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배우를 어디서 봤더라?’라고 생각하게 되는 건 비단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기시감을 부르는 대부분의 배우들은 언젠가 다시 당신의 눈에 들게 돼 있다. 샘 록웰이 바로 그런 배우다.
70년대 TV게임쇼의 유명 제작자이자 진행자였던 척 베리스가 CIA요원으로서의 살인 경력을 고백한 자서전을 영화화한 <컨페션>(2002)은 조지 클루니의 첫 연출작으로 화제를 모았다. 클루니를 비롯해서 드류 배리모어, 줄리아 로버츠와 같은 할리우드 톱배우가 등장하는 이 작품의 주연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샘 록웰의 것이었다. “영화가 완성된 건 샘 록웰이 처음부터 매우 용감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비열한 짓을 많이 한 캐릭터지만 보는 이들은 그를 지지해야만 한다. 적임자를 찾기란 어려웠고, 새미가 바로 그였다.” 클루니의 말처럼, <컨페션>은 록웰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했다. 그 신뢰란 전적으로 그의 경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1968년 11월 5일, 캘리포니아 댈리시티에서 배우를 지망하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록웰은 두 살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한다. 다섯 살이 되던 해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그는 여름 동안 뉴욕에서 사는 어머니와 시간을 보냈고 그녀가 일하는 뉴욕 시내 극장가의 문화를 일찍 경험할 수 있었다. 심지어 10살의 록웰은 이스트 빌리지의 한 극장 관계자의 제안으로 오디션을 치른 뒤, 곧바로 험프리 보가트가 출연하기도 했던 즉흥 코미디 촌극 무대에 어머니와 함께 오른다.
“나는 열 살부터 극장에서 이상한 짓을 했지만 내 시간 대부분을 보통의 10대가 하는 것을 하며 보냈지. 당신도 알다시피, 나를 흑인이라 생각하며 브레이크 댄스를 연습하거나 대마초를 빨아댔으니까.” 농담 섞인 스스로의 말처럼 록웰의 십대는 파란만장했다. 어머니 덕분에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일찍 발견했지만 그녀의 자유분방한 생활양식은 록웰의 학업을 방해하고 십대를 잠식했다. 습관적으로 약물을 복용하고, 여자를 찾아 파티를 전전하던 록웰의 방탕한 10대는 결국 부모님의 노력으로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배우로서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제작사가 만든 TV호러영화 <클라운하우스>(1989)로 데뷔한 록웰은 배우로서 미래를 걸고자 다짐했다. 뉴욕의 연기스쿨 ‘윌리엄 에스퍼 스튜디오’에서 트레이닝을 받던 록웰은 틈나는 대로 영화 오디션에 참여했고, <브룩클린으로 가는 비상구>(1989)나 <인 더 수프>(1992) 등과 같은 독립영화의 출연기회를 얻어냈으며 몇 편의 TV시리즈에 단역으로 출연하거나 극단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한편 생계 유지를 위해 레스토랑 서버나 사립탐정 조수와 같은 일을 전전하기도 한 록웰은 1994년, 맥주회사 밀러와 광고 계약을 맺는 행운을 얻기도 한다.
“그 영화는 확실한 터닝 포인트였다.”여기서 록웰이 말하는 ‘그 영화’란 바로 톰 디칠로의 <달빛 상자>(1996)다. 존 터투로가 연기하는 이성적인 엔지니어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괴팍한 히피 역할이란 록웰의 지난 경험을 비춰봤을 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중적인 흥행을 얻지 못했지만 인상적인 평가를 얻은 록웰은 미샤 바튼의 데뷔작 <론 독스>(1997)로 다시 한번 더 큰 주목을 얻는다. 선댄스에서 호평을 얻은 이 작품으로 록웰은 다양한 영화제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저예산의 독립영화를 통해 록웰은 경험과 경력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우디 알렌의 <셀러브리티>(1998)에 참여한 록웰은 이듬해 톰 행크스가 출연한 <그린 마일>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쇼생크 탈출>(1994)에 이어 다시 한번 스티븐 킹의 소설을 영화화한 프랭크 다라본트의 <그린 마일>에서 그는 비열한 사형수 와일드 빌을 연기한다. “나는 그를 사탄을 만난 허클베리 핀처럼 보았다”고 밝힌 록웰은 게리 올드만이나 존 말코비치를 참고하며 “구역질 나는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성아소애 변태라고 생각하는 와일드 빌”을 연기했다. 