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승패로 기록된다. 하지만 거기 사람이 있었다. 전쟁은 승패보다도 생사의 문제로 기억돼야 한다. 전쟁이라는 명분에 휘말리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건너야 하는 인간들의 존재는 승패로서 기록되는 역사적 명제 아래 손쉽게 지워진다. 전쟁은 영문도 모른 채 생사의 기로로 떠밀린 인간들의 지옥도다. <고지전>은 이를 대사로서 명확하게 전달한다. “빨갱이가 아니라 전쟁과 싸우는 거다. 그러니 살아남는 게 전쟁으로부터 진짜 이기는 길이다.” 전쟁이 승패가 아닌, 생존의 문제임을 강력하고 확실하게 피력하고 환기시킨다. 물론 이는 숱한 전쟁영화들이 다루고 언급해온 이야기다. 하지만 <고지전>은 사람 죽이는 전장의 비극을 전시하고 눈물을 요구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 지옥도 속에서 이유도 알 길 없이 서로를 죽이고 죽어나가는 이들의 참혹한 비극에 주목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1년 7월 10일 휴전 협정의 시작과 함께 형성된 휴전선 부근에서 2년여 동안 교착상태의 국지전을 거듭한 후, 1953년 7월 27일에 이르러서야 휴전을 맞이했다. <고지전>은 남북의 대표가 만나 군사분계선과 포로교환 문제로 탁상공론을 거듭하던 2년 여간의 휴전 협정 기간 속에서 고지 점령을 위해 소모적인 전투를 벌이던 휴전선 부근의 숱한 전투를 펼치던 치열한 전선 가운데 하나로 시선을 돌린다. 후방에 근무하던 방첩대 중위 은표(신하균)는 애록고지에서 전선을 지키는 악어중대 중대장의 죽음을 비롯해서 일부 부대원이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혹을 조사하라는 명을 받고 애록고지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참전했다가 북한군에게 끌려가 죽은 줄만 알았던 친구 수혁(고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은표는 애록고지를 둘러싼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는 동시에 참혹한 전장의 진실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매일 같이 약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고지 전투 속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가운데서도 전장의 일상은 흐른다. 그렇게 흐른 일상이 어느새 2년여 시간에 다다라서 어제 봤던 그 놈이 살아있었는지, 죽었었는지 분간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돼버린 고지의 병사들은 어제 올랐던 그 고지에 또 오르고 내리며 매일 같이 생사의 기로를 넘나든다. <고지전>은 치열한 고지 쟁탈전에 나서는 병사들의 일상을 그리며 숙연하게 내리쬐는 전쟁의 비장함 대신 그 아래 드리워진 부조리한 전쟁의 단면들을 채집해 나간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해야 하기에 전장에 끌려 나온 젊은이들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전선에서 한 뼘의 땅을 넓히기 위한 하루살이로 소모된다. 땅따먹기에 열중하는 윗대가리들이 탁상공론 속에서 시간을 허비할 때, 생존의 본능마저 찢겨 나뒹구는 고지를 기어올라가며 죽어나가거나 죽어나가는 전우의 시체를 밟고 넘는다.
<고지전>은 전쟁이 숙연하거나 엄숙하게 기념될만한 역사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비극임을 명백하게 전시한다. 그리고 이런 비극을 방관한 채 한 뼘의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당연하게 요구하는 권력, 더 나아가 국가라는 이름으로 비호되는 결정권자들의 부조리한 행실을 폭로한다. <고지전>은 아비규환 같은 전장의 풍경을 통해서 이 땅의 부조리한 역사를 환기시키는 진보적인 전쟁영화다. 생생하게 묘사되는 전투 시퀀스의 프레임이 인간적인 윤리에 대한 고찰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고지전>은 한국전쟁을 다룬 지난 영화들에서 한 발 나아간다. 이념의 대립이라는 빤한 수식어 대신 그저 생사의 기로 속에 내몰린 인간과 인간의 덧없는 사투가 낳은 명목 없는 비극의 온도를 서서히 가열시킨다.
