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련된 사무실과 억척스런 생선가게의 이미지가 교차된다.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두 여성의 일상이 대조군을 이루듯 차례로 스쳐 지난다. 사실 두 여자는 어머니의 부음 앞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는 자매지간이다. 그러나 자매는 가까이 누워도 마주보지 않는다. 명주(공효진)와 동생 명은(신민아)은 배다른 자매라서 인지 닮은 구석도 없지만 성격도 판이하다. 그래서인지 둘 사이엔 보이지 않는 벽이 감지된다.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는 두 자매의 갈등과 화해를 이루는 로드무비다.
바다와 육지를 가로지르는 동선만큼이나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서사도 부지런하다. 명은의 친부를 찾아 떠나는 여정 속에서 두 자매의 관계에 얽힌 비화가 한 꺼풀씩 드러낸다. 그와 함께 멀찍이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의 심리적 거리도 좁혀진다. 갈등 뒤, 화해를 이루는 과정은 그 형태만으로 진부하지만 영화는 이를 상쇄할 만한 진심을 연출한다. 세대를 넘어 복잡한 가정사 속에 놓인 여성들의 갈등과 화해는 한 걸음씩 조용히 이뤄진다. 다만 그 끝에 놓인 파격적인 결말에서 논란이 예상된다. 맥락을 변질시키는 대목은 아니지만 영화가 기존에 이루던 정서를 전복시킬만한 파괴력을 지닌 탓에 반감을 살 여지가 발생한다. 캐릭터의 균형마저도 한쪽으로 급격히 기운다. 물론 흥미로운 사안이며 존중될만한 문제제기로서의 가치가 있다. 다만 그 여파에 대한 호불호가 영화 자체의 잔향을 날려버릴 만큼 만만치 않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까. 물론 말미까지 호연을 유지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어떤 논란과 무관하게 만족스럽다.
지금까지 출연작의 개봉을 기다리는 것과 특별히 다른 느낌이 있나? 흥행이 어떤 영화보다 궁금한 영화다. 저희 영화가 걸고 있는 모토가 요즘의 관객들과 만났을 때 어떤 반응이 올 지 궁금하지, 과연 흥행하게 될지, 아니면 몇몇 매니아층이 좋아하는 영화로 끝날 것인지, 궁금하다. 대중들의 지지를 얻는 영화가 될 것인지.
2000년에 인터넷에서 상영된 <다찌마와 LEE>는 선풍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사실 예상 밖으로 뜨거운 반응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걸 그냥 우리끼리 재미보고 말자는 생각으로 만든 건 아니니까. 물론 실험적인 부분이 있었고 인터넷 관객들의 일부가 그런 면을 좋아해줄 거라고 생각만 했을 뿐, 그 정도로 많은 분들이 좋아해줄지는 몰랐다. 그런데 그게 벌써 8년 전이다. 그리고 이번엔 정말 완전 상업영화로 나가는 거니까, 과거의 그것에 비해 다른 지점의 긴장감이 있다.
<다찌마와 LEE>는 당신을 코믹한 배우로 단정짓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했다. 배우로서 당신의 이미지에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 나에겐 독이 되고, 약도 되는 영화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독이 될 수 있을지언정 이 영화를 한번 완성시켜보고 싶었다. 인터넷용만이 아닌 상업용으로도 한번 캐릭터를 만들어보고 싶었던 거지. 물론 그것을 완성하는 건 감독이지만 그 작업을 같이 해보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후회는 없다. 다만 이왕이면 관객들도 많이 사랑해줬으면 하는, 그런 기대감이 있을 뿐이다. 배우로서의 고민은 좀 더 나중에 하게 될 거 같다.
첫 번째로 주연을 맡은 영화이기도 했다. 다만 그것이 극장판이 아닌 덕에 그 당시엔 좀 가벼운 마음으로 연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나름 촬영 분위기도 상당히 유희적이었을 것 같고. 재미있었다. 이런 경우가 다 있을까, 신기하기도 했고.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가 아니라 인터넷에서 상영되는 영화가 이런 반응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의외였지. 인터넷 영화라는 게 사실 전무후무한 작품이니까. <다찌마와 LEE>이후로도 인터넷 영화가 나오긴 했지만 그만큼의 반향을 부른 영화는 솔직히 없지 않았나. 게다가 요즘은 그런 시도도 없고, 그런 게 지금 생각해보면 재미있더라. 그게 이제 상업영화로 다시 탄생했기 때문에 감회가 새로운 건 있다. 대신 책임감도 그 때보단 더 따르고, 그런 양면성이 생기는 거 같다.
그 뒤로 몇몇 작품의 주연을 맡게 된 것이 <다찌마와 LEE>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그 당시 주연을 맡았던 두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다. 개인적으론 부담을 느낄만한 상황이 아니었나. 그게 내 인력으로 안 되는 거니까, 쉽게 얘기하면 주춤했다고 할 수 있지. 근데 배우가 항상 잘 나갈 수만은 없지 않나. 그건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연을 맡았던 두 편의 영화가 크게 흥행은 못했지만 그 뒤로도 작품을 꾸준히 하긴 했었고, 그래서 후회는 없다. 관객의 선택을 못 받은 것에 대한 아쉬움은 남지만 그 선택을 통해서 하나의 공부를 한 셈이니까. 좋은 추억이라고,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당시 무대에서 활동하던 배우 중, 요즘 쟁쟁한 연기자로 꼽히는 이가 많다. 그 당시 내가 운이 좋았던 게 최민식 선배님이나 설경구 선배님이나 송강호 선배님 같은, 소위 유명해졌다고 할만한 배우 분들이 했던 연극을 다 볼 수 있었다. 내 동기였던 황정민 씨나 정재영 씨도 원래 연극을 했었고. 정말 생각해보면 화려했던 멤버였다. 그 당시엔 연극 판에서 소문난 좋은 재원들이었다고 해야 하나. 그 때는 정말 잠재력 있는 좋은 배우들이 많았다. 정말 대학로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 정도로 연기 잘 하시는 분들이 넘쳤으니까. 어쩌면 그 분들이 오늘날 명성을 얻은 게 당연한 결과물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요즘에도 그런 재원들이 있다면 몇 년 뒤 빛을 발하겠지. 앞으로도 더 많은 분들이 나올 테고.
극단 ‘목화’에서 4년 동안 활동했었다. 과거에 했던 인터뷰를 보니 힘들어서 극단에서 나왔다는 대답이 있던데 어떤 점이 본인을 힘들게 했나. 4년 정도 있었으니까. 일단 영화를 좀 하고 싶었던 내 입장에서 극단은 나와야 될 거 같더라. 나름대로 건방진 결정이었지.(웃음) 결단이라고 해야 하나. 한 다리라도 걸치면 소속감이란 게 생겨서 극단에 있으면서 영화를 모색하기 힘들더라. 물론 과감히 나왔지만 그 선택도 어려웠다. 그 뒤로 영영 연극을 못할 것 같단 느낌도 들고, 내가 잘 나가는 배우도 아니었고, 그저 영화 한두 편 짧게 해본 게 전부고. 그래도 일단 나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결정에 후회는 없다. 그냥 적당할 때 나왔다고 생각한다.
주변에 지인들의 반응은 어땠나? 사실 내가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었고, 학생도 아니었고, 나름대로 일종의 프로였지 않나. 그 결정에 대해 주변에서 가타부타 할 수는 없었을 거다. 격려는 해줄지언정. 연극하는 선배라도, 너 왜 나가, 임마, 사실 이럴 순 없으니까. 물론 선생님께서는 처음에 말리셨지. 하지만 결국, 네 선택이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해라, 하시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이제 세월이 지나서 종종 뵙게 되면 적당할 때 잘 나간 거 같다는 말씀 해주시더라.
