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강, 도약, 비행, 착지로 이뤄지는 스키점프의 과정은 기승전결의 과정이다. 높은 스키점프 대를 신속하게 미끄러져 내려온 뒤, 하늘로 붕 떠올라 멀리까지 날아가서 사뿐히 내려앉는 스키점프는 그 짧은 과정만으로 드라마틱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국가대표>는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의 실화로부터 기승전결의 드라마를 추출하는 영화다. 동계올림픽 불모지나 다름없는 이 땅에서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들이 일궈낸 현실을 발판으로 삼아 허구를 도약시킨다.
유년 시절 미국으로 입양된 밥(하정우)은 ‘알파인 스키’미국국가대표 자격을 버리고 어머니를 찾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온다. 방송을 통해서까지 어머니를 수소문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는 밥에게 그의 전력을 아는 방 코치(성동일)가 찾아와 국가대표 스키점프 선수 자리를 제안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나를 미국에 삼천만 원에 팔아 넘겼다”고 말하는 밥을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방 코치의 답변이 정곡을 찌른다. “너도 이용하라고, 대한민국.”밥의 마음이 움직인다. 비로소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단이 위용(?)을 갖추기 시작한다.
밥과 함께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를 구성하게 되는 나머지 4명의 청년들은 저마다 굴곡이 깊은 사연을 품고 있다. 학창시절, 도 대표 알파인 스키 선수로 활약하며 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지만 약물복용사실이 발각되어 수상 자격을 박탈당한 흥철(김동욱)과고깃집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권위에서억눌리듯 살아가지만흥철의 팀 동료로서그와 함께 메달을 박탈당했던 알파인 스키 선수 출신재복(최재환)이 선수단에 참여한다. 그리고나이든 할머니와 정신지체 증상이 있는 동생 봉구(이재응)를 돌보며 힘겹게 살아가지만 입영 날짜를받아들고 고민하는청년 가장 칠구(김지석)가 선수단에합류한다. 청년들은 저마다의 목적을 두고 방 코치의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 군대를 면제받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기 위해서,심지어 한 눈에 반한 여자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 국가대표를 허락(?)한다.
스키점프 불모지나 다름없는 대한민국에서 스키점프 국가대표로 발탁된 5명의 선수들은 세계와 맞서기 전에 열악한 국내 실정 안에서 고군분투한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노리는 무주의 스키점프 시설 공사장 주변에서 먼지를 마시며 러닝을 하거나 폐쇄된 놀이공원 후룸라이드를 스키점프대로 직접 개조하면서 연습을 거듭하는 모습은 그 이미지 자체만으로 고생스럽다.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멤버들의팀워크를 다져나가는 과정에서 개개인 간의 갈등이 도출되고 내분이 발생하며, 심지어외부에서 돌출된 알력으로 선수단이 와해될 위기를 연출하기까지 하는 국가대표단의 상황은 오리무중의 연속이라 구차하기 짝이 없다.
지나치게 쉽게 진전된다는 인상을 부여하는서사 속에서 헐거운 이음새를 종종 노출하곤 하는 <국가대표>가 뛰어난 이야기적 자질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선수들의 개별적인 사연들은 지극히 상투적인 드라마의 개연성 위에 각자 자리를 잡은 채 계산적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저마다 착지하고자 하는 감정적 목표가 확실한 영화 속 사연들은 때때로 개연성을 보장할만한 경사각을 구축하지 못한 채 무리수를 두고 단독질주를 감행하며 각기 미끄러져 내려가는 탓에 전체적인 호흡을 어지럽힌다.결국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사연들이 각자 내달리는 탓에 각자의 사연이 저마다의 지점에서 선전하지만 궁극적으로 총합적인 이야기의 스코어를 깎아먹는다. 그럼에도 그 스토리를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건 상투적인 예감에 미묘한 오차범위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유머의 순발력과 실화라는 원천적 동력이다. 지극히 계산적인 진지함을 연출하곤 하는 사연을 유연하게 중화시키는 입담이 구사되고 심각한 위기 속에서도 여유를 끼워 넣는 배반적 설정이 상투성을 둘러싼 사건을 순발력 있게 대체한다.
