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동안 소식을 모른 채 살아왔던 아들이 돌아왔다. 놀라는 아버지 앞에서 아들은 술병을 내민다. 하지만 아버지는 술을 끊었다. 아들이 되레 놀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아버지는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였고, 덕분에 집안은 파탄이 났다. 부부는 이혼했고, 형제는 헤어졌다.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온 건 격투기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유능한 트레이너였던 아버지의 도움을 받겠다는 것.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를 통해서 형의 소식을 듣는다. 형은 물리학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형은 현재 경제적 위기에 직면해있다. 그러던 중, 거액의 상금이 걸린 격투기 대회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된다.
<워리어>는 그 단도직입적인 제목만큼이나 단순한 영화다. 가정의 붕괴로 본의 아니게 헤어지게 된 형제는 그로 인해서 서로를 오해하게 되고, 그렇게 반목하게 된 형제가 링에서 해후해서 주먹을 맞대다가 결국 화해하게 된다. 현란한 스텝을 밟으며 관객을 교란시키기 보다 묵직한 주먹과 같이 직설적인 감정으로 감상을 두들긴다, 물론 시종일관 난타전만 벌이는 건 아니다. 가족과 형제의 관계를 둘러싼 인과가 천천히 드러나는 과정에서 탐색전의 묘미가 발견된다. 하지만 인과는 단명하고, 서사는 직선적이다. 그만큼 인과의 말판 위에 놓인 말의 역할이 중해진다. 그 인과 위의 캐릭터를 대신하는 배우들의 기량이 중요하다는 것.
영화의 양 팔이나 다름없는 톰 하디와 조엘 에저튼은 자신들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저돌적이고 파괴적인 공격력을 지닌 토미(톰 하디)와 인내와 끈기로 결코 경기를 포기하지 않는 브렌든(조엘 에저튼)은 그 판이한 경기 운영 방식만큼이나 뚜렷한 갈등과 대립 구도를 형성한다. 각자 나름의 책임감을 안고 링에 오른 형제가 맞붙기까지의 과정은 마치 서서히 달궈지는 불판 위에 열기처럼 점차 달아오른다. <워리어>는 형제와 가족의 갈등과 해후를 그린 단순 명료한 내러티브의 영화이지만 미군 해외 파병과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이라는 미국 내 사회의 문제적 화두들을 건드린다. 단순한 주제에 현실적인 설정을 더함으로써 극적인 상황에 사실적인 흥미를 자아낸다.
여느 스포츠 영화, 그 중에서도 잘 만들어진 격투기나 복싱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워리어>의 경기 장면들이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특별한 수준을 자랑한다고 말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적절하게 제 역할을 해낸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 사실 <워리어>에서 거듭되는 경기 장면은 링에서 맞붙는 두 형제의 경기, 그 피니쉬 블로우를 위해 거치는 라운드일 뿐이다. 개인적인 명예를 걸고, 혹은 가족의 평화를 걸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링 위에 선 두 남자가 형제라는 이름으로 마주설 때, 그 공간은 가혹한 생존의 터전이 됨과 동시에 오랜 시간 동안 쌓인 오해의 장벽을 깨부술 수 있는 화해의 장이 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형제애와 가족애라는 명료한 감정이 곁가지를 최대한 쳐내고 몸통을 드러내듯 우직하고 단단하게 전해진다.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며 인스텝으로 서서히 걸어나가는 인파이터가 상대 선수의 사정권 안에서 주저하지 않고 주먹을 날리듯 단도직입적이다. 그 한 방이 제대로 먹힌다.
1960년대 미국은 격변의 시기였다. 공식적으로 흑인 노예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흑인과 백인의 빈부 격차는 그들의 삶을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구분 짓는 주요한 잣대 노릇을 했다.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노골적인 인종 차별이 관행적으로 자행되며 인종 간의 갈등이 야기됐다. 특히 미시시피에서 흑인들의 위상이란 백인 가정을 위해 제공되는 값싼 노동력에 가까웠다. 유년시절부터 흑인 가정부의 손에 길러진 미시시피의 백인 아이들은 자라난 뒤, 되레 그들의 상전 노릇을 했다. 표면적인 계급적 구별이 사라졌을 뿐, 차별은 더욱 공고해졌다. 캐서린 스토킷의 <헬프>는 광폭한 차별의 한가운데서 폭력을 체감하면서도 묵묵히 백인 가정의 살림을 도맡아온 미시시피 흑인 가정부들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의 원작자와 가까운 친구이기도 한 테이트 테일러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 <헬프>는 원작의 서사와 캐릭터에 약간에 손질을 가미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전개로 각색의 묘를 살렸다. 할리우드의 다양한 신구 여배우들이 주를 이룬 이 영화는 인종 차별이 일상의 풍경 안에서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당대 미시시피의 풍경을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그리고 영화가 지닌 진지한 문제의식을 관객의 감상에 드라마틱하게 녹여낸다. 마치 21세기 버전의 <컬러 퍼플>이라 할 수 있는 <헬프>는 보다 경쾌하지만 역시 강건하게 그 세계의 부조리를 응시하게 만든다. 스크린은 어느 야만적인 시대를 중계하는 창과 같고, 그 너머에서 저마다 제 삶을 살아나가듯 연기하는 배우들의 뚜렷한 캐릭터들을 통해서 영화는 보다 명확해진다.
