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특유의 동화적인 낭만을 품은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은 사랑스럽다는 단어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시킨다.
<겨울왕국>은 동화적인 세계관을 빌려서 특유의 낭만적인 해피엔딩을 구축하는데 능한 디즈니의 장기가 여실히 반영된 애니메이션입니다.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모티프로 둔 작품이죠. 하지만 원작과 기본적인 설정 자체가 다르며 이야기 양상도 완전히 판이한 작품입니다. 일종의 ‘참고작’에 가깝다고 볼 수 있죠. <겨울왕국>에선 사악한 ‘눈의 여왕’이 등장하지도 않고, 남매에 가까운 소년과 소녀 대신 자매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어둡고 우울한 원작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죠. 디즈니 특유의 낙관적인 낭만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입니다.
사실 선악의 구별이 뚜렷하고 결말에 대한 예감이 명확하다는 점에서 이야기적인 흥미가 뛰어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습니다. 하지만 캐릭터의 개성이 뚜렷하고 스크린을 채우는 이미지의 완성도가 그런 결점을 보완해주고 있죠. 특히 살아있는 눈사람 캐릭터인 올라프의 등장은 <겨울왕국>이란 작품을 보다 훌륭하게 이끌어내는
. 개인적으론 최근작 중에선 <겨울왕국>보다 <라푼젤>이 보다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라푼젤>보다 <겨울왕국>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훌륭한 뮤지컬 넘버를 만들어내는데 일가견이 있었던 디즈니의 저력을 보여주는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말이죠. <겨울왕국>의 OST는 역대 디즈니 클래식의 사운드트랙 가운데서도 손에 꼽을 만한 수작으로 회자될 겁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위키드>에서 초록 마녀 역을 맡은 이디나 멘젤의 킬링 넘버 ‘ Let It Go’는 이 작품이 지닌 최고의 자산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이 들 정도이지요.
무엇보다도 <겨울왕국>에서 흥미로웠던 건 디즈니가 자신의 세계관을 부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공주와 개구리>(2009)부터 <라푼젤>(2011) 그리고 <겨울왕국>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성공적인 결과물을 연이어 내놓고 있는 지난 몇 년간의 디즈니는 낙천적인 해피엔딩의 강박을 넘어서 ‘지금’이라는 시제에 어울리는 감각과 철학을 반영한 작품들을 거듭 발표하고 있죠. 어쩌면 디즈니가 인수한 픽사의 브레인이었던 존 래세터를 디즈니의 총괄 책임자로 임명한 것이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동력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겨울왕국>은 익히 예상되는 왕자와 공주의 러브스토리로 극을 밀고 가지 않습니다. 특히 눈에 빤히 보인다고 믿었던 결말을 아주 살짝 비틀면서 대단히 참신한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죠. 디즈니 특유의 낭만적인 정서를 배반하지도 않고요. 자신의 세계를 참신하게 보존해냅니다. 그래서 <겨울왕국>의 결말은 정말 좋은 작법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공주와 개구리> 이후로 디즈니에선 대단히 운명에 함몰되지 않는 진취적인 여성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 역시 흥미롭습니다. 21세기의 디즈니가 찾은 마법의 비결은 여성이 아닐까 싶어요. 공주가 아니라 말이죠.
저는 지금까지도 초등학교 시절에 극장에서 <라이온 킹>을 봤던 기억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제 손을 잡고 직접 극장에 데려가셨죠. 아마도 어린 아들에게 보여줄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셨나 보죠. 그래서 만약 지금 저에게 어린 아들이나 딸이 있었다면 그 아이들의 손을 잡고 <겨울왕국>을 보러 갔을 겁니다. 좋은 작품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지만 분명 좋은 추억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면 착한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니까요. <겨울왕국>만큼 사랑스러운 결정을 지닌 작품을 아이들과 함께 볼 기회도 드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파격적인 동성애 영화로 알려진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그 어떤 멜로보다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러브스토리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지독한 멜로물입니다. ‘이별을 통한 소녀의 성장통’이란 식으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건 영화가 끝날 무렵까지 그 이별이 성장으로 해소되기 보단 통증으로 내려앉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델(아델 엑사르코풀로스)은 길에서 마주쳤던 엠마(레아 세이두)와의 우연한 재회를 통해서 예상하지 못했던 체험들을 거듭해나갑니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것은 물론 아티스트로서의 미래로 나아가는 엠마와 그 주변부의 삶에 종속되기 시작하면서 삶이 예상 밖의 궤도를 돌게 되는 셈이죠.