가장 확실한 밑천은 실화다. 실화를 밑그림으로 허구를 덧칠함으로써 가산점을 획득하고 감점을 얻었지만 사실상 현실이라는 원색이 환기되는 결말부에 다다라 그 모든 스코어는 무의미해진다. 비인기종목의 서러움과 지정학적 편견, 열악한 제반 조건을 이겨내고 올림픽 무대에서 괄목할만한 성적을 낸 선수들의 땀과 눈물을 압축하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절대적 질량이 현실적 기반 위로 부피를 확보한 드라마의 허구보다도 효과적인 페이소스를 발생시킨다. 대한민국이라는 열악한 현실 자체가 품고 있는 페이소스의 자질이 스포츠 영화로서의 쾌감에 정당한 상승을 부여하며 허구에 가속력을 부여한다. 특히 <국가대표>는 스포츠 영화로서 앞선 어떤 전례보다도 탁월한 이미지를 선사한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스키점프 신은 앞서 덜컹거리던 드라마의 단점을 잊게 만들 만큼 압권의 쾌감을 선사하고 성기게 진전되는 허구 속에서도 서서히 숙성되던 마이너리티적 감수성을 일거에 폭발시킨다. 마치 스크린을 통해 스키점프 경기를 단체관람하고 있다는 착각을 부를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되는 스키점프 신은 직선으로 내리 뻗은 스키점프 대를 타고 내리는 활강의 속도감과 도약의 쾌감, 그리고 비행의 체공감과 착지의 성취감을 고스란히 이미지로 구현한다. 스키점프 신의 이미지는 그 자체만으로 감정적 오르내림을 선사하는 기승전결의 압축적 이미지나 다름없다. 무엇보다도 캐릭터들의 고군분투를 정당하게 보상하는 신이란 점에서도 매끄러운 인과 관계가 발견된다. 서사와 묘사의 연동이 매끄럽다.
실화라는 질량을 유지한 채 허구의 부피를 늘려나가고 그 가운데 느슨해지는 드라마의 밀도가 발견되지만 궁극적으로 절대적인 질량을 보존하는 실화의 묵직함이 영화적 감수성을 보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그랬듯, <킹콩을 들다>가 그것을 복기했듯, <국가대표> 역시 실화에 밑진 영화다. 유머가 적절히 곁들어진 신파를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에 나열해도 궁극적으로 현실을 대변하는 자막 한 줄의 위력에 닿지 못한다. 여전히 대한민국 스키점프 국가대표가 5명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환기시키는 엔딩의 한 줄 자막이 <국가대표>가 부지한 2시간 여의 러닝타임보다도 위력적인 울림을 전한다. 헝그리 복서에 대한 기억이 낡았을 뿐, 대한민국은 여전히 촌스러운 마이너리티의 신파가 산재하는 세상이다. 경제적 지표를 자랑스럽게 전시하면서도 먹고 사는 문제에 촌스럽게 매달리는 대한민국은 여전히 스포츠 루저들을 양산하고 영화는 이를 착취한다. 그런 점에서 스포츠 루저들을 ‘자랑스럽고 무궁한 영광’에 도매금처럼 팔아먹지 않는 <국가대표>는 어느 정도 정치적으로 공정한 스포츠 신파라 인정할만하다.
일렬로 늘어선 폰(pawn)을 전진시킨다. 전선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동선이 확보된다. 그 사이를 비숍(bishop)과 나이트(knight), 룩(rook)이 파고들어 적진을 유린한다. 결정적인 순간, 순식간에 퀸(queen)이 적의 폐부로 돌진한다. 상대말을 하나씩 쓰러뜨리고 때론 자신의 말을 미끼로 던져 허를 찌른다. 멀리 선 킹(king)을 향해 포위망을 형성하고 동선을 조인다. 더 이상 오갈 때 없는 적진의 킹을 쓰러뜨리며 외친다. 체크메이트(checkmate).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하, <눈눈이이>)는 일종의 체스판을 구상하듯 만들어진 영화다. 말을 움직여서 공간을 만들고, 그렇게 마련된 공간 속에서 또 다른 전략적 동선을 그려 넣는다. 마지막 한 수에 다다르기까지의 밀고 나가는 전략은 그 와중에 발생하는 빈 공간의 변수까지도 철저하게 배려하는 것이어야 한다. 판을 읽는 지능적인 두뇌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 상황을 전진시키는 두둑한 배짱이다. 지능적인 복마전을 팽팽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을 움직이는 이의 배짱도 두둑해야만 한다. 손실조차도 차익으로 역전시키는 탁월한 전술과 냉정한 판단력은 게임을 지배하는 법칙과 다름없다. 결국 중요한 건 게임을 구사하는 유저의 능력이다.