그 당시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던 배우들로부터 얻은 자극도 있었을 것 같다. 일종의 경쟁심이 발생했을 수도 있고. 대부분 형들이었기 때문에 경쟁심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극은 됐지. 저렇게 잘 되는 배우들도 있구나. 나도 열심히 해야지. 이런 시너지 효과는 있었다. 참 연기 잘하시네. 저분 죽인다. 이러면서 정말 열심히 해야겠구나,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나한테는 행운이었던 거지. 그런 분들 연기를 연극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 자체로 내가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까. 정말 세상에 연기 잘 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충분히 느꼈다.
장진 감독과의 인연으로 영화에 발을 들였다. 그런데 한때 장진 감독이 만든 ‘수다’를 떠나면서 서로 사이가 안 좋아진 게 아니냐는 소문도 돌았다. 물론 이것이 오해임을 스스로 해명했지만 이젠 장진 사단이라기보단 류승완 사단이라고 불려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지금도 장진 사단이라고 하고 싶다. 장진이란 사람 때문에 운 좋게 영화를 시작하게 됐으니까. 어떤 사람들은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니냐고 생각하지만 지금도 가끔 만난다. 얼마 전에도 장진 선배가 일요일마다 하는 ‘북카페’라는 라디오 프로에 출연했었고. 아무래도 내가 장진 사단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지금 찾고 있는 캐릭터가 나랑 맞지 않아서 같이 작업할 기회가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언젠가 자연스럽게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하고.
<주먹이 운다>에 출연한 이후로 <식객>의 제작과 개봉이 미뤄지는 까닭에 본인 의사와 무관한 공백기가 형성됐다. 사실 그 중간에 케이블 영화에 두 편 출연하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노출이 빈번하지 않은 탓에 묻히는 경향이 있었다. 나름대로 고민이 많은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배우는 누구나 침체기가 있다고 본다. 하는 족족 매번 뻥뻥 터질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난 나름대로 활동했다. <코마>도 케이블 영화로서 최초의 시도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그 전까지 내가 했던 캐릭터와 다르다는 게 마음에 들어서 했다. 물론 상업영화를 많이 하고 싶었지. 없어서 못한 것일 수도 있고. 결국 그런 상황이 2년 간의 공백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난 그 자리에 있었던 거다. 다만 출연했던 영화가 어쩌다 보니 미뤄지고 해서 그렇게 된 거다. 사실 공백이라고도 할 수 없는 거다.
그렇게 맘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이 힘든 부분이 아닐까 싶다. 코믹한 캐릭터로 깊게 각인된 것도 사실 본인의 의도가 아니었듯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 같더라. 만약 누군가가 임원희 하면 코미디가 떠오른다고 해서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하는 것도 웃기지 않나. 그렇게 하려고 한 건 아니지만 과정이 그렇게 흘러갔고, 어차피 그렇게 보신다면 그것도 내 책임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몫은 스크린에서 나름대로 더 좋은 코믹 연기를 하던지, 내가 코믹연기만 하는 배우가 아니란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것 뿐이다. 만약 이 인터뷰에서 내가 그렇지 않다고 써주세요, 라고 해 봤자 대중이나 관객들이 그 기사만 보고 날 판단할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흘러온 만큼 앞으로 어떻게 또 흘러가느냐가 중요하겠지.
박찬욱 감독의 <쓰리, 몬스터>에서 연기했던 테러리스트를 생각해보면 보여주지 못한 바가 분명 있을 거란 생각도 든다. 나도 매우 아끼고 좋아하는 캐릭터다. 기회가 된다면 그런 역할도 하고 싶다. 나에겐 소중한 캐릭터다.
<실미도>에서 원희 같은 역할도 입담이 재미있는 인물이긴 했지만 희화화된 인물은 아니었다.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지극히 리얼한 캐릭터였지. 물론 극의 숨통을 틔워주듯 희극적인 면을 책임지는 점도 있었다. 사실 내가 그렇게 코믹한 연기만 한 것도 아닌데 ‘다찌마와 리’가 셌나 보더라. 생각보다 안 그랬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말이다. 한 두 가지가 아니라 다양한 이유가 겹친 거 같아요. <재밌는 영화>같은 경우도 좀 컸고.
사실 진지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코미디가 당신의 장기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재밌는 영화>는 조금 과장된 코미디란 점에서 불편했던 게 아닐까 싶다. 나도 <재밌는 영화>가 대한민국 최초의 패러디 영화란 점에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런데 거기서도 보면 시치미 뚝 떼고 하는 연기가 많다. 나는 표정이 이상해진다거나 그런 적 없다. 다만 나름 새로운 시도였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 그 뒤로 패러디 영화가 안 나왔으니까, 만약 그 영화가 성공했다면 아류작들이 많이 나왔겠지. 그래서 내 바람은 <다찌마와 리>가 흥행해서 꼭 류승완 감독이 만들지 않더라도 그런 키치적인 발상이나 B급 같은 장르가 많이 나와도 좋을 거 같다. 한국영화가 요즘 되는 것만 가고, 너무 몸을 사리지 않나. 거기에 숨통을 틔워서 작지만 다양한 시도가 나올 수 있다면 관객이나 한국영화한테도 좋은 게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극장에서 과연 이게 먹힐 것인가가 가장 큰 고민이겠다. 가장 큰 고민이고 걱정이지. 인터넷에서 보던 분들이 예매권을 가지고 뛰쳐나올 것이냐, 얼마나 다운로드를 안 받고 극장으로 뛰쳐나올 것이냐. 그런 점에서 입 소문이 참 무섭다. 이거 별로니까 다운받아 봐도 돼, 이런 게 아니라, 재미있더라, 하면 빨리 보고 싶어서 극장을 찾겠지. 이미 <다찌마와 리>라는 배는 떠났으니 그건 운명에 맡겨야지.
류승완 감독이 ‘다찌마와 리’를 다시 하자고 했을 때 기분은 어땠나? 생각이 좀 많았지. 물론 합시다, 하긴 했는데 내가 예전에 생각했던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거다. 그 때 내가 그것 때문에……(웃음) 하지만 일단 그런 걱정을 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런 건 나중에 걱정하고, 과거의 ‘다찌마와 리’와 다르게 캐릭터적으로 나름 더 고급스럽게 보여줘야 할 그런 부분의 고민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번 영화를 계기로 과거에 했던 연기를 다시 봤을 것 같은데, 과거에 자신이 했던 연기를 종종 다시 보는 편인가? 생각해봤자 어차피 다 지나간 거니까, 난 과거에 했던 걸 자주 보진 않는다. 물론 이를 계기로 해서 예전 <다찌마와 LEE>를 다시 보긴 봤지. 재미는 있는데 아무래도 유치하더라. 그 당시에 골 때리는 기발함으로 다가왔던 영화였지만 시간이 지났으니까. 요즘에 만약 다시 그대로 인터넷에서 보여준다면 과연 어떨까. 요즘 세대가 빠르지 않나. 최근에 놀랄만한 얘길 들었다. 물론 특이한 경우일지도 모르겠지만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보고 연기 잘 하는 신인 배우 나왔다고 어떤 사람이 그랬다는 거다. 이병헌 씨를 두고. (웃음) 웃기지 않나? 그리고 요즘 다시 상영하는 <영웅본색>에서 우리 세대는 달러에 불 붙이고 이런 장면을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세대는 웃는다더라. 저기에 왜 불 붙여, XX, 이러면서. (웃음) 감각이 다른 거다. 놀랍더라. 요즘은 그만큼 빨리 잊혀지고, 빨리 변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겠다. 그런 그들이 이 <다찌마와 리>를 어떻게 볼지.
<다찌마와 LEE>에서는 난이도 높은 액션 장면에서는 대역을 노골적으로 보여줬다. 반면 이번 작품에선 거의 티가 나지 않더라. 잘 가린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본인이 직접 연기한 씬도 꽤 많았던 거 같다. 아무래도 액션에 대한 대비가 중요했을 것 같다. 그 전에 만들었던 것처럼 대충하면 요즘 관객들이 쳐다보기나 하겠나. 액션은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예전처럼 대역한 티를 팍팍 내서 재미를 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재미를 배제한 다른 재미를 주고자 특별한 장치를 많이 했지. 많이 공을 들이긴 들였다.