단순히 성정체성을 깨닫는다는 것 이상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삶의 저편으로 나아가버리는 셈이에요. 결과적으로 아델에게 있어서 엠마와의 이별이란 감정적인 단절뿐만 아니라 경험적인 기회와의 단절로도 이해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죠. 그만큼 이별이라는 진통은 아델의 삶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절망이자 비통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자신이 보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삶의 저편까지 나아가 그 일상에 익숙해질 무렵 다시 원점으로 튕겨져 추방돼버린 셈이니까요.
배우들의 연기가 대단히 좋습니다. 특히 아델 역을 맡은 아델 엑사르코풀로스는 전반적으로 영화의 서사와 함께 인상이 변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줄 정도인데 이별 이후의 감정적 진폭을 드러내는 후반부의 연기는 정말 연기가 아니라 실제라고 믿어질 만큼의 감정적 몰입도를 보여줍니다. 충동적인 계기로 맞닥뜨린 이별에 의한 심적인 고통이 스크린 밖으로도 절절하게 전이되는 기분이죠. 게다가 그 반대편에 선 엠마 역을 맡은 레아 세이두는 거대한 감정적 파고를 형성하는 매개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이별 이후에 남게 되는 애틋함 같은 감정의 끈을 놓지 않음으로써 극적인 페이소스를 극한으로 끌어올립니다. 두 배우의 화학작용 자체가 이 영화의 감정을 입체적인 구조로 이끌어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 영화가 화제가 된 건 대단히 수위가 높은 여성간의 섹스신이 긴 분량으로 등장한다는 점이었죠. 그런데 대단히 적나라해서 한편으론 담담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은밀하고 농염한 연출을 위한 카메라 앵글이 동원되기 보단 사물을 관찰하듯 평범한 프레임 안에서 행위가 목격되는 인상입니다. 오히려 저는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무언가를 먹을 때 보는 이의 욕구를 건드린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토마토 파스타를 너무나 맛있게 먹는 장면에선 입 안에 침이 고이는 느낌이기도 했죠. 색욕보다도 식욕이 강렬하게 느껴진다니 좀 묘하지 않습니까? 그건 아마 이 영화가 섹스신을 특별한 영화적 체험처럼 위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동성애라는 소재는 이 영화의 주요한 키워드가 될 뿐, 서사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사안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결말부에서 묘사되는 찰나의 엇갈림을 보면서 ‘운명’이란 단어에 설득 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뒤바꿀 수 없는 결과를 등 뒤에 두고 터벅터벅 걸어가야 하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끄덕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델의 뒷모습을 비추는 엔딩시퀀스의 롱테이크에서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건 그래서입니다. 그 너머의 삶에 대해서 염려하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걸어가길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이죠. 그렇게 그 너머를 살아가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요. 사실 저는 원작의 비극적인 결말보다도 영화의 결말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죽음에 대한 연민보다도 이면의 생에 대한 호기심이 지워지지 않는 여운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한편 영화에선 프랑스의 전인적인 교육 환경을 목격할 수 있는데 학생들이 등록금 인상을 반대하는 가두 시위를 하는 신에서 '민영화를 반대한다!'는 대사가 나올 땐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물론 불법시위라는 목적을 앞세운 과격한 진압 장면 같은 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건 비단 저뿐만이 아닐 것이라고, 문득 생각하게 되네요.
뱀파이어들이 등장하는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는 좀처럼 목을 물지 않는다. 매혹적인 이미지로 이빨을 드러낼 뿐이다.
‘영원히 산다’라는 말을 뒤집어 봅시다. ‘영원히 죽지 못한다’라고 생각해봅시다. 영원히 산다는 건 그만큼 권태롭고 지겨운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두 존재가 있습니다. 사람이란 단어를 굳이 수정한 건 두 존재가 뱀파이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단히 오래된 존재처럼 말하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1세기 남짓의 경험만이 가능한 인간과 달리 그들은 수 세기 동안 인류의 역사를 살피며 살아왔습니다. 아니, 살아남았습니다. 언제, 어떤 연유로 뱀파이어가 됐는지 몰라도 태초부터 그들의 삶엔 낮이 없었던 것만 같습니다. 매우 평온하지만 은밀하고 때때로 아슬아슬한 그들만의 밤을 수 세기 동안 버텨왔습니다.
