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공무원 출신 아입니까!” 그렇다. 원래 그 남자, 최익현(최민식)은 밀수업자들에게 삥이나 뜯는 부산 세관이었다. 물론 혼자 해먹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팀원들의 비리 행위에 총대를 메고 옷을 벗을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밀수업자들의 필로폰을 입수한 그는 건달과 손을 잡고 이를 일본에 유통해서 한몫 챙기길 시도한다. 그래서 만난 것이 바로 부산의 내로라는 주먹 최형배(하정우)다. 그리고 경주 최씨 충렬공파 최익현은 직감한다. 그가 자신보다 항렬이 낮은 집안 사람임을.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렇게 그는 세력을 자랑하는 건달 두목의 대부가 된다. 1980년대의 일이었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는 노태우 전대통령이 선포한 ‘범죄와의 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품이다. 그러니까 ‘범죄와의 전쟁’은 그저 영화의 시대상을 짐작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동원된 것에 가깝다. 부산을 배경으로 둔 건달들의 행태를 그린 작품이기는 하나 이 작품을 단순히 갱스터 무비,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조폭 영화라고 정의하긴 아쉽다. 1980년대, 한국의 근현대사를 헤쳐온 아버지들 가운데 오늘날 일가를 이룬 어느 아버지의 진창 같은 일대기를 조명하는 영화라는 쪽이 보다 유력하다. 족보가 인맥이 되던 시대, 요즘의 관점에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시대의 틈새에 손과 발을 끼워 넣고 매달리며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오르는 법을 배운 한 남자가 어떻게 한 시대를 관통해왔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세관에서 밀수업자 삥을 뜯었다가 조직에서 팽 당할 위기에서 밀수된 필로폰을 빼돌려 독립한 최익현은 최형배를 만나 그의 대부 노릇을 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져든다. 최형배가 지닌 건달의 가오가 자신의 것이기도 한 것처럼 형님으로 군림하려 한다. 하지만 최익현의 가오는 곧잘 무너진다. 나름대로 곧잘 흉내를 낼 뿐, 흉내 이후에 보여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건달의 세계에 출입하지만 결국 건달의 세계를 겉도는 반달, 즉 일반인도 건달도 아닌 박쥐 같은 존재가 된다. 영화의 코미디 감각도 이 부근에서 살아난다.
경주 최씨 충렬공파의 종친 어른이라는 이유만으로 건달 두목의 대부를 자처하게 된 한 남자가 그 세계에 뛰어들어 벌이는 로비 행위는 오늘날 스크린 너머에서 이 행위를 지켜보게 될 관객에게는 좀처럼 진지해지기 힘든 우스꽝스러운 콩트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검사의 수사망을 압박하고자 동원하는 인맥이 종친회에서 만난 노인의 친척 검사이며 그것도 모자라서 빽이 될만한 종친들을 찾아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해나가는 최익현의 모습은 그야말로 코미디다. 또한 당대의 시대에서 나름의 가오를 잡으며 살아가던 건달 최형배와 그 무리들에게 뒤섞인 최익현의 앙상블은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을 보는 것마냥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다 결국 피를 본다. 그들 사이에 어떤 선악의 관점은 필요하지 않다. 어울리지 않는 공생관계에서 빚어지는 어설픈 합리는 때때로 웃음을 야기하지만 덕분에 종종 살벌하게 얼어붙는다.
