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MP3가 식상해졌다. LP로 음악을 듣고 싶어졌다. 턴테이블이 갖고 싶어졌다. 21세기에 말이다.
일렉트로니카 듀오 다프트 펑크가 복고적인 신시사이저 사운드로의 회귀를 표방하며 올해 발표한 신보는 LP로도 발매됐다. 이 LP는 미국에서만 30만장이 넘게 판매됐다. 뮤즈, 레이디 가가, 비디 아이, 마룬 5, 데이비드 보위, 메탈리카 등 현재 전세계 음악산업의 최전선에서 언급되는 현재진행형의 뮤지션들은 끊임없이 LP 제작과 발매에 공을 들여왔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선 끊임없이 LP가 제작됐고, 스테디셀러와 베스트셀러가 공존했다. 한편 지난 4월 10년 만에 정규 앨범 19집 <Hello>를 발표한 조용필의 신보는 LP로도 발매됐다. 그런데 여기서 다프트 펑크의 LP와 조용필의 LP 사이에 어떤 흐름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믿겠는가?
거짓말 같은 이야기지만 지금 LP는 전세계 음악산업의 새로운 화두다. 미국의 음반판매량을 집계하는 닐슨 사운드스캔(Nielsen SoundScan)에 따르면 지난 2009년 미국 내에서 LP는 25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1991년 이래로 최대 수치를 기록했고, 매년마다 판매량을 갱신하며 지난해에만 460만장이 판매됐다. 2008년부터 시작된 ‘레코드 스토어 데이’가 끼친 영향력도 적지 않다. 매년 4월 셋째 주 토요일에 미국 전역의 독립 레코드점들이 참여하는 이 행사엔 특별한 음악 관련 아이템이나 희귀 LP들이 판매되고 다양한 뮤지션들의 공연이나 이벤트가 개최된다. 이를 벤치마킹한 것이 바로 한국의 레코드페어다.
올해로 3회를 맞이한 레코드페어는 LP 리스너들을 위한 축제다. 올해까지 1만 명 이상의 관객이 레코드페어를 찾았고, 매년마다 관객이 늘어나는 추세다. 대부분은 LP를 제대로 접한 적도 없는 2~30대라고 한다. 이는 현재 국내에서의 LP 수요계층을 막연하게 짐작할 수 있는 바로미터다. 올해 레코드페어에선 이상은의 <공무도하가>를 비롯해서 미선이, 이이언, 조원선 등 몇몇 뮤지션의 명반들을 LP로 한정수량 재발매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런 기획이 가능해진 건 국내에 8년 만에 설립된 LP 공장, LP 팩토리 덕분이다. LP 팩토리의 대표 이길용은 공연기획사에서 다양한 해외 아티스트들의 내한공연을 주관하던 중, 그 아티스트들이 LP로도 앨범을 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장성을 파악했다. 장기적으로 국내에서의 시장 개척 가능성을 타진했고, 개인적인 애정을 더한 결과 LP 팩토리의 설립이 이어졌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한국을 덮친 것마냥 미국에서의 LP 시장 확대가 한국의 LP 부활을 부추기는 것만 같다. 조용필의 <Hello>가 LP로 제작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물론 아직 국내에서의 LP 제작은 미지근한 수준이다.
국내에서 싱글 앨범이나 미니 앨범 발매가 일반화된 건 음악시장이 음원 다운로드 위주의 구조로 재편됐기 때문이다. 곡 단위로 음악을 소비하는 시장에서 자본과 시간을 투자해서 다량의 곡을 담은 정규앨범을 발매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국내 실정에서 CD에 비해서 단가가 10배까지 치솟는 LP로 싱글 앨범이나 미니 앨범을 발매할 이유는 더욱 없다. 그만큼 LP 제작 기회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LP에 대한 수요는 확실히 증가하고 있다. 휴대용 턴테이블인 ‘아리아 판 USB 턴테이블’을 수입한 ‘스카이디지탈’의 마케팅 담당자는 지난 3개월 사이에 이 제품이 2천여 대가 판매됐다고 전했다. 스카이디지탈은 컴퓨터 주변 기기를 판매하는 회사였지만 해외에서의 턴테이블 시장이 활성화되는 걸 눈여겨보고 직접 수입과 유통을 계획했다. 7만원대의 저렴한 가격대를 지닌 만큼 들을 만큼 들어본 이들보단 LP에 막 입문하는 이들에게 적합한 제품이다. 무엇보다도 LP음을 MP3 음원으로 변환시키는 기능이 있다는 점에서 MP3 사용이 익숙한 젊은 세대에겐 보다 매력적이었고, 결국 먹혔다. LP에 대한 젊은 층의 수요가 짐작되는 대목이다.
LP를 사용한 경험이 없는 젊은 리스너들은 LP를 새로운 매체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음반사들은 그들이 지갑을 열도록 적극적으로 구애한다. 요즘 해외에서 발매되는 LP 케이스엔 MP3 다운로드 쿠폰이나 CD가 동봉됐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CD를 사더라도 파일 형태의 음원으로 변환해서 MP3 플레이어에 담아 듣는 이들이 음원 다운로드 대신 굳이 CD를 사는 건 그 물리적인 형태를 소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CD보단 보다 크고 선명한 커버 이미지를 지닌 LP가 부르는 소유욕이 더 클 수밖에 없다. 게다가 CD나 음원까지 제공한다니 혹할 수밖에 없다.
미국이나 유럽 심지어 일본에 비해서 아직 국내 LP 시장의 성장세는 더딘 편이다. 하지만 수요는 분명 존재한다. 서울의 한 백화점에선 한 달에 2대 이상 판매가 어려웠던 턴테이블이 조용필의 신보가 LP로 출시된 이후로 한 달에 20대 이상 판매됐다고 한다. 결국 공급의 문제다. LP를 갖고자 하는 욕망은 음악을 소유하는 재미가 어떤 것이었는지 다시 깨닫게 만드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음원을 아무리 채워 넣어도 손바닥만한 MP3 플레이어가 결코 충족시켜줄 수 없었던 허기에 대한 자각. 하지만 LP의 재조명이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된 회귀적인 현상은 아닐 거다. 오히려 전진이라 할만하다. 디지털 시스템의 편의가 결코 채워줄 수 없는 정서적 포만감에 대한 경험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위한 자산이다. 물론 LP를 음악의 미래라고 말할 순 없을 거다. 하지만 확실한 건 LP가 지금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현재진행형의 음악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