<영화는 영화다>와 <의형제>를 통해서 갈등 노선에 놓인 사내들의 멜로를 그려낸 장훈의 장기는 <고지전>에서도 여전하다. 하지만 대립과 연대를 거듭하는 두 인물의 긴밀한 감정선을 그리던 전작들과 달리 전쟁영화라는 스케일 안에서 다양한 인물의 관계도를 그리는 <고지전>은 너르고 보편적인 공감의 영역으로서 인물들의 감정선을 펼쳐 보인다. 은표와 수혁의 대립적 구도와 함께 북과 남의 경계에서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적으로 대치한 이들이 똑 같은 바람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될 때, 이는 1대1의 관계로 그려지던 장훈의 전작들 속에서 발견되던 등을 맞댄 남자들의 미묘한 연대적 감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박상연은 <고지전>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이념이라는 거대한 명분에 짓눌린 개개인의 비극을 환기시켜낸다. 그리고 이제 연출전문 감독이라 불려도 좋을 장훈은 주목할만한 신예 연출가의 수준을 넘어서 진짜 물건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저마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들의 열연 속에서도 신예 이제훈은 비범하게 돋보인다.
치열한 전투와 전투 사이에서 소소한 일상을 영위하는 이들의 생이 일거에 타 들어가는 클라이맥스는 <고지전>의 본체나 다름없다. 살아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일시적인 희망으로 부풀어오르다 이내 꺼져버린 광경은 전쟁기념비 속에 기록된 이들에 대한 감사보다도 분노해야 할 대상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젊은이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 기득권들의 행태는 그 시절의 전장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 사회에서도 만연한 부조리와 다를 바 없다. 시대는 변했고, 상황도 달라졌지만 몰염치와 몰상식으로 시대를 지배하는 이들의 세태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경계심을 부추기는 어떤 이들의 자극적인 멘트처럼 이 땅에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해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그 주적에 대한 적개심이 아니라 그 전쟁의 명분을 부추기는 우리 안의 어떤 입이다.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며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것을 강요하는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 입으로 세상을 움직인다. 그러니 기억해야 한다. 전쟁이란 승패의 기록이 아닌 생사로 기억돼야 하는 것임을, 승자와 패자가 아닌, 산 자와 죽은 자의 비극임을,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고지전>의 주제는 명확하다. 빨갱이가 아니라 전쟁과 싸우는 거다. 그러니 살아남는 게 전쟁으로부터 이기는 거다. 전쟁이 승패가 아닌, 생존의 문제임을 거듭 환기시킨다. 물론 숱한 영화들이 해왔던 이야기다. 하지만 <고지전>은 사람 죽이는 전장의 비극을 넘어서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지 알 길이 없는 전장에서 죽음을 조장하고 방관하는 치들에 관한 분노와 서러움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한편으로 의미심장하다. 땅따먹기에 열중하는 윗대가리들이 탁상공론에 열중하는 가운데 살기 위해서 죽이고 죽는 청년들의 모습은 단순히 전장이 아닌 이 사회에도 만연한 부조리 가운데 하나다. <고지전>은 전장을 통해서 이 땅의 부조리한 역사적 환기까지 나아가는 진보적인 전쟁영화다. 장훈은 확실히 스스로 물건임을 증명하고, 선배 배우들의 열연 속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뚜렷이 각인시키는 신예 이제훈이 인상 깊게 남는다.