코미디가 감상의 리듬을 좌우하는 가운데, 노스텔지어로 가오를 잡다가도, 서슬 퍼런 서스펜스가 때때로 쑥 들어온다. 무엇보다도 이는 영화를 쥐고 흔드는 최민식의 위력적인 연기 덕분이다. 껍데기 같은 자신의 존재를 포장하고자 안간힘을 쓰던 사내가 한 순간 쫄아서 무너지는 광경, 희극과 비극을 아우르는 최민식의 연기는 가히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아우르는 필요조건이다. 반대로 하정우는 최민식이 좌우로 흔드는 영화의 중간중간에 쐐기를 박아 넣으며 순간적인 긴장감을 불어넣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입증한다. 일종의 충분조건이랄까. 조진웅과 마동석을 비롯한 전체적인 캐스팅에는 어떠한 거품도 없다. 다들 자신의 위치에서 적절한 그림이 되어 무언가를 해낸다. 무엇보다도 조직의 2인자 박창우 역할을 맡은 김성균과 검사로 등장하는 곽도원은 각각 발굴이며 발견이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는 결국 한 남자가 구시대의 구멍난 체계를 혈연이라는 담합과 치열한 생존본능을 앞세워 유린하고 착복하며 끝내 생존하여 자신의 일가를 이루는 과정을 살피는 시대극에 가깝다. 가진 것 없이 가문의 이름으로 삶을 연명하던 껍데기 같은 사내는 그 껍데기를 통해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고 끝내 그렇게 키워낸 후손을 알맹이 삼아서 끝내 껍데기를 채운다. 이는 곧 현재 한국에서 중산층 이상의 일가를 이룬 오늘날의 아버지들이 자행한 가족사 세탁의 뿌리를 들추고 살피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두 전작을 통해서 리얼리즘적인 연출적 장기를 드러낸 윤종빈 감독은 탁월한 시대 묘사와 서사적 배열을 통해서 현실 같은 영화를 만들어냈고, 배우들은 또렷한 연기로 그 시대적 공기를 채워냈다. 우스꽝스럽게 처연하고, 신랄하게 저린, 그 마지막 인상은 여전히 우리 삶을 좌우하고 있는 어느 아버지들이 채운 알맹이를 감싼 껍데기를 추적한다.
신출귀몰한 전법으로 은행을 털고 유유히 FBI를 따돌리던 갱단의 리더 존 딜린저(조니 뎁)가 검거됐다. 존 딜린저를 구치소로 이송하는 차량 주변에 수많은 군중이 몰려 환호를 지른다. 존 딜린저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의 환호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열광에 가까운 것이다. 존 딜린저가 수감될 예정인 미네소타 구치소에 몰려든 취재진의 열기도 뜨겁다. “은행 하나를 터는데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나요?”“1분 40초 정도면 가능하지.”기자가 던진 가벼운 질문이 농담으로 튕겨져 돌아온다. 악명 높은 범죄자를 목전에 둔 긴장감 따위란 없다. 마치 유명인을 눈 앞에서 두고 본다는 들뜬 기분이 현장을 장악한다. 그 사이에서 여유로운 미소로 현장을 장악한 존 딜린저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퍼블릭 에너미>는 그 표정 너머의 시대를 관찰하기 보단 그 표정을 통해 시대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발견하는 영화다.
영화의 도입부, 스크린에 명시된 한 줄 자막에 따르면 미국 경제대공황이 4년째에 접어든 1933년에 존 딜린저의 삶은 절정에 달했다. 1930년대, 미국 경제대공황기에 전성기를 누렸다는 갱스터 존 딜린저의 전기적 실화를 다룬 <퍼블릭 에너미>는 전설적인 갱스터의 일생 가운데 절정을 이뤘다는 마지막 1년을 발췌하는 작업이다. 인물의 생애 안에서 가장 드라마틱하다고 회자되는 한 시절이 스크린에서 재현된다. 경찰에 검거돼 인디애나 주립교도소로 이송된 존 딜린저가 수감 중이던 동료들과 함께 교도소로부터 도주하는 광경을 통해 출발하는 <퍼블릭 에너미>의 서사는 바이오 그라프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던 존 딜린저가 FBI의 포위망 속에서 사살되는 1944년까지, 약 1년 여간의 생을 스크린에 재연한다. 인물을 조명하는 전기적 서술이 서사적 뼈대를 이루는 동시에 인물을 둘러싼 시대적 공기가 갱스터 무비의 육체와 멜로드라마의 감성을 입고 유려하게 포착되고 수집돼나간다.
