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스카이폴>은 제임스 본드 탄생 50주년을 맞이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지난 50년 동안 제임스 본드는 전 세계가 사랑한 스파이로 살아남았다. 물론 마티니 잔만 기울이며 시간을 보낸 게 아니다.
제임스 본드는 영국의 자존심이다. 올해 개최된 런던올림픽 개막식에서 영국 여왕을 보좌하는 임무를 수행한 것도 제임스 본드였다. <007 스카이폴>은 개봉 첫 주 북미 박스오피스 1위에 랭크됐고 878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역대 시리즈 중 개봉 첫 주 최고 스코어를 기록했다. 국내에서도 2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영화를 관람했다. 평단과 관객의 평가도 찬사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역동적인 듯 적막하고, 모던한 듯 클래식하다. 새로운 에너지와 고전적인 멋이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전통을 통해서 현재를 살아 나가는 제임스 본드는 여전히 마티니 잔을 기울이지만 이제 더 이상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철부지만은 아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졌기 때문이다.
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큰 타격을 입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제임스 본드였다. 자유 진영의 평화를 위협하는 공산 진영에 맞선다는 명목으로 전 세계를 왕래하며 한도 초과 걱정 없는 카드를 긁어대고 마티니 잔을 기울이다 미녀들에게 작업을 걸던 그는 새로운 적을 찾기 위해 구인 광고라도 내야 할 지경이었다. 2002년 미국의 전 대통령 조지 부시는 이라크, 이란, 북한이 악의 축이라 천명했다. 제임스 본드가 솔깃할 만한 삼지선다형 문항이었다. 21세기 최초의 시리즈 <007 어나더데이>에서 간택된 악의 축은 북한이었다. 냉전의 막차에 가까스로 탑승했지만 연비가 최악이었다. 완성도만큼이나 성적도 참담했다.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었던 제작진은 그제야 심각해졌다.
<본 아이덴티티>와 <본 슈프리머시>의 성공은 <007>시리즈를 더욱 낡아 보이게 만들었다. 제이슨 본은 제임스 본드처럼 총부리를 잡고 폼만 잡거나 어쭙잖게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다. 저돌적으로 달리고 과감하게 부딪히며 효과적으로 타격했다. 그리고 고뇌했다. 누구를 위하여 그들을 죽였나. 기억상실로 과거를 잃어버린 제이슨 본은 과거의 기억을 수집하며 맞닥뜨린 살인의 추억 앞에서 자기반성을 거듭하고 자신을 지휘했던 CIA에 책임을 묻고자 전진한다. 영화 속 스파이들이 더 이상 폼 나는 자유투사 코스프레로 연명할 수 없음을 체감하게 만들었다.
<본 아이덴티티>의 속편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 사이에 등장한 <007 카지노 로얄>은 시리즈의 전통에서 최대한 달아났다. 6대 제임스 본드로 선정된 다니엘 크레이그는 최초의 금발 제임스 본드라는 점에서부터 튀었다. 지적인 화이트칼라 선배들과 달리 그의 강인한 외모와 근육질 체격엔 블루칼라 노동자의 터프함이 배어 있었다. 전통적인 시리즈의 팬들은 금발의 제임스 본드를 강력한 반발로 맞이했다. 그리고 지금 <007 카지노 로얄>은 시리즈 사상 최고로 손꼽히는 걸작으로 회자된다.
<007 카지노 로얄>은 일종의 ‘제임스 본드 비긴스’다. 흑백 영상의 오프닝 시퀀스는 첫 공적 살인을 지시받은 제임스 본드가 이를 수행하고 ‘00’이란 살인면허를 허가받는 과정을 비춘다. 이어지는 타이틀 시퀀스를 지나 등장하는 건 고층 빌딩이 건축되는 공사장 한가운데를 상하좌우로 관통하는 스피디한 추격신이다. 뛰고 구르고 나는 가운데서 치고받는 제임스 본드는 과거의 선배들보다 제이슨 본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인상이었다. 실제로 <본> 트릴로지의 액션감독인 댄 브래들리가 <007 카지노 로얄>의 액션을 설계했다. 처음부터 새로운 제임스 본드에 대한 의지가 명확했던 것이다.
출발점에 선 제임스 본드는 새로운 경로에 주목했다. <007 카지노 로얄>은 제임스 본드를 순정적인 러브 스토리로 밀어 넣는다. 진정한 사랑을 깨달은 제임스 본드는 연인을 위해 상관에게 이메일로 사직서를 제출하기에 이른다. 새로운 삶을 꿈꾼다. 그러나 결국 이야기의 결말부에 이르러 그녀의 배신을 직감하고, 그녀를 뒤쫓다 의문의 조직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위기에 빠진 그녀를 구하고자 고군분투하지만 끝내 눈앞에서 참회하다 죽음을 맞이한 그녀의 주검을 안고 눈물을 흘린다. 그녀의 배신과 죽음이 자신을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인과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그 모든 상황을 설계한 이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제임스 본드가 차가운 도시 남자로 거듭난 것도 이런 과정의 결과임을 설득한다.
