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사이트에서 '바람'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봤다. 놀라웠다. '아빠랑 바람 핀 여자가 계속
도발해요.' '유부녀와 바람 피우다 걸렸어요.' '바람 피우는
사람의 증거를 확보하고 싶습니다.' 바람을 피우는 남편 혹은 아내 심지어 부모를 어찌해야 할지를 묻는
하소연이, 바람을 피우다 걸렸을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묻는 절절함이, 바람 피우는 아내 혹은 남편을 응징하는 방법에 대해 질문하는 단호함이 차고 넘쳤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온라인상이라 해도 사적인 치부가 드러날 만한 질문을 불특정 다수에게 던진다는 건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리도 많은 절박함이라니, 가히 바람
잘날 없는 사회라 해도 좋겠다.
흥미로운 통계가 있다. 지난
2015년, 한 일간지에서는 기혼자 2000명을
대상으로 불륜경험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중 484명이 불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그리고 40대와 50대의
불륜 비율이 20대와 30대에 비해 현저히 높고,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비율이 높아졌다. 그렇다면 다들 어디서, 누구와 바람을 피우는 걸까. 채팅사이트나 나이트클럽처럼 새로운 곳에서
만난 사람이 가장 높은 비율인 37.2%에 달했다. 유흥업소
관계자(29.5%)와 직장 동료(25.6%) 그리고 동창
등 친구(17.1%)와 동호회 사람(11.6%)이 그 뒤를
이었다. 여기서 남성은 유흥업소 관계자나 새로운 곳에서 만난 이성에 응답한 이들의 비율이 75% 이상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니까 한국의 기혼남성들 가운데
바람을 피우는 이들 중 8할 가까이가 자신의 취미나 사생활과 무관하게 여자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바람을 피우는 확률이 현저히 높다는 의미다. 정리하자면 바람을 피울 준비가 된 남성들이 바람을 피울
확률이 높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그렇다면 취미생활이 있는 남자와 불륜 가능성의 연관성은 존재할까? 물론
존재할 것이다. 다만 취미생활의 종류에 따라, 취미생활을
즐기는 이들의 성비에 따라, 집단적으로 함께 하는 취미인지에 따라서.
간단히 말하면 취미생활을 영위하면서 남녀가 만날 확률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바람 피울 수 있는 가능성 여부가 천차만별일 것이다. 예를 들어 목공에 취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특별히 동호회 활동을 하지 않아도 홀로 작업을 배울 수 있는 경로가
많고, 어느 정도 숙련된 상태라면 혼자서 취미를 영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외도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을 것이다. 또는 동호회 활동을 통해 지속하는 운동 같은 경우도 남자의 비율이 많은 경우엔 역시 가능성이 0에 수렴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지 않아서 바람을
피울 일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애초에 취미 자체에 몰입하는 이들은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간다
해도 바람을 피울 확률이 떨어질 것이다.
반대로 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있는 이들이 있다. 이를 테면 소위
외롭고 심심해서 취미생활을 찾는 이들 중에선 취미생활보다도 누군가와의 관계를 통해 일상의 외로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다. 그러니까 취미활동 이후의 뒤풀이를 기대하며 동호회를 찾거나 모임에 나가는 이들 말이다. 이런 이들에겐 애초에 동호회 모임 자체가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채팅사이트이거나 나이트클럽에 가깝다. 게다가 취미생활을 영위한다는 점에선 배우자에게도 그럴 듯한 핑계를 댈 수 있는 셈이니 어떤 의미에선 공작 활동도
수월해진다. 그리고 남자나 여자나 그런 이유로 동호회 활동을 시작한 이들이 있을 것이다. 크로스핏보다, 사이클보다, 산행보다, 스포츠댄스보다, 영어회화보다, 그
이후의 뒤풀이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그리고 취미생활을 통해 일탈의 알리바이를
확보한다.
물론 모두가 다 그래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저 반복적인 일상이 지겨워서
새로운 흥미를 찾기 위해 동호회를 찾아 자기계발을 해나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평소 즐기던
취미생활을 타인들과 함께 영위하기 위해 동호회를 찾았다가 우연히 만난 이성과 친근해져 대화를 나누고, 술도
한잔 하고, 그렇게 편안한 사이가 돼서 어쩌다 보니 서로에게 이끌려 본의 아니게 충동적인 관계로 발전하고
전전긍긍하는 이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이건 사람의 문제다.
바람은 차가운 곳에서 따뜻한 곳으로 불어간다. 누군가의 체온을 갈망하는 이가 그 손길을
원할 확률이 크다. 그러니까 바람 피울 사람은 바람을 피우게 돼있다.
너무 단호한 표현인가. 아니다. 단언컨대 취미는
문제가 아니다. 취미생활이 있어도, 없어도, 바람 피울 사람은 피우게 돼있다. 다만 취미생활이 있다면 취미를
통해서 피울 것이고, 취미가 없다면 없는 대로 피울 것이다. 바람
앞에서 취미는 그저 취미일 뿐, 결국 사람의 문제다.
여자가 없다. 남자가 없다. 만날 사람이 없다.
소개팅에 나오는 여자도 많고, 남자도 많은데, 정작
내 여자는, 내 남자는 없다. 소개팅만 계속된다.
“좋은 여자 없냐?” 남자1호가 물었다. “좋은 남자 없어?”
여자1호도 물었다. 일단 남자랑 여자는 있구나. 그래서 난 아무런 부담 없이 널 내 친구에게 소개시켜주기로 했다. 그런데
남자1호가 여자1호의 사진이 보고 싶다고 했다. 여자1호에게 사진을 하나 달라고 했다. 여자1호는 살짝 볼멘소리를 했지만 사진을 주겠다고 했다. 전제가 있었다. “그럼 나도 볼래.”
남자1호에게도 사진을 달라고 했다. 군말 없이
사진을 보냈다. 중간에서 두 사람의 사진을 봤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위
사진은 실물과 다를 수 있습니다’라는 경고 메시지를 띄워줘야 할 것인가 잠시 생각해보기도 하였으나 내
친구에게 관심을 더 보이며 날 조금씩 멀리하던 너를 보며 될 대로 되라고 생각했다. 뭐, 약간의 과장은 있지만 위조 수준은 아니니까. 어쨌든 두 사람은 심판의
날, 아니 날짜를 정했다고 했다.
그런 만남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난 알 수 없는 예감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을 때쯤 남자1호에게 연락이 왔다. 괜찮았냐고 물었다. “아니, 뭐, 나쁘진
않았어.” 그러니까 괜찮은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친구가
‘음…그런데’라고
운을 떼더니 2% 부족한 느낌을 나열했다. 굳이. 여자1호에게 끌리지 못한 이유를 시시콜콜하게 늘어놓았지만 남자1호에겐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내 스타일이 아니야.” 그리고 ‘내 스타일이 아님’을
스스로 다짐하는 이유가 덕지덕지 붙어있을 뿐이었다. 여자1호에게
문자가 왔다. 여자1호에게선 긍정적인 뉘앙스가 느껴졌다. 적극적인 표현이 동원되진 않았지만 무스크향과 같은 여운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명확한 기대감을 분사했다. “혹시 나에 대해서 별 말 안 해?” 나는 여자1호에게 약을 줬다. 모르는
게 약이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남자1호는 당연히 애프터 신청을 하지 않았다. 안부도 묻지 않았다. 여자1호도
당연히 안부를 묻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물론
소개팅 한번 한 게 대단한 인연이라는 게 아니다. 다만 그렇게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어떤 가능성이 깔끔하게
정리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지나치게 낭비가 없는, 효율적이지만
삭막한 엔딩이랄까. 소개팅의 애프터는 남자가 잡는 것이 무언의 룰이다.
연락이 없는 남자를 기다린다는 건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 불이 켜진 상영관의 텅 빈 풍경을 목격하는 것과 같다. 반대로 말하자면 소개팅에서 여자가 차일 일은 물리적으로 희박하다. 어떠한
기미도 없는 남자에게 스스로 무덤을 파듯 먼저 연락하는 여자가 아닌 이상에야 그렇다.
여자2호는 난감했다. 어제
소개팅을 했던 남자에게 카톡이 왔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행복하세요.”
여자2호는 일전에도 이런 문자를 받아본 적이 있었다. 통신사
상담원에게 요금 관련 문의를 하고 통화를 마치면 이런 문자가 왔다. 그 문자에 답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 카톡엔 답을 하고 싶었다. 그 남자에게 호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절한 답변을 찾지 못했다. “네. 오늘 하루 행복할게요!” 당연히 이상하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아침인데 벌써 하루가 끝난 느낌이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말투로 시련을 주는 남자의 카톡
앞에서 여자2호는 무기력해졌다. 일부로 이러는 걸까. 설마 어장관리인가.
나는 그 사연을 듣고 의아했다. 정말 어장관리일까? 놀아본, 지금도 노는 남자2호는
말했다. “쑥맥이네. 요즘 같은 세상에 관심도 없는데 다음날
연락하는 애가 누가 있어. 그리고 선수라면 그렇게 어설프게 안 던지지.
