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착한 남녀의 육체가 전후로 흔들릴 때마다 남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희열이 새어 나온다. 막 섹스를 마친 남녀의 표정만으로도 절정의 환희가 느껴진다. 하지만 육체적 쾌락이 끝난 직후, 현실적 고민이 그들의 침대를 덮친다. 현실적 물욕 앞에서 육체적 쾌락의 잔상이 손쉽게 걷힌다. 그리고 30분 후, 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남자가 마련했던 어떤 비책은 무참히 실패하고 만다. 되레 끔찍한 상황이 발생하고 비극이 예감된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이하, <악마가>)라는 중후한 제목을 지닌 이 영화는 일그러진 욕망에 사로잡힌 형제의 공모로부터 시작되는 가족의 파멸을 응시하는 작품이다.
비극의 방아쇠는 물질적 욕망이다. 이혼한 전처와 딸로부터 무시당하는 행크(에단 호크)는 자신의 무능력을 극복할 단서를 찾지 못하고 겉도는 신세다. 그런 그에게 형 앤디(필립 세이모어 호프만)가 접근해 솔깃한 제안을 던진다. 동생과 달리 반듯한 직장의 중역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앤디 역시 당장 거액의 돈을 마련해야 할 형편에 놓여있다. 형제는 새로운 출발을 꿈꾼다. 하지만 새로운 출발을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결국 형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로 결심한다. 그저 생각대로 하면 된다. 잠깐의 긴장감을 견디면 인생역전이 가능하다.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큰 행운을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은 그들의 편이 아니다. 자신들을 구원해줄 꿈이 박살나고 결코 맞이해선 안될 최악의 상황이 눈앞에 드러난다. 형제의 공모가 비밀로 움트는 사이, 가족에게 찾아온 비극이 뿌리를 내려가며 파멸을 향해 무럭무럭 자라난다.
<악마가>는 플래쉬백을 적극 활용하며 지속적으로 서사를 재구성한다. 서사의 변화와 함께 서사를 지배하는 시점이 이동한다. 30분 후로 점프컷하는 초반의 단 한번을 제외하면 영화는 전진하는 서사의 중심에 놓인 인물을 갈아입으며 5번에 걸쳐 플래쉬백된다. 전진하다 뒷걸음질치는 서사는 사건의 전모를 천천히 드러내며 사건에 연루된 인물 제각각의 사연을 수집해나가고 이를 통해 <악마가>는 영화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구축한다. 인물 개개인의 심리를 하나의 면처럼 이어 만든 입체도형의 형태로서 영화를 완성해나간다. 행크와 앤디의 시점이 교차되던 영화가 그들의 아버지인 찰리(알버트 피니)의 시점으로 옮겨 마침표를 찍기까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서사는 원인에 대한 의문을 결과까지 이어나가며 시작부터 끝까지 스토리텔링의 에너지를 보존한다.
<뜨거운 오후 Dog day afternoon>(1975)와 <네트워크>(1976)와 같이 사회를 관통하는 인상적인 작품을 통해 과거의 영예를 누렸으나 현대에선 점차 잊혀지던 시드니 루멧은 2007년에 발표한 <악마가>를 통해서 영광의 시계를 현재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악마가>는 팔순을 넘긴 노장 감독의 영화라는 점이 무색할 정도로 신선한 스타일을 유지하고 기품 있는 연륜이 깊게 배어든 중후한 시선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실로 대단한 작품이다. 시종일관 중후한 극적 무게를 보존하는 동시에 고조된 인물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한다. 특히 심장박동기의 신호음을 이용해 긴박하면서도 정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결말부는 <악마가>의 클라이맥스로써 손색이 없다. 어떤 부족함이나 지나침이 발견되지 않는 배우들의 연기력 또한 백미다. 특히 온화한 미소 너머로 점차 불안의 기색을 방출해내면서도 대범하게 움직이는 앤디를 연기하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표정은 <악마가>의 심리적 깊이를 대변하는 바다와 같다. 반대로 초조하게 흔들리는 에단 호크의 표정은 영화의 불안한 심리를 출렁이게 만들고, 알버트 피니는 단호한 중압감을 더하며 마리사 토메이는 관능과 허무를 동시에 이끈다.
<악마가>는 흉악하고 퇴폐적인 사회를 고발하고 있지만 근엄한 기운을 잃지 않는 중후한 영화다. ‘하나씩 더해도 완벽해지지 않는 삶’을 떠도는 도시의 양자들은 결국 끝없이 더해지는 욕망에 이끌려 천천히 파멸로 한걸음씩 다가간다. 앤디의 제안을 받은 행크의 불안을 잠재우는 건 다름 아닌 지폐이며 행크의 제안을 받은 바비(브라이언 F. 오바이런)의 불안을 잠재우는 것 또한 지폐다. 양심과 공포를 잠재우는 건 물질적 욕망이다. <악마가>는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혀 인간 본연의 존재적 가치를 망각한 이들의 삶이 향한 본질적 비극을 향해 전진하는 가족드라마다. 지독하게 흉악하고 끔찍한 스토리는 현실의 치부를 드러내는 동시에 폐부를 정확히 찌른다.