<헬프>는 지난 시대의 부조리를 반추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인종의 벽을 넘어서 소통한 어떤 여성들의 자아 찾기를 그린 드라마이기도 하다. 차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결국 자립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로 종착된다. 흑인과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웅변이 아닌, 그 약자들이 자신의 진짜 삶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과정을 뚝심 있고 사려 깊게 살핀다. 동시에 <헬프>는 용기에 관한 영화다. 용기란 것이 막강한 힘의 산물인 것 같지만 사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유일하게 쥘 수 있는 것이 그 용기라는 아이러니를 절실히 깨닫게 만든다. 물론 이 영화는 차별에 관한 영화다. <헬프>는 차별을 그리되, 차별을 웅변하지 않는다. 백인 가정에서 불합리한 처사를 견뎌내야 하는 흑인 가정부들이 사랑 받지 못하는 백인 아이들을 진심으로 끌어안는 광경 속에서 느껴지는 건 흑백의 구분이 아닌 체온의 공감이다. 눈물샘보다도 마음을 울린다. 그리고 따뜻하게 끓는다. 유연하고 강인한 수작이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리고 한 여자가 있다. 두 사람은 만나서 사랑했고 하나의 삶으로 융화되길 선택했다. 그리고 거기 한 아이가 생겼다. 그리고 또 한 아이가 생겼고, 다시 한 아이가 생겼다. 그들은 가족이라 불렸고, 더욱 너르게 삶이 분열하고 팽창했다. 하나하나의 생이 모여들어 더욱 커다란 삶의 영역이 자라났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분열하고, 생장하며, 격동하다, 소멸된다. 생명의 태동은 곧 삶으로 자라나 저마다의 세계를 이룬 뒤, 언젠가 사라진다. 단층과 같이 쌓인 시간들은 지층의 역사를 이루고 적층과 균열을 거듭하며 고유의 영역으로 멈춰서다 서서히 풍화된다. <트리 오브 라이프>는 바로 그 사소하고도 거대한 생, 그 자체에 관한 영화다.
과작의 거장 테렌스 맬릭은 <트리 오브 라이프>를 통해서 현묘한 생의 철학을 우주적인 심연으로 띄워 보낸다. 엄격한 아버지와 그 아래서 자라난 아들의 반목, 그 사이에서도 아이들은 성장하고, 어른들은 늙어가며,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하고, 나머지는 여전히 살아나간다. 영화는 그 삶의 단면을 응시하는 가운데 세밀하고 광대하게 이 세계의 풍경들을 스크린에 세워 넣는다. 생물처럼 움직이는 카메라는 어느 미시적인 삶을 관찰하다가도, 그 주변에 잠재돼 있던 광대한 대자연의 이미지들을 관조하듯 떠내려 보낸다.
사실 이는 형식적으로 지나친 과장이자 확대에 가깝다. 사소한 일상을 비추던 카메라가 초자연적인 감상을 부르는 광대한 몽타주들과 맞붙어 거대한 접점을 형성해내는 과정은 인위적이며 생경하다. 하지만 그 무분별한 몽타주들의 흐름에는 일정한 약속이 있으며 운율의 운동이 느껴진다. 탄생과 생장, 쇠락과 소멸의 여정이 뒤엉켜 완성된 세계가 스크린에 떠오른다. 하지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장관의 이미지들을 거듭 지켜보다 보면 그것이 끝내 탐미적인 극치로 가 닿아 감상을 부풀어오르게 만듦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미시적인 삶을 관찰하고, 거시적인 자연을 관조하는 영화의 전지적 시점은 끝내 이 세계의 모든 생의 너비를 아우른다. 탄생과 사멸의 예정 속에서도 꾸준히 생장하는 생은 흩어져 부유하다 한데 엉켜 돌다 덩어리져 구축되고 끝내 소멸하는 우주의 원리와 다르지 않음이 그 끝에 다다라 체감된다. 신앙적인 영험과 자연적인 신비, 그리고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과 경의, <트리 오브 라이프>는 그저 이 세계를 채우는 모든 존재에 관한 역사를 응시하고 되찾아 짚게 만드는 영화다. 악상처럼 흐르는 유려한 이미지들은 사소하게 자리한 모든 세계를 유려하고 장엄하게 아우른다.
생의 영역은 거대한 우주에 예속된 먼지처럼 존재를 드러내면서도 저마다 맞잡아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채우고 이룬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하고, 나머지는 여전히 살아남아 자신의 세계와 이 세계를 보존하고 움직인다. <트리 오브 라이프>는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향해 연주하는 경건하고 장엄한 심포니다. 일상의 단면이 모여 하나의 생을 이루는 여정 안에서 우리는 마주하거나 마주하지 못하는 거대한 풍경의 일원으로 자리한 채 생의 너비를 이룬다. 우리는 결국 음표다. 이 세계의 연주 안에서 고유의 음을 내는 음표로서 완전하고 불완전하다. 그렇게 뿌리 내린 저마다의 생이 이 세계를 울리는 생장의 화음을 만들어낸다.
소년은 세상에 관심이 없었다. 세상 또한 소년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소년은 어려서부터 가난했고, 엄마가 없었다. 어느덧 열여덟 살의 고등학생으로 성장한 소년은 가난과 소외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하지만 어느 날, 그 가난하고 소외된 소년을 향한 세상의 관심이 시작됐다. 완득(유아인)의 담임선생인 동주(김윤석)의 짧은 언어로. “얌마, 도완득!” 하지만 갑작스러운 관심이 완득은 귀찮기만 하다. 하지만 같은 동네, 그것도 심지어 건너편 옥탑방에 사는 담탱이는 퇴교 후에도 완득의 주변에서 그를 귀찮게만 한다. 그래서 완득은 기도한다. “제발 똥주 좀 죽여주세요.” 하지만 그 교회에서도 완득은 듣는다. 자신의 호를 지어준 담임선생 동주의 부름을. “얌마, 도완득!”