최소한의 대화는 형성시켜야 할 거 아냐. 호감은 보이고 싶은데 요령이 없네. 뭘 몰라.” 그렇다. 그는
그저 답답한 남자였을 뿐이다. 필연적으로 호감지수가 하락한다. 그리고
여자2호의 의심도 정당했다.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들의 의지
없는 호의에 닳고 닳아서 생긴, 일리 있는 의심이었기 때문이다. 여자3호는 요즘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들은 희한할 정도로 의지가 없다고 했다. “호감이
있다고 생각했고, 대화도 잘 되는데 관계에 진전이 없는 거야. 계속
같은 자리를 뱅 도는 느낌? 문자를 주고 받거나 통화를 할 땐 사귀는 것 같은데 막상 만날 의지도 안
느껴지고,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어.” 맞다. 뭐 하자는 건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남자도. “1등은 아니어도 3등 안에 드는 여자는 갖고 싶진 않지만 잃고
싶지도 않거든. 어차피 소개팅은 계속 잡혀 있고, 잡힐 거고, 그러니까 1등짜리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 하지만 3등짜리 여자를 놓치고 싶지도 않지. 그 이상의 여자를 만날 거라 확신할 수 없으니까.” 남자2호의 말이다.
하지만 어장관리가 남자만의 특권은 아니다. 남자3호는 말한다. “대답만 잘하는 느낌이랄까. A를 물어보면 정확히 A만 답하는 거지. 내가 다시 B를 물어보지 않는 이상 진전이 안돼. 그런데 막상 만나자면 또 만나고. 그러면 또 어쩌자는 건가 싶지.”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하게 남자의 물음표에 응답하지만 스스로 물음표를 제시하진 않는다. 문자를 주고 받는 동안에도, 만나서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남자가 궁금해하는 사연은 들려주되, 스스로 궁금해하지 않는다. 애프터 신청의 칼자루는 남자가 쥐고 있지만 애프터 신청이 넘어오는 순간 그 칼자루의 칼을 뽑는 건 여자 몫이다. 여자가 칼을 쥐게 된다. 하지만 여자 입장에서도 잡고 싶진 않아도
놓치고 싶지 않은 남자가 있다. 마찬가지다. 소개팅 기회는
널려 있고, 언젠가 엑스칼리버를 뽑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최소한 쓸만한 칼이다 싶은 건 일단 뽑고 본다. 손에 쥐고 버리더라도.
칼자루만 쥔 남자가 발을 동동 굴리건 말건. “어차피 선택은 남자가 하잖아. 그러니까 사실상 남자한테 선택을 많이 받는 여자는 상대적으로 도도해질 수밖에 없지. 남자가 지 잘난 거 알듯이 여자도 지 잘난 거 아는 거지. 그렇게
잘난 값을 하는 거야. 남자는 계속 그녀의 주가를 올려주는 거고.” 여자4호의 말이다.
주마다 평균적으로 1회 이상의 소개팅을 한다는 남자4호에게 소개팅은 습관이다. 그는 소개팅이 있는 날에도 술약속을 마다하지
않는다. 술자리에서 소개팅 결과를 물어보면 항상 무덤덤하게 말한다. “잘
안됐어.” 애초에 기대가 크지 않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별의 효율성은 높은데 만남의 효율성은 떨어진다니, 소개팅의 목적이
완벽하게 어긋난다. 물론 타석수와 타율은 비례하지 않다. 두
타석에서 안타 하나를 친 타자가 10타석에서 안타 네 개를 친 타자보다 타율이 높은 것처럼. 하지만 어쨌든 타석수가 많으니 안타를 칠 수 있는 절대적 기회가 많아지는 건 사실이다. 100타석에 섰는데 안타 하나를 못 칠까. 한 방이면 된다. 하지만 그 한 방이 없다. 스트라이크존에 꽂히는 공이 적지 않은데
내가 기다리는 공이 오지 않아서 방망이를 좀처럼 휘두르지 않는다. 성격이 좋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얼굴도
예쁘고, 교양도 있고, 스펙도 좋았으면 좋겠다. 좋으면 더 좋은 게 아니라 다 좋아야 좋다. 가진 것보다 갖지 못한
것이 더 크게 보인다.
“남자한테 청담동에 있는 바에 가자고 하는 여자들의
심리가 뭔지 알아? 자기를 위해 얼마나 쓸 수 있는지 보려고 데려가는 거야. 칵테일 한 잔 마시면 4만원 정도는 그냥 깨지니까.” “소개팅할 때 차는 일부로 안 가져가. 만약 데려다 주기 싫은
여자를 만나게 됐을 때 주차장 입구에서 ‘잘 가요’하고 헤어질
수 없잖아. 그래서 그냥 택시 태워서 보내는 거지. 그리고
마음에 드는 여자는 같이 택시 타고 가서 데려다 주면 되잖아.”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가 집에
데려다 주는 것도 신경 쓰이지. 혼자 사는 집의 위치를 공개하고 싶지도 않고. 여러 모로 부담스러워.” 남자가 하는 말도, 여자가 하는 말도 저마다의 합리가 있고, 저마다의 이기심이 있다. 다만 인내심은 드물다. 남자든, 여자든, 나름의 기대를 안고 소개팅에 나오지만 생각보다 절박하지 않다. 여자도, 남자도 없어서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단 한번의 만남을 통해서
너무 많은 것을 판단하려 한다. 마치 로또 같다. 다음 주가
되면 새로운 로또를 살 수 있다. 하지만 그 주에도, 다음
주에도 당첨확률은 한결 같이 희박하다. 가능성이 희박한 로또 당첨번호를 기다리듯 주말이 되면 소개팅
장소로 나간다. 마치 죽지 않기 위해서 절정이 없는 이야기를 매일 밤 이어나가는 셰헤라자데의 천일야화처럼
절정도 결말도 없는 일일야화가 덧대어지고 덧대어진다. 일회적인 인연만 덧대어지고, 덧대어진다. 그래서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솔로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솔로다. 그리고 항상 여자도, 남자도 없다. 소개팅만 넘친다. 어렵다. 어려워.
남자는 여자를 원한다. 여자도 남자를 원한다. 하지만 남자도, 여자도 깨는 상대는 원하지 않는다. 존중 받길 원한다. 그 남자, 그 여자가 만난 깨는 여자, 깨는 남자.
WHAT
MEN WANT
솔직히 남자가 여자한테 매너라는 걸 기대하진 않지. 남자가 바라는
게 얼마나 있나? 그런데 정말 항상 일관되게 별로다 싶은 지점은 있지.
이유는 모르겠는데 왜 여자들은 항상 늦는 건지 알 수가 없어. 집에 시계가 없나? 아니면 시계 보는 법을 안 배웠나? 10분 정도, 그래, 괜찮아. 20분? 그래, 뭐 괜찮아. 30분? 좀 열 받지. 그 이상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자를 처음 만날 때 좀 늦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아니, 늦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남자보다 일찍 오면 조금 없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건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래.
그래서 처음 여자를 만날 땐 이미 어련히 알아서 늦겠지 생각하고 있어. 어쩌다 그러는 게
아니라 10명 중에 7명은 그러니까. 이해가 된다기 보단 면역이 된 거지.
사실 밥값 내고, 차값 내고, 술값
내고, 영화비 내고, 아깝진 않아. 다만 성의의 문제지. 가격이 아니라 횟수의 문제라고. 최소한 초면에 여자한테 밥값 내라고 할 남자가 어디 있어. 그리고
처음 만났는데 밥 먹고 나서 헤어져? 그거 뭐냐. 요즘 유행한다는
소셜 다이닝이야? 아무튼 커피라도 한 잔 하지. 대부분 그때
좀 깨지. 전혀 계산할 생각이 없다라는 게 딱 보이거든. 지갑에
손도 안대. 지문 인식 지갑이라 손 대면 결제되나? 아무튼
내는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은데 얘는 이미 얻어먹을 준비가 돼 있는 거야. 나도 사람인데, 최소한 물질적으로 착취당한다는 기분이 드는 건 별로잖아. 내 카드랑
만나려고 나왔어? 그냥 두 가지 생각이 들지. 얘는 정말
개념이 없거나 나한테 마음이 없거나. 어떤 식으로든 긍정적일 수가 없지. 아무리 예뻐도 매너가 없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 내가 그나마
주선자 얼굴 봐서 예의를 차리는 거지. 네가 예뻐서가 아니라 너와 나의 연결고리 때문이라고. 돈이 아까운 게 아니야. 까놓고 커피값 정말 비싸다고 해도 2만원 안팎이지. 성의가 없잖아.
그리고 그런 거 있잖아. 왜 말을 애매모호하게 하는 거야. ‘어디 갈까?’ 물어보면 다 괜찮대.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재. 그런데 막상 어디 가자고 말하면 이래서
싫고, 저래서 싫고. 이유는 항상 있어. 그럼 차라리 자기가 정하던가. 아니면 신돈을 만나던가. 관심법이라도 써야 되는 건가? 최소한 자기가 싫어하는 거라도 말해주던가. 아니면 알아서 하라고 했으니까 군소리를 하질 말던가. 뭔가 항상
불명확해. 사귀다가도 뭔가 어긋나서 화를 내서 이것 때문이냐고 물어보면 그건 또 아니래. 아니, 무슨 인터스텔라야. 웜홀이라도
넘어가야 이유가 있을 거 같다니까. 섭섭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말하던가. 왜 꼭 쌓아뒀다가 옛날 일까지 다 끌어내서 화를 내고 그래. 그리고
가끔씩 그런 애들 있지. 전 여자친구는 어땠어? 대체 왜
물어봐? 말해주면 빡칠 거면서. 쿨한 척해봤자 결국 다른
식으로 화낸다고. 그리고 자기는 솔직하게 다 말한대. 전
남자친구가 어쩌고 저쩌고. 내가 그 얘기를 왜 듣니. 나한테
소개팅해줄려고? 아니면 셋이서?