의문스런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사건에 연루된 소년과 소녀. 용의자의 자살로 수사는 종결되고 사건은 마무리된다. 그리고 18년 후, 살인사건을 담당했던 형사 사사가키가 성인으로 성장한 소년과 소녀, 료지와 유키호의 행방을 쫓는다. 일본의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으로 꼽히는 ‘백야행(白夜行)’은 밀폐된 인물의 심리와 퍼즐 같은 서사적 진행을 통해 추리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이다. 미스터리한 장르적 구조 속에 내재된 멜로적 감수성은 ‘백야행’의 특이점이라 할만한 지점이다. 은밀하게 감지되는 두 남녀의 감정적 교류가 평행적 거리감을 유지한 채 조각처럼 나열된다. 칠흑의 아스팔트를 얇게 가린 흰 눈처럼 멜로적 감수성을 가린 장르적 연막, ‘백야행’은 추리극의 베일로 감싼 멜로나 다름없다.
원작소설과 동명의 제목을 지닌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이하, <백야행>)는 이런 원작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리메이크에 반영했다. 무엇보다도 <백야행>의 관건은 각색의 완성도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870페이지에 달하는 단행본 3권 분량의 서사를 2시간 여의 러닝타임으로 변환해낸 결과물은 원작을 접한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지점이다. 20여 년의 세월을 밀어내는 서사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과 두 남녀의 주변부를 채우는 다양한 인물들까지, ‘백야행’은 한 편의 영화로 변주하기엔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지닌 소설임에 틀림없다. 일본에서도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된 바 있는 ‘백야행’의 영화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건 소설의 원형을 온전히 영상으로 변환하기 위해선 긴 호흡이 필요하다는 제약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원작과 달리 영화가 서사의 너비를 14년으로 압축한 것도 어쩌면 서사적 너비를 덜어내기 위한 방편은 아니었을까 추측할만한 단서로서 유효해 보인다.
일단 <백야행>은 인물과 서사를 적절히 생략하거나 도치시킴으로써 원작의 부피를 줄여나간다. 서사적 방아쇠가 되는 살인사건으로부터 격발되듯 순차적으로 나아가는 원작의 순행적 서사와 달리 현재와 과거를 적절히 섞어가는 서사적 구성은 적절한 선택이라 할만하다. 섹스신과 살인신을 교차한 도입부의 영상도 나름의 흥미를 당긴다. 서사를 재배열하는 각색의 측면에서 <백야행>은 어느 정도 성공적인 선택을 이뤘다는 감상을 준다. 다만 서사적 변주와 함께 원작과 다른 뉘앙스가 발생한다.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원작이 차분하게 진전될 수 있는 건 긴 서사적 호흡 속에서 세밀한 묘사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러닝타임의 제약을 염두에 두고 축약과 변주의 과정을 거친 <백야행>은 서사적 부피가 줄어든 반면 정서적 질량은 보다 넘친다. 그만큼 밀도가 높아졌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나열의 방식에서 성과를 거뒀지만 감정을 넘쳐내는 방식이 지나치게 성급하다. <백야행>이 원작과 명확히 달라지는 건 후반부의 감정적 표현에서 비롯된다. 결코 마주서지도, 마주치지도 않는 남녀의 거리감이 명확히 묘사되는 가운데서도 끊어지지 않고 지속되는 멜로적 감수성을 독자에게 인식시키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멜로적 감정을 끝내 직설적으로 호소하고 만다. 구체적으로 후반부에 다다라 두 남녀의 마주침을 묘사하는 몇 번의 과정은 그 자체로 실패적이다. 얇은 비닐에 담긴 물처럼 쉽게 터져서 넘쳐흐를 것 같지만 좀처럼 새어나가지 않는 감정의 내밀함을 유지한다는 것이 원작의 매력이라 한다면 <백야행>은 이를 거부하듯 정반대의 선택을 감행함으로써 신파적 비극성을 과감히 전시한다. 마치 원작에서 가려진 단면을 발굴하듯 두 남녀의 접촉을 노골적으로 묘사한다. 선택은 영화의 몫이다. 그리고 선택에 따른 효과적 책임 역시 영화의 몫이다. <백야행>은 후반부에 다다라 온전히 신파적 눈물을 강요하는 멜로로서 스스로를 가둔다. 감정이 차고 넘친다. 연막과 같은 신비감과 모호한 흥미는 온전히 휘발되고 증발된다. 원작과 다른 형태를 지닌다는 건 리메이크로서 가능한 선택이다. 하지만 원작과 차별화된 장점을 선사하지 못했을 때 그 선택은 오판이 된다.