김려령의 동명 원작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완득이>는 타이틀롤 완득이에 관한 이야기다. 원작의 설정 일부에 작은 변주를 가하긴 했으나 <완득이>는 기본적으로 원작의 활자를 스크린에 세워 넣는 작업에 충실한 작품이다. <완득이>는 어느 한 가난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그늘과 부조리한 편견을 살피고 들추는 작품이기도 하다. 밤무대에서 춤을 추는 꼽추 아버지, 얼굴조차 본 기억이 없는 어머니, 어려서부터 가난과 소외에 길들여진 소년이 세상을 외면하며 스스로를 방어하며 성장해 왔다는 것을 설명해내기보다도 그 과정을 짐작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는 그러한 일련의 불행을 비추는 과정에서 감정적인 감상을 휘발시키고 객관적인 상황을 살필 수 있도록 감상을 유도한다.
영화의 주를 이루는 건 완득이와 동주의 관계다. 완득이의 일상에 빈번하게 침입하는 동주와 이를 괴로워하는 완득이의 관계적 변화, <완득이>의 드라마틱한 사연은 바로 그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살갑지는 않지만 솔직하고 진실된 담임선생님 동주가 조용하게 모나듯 살아온 완득이의 일상에 끼어들어가며 진심을 전달해내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꿈꾸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제자에게 꿈을 지도하는 스승, 그리고 차츰차츰 그 귀찮은 관심에 호감을 느껴나가기 시작하는 소년, 유아인과 김윤석의 탁월한 호흡이 만들어낸 캐릭터의 앙상블은 가히 탁월하다. 특히 촌철살인의 대화만으로도 유쾌한 동주가 사납지만 한편으로는 순진하여 속을 알 수 없는 완득이의 멘토가 되어서 그에게 세상으로 다가서는 법을 지도하는 과정은 시종일관 웃음기를 머금은 채 유쾌하게 진전된다.
<완득이>는 거대한 비극의 자질 위에 쌓아 올린 희극의 탑이다. 주인공인 완득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주변에 산재한 대부분의 이웃들은 역시 가난하거나 심지어 핍박 받는 이주노동자들의 가족이다. 다양한 민족적 구성원으로 이뤄진 다문화사회로 들어선 오늘날 한국 사회 안에서 영화가 여전히 편견과 부조리에 노출된 동남아 이주 노동자들의 삶을 다루는 방식에는 이해와 배려라는 기본적인 예의가 갖춰져 있다. 동시에 극적으로 구성된 그 모든 광경이 대단히 비극적인 현실성을 기반으로 두고 있는 결과물들임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그 비극적인 현상에 자리한 이들의 삶을 단순히 비극의 희생양처럼 단순화시키지 않는다. 가난과 소외, 편견과 멸시라는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연대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완성하고 삶을 꾸려나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며 공감을 얻어내는 동시에 일종의 희망을 불어넣는다. 동시에 기본적으로 영화가 품은 코미디의 품질도 훌륭하다. 대사의 호흡, 캐릭터들의 어울림, 상황의 진전, 전반적으로 영화는 군더더기 없이 순탄하게 흘러가면서도 자신만의 고유적인 특성을 어필해낸다.
“가난해서 쪽팔린 게 아니라 가난해서 쪽팔리다고 생각하는 게 진짜 쪽팔린 거야.” <완득이>의 대사들, 특히 그 중에서도 동주의 대사들은 명확하고 현명하게 현실을 관통한다. 타인의 불행을 애써 위로하는 대신, 그 불행을 직관하고 그 불행이 결코 삶의 끝자락이 아님을 각인시킨다. 결국 <완득이>는 대책 없는 낙관으로 구제할 수 없는 불행을 위한 현실적인 처방에 관한 이야기다. 소외된 이들의 삶에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보다도 그 삶에 어떤 방식으로 손을 내밀어야 하는가라는 방향을 유쾌하게 제시한다. 물론 그러한 계몽은 완득이의 우직한 표정과 동주의 유려한 언변을 등에 업고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극의 중심에 놓인 완득이의 담담한 표정을 통해서 비극에 대한 자위적인 감상의 배출을 억제하는 대신, 역설적으로 웃음을 활성화시키며 그 현장을 꾸준히 응시하도록 유도한다. 완득이는 결코 울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관객에게 호소하지 않는다. 깨알 같은 웃음을 선사하며 끝까지 지켜보게 만들 뿐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그 비극 안에서도 성장하는 소년이 있음을, 살아갈만한 가치를 지닌 존재들이 있음을 자각하게 만든다.
2020년, 링 위에서는 더 이상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는 복서들의 혈전이 펼쳐지지 않는다. 대신 윤활유와 불꽃이 튀는 로봇들의 철(鐵)전이 벌어진다. 로봇들은 원격 조종에 의해서 링 위에서 주먹의 방향을 정한다. 과거 링에 올라 챔피언을 꿈꿨던 찰리 켄튼(휴 잭맨)은 이제 링 밖에서 로봇을 조종하며 새로운 삶을 꾸린다. 하지만 링 위에서보다도 링 밖에서 그의 챔피언 벨트는 더욱 요원해 보인다. 그리고 전전긍긍하던 그에게 이혼한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맥스(다코다 고요)가 나타난다.
