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다짐한다. 인류를 위협하는 히틀러를 척결하겠노라. 그는 히틀러를 자신의 적으로 선포하는 중이다. 그는 장교다. 그러나 히틀러가 숨쉬는 독일을 향해 진군하는 연합군의 장교가 아니다. 나치의 표식을 달고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한 독일군의 장교다. 그는 자신의 최고 상관을 적으로 규정한다. 성공하면 혁명이 된다. 실패하면 반역이 된다. 기로에 선 그 남자는 성공을 다짐한다.
<작전명 발키리>(이하, <발키리>)는 실패한 혁명에 앞장 선 남자의 이야기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장교로서 국가 전복을 꿈꿨던 슈타펜버그(톰 크루즈)의 실패한 혁명에 관한 실제적 사연이다. 쉽게 말하면 <발키리>는 어느 한 인물의 일대기인 셈이다. 궁극적으로 <발키리> 역시 결과는 훤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결과가 정해진 사연이다.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이뤄진 영화가 이에 충실하다면 이야기의 구조는 새로울 것이 없다. 정해진 길을 따라갈 뿐이다. 정해진 결말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이야기에 대한 의문은 불필요하다. 단지 그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들려지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이미 공개된 결말이나 다름없는 <발키리>엔 결말에 대한 짐작이 필요없다. 슈타펜버그가 히틀러에 반하는 군부 세력과 연합하여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과정엔 미스터리의 흥미가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는 사전에 공개된 정보를 통해서 극도의 긴장감을 선사하는 히치콕의 방식과 유사하게 서스펜스를 발생시킨다. 인물의 사소한 움직임마저 세심하게 포착하는 카메라의 샷은 공간의 여백까지 번져나가는 인물들의 미묘한 심리적 충돌을 세밀하게 담아낸다. 전쟁이 벌어지는 시대적 배경을 두르고 있으나 <발키리>는 전쟁영화라기보단 정치영화에 가깝다. 베를린 한복판에서 발견할 수 있는 광경은 전쟁의 승패를 가늠하기 위한 전투가 아니라 전쟁의 끝을 예감하는 이들의 각기 다른 표정이다.
그 표정엔 공통적으로 어떤 두려움이 엄습해있다. 이미 자신들의 전쟁이 패배할 것임을 아는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전쟁의 끝을 맞이할 것인가라는 고뇌를 품고 있다. 패망을 알면서도 체제에 기대는 이들이 있는 반면,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들은 각기 다른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다. 그 와중에 슈타펜버그만이 자신의 신념을 통해 행위를 관철시킨다. 히틀러의 죽음을 확신하지 못하는 동조자들이 갈등할 때 슈타펜버그는 과감히 행동을 펼친다. 여기서 슈타펜버그는 양심적인 내부자로 묘사되곤 하는데 이는 때때로 브라이언 싱어의 잠재된 혈통의 욕망을 읽게 만든다. 그를 묘사하는 주체의 욕망이 슈타펜버그를 선으로 규정하려 할 때 <발키리>는 때때로 격양된 감정을 품는다. <발키리>의 가장 큰 흥미는 양립된 야심의 중간자들이 갈등하고 추이를 지켜보는 표정에서 발생한다. 중간에 선 자들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표정에서 인간의 원초적인 고뇌가 감지된다.
<발키리>는 비상전시체제를 대비한 독일의 예비군 동원을 뜻하는 작전명이다. 또한 극중에선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에 삽입된 ‘발키리의 비행’이 흐르기도 한다.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발키리는 용맹하게 전사한 전장의 용사를 천상의 발할라 궁전으로 인도하는 여신이다. 발키리는 때때로 남성 인간과 결혼하기도 했지만 결국 남자를 떠나거나 그 반려자가 된 남자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다고 묘사된다.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발키리 여신 브륀힐테와 결혼을 약속한 지상의 영웅 지그프리트는 갈등과 반목 끝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발키리 작전을 믿었던 슈타펜버그 역시 작전 지휘자의 변심으로 혁명의 수장에서 반역을 선동한 주범으로 반전된다.
물론 현대의 역사는 그를 반역자로 기록하지 않고 있으나 그의 최후는 명백하다. 역사는 항상 정의의 편에 선 것만은 아니다. 동시에 그것이 절대적 정의였는지 알 수가 없다. <발키리>의 결말이 과정보다 감흥이 덜한 건 단지 예상된 결과인 것만은 아니다. 슈타펜버그의 의지가 숭고한 정의에서 비롯된 것처럼 묘사하는 태도가 어딘가 식상하기 때문이다. <발키리>의 결말은 휴머니즘을 향하고 있으나 실상 그것은 정치 드라마에 가깝다. 전쟁에 패배했지만 정치적 승리를 꿈꾸던 이들의 표정이 흥미롭다. 하지만 결말은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마치 홀로코스트 영화의 영웅을 접대하듯 관성적이다. 영웅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그것이 실화를 기반으로 한다는 핑계는 식상하다. 브라이언 싱어의 욕망이 영화를 사유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명예의 수여라기 보단 지나친 미화적 욕심에 가깝다. 브라이언 싱어 역시 <발키리>에서 자신의 정치적 승리를 위해 영화적 패배를 감수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