전체적인 분량도 길다. 137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원작의 부피를 염두에 둔다면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백야행>은 사건의 개연성을 확보하는데 실패한 드라마다. 서사를 직조하는데 급급할 뿐, 인물의 심리를 매만지는데 소홀하고 불필요한 감정을 덧씌워 감상의 사족을 벌려나간다. 사사가키의 대역이라 할만한 동수(한석규)는 원작에서 일종의 중계자 역할을 하던 캐릭터다. 원작으로 치자면 평행적인 거리감을 둔 묘연한 관계 속에 놓인 미호(손예진)와 요한(고수)의 접점을 설명하는 캐릭터다. 이와 달리 영화는 동수를 두 남녀의 입장을 대변하는 중계자 캐릭터가 아닌, 또 다른 감정적 이입의 대상으로서 극에 활용한다. 역시나 다른 선택을 했다는 건 문제가 아니다. 다만 역시나 그 선택이 얼마나 효과적인가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동수가 자아내는 감정은 불필요한 확장이다. 딱히 그 확장된 쓰임새엔 설득력이 없다. 덕분에 감정적으로 집중돼야 할 두 남녀, 미호와 요한의 심리 묘사와 이를 보좌하는 배경적 묘사가 구체화될 너비를 상실하고 낭비적인 감정적 처리만 추가된다. 결말부에 다다라 두 남녀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일종의 강박처럼 보일 정도다. 앞서 해결하지 못한 감정적 충만을 뒤늦게나마 한방에 터트려야 한다는 강박이랄까. 결과적으로 후반부에 다다라 서로에 대한 연민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두 남녀의 태도는 극적인 일관성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형세에 가깝다.
<백야행>은 마치 전반과 후반이 다른 영화 같다. 이성적 형태로 나아가던 영화는 끝으로 다다를수록 눈물을 조장하는데 바빠 보인다. 결말부에 다다라 희미한 신파적 여운을 남기는 원작과 전혀 다른 감상을 부여한다. 원작과 유사한 형태적 결말을 선보이면서 전혀 상반된 감상적 차이를 남기는 건 이 때문이다. 시대적 분위기마저 적극 활용하는 텍스트의 방대한 부피를 이미지에 축약하기 위한 고민은 적당했지만 그 안에서 유지해야 할 감정의 질량적 보존에 무신경하다. 덕분에 전반적인 영화적 밀도마저 느슨해진다. 감정의 선이 불분명한 영화의 태도는 캐릭터들마저 그 감정 안에서 헤매게 만드는 것만 같다. 덕분에 배우들마저도 그 캐릭터의 늪에 빠진 것처럼 기능적인 묘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마냥 보인다.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선사하던 인물의 매력도 온데간데 없어진다.
백열등과 같이 미열한 밝기를 유지하는 원작과 달리 영화는 형광등처럼 깜빡 거리다 이내 환해진다. 덕분에 감정은 숨을 곳을 잃은 채 지나치게 명확히 노출된다. 감정적 명암의 안배에 실패했다. 감춰야 할 것과 드러내야 할 것에 대한 변별력이 온전히 상실된 것만 같다. ‘블랙 앤 화이트’의 대비적 미장센을 부각시키는 것도 좋지만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백야행>은 내밀하게 보존된 감정적 여운을 놓쳐버린 채 구질구질하게 감정적 호소에만 집착한다. 원작과 차별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원작의 장점을 놓쳐버린 셈이다. 결국 감상적 명암만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명확한 감상이란 분명 긍정적인 쪽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