 낭비적인 신들을 제 입맛에 맞게 버무린다. 중간중간 몽타주신을 이용해서 긴 설득이 필요할 만한 서사를 일거에 압축해버린다거나 세계 각지를 도는 로케이션은 어떤 액션들을 연출하기 좋은 병풍처럼 나열된다. 백치스럽지만 명확하고, 단순하지만 간단하다. <나잇 & 데이>는 명확하게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오락영화다. 빈 구석이 눈에 띄지만 그 빈 공간마저도 하나의 전략적인 형태를 띄고 있는 영악한 작품인 셈이다. 백치와 백치미가 다르듯, 멍청한 척하는 것도 일종의 전략이다.
모든 사람은 성장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성숙해지는 건 아니다. 성장이 신체적인 발육과 성징을 통해 이뤄지는 선천적 변이라면 성숙이란 사회적인 체계를 통한 교육과 학습으로서 완성되는 후천적 변화다. 아이들은 어른을 동경한다. 성장이 자신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고, 스스로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 성장 너머로 자신의 꿈이 자연스레 안착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어른들은 시간을 뒤돌아본다. 때때로 아이였던 지난 날을, 좀 더 명확하게는 그 시절의 꿈을 그리워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유년 시절 꿈꾸던 미래의 청사진과 자신의 현실 사이의 거리를 체감하게 되는 일이다. 성장만으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해지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되레 그 성장과 함께 그 꿈들이 그 시절에 머물러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어른이 되는 길이라며 현실을 합리화시킨다.
성장이 개인적 영역에서의 완성이라면 성숙은 그 개인과 연관된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완성에 가깝다. 개개인의 성숙은 사회를, 그리고 세계를 성숙시킨다. 성숙은 개인의 자질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 주변의 도움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관계적 변화다. 성장이 성숙을 동반할 때 진짜 어른이 된다. 성숙한 어른들의 틈바구니에서 아이들은 보다 성숙해진다. 그리고 성숙한 교육이 이뤄진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유산처럼 물려주는 어른들의 아집이나 자신이 타협한 현실을 당연한 것이라 충고하는 어른들의 편견은 때로 교육적이란 말로 남용된다. 성숙한 교육은 성숙한 개인과 사회와 세계를 이룬다.
17세 소녀 제니(캐리 멀리건)는 명민하다. 아버지로부터 ‘옥스포드’ 진학을 강요당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학교에서도 옥스포드 진학을 기대할 만큼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다. 하지만 제니는 우등생이기 이전에 호기심 많은 소녀다. 옥스포드 진학의 유일한 걸림돌인 라틴어 공부보다도 첼로 연주와 샹송에 관심이 많으며 후에 프랑스 파리에 꼭 가보리라 다짐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시시하다 느껴질 만큼 평범한 일상을 흔드는 계기가 생긴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던 날, 첼로를 든 채 비를 맞고 서 있던 제니에게 낯선 중년 남자가 호의를 베푼다. 데이빗(피터 사스가드)의 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온 제니는 그에게 미묘한 호감을 느끼고 그와 재회한 뒤, 자신이 꿈꿔왔던 혹은 예감하지 못했던 짜릿한 경험을 거듭해 나간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삶 가운데서 느끼지 못했던 희열을 만끽하고, 점차 지난 일상들이 시시하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린 바버가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썼다는 12페이지 분량의 회고록을 각색한 닉 혼비의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한 <언 애듀케이션>은 재기발랄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언 애듀케이션>은 17세 소녀가 우연히 찾아온 중년 남자와의 로맨스를 거치며 보다 성숙해지는 성장담을 그린다. 제 삶에 만족할 수 없었던 소녀는 우연히 찾아온 인연을 통해 자신의 테두리 내에서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낭만과 자유의 일탈을 겪어 나가고 그 특별한 경험과 짜릿한 감정에 도취되어 그것이 자신의 이상이라 믿게 된다. 하지만 뒤늦게 그것이 가혹한 착각이자 환상이었음을 깨닫는 소녀는이를 통해 자신에게 주어졌던 기회의 가치가 얼마나 큰 가능성을 이뤄줄 수 있는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언 애듀케이션>은 ‘교육’이라는 본질을 관통하면서도 전형적인 교육관에서 벗어난 영화다. 경험을 통해 얻어진 성찰을 중시하면서도 본질적인 교육적 제도의 가치를 보다 돋보이게 설득한다. 일탈은 소녀에게 잊을 수 없는 감정적 생채기를 안겨주지만 이는 보다 단단하게 아물어 소녀의 성장을 수식하고 성숙으로 인도한다.