일단 뱀파이어라는 소재가 주는 장르적인 기대감을 품고 상영관을 찾았다면 대단히 곤란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짐 자무쉬가 연출한 영화라는 사실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애초에 그런 종류의 기대감을 품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단히 서정적인 리듬감과 시적인 묘사로 특유의 미학적인 시선을 견지해온 짐 자무쉬의 뱀파이어물에서 장르적인 공포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낯선 것이니까요. 그리고 짐 자무쉬 특유의 미학적인 방식은 이 영화가 주목하는 뱀파이어들의 영속성과 맞아떨어지는 측면도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나른한 분위기 속에서 고상하고 우아하게 소모되는 뱀파이어들의 평범한 일상은 때때로 대단한 블랙코미디의 자질을 느끼게 만들기도 하고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Only Lovers Left Alive>라는 시적인 문장은 생각보다 절박하고 짓궂은 제목입니다. 특히 느슨하게 풀려있던 영화의 흐름을 강하게 확 당기는 듯한 결말부 덕분에 이 영화 자체가 대단히 악랄하고 재기발랄한 농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살아남는다’라는 절박한 감정과 직접적인 행위의 중의성을 한번에 깨닫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한편으론 뱀파이어들이 ‘인간 따위가’란 식으로 계급적인 우월성을 드러낼 때 그들이 지닌 고매한 정신이 느껴지지만 인간 세계에 기대서 자신의 삶을 연명해나가는 일상을 거듭 목격하다 보면 멸종을 앞둔 동물의 자존심을 보는 것과도 같은 아이러니가 느껴집니다.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낡아 버린 귀족 가문의 풍경 같기도 하고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됐다고 할법한 존재들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살아왔다고 생각하면 그 자체가 대단한 아이러니이기도 하죠.
나이트신으로만 점철되어 낮은 조도의 색채감으로 채워진 영화의 풍경은 그만큼 정적입니다. 어둠과 어둠을 밀어내는 조명들로 채워진 영화의 몽환적인 풍경과 비현실적인 색감 자체에서 시간의 흐름을 지워버린 듯한 근사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물들만큼이나 영속성을 지닌 듯한 소품들로부터 반시대적인 낭만 같은 것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백미는 캐스팅입니다. 틸다 스윈튼은 그냥 뱀파이어를 섭외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아요. 특유의 신비감과 중성적인 매력이 더해져서 영화의 비현실성을 강화하는 도구적인 역할도 해내고 있다는 인상도 들고요. 반대로 톰 히들스턴은 뱀파이어로서 ‘생존’과 ‘생활’이라는 현실적 화두를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 캐릭터의 조합이 영화 자체의 시공간에 입체적인 감상을 부여하도록 이끄는 것도 같고요. 서사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미아 바시코브스카와 안톤 옐친은 캐릭터의 쓰임새나 표현력이 적절합니다. 결말부에 다다라 비장한 페이소스와 역설적인 냉소를 품게 만드는 존 허트의 존재감도 탁월하고요. 완벽하다고 칭송해도 모자랍니다. 기꺼이 목을 내주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랄까요.
조셉 고든 레빗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메가폰을 잡고, 주연까지 맡은 <돈 존>은 보통 물건이 아니다.
매일 밤 친구들과 함께 클럽을 찾으며 여자를 찾는 남자가 있다. 최상등품의 고기를 고르듯이 점수를 매기고, 최고등급이라고 생각되는 여자에게 작업을 걸고, 춤을 추다가 집으로 가서 섹스를 즐긴다. 그에게 이는 일종의 게임이나 다름없다. 1회용품을 소비하듯이 자연스럽고 거리낌 없이 원 나잇 스탠드를 즐기고, 다음날이 되면 새로운 상대를 찾는다. 도돌이표 같은 밤이 반복된다. 하지만 그 어떤 여자와의 잠자리도 그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다. 그를 위한 환상 속의 그녀는 따로 있다. 클릭 몇 번이면 만날 수 있는 포르노 배우들을 보며 자위를 하는 것이 그 어떤 여자와의 잠자리보다도 그를 만족시킨다. 그런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새로운 여자가 나타났다.
<돈 존>은 할리우드의 미래로 꼽히는 영민한 배우 조셉 고든 레빗의 각본, 연출, 주연작이다. ‘돈 존(Don Jon)’이란 제목의 모티프가 된 건 스페인 귀족 가문의 전설적인 바람둥이 돈 주앙(Don Juan)이라고 한다. 돈 주앙은 카사노바와 달리 자신이 만나는 여자들로부터 혐오를 샀는데 여자를 노골적인 정복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돈 존>의 존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만족할 수도 없는 잠자리를 전전하는 건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자존감의 정복을 위해서다. 그를 충족시켜주는 상대는 인터넷의 포르노 사이트에 널려있다.