그는 이 작품으로 미국 영화배우조합 시상식의 연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그리고 록웰은 이를 통해 할리우드에 한 발을 걸치게 된다. 인기리에 방영됐던 TV시리즈를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갤럭시 퀘스트>(1999)와 <미녀 삼총사>(2000)에서 연이어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런 과정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샘 록웰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 <달빛 상자>였다면 그의 전환점이 된 인물은 조지 클루니일 것이다. <오션스 일레븐>(2001)의 얼간이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웰컴 투 콜린우드>(2002)에 출연한 록웰은 스티븐 소더버그와 공동기획자로 이름을 올리고 단역으로 등장하기도 한 클루니로부터 클리블랜드에 있는 어느 바에서 그의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된다. 록웰은 말했다. “그래, 좋아, 무엇이든, 어떤 것이라도 해주지. 하루라도 배우가 된다면.” 그리고 한 달 뒤, 소더버그의 ‘섹션 8’에 있는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조지가 혹시 당신이 10월에 시간이 있는지 알고 싶다더군.”록웰의 첫 단독주연 이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 배역에 너무 유명한 누군가를 원치 않았다”는 클루니의 바람대로 <컨페션>의 적임자였던 록웰은 “무엇보다도 그는 그 역할에 대한 권리가 있는 배우”이기도 했다. 그리고 <컨페션>은 록웰의 권리를 보다 많은 사람에게 이해시키는 결과물이 됐다. <컨페션>의 트레일러를 본 리들리 스콧은 <매치스틱 맨>(2003)에 니콜라스 케이지의 상대역으로 록웰을 캐스팅했다.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2006)에 출연한 것도 조지 클루니를 통해 얻은 브래드 피트와의 인연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렇게 록웰은 흔히 비주류와 주류의 진영으로 구분되는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를 건넜다.
“나는 항상 조금 이상해지거나 약간 삐뚤어지는 것을 느낀다. 나만큼 괴짜인 사람도 없을 거다.”정형화되지 않는 그의 성향은 어떤 캐릭터나 장르에도 곧잘 어울리는 능력으로 승화됐다. 2007년작인 <조슈아>와 <스노우 엔젤>과 같은 스릴러에 출연한 바 있는 록웰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2005)나 <더 문>(2009)과 같은 SF장르에도 익숙한 배우다. <컨페션>이나 <매치스틱 맨>과 같이 범죄물을 바탕으로 둔 코미디는 물론 <에브리바디스 파인>(2009)과 같은 가족드라마에서도 썩 어울리는 연기를 선보인다. 또한 “나는 끊임없이 우울한 연기적 접근을 꾀함으로써 나를 채우는 유형의 배우다.”는 스스로의 말처럼 고독하고 우울한 감수성이 짙게 드리운 록웰의 인상은 독설적인 언변으로 유머를 이끌어 내는 그의 태도와 어울리며 작품 전반에 입체적인 감상을 부여한다. 특히 근작인 <더 문>에서 광활한 우주의 달기지 속에서 홀로 생활하는 샘 벨을 연기하는 록웰의 존재감은 단 한 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 정도로 흥미로운 것이었다.
확실한 건 이제 록웰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연기를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섰다는 사실이다. <아이언맨 2>(2010)와 같은 대작 블록버스터로 할리우드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는 여전히 <위닝 시즌>(2009)과 같은 독립영화로 선댄스나 시체스에서도 존재감을 자랑하는 전방위적인 배우로 거듭났다. “나는 내 스스로를 캐릭터로서 인식하는 배우다”라고 말하는 그를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가늠할 수 없기에 더욱 흥미로운, 지울 수 없는 존재감을 지닌 배우. 그가 바로 샘 록웰이다.
오래 전부터 인간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운명을 점쳤다. 그리고 오늘날의 인류는 매일 같이 뜨고 지며 차오름과 이지러짐을 반복하는 달에 수많은 사연을 담아왔다. 오늘도 달이 차오른다. 그러니 가자. 우주에 매혹 당한 영화 속으로.