그래서인지 <다찌마와 LEE>NG컷과 달리 이번 <다찌마와 리>NG컷에서는 고통을 호소하는 장면이 많았다. 실제로 오토바이 씬과 썰매 씬은 꽤 위험해 보였다. 부상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 액션은 몇 번 찍어봤으니까, 힘든 것도 알고, 힘들어야 관객이 즐겁다는 것도 안다. 힘든 걸 알면서 하는 만큼, 힘들어서 보람이 있다는 것도 안다. 멋있지 않나. 그게 액션의 매력인 거 같다. 솔직히 어디가 크게 다쳤다고 할만한 건 없지만 잔부상이 많았다. 소위 말하면 까지는, 타박상이 많았지. 그래서 어디가 터지고 그래야 다쳤다고 말하고 기사로 생색낼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하더라. (웃음) 찰과상 이런 건 사실 티도 안 나니까.
사실 촬영현장은 치열했을 것 같다. 하지만 현장의 상황과 반비례하게 영화는 상당히 호쾌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본인이 지닌 연기적 경험으로서의 기억과 영화적 결과물 사이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독비도>에 나왔던, 외팔이 검객의 만주 벌판 씬을 촬영한 영종도가 벌판이라 정말 추웠다. 추위 때문에 엄청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아수라장, 아비규환이 따로 없을 정도로 정말 힘들었다. 썰매액션 같은 경우는 아마 세계적으로 최초일거다. (웃음) 외투 타고 내려간 사람은 처음이니까, 누구도 해본 적 없고, 아무런 노하우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될지 서로 모르니까 거의 연구하면서 찍다시피 하고 그래서 고생도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는 일이다. 스키장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이리 찍고, 저리 찍고 했던 기억이 난다. 새로운 시도란 점도 특별하고.
썰매 씬은 돌발적인 경우가 많았을 텐데. 제어가 잘 안되니까. 외투를 타고 내려가다 보니 쭉 내려가다가 제어가 안되면 구르기도 하고, 잘 내려가다가 갑자기 안 미끄러지는 경우도 있고. 그런 노하우가 없어서 위험한 것도 많았다. 설원에서 타는 차, 스노우 모빌(snow mobile)이라 하나, 거기에 매달려 내려가면서 카메라로 찍고 그랬는데 종종 위험한 순간도 있었지. 가파른 경사에서 내려가며 찍다 보니까.
마음가짐 자체가 과거와 다를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마음가짐이란 건 당연히 달라야 했다. 액션뿐만 아니라 연기적으로도 그렇고. 우리가 2000년에 했던 그런 치기 어린 장난과는 다르지 않나. 몇 십억을 책임져야 되는 입장이고, 극장에 거는 영화니까 관객들이 돈 아깝지 않을만한걸 보여드려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코미디란 게 원래 어렵기도 하고.
캐릭터적으로 좀 더 비장한 느낌이 가미됐다. 좀 진지해졌지. 2000년의 ‘다찌마와 리’는 어디서 나타난 지도 모르는 일종의 협객이자 건달이었지만 이번엔 그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일제시대의 첩보원이 된 셈이다. 물론 캐릭터가 완전히 달라진 건 아니다. 일단 뿌리는 그대로 있고 그래서 ‘다찌마와 리’라고 부르는 거고. 그런데 그가 좀 더 점잖아지고, 진지해진 거지. 여러 캐릭터가 있지만 내가 중심을 잡고 가야 하는 것이기도 했고. 더 웃겨보지 그랬어, 라고 말하는 분이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지만 다찌마와 리의 진지함 속에서 오는 웃음을 주려고 했다. 심지어 구르는 장면조차도 진지하지 않았나. (웃음)
구르는 와중에 나오는 어이쿠, 하는 추임새가 상당히 재미있다. 그게 안 들어가면 다찌마와 리가 아니지. 사실 구르면서 좀 더 많은 소리를 냈는데 원래 사운드에 묻힌 건지 잘 안 들리더라. 어~허, 어~허, 하는 이런 것도 있었는데 그게 안 들리더라. (웃음)
사실 다찌마와 리는 애드립이 가미되기 쉬운 캐릭터 같지만 실제로는 대사의 합이 치밀하게 짜인 상태이기 때문에 즉흥적인 것을 가미할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본인도 애드립을 잘 안 한다고 들었다. 이번에도 애드립은 별로 없었나? 별로 없다. 왜냐면 대사 자체가 문어체라서 섣불리 애드립을 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처음에 마담 장의 대사 봐라. 외부인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이 곳에서 누군가의 눈빛이 느껴지는 건 긴장 때문에 생긴 나의 착각이겠지? 대사가 어려워서 입에 붙지도 않는다. (웃음) 이런 대사를 가지고 애드립을 하기란 힘들지. (웃음) 물론 약간의 애드립은 있긴 있지만 그게 채 10%가 되지 않을 거다. 철저히 계산된 대사를 해야 하니까 다른 배우들도 아마 별로 없었을 거다.
아무래도 대사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장문의 대사를 외우는 것도 애먹을만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이 영화는 시적인 문어체 대사들이 기교로 작용하면 끝나는 거다. 그걸 재미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려운 거 같다. 난 시종일관 진지하기 때문에 그걸 지루하게 느끼지 않게 만드는 것도 관건이고. 예를 들면 만주 벌판 씬에서 국경 살쾡이가 다찌마와 리를 찾아와서 그냥 싸우면 되는데 멋있게 한마디씩 주고 받는다. ‘죽을 때가 되니 제삿날을 부르는구나.’ ‘뜸을 들여야 음식이 맛있는 법.’ 그런데 요즘 영화는 안 이렇지만 옛날 영화는 진짜 이랬거든. ‘네가 아직 내 주먹 맛을 못 봤구나.’ 이런 식으로 일장연설을 하지 않고 바로 싸우면 어색했던 시대니까. 그런데 요즘은 그게 아니지 않나. 그냥 팍팍 치고 나가는 시대니까. 그런 옛 것의 즐거움을 주려고 잊고 있던 것들을 끌어낸 거지. 그게 재미없다고 하면 할 수 없는 거지만, 그런 과거의 기법들을 요즘 관객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하다.
다찌마와 리는 정체불명 자체를 매력으로 끌고 가는 특이한 캐릭터다. 족보도 없는 듣도보도 못한 캐릭터지. (웃음) 걔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형제는 있는지, 과거에 대해서 캐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냥 다찌마와 리는 다찌마와 리다. 그게 재미있는 거 아닐까? 그리고 다찌마와 리는 무엇이든 갖다 붙여도 다 얘기가 된다. 류승완 감독님하고 농담처럼 얘길 했는데 다찌마와 리가 어느 여고에 교생으로 간 거다. 그렇게 만든 얘기가 ‘여고개담’, 부제가 ‘다찌마와 리 여고 교사가 되다’ 여고에서 다찌마와 리가 여학생들과 함께 귀신들과 싸우는 거지. (웃음) 갖다 붙이면 안될 얘기가 없다. 내년 여름에 대비해서. (웃음) 물론 장난으로 한 얘기다. 그냥 그렇게 된다는 거지.
호환이 그만큼 용이한 캐릭터란 의미다. 다찌마와 리가 미래에 갈 수도 있고, 터미네이터와 맞붙다. 이런 식으로. 이러니까 점점 <영구와 땡칠이>처럼 되는구나. (웃음) 이래저래 재미있는 발상이 아닐까 싶다.