고집스런 리얼리즘 영상 <퍼블릭 에너미>는 사실주의적인 재현을 통해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원론적 고집과 노고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존 딜린저와 FBI의 총격전이 벌어진 실제장소인 ‘리틀 보헤미안 롯지’에서 이뤄진 로케이션 촬영과 FBI의 포위망에 걸려든 존 딜린저가 총에 맞아 즉사한 장소인 ‘바이오 그라프 극장’을 고스란히 재현한 세트 촬영은 그 객관성의 자질을 구체화하기 노고에 가깝다. 실제 은행강도 범죄전력이 있는 ‘제리 스칼리스’를 고용하면서까지 실제적 완성도를 고려했다는 은행강도 신 역시 리얼리티를 최우선으로 삼은 연출적 고집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퍼블릭 에너미>가 이루는 리얼리즘 이미지의 대부분은 총격신에 걸쳐있다. 특히 극초반부에 등장하는 인디애나 주립교도소 탈주 신은 <퍼블릭 에너미>의 지향점을 드러내는 극명한 이정표나 다름없다. 선명한 디지털 색감이 이루는 생생한 질감의 영상 너머로 역동적인 핸드헬드가 연출하는 현장감과 외부적 사운드의 유입을 차음(遮音)하고 현장음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총격전 이미지는 다큐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현장성에 의존된 연출력을 선보인다. 그 뒤로 리틀 보헤미안 롯지에서 존 딜린저와 멜빈 퍼비스(크리스찬 베일)가 지휘하는 FBI의 야간 총격신 역시 <퍼블릭 에너미>가 추구하는 연출방식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사례다.
도심 총격신의 바이블로 꼽혀도 손색이 없는 <히트>를 비롯해 <퍼블릭 에너미>와 기종이 다른 HD카메라로 촬영된 <콜래트럴><마이애미 바이스>등을 통해 생생한 질감의 총격신을 연출한 마이클 만은 <퍼블릭 에너미>에 이르러 더욱 거칠고 역동적인 동시에 광범위한 클래식 총격신을 디지털 장비로 연출했다. 디지털 카메라의 또렷한 색감은 재현이라는 객관성을 공고히 다져나간다. 또한 정적인 분위기 안에서 극대화된 총성과 역동적인 동선을 구사하는 카메라 워크는 영화의 외부적 위치에 놓인 관객의 감정적 침입을 차단하듯 현장성을 극대화시키며 목격으로서의 감상을 극대화시킨다. 물론 <퍼블릭 에너미>가 시종일관 현장성이 극대화된 흔들림으로 가득한 핸드헬드의 기록적 영상만을 전시하는 건 아니다.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라는 인물의 기록적인 범죄행적을 따라잡는 동시에 존 딜린저라는 개인의 독립적인 사연을 연출한다. 일종의 서브 플롯에 가깝게 보이지만 실상 <퍼블릭 에너미>를 관통하는 건 이 독립적인 사연, 즉 존 딜린저와 빌리 프레셰(마리안 코티아르)의 로맨스다. 그 로맨스는 <퍼블릭 에너미>의 사실주의적 풍경으로부터 자제되는 영화의 감정적 근간을 발생시킨다.
영웅적 환상성이 반영된 논픽션
1933년과 1934년 사이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퍼블릭 에너미>는 대공황기의 혼란 가운데서도 낭만을 확보하는 존 딜린저의 모습을 통해 시대적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대공황의 주범이라 지목됐던 은행과 연방정부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시민들이 은행을 털고 시민의 돈을 갈취하지 않는 존 딜린저에게 환호를 보낸 건 그의 범죄적 행위가 그들의 반정부적 불만을 대리적으로 해소해주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퍼블릭 에너미>는 시대를 관통하기 보단 시대의 한 이미지를 영화적 배경으로 선택한 작품이다. 대공황기의 주효한 이미지를 찾아보기 어려운 <퍼블릭 에너미>에서 시대적 궁핍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는 건 존 딜린저에게 환호를 보내는 군중의 모습에서다. 갱스터에게 열광을 보내는 군중의 이미지에서 낭만의 유희를 상실한 대중의 곤궁한 정서가 읽힌다. 동시에 <퍼블릭 에너미>는 종종 존 딜린저를 마치 유령처럼 묘사되는 시퀀스를 등장시키곤 하는데 특히 존 딜린저가 극장에 앉아 자신의 수배 영상을 보는 광경과 자신의 검거전담반이 있는 경찰서 안을 휘휘 도는 광경은 <퍼블릭 에너미>의 의도가 반영된 연출적 결과물에 가깝다. 명성에 도취된 채 실체를 망각한 시대적 증후, 대중은 실체를 짐작하기 보단 명성에 도취되어 환호하고 그 이름을 쫓는 공권력은 도리어 실체 없는 악명에 짓눌려 겁쟁이처럼 눈을 돌린다. 그 한가운데서 갱스터는 대중의 환호를 얻는 판타지 스타이자 공권력을 조롱하는 히어로가 된다.