아, 그리고 진짜 제일 심한 비매너.
왜 사진이랑 얼굴이 그렇게 달라? 달라도 너무 달라야지.
얼굴이 두 개야? 교체형인가? 그럼 그 얼굴을
달고 나왔어야지 왜 잘못 달고 나왔어. 그래서 가끔씩 자기 얼굴 제대로 달고 나온 여자가 나오면 정말
매너모드지. 커피값? 에이,
됐어. 내가 내면 되지. 이미 완벽한 매너모드인데.
WHAT
WOMEN WANT
처음 만났는데 ‘어디로 갈까요?’라고
물어보는 것까진 괜찮아. 그러면 좀 무난한 곳을 가던가. 전에
처음 만난 남자애가 나를 데리고 불족발을 먹으러 가는데, 정말 열불이 났지. 내가 불알친구야? 사실 처음 만났을 때 어디 가자고 꼬치꼬치 말하면
좀 그렇잖아. 너무 까다로운 사람 같고. 그럼 좀 알아서
무난한 곳으로 가주면 안돼? 아무데나 가자고 했더니 불족발이 뭐니? 불족발이. 이 남자랑 만나면 안 봐도 훤하다. 속 터지겠지. 그리고 정말 최선을 다해서 신경 안 썼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지는 애들 있지.
그러니까 옷을 잘 입고, 못 입고, 그런 센스를
말하는 게 아냐. 자기 방에서 뒹굴다가 그렇게 약속장소까지 굴러서 나온 것 같은 애들이 있다니까. 여기가 카페냐, 네 방이냐 싶을 정도로. 그럼 다시 굴려서 집에 보내고 싶지. 나름 소개팅이라고 신경 쓰고
나왔는데 왜 이런 꼴을 보고 있어야 되나 싶고. 성의가 없어. 성의가. 아, 물론 나름의 사정이 있을 수도 있어. 이해해. 하지만 내가 계속 이해할 이유는 없는 거잖아. 한번 이해해줬으면 됐지.
어쨌든 밥값은 관례적으로 남자가 내잖아. 그러니까 커피든, 맥주든, 이 다음에 가는 곳에선 내가 계산해야겠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가끔씩 ‘다음 차례는 그쪽이 사세요’ 이런 애들 있어. 어린 시절에
TV 보다가 ‘이것만 보고 공부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엄마가 ‘너 공부 안 하니!’ 이러면 공부할
마음이 싹 사라지잖아. 정말 다음 차례가 아니라 다음 생에서도 사줄 마음이 사라지지. 친해진 것도 아니고 처음 만나서 그러면 깨지. ‘나한테 밥 사준
게 그렇게 아까웠나?’ 싶기도 하고.
그리고 밥 먹듯이 전 여자친구 이야기하는 애들 있잖아. ‘전 여자친구는
안 그랬는데’ 이런 애들. 진짜 생각보다 많아. 무슨 알람처럼 뱉는다니까. 그럼 걔한테 다시 가서 잘 하던가. 그나마 그건 양반이다. 난데없이 옛날에 사귀었던 여자친구 욕하는
애들 있거든. ‘전 여자친구는 정말 멍청했어’ 이런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데 그러면 내가 ‘아, 그 여자는 정말
멍청했구나’ 할까? 얘는 나중에 나도 이렇게 말하겠구나 생각하지. 그리고 왜 꼭 내 얘긴 안 듣고 지 얘기만 해? 모든 이야기가 다
자기중심적이야. 이게 무슨 그래비티야? 내 앞에서 자기 인생을
구구절절 말하는데 입으로 ‘자소서’ 써? 내가 면접관이야? 재미라도 있던가.
그나마 위트 있게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있어서 듣고 있다가 나도 관심 있는 소재를 말하길래 한 마디 했어. 그럼 좀 들어야지. ‘아, 그래요’하고 다시 또 지 얘기만 해. 전생에 묵언수행하다 죽었나 봐. 그냥 내 귀만 놔둬도 될걸? 자웅동체도 아니고, 자기가 그렇게 좋으면 여자는 왜 만나니? 아, 여자 귀를 좋아하나?
사실 남자가 여자보단 돈에 민감하겠지. 책임감도 들고. 하지만 ‘오늘 영화 보러 갈까?’하면
영화 얘기를 해야지. ‘어? 그래? 그럼 밥도 먹고…’ 얘 뭐니? 누가
너 혼자 내래? 영화를 보자고 했는데 얘는 영화가 아니라 영화값, 밥값, 커피값, 이런 걸 생각하고 있는 거지. 그런 게 보인다니까. 그리고 영화를 선택할 때도 자기가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고 하면 그러려니 해. 그런데 네가 보고 싶은 영화보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가 훨씬 대단하고
어쩌고 저쩌고. 자기가 훨씬 우월한 선택을 한다고 설득하는 애들 있잖아. 좀 재수없지. 아, 물론
재수없는 것 중에 최고는 말 놓는 애들 있잖아. ‘어? 내가
오빠네?’ 이러면서. 이게 쿨한 줄 아나 봐? 거기다가 가끔씩 능글능글하게 어영부영 손 잡거나 어깨에 손 올리는 애들도 있어. 팔이 불편하면 깁스를 하던가.
그리고 포르노 보고 성교육 잘못한 남자애들 많잖아. 섹스도 사실 둘이서 함께 교감하려고 하는 건데, 나한테 무슨 서비스
받으러 왔어? 욕구는 넘치는데 무드는 없고. ‘입으로 해줘’ 이런 말하는 애들 정말 입으로 해주고 싶지. 욕을. 얘는 정말 어떻게든 나랑 한번 해볼라고 만난 건가 싶을 정도로, 옷도
벗고, 체면도 다 벗는 애들 있잖아. 완전 깨지. 침대에서 내려오면 나랑 헤어질 거야? 남자는 그게 결승선인 줄 아는데
여자는 거기가 출발점이라고. 몰라도 그렇게 모를까.
줄기차게 소개팅을 하는데도 만날 남자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요즘 남자들 속을 도통 모르겠단다. 만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썸 타는 남자들이 늘었다. 이유가 뭘까?
언젠가부터 A군은 심심찮게 괜찮은 레스토랑을 물었다. 소개팅 때문이라고 했다. 한 주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소개팅을 했다. 어차피 같은 여자를 매주 만나는 것도 아닐 텐데 그렇게 열심히 장소를 옮겨 다니는 이유를 물었다. “장소가 중요하니까.” 너무 당연해서 당황스러운 답변이었다. 하지만 곧 삼면에서 불어오는 냉기 같은 멘트에 정신이 맑아졌다. “나도
같은 곳을 여러 번 가면 질리거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하면 최소한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여야
할 거 아니야.” 유레카! 그렇다. 시간과 돈을 투자했으니 손실을 최소화시켜야 한다. 언제부턴가 남자는
소개팅의 기회비용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식사라도 맛있게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 종의 진화다.
사실 이미 기회비용을 이용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심심하니까 소개팅할
때도 있어. 특별히 어떤 남자를 만나고 싶다기 보단 특별한 계획도 없는데 소개팅 제안이 들어오면 그냥
나가는 거야. 맛있는 것도 먹고, 그냥 놀다 들어오는 거지.” B양의 말처럼 어떤 여자들에게 소개팅이란 킬링타임무비 같은 것이었다. 소개팅
자리에서 여자에게 계산을 시키는 남자를 만난다는 건 벼락을 맞을 확률과 비례할 것이니 나갈 준비만 하면 된다. 그래서
여자들은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라도 두세 번 만나는 게 부담스럽지 않다. 남자들은 계산하라는 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여자들에게 애프터 신청은 중요하다. 소개팅에서
애프터 신청을 받지 못한다는 건 치욕적인 일이란다. 하지만 요즘 남자들은 예전 같지가 않다. 대부분 만나서 헤어질 때까지 매너 모드는 유지한다. 하지만 헤어지면
꺼진 전화기처럼 울리질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은 여자와의 관계를 한 발 이상 내딛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은 여자에게 돈도 쓰고, 시간도 쓰는 건 한번이면
족하다는 거다. 남자의 애프터 신청은 더 이상 매너가 아니다. 확실한
투자다. 어차피 소개팅 기회는 차고 넘친다.
“소개팅에서 만났을 때 진짜 괜찮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은 대부분 콧대가
높다.” C양이 말한 ‘진짜 괜찮다고 생각하는 남자’의 기준은 무엇일까? 키가 크고, 나이는
적당하고, 학벌도 좋고, 직장도 좋고, 얼굴은 그냥 못 볼 정도만 아니라면야. 왜 얼굴보다 키일까? “키가 큰 남자는 대부분 잘 꾸며놓으면 괜찮아지거든. 얼굴도 잘
생기면 좋고.” 하지만 요즘 그런 남자들은 이미 자신의 몸값을 안다.
