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가 지나고 있다. 평생 기억에서 사라지지 못할 만큼 침통하면서도 깊게 내려앉은 한 주가 가고 있다. 사람을 하나 보내고 있다. 눈물과 애도 속에서, 때때로 분노하는 언성과 담담한 눈빛이 교차하는 세상은 모질고도 평온했다. 시청 앞과 서울역을 비롯해 곳곳에 점처럼 놓인 분향소의 풍경들이 따스하듯 서러웠다. 애처로움을 가릴 수 없어 때론 뭉클했지만 타오르는 마음 한 곳을 추스를 곳 없어 뜨겁고 매웠다.
그 죽음이 무엇을 남겼는가, 에 대한 논의는 급하지 않아도 좋다. 일단은 상처를 위로할 때다. 하지만 이 슬픔이 한데 모여 발전적인 에너지를 구축할 수 있다면 좋겠다. 고인에 대한 비통한 심정이 스스로에 대한 연민을 넘어 새로운 각성의 계기로 나아간다면 더더욱 좋겠다. 고인의 뜻대로 누군가를 원망하기보다도 스스로를 되새길 수 있어야 한다. 어느 한 인간의 진심을 능욕하기 쉬운 우리 사회의 냉소적 잔인함을 되새겨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해 외면했던 사회적 관심을 회복해야 한다. 정작 그 먹고 살기 위한 무관심이 스스로의 생계를 쥐고 흔드는 거대한 딜레마임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더불어 사는 사회를 꿈꾸던 정치인이자 타인에게 관대하던 한 인간의 죽음은 살아 숨쉬는 이의 마음을 부끄럽게 만든다. 그 누구보다도 나은 사람이었다. 빈 자리에서 새어나오는 채무의 공기가 산 사람의 폐를 무겁게 채운다. 우리가 그를 죽인 것이란 죄의식이 은연 중에 뒤섞여 산 사람을 흔든다. 고인에 대한 애도만큼이나 스스로에 대한 위로가 절실하다. 그렇다고 어느 한 사람을 탓하지 말자. 우린 아직 갈 길이 멀다. 아직 늦지 않았다. 분노와 저주로 염세하는 건 고인의 유지를 받드는 길이 아니다. 우린 이제부터 갈 길이 먼 사람들이다. 염치 없는 자는 칼과 방패로 스스로를 막아서지만 양심을 아는 자는 제 한 몸으로도 칼과 방패에 맞선다. 세상을 비극으로 만드는 건 어느 한 사람의 지독한 야비함이 아니라 그 야비함을 방조하고 스스로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멸망시키는 담담함이다.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따위로 세상을 멸시하다 담담히 주저앉지 말자. 자조하다 체념하고 냉랭해지기 보단 고민하고 일어서며 뜨겁게 내뱉으라. 당신의 뜨거운 마음은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 이상을 현실로 억압하지 마라. 그 이상이 언젠가 당신의, 혹은 당신의 아들, 딸의 현실이 될 것이다. 당신의 뜨거운 양심으로 세상을 덥혀라. 세상에 눈감지 말라. 눈을 뜨고 깨어있으라. 상록수처럼 푸르른 양심으로 살아있으라. 그러면 우린 될 거야.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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