로봇들의 복싱 경기가 열리는 2020년의 미래, 하지만 <리얼 스틸>은 로봇들의 복싱 경기가 존재할 뿐, 10여 년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세상이다. <리얼 스틸>은 미래라는 시제가 중요한 SF물이 아니다. 로봇이 인간의 복싱 경기를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된 미래의 풍경도 중요한 게 아니다. <리얼 스틸>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취향과 장기가 버무려진 영화다. 포기하지 않는 소년의 꿈, 로봇이나 외계인 같이 인간이 아닌 대상으로부터 전달되는 휴머니즘, 발달된 문명의 이기 속에서 발견되는 아날로그적인 감수성. <리얼 스틸>은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숀 레비가 연출한 작품이기 이전에 스필버그가 잘 하는 것들, 즉 스필버그의 영향력과 취향으로 무장된 작품처럼 보인다.
기본적으로 <리얼 스틸>은 반목하는 부자의 회복을 그린, 퇴물 복서가 자신의 아들이 그린 꿈을 통해서 이루는 삶의 성취를 그린, 고철더미 속에 묻혀있던 낡은 로봇의 육체를 빌려서 재기의 도전을 그린 스포츠 액션물이자 휴머니즘 성장드라마다. 로봇은 거들 뿐, 중요한 건 결국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어느 부자의 성장과 성취라는 가족적인 체온과 그리고 도전적인 의지와 삶의 회복이라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리얼 스틸>의 본체에 가깝다. <리얼 스틸>을 통해서 연상할 수 있는 작품이 <트랜스포머>와 같은 전시적인 로봇영화가 아니라 <록키>와 같은 고전적인 복싱영화의 쾌감이나 스필버그의 감수성으로 무장된 휴머니즘 SF <A. I.>를 연상시키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물론 <리얼 스틸>은 CG기술의 발달 덕분에 로봇의 미장센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트랜스포머>의 성취 이후 처음으로 스크린에 로봇을 세운 영화란 점에서도 주목할만하다. 하지만 <리얼 스틸>은 실물 모형 로봇을 제작해 구동시킨 뒤, CG로 디테일을 채워 넣은 작품이다. 물론 로봇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이와 같은 방식의 촬영이 적용된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이러한 제작 방식은 이 영화의 태도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CG로 채워질 허상 대신 실질적인 형체를 지닌 실물의 목격을 통해서 얻어질 생생한 리액션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리얼 스틸>은 보다 고전적인 영화들의 감성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며 이런 아날로그적인 제작 방식은 영화의 드라마틱한 체온으로 고스란히 승화됐다. 새롭고 획기적인 오락물은 아니지만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방식의 완성을 통해서 얻어지는 미덕이 <리얼 스틸>에 존재한다.
반목하던 부자가 화해와 용서를 통해서 하나의 소망을 품게 되고, 퇴물 복서가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는 과정은 결국 고철이라 여겨지던 로봇 아톰의 육체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과 같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나 다름없는 후반부의 로봇 복싱 시퀀스가 단순히 조종당하는 로봇 간의 격돌이라는 사실성을 넘어서 강자에게 맞서는 약자의 투지라는 감정을 덧입게 되는 것도 이런 맥락 덕분이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캐릭터들의 꿈을 함께 희망하게 만들고, 그 희망의 키가 되는 로봇의 승리를 염원하게 만들며, 이런 과정은 결국 로봇이라는 비인간적인 대상의 행위가 인간적인 제스처로 인식될 때, 기적을 꿈꾸게 만든다.
<리얼 스틸>은 단단한 철갑 로봇의 비주얼에 스토리텔링의 감정선이 더해진, 체온이 느껴지는 로봇 영화다. 의도된 기획물로서 기승전결의 수순이 차례대로 읽히는 작품이지만 그 작위적인 수순보다도 그 흐름 속에 존재하는 감성의 위력이 보다 깊게 느껴진다. 압도적인 KO승보다도, 7전8기의 역전승이 보다 큰 열광을 부르듯, 실패와 몰락을 겪은 루저들의 드라마는 인간과 로봇 그 어떤 대상도 피해나갈 수 없는 결정타와 같다. <리얼 스틸>은 그 한 방을 제대로 꽂아 넣는, 철권의 피니시 블로우다.
프랑스의 베스트셀러 작가 마르틴 주터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릴라 릴라>는 우연과 필연이 뒤엉켜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눈덩이 구르듯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감당하지도 막아서지도 못하는 한 남자에 관한 사연이다. 그리고 한 남자와 한 여자에 관한 러브스토리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다 그 죽일 놈의 사랑 때문이다. 카페의 평범한 웨이터에 불과하던 다비드(다니엘 브륄)는 마리(한나 헤르츠스프룽)라는 여인에게 사로잡히고, 그녀가 문학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 하지만 우연히 얻게 된 정체불명의 인물이 남긴 소설을 자신의 것처럼 사칭해 마리에게 접근한 다비드는 그녀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성취감을 맛보는 것도 잠깐일 뿐, 그것이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을 사건임을 곧 깨닫게 된다.