<스타워즈>
1977년, 모든 것이 변했다.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으로 서부극 일색의 1970년대 할리우드에서 우주시대를 열었다. 사실 많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 시리즈는 루카스의 취향이 총 집약됐다 말해도 좋을 ‘스페이스 오페라’다. 대학시절부터 우주전쟁영화를 꿈꾸던 루카스가 집필한 대하드라마 초안 중 하나의 에피소드가 영화화된 뒤, 대단한 흥행을 거둠으로써 <스타워즈> 시리즈의 역사는 시작됐다. 광선검을 휘두르는 ‘제다이’들은 사무라이 영화의 영향력을, 우주에서 전투를 벌이는 ‘X-윙’의 곡예는 전쟁영화의 공중전을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셰익스피어를 연상시키는 비극적인 스토리와 캐릭터들의 관계도 분명 흥미로운 것이다. 무엇보다도 디테일한 미니어처를 비롯해서 자동으로 작동되는 모형 로봇을 제작하고 다양한 크리처 디자인을 선보이는 등, 일일이 수작업을 거쳐 완성된 대부분의 특수효과는 이 시리즈의 아이덴티티를 대변하는 동시에 새로운 영화적 미래를 제시한 ‘새로운 희망’ 그 자체였다.
<아폴로13>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을 디디기 직전까지 전세계의 인류는 흑백TV 앞에 모여들어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가 달에 남긴 발자국은 인류에게 새로운 열망을 부여했다. 그리고 다음해, 역사적인 두 번째 발걸음을 꿈꾸며 우주로 날아간 아폴로 13호의 승무원들은 우주의 미아가 될 위기에 처했다. 미연방항공우주국 나사의 역사상 최악의 실수로 꼽히는 우주사고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아폴로 13>은 지구로 귀환하기 위해 나흘 간 무중력과의 사투를 펼치는 우주비행사 3인의 ‘성공적인 실패’를 다룬 SF휴먼드라마다. 자신들이 꿈꾸던 달과의 조우를 앞두고 설레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던 세 우주비행사는 불의의 일격과도 같은 기체 고장으로 인해 원대한 꿈을 뒤로 하고 귀환을 위한 생존의 레이스를 펼친다. 수동으로 기체를 조종하며 대기권 진입의 마지막 고비를 넘긴 세 인물이 지구로 귀환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인물들의 노력과 헌신은 인간의 집념과 의지가 한데 모여 이루는 감동의 화음과도 같다.
<콘택트>
소녀는 어려서부터 미지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했다. 자신이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존재할 누군가와의 교신을 바라며 단파방송기 앞을 떠날 줄 몰랐던 소녀는 자신이 따르던 홀아버지마저 여읜 뒤에도 단파 통신을 멈추지 않으며 자신의 꿈을 키워나가고 결국 천체물리학자로 성장한다.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집필한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콘택트>는 과학적 진리가 절대적인 것이라 간주하는 여성 과학자 앨리(조디 포스터)의 신비한 체험을 통해 그 너머의 가치를 되묻는다. 자신이 추구하던 과학적 명제 너머의 무언가를 목격하지만 결국 자신의 체험을 증명해내지 못하는 앨리는 곧 자신이 추구하던 가치의 비좁은 가능성을 깨닫는다. 이는 보이는 것만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이 세계의 신비를 증명하는 영화적 설득과도 같다. “단지 이 우주에 인류만 존재한다면 대단한 공간의 낭비가 아닐까.” <콘택트>는 자신이 머문 이 세계의 신비를 가늠하지도 못한 채 한 세기 안에서 소멸하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영험한 성찰을 부른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갑자기 지금 우리가 두 발을 붙이고 사는 지구가 소멸한다면? 더글라스 애덤스의 장편 SF소설을 동명 그대로 영화화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이 뜬금없는 물음이 과감히 실현되는 이상한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허무맹랑한 우주기행기다. 미래 세계를 건축하겠다는 실현성의 야심을 품거나 비범한 예언적 의지로 무장한 대부분의 SF영화들과 달리 이 작품은 그저 우주와 외계라는 미지의 세계를 우스꽝스럽고 껄렁한 농담 따먹기의 장으로 활용하는데 주력한다. 대단한 과학적 이론을 읊어대는 비범한 SF작품들과 달리 밑도 끝도 없는 상상을 허풍선처럼 떠들어대는 이 작품은 설명이 불가능한 상상력을 마음껏 나열하고 확장해나가는 낙관적 태도를 통해 유쾌한 매력을 자랑한다. ‘로키산맥을 칠하는 페인트공과 대서양에 물을 채워 넣은 인부들이 없었으면 지구가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랑스러운 상상력으로 도배된 이 작품은 마치 우주로 나가는 산책처럼 가볍고 편안한 웃음의 유영으로 당신을 인도한다.