시간은 남자의 편이다. 30대 여자들은 소개팅 시장에서 30대
남자들보다 단가가 낮게 책정된다. “원래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기보다 더 나은 수준의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30대가 넘어가면 점점 자기랑 비슷한
수준의 남자랑만 결혼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니까.” 30대 이후의 미혼 남자들이란 결혼 시기를 놓쳤거나
결혼이 절실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한쪽은 매력이 없고, 한쪽은
믿을 수 없다. 고로 이상적인 남자를 찾기가 어렵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어”라고
D군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네가 어제 한 일을 알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는 없어도 여자는 만난다는 사실을. “사실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는 여자는 많지. 하지만 마음에 드는 여자는 정말 없다니까. 그냥 요즘은 섹스하려고 여자 만나는 거 같아.” E군은 잘 생기고, 키도 컸으며 결정적으로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여자가
많았다. 혹자는 이게 무슨 된장녀 아메리카노 원샷하는 소리냐고 하겠지만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다. 지하철 3호선 타고 다닌다며 당당하게 말하는 남자의 말에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이던 여자도 외제차 키를 무심하듯 시크하게 테이블에 올려놓은 남자 옆에 앉는 법이다. 키도
크고, 잘 생기고, 돈도 많아 보이는 남자가 매너도 좋으니까
끌리는 것도 당연하다. 다만 체크인과 체크아웃 시간이 정해진 호텔 같은 남자라서 안타까울 뿐이다. 룸서비스 시간은 정해져 있다. 그의 원나잇에 투숙한 뒤 새로운 방을
찾아야 한다. 제로섬 게임이다. 자신이 머물 방을 찾아야
하는 여자는 반복되는 패턴이 지겹고, 방에 새로운 여자를 끌어들여야 하는 남자는 자신의 욕망이 허망하다.
100세 시대라는데, 인생은
길어졌지만 서로가 어떤 사람인가를 천천히 알아갈 만한 인내심은 줄었다. 여유가 사라졌다. 적자생존의 진화 과정을 거친 동물적 본능으로 더 나은 사람을 선택하고자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그러다 보니 선택을 위한 인내심은 증발하고 만남과 이별의 패턴에 대한 익숙함만 남는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소개팅을 아무리 해도 남자를 만날 수가 없다니. 소개팅을 하러 나갔는데 음식에 반해야 한다니. 여자들은 성에 차는
남자를 찾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정말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면 콧대가 너무 높다고 말한다. 덧셈, 뺄셈 수준이었던 남자들이 언젠가부터 미분, 적분 수준으로 진화했다. 상대적으로 남자들은 여자를 만나는 게 쉬워졌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기는 역시 어렵다고 말한다. 왠지
이 여자보다 더 괜찮은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거 같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내가 투자한 자리인데 더 나은
선택을 해야 하는 게 도리다. 그리고 여자를 만나지 않아도 놀 사람은 많다. 주변에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도 적지 않다. 플레이보이들이 넘친다. 남자들끼리 모여서 와인을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것도 지겹진 않다. 여자에게
쓰던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걸 깨달았다. 세상은 넓고 기회비용은 많다.
“아무래도 요즘 남자들은 박력이 줄어들었지.” 여자의 입에서 발음된 게 아니다. F군은 계속 발음했다. “사실 여자들도 이젠 남자한테 기댈 필요 없잖아. 나름대로 사회적
지위가 생긴 여자도 많고. 그만큼 남자들이 여자들을 압도할 수 있는 이유가 하나 줄어든 거 아냐. 그러니까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그러니까 계속 썸만 타는 거지.” 일리 있는 말이다. 터프가이의 시대는 끝났다. 화끈했던 남자들은 맹탕이 됐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사랑은 쟁취하는 게 아니라 기다리는 거라고. 나를 보고 자꾸 웃어주는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착각하던 남자들은 그녀의 미소를 닮은 매너로 여자들을 착각하게 만드는 법을 익혔다. 썸 태우는 기술을 익혔다. 경제적인 우월감을 창처럼 휘두르던 남자들은
이제 썸이라는 방패 뒤로 숨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전통적으로 한국사회에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우월한 존재여야 했다. 그
수단은 경제력이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남자들의 경제력은 여자를 압도하지 못한다. 그만큼 비슷한 여건을 지닌 또래 여성에게 자격지심을 느끼는 남자들도 늘어났고,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점할 수 있는 어린 여자들을 살피게 된다. 그런데 사실 이건 남녀의
관계가 평등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남자들의 지배력이 떨어진 건 여자들의 지위가 상승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페어플레이가 가능해졌다. 그렇다면 보다 명확해진다. 남자가 계산하는 게 당연하다는 암묵적 룰도 깨져야 한다. 페어게임을
원한다는 신호는 분명 매력적일 거다. 뺨 맞은 재벌 2세처럼
‘이런 여자 처음인데’라는 인상만 줘도 일단은 성공이다. 남자는 단순하다. 그러니 알려줘야 한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 역시 이 관계에 있어서 동등한 투자자임을 어필해야 한다. 같은 출발선 위에 서 있는 존재임을 깨우치게 만들어야 한다. 물론
남자가 당신의 지갑을 사랑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썸’을 타고 말지.
밥이라는 거, 그냥 씹어 삼킬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맛없는 밥을 먹으면 맛있는 디저트라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새삼 내 혀에게 미안해졌다.
“조물주는 인간에게 살기 위해 먹기를 강요하는 대신 그것을 권장하려고 식욕을, 그것에 보답하려고 쾌락을 주었다.” 미식의 경전으로 꼽히는 <미식예찬>의 저자이자 저명한 미식 평론가였던 브리야 사바랭이 남긴 말이다. 여기서 쾌락이란 아마 미각을 의미할 것이다.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자연히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하는 욕구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이 욕구란 것이 결국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일종의 혜택이란 의미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이 혜택을 잘 누릴 수는 없을 것이다. 혹은 그 혜택을 꼭 누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존재할 것이다. 그건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는 것을 강요할 필요가 없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회사 사무실이 이사하기 전, 그 부근에 점심시간마다 자주 찾던 식당이 하나 있었다. 흔히 밥집이라고 말하는 백반집 같은 곳이었는데 아마 몇 달 동안 그곳을 찾는 내내 순두부 찌개를 먹었던 것 같다. 나중에는 내가 순두부 찌개를 시킬 것임을 사장님도 짐작할 지경이었는데 한번은 함께 밥을 먹던 회사 동료가 말했다. “순두부 찌개 정말 좋아하나 봐.”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정답도 아니었다. 싫어하지 않을 뿐 정말 좋아하지 않았던 게다. 그런데 왜 맨날 순두부 찌개를 먹었던 것일까. 그냥 그게 편했다. 어차피 밑반찬이 매일같이 바뀌는 곳이고 찌개 역시 밥맛을 돋우기 위해서 곁들인 음식이라고 생각하면 뭐가 됐든 상관 없었다. 어차피 그 나물에 그 밥이니까. 물론 그 식당의 다른 메뉴가 형편없어서가 아니다. 대부분 먹을만했다. 나는 좀처럼 ‘맛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먹을만하다’ 정도라면 적당히 만족한다. 순두부 찌개는 먹을만했다. 내 기준에서 먹을만한 메뉴들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씹어 삼킬 수 있었다. 고로 어제 자장면을 먹었으니 오늘 자장면을 먹을 수 없다는 논리는 나와 무관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는 것처럼 오늘은 오늘의 짜장면이, 내일은 내일의 짜장면이 만들어지는 거다.
“지금 먹고 싶은 거 있어?”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는 건 그래서였다. 먹어야 한다는 본능은 강렬한데 먹고 싶은 무언가에 대한 욕구는 강렬하지 않았다. 서술어는 존재하는데 목적어가 부재했다. 뚜렷한 의지도 없었다. 사실 직장인이라면 필연적으로 일주일에 다섯 번씩 반복적인 고민에 당면한다. 점심시간마다 매번 무엇을 먹을 것인가라는 화두 앞에서 고민하기 마련이다. 만약 당신이 80세까지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당신은 29200번의 점심을 먹어야 한다. 하루에 식사를 세 번 한다는 가정 하에선 87600번의 식사를 해야 한다. 그만큼의 고민을 껴안고 살아야 한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피곤한 일이다. 결국 적당히 끼니를 때우자는 절충안이 득세하기 마련이다. 생존이라는 식사의 본질적인 기능성이 메뉴 선정의 패턴에 적극적으로 반영된다.
사실 내게 있어서 식사란 기본적으로 주유 혹은 충전과 다를 바 없는 행위다. 식사란 에너지 충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뇌에서 보낸 전기 신호로 인해 촉진된 위산의 분비가 발생시킨 위벽의 통증, 즉 우리가 흔히 허기라고 말하는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 씹고 삼키는 행위를 유도하기까지의 매커니즘의 결말에 해당된다, 결국 인간은 살기 위해서 식사한다. 다만 생존만을 생각하기엔 인생은 길고 먹을 것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맛있는 것을 먹길 바란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항상 최상의 맛을 느낄 수 없다면 적당한 포만감이 보다 중요하다. 신은 내게 세치 혀가 느낄 수 있는 쾌락을 선물했을지 몰라도 그것을 끝까지 추구할 끈기를 선물한 것 같진 않다. 하지만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입과 소화시킬 수 있는 위만큼은 확실히 선물한 것 같다. 그리고 세상엔 신이 선사한 혜택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신념을 필사적으로 추구하는 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의 고민에 무임승차하면 된다. ‘머리칸’이든 ‘꼬리칸’이든. 그런데 대부분 그 고민의 주체는 남자보단 여자였던 것 같다.