카체이싱의 박진감과 스피디한 전개로 현금수송차량 탈취과정의 흥미를 돋우며 시작되는 <눈눈이이>는 시작부터 범인들의 몽타주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는 사건의 양 축이 되는 범인과 형사의 구도를 선명하게 대비시키며 그들의 대결양상을 한껏 살리겠다는 의도를 지닌다. 결국 그 구도는 과연 이 양상이 어떻게 끝맺음을 낼 것인가에 관심의 무게를 얻는 방식에 가깝다. 하지만 그 와중에 물음표가 하나 얹혀진다. 판을 구성하고 패를 돌리는 안현민(차승원)은 그 게임에 의도적으로 백반장(한석규)을 개입시키며 판을 키운다. <눈눈이이>는 안현민과 백반장의 대결을 다룬 게임의 묘미를 살리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두 캐릭터의 비중은 사실 한쪽으로 이미 치우쳐 있는 것과 다름없다. 안현민의 의도는 <눈눈이이>에서 중요한 키워드다. 결국 두 캐릭터의 격돌양상이 캐릭터에서 발산되는 에너지의 세기와 달리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건 애초에 캐릭터에게 주어진 능력치의 양상이 불공정했기 때문이다.
게임을 설계한 안현민이 체크메이트를 외치고자 하는 대상은 그의 감춰진 사연을 통해 형태를 드러낸다. 결국 안현민과 백반장의 대결구도는 <눈눈이이>의 맥거핀과 다름없다. 문제는 그것이 동등한 캐릭터의 대비를 갖추지 못한 탓에 맥거핀의 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굳이 동등해야 할 의무는 없다. 차라리 <눈눈이이>가 안현민을 위해 백반장을 소모시키는 영화였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의도한 게임의 묘미는 캐릭터의 대비가 느슨해진 덕분에 긴장감을 서서히 상실한다. 이는 결국 영화가 의도한 목적성에 이도 저도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활력적인 범죄스릴러의 구조를 지닌 전반부가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느와르적 감수성을 머금으며 느릿느릿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형태의 변질과 함께 클라이막스도 손상된다.
애초에 안현민과 백반장의 대립구도가 선악의 구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란 점은 <눈눈이이>의 특별한 묘미를 발생시키는 지점이었다. 형사와 범인이라는 공식과도 같은 구조관계에서 벗어나 두 캐릭터가 서로를 의식하고 상대의 우위에 서려는 사소한 욕망의 대결구도가 <눈눈이이>의 성패를 가늠하는 지점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눈눈이이>는 스스로가 내세운 게임의 법칙에 충실하지 못한 채 일방적인 체크메이트를 위한 구색만을 차린다. 다만 외모만으로도 인상적인 두 캐릭터가 펼치는 신경전의 양상과 초반부 현금차량탈취씬을 비롯해 주요한 사건이 발생되는 굵직한 시퀀스의 연출력은 <눈눈이이>가 지닌 절반의 성취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위장된 게임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영화는 흥미를 반감시킨다. 일방적인 게임은 아무래도 재미없는 법이다. 게다가 그 게임조차도 예상범위를 벗어나는 의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위장전술에 불과하다. 그 말미에 다다라서야 이 영화의 제목과 포스터가 주는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 단 그것이 배신감의 형태로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그나마 영화가 마지막까지 일정한 동력을 발생시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두 배우의 힘있는 표정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