그 성장담은 <언 애듀케이션 An Education>이라는 제목이 직시하는 것처럼, ‘교육’이라는 명제에 대한 철학을 이끌어내는 은유적 구실을 하고 있다. 제니에게 주변인의 기대가 짐이 되는 건 옥스포드 진학의 가치를 설득해줘야 할 어른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탓이다. 기대는 버겁고 강요는 거세다. 제니에게 옥스포드 진학이란 드넓은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지 못할 현실로부터 달아날 기회를 마련해주는 기회일 뿐이다. 제니에게 얹혀진 어른들의 기대감은 제니가 품은 가능성에서 기인한다. 부모의 기대도, 선생님의 충고도, 그녀의 기대할만한 가능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태도나 다름없다. 문제는 그 가능성을 제대로 설득시켜 줄 어른의 충고가 부재하다는 것. 그 역할을 대신하는 건 경험이다. 경험은 좋은 교훈이 된다. 제니는 자신에게 찾아온 달콤한 경험을 만끽하고 안주하고, 이를 통해 자신이 스스로 이뤄내야 한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을 손쉽게 포기한다. 하지만 이면의 진실을 마주한 뒤, 자신의 선택이 이룬 비참한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음을 깨닫는 제니에게 다시 기회를 부여하는 건 교육이다. 학교를 떠나 옥스포드에 진학하지 않고도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혹은 그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제니는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뒤늦게 깨닫는다. 미성숙한 제자의 얕은 확신을 걱정하던 스승은 제자의 절망을 책망하지 않으며 그 경험이 남긴 교훈을 쓰다듬는다. <언 애듀케이션>은 교육이란 제 가치를 스스로 깨닫게 만들고, 그 대열에서 이탈한 이들의 시행착오마저 돌볼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고 설득한다. “인생에 지름길은 없다는 걸 알았다”는 제니는 자신이 멸시하던 스승에게 뒤늦게 도움을 청하고, 스승은 “그 말을 기다렸다”며 제자를 맞이한다. 달콤했던 일탈의 경험은 끝내 절망적인 파국으로 갈무리되지만 어린 소녀의 인생은 파국으로 멈추지 않는다. 제니의 말처럼 인생에 지름길은 없다. 막다른 길도 없다. 다만 자신의 인생이 지름길을 내달리고 있다고, 혹은 막다른 길로 내몰렸다는 믿음이 있을 뿐이다. 필요한 건 설득의 힘이다. 성공을 위해 매달려야 할 가치가 아니라, 보다 폭넓은 인생의 가능성을 꽃피우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의 시행착오마저도 헛되지 않았다는 것. 교육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출산을 앞두고 산통에 시달리는 산모의 얼굴엔 만감이 교차한다. 휠체어를 탄 채 분만실로 향하는 산모는 당장 맞이한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시에 곧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는 마음에 설렘이 가득하다. 하지만 곧 잉태의 축복은 사산의 저주로 돌변한다. 갑작스런 출혈과 함께 유산을 알리던 의사는 곧이어 태아의 주검을 꺼내기 위한 절제술에 돌입한다. 비명을 지르는 아내 앞으로 뒤늦게 분만실에 들어온 탓에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남편이 캠코더를 들이민다. 순간 의사가 말한다. “아이가 살아있어요.”온 몸에 피에 젖은 아이가 아내의 얼굴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다시 한번 날카로운 비명으로 분만실을 뒤흔들던 아내는 비로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다.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난다.
아내의 악몽에서 시작되는 <오펀: 천사의 비밀>(이하, <오펀>)은 진짜 악몽 같은 현실을 맞이하게 되는 한 가정의 비극을 담보로 한 스릴러다. 세 번째 아이를 유산한 부부가 그 고통을 극복하고자 영민하고 착한 여자아이를 입양하지만 딸이 된 입양 소녀는 어느 순간부터 괴물 같은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점차 의심에 빠져드는 아내, 이를 부인하는 남편은 지난 날의 비화를 꺼내 들고 갈등에 빠져들며 아이가 계획한 파국으로 발을 담근다. 친절한 이방인의 유입이 갈등을 부르고 감춰진 속내가 파국을 모색하는 과정은 어느 스릴러 영화에서나 마주할 수 있는 주요한 설정 가운데 하나란 점에서 <오펀>이 활용하는 서스펜스의 장치들은 딱히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없다.