사실 예전엔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들은 왜 항상 밥을 남기면서 케이크를 먹는 것일까. 분명히 배가 불러서 밥을 남긴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저 빵은 입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인가. 그때마다 그녀들은 말했다. 여자에겐 ‘밥 배가 따로 있고, 디저트 배가 따로 있다’고. 그러니까 한 조각 케이크를 맛보기 위해 그녀들은 그리 밥을 남겼나 보다. 생각해보면 그것이야말로 대단히 필사적인 행위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혜택을 누리고야 말겠다는 일종의 의지. 식사가 맛이 없었다면 맛있는 디저트라도 먹어야 한다는 의무감. 물론 그녀들은 식사가 맛있어도 디저트를 찾는다는 게 함정이지만 어쨌든 디저트 문화라는 건 보통의 남자들에겐 익숙한 행동 양식이 아니다. 남자 둘이서 카페에서 케이크를 나눠 먹고 있는 모습을 볼 기회란 흔치 않은 건 그래서다. 애초에 케이크를 먹기 위해서 위를 비워야 한다는 사고를 지시할 학습 유전자 자체가 남자에겐 희박하다. 결국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미식의 개화기를 열어주는 건 여자일수밖에 없다. 애인과의 데이트를 위해서 맛집을 찾고, 브런치를 먹고, 케이크를 먹고, 와인도 마시고, 아마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자를 통해서 미식의 개화기를 맞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남자 누구냐고? 내가 그랬다.
잘못된 일반화의 오류 아니냐고? 글쎄. 물론 아닌 남자들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 남자의 팔 할은 그럴 것이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삼겹살이 이 땅의 외식 문화를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삼겹살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말이다. 남자들이 주도한 심심한 식문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건 분명 여자들이다. 결국 먹고 싶은 게 많은 여자들 덕분에 먹을 수 있는 것이 많아졌다. 사회적인 시각도 변했고, 남자들의 혀도 달라졌다. 여자로 인해 남자의 미각이 진화했다. 생각해보면 아담에게 선악과를 권한 것도 이브였다. 태초부터 미식에 대한 호기심이란 남자보단 확실히 여자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언컨대 여자가 미식의 미래다. 고로 나는 그녀들을 따라서 주유, 아니, 주문한다. 선악과라도 상관없다. 먹을만하니까 먹었겠지.
“자꾸 나만 바라 봐.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니까. 유난히 나한테 잘해주더라고. 어떡하지. 내가 먼저 고백할까?” 일단 내 노래를 먼저 들어보게나. ‘아, 여보게. 정신 차려. 이 친구야.’
“그거 다 어장관리야. 원래 선수들이 그래.” 친구는 호기롭게 말했다. 그런데 잠시 후 생각에 잠기더니 무언가 기분 나쁜 것이 떠올랐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음, 맞다. 그런 적이 있었어.” 이윽고 혀를 굴려 밀어낸 언어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나를 좋아하나?’라고 생각했지. 그것도 아니면 왜 나랑 둘이서만 술을 마시겠어? 그리고 자꾸 기댄다니까. 그러니까 나도 왠지 호감이 생기는 거야. 괜히 잘해줄 리 없잖아. 그리고 어느 날 고백했지. 그런데 갑자기 자기는 아니래. 멍했지. 그래서 그 뒤론 안 봤어. 좀 짜증나잖아.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유치하게 군 것 같긴 한데 막상 그 때 기분을 떠올리면 역시 별로라니까.”
왜 그는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을까? 친절해서? 그럼 지난 번에 찾았던 식당의 종업원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서 불친절했던 걸까. 친절한 건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손을 잡고 어깨도 기대고 막 그러는 건 좀 오해할만하지 않나? 착각하지 않고 배길 수 있는 건가. 그래서 여자에게 물었다. “학창 시절에 여자들끼리 손잡고 화장실도 가는 거 본적 없어? 그만큼 그런 행동이 자연스럽다고.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 네 손을 잡거나 어깨에 기대거나, 그러는 거? 같이 화장실만 안 갔을 뿐이지. 그런 친구들과 비슷한 거야. 그냥 편한 거지.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남자라면 그렇게 못하지. 오히려 엄청 조심스러워질걸.” 미안하다. 잘 몰랐다. 남중, 남고 졸업했거든. 어쨌든 그렇다면 그는 그녀에게 손 잡고 화장실에 가던 ‘베프’ 같은 존재였다는 말일까.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과연 그것이 남자만의 착각이란 말인가?
물론 착각이 남자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자신에게 친절한 남자로부터 호감을 기대했다가 그저 만인에게 ‘매너 좋은 남자’임을 알고 실망한 여자들의 사례도 적진 않다. 매너 좋은 남자는 그냥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일 뿐이다. P2P파일처럼 누구나 공유하는 매너라는 것이 결국 매력일 순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혹시 매너 좋다고 칭찬 받는 여자를 본 적 있나? 혹은 칭찬해본 적 있나? 기억나지 않을 거다. 그럴 일이 없었을 테니까. 매너란 단어의 소유주는 대부분 남자다. 왜냐면 매너란 것이 여자보단 남자에게 유용한 스킬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호감의 기미가 보이면 움직인다. 여자는 보다 신중하다. 어느 정도 확신이 생겨야 반응한다. 먼저 움직이는 쪽이 잘 보이고자 노력하기 마련이다. 채점하는 쪽은 주로 여자다. 남자에겐 매너가 필요한 시점이란 말이다. 그만큼 남자는 보편적인 매너를 갖추는 방향으로 훈련된다. 그만큼 여자들의 친절한 호의란 남자의 입장에선 낯선 것이다. 여자들이 친절을 베풀 줄 몰라서라는 말이 아니다. 그럴 기회가 적다는 말이다. 남자 입장에선 희소한 경험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그만큼 그 여자가 인상적으로 느껴질 가능성이 있다.
육체적인 차이로부터 오해가 조장되는 경우도 있다. 일상적으로 남자가 여자의 몸에 손을 댄다는 건 조심스러운 일이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상대적으로 여자가 남자의 몸에 손을 댄다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는 경향이 있다. 물론 스킨십에 대한 욕망은 여자보단 남자에게 보다 강렬하다. 남자의 입장에서 여자의 육체는 ‘감각의 제국’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스킨십에 있어서 심리적으로 예민한 건 남자 쪽일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서 포털사이트에서 ‘가슴’과 ‘팔짱’을 함께 검색해 보시라. 팔짱 낀 여자의 가슴이 팔에 닿는다는 것이 남자의 상상력을 얼마나 자극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여자에겐 그냥 피부의 접촉일지 몰라도 남자에겐 의미 있는 행위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이다. 물론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즐기는(!) 남자도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다. 여자의 무신경한 행위가 남자에겐 적극적인 어필로 읽힌다는 말이다.
남자의 감정 표현은 확실히 단순하고 명확하다. 물론 혹자는 반문할 것이다. 요즘 남자들도 ‘밀당’이 얼마나 심한데! 미안하지만 그렇게 느꼈다면 그 남자가 당신에게 확실한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감정적으로 어리석은 짓은 해도 자기 감정을 배반하진 못하는 존재다. 물론 선수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하지만 이는 여자도 마찬가지다. 어장 관리는 성별의 제한을 두지 않는 선수들의 세계니까. 어쨌든 남자란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에겐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전달하고자 애쓰기 마련이다. 상대를 소유하고 싶어한다. 그러니 상대의 호감을 예감한 남자들은 그만큼 빠르게 달궈진다. 감정을 익히는 속도를 끌어올린다. 아우토반을 만난 듯이 질주한다. 그래서 착각 속에서 달려나간 감정을 돌이키기가 어렵다.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 그녀는 이미 나만의 연인이었는데 환상 속의 그대가 돼버렸으니 헤어나올 길이 막막하다. 한편에선 수치심도 자란다. 본의 아니게 착각하게 만든 그녀가 원망스러워지기 마련이다. 착각은 자유지만 대가가 크다.
사실 자신의 호의가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착각하게 만든 남자가 있었던 여자에겐 그런 경험이 몇 차례 더 있었거나 생길 가능성이 있다. 미필적 고의로 어장을 운영하는 여자인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습니다. 매번 말하고 미안해한다. 정말 본의 아니게 그리 된 것인지 의심스럽다. 어차피 미필적 고의로 착각을 수확했던 그녀였건, 고의적으로 마음을 경작했던 그녀였건 간에 그녀들에게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던 남자라면 아파도 다시 한번 거절의 뉘앙스를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전문적인 양식업 종사자는 끝까지 당신에게 마음이 없다는 뉘앙스를 풍길 뿐 자신의 어장에서 쉽게 풀어주려 들지 않는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남자를 긍휼히 여겨서 격려하고 위로를 할지언정 미안해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양식업에 종사하게 된 그녀라면 선을 그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당신을 옭아맨 그물을 당장 치우려 노력할 것이다. 사과부터 할 것이다. 당장의 착각에 일조했다는 죄책감을 표시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위로가 될진 모르겠지만 최소한 잘못된 경로를 수정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안긴다.
<건축학개론>에서 수지가 연기한 서연이 ‘썅년’이 된 건 그녀가 약아서가 아니었다. 승민(이제훈)이 머저리였기 때문이다. 이 여자가 내 여자다. 왜 말을 못해! 하지만 알다시피 수지는 ‘국민 썅년’이다. 대한민국 남자들이 필연적으로 입대하는 것마냥 수지를 좋아한다. 물론 남자들이 착각하는 여자가 죄다 수지 같을 리가. 하지만 매력이 없는 여자가 남자의 착각을 불러일으킬 순 없다는 말이다. 고로 선수 지망생을 꿈꾸며 자신의 매력에 낚이는 남자들의 어장 관리를 즐기는 여자가 아니라면 주의할 필요는 있다.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남자들의 원망을 먹고 사는 일상이 즐거울 리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녀 사이엔 친구 관계라는 게 없다는 속설이 괜한 말은 아니다. 그만큼 이성간의 친구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황진이가 서경덕과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서경덕이 황진이를 옆에 누이고도 코를 골고 잘 수 있는 대쪽 같은 남자였기 때문이다. 세상에 그런 남자가 흔할 리 있겠나. 아니, 그런데 진짜 잠만 잤을까? 진짜?
