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예매하려다 시간 여행을 떠나는 기분을 느꼈다. 10년 전에
극장에서 봤던 영화들은 왜 다시 극장으로 돌아온 걸까?
<인생은 아름다워>,
<이터널 선샤인>, <500일의 썸머>,
<죽은 시인의 사회>, <파이트 클럽>,
<포레스트 검프>, <유주얼 서스펙트>,
<매트릭스>, <벤허>. 두서
없이 나열한 이 영화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근래에 극장에서 다시 상영된 영화들,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재개봉작이다. 그런데 왜 이 묵은 영화들은
다시 극장에서 상영된 걸까? 2015년 11월에 재개봉한
<이터널 선샤인>은 무려 32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2005년 개봉 당시 16만여 명의 관객이 이 영화를 봤으니 재개봉으로 두 배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한 것이다. 이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해외에서 수입한 영화를 개봉할 수 있는
판권 계약 기간은 보통 7년에서 10년 정도다. 2015년에 <이터널 선샤인>의
개봉판권을 가진 수입사는 2005년의 수입사로부터 소멸된 개봉판권을 재구입해서 재개봉시켰다. 재개봉 판권의 가격은 신작 판권의 10~30%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2015년에 재개봉된
<이터널 선샤인>은 2005년에 개봉됐을
때보다 월등히 싼 가격으로 수입했지만 두 배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으니 수배에 달하는 수익을 거둔 셈이다. 재개봉작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된 것이다.
사실 2013년에도 <레옹>과 <러브레터>가
재개봉했고 각각 4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재개봉작을 블루칩으로 여기지 않았다. 시장 상황이 판이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200개 미만의 상영관에서 개봉하는 영화들이 다양성 영화로
분류된다. 중소 규모의 해외 수입영화들과 저예산 독립영화들이다.
2013년 다양성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작품은 약 18만 명을 동원한 <로마 위드 러브>였다. 이
작품을 포함해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은 다양성 영화는 불과 여섯 편 정도였다. 그런데 2014년엔 다양성 영화 중 18편이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심지어 2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작품도 10편이나 된다. 다양성 영화 시장은 금광이 됐고, 영화 수입사들 간의 골드 러시도 시작됐다.
다양성 영화의 수입단가는 지난 2년 사이 무려 두 배 이상 상승했다. 덕분에 평균적으로 1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면 수익 실현이 가능했던
중소 규모의 수입 영화들은 2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해야만 본전을 얻을 수 있다. 상영관 수는 한정돼 있고, 할리우드 대작이나 한국 상업영화들이 70~80% 이상의 상영관을 싹쓸이하는 국내 실정에서 다양성 영화들의 각축전만 치열해지고 있는 양상이란 것. "아트하우스 영화시장이 과열되면서 다양성 영화들의 수입가가 많이 상승했다. 결국 인지도가 떨어지는 수입영화들은 흥행이 어려우니 재개봉작을 싸게 들여와 개봉하는 건 상대적으로 안전한 일이
된다. 게다가 이미 인지도도 존재해서 홍보비용도 절감된다."
영화수입배급사 유로커뮤니케이션 이재진 본부장의 말처럼 신작에 비해 단가가 낮고 수익성이 충분한 재개봉작이 주목받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이는 아트하우스 영화를 수입하는 중소 규모 영화사들에겐 부담스러운 일이다.
"다양성 영화관은 한정돼서 다양성 영화들의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에서 매주 재개봉작까지 개봉관 확보에 뛰어들다 보니 인지도가
떨어지는 신작들은 상대적으로 버티기가 어렵다." 영화사 진진의 마케팅팀 장선영 팀장의 말처럼
인지도가 형성된 재개봉작들의 시장 유입이 거세지면서 되레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수입영화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게다가 최근 멀티플렉스들이 다양성 영화의 단독 개봉을 유치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데 인지도 높은 재개봉작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만큼 개봉관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영화수입사들의 신작 수입영화들과 관객들의
접점이 좁아진 것이다.
"재개봉작들도 다양성 영화시장에서 좋은 콘텐츠가 될 수 있다. 관객 입장에선 재개봉작도 영화의 다양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다만
재개봉작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변별력이 사라지는 건 아쉽다. 수요와 공급 조절이 필요한데 소화가
안될 정도로 과잉 공급돼서 적절한 프로그래밍도 어렵고, 관객들의 피로감도 가중될 것 같다." 영화수입배급사 그린나래미디어의 유현택 대표의 말처럼 재개봉작도 다양성 영화의 한 축이 될 수 있다. 다만 긴 안목이 필요하다. 명성이 자자한 과거의 개봉작들을 극장에서
다시 만난다는 건 영화팬 입장에서도 귀한 기회다. 수입사 입장에서도 효율적인 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산업 안에서 좋은 동력이 된다. 어차피 영화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잊혀질 뿐이다. 결국 시대를 넘어 관객을 만나는 영화가 존재한다는
건 일종의 귀감이 된다. 좋은 영화는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귀감. 재개봉작들은
그런 미덕을 품고 있다. 그러니 혜안이 필요하다. 지금의
영화와 과거의 영화가 공생할 수 있고, 그 중에서도 좋은 영화는 오래 살아남을 기회를 줄 수 있는, 혜안 말이다.