‘포르노 중독자’라는 캐릭터의 특성은 인터넷 시대의 폐해를 연상시키지만 <돈 존>은 궁극적으로 관계의 일방성을 지적하고 수긍하게 만드는 영화다. 존에게 있어서 진짜 섹스를 위해 거쳐야 하는 스킨십과 전희의 과정이란 그저 결과를 위한 노동에 가까운 반면, 포르노를 보며 자위하는 것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만족스럽다. 쾌감이란 결과에 닿기까지의 과정이 간편하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그가 바바라(스칼렛 요한슨)에게 끌리는 것 또한 쉽게 섹스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점차 존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그 변화는 존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일방적인 관계에 탐닉하던 남자는 자신을 매료시킨 여자에게 적극적으로 투신함으로써 일방적인 관계의 허무를 깨닫는다. 간편하고 합리적인 방식의 쾌감이 ‘가짜’임을 깨닫는다.
<돈 존>은 계산된 연출 방식이 눈에 띄는 작품이다. 반복적인 패턴을 지닌 존의 일상을 도돌이표 같은 동선과 공간 묘사, 행위를 통해서 묘사하는데 이 패턴에 미세한 변화를 삽입함으로써 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별다른 설명 없이도 효과적으로 이해시킨다. 과감한 인서트컷을 삽입하거나 빠른 컷의 전환으로 두 개의 신을 연결하는 교차 편집 등 편집 방식이 현란하게 느껴지는 신도 더러 있는데 때때로 과장되거나 넘치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재기발랄하고 영리하게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킨다. 무엇보다도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에서 소모될만한 소재를 군살 없는 성찰로 승화시킨 성장드라마로 완성해낸 재능이 놀랍다. 과감하면서도 감복할만한 결말로 다다르는 이야기 방식도 탁월하다. 실로 주목할만한 연출 데뷔작이다. 조셉 고든 레빗, 역시 보통 물건이 아니다. 참고로 중반부에 놀라운 카메오가 등장하니 기대할 것.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는 뛰어난 이야기꾼의 영화다. 물론 흥미로운 이야기밖에 없는 영화라는 말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공항에서 손짓을 이용해서 대화를 나눈다. 여자는 남자를 마중 나간 모양이다. 친밀한 사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차 앞좌석엔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두 사람의 재회가 이혼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는 끝에서 시작하는 이야기 같다. 그 끝에서 과연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카메라와 함께 이야기의 문턱을 넘게 되는 순간부터 영화는 예상 밖의 이야기 범위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는 이야기의 운용 방식만으로도 흥미진진한 영화다. 이혼을 앞둔 부부의 입장을 핵심으로 그와 연관된 주변부의 입장을 끌어들이며 극의 너비를 확장해나간다. 단순명확해 보이던 사안이 점차 복잡한 양상으로 확대된다. 평범해 보이던 사연이 주변 인물들의 내밀한 감정과 충돌하고, 그로 인해서 예기치 않게 불거지고 밝혀지는 진실들로 인해서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된다. 평면적인 일상의 기류에 입체적인 변곡점이 형성되고 점진적으로 이야기의 절정이 형성된다. 감독 아쉬가르 파라하디는 전작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서도 명확해 보이는 사연의 끝으로부터 가늠하기 힘든 이야기의 방향성을 살핀 바 있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역시 마찬가지다. 끝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영화는 끝을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굴러나간다. 그 예측하기 힘든 방향성을 지켜보는 것 자체가 이 영화의 묘미에 가깝다.
부조리극의 양상 자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고, 그 복잡다단한 이야기 흐름만으로도 감정적인 진통이 명확하게 다가온다.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는 뛰어난 이야기꾼에게 가능한 화술과 작법이 무엇인지 새삼 깨닫게 만드는 작품이다. 물론 단지 그런 이야기 구조에 대한 흥미만을 안겨주는 작품은 아니다. 결말부에 다다라 영화는 명확한 결말을 묘사하는 대신 카메라를 두고 떠나버리듯 롱테이크 기법의 엔딩 시퀀스를 제공한다. 이는 단순해 보이던 도입부 상황과 대비적인, 어떤 것도 불확실해진 결말부의 상황 자체를 아이러니한 여운으로 각인시킨다.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던 상황들의 내면엔 감당하기 힘든 비밀과 켜켜이 쌓인 오해들이 존재했고 그렇게 방치된 비밀과 오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당사자들의 삶을 휩쓸어 나간다. 그리고 그 순간의 진실을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그 진실을 알았다는 판단일지도 모른다는 여운으로 가닿는다. 인물로부터 시선을 거두지 않는 엔딩 시퀀스의 이미지는 그래서, 그렇게 마음을 진동시킨다.