삽시간에 성공가도에 올라선 남자.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기반으로 둔 성공이 아닌 누군가의 재능이 남긴 유산을 본의 아니게 도용해버린 남자. 하지만 되돌리기엔 너무나 늦은, 그리고 애초에 얻고자 했던 여인의 마음을 포기할 수 없는 남자. 누군가가 쓴 소설을 우연히 발견한 남자가 단지 한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이를 자신의 것처럼 사칭을 하고, 끝내 그녀의 마음을 얻지만, 글 좀 읽는 여자는 그 소설의 진가를 알아보고, 출판사에 남자 몰래 출판 문의를 넣어버렸고, 출판사는 긍정적인데 남자는 망설이고, 그럼에도 그녀가 원하니 소설은 출판되고, 베스트셀러 자리에 오르지만, 정작 그 소설은 제 것이 아니고, 그 삶도 제 것이 아니고, 그 와중에 자신의 정체를 아는 어느 남자가 접근해 오고, 남자의 수심은 깊어져만 가고, 여자와의 갈등은 심해진다.
단지 이 맥락만으로도 <릴라 릴라>는 가능성이 풍부한 영화다. 기본적으로 <릴라 릴라>는 아이러니와 딜레마로 뻗어나간 줄기에서 서스펜스의 가시를 철저하게 제거한 귀여운 로맨틱 코미디다. 작가가 선택한 방향은 로맨틱 코미디지만 이 작품의 설정은 방향에 따라 다양한 장르로 자라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를 테면 타인의 재능을 훔친 다비드의 심리적 불안, 즉 서스펜스에 주목한 스릴러물로서의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 물론 <릴라 릴라>는 이런 개인의 불안보다는 관계에 보다 주목한다. 또한 심각한 갈등과 불화가 발견될만한 관계조차도 연민과 연대가 발견된다.
착한 영화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선의를 품고 있으며, 악의조차 상대를 배려하며 행한다. 덕분에 영화는 종종 비현실적인 거짓말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이런 조건이 이 영화의 기발한 설정을 보다 깜찍하게 수식하는 인상이 든다. 물론 로맨스 영화로서 남녀의 심리적 관계를 설명해나가는 기승전결의 인과가 결말부에 다다라 무리수에 가까울 만큼 논리적인 설득을 포기하고 있다는 인상도 느껴진다. 갈등의 요건이 두터운 캐릭터의 관계가 지나치게 천진난만해 보이는 구석도 있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인 시선을 이 영화에 대한 판단의 잣대로 견지하고 싶진 않다. <릴라 릴라>는 그 비현실적인 우연만큼이나, 그 불순한 행위의 결과를 해피엔딩으로 밀어내고 싶을 만큼 비현실적인 감상을 야기시키는 영화다. 우연은 결국 시간이 지나 필연으로 거듭난다. 그러니까 <릴라 릴라>는 사랑이라는 묘약으로 뒤바뀐 한 남자의 일생을 그린 드라마틱한 영화다. 영리한 설정이 너무 순진하게 발전된 구석은 있지만 결과적으로 훈훈하다. <굿바이 레닌>의 다니엘 브륄과 <포미니츠>의 한나 헤르츠스프룽을 함께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반갑다.
눈을 뜬 그의 눈 앞에 놓인 건 낯익은 풍경이 아니다. 그곳은 그가 머물던 곳이 아니다. 게다가 몰골도 말이 아니다. 지난 밤을 함께 했던 친구들도 말이 아니다. 심지어 모두 다 있는 게 아니다. 좀처럼 찾을 수 없는 한 친구와 연락이 닿는 것도 아니다. 행적이 기억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그들이 널브러진 그 방에서 난데없이 출몰한 어떤 동물의 출처도 아는 바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상황이 그들이 의도했던 것이 아니다. 기억이 사라진 지난 밤의 흔적은 끔찍한 숙취(hangover)뿐만이 아니다. 그리고 이건 그들의 첫 번째 경험이 아니다.
<행오버 2>라니, 어떤 이에게는 이 낯선 제목의 영화가 심지어 속편이란 것까지 의아할 수 있겠지만 알만한 이들은 익히 잘 알고 있는 이 영화가 이 땅에서 미개봉작이 돼버린 전편의 사례에도 불구하고 불시착하듯 개봉한 것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숙취’라는 제목을 지닌 이 영화는 결혼식을 앞둔 친구와 총각파티를 벌이겠다며 라스베가스에서 질펀하게 먹고, 마시고, 맛보고, 즐기던 네 남자가 필름이 끊어진 사이에 벌어진 친구의 실종을 수습하기 위해서 벌어지는 난장판의 코미디다. <행오버>가 여타의 코미디물들과 차별화된 건 절제하지 않는 표현력의 막강한 수위 덕분이다. 예측불가능한 내러티브 위에서 나열되는 파편적인 시퀀스는 역시나 측정 불가능한 수위의 파괴력을 지닌 코미디의 엔진을 달고, 거침없이 달려나간다.
<행오버>와 <행오버 2>는 온전히 닮은 꼴 영화다. 라스베가스에서 방콕으로 장소만 변했을 뿐, 모든 제반 상황은 전작의 기시감을 느낄 정도로 유사하다. 심지어 영화 속 캐릭터들조차도 또 한번의 반복이라는 상황을 인식하고 직접적인 대사로 이를 내뱉는다. 그러니까 이는 분명 의도적이다. 또 한번 필름이 끊긴 그 상황은 역시나 예측할 수 없는 민폐의 포텐셜을 지니고 있는 한 인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역시나 누군가가 사라지고, 난데없이 그들의 곁에는 정체불명의 동물 한 마리가 자리하고 있으며 역시나 전작에서 등장했던 요주의의 인물이 그들의 여정에 끼어들고, 그들이 더듬어나간 잃어버린 기억 안에는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 잠재돼 있다.