사실상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라는 갱스터의 족적을 배려한 전기물이라기 보단 존 딜린저라는 갱스터가 만들어낸 영웅적 환상성이 반영된 논픽션에 가깝다. 존 딜린저라는 인물로부터 새어나오는 낭만성이 시대를 장악하고 객관적으로 위장된 연출적 풍광의 영향력을 넘어서 관객을 도취시킨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을 건져 올려 그 인물을 둘러싼 시대의 특수한 단면을 도려낸 뒤, 해석적 연출을 가미한다. 연출력이 극대화될 수 있는 액션신을 리얼리즘에 가까운 영상으로 구사하는 건 <퍼블릭 에너미>가 신에서 발생할 만한 극적 흥미보다도 그 이미지에서 발생할만한 해석을 객관적으로 위장시키는데 치중하고 있다는 증거다. 또한 <퍼블릭 에너미>는 이런 해석적 위장을 통해 범죄자를 미화하고 있다는 혐의에서 풀려나는 영화다. 관객에게 인물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인지를 거듭하면서 인물로부터 배어나오는 매력적인 분위기마저 객관적 형태로 이해시킨 뒤, 영화가 연출하는 시대적 공기 안에서 관객을 만취시킨다. 동시에 <퍼블릭 에너미>는 조니 뎁이라는 배우의 캐릭터 연출이 많이 반영된 영화이기도 한데 존 딜린저와 빌리 프레셰의 멜로 플롯이 이루는 로맨틱한 분위기가 영화의 전반을 지배하게 되는 건 그 플롯의 비중에서 비롯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모든 영향력의 전반은 조니 뎁이 연출하는 캐릭터의 뉘앙스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멜로적 잔향을 남기는 결말부의 여운 역시 <퍼블릭 에너미>가 궁극적으로 느와르보단 멜로적 감수성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만하다. 궁극적으로 <퍼블릭 에너미>에 방점을 찍는 정서는 로맨틱한 무드를 연출하는 멜로 그 자체에 놓여있다. 그 멜로적 분위기는 존 딜린저라는 인물의 매력을 연출하는 밑그림이기도 하다.
인물의 퇴장이 고하는 시대적 종언 존 딜린저가 죽음을 맞이한 바이오 그라피 극장에서의 결말부는 <퍼블릭 에너미>에서 궁극의 이미지라 할만한 광경이다. <맨하탄 멜로드라마>(1934)를 감상하는 존 딜린저가 스크린 너머의 클라크 게이블과 명확히 조응하는 눈빛으로부터 <퍼블릭 에너미>의 클라이막스가 형성된다. 한 시대의 끝을 예감하는 인물의 눈빛에서 비장한 영웅적 면모가 연출된다. 스크린 너머에서 단호하게 퇴장을 선택하는 배우의 표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비장하게 다짐한다. 존 딜린저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는 결말은 실상 한 인물의 생이 마감되는 순간이라기 보단 한 시대의 종말에 가까운 의미를 연출한다. 명예라는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시대로부터 뒤쳐져 버린 인물이 자신과 조응할 만한 캐릭터의 비장한 결말에 도취될 때, 자신이 지배하던 시대의 끝을 직감한 인물의 느와르적 예감이 스크린을 지배한다. 어쩌면 결말부에서 중요한 건 존 딜린저의 죽음이 아니라, 끝을 직감하는 존 딜린저의 표정인 셈이다. 여기서 끝이란 죽음이라기 보단 자신의 시대에 가깝다. 그 시대로부터 어떻게 퇴장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영웅적 면모가 고독하게 돋보인다.