<변호인>은 노무현에 관한 영화이되, 노무현을 위한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노무현이란 말을 통해서 환기되고 복기되는 영화인 것 같다. 이 시대의 첨예한 갈등 한복판에 <변호인>이란 영화가 놓여있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제작 초기부터 그리고 영화가 개봉된 지금까지도 <변호인>에 관한 말의 8할도 여기서 비롯됐다. <변호인>이 ‘노무현에 대한 영화’라고 알려지면서 이 영화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정치적인 영화로서 인식된다. 하지만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인 시절의 영화라기 보단 고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인 시절에 변호를 맡았던 부산 학림 사건, 흔히 말하는 ‘부림사건’에 관한 영화로서 설명할 때 보다 명확해지는 작품이다.
‘부림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평범한 독서모임을 운영하던 대학생들이 빨갱이 조직원으로 몰리면서 강제 연행되어 악랄한 고문을 당하고 강제적인 자백을 실토한 뒤 재판에 회부됐고 이미 정해진 각본의 결말을 향하듯 일방적인 분위기로 강행된 재판 속에서 노무현을 비롯한 당시의 변호인단 3인이 조작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불공정한 재판에 항의했지만 부당한 형 집행이 이뤄졌다. 당시 구속된 22인 중에선 부산지역의 대학생을 비롯해서 교사와 직장인들도 포함돼있었는데 개중의 몇몇은 재판 당일에서야 처음 대면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권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서 활용했던 대국민 빨갱이화 조작 사건, 이른바 용공 조작 사건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이 바로 이 부림사건이다.
<변호인>이란 영화가 부림사건을 관통하며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국민과 국가의 관계란 일방적으로 충성을 바쳐야 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 “국민이 곧 주권이다.” 그만큼 국가라는 거대한 울타리를 사유화가 가능한 권력으로 인식하고 이를 남용하는 무리의 부조리한 행위에 대한 고발, 그것이 <변호인>의 주제의식에 가깝다. 사실 <변호인>이 공적인 사건을 환기시키는 묘사의 방식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다고 말하긴 조금 망설여진다. 다만 기본적으로 어긋나있지 않으며 명확한 정황을 되짚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선 나름대로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발화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엿보인다. 어쩌면 폭압적이고 몰염치한 권력의 시대에서 선악의 구도가 명백한 탓에 그 균형 자체를 담아낸다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대에 죄를 물을 순 없겠지만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것에 대한 이해도 필요한 건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를 제대로 작동시키는 건 송강호라는 배우 자체의 존재감이다. 아마 <변호인>은 올해 개봉된 <더 테러 라이브>, <집으로 가는 길>과 함께 배우의 연기력이 영화의 완성도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를 논하기 적절한 사례로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지난 12월 18일에 개봉된 <변호인>은 개봉 첫 주에 약 500여 개의 스크린을 확보했고 관객 170만 명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다. 개봉 전부터 개봉관 확보에 대한 걱정을 비롯해서 흉흉한 소문이 돌았던 영화였다. 개봉 전부터 영화에 관해서 할말이 많은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 영화였다. 개봉 전부터 포털사이트의 평점에선 양극화된 싸움이 한창이었다. 1점 아니면 10점. 절대적인 지지와 절대적인 반대가 맞서는 극단적인 대치 상황. 영화에 대한 감상과 무관한 자기 선언. 이는 바로 우리 사회의 갈등 국면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바로미터나 다름없다.