아까 말한 만주 벌판의 대결씬처럼 고전액션영화에서 차용한 장면도 더러 있다. 이번 <다찌마와 리>를 위해 참고한 몇몇 작품이 있을 것 같다. 박노식 감독님의 <악인이여, 지옥행 열차를 타라>가 제목으로 차용된 건 권선징악이란 영화의 주제가 서로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이렇게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까지, 과거 액션영화에서 여러 가지 소스를 따왔기 때문에 어떤 특정영화뿐만 아니라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한국영화는 볼 수 있는 대로 다 찾아서 봤다. 주성치의 <희극지왕>과 같은 설정도 가미됐고, <서극의 칼>을 의도적으로 재연한 장면도 있고.
아무래도 <다찌마와 리>의 즐거움은 정색하는 코미디가 아닐까 싶다. 특히 그 압록강, 두만강, 흑룡강 씬은 정말 배짱이 두둑하더라. (웃음) 내가 봐도 심하더라. (웃음) 현장에서 농담으로, 화면을 좀만 내리지, 이거 너무 뻥이 심한데, 그랬었다. 그리고 한강대교도 좀 가고, 흑룡강이면 좀 저기 서강대교도 가고 그러지, 너무 성수대교에서만 찍어. (웃음) 농담이고, 물론 그게 의도가 있는 거니까.
사실 이만큼 파격적인 실험영화도 없다고 여길 지경이다. 사실 그저 웃는 관객에게 반대로 무너진 성수대교를 생각헤라, 이런 건지도. (웃음) 그걸 정말 기발한 시도로 받아들이면 영화는 성공한 건데, 장난치고 앉아있네, 쌈마이들, 이러면 끝나는 거다. (웃음) 그러니까 이 영화는 좋게 보면 기발해서 용서가 된다. 반대로 좀 트집잡고 들어가자면 트집잡을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과연 이 영화가 어떻게 될까.
‘다찌마와 리’의 가르마 넓이도 변했다. 2:8에서 3:7비율로 미묘하게 옮겨진 것 같더라. 그것도 사실 의도된 변화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의도된 거다. 사실 예전엔 거의 9:1이었지. 그런데 이번엔 옛날 배우들처럼 보이려고 정확한 8:2로 멋을 낸 거다. 나름대로 그 당시 멋이었으니까. 의상도 자주 갈아입지 않나. 사실 옷도 그 시절로 치자면 촌스럽진 않다. 세련된 다찌마와 리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고. 악당들도 그 당시의 멋을 내려고 노력했고, 여배우들도 그 당시의 화장법, 그 당시의 유행했던 옷을 입고 나온다.
사실 시대적인 분위기가 감지된다. 사실 그 지점이 과거 <다찌마와 LEE>와 이번 <다찌마와 리>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렇다기 보단 그 당시 영화 속 연기가 그랬다는 걸 보여주는 거지. 물론 그 당시 말은 못 들어봤지만.
시대극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시대극?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는데.
목소리의 발성톤이 사극에 어울릴 거란 생각이 든다. 한번도 염두에 둔 적은 없나? 이렇게 하면 사극이 들어오겠다, 라는 게 가능한 것도 아니니까. (웃음) 옛날부터, 왜 사극이 안 들어오지? 이런 생각은 해본 적 있다. 목소리가 코믹해서 그런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들라 해라’ 나름 어울리는데. (웃음) 하지만 한번도 제의가 들어온 적이 없다.
아직도 코믹한 장르의 시나리오 제의가 주로 들어오는 편인가? 아직도 그런 편이지. 하지만 그게 많이 상쇄됐다. 2000년에 <다찌마와 LEE>끝나고 3~4년 정도 그랬는데 그 뒤로는 여러 역할이 많이 들어왔었고. 또 모르지. 이번에 다시 그렇게 돌아갈지도.
다시 연극무대로 나가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 하고 싶었는데 못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하긴 해야 한다. 다만 자꾸 영화를 하게 되야 하니까 미뤄지는 거다. 사실 연극도 날 찾아줘야 하는 거지. (웃음) 어쨌든 그런 마음은 갖고 있다. 어차피 난 지금도 연극에서 연기를 배웠다고 생각하니까. 물론 심심찮게 연극은 들어온다. 못해서 아쉽지.
종종 멜로 영화를 하고 싶다는 의견을 표했었다. 농담 반 진담 반처럼 보이지만. 그게 약간 와전된 바가 있다. 물론 하고는 싶지. 그런데 하고 싶은 장르를 꼭 찍어서 말해주라고 해서 그냥 농담처럼 멜로, 이런 것뿐이다. 사실 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겠어. (웃음)
‘다찌마와 리’라는 역할이 본인에겐 중요한 전환점이 아닐까 싶다. 과거 배우로서의 인지도를 넓히게 만들어 준 캐릭터였다면 이번엔 또 한번 배우로서의 중간결산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싶다. 반복이란 표현보단 새로운 시작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좋은 결과가 나서 여러 가지 장르적인 발전에도 기여한다면 나 자신에게도 좋은 거고 보람된 거니까 관객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면 하는 게 가장 큰 바람이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가 중요한 거 같다.
낯을 좀 가리는 편인 거 같다. 맞다. 낯을 좀 가리는 편이다.
아무래도 영화에서 보여준 호방한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의외처럼 보인다. 영화에서 보여준 그런 캐릭터대로 살자면 차라리 평상시에 살기 힘들다. 지치지. 사람이 진지할 때도 있고, 안 그럴 때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지 않나. 영화적으로 기대하는 건 다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런 이미지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영화적인 이미지도 나에게 담겨 있는 것이겠지. 다만 실제로 그런 이미지처럼 살거라 생각하니까 그런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겠지만. 사실 그렇게 살면 미친 놈처럼 보일 거다.
그런 성격으로 연기를 마음먹게 된 사연이 궁금하다. 어쩌다가 학교에서 연극반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게 즐거웠다. 내가 잘 하는 게 있네, 뭐 이런 거. 내가 이걸 하면 참 행복한데 성격이 문제될 리가 없는 거지. 성격을 바꿀지언정 그게 좋으니까. 그래서 많이 적응했던 거 같다. 물론 일부로 바꾸려고 했던 건 아니었고 사람들과 어울려서 공동 작업하면서 자연스럽게 바뀐 것 같다. 바뀌려고 노력했다기 보단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니까.
연기를 통해서 스스로를 극복하게 된 측면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거창할 것까진 없지만 있다고 볼 수 있죠. 내 스스로가 거기에 맞춰져 가는 거니까.
어쨌든 이제 우리는 통성명이 필요 없는 사이가 됐다. 지옥행 급행열차는 안타도 되겠지. (웃음)
지난 2000년, 인터넷에 유포된(?) 류승완 감독의 중편영화 <다찌마와 LEE>를 보며 방구석에서 낄낄댄 기억이 있는 이라면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이하, <다찌마와 리>)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다찌마와 리>는 모니터에서 스크린으로 주소지를 옮긴 자기 복제작,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품종 개량작이라 명명해도 좋다. 버전업된 ‘일백푸로 후시녹음’과 ‘정통 액숀’, 그리고 상하이와 만주, 스위스, 미국까지 이어지는 다국적 비(非)현지(?) 로케이숀으로 돌아온 <다찌마와 리>는 ‘디지털 푸로젝트’ 액션협객물 <다찌마와 LEE>를 글로발 스케일의 잘빠진 첩보액션물로 확장시킨 또 한번의 문제작이다.