존 딜린저의 죽음을 담아낸 영화의 결말부는 범죄자에 대한 사살이라기 보단 비겁한 공모적 암살에 가깝게 연출된다. 그 순간, <퍼블릭 에너미 Public Enermies>, 즉 ‘공공의 적’이라는 제목은 명확히 반어적인 언어로 전복된다. 고독한 영웅적 면모를 선보이는 갱스터가 무리 지어 모인 FBI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광경은 아이러니하게도 비장한 페이소스를 연출한다. 시대적으로 퇴물이 되어가는 갱스터의 낡은 영광이 영면에 든다. 겁쟁이처럼 숨어서 존 딜린저를 기다리던 수사관들은 그가 주검이 된 뒤에야 그 얼굴을 대면한다. 겁쟁이들을 평정한 영웅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거대한 인물의 죽음을 마주한 뒤에서 시대의 종언을 체감한다. 떠나간 사람을 추모하며 뒤늦게 한 시대의 끝을 체감하는 오늘날의 우리처럼 그렇게 시대의 끝은 뒤늦게 직감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겁쟁이들이 끝없이 사라지는 것과 달리 영웅은 이야기를 통해 영생을 누린다.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다'고 믿었던 낭만주의적 영웅은 시대를 넘어 스크린에 부활된다. <퍼블릭 에너미>에서 '존 딜린저'는 전설적인 갱스터의 고유명사라기 보단 진정한 낭만주의적 영웅을 대표하는 실존적 육체에 가깝다. 결국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의 육체를 통해 영웅의 시대를 기리며 낭만의 부활을 꿈꾸는 영화인 셈이다.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신상명세를 설명하는 간략한 자막이 따라붙고, 서사의 변화를 표기하는 자막도 타이밍 맞게 등장한다. 이 사연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강조하듯 빈번하게 자막이 등장하며 화면을 수놓는다. 실제로 <알파독>은 충격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이뤄진 작품이다. 불과 스무 살의 나이에 마약딜러로 성공했지만 결국 미 FBI의 최연소 수배범으로 기록된 제시 제임스 할리우드라는 청년에 관한 서사를 극화했다.
과감하게 총질을 해대는 흑인 갱스터들이 걸러지지 않은 증오와 살의로 무장한 랩을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커다란 TV로 방영된 힙합 뮤직비디오는 타락의 이미지를 쾌락의 메시지로 변형시킨 강렬한 비트가 젊은이들을 자극한다.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던 한 청년이 무심하게 소리친다. 총을 쏘면 기분이 죽이겠지! 행위의 결과적 책임보다도 행위에 대한 쾌락만이 강하게 감지된다. 흥청망청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타락의 무게를 감내할 줄 모르면서도 타락을 꿈꾼다. <알파독>은 자신이 무엇을 저지르는지 모르면서 무작정 내달리는 젊은이들의 비극을 품고 있다. 장난처럼 시작된 사연은 번져나가는 불처럼 걷잡을 수 없게 커져나간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해 쉴새 없이 에피소드를 만들어 돌린다. 각기 비중이 다른 다양한 인물들은 거미줄처럼 얽히며 사건을 형성해나간다. 그 사연의 중심엔 젊은 나이에 마약 딜러로 승승장구하며 호화롭게 살아가는 조니(에밀 허쉬)가 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친구들과 함께 매일같이 향락을 즐기고 흥청망청 살아간다. 하지만 자신에게 빌려간 돈을 기한 내에 갚지 못하겠다는 제이크(벤 포스터)와 심하게 다툰 후 그의 삶이 풍랑처럼 흔들린다. 제이크와 주고 받은 갈등의 전개 속에서 조니는 자신도 모르게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는다. 우연히 만난 제이크의 동생 잭(안톤 옐친)을 납치한 조니는 친구인 프랭키(저스틴 팀버레이크)에게 잭을 떠넘기고 감시를 맡긴다. 본격적인 사연은 여기서 시작된다.