<변호인>을 관통한 스크린 밖의 관객들의 감상은 과거에 대한 안타까움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 안에서 영화에 대한 신뢰와 지지가 보다 단단해지는 인상이다. <변호인>에 대한 감상의 방향이 실화 자체가 지닌 가혹함에 대한 분노 이상으로 작금의 현실에 대한 호소나 공감으로 확장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영화가 아닌 하나의 상징으로서 권장하거나 부정해야 될 무언가가 돼버린 인상이다.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 간의 싸움 안에서 <변호인>은 뜨거운 감자가 되는 것 같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변호인>에 대한 관람 여부를 선거 운동하듯 알리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는 건 시대적인 정의 그리고 보편적인 상식에 가깝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 영화를 ‘노무현에 관한 찬양’이라며 힐난한다. 한편에선 우리가 꼭 봐야할 영화라며 호소한다. 한편에선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면 종북세력이 된다. 한편에선 <변호인>이란 영화를 보지 않으면 민주주의의 몰락에 기여하는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호도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그저 한편의 영화가 아니다. 지금 현실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증명하기 위한 필사적인 도구인 셈이다. 자신의 블로그에 <변호인>에 관한 리뷰를 남긴 영화평론가 이동진을 향해서 비판적인 댓글이 달렸다.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인 입장이 없다는 것이 골자였다. 댓글을 남긴 이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드러내야만 하는 것이란 의미일 테다. 그에게 있어서 <변호인>이란 영화는 그저 영화가 아닌 셈이다.
심지어 다른 한편에선 영화를 관람하지 않고도 싸지를 수 있는 촌평이 쏟아진다. 심지어 ‘공산주의 혁명을 기도했던 반국가 범죄사건’에 대한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위인도 등장했다. 시절이 하수상한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하수상하지 않았던 시절이나 있었는지 눈과 귀를 의심할만한 작태들이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커밍아웃하는 시대에서 <변호인>과 같은 영화가 돋보이지 않고 배길 수나 있을까. 엄밀히 말하자면, <변호인>을 돋보이게 만드는 건 여전히 스스로 불신의 탑을 쌓고 자신만의 국민을 보호하는 공권력이고 그 공권력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과 수익을 보장받는 보신주의자들의 파렴치한 행태에 있다. <변호인>과 그 주변반응을 ‘노무현의 영화’를 두고 벌어지는 갑론을박에 대해서 친노와 일베의 갈등으로 일반화시키는 것 역시 그리 적절한 태도인지는 모르겠다. 이 영화를 둘러싼 공기는 생각 이상으로 포괄적이고 상징적이다. 그냥 이 시대 자체의 양상처럼 보인다.
<변호인>은 어쩌면 누군가의 말처럼 시대를 잘 만난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하수상하다 못해서 보고 듣고도 의심할만한 일들이 시시때때로 눈과 귀를 바늘처럼 찌르고 들어온다. 하지만 <변호인>이 잘 만날 시대가 하루 이틀이었나. 아마 한반도에 대한민국이라 칭하는 국가가 세워진 이래로 <변호인> 같은 영화가 개봉하지 못할 만큼 무기력한 시대만 아니라면 이 영화를 흥행시킬 시대는 적지 않았다. 다만 그런 시대가 21세기를 넘어선 지금에서도 머리를 들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놀라울 뿐이다. 민주주의를 천년왕국 정도로 해석했던 이들에겐, 정치라는 것이 대단히 불쾌한 술자리 대화 소재로 인식했던 이들에게도 충격과 각성을 준다고 말하는 시대에서 <변호인>이란 영화는 정말 대단한 흥행 요건을 갖춘 상업영화일수밖에 없다. 이 영화가 시대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시대가 이 영화를 떠받들게 만든다. 시대는 보다 우울해지고 있다. 그만큼 관객은 더 들 것이다. 이것도 다 ‘놈현 탓인가?’ 무서워서 대통령 욕도 하기 힘들어진 작금의 시대 탓이라고 여겨지는 건 그저 오해인가?
능력 있는 아버지는 부족함 없이 아들을 키웠습니다. 아이는 건강했고, 집안은 화목했으며 문제될 것은 없었죠. 아이의 여섯 살 생일을 앞둔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났던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고, 병원 관계자는 믿을 수 없는 말을 전했습니다. 아이가 바뀌었다는 거짓말 같은 말. 그리고 아이와 함께 했던 지난 6년간의 거짓말 같은 삶. 아버지는 기로에 섭니다. 6년간 함께 했던 정을 선택할 것인가,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유전자를 선택할 것인가. 현존하는 일본의 거장이라 해도 좋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신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던지는 물음표란 이렇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수면에 물방울을 떨어뜨려 번져나가는 동심원의 파문을 조용히 살피듯이, 무거운 주제를 사소하고 차분한 풍경 속으로 담담하게 떠내려 보냅니다. 그리고 정작 영화는, 엄밀히 말하자면 감독은 그 관계에 대해서 어떠한 할 말이 없다는 것처럼 당사자들의 선택을 객석에서 응시하듯 상황을 그려나갑니다. 이 영화에는 시점숏이란 게 희박합니다. 특정한 인물의 시선을 대변하는 카메라의 시점이란 게 좀처럼 발견되질 않죠. 전지적인 시점에서 이 영화 속의 상황이 중계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고로 사실상 이 영화에 개입하는 존재가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죠. 그리고 영화적 사연에 대한 판단을 극 속의 캐릭터들이 주도하는 상황처럼 그려냄으로써 관객에게도 판단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만 같습니다.