오토매틱은 확실히 편하다. 하지만 스틱 한번 제대로 잡아보면 그 ‘손맛’을 잊기 힘들다. 물론 기어보다도 중요한 건 타고 싶은 차 그 자체다.
친구에게 물었다. “수동적인 여자와 능동적인 여자 중 누가 좋아?” 류현진의 직구처럼 답이 날아왔다. “낮에는 수동적이고 밤에는 능동적인 여자!” 그야말로 능동적이다. ‘낮에는 따사로운 인간적인 여자’든, ‘커피 한잔의 여유를 아는 품격 있는 여자’든, 수컷들은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운 여자’를 원한다. 이왕이면 침대에서. 대부분의 남자들이 능동적인 여자를 원한다고 말하는 건 한번 어떻게든 ‘해볼라꼬’ 노력했던 기억의 산실일 것이다. 그러니 능동적인 여자가 좋다. 혹시 능동적인 여자 이상의 자동적인 여자라면, 주님께 영광.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시라. ‘너무 수동적인 여자친구 때문에 고민입니다.’ ‘관계시 수동적인 여자는 어떻게 적극적이게 만들까요?’ ‘연애를 할 때 수동적인 여자 아닌 능동적인 여자 되라?’ ‘능동적인 여자의 섹스.’ ‘남자는 능동적인 여자를 좋아한다.’ 등등. 세상 수컷들의 관심은 로마가 아니라 섹스로 통한다.
‘수동적’이란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란 이렇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의 작용을 받아 움직이는. 또는 그런 것.’ 반대로 ‘자동적’은 이렇게 정의된다. ‘다른 힘을 빌리지 아니하고 저절로 움직이거나 작용하는. 또는 그런 것.’ 그러니까 수동적인 여자란 달과 같은 존재다. 자신을 비춰줄 남자가 필요하다. 상대의 액션에 따라서 리액션도 제각각이다. 흥미롭지만 속을 알 수 없어서 답답하다. 자동적인 여자란 자연히 태양과 같다. 주변에 빛과 온기를 전한다. 누리고 싶은 존재다. 에너지가 넘친다. 하지만 때론 견딜 수 없게 뜨겁다. 지나치게 주장이 강해서 지칠 때도 많다. 고로 섹스를 기준으로 여성의 수동성과 자동성을 판단한다는 건 다분히 수컷의 본능일 뿐이다. 게다가 남녀가 만나서 발정기의 개처럼 섹스만 하는 건 아니다.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여자’도 ‘밤이 오면 심장이 터져버리는 사나이’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이순재 선생님의 특별한 제안에 귀가 솔깃해질 나이가 온다. 인생은 길고, 섹스는 짧다. 수동적인가, 자동적인가라는 이분법적인 구별보다 중요한 건 어쩌면 얼마나 매력적인가라는 기준이다.
페로몬 향수보다도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일지 몰라도 ‘사랑 받을 수 있는 사람’일지는 정말 아무도 모른다. 물론 니체는 ‘두 사람이 있는 그대로 기뻐하는 것이 사랑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니체는 평생 혼자 살았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내 모든 것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이상형이라는 말은 자웅동체가 되고 싶다는 말처럼 들린다. 전략이 필요하다. 수동적인 여자와 자동적인 여자를 구별하는 건 남자일지 몰라도 기준은 분명 대상이 되는 여성 자신에게 있다. 자신의 성격을 자신의 매력으로 승화시키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필요하다.
“아니, 1년을 사귀었는데 한번을 안 해주는 거야. 내가 무슨 스님이냐? 그래서 1년 되는 기념일에 해외로 여행을 가기로 했어. 같이 해외까지 나가서도 설마! 그리고 역시 드디어! 했지. 했어. 그리고는 한국으로 돌아왔어. 아, 이젠 좀 쉽겠지. 아놔, 그런데 이게 뭐야. 또 안 해주는 거야. 내가 걔랑 한 3년 사귀었는데 1년에 한 두 번했나? 그런데 진짜 웃기는 게 뭔 줄 알아? 지금도 종종 걔가 생각난다니까? 헤어진 지가 언젠데.” 정말 아이러니한 사연이다. 쉬운 여자가 아니었기에 미련이 남는다. 자동적인 여자가 보다 좋다고 느낀다는 건 감정적 판단이 아니라 경험적 믿음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여자를 리드해야 한다고 믿는다. 침대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그녀가 원하는 걸 해주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녀는 좀처럼 말이 없다. “그냥 너 편한 대로 해”라는 말을 믿었다가 맘 상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속내를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차라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거나 아예 상황을 리드해주는 자동적인 여자가 수동적인 여자보다 상대적으로 편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연상녀를 좋아하는 남자들의 심리도 어쩌면 이런 것이다. 그녀들은 남자를 자신을 위한 지갑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댈 수 있는 편안한 파트너십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남녀란 섹슈얼한 긴장감이 필요한 관계다. 연인이 아니라 모자지간이 돼선 곤란하다. 당신이 원하는 건 연애이지 육아가 아니니까. ‘나는 솔직하고 털털한 여성이야. 그게 매력이지’라고 믿는다면 당신이 구애하는 그 남자에게도 그런 동성 친구 몇 명쯤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을 사랑해주길 바라는 남자의 ‘베프’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정신 차려야 한다.
“클럽에서 만난 두 명의 여자가 앞에 있다고 생각해봐. 한 명은 정말 화끈하게 잘 놀아. 그런데 그 옆에 좀처럼 말도 없고 새침한 여자가 앉아있어. 둘 다 예뻐. 섹시해. 일단 그날은 화끈한 여자랑 자겠지. 그런데 아마 그 다음 날엔 그 옆에 있는 여자에게 연락할걸.” 좀 놀아본 지인의 말이다. 모든 남자의 심리가 꼭 이렇진 않다. 하지만 참고할 필요는 있다. 물론 내숭 떠는 여자는 매력이 없다. 정확하게는 내숭만 떠는 여자는 별로다. 물론 적당한 애교에 녹지 않는 남자는 드물다. 하지만 꼭 콧소리를 낼 필요는 없다. 그저 상냥하게 한번 거절해보시라. “미안하지만 안돼.” 당신의 자동적인 여자의 유전자를 억누르고 수동적인 여자의 탈을 써보라는 말이다.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 먹기 쉬운 떡은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먹기 힘들어지면 애써 손을 뻗는다. 남자의 마음도 간사하다. 쉬운 여자가 되느니 나쁜 여자가 되는 것이 훨씬 매력적이다. 물론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마음을 얻는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체질을 바꾸라는 말이 아니다. 적당히 조절하라는 말이지. 지나치게 수동적인, 의존성이 심한 여자는 피곤하다. 누구라도 쉽게 나가떨어진다. 하지만 적절한 수동적 태도는 이성의 흥미를 자극할만한 매력이 될 수 있다. 채찍질을 한번 했으면 당근을 하나 물려줘야 하는 법이다. 긴장과 이완의 균형처럼 수동과 자동의 균형을 맞추는 노하우가 필요하다.
남자를 리드하는 건 좋다. 처음부터 모든 패를 보여줘선 곤란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을 아낄 필요가 있다. 좋아한다면 모든 것을 줄 필요가 있다. 다만 일방적이거나 쉽게 줘선 곤란하다는 말이다. <섹스 앤 더 시티>의 한 에피소드에서 캐리는 상담사에게 하소연한다. 연애도 잘 안 풀리고, 인생도 꼬여간다며, 자신이 만난 남자들이 왜 다 그 모양인지 모르겠다고. 그때 상담사가 말했다. “당신이 만난 이상한 남자들의 공통점은 바로 당신이죠.” 모든 이유는 당신의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자동적인 여자이건, 수동적인 여자이건, 남자의 선택을 기다리지 마라. 스스로를 뽑기 인형이라 여기지 않는다면. 선택을 이끄는 여자가 돼야 한다. 매력 있는 여자가 돼야 한다. 남자가 원하는 것도 그런 여자이니까.
든 자리도 알고 난 자리도 안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건 없어졌고, 없어야 할 것이 굴러다녔다. ‘내 집’에선 상상할 수 없던 일이 결혼 후 ‘우리 집’이 생기면서 벌어졌다.