<더 문>
화석에너지의 고갈로 위기에 직면한 가까운 미래의 인류는 달에서 채취된 청정에너지 ‘헬륨3’를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새로운 인류의 희망은 곧 한 남자에게 거대한 고독을 안겼다. 달에서 자원을 채취해 지구로 발송하는 업무를 홀로 해내는 샘 벨(샘 록웰)은 광활한 우주를 메워버리고도 남을 만큼의 고독을 품은 채 하루하루를 힘겹게 밀어낸다. <더 문>은 드넓은 우주의 한 점과 같은 달에서, 역시 한 점처럼 작은 존재에 불과한 한 남자의 광활한 고독을 담은 모노드라마다. 거대한 우주의 풍광이 목격되는 달 위에 놓인 남자의 모습만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고독이 체감되는 <더 문>은 예측할 수 없는 궤도로 들어서는 스토리를 통해 가스와 먼지처럼 불분명한 호기심을 단단하게 다진다. 적막한 달 위에서 홀로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일상을 역설적인 서스펜스로 달구다가 끝내 진한 페이소스로 띄워 보낸다. 데이빗 보위의 아들인 신예 감독 던칸 존스의 <더 문>은 창의력이란 단어의 의미를 대변하는 좋은 예시다.
오랜 과거부터 인간들은 달을 통해 미래를 읽고, 현재를 파악했다. 영원을 누릴 듯 이글거리는 태양과 달리 순간을 견디지 못할 듯 위태롭게 이지러지다 차오름을 반복하는 달은 그만큼 신비롭되 불길한 것이었다.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에 첫 발을 디딘 이후로도 그곳은 여전히 낯선 영역이다. 환형의 굴레를 끊임없이 돌고 도는 달을 향한 인류적 호기심이 신비에서 실리로 변모했을 뿐, 그 구체는 여전히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큼 미지수의 창작적 자원량을 보유한 미지의 영토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Where are we now?)”단순하듯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자막으로부터 미끄러져나가듯 이어지는 낮은 음성의 내레이션은 화석에너지를 사용하며 다양한 불협화음에 시달리던 인류가 달의 표면에서 채취한 청정원료 ‘헬륨3(HE3)’를 대체에너지원으로 삼아 새로운 질서를 이뤘다고 전한다. 궁극적으로 이는 그 모든 성과가 전세계 자원소비량 70%를 차지하는 에너지를 조달하는 ‘루나 산업(Lunar Industries LTD)’에 의해 이뤄졌다는 의미를 전하기 위한 것과 같다. 그리고 기업광고에 가까운 그 도입부 영상이 묘사하는 거대한 변화는 인류의 머리맡에 놓인 달에서 시작된 것이다.
마치 덩그러니 버려진 것처럼 놓인 달 기지에서 홀로 헬륨3를 채취해 지구로 보내는 작업을 도맡은 샘 벨은 계약기간이 종료되어 가족을 만나는 날만 손에 꼽은 채 하루하루를 버틴다. 유일한 동료라 할만한 인공지능 컴퓨터 거티(케빈 스페이시 목소리)가 종종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컴퓨터를 통해 외로움을 달래기란 불가능한 노릇이다. 하지만 그 긴 시간도 어느덧 계약 만료 예정일을 앞두고 있다. 2주가 지나면 자신을 태우고 지구로 갈 수송선이 도착할 것이고 곧 사랑하는 아내와 입을 맞추고 자신의 딸도 안아줄 수 있다. 그런 어느 날, 월면 작업차를 타고 자원채취 현장에 순찰을 나간 샘 벨은 충돌사고를 겪게 되고 이로부터 영화는 조금씩 예측할 수 없는 궤도로 들어선다.
<더 문>은 범인류적 진전을 피력한 그 동영상의 실체 속에서 살아가는, 혹은 살아가던 한 남자에 대한 사연을 그리는 SF영화다. 달에서 채취한 에너지를 지구로 전달하는 달 기지 ‘사랑(Sarang)’에서 3년의 계약기간 동안 홀로 그 모든 작업을 도맡는 샘 벨(샘 록웰)에 관한 드라마다. 지구의 중력에 속박된 이상 결코 볼 수 없다는 달의 뒤편에 대한 비밀이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전인류의 편의를 위해 홀로 달에서 외로운 작업을 펼쳐가는 샘 벨의 삶 또한 고립된 비밀처럼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타인의 고독한 현실에 불과한 것이다.