단순히 낳은 정과 기른 정 사이의 갈등을 담아낸 드라마 같지만 영화는 결과적으로 더욱 큰 범위의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객석에서도 어떤 판단에 동참하길 원하면서도 결과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강력하게 어필한다는 말이죠. 이 영화는 생물학적 아버지와 사회적인 아버지 사이에서 후자의 미래 그리고 사회를 보다 존중하고 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대안가족’의 형태라고 할까요. 인간의 갈등을 그리는 개인적인 드라마 같지만 결국 그 사소한 영역의 이야기엔 우주 같은 주의가 담겨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결말부에서 전달되는 거대한 진폭의 감동이 그 강력한 주의를 무의식적으로 환기시키고 증폭시키는 인상마저 듭니다.
물론 이 영화가 주장하는 것이 단순히 아이를 입양하자는 사회운동적인 메시지가 아닐 겁니다. 결국 우리는 사회적인 아버지가 돼야 한다는, 일종의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죠. 저마다에겐 가족이 있고, 가정이 있겠지만 결국 이 사회라는 거대한 공동체에서 우린 다음세대를 위한 어른이 돼야 합니다. 생물학적 부모가 아니라 해도 부모와 같은 온기와 지혜를 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 영화는 그런 어른의 성장을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대단히 감동적이고, 숭고한 이야기이지요. 그리고 이토록 거대한 메시지를 이토록 사소하고 담백하게 해낼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능력일 테고요. 어쩌면 이런 이야기를 해낼 수 있다는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야말로 진짜 어른이 아닐까 문득 생각하게 되는군요.
<호빗> 시리즈를 이끄는 건 <반지의 제왕>으로 익숙한 피터 잭슨이다. 불가피한 이유로 길예르모 델 토로에게서 메가폰을 넘겨 받았다 해도 <호빗>은 끊임없이 <반지의 제왕>과 비교당할 운명을 타고난 작품이란 것이다. 그리고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는 새로운 트릴로지를 받치는 허리이자 전후를 잇는 다리 역할에 충실해야 할 두 번째 속편이다. 본격적인 서사의 진전이 이뤄진다. 트릴로지의 성패를 쥐고 있는 분수령이 되는 작품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속편 역시 초당 48프레임을 영사하는 하이 프레임 레이트(HFR) 방식으로 제작됐다. 사실 전작인 <호빗: 뜻밖의 여정>에서 HFR은 과욕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서사의 시동을 거는 첫 작품에서 이 특수한 기술이 효율적으로 활용됐다고 말하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서사의 주행을 위해서 진로를 설계하는 목적이 강했던 첫 작품에선 액션신의 비중도 적었던 만큼 무언가 특별한 것을 보고 있다는 인상을 부여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역동적인 카메라의 이동을 통해서 공간 전반을 활용하는 몇몇 액션신에선 확실히 HFR의 장점이 부각되는 인상이었다. 스펙터클한 액션신과 이미지의 비중이 늘어난 이번 작품에선 HFR의 장점이 보다 뚜렷해 보인다. 특히 다이내믹한 카메라의 이동과 전방위적인 공간 활용이 빛을 발하는 협곡에서의 추격신은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에서 단연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원작자인 J.R.R 톨킨은 <반지의 제왕>에서 세계관의 자궁 역할을 한 <호빗>의 일부 설정을 수정했다. 피터 잭슨이 톨킨의 <호빗>을 바탕으로 원작과 다른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건 이와 비슷하다. <반지의 제왕>은 톨킨의 원작에 충실한 작품이지만 <호빗>은 오히려 <반지의 제왕>의 프리퀄로서의 목적에 충실하고자 원작을 적극적으로 인큐베이팅해낸다. 원작과의 연관성에 관대해질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는 훌륭한 각색물이자 <반지의 제왕>의 프리퀄로서의 목적을 확실히 달성하는 작품이다. 어떤 면에선 <반지의 제왕>보다도 피터 잭슨의 인장이 보다 확실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기술적 시도와 서사적 의도가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성공적인 트릴로지의 완결이 기대된다.