스팀펑크는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미래다. 19세기의 유물로부터 빚어진 상상력이 21세기에 주목을 받고 있다. 물론 증기기관차를 타고 싶어서가 아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말했다. ‘인간 존재의 본질은 다름 아닌 불안’이라고. 인간은 불안해한다. 그리고 불안은 대부분 미래에서 온다. 마치 존 코너를 잡으러 과거로 오는 터미네이터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 즉 알 수 없다는 것 자체가 불안이다. ‘발달된 기계 문명에 의해서든, 자연 재해에 의해서든, 존재를 알 수 없는 우주 어딘가의 외계인에 의해서든, 인류는 멸망할지도 모른다!’라는 불안감. 그 중에서도 가장 현실적인 불안을 야기시키는 건 하이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의한 영향력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불안은 때론 인간의 상상력에 불을 지피는 땔감 노릇을 해왔다. SF영화들이 숱하게 그린 디스토피아의 미래상은 문명의 발달과 함께 자라는 인간의 불안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사이버펑크(cyberpunk)’라는 장르의 태동도 이런 불안에서 비롯됐다.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펑크(punk)’의 합성어인 사이버펑크는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로버트 위너의 저서에서 처음 언급된 뒤 컴퓨터를 기반으로 발달한 인공지능을 대변하는 용어로 대두됐으며 SF세계관을 대변하는 장르적 언어로 자리잡았다. 컴퓨터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편의를 넘어서 인간을 위협한다는 두려움은 더욱 짙어졌고, 발달된 기술이 부의 축적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측도 등장한다. <블레이드 러너>와 <매트릭스> 같은 SF영화들이 그리는 음울한 미래상과 인간성의 말살에 대한 고찰은 사이버펑크의 자궁 안에서 잉태된 것이다. 이는 컴퓨터를 위시한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함께 심화된 물질주의에 대한 불안을 반영한 디스토피아를 그린 SF적인 세계관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SF소설가 K.W.지터는 당대를 지배하던 사이버펑크 운동에 빗대어서 자신이 창조한 세계관을 이렇게 언급했다. “컴퓨터 대신 증기기관이 등장하는 우리 소설은 ‘스팀펑크(steampunk)’라고 불려야 한다.” 스팀펑크는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촉발된 산업혁명과 함께 급격한 산업화가 도래한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안 시대를 모티프로 삼은 SF소설의 하위 장르이자 대체 현실이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반영된 만큼 활기가 넘친다. 태엽이나 톱니바퀴로 대변되는 기계적인 이미지가 부각된 스팀펑크의 세계관은 컴퓨터와 내연 기관 대신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증기기관을 통해서 고도로 발달된 가상의 미래를 그린다. 증기기관차와 비행선 등 산업화 시대의 이동 수단으로 대변되는 스팀펑크의 미래란 대체로 인간이 기계를 압도하는 기술자의 시대이기도 했다. 거미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기계 로봇이 등장하는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등장하는 증기기관으로 나는 거대한 기계성은 결국 인간의 의지에 따라 작동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디지털화되는 테크놀로지가 인간을 대체하리라는 불안을 먹고 자란 사이버펑크와 달리 스팀펑크는 기계 문명을 이용하는 인간의 역할을 뚜렷하게 묘사하며 아날로그적인 기계 문명에 대한 향수를 부추긴다. 게다가 사이버펑크가 그리는 미래는 당대의 상상력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미지의 한계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테면 최첨단화된 미래를 그린다던 90년대의 사이버펑크 영화들이 도스창을 띄운 컴퓨터 화면을 제시하고 있다는 건 결국 당대의 상상력이 지닌 필연적인 한계가 명확한 이미지로 드러낸다는 말이다. 반면 스팀펑크는 과거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구성되는 만큼 고유의 세계관이 보존되기 때문에 이미지의 일관성이 유지되면서도 풍부한 재해석이 가능하다. 오히려 지나온 과거를 통해서 미래를 내다보는 만큼 시도할 수 있는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지난해, IBM에선 인터넷상의 게시판과 블로그, 뉴스, SNS상의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향후 2년간 스팀펑크가 스타일을 주도하게 될 것이란 분석을 내놓았다. 이는 스팀펑크가 유형의 가치로 거듭나고 있다는 말이다. 문학이나 영화의 장르적 소재를 넘어서 실생활의 아이템으로 거듭나고 있다. 게리 올드만, 가렛 헤드룬드, 제이미 벨, 윌렘 데포와 같은 배우들을 모델로 내세운 프라다의 2012년 F/W 남성 컬렉션에선 19세기 영국 빅토리안 시대의 복식을 모티프로 현대적인 스타일을 가미한 스팀펑크 콘셉트를 공개한바 있다. 한편 2010년 이후로 미국 내 24개 이상의 백화점과 의류 전문점에선 스팀펑크 스타일의 인테리어 콘셉트를 반영했다고 한다. 이를 기반으로 의류, 액세서리 산업으로 영향력이 확장되고 있는 추세다.