개인의 몰락이 도미노처럼 이어지며 결국 가족은 붕괴된다. 이는 결국 극악하게 타락한 세태를 대변한다. <악마가>는 결국 중후하고 세련된 영화적 양식을 통해 충격적인 현실의 세태를 놀라운 방식으로 고발하는 영화다.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천국으로 가 있기를(May you be in heaven a half hour 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 근사하면서도 엄숙한 제목을 포함한 이 문구는 마치 악마의 유혹처럼 흉악한 물질적 욕망에 시달리는 현대인을 위한 비통한 기도와 같다. 그리고 <악마가>는 그 끔찍한 현실을 생생하게 포착하는 뜨거운 시선이자 깊이 전해 들어야 할 비장한 묵시록이다.
격양된 목소리 너머로 사진과 기사가 흐른다.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프로레슬러의 전성기가 언어로 구술되고 이미지로 비춰진다. 영광의 나날들이 전설처럼 전해진다. 환호와 열광이 빗발치던 지난 세월을 넘어 눈앞에 들어서는 건 어느 적막한 대기실의 풍경. 작은 의자에 몸을 의지한 채 가쁜 숨을 몰아 쉬는 그는 고단하고 힘겨워 보인다. 영광의 세월을 지나 노쇠한 육체는 여전히 그 세월을 연장하기 위해 부딪히고 내던져진다. 사나이는 여전히 자신의 전설을 놓지 못한다. <더 레슬러>는 전설을 먹고 사는 어느 루저를 위한 송가다.
영화 속 대사처럼 프로레슬링은 ‘다 짜고 하는’게 맞다. 리얼리티를 가장한 버라이어티에 가깝다. <더 레슬러>는 그 합이 완성되는 과정을 여과없이 들춘다. 과격한 퍼포먼스가 링 위를 지배하고 승자와 패자의 구도 역시 배역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허구의 노동은 실로 헌신적인 육체적 공갈을 기반으로 이뤄진다. 합을 맞추고 과정을 숙지한다 해서 노동이 부정되는 건 아니며 고통이 반감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해에 가까운 엔터테인먼트다. 살점이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는 와중에도 극적인 연출을 고려하고 내러티브를 유지해야 한다. 그 와중에 정교한 합이 어울려야 한다. 그 퍼포먼스가 실제적인 고통과 고단한 노동의 성과라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값어치를 발생시킨다. 수난이 심할수록 관객의 열광도 더해진다. 링에서 영웅이 된다는 건 얼마나 자학적인 수난을 감내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그것은 실로 절박한 진심을 담고 있는 피학적인 거짓말인 셈이다.
랜디 램(미키 루크)은 화려한 퍼포먼스와 테크닉을 통해 2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도 링의 전설로서 군림했다. 링 위에서 영웅으로 연호되는 레슬러지만 그는 사실상 남루한 삶을 살고 있다. 경기가 끝나고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집세를 내지 못해 좁은 차 안에 몸을 누이고 맥주 한 모금에 갖가지 약을 삼킨다. 작은 임대 트레일러에서 홀로 살아가며 대형마트에서 잡일을 하고 주말마다 링에 오르는 랜디의 삶은 패배자의 정서를 연상시킨다. 그가 링을 떠날 수 없는 까닭 역시 그 삶과 연관돼있다. 링을 떠나면 랜디는 진짜 패배자의 삶에 갇힌다. 그의 삶을 증명하는 건 오로지 링에 서는 것뿐이다. 그것이 지금의 현실을 역전시킬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링 위에서 관객의 환호를 얻는 것만이 그 삶을 부지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동정의 여지로 가득한 랜디의 삶은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객관화된다. 다큐적인 질감을 품은 카메라 기법은 <더 레슬러>를 페이소스로 가득한 감동의 도가니에서 구출시킨다. 종종 랜디의 뒤를 차분히 뒤따르곤 하는 카메라는 이를 통해 관객에게 그 남자가 걸어나가는 그 세계를 같은 눈높이로 응시할 기회를 준다. 환호와 열광 속에서 링에 오르던 랜디가 고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집주인이 잠근 열쇠를 열지 못해 비좁은 차 안에 몸을 누이는 과정은 실로 대조적이다. 또한 온몸에 스탬플러가 박혀 피투성이로 대기실에 앉아있는 랜디의 모습을 먼저 비춘 뒤, 끔찍한 유혈을 동반한 경기 과정과 경기 중에 얻은 상처를 대기실에서 치료하는 과정을 교차시켜서 적나라하게 포착하는 카메라의 시선엔 어떤 과장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기교를 동반한 배열상의 편집은 있지만 감정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기 위한 노력은 극도로 절제된다. <더 레슬러>가 <록키>와 명확한 차이를 두고 있는 지점이다. 인물에 대한 감상주의적 접근을 최대한 배제시키고 철저하게 객관화시켜서 그 세계를 응시하고 인물에 대한 관찰을 요구한다.
