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려서부터 야구광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시절 광주로 내려간 뒤 10년을 넘게 살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난 해태 타이거즈와 함께 살았다. 선동렬과 이종범은 둘도 없는 우상이었지. 심지어 아침마다 신문을 펴고 스포츠 면 야구 기사에 검정색 모나미 볼펜으로 줄을 치면서 봤다. 덕분에 부모님 역성이 대단했다. 그래도 그 망할 짓을 포기하지 않았고, 부모님은 결국 날 포기했다. 어쨌든 그랬다.
내게 있어서 야구란 내가 세상에서 가장 먼저 좋아했던 스포츠이자 그만큼 좋아해본 적 없는 스포츠였던 것 같다. 해태 타이거즈가 기아 타이거즈로 변하고 종이 호랑이로 몰락한 뒤, 잠시 국내 프로야구에 관심이 시들했던 적도 없지 않았지만 작년에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는 척하던 기아를 열심히 지켜봤다. 메이저리그까지 챙겨볼 겨를은 없었지만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당시 박찬호의 18승에 감격했고, 재수 시절 김병현의 월드시리즈 홈런 연타 사건에 충격을 먹기도 했다. 당시 김병현이 홈런볼을 던지기 직전마다 이러다 홈런 맞는 거 아냐, 라고 중얼거리다 주변인들에게 재수없는 주둥이로 낙인 찍혀버린 가슴 아픈 사연도 있단다. 어쨌든 야구란 내게 참 재미있는 게임이다.
내일이면 WBC결승이다. 종범신의 대단한 활약에 감격했던 전 대회에서 한국은 4강이었다. 3번이나 이겼던 일본을 상대로 단 한번 졌는데 하필 그게 4강전이었고 덕분에 짐 싸서 돌아왔다. 내일은 결승이다. 또 일본이다. 이번엔2:2무승부. 이게 무슨 한일 슈퍼리그냐. 아니면 한일전 및 월드 베이스볼 초청 시범경기냐. 게임은 미국에서 열리는데 정작 주인공은 삽질로 물러나고 그 이상한 대전 규칙에 의해 한국과 일본만 죽어라 맞붙는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서로가 지겹고 지겨워서 다시 보기 싫어 죽을 판에 외나무 다리에서 만났다. 뭐 이딴 시나리오가 있냐고 대본을 내던지고 싶어도 글러브를 내던질 순 없지. 지는 쪽은 최악이고 이기는 쪽은 최상이다. 리얼리티 버라이어티 쇼 따위는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흥미진진한 리얼타임 쇼가 벌어지는 셈이다.
종목을 불사하고 한국을 대표해서 국제대회에 나간 선수들에게 우승해서 돌아오라는 압박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이 선의의 응원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내일만큼은 이겨서 돌아왔으면 좋겠다. 일단 내가 지는 꼴을 보고 속상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하거니와, 그네들이 가장 속상할 것 같아서 말이지. 차라리 미국이 올라왔다면 그냥 결승전을 만끽하고 돌아와도 좋다고 말할 순 있겠다만, 어쩌다 보니 또 일본이다. 이젠 그 악연에 종지부를 찍는 게 좋겠지. 다만 그게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다. 이긴 편은 우리 편, 이라고 외칠 수 없는 상황에서 이긴 편이 우리 편이 됐으면 좋겠다. 다져스 스타디움에 태극기를 꽂아서 대한민국의 자부심을 알려주세요, 따위는 모르겠고 그 세레모니를 통해 본인들 스스로 환희에 차는 순간을 봤으면 좋겠다. 나라 꼴도 지랄 맞고 ‘뉴딜’이란 단어 하나 익혔다고 여기저기 적용하며 생색내는 MB의 꼴 같지 않는 작태도 흉악한 판에 야구는 그나마 지친 사람들에게 일말의 낙이 되고 있다. 김연아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내일만큼은 국민을 위해서, 대한민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네들 당신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달라고 말하고 싶다. 그 다져스 스타디움에 태극기를 꽂고 기쁨에 만끽할 수 있었으면 한다. 최선을 다했으니 꼭 그 보답을 얻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