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바도르 달리는 스스로를 천재라고 지칭했다. 그는 사회부적응자처럼 행동하면서도 자신을 천재라고 언급하는데 있어서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었다. 그의 기괴한 행적은 다양한 기록으로 남아있으며 스스로도 이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그는 현재 천재로 인정받는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전해진다. 달리의 기괴한 행위만큼이나 기괴한 그의 그림들이 가늠할 수 없는 그의 천재성을 대변한다. 그의 기괴한 행위는 그의 죽음과 함께 잊혀져 갔지만 그의 그림만큼은 여전히 현세에서 유효한 가치를 이어나간다.
<리틀 애쉬: 달리가 사랑한 그림>(이하, <리틀 애쉬>)는 살바도르 달리(로버트 패틴슨)에 관한 전기적 드라마이자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달리의 가려진 삶을 조명하는 작품이다. 시대상과 실존인물을 재현하는 전기적 드라마의 성격이 기본적인 극의 자질을 이루는 동시에 퀴어 멜로의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는 <리틀 애쉬>는 살바도르 살리가 죽기 직전 고백했다는 스페인의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하비에르 벨트란)와의 은밀한 로맨스를 서사의 줄기로 이어나간다. 독재와 혁명이라는 격동의 현대사를 지닌 스페인의 시대상 안에서 살아나가는 명사들의 삶을 지켜본다는 의미와 함께 그 삶의 가려진 단면을 발췌하고 드러낸다는 점에서 <리틀 애쉬>의 기획적 목표는 뚜렷하다.
살바도르 달리보다도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중심으로 두 사람의 관계와 그들이 놓인 시대상을 곁들이듯 묘사하는 <리틀 애쉬>는 인물의 삶을 관통하기 보단 그 이색적인 관계의 지속을 곁눈질하듯 관찰한다. 동성애자였던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살바도르 달리에게 호감을 느낀 후, 지속적인 관계를 이뤄 온 두 사람의 일대기가 서사의 줄기를 이룬다. 살바도르 달리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오가던 시점의 중심은 점차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에게 할애되기 시작하며 점차적으로 <리틀 애쉬>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바라본 살바도르 달리의 이미지를 곁들이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일대기적 전기 성격을 띠게 된다. 그 서사적 진전엔 일관성이 부족하다. 인물의 관계와 시대적 상황을 오가며 어느 곳에 방점을 찍어내지 못하는 형상을 연출한다.
시대상에 대한 묘사나 해석은 탁월한 편이라 말하기 어렵고,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방식에 대한 특별한 감상도 도모되기 어렵다. 단지 특이한 인물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캐릭터들의 인상에선 어떤 특별한 감흥을 얻어낼만한 지점이 드물다. 단지 그것이 그 인물에 대한 정통적인 관점을 배제한 관계 묘사에 치중한 결과라 할지라도 인물에 대한 인상적인 감상이 도모되지 않는다는 건 분명 전기영화로서 아쉬운 지점이다. 시대나 인물에 대한 묘사나 해석 어느 측면에서도 딱히 인상적인 면모를 발견하기 어렵다. <리틀 애쉬>는 수많은 실존인물들을 등장시킬 뿐, 그 인물들에 대한 흥미를 돋우지 못하는 전기영화인 셈이다. 마치 실존주의적 과거를 초현실주의적 스크린이 따라잡지 못하는 형국이랄까.
스페인의 위대한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훗날 히치콕의 추앙을 얻는 거장 루시스 브뉘엘(매튜 맥널피), 그리고 천재 화가로 꼽히는 살바도르 달리까지, 실존인물을 재현하는 작품 안에서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단연 눈에 띄는 볼거리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하이틴 이미지를 벗어 던진 로버트 패틴슨의 광기 어린 연기는 그 연기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이색적이다. 때때로 캐릭터의 흐름을 설득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경도적인 연기를 펼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호연이라 평하긴 망설여지지만 열연으로서의 성과는 인정받을만하다. 동시에 배역만으로도 자신의 한계에서 벗어나고자 한 선택의 의지가 엿보인다는 점에서 보다 인상적이다. 때때로 흉내와 같은 기능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상은 아쉽지만 그 시도는 인정할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