<007 퀀텀 오브 솔러스>는 바로 그 복수에 관한 영화다. <007 카지노 로얄>과 <007 퀀텀 오브 솔러스>는 하나의 맥락으로 묶인 최초의 연작이란 점에서 또 한 번 새로웠다. <007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 제임스 본드는 공적인 임무와 사적인 복수 사이를 방황한다. 그가 몸담은 영국 첩보 조직 MI6 또한 혼란스럽다. 냉전시대의 적은 이념만큼이나 실체가 명확했지만 새로운 시대에서 적의 화장법은 보다 교묘해졌다. 이익에 따라 행동하기에 선악을 자유자재로 갈아입는다. 거대한 첩보 조직의 실체가 되레 명확하다. 새로운 시대는 유물 취급을 당하는 조직의 미래를 근심하게 만든다.
제임스 본드는 단독 드리블로 조직의 한계를 극복하고 적의 실체를 따라잡아 파헤친다. 때때로 조직의 압력을 받고 카드가 끊기는(!) 불상사까지 인내하면서 공적인 의무와 사적인 복수를 자신의 방식으로 해결하고 응징하며 존재감을 어필한다. <007 카지노 로얄>과 <007 퀀텀 오브 솔러스>가 시리즈의 한계로부터 탈출하고 이탈하는 작품이라면 <007 스카이폴>은 다시 한 번 전통을 회복하고 건축하는 작품이다. <007 스카이폴>은 추락하고 가라앉는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로 시동을 건다. 역사 속으로 수장된 대영제국의 영광만큼이나 MI6의 활동 또한 마냥 자유롭지만은 않다. 쇠락의 기운이 여실하다. 제임스 본드의 기력도 예전 같지 않다. 조직 내에 수혈되는 젊은 피들이 보다 선명하다. 그 와중에 강력한 적이 등장한다.
컴퓨터 프로그램 하나로 전 세계 경제와 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적의 존재란 바로 자신과 동일한 일을 했던 예전의 동료다. <다크 나이트>의 투페이스처럼 변절해 버렸고, 조커처럼 무모해서 공포스럽다. 21세기의 정세에 걸맞은 무정부적인 악인의 출연은 제임스 본드가 오늘날에도 살아남아야 할 이유를 대변한다. <007 스카이폴>은 그런 제임스 본드의 생존을 도울 팀을 재정비하는 작업이다. 앞선 두 전작이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에 깃든 냉전의 때를 씻어내는 작업이었다면 <007 스카이폴>은 그 과정에서 벗어 던졌던 전통의 품위를 재단하고 착용하는 작업이다. 다만 그것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클래식으로서 재단된 것이어야 한다.
<007 카지노 로얄>은 시리즈 최초로 MI6의 국장인 M으로 여배우 주디 덴치를 캐스팅하며 파격을 새겼다. <007 스카이폴>은 랄프 파인즈를 통해서 다시 전통을 복원한다. 시리즈 초기에 M의 비서로 제임스 본드에게 지령을 전달하는 캐릭터 머니페니를 부활시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제임스 본드가 60년대에 유행했던 좁은 라펠의 수트를 착용한 것도 어쩌면 의도적이다. <007 골드핑거>(1964)에 등장했던 에스턴 마틴 DB5에 앉아서 차량 전면에 탑재된 기관총을 난사하는 이벤트마저 등장한다. <007 스카이폴>은 지난 두 편의 전작이 구축했던 새로운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 위에 다시 시리즈의 전통을 건축하는 ‘제임스 본드 라이즈’다.
하지만 굳이 왜 제임스 본드가 태어난 고저택에서 <나홀로 집에> 같은 결전을 벌이는 것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 고저택을 ‘스카이폴’이라고 명명한 건 일종의 고의다. 추락을 상징하는 곳에서 태어난 제임스 본드가 그 운명을 스스로 박살내 버리고 결국 살아남는 과정은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다. 그가 말한 새로운 취미 즉 ‘부활(Resurrection)’인 셈이다. 그렇게 다시 태어난 제임스 본드는 새롭게 정비된 팀원들과 함께 다시 세계를 구하러 나아간다. 잘 알려졌다시피 다니엘 크레이그는 계약상 두 편의 시리즈에 재탑승할 예정이다. 마티니 잔을 채울 준비는 끝났다. 그리고 그는 말할 것이다. 본드, 제임스 본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