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에도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다. 작품마다 명암이 엇갈렸다. 보고 싶은 작품은 여전히 넘쳤다.
사실 생중계를 보진 못했다. 그저 결과만 실시간으로 체크했을 뿐이다. 그래서 U2의 라이브 무대를 생방송으로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아쉬웠다. 게다가 사회를 맡은 엘렌 드제너러스가 꽤 진행을 잘했던 것 같다. 미국의 유명한 TV쇼 프로그램인 <엘렌 쇼>의 진행자답게 유연한 진행 실력을 뽐내면서도 시상식의 품위에 어울리는 유머를 구사한다. 시상식이 열리는 할리우드의 코닥 극장으로 피자를 배달시켜서 브래드 피트가 손수 서빙을 하게 만든 건 정말 훗날에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일 거다. 그녀가 할리우드의 대단한 배우들과 찍은 셀카가 트위터상에서 무한하게 리트윗되는 과정은 오스카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도 효과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세계 최고의 배우들이 모인 현장에서 권위보다도 대단히 소소한 동료애를 목격한다는 건 할리우드가 지닌 저력을 체감한다는 것과 같다. 영화를 통해서 삶을 공유하고 있다는 동료 의식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축제를 즐기고 있다는 인상이 오랜 할리우드의 역사와 함께 해온 86년 전통의 아카데미 시상식만의 저력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수상 결과를 놓고 보자면 이번 아카데미는 <그래비티>를 위한 무대였던 것 같다. 10개 부문의 후보에 올랐고, 7개 부문을 수상했다. 시각효과 부문을 비롯해서 촬영, 음향효과 등 기술 부문을 거의 독식한 건 익히 예상한 결과였다. 지난 해에 발표된 영화 중 <그래비티>만한 기술적인 성취도를 보여준 영화를 언급하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다만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주요부문에서 <그래비티>가 호명될 수 있을 지가 관건이었다. 그런 점에서 편집상과 감독상 부분 수상은 할리우드가 보기 드물게 SF영화를 인정한 결과라는 점에서 이례적이지만 한편으론 <그래비티>가 구현해낸 영상 기술이 특정한 장르적 표현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적인 영화적 감동을 전달하는데 혁혁한 매개체가 됐기 때문임을 아카데미 위원회 역시 인정한 것이 아닐까. 사실 <아메리칸 허슬>의 차지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편집상을 <그래비티>가 차지한 것도 기술적인 효과를 넘어서 영화라는 결과물로서의 완성도를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만약 <그래비티>가 작품상을 수상했다면 어땠을까? 반대로 <노예 12년>의 감독 스티브 맥퀸이 작품상 대신 감독상을 쥘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랬다면 제86회 아카데미는 역사상 꼽힐만한 오스카로 기억됐을지도 모른다. 기술적인 진보를 인정하는 의미는 더해지고 흑인 감독의 능력을 인정한 오스카로 기억됐을 테니까. 어쨌든 스티브 맥퀸은 처음으로 작품상을 수상한 흑인 감독으로 기록되며 역사에 남게 됐다. 덕분에 브래드 피트 또한 피자를 서빙했던 특별한 경험을 넘어서 배우로서 오른 적 없었던 아카데미의 단상을 제작자로서 오르게 됐다. <노예 12년>은 흑인 감독이 연출한 흑인 노예에 관한 영화라는 점에서 보다 주목을 받을만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흑인 감독이 이토록 중립적인 시각과 건조한 감정 묘사를 통해서 그 시대성을 완벽하게 사실적으로 환기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놀라운 작품이었다. 걸작의 면모가 충분한 이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앞서서 설명한 이유 때문에 한편으로 대중적인 호감을 얻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건 되레 이 영화가 관객의 감정을 고양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영화가 묘사하는 시대성의 비극을 생생하고도 건조하게 전달하는, 그만큼 무겁고 엄중한 시대적 목격이 될만한 영화다. 작품상 수상은 이 영화에게 어울리는 대우처럼 보인다. 그리고 <노예 12년>은 <헝거>와 <셰임>을 통해서 자신의 재능을 줄곧 증명해왔던 스티브 맥퀸에게서 명확하게 드러난 거장의 면모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환영할만한 결과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으로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매튜 맥커너히와 자레드 레토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정확하게는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 출연한 이후부터 배우 경력의 전후를 나눠버리 듯 눈부신 경력을 이어나가고 있는 매튜 맥커너히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 완벽하게 메소드 배우로 진화해 버린다. 에이즈에 걸린 텍사스의 마초 역을 맡은 그는 죽음의 기로에서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미국 내에서 금지된 해외 제약사의 약품을 들여오고 이를 판매하는 사업을 벌이며 불합리한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맞서는 동시에 에이즈에 대한 편견과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 속에 갇혀 살던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인물을 온 몸으로 연기한다. 단순히 체중을 얼마를 줄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원래 이 영화 속에서 살았던 것처럼 행동하고 말한다. 장담하건대 아마 <데어 윌 비 블러드>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 이후로 오스카에 노미네이트된 어떤 배우도 이만한 연기를 보여줬던 적이 없었을 거다. 그리고 그의 연기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 영화엔 자레드 레토도 있다. 아무래도 국내 인지도가 낮은 배우이지만 <레퀴엠>과 같은 작품에서 혹은 지난해에 개봉된 <미스터 노바디>에서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이 배우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 보다 확실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발산한다. 매튜 맥커너히가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이란 영화를 가득 채우는 면과 같다면, 자레드 레토는 이 영화의 결을 만드는 선과 같다. 일찍이 <영 빅토리아>와 같은 실화 바탕의 영화를 연출한바 있는 장 마크 발레를 통해서 재현되는 시대적 풍경 또한 인상적이며 두 배우의 훌륭한 연기를 위해 마련된 완벽한 무대 노릇을 한다.