“사람을 갑자기 바꾸려고 그러면 안돼. 그냥 서로 맞춰서 살아야지.” 장모님께선 신신당부하셨다. 하지만 인내심이 바닥을 치는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아내는 종종 ‘조커’ 같았다. 집안 곳곳을 무질서하게 어지럽혔다. 여기가 신혼집인지 고담시인지 구별할 수 있을 때 무찔러야, 아니, 바로잡아야 했다. 질서를 확립해야만 한다. 복면을 쓸 필요까진 없었다. 대신 단호하게 언어를 던져야 했다. “외출하고 돌아와서 가방은 제발 식탁 의자에 던져두지 말라니까.” 그렇게 옥신각신한 이후에도 어김없이 그녀의 가방은 주문이라도 받을 사람처럼 식탁 의자에서 발견됐다. 종종 쇼파에서도 목격됐다. 목탁을 두드리며 반야심경이라도 읊는 마음으로 그 무질서를 견뎠다. 사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내로 업데이트 되기 전, 그러니까 여자친구 버전이었던 당시에 그녀가 혼자 살던 집에서도 이런 풍경을 적잖이 목격했으니까. 사실 낯익은 그림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정리라는 단어와 멱살이라도 잡은 양 생활하는 누나를 보며 자랐고, 덕분에 여자와 정리라는 단어는 강남구와 캘리포니아주처럼 요원한 관계임을 암기해 왔다. 문제는 그것이 더 이상 남의 집 불구경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사람들이 종종 착각하는 한가지 개념을 정리해보자. 간혹 청소와 정리를 동일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가슴을. 정확한 의미부터 짚어보자. 청소의 사전적 의미는 ‘더럽거나 어지러운 것을 쓸고 닦아서 깨끗하게 함’이며 정리는 ‘흐트러지거나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는 것을 한데 모으거나 치워서 질서 있는 상태가 되게 함’이다. 그러니까 바닥에 널브러진 지갑이나 옷 따위를 치우고 나서 우리가 ‘바닥을 깨끗하게 했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간단히 정의해서 날 잡고 하는 게 청소라면 언제라도 그러하듯이 해야 하는 게 정리다. 그리고 다음 문장은 밑줄 쫙. 청소를 하겠다고 정리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그냥 정리하지 않는 사람이란 말씀. 청소를 위한 정리란 말 그대로 청소 직전의 일상적인 행위 중에 불가피하게 어질러진 것을 치운다거나 청소기 헤드에 걸릴만한 것들을 임시적으로 옮기는 하등의 행위일 뿐이지 약속된 위치에 두지 않은 것들을 몰아서 제 자리로 되돌려 보내는 노동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건 청소가 아니라 온전히 정리에 관한 것이다. 솔직히 청소는 주기적인 노동일 뿐이지 일상적인 습관이 아니니까. 중요한 건 정리가 되지 않는 상태에선 청소도 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물론 항상 정리하지 않는 사람이 깔끔하지 않은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깔끔한 상태를 좀처럼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정리가 안된 상태에선 청소도 힘드니까, 결국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고.
정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정리의 대상이 되는 물건의 위치를 지정해주는 것이다. 자주 쓰는 물건과 그렇지 못한 물건을 구별하고 위치가 얼마나 자주 바뀔 것인지 그 가능성을 탐색한 뒤 물건의 용도와 어울리는 동선을 생각해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옷방에 국자를 두지 않고, 부엌에 옷걸이를 걸지 않는 이치랄까. 물론 이처럼 명확한 경우엔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만 공간의 특성에 딱 떨어지지 않는 물건들도 존재하기 때문에 고민이 필요하다. 집마다의 구조적인 특성에 기반한 노하우도 요구된다. 스스로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대체 그건 어디 있는 거지?’ 당장 필요한 무언가가 약속된 위치에 놓여있지 않아서 생기는 혼선에 익숙하다면 정리를 못하는, 어쩌면 안 하는 쪽인 셈이다. 아내를 비롯해서 몇몇 여자들이 가끔 핸드백이나 가방을 뒤적거리며 핸드폰을 찾는 모습을 보는데 그때마다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건 그 작은 가방에도 작게나마 별도의 주머니가 있는데 굳이 그 핸드백 안의 잡동사니들 속으로 핸드폰을 묻어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리곤 매번 겨우내 핸드폰을 발굴한다. 그때마다 핸드폰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긴장하기도 하면서. 문제는 실제로 잃어버렸음에도 잃어버린 건지 모르고 뒤늦게 그 상황을 파악하는 순간도 존재한다는 것. 정리란 물건의 공간을 확정 짓는 동시에 공간의 용도를 명확히 가져가는 일이다. 단지 집 안에서만 쓸모 있는 기술이 아니다. 정리가 필요한 건 비단 ‘집 구석’만은 아니니까.
원래 나는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짐에 불과한 것들을 구별해서 최대한 신속하게 버리는 편이기도 하다. 방의 면적엔 한계가 있었고 넘치는 잡동사니들을 수납할 만한 공간의 견적을 파악해서 채워 넣는데 이골이 났다. 문제는 그런 덕분인지 빈 공간에서 어떤 강박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신혼집을 방문한 몇몇 지인은 말했다. “신혼집이 아니라 이미 몇 년 정도 살아온 집 같은데?” 그러니까 무언가 꽉 채워진 공간 같다는 인상을 주는 건 아내보단 내 욕심이 반영된 결과다. 처음 신혼집으로 이사하던 날부터 집정리의 윤곽이 잡혀가던 3일 간 공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주도했던 건 아내가 아니라 나였다. 지금도 무언가 자리를 잡아야 할 가구가 생기면 으레 자리를 지정하는 건 아내보단 나다. 물론 의견을 교환하고 수렴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고민하고 선택하는 건 주로 내 몫이 됐다.
아무래도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가 되듯이 더 많이 정리하는 쪽도 약자가 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빨래가 마르면 당장 치워야 속이 편한 쪽이 전전긍긍하다가 빨래를 걷게 된다. 설거지도 마찬가지이고, 청소 역시 그렇다. 그러다 보니 살짝 억울해지는 순간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한편으론 정리 페티쉬라도 있는 것마냥 정돈된 이미지로부터 쾌감을 느낄 때도 있다. 어쩌면 이건 피곤한 강박일지도 모른다. 규칙을 정하고 따르길 설득하며 실태를 확인하는 쪽이 자연스레 더욱 피로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 딱히 정리에 신경 쓰지 않는 아내가 편해 보이기도 하고. 물론 아내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식탁 의자나 쇼파에서 아내의 가방이나 핸드백을 보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고, 집 안을 떠돌아다니던 물건들이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물건의 가짓수가 늘고 있으니까. 반대로 내가 무장해제되는 순간도 생기는데 ‘포기하면 편해’라는 진리를 새삼 깨닫는 순간도 있다고나 할까. 노력하는 속도가 빠를지, 포기하는 속도가 빠를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애초에 정리는 내 몫이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적당히 발만 맞춰준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결국 우린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닫는 과정이 필요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건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장점이 될 수도 있더라. 각자 자신에게 어울리는 역할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나쁜 일이 아니다. 게다가 보다 인정받는 일이 있다면 생색도 낼 수 있기도 하고. 가끔 머슴처럼 살고 있다는 기분은 그저 착각이겠지. (응?)
직장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경쟁력이 있다고 말했다. 어느 여자 상사가 그랬다. 듣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결국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글래스 실링(glass ceiling)’이라는 숙어가 있다. 직역하자면 ‘유리 천장’이란 뜻이지만 ‘여성이나 어떤 집단이 높은 지위로 올라서지 못하도록 막는 장벽’이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차별은 뿌리 깊은 전통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통용되고 유전자적으로 세습되면서 때론 교묘하게 역할의 분리처럼 강요되는 차별적인 유전자가 사회 도처엔 여전하다. 어쩌면 굳건한 남성성의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여성의 공성전과 남성의 수성전은 현대 인류사의 한 단면을 차지하는 그림일지도 모른다.
성경에 따르면 야훼는 에덴동산의 외로운 독거남을 위해서 그의 늑골 하나를 여성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란 남자에게 있어서 뼈를 내어준 존재라 할 수 있겠다. 탈무드에선 남자가 여자에게 끌리는 것이 남자가 잃어버린 늑골을 되찾고자 하는 본능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기도합시다, 는 훼이크고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남성은 항상 여성을 ‘소유’하고자 했다. 그래도 된다고 믿었다. 아니, 믿을 것도 없이 그랬다. 전쟁에서 여성이 전리품처럼 여겨진 것도 그래서다. 전쟁이 지배하던 역사의 주인공이 남자였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 건 어쩌면 야만의 시대가 끝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위치에 서있는가. 남자만 지배하는 시대가 끝났을 뿐 남자가 지배하는 시대가 끝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서론이 거창했다. 어쩌면 거창한 핑계를 대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남자다. 군대도 다녀왔다. 대한민국에서 사회생활하기 최적화됐다고 여겨지는 ‘남자 직원’ 중 하나다. 무슨 자신감이냐고? “군대문화에서 익힌 계급적인 충성심이 강하다.” “군대 경험을 통해서 상하 관계에 익숙해서인지 무언가 지시를 내리면 일단 부딪혀 보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여자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정확하게는 ‘여자 상사’로부터. 지금부터 인용되는 말들은 모두 여자 상사들로부터 얻은 답변이다. 여기서 말하는 여자 상사란 직장 내에서 최소한의 결정 권한이 있는, ‘팀장’급 이상의 직책을 지닌 여자들이다. 물론 당사자들은 모두 무기명으로. “누런 소가 일을 잘하오? 검은 소가 일을 잘하오?”라고 묻는 황희 정승의 질문에 밭 갈던 농부가 굳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타산지석 삼았다. 그 농부가 왜 그랬는지 모른다면 검색하길 요망하며 본론으로 다시 정주행.