그러니까 만취 속에서 정신을 잃어버린 그들이 마치 토사물을 치우듯, 지난 밤에 벌여놓은 난장을 청산하는 과정이 바로 <행오버>와 <행오버 2>의 요지다. 사실 이건 똥이다. 변기 뚜껑 아래에 놓인, 똥이다. 그냥 물을 내려도 되겠지만, 꼭 누군가는 그 뚜껑을 들어서 내용물을 확인하고야 마는, 그것이다. <행오버 2>는 <행오버>와 마찬가지로 술 취한 얼간이들이 벌인 지난 날의 막장 놀음을 뒤쫓는, 좋은 구경거리다. 전작만큼이나 위력이 대단한 화장실 코미디가 곳곳에 지뢰처럼 매설된 <행오버 2>는 위력적인 면에서 좀 더 업그레이드된 코미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전작의 흥행에 힘입어 나온 속편이라는 의심은 확신으로 변모한다. 예상 범위를 뛰어넘는 복마전을 전전하는 전편의 재미는 속편에서 다소 증발된 면이 있다. 스토리의 흐름 속에서 인위적인 강박이 느껴지고, 캐릭터의 등장도 부자연스럽다. 특히나 하던 이야기를 대충 수습하는 듯한 결말의 방식은 어리둥절한 수준에 가깝다. 업데이트가 부진한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행오버 2>는 역시 <행오버>의 속편답다. 무시할 수 없는 코미디의 위력,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존재가치를 스스로 선언한다. 스토리는 그저 거들 뿐, 중요한 건 결국 그 만취의 난동 속에서 만들어진 토사물 같은 상황들을 시한폭탄 같은 웃음의 잠재력으로 강력하게 이어나간다는 것이 바로 <행오버>를 포함한 <행오버 2>의 본체다. 그러니 더도 말고, 그저 취향이 맞으면 고, 아니면 스톱인 것. 다만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숙취처럼 감상의 호불호도 결국 본인의 몫인 것.
야심 차게 시작한 베이커리 사업은 씁쓸한 과거의 실패담이 돼버렸고, 비호감이 철철 넘치는 룸메이트는 상의 한마디 없이 역시 비호감인 여동생을 집에 모셔놓고도 기고만장으로 일관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애인에게는 그저 수많은 섹스 파트너 가운데 하나로 취급 당할 뿐인, 그 혐오스러운 일상의 주인공은 바로 애니(크리스틴 위그)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의 절친한 친구 릴리언(마야 루돌프)이 그녀에게 기쁜 한편으로는 우울한 소식을 전한다. 함께 늙어가는 노처녀 친구가 자신의 결혼 소식을 전한 것 그리고 들러리 대표로 서주기를 부탁 받은 것. 둘도 없는 친구의 일생일대의 이벤트를 위해서 애니는 그 요청을 받아들인다.
일찍이 미국에서 ‘여자 버전의 <행오버>’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은 그 소문대로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뽐내는 화장실 유머로 치장된 코미디물이다. 하지만 <행오버>시리즈가 그 막장 유머에 대한 취향이 필요한 미국식 코미디물이라면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은 한 여인의 성장드라마 위에 파괴력 있는 유머가 가미된 작품이란 점에서 공감의 여지가 보다 너른 작품이다. 메가폰을 잡은 폴 페이그보다도 제작자로 이름을 올린 주드 아패토우의 인장이 보다 짙은 이 작품은 그가 연출한 전작들 <40살까지 못해본 남자>나 <사고친 후에>, <퍼니 피플> 등과 마찬가지로 드라마틱한 내러티브가 설득력 있게 극의 밑천을 마련해나가는 위로 포복절도할 만한 유머들을 장식처럼 얹혀나간다.
당사자가 아닌 구경꾼 입장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볼거리를 이루는 이 작품의 유머들은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에 매설된 지뢰와 같다. (물리적인 가학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끔찍하리만치 가혹하게 난감해지는 어떤 상황들 혹은 한없이 엇나가거나 유치하게 일관하는 성인들의 대화와 행동들로부터 지속적으로 투하되는 유머들은 양에 비해서 질적으로 우수한, 대단한 성능을 자랑한다. 드레스장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소동극을 비롯해서 마력과도 같은 폭소의 자질이 곳곳에 설치된 이 작품의 유머 코드에도 취향의 호불호는 작용할만하다. 하지만 그것이 일상적인 행태를 담보로 벌어지는 극단의 연출이란 점에서 공감대의 웃음이 발생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것이 <행오버>와 이 작품의 웃음을 구분 짓게 만드는 또 하나의 차별점에 가깝다.
물론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은 미친 듯이 몰아치는 웃음의 광풍만으로 채워진 단순 코미디가 아니다. 열등감과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한 여인이 갖은 갈등과 충돌을 겪은 뒤, 비로소 자신의 결핍과 한계를 견뎌내고 스스로 다시 일어선다는 보편적인 성장드라마의 틀거리가 이 작품의 본론에 가깝다. 이토록 빤한 교훈이 나름의 설득력을 얻었다 말할 수 있는 건 이 작품이 어떤 특정한 소재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대상 혹은 캐릭터 자체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통해서 시작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덕분이다. 결혼과 자립이라는 고민 앞에서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는 한 여인이 수많은 난관에 직면하고 스스로를 뒤돌아볼 계기를 얻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단편적인 설정 이상의 깊은 이해를 품고 있다.