과장된 수사를 남발하던 한국고전액션영화의 문어체 대사를 원형 그대로 영화에 활용한 <다찌마와 LEE>는 구시대적 촌스러움을 복고적 유희로 승화시키는데 전략적으로 성공했다. <다찌마와 리>역시 그 전략을 뻔뻔하면서도 노골적으로 답습한다. 다만 모니터에서 스크린으로 스케일이 넓어진 만큼 그것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음을 간파한 것인지 의도적 규모가 넓어졌다. 자신의 문제작을 다시 한번 매만진 류승완 감독이 추가한 메뉴의 정체는 박노식 감독의 1977년작, <악인이여, 지옥행 열차를 타라>에 ‘급행’의 추임새를 넣어 변주된 긴 부제로부터 음미할 수 있다. 권선징악의 목표가 뚜렷한 6~70년대 한국고전액션물에서 만연했던 수사남발 장문대사를 익살스럽게 배치하던 <다찌마와 LEE>의 전략적 응용사례를 헌사수준으로 격상시키는 한편, 그 영역을 한국고전액션물에서 동아시아 첩보활극까지 확대했다. 게다가 유희적 스킬이 추가됐다. TV에서 종종 개그맨들이 구사하던 엉터리 외국어 음차가 거리낌없이 도입됐고, 그와 함께 무단 배포 형식의 인터넷 영화자막을 활용한 풍자적 개그까지 가미된다. 좀처럼 무시할 수 없는 위력적인 화장실 개그도 종종 눈에 띤다. 극장판은 과거 인터넷판보다 분량이 늘고 스케일이 확대된 것에 만족하지 않고 유희적 너비의 폭을 더욱 발전적으로 확충했다.
<다찌마와 리>는 사실 모든 면에서 아이러니한 영화다. 쌈마이 정체성의 구시대적 B급 유희를 발산하지만 때깔은 최신판 세련미로 충만하다. 어찌 보면 이건 굉장히 실험적이다. 낡아빠진 구시대적 유물에 현대적 회화기법을 채색하는 모험이다. 만약 그 누군가가 이 영화를 보고 자지러진다면 그 의도적인 방식을 수용할 의사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관객이라면 그 의도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암묵적인 이해관계가 성립해야 한다. 시대를 배반하는 언어가 유희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 의도된 쓰임새에 대한 충분한 수긍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찌마와 리>는 모든 것이 헐거워 보이지만 실제론 상당히 계산된 구조로 작동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즉흥적으로 발생한 애드립을 추임새로 넣어도 상관없을 듯한 장문대사들의 희극성은 실제로 치밀하게 직조된 대화의 합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쯤 나사 풀린듯한 자세를 취하지만 실제론 확실한 의도를 품고 조율된 경로로써 진행되는 영화적 구조로 이뤄져 있다. 그만큼 모든 경로를 추적하는 배우들의 역할 몰입이 중요해진다. 그런 점에서 극의 전반을 이끌어가는 임원희의 연기는 애초에 <다찌마와 LEE>로 잉태된 그때만큼이나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 셈이다. 또한 국경 살쾡이 역을 맡은 류승범은 <다찌마와 리>에서 가장 큰 파괴력을 자랑하는 웃음을 발생시키는 다크호스라 할 수 있다. 물론 가장 무시무시한(?) 웃음의 희생양은 진상 8호 역의 정석용이 맡았다.-이건 보면 안다. 당사자에게 깊은 위로를.- 게다가 박시연의 일관성있는 후시 연기도 꽤나 눈길을 끈다.
하지만 뼈 속까지 유치 찬란해 보이는 이 영화에도 비범함은 있다. 코믹과 액션은 <다찌마와 리>의 양 날개나 다름없다. 전자가 관객과 스크린을 끼워 맞추는 너트라면 후자는 그것을 조이는 볼트나 다름없다. 웃음은 관객을 <다찌마와 리>로 응시하게 만드는 일종의 감상적 매개체라면 액션은 그 감상의 화룡점정을 찍는 결정적 지점이다. 최근 만주벌판을 무대로 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이 실제 만주를 카메라에 온전히 보존하며 호쾌한 활극적 기운을 담아낸 것과 비교했을 때 영종도를 눈 딱 감고 만주로 치환한 <다찌마와 리>의 성과는 더욱 선명해진다. 그것에 실제로 접근하지 않고서도 그것을 전시할 수 있는 대범함은 <다찌마와 리>가 단지 퍼포먼스 위장술에 능통한 혹은 우격다짐이 강한 영화라서가 아니다. 다찌마와 리가 자신을 찾아온 국경 살쾡이와 마적단 일행에 맞서는 일대 다수의 평원 결투씬은 만주 평원에서 말을 타고 내달리던 <놈놈놈>의 그 장면 못지 않게 스펙터클한 감상을 부여한다. 그 과정에서 류승완 감독은 세월 너머로 희미해진 한국고전액션영화에 새로운 육체를 대입해 재생하곤 한다. 그 순간만큼은 <다찌마와 리>가 품은 비범한 액숀 로망이 한없이 분출된다.
<다찌마와 리>는 마치 막 꾸며낸 거짓임을 알면서도 그 재미에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입담 좋은 이야기꾼의 언변과도 같은 매력이 있다. 물론 그 싸구려 유희의 의도를 체감하지 못하는 관객에게 <다찌마와 리>는 그저 열라 유치한 삼류영화로 몰락해버릴 공산도 있다. 하지만 그 유희는 순간적인 컷의 파괴력을 지니고 있어 만만찮다. 무엇보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뻔뻔함에 기가 차서 감탄할 정도다. 특히 거대한 자막을 패기만만하게 앞세운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흑룡강 씬을 예로 들만하다. 누가 봐도 성수대교임이 분명한 그곳에서 심지어 지나가는 차가 앵글에 포착되고 뒤편으로 아파트까지 적나라하게 보이는데 영화는 그 곳이 압록강이라고 시치미를 떼더니 후에 두만강과 흑룡강까지 재활용하면서도 딱 잡아뗀다. <다찌마와 리>의 다국적 로케이숀은 이렇게 완성됐다. 이 정도면 노골적인 커밍아웃이다. 하지만 그 우격다짐이 실소 대신 폭소를 유발하는 건 실제공간을 대리 출석한 그 짝퉁 공간들의 기능성이 기발하게 발휘되는 덕분이다. 순발력있는 유희를 그 순간에 확실히 소비하되 그것을 토막내지 않음으로서 전체적인 리듬을 해치지 않는다. <다찌마와 리>는 상당히 노련하면서도 민첩하고 성실한 영화다. 류승완 감독의 고군분투를 바탕으로 한 총체적 경험에서 잉태된 의욕적인 시도들이 상당수 엿보인다. <다찌마와 리>의 뻔뻔함을 높게 평가할 수 있는 건 그 의욕이 남기는 잘생긴 호감 덕분이다.
<백만장자의 첫사랑>(이하, <백만장자>) 이후 두 번째 출연작이네요. 작년에 개봉했었죠.
그 두 번째 영화에 모이는 관심도가 높아 보이네요. 그만큼의 부담감과 기대감이 교차할 것 같아요. 작업하는 동안에는 그렇게 많은 부담을 받질 않았어요. 작업하는 동안만큼은 감독님과 재미있고 즐겁게 촬영했죠. 다만 감독님과 같이 작업한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부담을 많이 가졌었어요. 이명세 감독님이랑 작업하게 되면 힘들다는 말들이 주위에 워낙 많이 있어서, 감독님께서 영화에 대한 집중력이 되게 강하셔서 연기자들이 힘들어 하기도 한다고, 그래서 어떻게 할까 했죠. 감독님만의 스타일이 강하잖아요. 이전에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계신 감독님과 작업을 해서 조금 힘든 것도 있었는데, 촬영하면서는 재미있게 촬영했던 거 같아요. 부담감은 그때 초반에만 잠깐 생각했고, 지금은 이제 기대가 좀 커요. 영화를 어떻게 보실지.
사실 이명세 감독님이 완성하고자 하는 어떤 이미지들로 이뤄진 영화라 연기를 하는 당사자인 배우는 영화에 대한 감이 잘 안 오는 순간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앞뒤 연결 같은 건 전혀 생각 못했어요. 감독님의 머릿속에 영화가 다 들어있었기 때문에, 촬영할 때 저희는 씬만 가지고 고민했죠. 오늘 이 씬을 가지고 촬영하게 되면 이 씬만을 생각했지, 이 씬 앞에 뭐가 들어갔고, 뒤에 무엇이 이어지고, 어떤 씬일지 전혀 몰랐죠. 감독님께서 편집하기 나름일 테니까 잘 몰라서 그냥 하루 하루 해당되는 씬만 생각하며 촬영했던 것 같아요.