달이라는 미지의 영토에 현대문명의 이기를 착륙시켜 완성한 SF영화 <더 문>은 광활한 우주의 한 점과 같은 달 표면을 독점하기엔 너무도 작은 존재인 한 남자의 광활한 고독을 담은 모노드라마다. 회상이나 영상의 동원과 같은 간접적 방식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를 배제한다면 직접적으로 스크린에 노출된 시공간에 등장하는 인물은 단 한 명에 불과한 <더 문>은 그만큼 정적이지만 좀처럼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작품이다. 엄밀히 말해서 달 기지에 홀로 남아 전인류를 위한 에너지 공급에 중책을 맡고 있다는 샘 벨의 상황은 언뜻 봐도 비상식적이다. <더 문>의 우주는 샘 벨의 정서적 고립을 묘사하기 위해 장치된 광활한 감옥이다. 오로지 단 한 명의 배우가 등장하는 <더 문>에서 달은, 더 넓게 우주는, 궁극적으로 휴머니즘과 멜로를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광활한 모노드라마의 무대다.
일차적으로 묵묵히 일상을 견뎌나가는 인물의 고독을 담담하게 응시하던 영화는, 이차적으로 그 인물을 둘러싼 삶의 실체를 가볍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관객의 시야에 들이밀며 본질적 물음에 접근해나간다. 광활한 우주의 깊은 어둠처럼 평온한 고독을 유영하던 영화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전개하며 이를 대면한 인물의 심리적 공황을 긴장으로 달궈나간다. 마치 대기권에 돌입하며 대기와 마찰하는 우주선의 표면과 내부의 온도가 다른 것처럼 인물의 공황적 심리 밖에 흐르는 차분한 공기를 평등하게 포착함으로써 감정적 역설을 이끌어낸다. 관객은 <더 문>에서 그 거대한 우주를 채우고도 남을만한 고독의 만료를 기다리던 남자의 운명이 행성의 소멸처럼 덧없이 사라질 것이며 그 고독이 끝없이 팽창되는 우주적 너비의 운명과 같은 것임을 눈치채게 될 것이다.
가스와 먼지처럼 형체가 불분명한 연민을 자아내던 샘 벨의 고독은 창작자가 연출한 충돌적 상황을 빌미로 이야기적 자전력과 공전력을 얻어 단단한 감정적 형태를 완성하고 전달해낸다. 샘 벨을 연기하는 샘 록웰의 연기는 <더 문>의 자전력의 기반이 되어 관객의 몰입을 당기는 인력이 되고 창의적인 발상과 전개는 공전력의 기반이 되어 거대한 감정적 은하계를 이룬다. 공기가 없어 소리가 발생할 수 없는 우주의 적막 속에서도 저마다의 자전 궤도와 공전 궤도를 지닌 행성들의 화음이 존재하고 있음을 귀로 확인하는 것과 같이 황홀한 경험적 진경을 전달한다.
결국 도입부의 물음은 여운적 답변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인간은 과연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라는 대의적 진리를 떠올리기 위한 발사대나 다름없다. 심오한 질문과 달리 답변은 명확한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배제하지 않는 삶. 결국 무음의 우주에서 살아남아 유음의 지구로 돌아간 샘 벨은 비로소 삶에 대한 선택권을 얻고 인생에 대한 진리를 깨닫는다. 적막한 무음의 대지에서 번잡한 소음의 대륙에 내린 샘 벨은 그렇게 긴 시간의 고독 끝에 제 삶을 찾아나갈 것이다.
무엇보다도 <더 문>은 최근 개봉된 <디스트릭트9>과 마찬가지로 소재에 대한 응용력과 이야기에 대한 창작력의 자산적 가치를 증명하는 작품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비롯해 지난 SF영화들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배어 나오는 <더 문>은 창조보다도 발굴의 가치를 설득하는 참신한 결과물이다. ‘사랑’이라는 한글로 표기된 달 기지의 이름이나 성조기와 나란히 놓인 태극기가 발견되는 우주복은 분명 국내 관객에게 특별한 감상을 부여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배려가 인상적인 건 그것이 단순히 얄팍한 생색내기에서 비롯된 이벤트가 아니라 자발적인 애정과 관심을 고스란히 보존하는 선물이라 이해될 만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문>을 통해 대한민국에 애정을 표현한 던칸 존스는 무려 데이빗 보위의 아들이다. 어쩌면 그는 <더 문>에 진심을 담아 국내 관객들과 조우하길 원한 것이 아니었을까. 관객이 그 진심에 답할 의무는 없겠지만 적어도 <더 문>을 완성한 던칸 존스의 재능이 그 진심을 빛낸다는 점에서 <더 문>은 분명 국내 관객에게 보다 특별한 작품으로 기억돼도 좋을 만한 가치를 지닌 작품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