여자가 당당해야 이 영화는 산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제대로 살았다.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망가지는 동시에 깊은 감정까지 포괄하는 여배우들의 열연은 <내 여자친구의 결혼식>을 완성시킨 기초적인 자산과 같다. 애니 역을 맡은 크리스틴 위그를 비롯해서 그녀의 주변부를 장식하는 로즈 번, 마야 루돌프 등 영화에 출연하는 모든 배우들은 모든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놀랍도록 과감한 영화의 난장 속에서 끝내 제각각 반짝인다. 진심으로 더럽게 재미있다.
미네소타의 작은 마을 무스레이크를 지나던 트럭에서 나무 상자 하나가 눈 쌓인 길에 떨어진다. 길을 지나던 소녀 린다가 호기심에 상자를 열어보곤 그 안에 있던 파란 앵무새 한 마리를 발견한다. 추위 탓인지, 두려움 탓인지, 몸을 웅크리던 앵무새가 소녀의 손길 앞에서 평정을 되찾는다. 블루라는 이름을 얻게 된 앵무새는 그 소녀가 어른이 되기까지 그 곁에 자리하며 편안하고 안락한 애완용 새로 길들여진지 오래다. 하지만 블루는 브라질의 리오 데 자네이루에 있다는 암컷 마코 앵무새 쥬엘과 함께 지구상에 단 한 종 밖에 남지 않은 희귀종 마코 앵무새라는 사실. 이를 전해 듣게 된 린다는 고심 끝에 마코 앵무새의 멸종을 막고자 블루를 데리고 브라질 행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블루가 만나는 건 블루와 한 쌍을 이룰 쥬엘만이 아니다.
픽사와 드림웍스의 양강 체제로 이뤄진 오늘날의 애니메이션 월드에서 호시탐탐 틈새공략을 노리고 머리를 드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이 있다. 지난 해 <슈퍼배드>를 내세우며 평단의 호평과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낸 유니버셜 스튜디오도 그 중 하나. 하지만 이에 앞서서 20세기 폭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아이스 에이지>시리즈를 성공시킨 블루 스카이 스튜디오가 있었다. 그리고 <리오>는 바로 그 블루스카이 스튜디오가 꺼내든 새로운 카드다. <리오>의 기획 전략은 <아이스 에이지>와 흡사하다. 고대 빙하기 시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 풍경 안에 특유의 개성이 넘치는 동물 캐릭터들의 활약상을 그린 <아이스 에이지>와 마찬가지로 <리오>는 축제 활기로 가득한 리오 데 자네이루의 분위기 속에서 생동감 넘치는 동물 캐릭터들의 활약상을 채워 넣는다.
대부분의 성공적인 애니메이션들이 그러하듯이, <리오> 역시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의 활약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리고 동물 캐릭터가 주를 이룬 어느 애니메이션들과 같이 <리오>는 저마다의 동물들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캐릭터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도 의인화된 행위와 언어를 이식하며 어드벤처의 활기를 구현해낸다. 비행하지 못하는 마코 앵무새 블루가 짝짓기를 위해서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제 짝을 찾아 리오 데 자네이루에 도착해 벌이는 모험은 사실상 블루의 혼자 날기, 즉 홀로서기를 위한 필연적 여정과 같다. 그 과정에서 병풍이 되는 리오 데 자네이루의 풍경은 그 자체로 볼거리를 이루는 동시에, 위트 있는 활력을 채우기 위해서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것 또한 다채롭게 영화를 장식한다. 특히 극 중반부에 쥬엘과 함께 비행( 아닌 비행)을 하는 블루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 거대 그리스도상을 비껴가며 리오 데 자네이루의 풍경을 부감으로 펼쳐 보이는 모습은 장관의 엔터테인먼트다.
스토리텔링의 측면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완성도라 치켜세울 수는 없지만 <리오>는 자신이 지닌 최고의 장점을 최대로 극화시킬 줄 아는 이들의 최상품이라 할만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고대 빙하시대의 설원을 현대적인 감각의 애니메이션 소재로 차용한 <아이스 에이지>가 그러했듯이, <리오> 역시 세심하게 창작된 캐릭터들이 저마다 충실하게 제 역할을 해내며 엔터테인먼트적인 흥미와 활기를 배가시킨다는 하나의 영화적 목표로 도달해나간다. 무엇보다도 소소한 뒷골목부터 화창한 해변까지 리오 데 자네이루의 곳곳을 그려낸 <리오>의 풍광은 여행 욕구마저 자극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너무 착해서 합의적인 혐의마저 느껴지는 결말은 조금 아쉽지만 신나게 이륙해서 감동적으로 착륙하는 <리오>가 기술적으로나 감성적으로 보는 이의 안구를 정화시키고, 마음을 풍요롭게 채우는 애니메이션이란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게다가 등장 자체만으로도 눈에 띄는 ‘앵그리 버드’의 출연은 이를 눈치채는 이들을 위한 반가운 서비스 노릇을 톡톡히 해낸다.