이명세 감독님께서 기자시사회 때 ‘좋은 꿈을 꿨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잖아요. 그런데 어쩌면 진짜 꿈을 꾼 건 배우들이 아닐까 싶네요. 잘은 모르겠어요. 아직까지 감독님과 배우들이랑 같이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을 얘기해보진 못했거든요. 글쎄요. 보는 관점은 관객들마다 다르시잖아요. 저희 스텝들도 똑같을 것 같아요. 아닐 수도 있지만, 영화를 보는 관점은 똑같이 흘러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M>을 처음 본 건 부산영화제라고 들었어요. 본인에겐 어땠나요? 저는 이제 촬영한 장면장면마다, 씬마다의 배열만 알고 있었는데 붙여놓고 보니까 정말 잘 이어진 거 같아요. 그걸 감독님께서 너무나 잘 하셨던 거 같고, 저는 이제 이 영화가 이렇게 만들어질 영화였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이해가 안되거나 난해하다라고 느끼진 못했어요. 영화 한 장면마다 정말 너무나 생생히 느껴졌고, 잘 만들어진 영화 한편 같다고 생각했었거든요.
<M>같은 영화는 왠지 연기 경험이 많은 배우에게도 생경한 작업이 아닐까 싶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경험이 짧은 배우한텐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어요. 몸에 밴 습관이 없기 때문에 이런 비전형적인 연기 경험을 먼저 겪어보는 것이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물론 이제 많이 어려울 거라고 촬영 전에 주위 분들께서 걱정해주셨지만 저도 더 걱정스러웠죠. 그래서 주위 분들에게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라고 여쭤보니까, 그건 ‘네가 노력하기 나름이고, 지금 이 시점에서 이명세 감독님처럼 대단한 분과 작업을 한다는 것조차 만으로도 너한테 많은 플러스가 될 거다’라고 얘기해 주셔서 편안한 마음으로 하게 됐죠.
이명세 감독님 처음 만났을 때 기분은 어땠어요? 성격 면에서 대하기 어렵다거나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명성 때문에 부담되진 않았나요? 그런데 사실 저는 감독님에 대해 잘 몰랐었어요. (웃음) 그냥 <형사>란 영화만 봤지, 오래된 옛날 영화들은 잘 못 봐서 잘 몰랐거든요. 그런데 제가 조용해서 말이 없었는데 오히려 괜히 죄송스러울 정도로 감독님께서 말씀도 많이 해주시고, 잘 챙겨주셨어요. 어렵다고 한다면 단지 그런 거 같아요. 감독님께서 워낙 말씀들을 어렵게 하시거든요. 영화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워낙 많이 가지고 계시니까 제가 그분의 그런 기질을 따라가기에는 힘들어서 어려웠죠. 영화에 대해서 얘기하신다고 하면 제가 조금 어려워하진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감독님께서 영화 외에도 회화나 문학적으로도 상당히 해박하시죠. 예.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나세요.
그런 면에 대해서도 어떤 영감을 받을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 전 워낙 예술적 감각이 떨어져서요. (웃음) 그림이나 미술 같은 건 잘 못해요. 감독님 만나면서 굳이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사진이나 그림 같은 걸 보고 어느 정도의 느낌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조금 얻었던 거 같아요. 그런 것들과 관련된 자료를 되게 많이 보여주셨거든요.
미술은 별로지만 운동은 잘 한다고 들었어요. 예. 운동 좋아해요. (웃음)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와는 참 반대네요. (웃음) <M>에서는 넘어지는 슬랩스틱 연기도 많았어요. 뛰다가 다칠 때가 많았어요. 뛰다가 워낙 저를 쫓아오시는 분이 다리가 길어서 거리 차이를 느껴야 되는데 저를 자꾸 따라잡으시니까, 제가 전력 질주하면서 진짜 뛰어야 했거든요. (웃음) 그러다가 커브 돌다가 넘어져서 다친 적이 많았죠.
유일하게 <M>에서 액션 연기를 한 셈이네요. (웃음) 그런데 사실 <M>은 화면을 통해 완성되는 영화이기 때문에 상황만을 인지하며 연기한 배우로서는 완성된 영화를 짐작하기 어려웠을 거에요. 그래서 완성된 영화는 낯설면서도 놀라웠을 것 같아요. 저한테는 거의 모든 장면이 그렇다고 볼 수가 있어요. 어떤 관객은 이상하게 편집된 것 같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전 전혀 그런 게 없었죠. 오히려 편집을 정말 잘 하신 거 같다고 생각해요, 정말 한 장면마다 너무 잘 나와서.
<백만장자>같은 경우는 야외 촬영이 대부분이었지만 <M>은 세트 촬영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런 차이점도 컸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그런 점도 많이 느껴졌어요. <백만장자>때는 거의 로케이션 촬영이었거든요. 세트라고 해도 거의 밖에 세트를 지어놓은 채 촬영하고 그랬는데 근데 이번 작품은 거의 80%가 세트라서 조금 답답할 때가 있었어요. 세트장 안에 계속 갇혀만 있으니까 나가고 싶다고만 생각했죠. 그래서 쉬는 시간마다 틈만 나면 나가고 그랬거든요. 어떻게 보면 스텝들이랑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들을 밖에서 보낸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하네요. <백만장자>같은 경우는 지방에서 촬영하다 보니까 자연을 느낄 수 있었고 예쁜 것도 많았거든요. 근데 <M>은 어둡기도 해서 답답한 게 없지 않았죠. 그래도 그 어둠 속에서도 빛과 조명만으로 비쥬얼을 너무 잘 잡아내서 신기했어요.
우연인지 모르지만 두 편의 영화에서 상대역이 다 알아주는 꽃미남 스타네요. (웃음) 남자배우 복이 많은 편일지도 모르겠네요. 주변의 또래 친구들도 많을 텐데 부러워하지 않나요? 부러워하기도 하는데, 제 친구들은 오히려 덤덤해요. 그냥 저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물어보죠. ‘촬영 어땠어?’ 이런 얘기 하지, ‘그 사람은 어때?’ 그런 얘기들은 별로 안 하는 거 같아요.
<백만장자> 때, 현빈 씨는 현장에서 어떤 편이었나요? 빈이 오빠도 처음에는 되게 내성적이었는데, 촬영하면서 별로 오랫동안 얘기 못하고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정말 급격하게 친해졌어요. 그렇게 친해지고 나니까 장난도 많고 즐겁게 대화도 나눌 수 있었어요.
그에 반해서 강동원 씨는 끝까지 무뚝뚝한 편이었다고 들었어요. (웃음) 네. 워낙 낯을 가리시는 거 같아요.
사실 강동원 씨 같은 잘 생긴 배우는 외모 때문에 진지함이 많이 가려지는 면이 있어요. 어쩌면 그건 장치 본인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강동원 씨는 <M>을 통해 자신을 한 꺼풀 벗겨내는 연기를 보여준 셈인데 옆에서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강동원 선배님은 <M>에서 그런 걸 많이 얻어간 것 같아요. 저도 이제 계속 이미지적으로 많은 걸 보여드렸기 때문에 다음 작품에서는 이미지보다는 좀 더 연기나 성격 같은 걸 많이 보여드리려고 노력해서 촬영을 했었어요.