상황만을 설명하자면 상당히 심각한 범죄적 행위가 발생했다 할 수 있겠지만 실상 영화는 그리 심각하지 않다. 서스펜스에 유리한 상황임에도 코믹이 발생하고 하이틴 무비의 발랄함이 감지된다. 심각한, 혹은 심각할 운명에 놓인 사연에 비해 혈기왕성한 스타일로 멋을 내기에 여념이 없는 영상엔 어떤 변수에 대한 예감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가벼운 장난처럼 두서없이 부유하는 사연 속엔 그저 놀기 좋아하고 즐기기 좋아하는 청춘이 존재할 따름이다. 납치한 쪽이나 납치된 쪽이나 즐기기에 여념이 없다. 일종의 해프닝처럼 서로의 관계를 인식하던 이들은 때때로 끈끈한 교우 관계로 거듭나며 특별한 추억을 쌓기도 하고 미래를 기약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결말에 다다라서야 그 사태의 심각성이 각인된다.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심각한 사안이었는가를 깨달은 조니는 나름의 방식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 마약을 팔고 유흥을 즐기던 20대 청년은 어른의 육체로 성장했으나 성숙하지 못한 아이처럼 미숙하기만 하다. 가벼운 리듬에 들썩거리듯 흘러가던 이야기는 결말부에 다다라 심각하게 주저앉는다. 큰 온도차가 발생한다. 흥겨운 파티와 취기로 가득하던 영화가 이내 급작스런 죽음을 대면하며 급격하게 얼어붙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이뤄진 <알파독>은 책임보다 권력을 먼저 배운 청년들의 비극을 묘사한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온도차만큼이나 충격도 크다. 하지만 이는 진지한 사유로 발전되기 위한 계기라기 보단 일회적인 충격요법에 가깝다. 다큐적인 양식을 통해 사안의 심각성을 조명하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극의 말미까지 사연의 허구적 태도를 추구한다. 또한 그 상황의 주체를 묘사할 뿐 그 상황에 영향력을 끼친 배후를 지적하는데 미흡하다.
마약을 파는 조니의 아버지 소니(브루스 윌리스)는 아들의 사업을 방조하고 되려 육성한다. 부자의 기묘한 유대감이 시대적 타락을 가볍게 비웃는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아버지의 훈육은 아들을 망친다. 한편에서 잭은 어머니 올리비아(샤론 스톤)의 지나친 간섭에 스트레스를 겪고 이내 집에서 달아난다. 두 사연은 결국 기이한 파국을 낳는다. 이 사연은 특수하나 그 사연의 배후는 보편적인 문제를 품고 있다. 하지만 <알파독>은 그 사연의 배후보다도 그 사연의 형태를 탐닉하는데 열중한다. 결국 그 심각한 결과를 마주친다 해도 그 과정의 경쾌한 잔상이 아른거린다. 허구적인 내러티브가 진지한 실화를 압도한다. 의도보다도 수단이 앞선다. 스타일의 과잉 속에 자의식이 묻혔다. 영화의 의미가 증발된다. 기교는 성장했지만 의미를 성숙시키는데 실패한 셈이다.
전작 <폭력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라미스>는 관객을 폭력의 현장에 무덤덤하게 노출시키며 이야기를 꺼내 든다. 날이 선 면도칼은 사람의 목을 갈라 피를 쏟아내고, 약국에 들어와 도움을 청하던 임산부는 발 아래로 하혈하다 쓰러진다. 시작부터 피가 흥건하다. 그 거리엔 피가 흐른다. 포도주를 따르듯 피를 부르는 무리들이 조용히 살아간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피의 거래로 거리를 장악한 이들의 살벌한 언약에 발을 담게 된 자의 이야기다. 폭력에 가담한 그 손아귀에서 달아날 수 없다. 더 이상 헤어날 수 없는 침전된 삶에 발목을 잡힌다.