악마적 영악함을 지닌 아동 캐릭터로부터 강력하게 발산되는 서스펜스는 <오멘>과 같은 오컬트 무비의 기시감을 부른다. 동시에 입양아가 평화로운 가정을 뒤흔든다는 설정은 <케이프 피어>와 같은 가족 지키기 스릴러에서 활용하던 전술과 유사한 것이다. <오펀>은 ‘낯선 자의 친절을 경계하라’는 스릴러적 규칙에 입각한 캐릭터 장르물이다. <오펀>이 새 술을 담은 부대는 아니란 의미다. 하지만 <오펀>은 뛰어난 응용력을 선보이는 호러이자 스릴러다. 사악한 본능을 고스란히 선보이는 아동 캐릭터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악마적 매력을 선사하며 이는 <오펀>이 곳곳에 매복해둔 장치들과 더불어 장르적 착시를 이룬다. 순진무구한 아동 캐릭터를 악의 근본처럼 묘사하는 동시에 호러적인 연출방식을 더하며 전략적으로 초자연적 예감을 부른다.
캐릭터의 완성도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만큼 어린 배우의 영민한 연기가 관건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오펀>에서 에스터를 연기하는 이사멜 펄먼의 연기는 높게 평가 받을 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에스터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노골적인 본심을 드러내는 냉정한 눈빛으로 돌변할 때마다 긴장감이 새어 나오고 이는 서사의 진행과 함께 두텁게 축적되며 영화 안에서 지속적인 서스펜스를 구축한다. 또한 <오펀>은 순진무구한 아동 캐릭터를 절대악의 대상에 국한시키지 않고 아동 특유의 유약한 심리를 이끌어냄으로써 궁극적인 장르적 목적성에 접근한다. 이기적인 아동의 심리를 전시함으로써 절대적인 신비에 기대지 않고 이성적인 병리학으로서 범죄적 논리를 설득시킨다.
말미에 다다라 밝혀지는 진실은 사실 <오펀>이 야기시킨 모든 서사적 이해를 온전히 전복시키는 반전 그 자체다. 아동 캐릭터라는 정보를 통해 이해되던 심리적 구조를 일거에 전복시키는 동시에 스토리의 흐름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예측할 수 없는 흐름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반전으로서의 쾌감을 부른다. 물론 추격과 난투로 점철되는 후반부의 단순화된 흐름은 심리적 긴장감을 유지하던 그 이전까지의 흐름과 배반적인 감상을 부르지만 그 상황을 통한 절대적인 긴장감이 발휘된다는 점에서 효과적인 서스펜스를 구가하고 있다고 인정할만하다. 정서적 긴장감의 양태가 달라질 뿐, 흐름의 양상은 훼손되지 않으며 서스펜스의 절대량은 보존되거나 더욱 상승한다.
물론 아동 캐릭터를, 그것도 입양아를 악의 이미지로 치환하고 공포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일부 특수한 계층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착취하고 있다는 불순함이 감지되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장르적 완성도를 염두에 두자면 감안할 수 있는 성공적 투자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정도의 의도적인 필요악쯤은 충분히 감안하고 장르적 성취를 즐기는 것이 타당하다. 그만큼 <오펀>은 인상적인 캐릭터와 흥미로운 스토리텔링, 그리고 효과적인 연출력까지, 수준 이상의 만족감을 부르는 스릴러다.
미소 너머로 본심을 가린 채 가족을 위협하는 이방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악마적 캐릭터, <오펀: 천사의 비밀>은 기시감을 부르는 영화다. <오멘>과 같은 악마적 아동이 등장하는 오컬트를 비롯해서 <케이프 피어>와 같은 가족지키기 스릴러까지, <오펀>이 흡수한 장르적 전례는 차고 넘친다. <오펀>이 영리한 영화라 말할 수 있는 건 그 덕분이다. <오펀>은 새로운 전형이라기 보단 뛰어난 응용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악한 유아적 캐릭터를 통해 장르적 착시를 발생시킨 뒤, 관객의 호기심과 긴장감을 동시에 유발한다. 무엇보다도 에스터의 천진난만한 미소가 점차 본심을 드러내는 순간마다 연출되는 긴장감이 서사의 진행과 함께 두텁게 쌓여나간다. 결과적으로 <오펀>이 이룬 장르적 성취의 팔 할은 절대적으로 에스터를 연기하는 이사멜 펄먼의 연기력에 얹혀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말부에 다다라 내던져진 반전 역시 호불호의 차이를 발생시킬 가능성은 존재하나 이야기의 흐름 안에서 적절한 흐름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확실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말미에 다다라 난투극으로 변질되는 양상이 영화를 단순화시킨다는 인상도 들지만 역시나 그 순간조차도 절대적인 긴장감이 발생한다. 인상적인 캐릭터와 흥미로운 스토리텔링, 그리고 효과적인 연출력까지, 수준 이상의 만족감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