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남녀가 만났다. 우연한, 하지만 필연적인 만남이었다. 몸을 섞었다. 남자는 그것이 일발적인 우연이라 여겼지만 여자는 운명을 원했다. 여자는 상처 입었고, 남자는 미안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둘은 만났다. 서로 닮아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보다 절실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만남은 마냥 설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어떤 선을 넘어섰고, 그것이 자신을 해칠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문제는 여자였다. 여자 자신에게도, 남자에게도 그 만남은 독이 든 성배였다. 하지만 이미 세상의 끝까지 내몰린 두 사람은 서로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는 그 만남을 결코 포기하지 못한다.
요시다 슈이치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이상일 감독의 <악인>은 너무도 담담하여 되레 끔찍하게 처연해지는 영화다. 제목 그대로 어떤 악인을 그리는 이 작품은 오히려 극명하게 악인으로 내몰린 이가 몸담고 있던 세계를 조명함으로써 명료하게 가로지를 수 없는 선악의 경계를 묻고 답한다. 쭈뼛하게 선 머리칼처럼 예민한 소설의 문체는 의뭉스럽고 건조한 낯빛의 영상 기법으로 변주되어 스크린에 투영된다. 소설에 내재된 장르적인 서스펜스나 냉소적인 태도보다는 좀 더 진지한 관찰자로서의 시선이 견지된 영화는 원작에 비해서 감성적인 여운이 깊게 확보됐다.
스릴러나 추리물에 걸맞은 소재를 지니고 있으며 극초반의 전개 방식 또한 그러한 의문을 발생시키는 형식으로 진전되고 있지만 <악인>은 서스펜스를 위한 무대가 아닌, 멜로적인 감수성이 보다 짙게 드리운 작품이다. 세상의 끝에 내몰린 듯한 두 남녀가 만나 서로에 대한 절실함으로 진짜 세상의 끝에 다다를 때, <악인>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그 흔한 논리로도 어찌할 수 없는 로맨스의 깊고 너른 영역을 대변해낸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악인’이라고 규정된 인물이 그 ‘악인’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그 정황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인물들을 비추는 과정을 통해서 진짜 악인의 실체를 드러내고 그 악인을 둘러싼 세계의 참상을 비춰낸다.
<악인>에서의 피해자들은 동시에 가해자들이고, 가해자들은 결국 피해자들이다. 그들은 누군가로 인해 삶이 망가진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삶을 망쳐버린 가해자이기도 하다. 무언가에 대한 소중함이나 절실함이 사라진 상실의 시대, 그 속에서 무언가를 아끼고 바라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이 내던진 말 한마디에 내몰리다 때때로 악인이 되어 그 세계로부터 달아난다. <악인>은 그 상실의 시대 속을 살아가던 어느 남녀가 만나 이루는 처연한 로맨스다. 서사적 흐름, 소재의 착상, 주제의식 등, 전형적인 멜로의 문법과 동떨어진 이 작품은 그런 여건을 통해서 보다 신선한 흥미를 자아내지만 끝에 다다라 결국 어느 멜로보다도 짙고 아득한 여운을 드리워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악인>은 그런 감정의 깊이를 통해서 선악의 경계를 보다 강렬하게 사유해낸다. 이 작품의 결말에서 드러나는 직설적인 강변은 <악인>이 다다르고자 했던 궁극적인 끝일 것이다. 세상의 끝에 다다라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던 두 남녀의 감정을 허물고 붕괴시킨 단초의 씨앗을 향해 영화는 경고하고 또 질타한다. 너무나도 순진한 명제라서 되레 잊거나 무시하는 이들에게 요구하는 극렬한 고찰, <악인>은 그러한 진지함이 마땅하고 옳은 일임을 설득시키는 명징한 영화다. 타인의 진심을 비웃지 말 것. 그것이 이 세계의 악을 몰아내고, 선을 보존하는 최선의 인간적 선택이자 방도이므로, 무엇보다도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가치이므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