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듯, 다소 황당하지만 귀여운 그녀와 덜 떨어진 듯 순수한 그가 만나 에피소드는 이뤄진다. <엽기적인 그녀>이후로 곽재용 감독의 머릿속엔 그저 대조적인 성향의 여자와 남자의 만남으로 이뤄지는 좌충우돌 에피소드 밖에 없는 것 같다. <싸이보그 그녀>도 별반 다를 게 없다. 무시무시한 괴력을 지닌 싸이보그 그녀(아야세 하루카)는 먼 미래에서 지로(코이데 케이스케)에게 날아와 한시도 그의 옆을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남녀의 동거가, 엄밀히 말하면 싸이보그와 주인의 합숙이 시작된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 상황이 펼쳐지는지 의문을 품지 않는 게 좋다. 그걸 안다고 해 봤자 모르는 것만큼이나 속 터지는 일이 될 테니까. <싸이보그 그녀>는 두서 없는 영화다. 인과관계에 대한 납득은 좀처럼 불가능하다. 그저 시트콤 같은 상황을 마련하기 위해 마련된 서사엔 스토리텔링에 대한 장기적인 배려 따윈 눈 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니 자아도취되는 영화의 감정선 따위에 몰입할 가능성은 반 푼어치도 발생할 리 없다. 거대한 지진을 묘사하는 영화의 끝머리에 다다르면 이 영화의 태생적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가늠할 수조차 없게 된다. 한국 개봉을 앞두고 일본 개봉판을 재편집했다는데 전자도 딱히 궁금하진 않다. 영화의 말미에 묘사되는 지진만큼이나 100분의 러닝타임이 끔찍하게 막장이라 원래 형태를 되새김질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나마 아야세 하루카의 미소가 작은 위로가 된다.
군중의 목소리와 자동차 경적소리가 어지럽게 뒤엉킨 아래, 인공적으로 반짝이는 스팽글(spangle) 도시가 펼쳐진다. <도쿄!>의 오프닝은 미쉘 공드리, 레오 까락스, 봉준호까지, 됴쿄를 바라보는 세 이방인들의 시선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시선을 집약한다. 반짝거리는 빌딩 숲 사이를 가득 메운 갖가지 소음들로 들어찬 도시의 풍경 속에 숨어들어간 듯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형체. 발들일 틈 없이 빽빽하게 보이지만 한편으론 기이하게 텅 빈 풍경. 인공 도시 안에서 유령처럼 살아가는 인간들의 단상들이 어렴풋이 어른거린다. 가늠할 수 없는 세 감독의 옴니버스 <도쿄!>는 이처럼 뚜렷한 형체가 짐작되지 않는 거대한 실체를 구상한다.
포문을 여는 것은 미쉘 공드리의 <아키라와 히로코>다. 히로코(후지다니 아야코)는 자신의 애인인 아키라(카세 료)와 도쿄로 상경해 친구의 거처인 작은 쪽방에서 머무른다. <아키라와 히로코>는 간단하게 정리하면 자기 존재의 가치를 묻는 어느 여성의 고민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자신을 쓸모 없는 존재로 스스로 인식하고 그에 대한 깊은 우울에 빠져들던 그녀는 어떤 변신을 맞이한다. 공산품처럼 비슷한 크기의 방이나 줄지어 선 자동차보다도 가치가 앙상하다고 느끼는 히로코의 변신은 물질가치의 경도 속에서 스스로 퇴락을 경험하는 현대 도시인의 불행과 맞닿아 있다. 그 불행은 유령처럼 인식되는 자신의 가치를 사물에 빗대어 몰락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아키라와 히로코>는 가볍진 않지만 묵직하지도 않다. 수긍할만한 의도는 존재하지만 큰 감흥을 부르기엔 어딘가 텅 빈 느낌이다. 사물과 공간에 감성을 부여하는 미쉘 공드리 특유의 미술적 감각만큼은 탁월하게 구현된다.
