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번째 영화, 한국영화계에서 임권택 감독의 위치는 숫자만으로도 명확해진다. 하지만 능선처럼 굽이진 대한민국의 근대사를 돌아온 구도자의 발걸음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영화를 꿈꾸고 있다.
임권택은 영화를 '먹고 살기 위해서'시작했다. 18살의 나이에 기차값만 들고 홀홀단신으로 고향을 등진 소년은 부산에서 노가다판을 전전하며 밥벌이를 했다. 그러다가 인연을 맺게 된 군화장사꾼들이 남긴 군화로 장사판에 뛰어든다. 그리고 서울로 상경한 군화장사꾼들 가운데 영화일을 시작하게 된 몇몇 사람이 임권택을 찾았다. 오랜 전란을 지난 사람들이 황폐해진 마음을 영화로 달래던 시기였고, 영화는 좋은 돈벌이가 됐다. 그렇게 임권택은 또 한번 먹고 살기 위해서 서울행을 택한다.
잡역부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다 연출부 생활을 거쳐 비로소 감독에 데뷔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7년이었다. 1962년, 26살의 나이로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발표하며 첫 삽을 뜬 임권택은 그 뒤로 10년여 동안 50편에 달하는 영화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에 대해 누누이 부끄럽다고 고백하며 51번째 연출작 <잡초>(1973)를 자신의 두 번째 데뷔작이라 말해왔다. “내 자신이 나이 들어가면서 삶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가 되니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단 말이오. 미국 영화의 아류나 다름없는 영화들을 찍어대다가 점점 이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생계의 수단으로서 영화를 생산해내며 감독이란 직업을 택했던 그가 비로소 자기 세계를 추구하는 예술인의 삶을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로도 부침이 끝난 건 아니었다. “군사정권 때 반공영화, 생활영화를 많이 찍었는데 정권이 원하는 소재를 영화에 담아내면서 마음 속의 걸림 같은 소리가 들렸지요. 정권이 원하는 국책의 지향점을 영화에 담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를 살았을 때의 이야기에요.” 그는 한국 근대사 위로 풍랑처럼 떠밀려 가던 국내 영화계 위에서 자신의 돛을 펴고 표류하듯 나아갔다. 물론 시대의 큰 흐름에서 완벽하게 이탈할 수는 없었지만 <족보>(1978), <짝코>(1980) 등과 같이 훗날 재평가된 수작들이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건 중요한 대목이다. 그리고 한국영화 최초로 베를린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만다라>(1981)는 구도자의 세계관을 지닌 임권택의 내면을 비춘 첫 작품이었다. 이는 한국영화가 세계에 알려지는데 큰 공헌을 남긴 작품으로도 일컬어진다. 국내에서는 에로영화 취급을 받았지만 <씨받이>(1986)의 주연을 맡았던 강수연이 베니스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도 발생했다. 승려들의 반발로 촬영 도중 제작이 무산된 <비구니>의 아픔이 있었지만 임권택은 <아다다>(1987)나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로 구도자의 길을 보다 깊게 모색했다.
<장군의 아들>(1990)로 흥행감독의 대열에 올라선 임권택에게 90년대에서 가장 중요한 이력이 된 건 아무래도 <서편제>(1993)였다. 백만 관객을 동원하며 당대의 ‘국민영화’가 된 이 작품은 그보다도 임권택에게 보다 확실한 길을 열어준 작품이란 점에서 보다 중요하다. <서편제>보다 앞서서 제작됐던 <태백산맥>(1994)이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무산됐다가 문민정부의 출범을 통해 가능해졌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과거 일본 유학 중에 좌익사상을 익혀서 집에 돌아온 삼촌으로 인해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꼴을 봤던 그에게 이는 큰 시련이었다. “중요한 건 실제로 자기가 인생을 살면서 쌓아가는 직감적인 삶의 체험이고, 또 그런 삶 속에서 생을 바라보는 관점에 철이 들어야 한다는 것이오.” <서편제>는 험난한 근대사의 굴곡을 지나오며 영화적 수난을 감내했던 임권택의 깨달음을 대변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서편제>의 형제나 다름없는 <천년학>(2006)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퇴색되지 않는 장인의 면모를 확실하게 증명한다. 빛을 잃고 득음하게 된 여인의 소리가 논밭으로 변한 포구에 물을 채우고 비상학을 날리는 신비의 선경, 이는 <취화선>(2002)의 칸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만큼이나 값진, 유산과 같은 풍경이다.
“내가 99번째 영화까지 고만고만한 역량을 가지고 찍어왔는데 100번째 영화라 하여 그전보다 더 나은 괜찮은 영화를 만든다는 복안이 있을 턱이 없지 말이오. 그런데 어딜 나가도 100번째라 하니 부담스럽지 않겠소.” 그는 ‘100번째’라는 무거운 기념비를 빨리 내려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임권택 영화다운 것에서 벗어나는 작업”이었던 <달빛 길어올리기>(2011)는 어쩌면 그의 세 번째 데뷔작이라 불려도 좋을 작품이다. 처음으로 디지털 카메라 촬영을 시도한 <달빛 길어올리기>는 한지를 소재로 임권택이 완성한 또 하나의 ‘우리 문화 유산 발굴기’다. 하지만 극영화 속에 소재를 녹인 전작들과 달리 소재에 대한 기록성을 보다 중시한 다큐멘터리적인 요소가 차별성을 이룬다. “나 몰라라 하기에는 너무 소중한 것들이니까요. 그 시대적인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후대의 어떤 이가 나서서 우리뿐만이 아닌 세계 인류에게 다가가게 만드는 일이 생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고. 누군가가 이를 하고 있으면 나도 그만둘 수 있지 않겠소.”
그는 영화를 통해 삶을 꾸려왔다. 그리고 어느 날 감독으로서의 길을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50년 동안 감독으로서 굽이진 세상을 흘러왔다. “찍지 못하는 것보다도, 폐가 될까 걱정이지요. 가령 내가 영화를 찍다가 완성을 못하고 죽거나 갑자기 치매에 걸린다면 감독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임권택은 아직도 생의 끝보다 감독으로서의 끝을 고민한다. 거장, 장인, 거목, 그 거창한 수사들보다도 그에게 어울리는 건 현재형의 시제다. 그는 여전히 마르지 않고 흐르는 강물이다. 현역감독, 임권택은 여전히 영화를 찍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