다음 작품이라면 얼마 전 촬영이 끝난 <내사랑>말이죠? 일단 <M>과는 상반되게 밝은 분위기의 영화네요. 어땠어요? <M>을 찍고 난 후, <내사랑>을 찍게 되니까. 이제 <M>의 다음 작품임을 고려해서 고른 게 <내사랑>인데 우선 <내사랑>의 캐릭터는 미미보단 조금 밝은 아이에요. 그런데 사실 <M>이 분위기 자체가 어두울 뿐이지, 미미라는 캐릭터가 어두운 편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이번엔 배경도 밝은 작품을 선택했어요. 캐릭터도 워낙 밝고, 되게 수다스럽다고 해야 될까요? 워낙 캐릭터도 좋고 시나리오도 좋아서 작품을 골랐어요. 이미지적인 면은 많이 보여드렸으니까 이번엔 조금 연기적인 면을 보여드리고 싶기도 했고요.
작품의 분위기와 상관없이 그 동안 연기한 캐릭터는 항상 밝은 면이 강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게 실제 성격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막상 대화해보니 꼭 그렇진 않네요. (웃음) 인터뷰같이 일적으로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조금 조심스러운 게 있어요. 잘못 보여서는 안될 것 같고, 행동 같은 것도 조심스러워야 할 것 같아서 좀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친한 친구들하고 만나면 되게 수다스럽게 되요.
<백만장자>나 <M>이나 같은 소녀지만 <백만장자>의 은환은 나이에 비해 성숙한 느낌의 캐릭터였지만 <M>의 미미는 연령대에 맞는 풋풋한 이미지가 두드러졌던 것 같아요. 계절에 따라서 마음이 조용할 때도 있고, 활발할 때도 있고, 기분적인 차이가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백만장자>찍을 때는 분위기가 차분하고 뭐랄까, 가을의 분위기 같은 게 느껴져서 마음이 좀 더 성숙했던 거 같아요. <M>은 그냥 편하게 촬영했는데, 물론 두 개 다 편하게 촬영했어요.
작년부터 활동이 활발했어요. 열 아홉에서 스무 살 오늘이 되기까지 드라마 세편에 영화 두 편을 마쳤네요. 참 바빴을 것 같은데 개인적인 평범한 생활을 많이 포기해야 했을 것 같기도 하네요. 제 인생에 있어서 제일 바빴던 거 같아요. 그 전에 고등학교 생활을 많이 못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고등학교 친구들과 자주 어울리지 못해서 아쉬운 게 있죠. 그래도 초등학교, 중학교 때 친구들이 워낙 많았고 지금도 아직까지 친구들은 많이 있으니까. 그래도 촬영할 때는 그게 워낙 좋아서 아쉬운 거 없이 촬영했어요.
올 해 대학에 진학했어요. 연기와 병행하긴 쉽지 않을 텐데. 처음 한 학기 동안은 영화 촬영이 끝나고 조금 한가해서 학교 생활에 대해서 별로 조급할 필요 없이 그냥 잘 다녔어요. 그런데 이번 학기에는 영화 두 개가 개봉하니까 휴학해야 했죠.
캠퍼스의 낭만은 느껴봤어요? 아뇨, 별로 없던데요. (웃음) 저도 친구들이나 동기들과 잔디밭에 앉아서 책을 본다거나 도시락을 먹을 줄 알았는데 그런 분위기는 없더라고요.
미미라는 캐릭터엔 어떻게 접근했어요? 초반에는 미미라는 캐릭터가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설명이 안돼있어서 저 혼자 준비하기가 좀 힘들었어요. 그래서 감독님과 같이 영화사에서 얘기하고 자료도 보면서 미미의 캐릭터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죠. 근데 감독님께서 그때까지만 해도 저한테 계속 숙제를 내주셨어요. 미미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라고 숙제를 내주기만 하셨지, 미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촬영이 들어가기 전까지도 계속 혼자 생각했는데 생각을 해도, 해도 잘 모르겠더라 구요. 그냥 끝까지 계속 생각하면서 촬영하니까 확답이 나오진 않았지만 답에 근접한 것들을 계속 찾아가게 됐죠. 이것도 미미의 캐릭터에 어울리고, 저것도 어울리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만들어진 거 같아요. 결국 그렇게 하면서 캐릭터가 나오게 된 거였죠. 그리고 감독님께서도 설명을 좀 어렵게 해주시지만 생각해보면 그게 다 관련된 것들이었거든요. 나중에는 다 그런 말씀들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더라고요. 어렵게 설명해도.
<백만장자>의 은환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보여주는 연기가 필요했다면 <M>의 미미는 자신을 과장하고 없는 모습을 만들어야 했던 것 같아요. 연극적이랄까, 어쩌면 그런 점에서 더욱 연기라는 궁극적인 지점에 근접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그전엔 그냥 차분하고 조용한 연기만 해서 그렇게 하고 싶어도 어색할까 봐 못하고 그랬는데 감독님이 오히려 먼저 괜찮다고 해주시고, 제 연기를 열어주셨어요. 감독님께서 그런 걸 많이 끌어올려주신 덕분이죠.
결국 미미는 처음으로 거짓말 같은 연기를 해봤다고 할 수 있겠네요. 배우로서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연기를 소화하는 것도 하나의 도전이었을 것 같은데요. 그건 연기자가 연기할 때 생각하기 나름인 거 같아요. 나한테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걸 끄집어내려고 하다 보니까 그게 어색하게 보일 수가 있고, 끄집어내고 보니 ‘나한테도 이런 면이 있었구나, 이렇게 연기를 할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돼서 연기가 어색하지 않게 또 하나의 캐릭터가 될 수 있는 거 같거든요. 저는 연기를 할 때만큼은 이게 너무 과장이 돼서 어색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만약 그게 캐릭터에 어울리고 감독님께서 오케이 하신 거라면 그걸 믿고 따라갔죠.
<백만장자>때도 그랬지만 <M>에서도 카메라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어요. 영화는 왠지 모르게 편해요. 드라마는 조금 부담되기도 하는데, 그러니까 대사의 양이 너무 많아서 대사를 틀리지 않게 잘 전달하려다 보니까 조금 부담을 갖게 되요. 그러다 보니까 연기가 조금 딱딱해지거든요. 그런데 영화는 분위기를 너무나 편하게 만들어주시는 것 같아요. 스텝들도 그렇고, 감독님께서도 그렇게 만들어주셔서, 그리고 어색하면 계속 다시 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보니까 드라마보다 영화에서 편하게 연기할 수 있는 거 같아요.
그럼 드라마와 영화 현장이 왜 그런 차이가 난다고 생각해요? 우선 시간의 차이인 거 같아요. 드라마는 빨리 찍어서 방송에 내보내야 되니까 그런 촉박함과 부담감이 다 전해져 와서 몇 번을 틀리게 되면, 예를 들어 한번, 두 번, 그리고 세 번까지 다시 가게 되면 분위기가 달라져요.
아무래도 분위기가 싸늘하겠죠? 예. 보는 모습도 달라지고. 근데 영화는 한번 오케이가 됐어도 다시 하고 싶으면 또 해도 되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내 모습을 만들어낼 수 있고.
그럼 <M>의 현장 분위기는 어땠나요? 감독님 중심으로 해서 많이 움직였었어요. 영화 자체가 감독님의 머릿속에 있기 때문에 감독님의 지시 없이는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았죠. 저희도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질지를 모르다 보니까, 내일은 이 씬을 찍을 거란 얘기가 나오면 그에 대해서 감독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를 주세요. 모든 것을 다 하나부터 열까지 준비해주셨거든요. 소품 팀은 소품 팀대로 숙제를 내주시고, 배우들은 배우들대로, 그 모든 걸 다 하나하나 신경 쓰셨기 때문에 감독님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된 거 같아요.