분야마다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여자 상사들은 직장 내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에 비해서 직장 내에서의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사원 시절엔 조금 생각이 달랐다고 한다. “옆에서 볼 땐 답답하고 줄서기에만 급급해 보여서 한심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팀장이 되고 보니 상사에 대한 충성심이 깍듯하고 다른 팀으로부터 주요 정보를 수집해오는 정보력도 있다.” 여자들은 보통 남자들을 정치적이라고 말한다. 정치는 관계를 형성시킨다. 관계는 바로 정보망이다. 정보가 패처럼 돌려진다. 좋은 패는 아무 곳에서나 펴는 게 아니다. 이기고 싶은 상대 앞에서 펴는 거다. 인정받고 싶은 상대에게 던져야 한다. 그러니 동료들은 몰라도 상사는 알게 돼있다. 그 패를 확인하게 되는 쪽은 상사일 테니, 그 정치적인 관계로부터 얻어지는 정보의 장점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저 동료 여자들이 한심해 여기는 단합회장에선 은밀하게 정보가 오고 간다.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일 때도 남자들은 대놓고 반대하거나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여자들은 즉각적으로 반대의견을 표한다. 표정 관리도 잘 안 되는 편이라 일을 주는 입장에선 부담을 느낄 때가 있다.”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골목대장 놀이를 하는 게 남자다. 유전자적으로 서열을 나누고 패를 가르는 게임에 능하다. 어쩌면 군대는 그런 본능을 보다 구체적으로 계발시키는 조직일지도 모른다. 속된 말로 ‘까라면 까는’ 일상에 2년간 체류하다 보면 방사능에 피폭당한 사람처럼 상명하달 방식의 수직적인 조직 체계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게임상에서 일단 클리어해야 하는 스테이지처럼 느껴지는 거다. 상사에 대한 복종심도 존재하겠지만 당장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정복하겠다는 욕망도 적지 않을 거다. 뭐, 남자는 단순한 동물이기도 하고.
“남자들은 큰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여자들은 당장의 흥미에 이끌려서 프로젝트를 기획하거나 아이템을 개진하는데 그러다 보면 논리에 막히는 경우도 있고 큰 관점에서 허술한 측면이 발견된다. 남자들은 아무래도 직간접적인 경험이나 디테일한 가능성을 깊게 파고드는 편이라 무언가를 추진할 때 더뎌 보이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보다 안전성을 확보하는 경우가 많아서 신뢰하게 된다.” <화성에서 온 여자, 금성에서 온 남자>에서 남자는 목적을 성취할 때 만족을 느낀다고 했고, 여자는 누군가와 자신의 느낌을 공유할 때 만족을 느낀다고 했다. 남자는 결과적인 완성을 추구한다. 여자는 그 순간의 흥미를 인정받길 바란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먼저 딴 것도 여자였다. 선악과를 권하는 여자를 믿고 역시 한 입 물었던 남자는 여자와 함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애초에 리스크 있는 거래는 피하라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부동산 교훈극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이 모든 장점들이 남자들의 뛰어난 경쟁력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야근시키는데 무리가 없다는 건 과연 장점인가? 지시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언제나 현명한가? 무조건적인 안정만을 추구하는 것이 사업에서 유리한가? 이 모든 장점들을 빛내주는 건 남자들 자신일까, 그 장점을 요구하는 사회 혹은 조직문화의 분위기일까?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남자의 성비가 여전히 높은 만큼 남자들에겐 좀 더 많은 선배가 있기 마련이고, 남자들 특유의 선후배 문화에 적응한 사람들에게 유리한 조건이 갖춰지는 것 같다. 아무래도 여자들에게 애초에 불리한 경쟁이다.” 그러니까 출발점이 다르다는 말이다. “아무래도 여자들은 결혼이나 육아 문제로 경력이 단절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잠재적으로 여자들에게 지속적인 중요 업무를 맡기는 걸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큰 것 같다.” 출발선도 다르지만 트랙의 조건도 차별적이란 말이다. 아이러니한 건 그런 열악한 조건 속에서 ‘상사’의 위치까지 오른 여자 상사들이 남자의 경쟁력을 인정하는 현실이다. 어쩌면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를 남성보다도 치열하게 습득한 여자만이 그 유리 천장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조직의 논리를 합리화하는 건 아닐까.
반대로 어느 남자 상사는 말한다. “여직원들은 빨리 이해할 줄 알아서 편하다.” 어쩌면 남자와 여자는 서로 자신에게 없는 것을 경쟁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결국 성별의 차이가 경쟁력의 차이라고 느껴지는 환경을 진단해야 한다. “남자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건 여자들에 대한 경계심리가 있는 거다. 관료적이고 계급적인 시스템 말이다. 결국 남자든 여자든 편하게 일하면서도 저마다의 책임감을 느끼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남녀의 장점이 편안하게 수용되는 사무실의 풍경은 당장 요원해 보인다. 현실적으론 지금의 직장에서의 최적화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 최선의 경쟁력일 것이다. 하지만 그 경쟁력이 조직을 진보시키기 보다 조직에서의 생존에 유용한 것이라면 과연 그 경쟁력을 존중해야 할까. 한국 사회에서 남자들의 경쟁력이란 어쩌면 그런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건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성별이 아니다. 언젠가 당신이 누군가의 상사가 됐을 때 당장 시도할 수 있는 그 무엇에 관한 고민일 거다.
지금 <엘르>를 넘기는 당신은 여자 아닌가? 빤한 질문 아니냐고? 그렇다면 혹시 <엘르> 보는 남자본적 있나? 이것도 빤한 질문인가?
남자들은 <엘르>를 보지 않는다. 이게 무슨 자폭 테러이고 자학 공갈인가 싶겠지만 경험상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렇다. 궁금하다면 한번 직접 물어보시라. “<엘르> 챙겨봐”라고 말하는 남자가 얼마나 있는지. 물론 전제조건이 있다. 질문을 받을 그가 일단 패션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 혹은 산업적인 관련이 없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잡지보는 것 자체를 낙으로 자처하는 남자 역시 여기서 말하는 그 ‘남자’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남자’의 자격이란 최소한 손을 뻗어서 닿는 위치에 놓인 잡지를 한번쯤 훑어볼 정도로 잡지에 완벽하게 무관심하지 않은 남자를 의미한다. 감히 장담하건대, “몇 번 본적 있어”라고 말하는 남자를 만나기가 생각보다 어려울 거다.
<엘르>를 읽지 않는 그들은 흔히 여성 패션지라고 일컫는 대부분의 매거진을 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여성’ 혹은 ‘우먼’이란 단어로 수식되는 매거진 대부분이 마찬가지다. 그들은 여자들이 주독자층을 차지하는 잡지에 관심이 없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보이시한 여자’는 있어도 ‘걸리한 남자’는 없다. 남자 옷을 입은 여자가 패셔니스타 대접을 받을지 몰라도 여자 옷을 입을 수 있는 남자는 구경거리가 되고도 남는다. 정말 왜소한 체격의 남자가 아니고서야 골격의 구조상 입을 수 있는 옷조차 드물다. 단적으로 남자는 치마를 입지 않는다. 물론 당신은 “마크 제이콥스는 치마를 입잖아!”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솔직하게 답해보시라. 당신의 애인에게 치마를 입힐 자신 있나? 혹시 스코틀랜드의 전통의상인 킬트(kilt)로 딴지 거는 사람은 반사. 게다가 남자들은 립스틱이나 코스메틱에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다. 마찬가지로 그 아이템과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이 아니라면 말이다.
반대로 여자들 중엔 남성 패션지를 본다는 심지어 즐겨본다는 여자가 생각보다 적지 않다. 그리고 그건 그녀들이 남성복을 입을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관심이 많다. 그럼 남자가 여자한테 관심이 없냐고? 그럴리가. 다만 서로에게 갖는 관심이나 호기심이 다를 뿐이지. 예를 들자면 여자는 남자에게 넥타이를 매줄 수 있다. 남자도 여자의 집업 드레스의 지퍼를 올려줄 순 있지만 그건 엄연히 다른 행위다. 남자가 남자의 넥타이를 매주는 거 봤나? 웬만해선 시도하지 않는 행위다. 하지만 여자는 여자의 지퍼를 올려줄 수 있다. 남자의 복식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는 동성인 남자보다 이성인 여자에게 주어진다. 여자가 남자의 영역을 침범하는 건 자연스럽단 말이다. 그리고 그러고 싶어한다. 대부분의 여자는 자신의 남자를 자신의 기준대로 변화시키는데 능하다.
반대로 남자는 여자의 취향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최소한 그 취향이 눈뜨고 볼 수 없는 재앙이거나 집안 기둥뿌리 뽑아먹는 재난이 아닌 이상에야 그렇다. 대부분의 남자는 자신의 여자를 변화시키고 싶은 욕망이 없다. 선물을 하는 방식에서도 그런 차이가 보인다. 남자는 대부분 그 여자가 갖고 싶은 것이나 갖고 싶을 만한 것을 선물한다. 후자일 땐 대부분 값비싼 것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녀들은 자신이 선물하고 싶은 것을 찾는다. 자신의 남자가 자신의 취향대로 변신할 수 있길 기대한다. 정리하자면 여자는 남자에게 입히고 싶은 것을 선물하고, 남자는 여자를 벗길 수 있는 것을 선물한다. 이성에 대한 남녀의 욕망이 대단히 다르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모른다. 그러니 그들에게 바라는 걸 영리하게 어필해보시라. 그게 그의 주머니 사정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만 아니라면 그에게도 대단히 편안한 일일 테니까. 물론 그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전제하에서. 그리고 당신이 아까 앞에서 언급한 그런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전제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