전쟁은 승패로 기록된다. 하지만 거기 사람이 있었다. 전쟁은 승패보다도 생사의 문제로 기억돼야 한다. 전쟁이라는 명분에 휘말리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건너야 하는 인간들의 존재는 승패로서 기록되는 역사적 명제 아래 손쉽게 지워진다. 전쟁은 영문도 모른 채 생사의 기로로 떠밀린 인간들의 지옥도다. <고지전>은 이를 대사로서 명확하게 전달한다. “빨갱이가 아니라 전쟁과 싸우는 거다. 그러니 살아남는 게 전쟁으로부터 진짜 이기는 길이다.” 전쟁이 승패가 아닌, 생존의 문제임을 강력하고 확실하게 피력하고 환기시킨다. 물론 이는 숱한 전쟁영화들이 다루고 언급해온 이야기다. 하지만 <고지전>은 사람 죽이는 전장의 비극을 전시하고 눈물을 요구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 지옥도 속에서 이유도 알 길 없이 서로를 죽이고 죽어나가는 이들의 참혹한 비극에 주목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1년 7월 10일 휴전 협정의 시작과 함께 형성된 휴전선 부근에서 2년여 동안 교착상태의 국지전을 거듭한 후, 1953년 7월 27일에 이르러서야 휴전을 맞이했다. <고지전>은 남북의 대표가 만나 군사분계선과 포로교환 문제로 탁상공론을 거듭하던 2년 여간의 휴전 협정 기간 속에서 고지 점령을 위해 소모적인 전투를 벌이던 휴전선 부근의 숱한 전투를 펼치던 치열한 전선 가운데 하나로 시선을 돌린다. 후방에 근무하던 방첩대 중위 은표(신하균)는 애록고지에서 전선을 지키는 악어중대 중대장의 죽음을 비롯해서 일부 부대원이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혹을 조사하라는 명을 받고 애록고지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참전했다가 북한군에게 끌려가 죽은 줄만 알았던 친구 수혁(고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은표는 애록고지를 둘러싼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는 동시에 참혹한 전장의 진실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매일 같이 약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고지 전투 속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가운데서도 전장의 일상은 흐른다. 그렇게 흐른 일상이 어느새 2년여 시간에 다다라서 어제 봤던 그 놈이 살아있었는지, 죽었었는지 분간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돼버린 고지의 병사들은 어제 올랐던 그 고지에 또 오르고 내리며 매일 같이 생사의 기로를 넘나든다. <고지전>은 치열한 고지 쟁탈전에 나서는 병사들의 일상을 그리며 숙연하게 내리쬐는 전쟁의 비장함 대신 그 아래 드리워진 부조리한 전쟁의 단면들을 채집해 나간다.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해야 하기에 전장에 끌려 나온 젊은이들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전선에서 한 뼘의 땅을 넓히기 위한 하루살이로 소모된다. 땅따먹기에 열중하는 윗대가리들이 탁상공론 속에서 시간을 허비할 때, 생존의 본능마저 찢겨 나뒹구는 고지를 기어올라가며 죽어나가거나 죽어나가는 전우의 시체를 밟고 넘는다.
<고지전>은 전쟁이 숙연하거나 엄숙하게 기념될만한 역사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비극임을 명백하게 전시한다. 그리고 이런 비극을 방관한 채 한 뼘의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당연하게 요구하는 권력, 더 나아가 국가라는 이름으로 비호되는 결정권자들의 부조리한 행실을 폭로한다. <고지전>은 아비규환 같은 전장의 풍경을 통해서 이 땅의 부조리한 역사를 환기시키는 진보적인 전쟁영화다. 생생하게 묘사되는 전투 시퀀스의 프레임이 인간적인 윤리에 대한 고찰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고지전>은 한국전쟁을 다룬 지난 영화들에서 한 발 나아간다. 이념의 대립이라는 빤한 수식어 대신 그저 생사의 기로 속에 내몰린 인간과 인간의 덧없는 사투가 낳은 명목 없는 비극의 온도를 서서히 가열시킨다.
<영화는 영화다>와 <의형제>를 통해서 갈등 노선에 놓인 사내들의 멜로를 그려낸 장훈의 장기는 <고지전>에서도 여전하다. 하지만 대립과 연대를 거듭하는 두 인물의 긴밀한 감정선을 그리던 전작들과 달리 전쟁영화라는 스케일 안에서 다양한 인물의 관계도를 그리는 <고지전>은 너르고 보편적인 공감의 영역으로서 인물들의 감정선을 펼쳐 보인다. 은표와 수혁의 대립적 구도와 함께 북과 남의 경계에서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적으로 대치한 이들이 똑 같은 바람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될 때, 이는 1대1의 관계로 그려지던 장훈의 전작들 속에서 발견되던 등을 맞댄 남자들의 미묘한 연대적 감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자로 잘 알려진 박상연은 <고지전>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이념이라는 거대한 명분에 짓눌린 개개인의 비극을 환기시켜낸다. 그리고 이제 연출전문 감독이라 불려도 좋을 장훈은 주목할만한 신예 연출가의 수준을 넘어서 진짜 물건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저마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들의 열연 속에서도 신예 이제훈은 비범하게 돋보인다.
치열한 전투와 전투 사이에서 소소한 일상을 영위하는 이들의 생이 일거에 타 들어가는 클라이맥스는 <고지전>의 본체나 다름없다. 살아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일시적인 희망으로 부풀어오르다 이내 꺼져버린 광경은 전쟁기념비 속에 기록된 이들에 대한 감사보다도 분노해야 할 대상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젊은이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는 기득권들의 행태는 그 시절의 전장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 사회에서도 만연한 부조리와 다를 바 없다. 시대는 변했고, 상황도 달라졌지만 몰염치와 몰상식으로 시대를 지배하는 이들의 세태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경계심을 부추기는 어떤 이들의 자극적인 멘트처럼 이 땅에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해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그 주적에 대한 적개심이 아니라 그 전쟁의 명분을 부추기는 우리 안의 어떤 입이다. 민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며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것을 강요하는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 입으로 세상을 움직인다. 그러니 기억해야 한다. 전쟁이란 승패의 기록이 아닌 생사로 기억돼야 하는 것임을, 승자와 패자가 아닌, 산 자와 죽은 자의 비극임을,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