결국 감독님을 믿고 따라가야 했었다는 건데 그건 신뢰가 있어야 가능해요. 한편으론 마냥 믿고 따라가기만 해도 되는 걸까라는 의심이 생길 법도 했을 텐데요. 물론 그런 부분들이 있긴 했죠. 감독님을 완전 믿기도 어려웠지만 이게 스크린에서 어떻게 나오는 건지도 의문이었어요. 촬영을 할 때 ‘과연 이게 정말 스크린 안에서 잘 나올까?’, 그런 의심이 들었죠. 그런데 감독님께서 그럴 때마다 스크린 속의 진실을 믿으라고 얘기하셨어요. 하지만 결국 나중에 완성된 작품을 보고 나니까 촬영할 때 내가 왜 의심하고 믿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웃음)
혹시 이명세 감독님께서 왜 본인을 캐스팅 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들지 않았나요? 사실 처음 미팅할 때, 감독님께서 저에 대해서 워낙 잘 모르셨어요. 주위 분들을 통해서 저를 캐스팅하신 거였거든요. 그런데 미팅 첫날, 감독님께서 맘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 때부터 자연스럽게 촬영하게 됐죠.
사실 <M>에서 이명세 감독님이 가장 공들인 캐릭터는 미미라고 생각해요. 첫사랑의 대상임과 동시에 <M>의 미로 같은 이야기가 만나려 했던 간절한 대상이니까요. 결국 <M>의 이야기적 궁극지점은 Muse, 바로 미미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본인이 이명세 감독님의 애정이 가장 많이 녹아 들어간 캐릭터를 연기했을 수도 있겠군요. 메시지를 전달해줘야 되는, 왜라는 것에 대한 대답을 위해선 미미가 필요했기 때문에 감독님께서도 이제 저에 대한 캐릭터에 많이 집중해 주셨던 거 같아요. 그리고 감독님께서 저랑 처음 작업을 하시니까 저한테 많이 가르쳐주려고 하셨고, 강동원 선배님은 그전에 한번 작품을 했으니까 믿고 맡기셨던 거 같아요. 그래서 강동원 선배님보단 저한테 숙제도 많이 내주시고 저랑 얘기도 많이 하셨던 게 아닐까 싶어요.
사실 <M>은 배우에게 참을성을 요구하는 영화였을 것 같아요. 형태를 가늠할 수 없는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는 완성된 영화에 대한 궁금증을 억누르면서 연기를 해야 하니까요. 영화보기 전까지 계속 기대하고 그 전에 본 스텝들한테 어떻게 나왔는지 묻기도 했어요. 부산국제영화제에 가기 전까지도 계속 감독님께서 후시 녹음도 한번 더 하실 정도로 너무나도 완벽을 추구하셨기 때문에 그때까지도 전혀 몰랐었거든요. 기대도 너무 크고, 궁금증도 많았고, 빨리 보고 싶었죠.
<백만장자>당시엔 또래 연기자도 많았고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촬영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M>은 아무래도 혼자 떨어진 시간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워낙 출연하는 배우들이 별로 없다 보니까, 그리고 미미 같은 경우에는 마주치는 사람이 민우 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촬영할 때는 감독님께서 그만큼 허전함을 채워주셨던 거 같아요. 어차피 감독님과 같이 생각하고 연기에 대해서 얘기했으니까.
그러다가 다시 또 사람이 많은 영화로 왔네요. 예. (웃음) 근데 거기서도 많이 부딪히진 않아요. 정작 부딪히는 건 파트너들끼리만.
하긴 옴니버스 형식이니까요. 이번에도 정일우 씨가 파트너라고 들었는데, 역시 남자배우 복이 많네요. (웃음) 그런데 서로 또래 아닌가요? 예. 저랑 동갑이에요.
그런 점에서 앞의 두 배우보단 접근하긴 편했을 것 같아요. 또래이다 보니까 정말 항상 노는 분위기였죠. (웃음) 처음부터 편하게 촬영했던 거 같아요. ‘먼저 다가가서 얘길 해야 될까?’ 이런 고민 없이, 예전에는 이제 ‘선배님한테 먼저 가서 얘기할까?’ 이랬는데, 저희는 처음부터 편하게, ‘잘 촬영해보자!’ 이렇게 잘 통했었죠.
스크린을 통해서 본인의 얼굴을 봤을 때 기분은 어때요? 되게 좋아요. 이명세 감독님도 ‘실물보다 무척 더 잘 나오지 않았냐?’ (웃음) 라고 얘기하시기도 하셨어요. 그런데 정말 실물보다 잘 찍어주시는 것 같아서 좋아요.
사실 영화는 드라마에 비해 흥행 부담이 큰 편이죠. 그런 부담감이 느껴지나요? 아직 영화가 두 번째니까, 전 한번밖에 느끼지 못했죠. 근데 그 한번이 조금, (웃음) 상처까진 아니고, 약간 실망? 사실 기대가 컸었는데……저희 스텝들끼리도 영화가 잘될 것 같다고 했었는데 그 당시에 다른 영화들이 많이 개봉하다 보니까 잘 되지 않았던 거 같아요. 그래서 이번엔 부담도 되요. 하지만 영화라는 게 흥행을 전혀 모르겠어요. 관객들의 마음이 정말 갈대 같아서 <M>은 과연 흥행될지.
영화는 많이 보는 편이에요? 예. 영화 좋아해요. 저는 로맨틱 코미디보다는 멜로를 조금 더 좋아해요. 근데 그 멜로가 너무나도 슬픈 멜로보다 기쁨이 있는 멜로를 좋아하죠. 또 할리우드 액션 영화도 되게 좋아하고, 중국 무술 영화도 좋아하고, 다만 호러같이 귀신이 나오거나 <쏘우>같은 잔인한 영화는 전혀 안 봐요. 그래도 미스테리 같은 건 좋아해요. 스릴러! (웃음)
피바다 영화는 싫어하나 봐요. <M>은 좋아하겠네요. 미스터리 멜로잖아요. (웃음) 그런데 사실 <M>은 난해한 영화라고 느낄 수도 있어요. 영화를 끝까지 봐야죠. 처음부터 긴장감이 흐르는데, 그 긴장감을 쭉 이어가다가 나중에 스스로 풀려지면서 결과가 드러나는 거니까 그때까지 관객 분들이 잘 참고 보셨으면 좋겠어요.
작년에 첫 영화를 찍은 지 일 년이 지났고 어느 새 올 한해도 지나고 있어요. 내년은 정말 궁금해요. 12월 말에 <내사랑>이 개봉되면 이제 바로 내년이 되는데 그 다음 작품은 정말 고민하고, 고려해서 작품 선정을 해야 될 것 같기도 하고, 또 학교 문제도 있으니까 학교는 어떻게 다닐지 생각해 보기도 해야 하고, 내년은 참 힘들 것 같네요.
조금 막연하지만 스무 살에 그려보는 서른의 청사진을 물어도 될까요? 좀 더 성숙되고 좋은 연기자? 물론 그때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까, (웃음) 연기도 많이 성숙해져야 되고 지금의 부족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게 커버가 되는 상태이어야 될 것 같아요. 지금부터 많이 노력해야겠죠.
일단 두 번에 걸쳐 누군가의 첫사랑이 됐지만 그게 그 분들의 짝사랑만은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본인도 두 번에 걸쳐 상처를 받은 셈이네요. (웃음) 좀 제대로 사랑해보고 싶을 것 같아요. 이젠 다음부터는 서로가 좋아하고, 아니면 그 좋아하는 상태에서 엇갈릴 수도 있는, 그런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 너무 한 사람만 바라보거나 서로 좋아했지만 이뤄질 수 없었던 사랑보단 그런 역할을 한번 해보고 싶죠.
혹시 첫사랑이 기억나요? (웃음) 아직까지는 첫사랑에 대해서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 지나고 나서야 그 사람이 내 첫사랑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아직까지 이 사람이 내 첫사랑이라는 걸 기억하지 못한 것이겠죠.
사실 저도 기억난 지 얼마 안됐어요. (웃음) 어쩌면 민우처럼 나중에 기억날 수도 있겠죠? 네. 하지만 악몽처럼 떠올리긴 싫어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