한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블루 재스민>의 케이트 블란쳇이 아카데미를 수상한 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처럼 보인다. 시종일관 모순된 일상을 전전하는 신경질적인 여인을 연기하며 풍자적인 웃음을 유발하다 결말부에 다다라 놀랍도록 처연한 심연의 민낯을 드러내며 영화 자체의 감정적인 온도를 바꿔버린 그녀의 표정은 애초에 <블루 재스민>이란 영화가 품고 있었던 완벽한 결정과도 같았다. 물론 한편으론 <그래비티>의 산드라 블록에겐 조금 아쉬운 오스카가 아니었을까. 지난 2010년 <블라인드 사이드>로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거머쥐긴 했지만 <그래비티>는 그녀에게 대단히 특별한 작품이었을 거다. 한편으론 이번 아카데미 최대의 이변으로 꼽힐만한 루피타 니옹고의 여우조연상 수상은 지난 201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프레셔스>의 모니카에게 여우조연상을 안겼던 풍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떤 식으로든 놀라운 결과다. 납득할 수 없는 결과는 아니지만 미친 듯한 연기력을 선보인 <아메리칸 허슬>의 제니퍼 로렌스나 탁월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낸 <블루 재스민>의 샐리 호킨스를 생각한다면 두고두고 이례적인 선택으로 회자될 것만 같다.
<슈퍼배드 2>를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버린 <겨울왕국>이 장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한 건 역시 익히 예상한 바이지만 픽사가 아닌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상을 수상한 건 최초란 점에서 특별한 사건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은 2002년에 처음 신설됐다. 게다가 전통적인 주제가의 명가였던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주제가상 수상은 2000년 제72회 오스카에서 <타잔>으로 수상한 필 콜린스 이후로 무려 14년만이기도 하다. 한편 <겨울왕국> 상영 전에 짧게 소개된 단편 애니메이션 <말을 잡아라!>가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 수상이 유력하다고 생각했지만 <미스터 허블롯>이란 작품에게 밀린 건 꽤나 놀라웠다. 애니메이션의 기술적인 변천사를 디즈니의 전통적인 흑백 캐릭터들을 통해서 유머러스한 연출과 테크니컬한 구현에 성공한 수작을 밀어낸 작품의 정체가 실로 궁금하다. 한편 미술상과 의상상을 수상하며 2관왕에 오른 <위대한 개츠비>는 영화가 지닌 야심에 비해서 아쉬웠던 결과물을 생각한다면 다시 한번 씁쓸한 결과처럼 보인다. 올해만큼은 내심 오스카 트로피를 노렸을지도 모를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또 다른 주연작이었다는 사실에선 묘한 연민이 드는 것도 같다. SNS상에서 떠도는 레오의 아카데미 수상 실패에 관한 '짤방'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수상 실패가 인류 대화합에 기여하고 있는 것도 같다. 게다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 매튜 맥커너히가 그와 함께 잠시 호흡을 맞춘 신을 복기한다면 동정심이 더해지는 효과가 유발되는 것 같다.
물론 이번 아카데미에서 최악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던 건 <그래비티>와 함께 10개 부문 후보로 오른 <아메리칸 허슬>이었다. 이 작품이 단 한 개 부문도 수상하지 못한 건 역시 이례적이다. 사실 <아메리칸 허슬>은 영화를 만드는 기능적인 면에서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으로 보이는 반면 결과적으로 정서적인 울림이 얕은 작품처럼 느껴지긴 했다. 마치 캐릭터들의 전장처럼 보일 정도로 배우들 저마다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인상이 느껴지는 이 영화는 시대를 조망하는 시야와 능수능란한 연출과 빠른 편집이 돋보이는 코미디물이지만 그 실화의 재현이 끝내 특별한 감흥까지 가 닿는다는 인상을 느끼진 못했다. 뛰어난 범작을 보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그것이 아마도 골든글로브에 비해서 영화적으로 보수적인 아카데미 위원회의 호응을 끌어내기엔 역부족이었을지도. 어쨌든 축제는 끝났고, <아메리칸 허슬>은 놀랍게도 무관의 제왕으로 남겨졌다.
한편 각본상을 수상한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허>와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파올로 소렌티노의 연출작 <그레이트 뷰티>가 궁금하다. 해외 평에 따르면 <허>에서 호아퀸 피닉스가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줬다고 한다. <존 말코비치 되기>와 <어댑테이션>, <괴물들이 사는 나라>와 같이 범상치 않는 작품들을 연출해온 스파이크 존즈의 작품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또한 전작 <아버지를 위한 노래>로 한국에서도 알려진바 있었던 파올로 소렌티노의 <그레이트 뷰티> 역시 눈길을 끈다. 참고로 <그레이트 뷰티>는 6월에 개봉된다고 한다. 아직 <허>는 개봉 여부가 불투명한 인상인데 아카데미의 힘을 빌어서 개봉에 탄력을 받았으면 좋겠다. 또한 수상엔 실패했지만 스타 캐스팅 하나 없는 흑백 영화로서 주요 부문 후보에 노미네이트된 <네브라스카>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디센던트>와 <사이드웨이>, <어바웃 슈미트>와 같은 작품을 연이어 내놓은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신작이라니 어찌 기대하지 아니할 수가. 이미 해외에선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아카데미 특수를 마저 누릴 순 없을까. 우리가 아카데미를 주목하는 것도 그곳에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가 있기 때문이니까.
(ELLE.CO.KR '민군의 컬처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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