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이른 시간에 잠이 들었다가 새벽녘에 깼다.
마음이 가라앉았다. 심장을 옥죄던 감정이 느슨해졌다. 눈물도 나지 않는다.
짐을 내려놓는 기분으로 그 아이를 놓고 왔다.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기니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도 조금 희미해졌다.
전날, 그 아이를 특별하게 올려놨던 모든 것들을 정리했다. 지우고, 내리고, 접었다. 아팠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일인걸. 하나하나 고이 접어 넣었다.
지금까지 그 아이와 함께 봤던 영화나 공연, 전시회 티켓을 모았었다. 사진만큼이나 참 많은 걸 함께 했구나. 서랍에서 꺼내보곤 다시 서랍에 넣었다. 언젠가 이것도 버려질까. 지갑에 있던 그 아이의 사진을 꺼내 함께 담았다. 서랍을 닫았다.
마음도 닫았다. 그 아이와 나눴던 기억을 모두 담아 넣고 닫았다.
친구 녀석 하나가 괜찮느냐 묻는다.
응. 괜찮아. 어쩌겠니. 여자라도 소개시켜줄까. 아직은, 그 사람에게 미안할거야. 자꾸 예전 기억이 떠오를 테니까. 그래. 그럼 네 마음이 편해지면 말해. 알았어.
삶은 어차피 계속된다. 언젠가 또 한번 마음이 설레고 뛰면 그때 다시 사랑을 시작할지도 모른다. 다시 헤어지고 마음 아파하고, 그러다 다시 사랑하고.
지나간 모든 사랑이 기억 속에서 낡아가도 그것은 거짓이 아니다. 다만 오래된 만큼 퇴색될 따름이겠지. 너도 점차 낡아가고 있다. 너에게 나도 낡아가고 있겠지. 그 아이와 나는 서로 낡아가고 있다. 이젠 더 이상 함께 오늘을 살아갈 수 없다. 어제가 되고 옛일이 되겠지.
애석해하지 말자. 다만 마지막까지 그 아이에게 좋은 사람일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자. 우린 서로에게 많은 것을 주고 받았다. 그러니 더 이상 바라지 말자. 주고 받은 기억을 통해 서로를 간직하련다.
겨울이 왔다. 사랑이 저물고 또 한 해가 저물고, 계절은 시작된다.
춥고 시린 계절에 널 잃었지만 난 손을 호호 불며 살아가련다.
또 다시 계절은 바뀌겠지. 그리고 사랑도, 이별도 찾아올 거라 난 믿는다.
그렇게 난 살아가리라. 사랑하면서. 아파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