<집으로 가는 길>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다. 마약 운반 혐의로 2년간 프랑스의 교도소에 억류됐다는 한국인 여성에 관한 실화 말이다. 어쨌든 2006년 한 TV 시사프로그램을 통해서 알려진 이 기구한 사연은 여론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이 여론을 통해서 그녀의 귀국에 결정적인 계기가 만들어졌다. 이 사건의 보도가 환기한 것은 국가 기관의 어이 없는 작태였다. 국민의 안전을 보호한다던 외교통상부 산하의 주불대사관에서 이국에서 범죄 혐의로 조사를 받는 자국민을 외면해버린 진실은 국내 여론을 뜨겁게 달궜다. 그녀를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만든 것도 그 여론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대단히 비극적인 사연을 담고 있는 영화다. 영화를 보는 동안 절절하고 속이 끓는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 감정의 발화점이 되는 건 바로 전도연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 전도연은 심장과 같다. 그녀의 연기를 통해서 객석 곳곳으로 피가 돌듯이 오롯한 심정이 전달된다. 특히 영화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카리브해 질주 신에서 전도연의 얼굴은 삼라만상 같다. 공터 같은 표정에서 역설적으로 모든 감정이 느껴진다. ‘연기력’이란 기능적인 단어로 그녀의 연기를 설명하길 꺼려지게 만든다. ‘경지’라는 단어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그리고 그 대단한 연기로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문장을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한다. 정말 좋은 배우다.
단점이 없는 영화는 아니다. 때때로 신과 신의 이음새에서 성급한 인상이 느껴지기도 하고, 할말이 너무 많아서 넘치는 것이 아닌가 의심되는 순간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길>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해내는 영화다. 이야기의 바탕이 된 실화와 가공된 허구를 재단하고 접목해서 영화적인 언어로서 현실적인 공감대를 쥐어준다. 인물의 고난을 전시하며 눈물샘을 자극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고난을 가혹하게 여겨야 할 이유를 추적하고 제시한다. 그리고 현실을 환기시킨다. 어쩌면 당신이 공감하는 건 단순히 영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집으로 가는 길>에 공감한다면 그건 우리가 속한 이 사회에 대한 불안이 반영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권력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사회와 국가가 영화적 비극을 완전하게 보완한다. 이건 희극인가, 비극인가.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 팀(돔놀 글리슨)은 여자에게 지극히 인기가 없는 남자입니다. 하지만 진실된 사랑을 꿈꾸는 남자이기도 하죠. 그런 팀은 만 20세가 된 날 아버지(빌 나이)로부터 “우리 가문의 남자들은 만 20세가 되면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는 비밀을 전해 듣습니다. 그리고 팀은 이 능력으로 여자를 사로잡겠다고 다짐합니다.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이란 여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시간으로 여기는 거죠. <어바웃 타임>이 시간여행을 다루는 방식이란 이처럼 사소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목이 ‘타임’이란 단어를 동원하고 있는 건 단지 시간여행을 다루고 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팀은 자신의 시간을 거듭 되돌리며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고 더 나은 기회를 얻는 방향으로 삶을 가다듬으며 자신이 꿈꾸던 미래로 나아갑니다. 사랑스러운 여인 메리(레이첼 맥아담스)를 만나서 그토록 꿈꾸던 연애를 하고 가정을 꾸립니다. 이처럼 순조롭고 평탄한 과정은 그가 아버지가 되는 순간부터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시간을 되돌려서 자신의 행위를 수정하고 다른 결과로 나아갔을 때 발생하는 오차는 그 시절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식의 존재 여부에 변수를 만들어버린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죠.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는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너무나 간단하게 되돌릴 수 있는 것이라 믿었던 시간의 무게가 비로소 느껴집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에 대한 절실함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우린 시간 속에서 이별과 상실을 경험합니다. 피할 수 없죠. 그 덕분에 추억을 품을 수 있다는 건 시간이 낳은 아이러니일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 지난 시간들이 언제나 오늘이었고, 지금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바웃 타임>이란 제목은 그 지금에 깃든 모든 순간들을 의미합니다. 결국 <어바웃 타임>은 돌아가고 싶은 과거보다도 소중한 지금에 대한 송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바웃 타임>을 완벽한 영화라고 말할 순 없지만 당신이 사랑할만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래서입니다. 완벽하지 않았던 과거를 그리워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