니콜라이(비고 모텐슨)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내다. 니콜라이는 국제적 범죄조직 ‘보리V자콘’의 보스 세미온(아민 뮬러-스탈)의 아들 키릴(뱅상 카셀)을 돕고 그의 신임을 얻었다. 앞뒤 분간 못하는 키릴과 달리 니콜라이는 냉정하면서도 속이 깊다. 거친 인상과 달리 난폭하지도 않다. 명확하게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직감하기 어렵다. 실질적으로 런던 거리를 암묵적으로 지배하는 ‘보리V자콘’의 패밀리들은 거리의 이방인이다. 그들은 폭력을 유입하며 그 거리의 일부로 편입된다. 니콜라이는 그들이 장악한 거리에 편입하기 위해 폭력을 전시한다. 신임을 얻고 그들의 일부로 거듭나려 한다. 결국 세례식이 거행되듯 그는 조직의 일부로 문신을 새긴다.
폭력을 계승하려는 아비는 직계의 무능함을 질시하면서도 보호하려 든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인을 주문하고, 가문의 이름으로 후계를 보호한다. 그러나 아들들은 하나같이 어리석거나 무력하다. 아비들이 자식들로 전전긍긍할 때 새롭게 유입된 이방인이 눈에 들어온다. 니콜라이는 키릴로 인한 조직의 손실을 보석하기 좋은 대상이다. 세미온은 니콜라이에게 의식을 통해 조직을 세례한다. 그는 조직의 신임을 얻고 중책을 맡게 된다. 자식으로부터 비롯된 조직의 부채를 갚기 위한 제물로 삼는다. 사투가 벌어진다. 조직의 일원으로 거듭되는 순간 조직을 위한 죽음에 내몰림마저 불사해야 한다.
이 모든 사건에 대한 관찰이 시작되는 건 일기장 덕분이다. 사람이 죽는 동시에 생명이 태어난다. 폭력에 노출된 어미는 죽어서 새로운 자식을 남긴다. 동시에 그녀가 남긴 기록은 그녀에게 가해진 폭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조산원 안나(나오미 왓츠)는 그 실체로 접근하지만 실상 그녀조차도 은밀하게 다가오는 폭력의 위협을 감수해야 할 따름이다. 니콜라이는 조직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서 은밀히 흔들린다. 조직의 수하로서 충성을 맹세하고 명령을 이행하지만 그는 폭력을 맹신하는 무리와 다르다. 궁극적으로 다른 목적을 위해 조직에 잠입하면서도 조직의 수하로서의 역할극에 충실하다. 폭력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폭력에 온전히 노출된다. 또한 조직에 충성하는 동시에 안나와 아이를 보호하려 한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폭력의 역사> 이전의 사연처럼 보인다. 두 영화가 하나의 맥락을 두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정서적인 진화의 측면에서 <이스턴 프라미스>는 <폭력의 역사>보다 뒤가 아닌 앞에 놓인 이야기 같다. <폭력의 역사>가 폭력의 인과율을 운명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이스턴 프라미스>는 폭력의 양면성을 저울질하듯 관찰하는 이야기다. 전자가 어떤 결과에 대한 후일담이라면 후자는 결과를 가늠하는 전사의 추적에 가깝다. 갱스터 무비의 외피를 입고 중후한 방식으로 구술되는 영화는 흥건하고 질퍽거리는 이미지를 묘사한다. 관객은 그 폭력을 관찰하는 동시에 온전히 폭력에 노출된다. 아이를 입양한 안나의 가족이 스코틀랜드의 외딴 곳에서 평화를 누릴 때 니콜라이는 런던의 어두운 바에서 고독을 맞이한다.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사내는 구원을 약속할 뿐 정작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선의든 악의든, 폭력은 그 대상마저 철저하게 유린한다. 발가벗고 적을 맞이하더라도 살아남기 위해선 악마가 되야 한다. 폭력과 계약한 사내는 그 속에서 계속 가라앉을 따름이다. 죽여야 할 적도, 살려야 할 가족도 모두 다 잃은 채 홀로 아득한 폭력에 갇혀 살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