1999년 작, <폴라 X>이후 9년 만의 복귀작이라 명명할 수 있는 레오 까락스의 <광인>은 그의 페르소나인 드니 라방이 출연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만하다. 도쿄 도심의 하수구에서 출현하곤 하는 정체불명의 광인(드니 라방)은 혐오스러운 행동으로 시민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사라지곤 한다. 광인은 도쿄의 하수구를 제집처럼 드나드는데 그 밑바닥엔 대동아 전쟁 시대의 잔재들이 도처에 존재한다. 이는 한편으로 현대일본의 기저에 잠재된 군국주의적 욕망을 도시의 상하구조로 형상화하여 고발하는 제스처 같기도 하다. 역으로 그것은 어떤 상흔에서 비롯된 공포와도 연동된다. 정체불명의 광인이 벌이는 폭력적 행위가 부르는 도심의 혼란은 패전국의 역사를 물려받은 일본인의 심리적 반작용을 자극한다. 마치 광인의 재판장은 전범재판소를 연상시키며 그곳에서 광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일본에 대한 분노를 서슴없이 표한다. 광인은 일종의 망령이다. 군국주의 역사를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혹은 짐처럼 짊어진 일본인의 이중적 심리가 유령 같은 형체로 도사린다. 드니 라방의 거칠고 사나운 연극적 연기는 이런 심리적 형상을 끌어내는 일종의 촉매와 같다. 노골적이면서도 한편으로 섬뜩한 결말부는 둔탁한 맥락을 지닌 이 작품의 모호한 가치를 대번에 끌어올린다. 동시에 그것은 다음 상대를 겨누기까지 한다.-메르드의 다음 모험은 뉴욕에서!-
말미에 등장하는 봉준호의 <흔들리는 도쿄>는 드라마틱한 내러티브와 팬시한 이미지를 선사하는 작품이다. 9년 동안 집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어떤 사람과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며 자신의 적막한 삶을 담담하게 인식하는 히키코모리(카가와 테루유키)가 어느 날, 우연히 눈을 마주친 피자배달부(아오이 유우)를 통해 변화를 겪게 된다. 소품과 같은 상징성과 은유적 태도가 이미지로 구체화되긴 하지만 <흔들리는 도쿄>는 간결하면서도 단출한 테마가 짧은 시간에 잘 숙성된 작품이다. 현실도피적인 남자의 편집증적 삶에 어지럼증과 같은 흔들림이 찾아온다. 폐쇄적인 안정에 갇혀있던 히키코모리가 우연히 외부와 접촉하고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는 설정은 실로 명확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 정체된 삶에 흔들림이 찾아온다. 모든 것이 정돈된 삶이 일사불란해진다. 도시의 유령은 비로소 삶의 윤곽을 확보한다. 히키코모리라는 사회적 문제를 지진이란 초자연적인 현상에 접속한 봉준호 감독의 재기발랄한 발상이 능숙한 연출력으로 잘 포장된 작품이다.
연출자의 개성이 적극 반영된 개별적 결과물들은 형태적으로 불균질한 패키지나 다름없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맥락은 도쿄라는 유령이다. <도쿄!>의 세 작품은 도쿄에서 얻은 모티브를 통해 도쿄라는 특수한 이미지를 완성하지만 그것은 도쿄의 실체가 아니다. 그 지점에서 <도쿄!>가 어느 정도 통찰력을 검증 받은 개인의 해석적 관점을 수집한 것임을 감안해야 한다. 그만큼 그것은 보편적인 심리를 아우르는 대신 특별한 시야를 확보한다. 누군가가 문득 느꼈을, 혹은 느낄만한 도시의 단상이 심중하거나 재기 발랄하게 구현된다. 무엇보다도 도시를 바탕으로 한 기획은 그 도시에 대한 어떤 관심을 볼모로 한다. 그런 점에서 과연 현재 서울이란 도시는 이방인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지, 어떤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