물론 랜디라는 레슬러에 대한 감정일체가 생성되지 않는 건 아니다. 분명 루저의 삶을 바라보는 일말의 동정심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런 극적인 감정을 철저하게 억누르는 연출의 묘가 좀 더 객관화된 감정을 야기시키고 이를 통해 그 인물 너머로 확대된 세계관을 조명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스트립 댄서 캐시디(마리사 토메이)를 사모하는 랜디의 감정을 온전히 순정적인 양상으로 치환하지 않으며 자신의 딸 스테파니(에반 레이첼 우드)로부터 박대 받는 랜디의 모습을 동정으로 유도하지 않는 것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모든 상황은 상황 그 자체로서 판단하게 만들 뿐, 어떤 감정의 매개체가 되어 객석을 유린하지 않는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철저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카메라의 시선에 따라 상황의 응시자로서 자리를 지켜야 한다. <더 레슬러>가 정서적인 통증을 동반하는 건 그 덕분이다.
전설을 부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랜디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건 숭고함보단 처절함에 가깝다. 그것은 영광을 위해서라기 보단 생존을 위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생존이란 물질적 가치의 잉여를 위한 것과 차원이 다르다. 그 비루한 삶에 생기를 불어넣고 유일한 존엄성의 뼈대를 보존할 수 있는 방식이 그것뿐일 따름이다.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버린 과거의 영광을 끊임없이 복기하고자 하는 노력은 때때로 그 현실을 한심할 정도로 나약하게 대비시킨다. 고통을 무릅쓰고 링에 올라서는 사내의 뒷모습엔 현실의 무력함이 깊게 배어있다. 더 이상 진짜가 될 수 없는 영광의 껍데기만 두른 고독한 삶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아버지로서의 삶에 재기할 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고 자신의 링만큼이나 현실성 없는 로맨스에 천착한 그 삶은 지독하게 비루하다. 그럼에도 그 삶을 책망할 수 없는 건 그 삶이 무가치하다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흔과 혈흔으로 만신창이가 된 육체에 담긴 영광의 세월을 폄하할 순 없기 때문이다. <더 레슬러>는 그 삶을 통해 감정을 완성하기 보단 그 삶 자체를 조명한다. 무엇보다도 미키 루크는 캐릭터로서의 연기적 영역을 넘어 배우 본연의 삶을 투영하는 양상이라 입체적인 감상을 부여한다. 배우의 삶이 투영된 듯한 캐릭터의 진정성을 무시하기 힘들다. 실로 적나라한 루저의 일생이 배우의 삶 자체만으로 영화적인 감상을 부여하는 덕분이다.
그 삶엔 어떤 낭만도 포용되지 않는다. 스러져가는 육체를 겨우내 지탱하는 사내가 해묵은 언어로 짐작할 수 밖에 없는 전설에 몸을 던질 때, 희망보단 절망이 새어 나온다. 그럼에도 그 삶을 응시하는 건 그것이 진심이 담긴 삶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껍데기뿐인 영광이라 해도 그 자체를 위한 삶의 진정성은 진심이기 때문이다. 이 건조한 영화가 품고 있는 일말의 낭만 역시 그 지점에 있다. 비범하지 못한 삶 속에서도 남다른 생의 의지가 빛난다. 박동이 약해진 심장이라 해도 마지막까지 피를 순환시키기 위해 움츠림을 거듭하듯 낡아가는 전설을 삶의 최전선으로 연장하려는 사내의 인생을 통해 삶이란 단어 그 자체를 응시하게 만든다. 그 최후의 수단이 죽음이라 해도 그 사내는 끝까지 전설을 삶의 테두리로 보존하려 한다. <더 레슬러>는 실로 처절하지만 그 의미를 결코 간과할 수 없게 담담한 그 인생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육체의 쇠락 속에서도 정신적 자존을 부지해 보려는 사내의 삶을 결코 무시할 수 없게 만든다. 루저를 위한 삶이 아니라 진짜 루저의 삶을 그린다. 전설을 복원하는 게 아니라 그 껍데기를 유지한 채 그저 걸어간다. 영광의 뒤안길에 선 삶을 고스란히 발가벗긴다. 그로 인해 드러나는 건 비루한 삶을 연명하고자 하는 일말의 의지다. 남루하지만 꿋꿋한 삶의 의지가 아련하게 빛난다. 그 삶에 어떤 감정 이입을 가하지 않고 그저 따라 걷을 뿐이다. 훌륭한 위안이자 현명한 연대로서 진심을 전한다. <더 레슬러>의 담담한 스크린을 응시하는 가운데 먹먹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