스팀펑크의 모티프가 된 19세기는 아르누보 양식에서 비롯된 아르데코 양식이 절정을 이루던 시대다. 스팀펑크 또한 그 영향력 아래 있다. 자연주의적인 양식의 아르누보를 바탕으로 기하학적인 문양과 금속 재질과 기계적인 디테일을 활용한 아르데코 양식은 스팀펑크에 온전히 반영됐다. 오는 3월 8일부터 5월 18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되는 <스팀펑크 아트전>은 이런 스팀펑크 아트의 현주소와 그 가능성을 대면할 수 있는 기회다. 크고 작은 태엽들을 비롯한 기계 부속을 활용해서 다채로운 동물들의 형상을 완성한 작품들과 앤티크한 조명이나 다양한 소품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매끈한 외형을 자랑하지만 점차 천편일률적인 형태로 획일화되고 있는 노트북과 태블릿 PC 등의 디바이스들의 외형을 해체하고 고풍스럽게 고안된 스팀펑크의 형태를 입힌 실생활적인 디자인은 스팀펑크의 재발견에 가깝다. 타자기의 형태를 빌린 아이패드 거치대라던가, 빈티지하게 재가공된 데스크탑 등은 고도로 발달한 기술에 풍요로운 감수성을 불어넣는 작업 같기도 하다.
스팀펑크에 ‘펑크’라는 단어가 결합된 건 체제에 대한 저항적인 상상력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스팀펑크가 그리는 19세기의 풍경은 산업화로 인해 태동한 기계 문명이 여전히 인간에게 종속되는 시대였다. 사고의 기능이 인간에게 머물던 시기였다. 결국 21세기에서 스팀펑크가 주목을 받는다는 건 인간 그 자체를 발굴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구가 아닐까. 가속화되는 디지털 기술의 발달 속에서 점차 기술의 지배자가 아니라 기술에 종속되어가고 있다는 위기의식으로부터 탈출하고 싶다는 것, 기술의 발달이 부추기는 물질중심적인 세태로부터 소외되는 인간 고유의 가치를 회복하고 싶다는 것, 그것이 스팀펑크를 주목하도록 이끈다. 또한 급속히 변화하는 21세기의 풍경 속에서 고유의 미학적 가치를 계승하고 새로운 창조를 이끈다는 건 스팀펑크가 제시하는 청사진이기도 하다. 고글, 시계 태엽 장치를 바탕으로 완성된 장신구를 비롯해서 프록코트, 실크모자, 가죽 등의 소재에 결합된 스팀펑크의 미학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역사학자 E.H. 카는 말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21세기에서 스팀펑크가 조명되는 건 어쩌면 그것이 이미 인간이 거쳐온 역사를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지난 역사를 통해서 오늘의 역사를 보완한다. 16세기의 르네상스는 절대적인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해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예술적 움직임이었다. 기술이 인간을 압도하는 시대에서 인간의 감성을 닮은 아날로그의 향수를 부추기는 스팀펑크가 주목받는다는 건 여러모로 르네상스 시대의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21세기의 르네상스는 스팀펑크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작될 수 있다.
(ELLE DECOR 2014 SPRING NO.13 'DECOR FEATURES CULTURE')
총구에서 불꽃을 튀며 튕겨져 나간 탄환이 반대편에 날아온 탄환과 맞부딪혀 일그러진다. 인간의 반사신경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에 틀림없다. 대상을 정조준 하지 않고 팔의 스윙과 팔목의 스냅을 통해 내던져지듯 총구를 벗어난 총알은 곡선의 궤적을 그리며 장애물 너머의 과녁에 명중된다 회전력에 의해 날아가는 탄도의 관성적 움직임은 아무렇지 않게 간과된다. <원티드>는 과학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혹은 그것을 철저히 무시하는 방식으로 독창적인 스타일을 완성한다. 말이 되지 않음은 <원티드>의 동선을 옭아매는 제한요소로 작동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것은 현실이라는 중력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하는 반작용의 질서로 적용되는 것이기도 하다.
심장박동처럼 두근거리듯 울렁이는 화면이 말해주듯 웨슬리(제임스 맥어보이)는 지나치게 예민하고 소심한 성격을 지녔다. 과도한 업무와 지독한 타박에 시달리는 그는 쳇바퀴 돌아가듯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에 짓눌려 자신의 삶을 명명될 의미조차 없는 가치라며 좌절한다. 하지만 어느 날, 그의 앞에 정체불명의 여인 폭스(안젤리나 졸리)가 나타나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총격전에 휘말린다. 그리고 그의 권태로운 일상에 거대한 금이 가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집을 나간 아버지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고, 자신이 분당 400회가 넘게 뛰는 심장을 지닌 덕분에 뛰어난 반사신경을 지녔음을 간파하게 된 그는 피가 튀고 살을 깎는 고도의 수련을 통해 ‘결사단(The Fraternity)’의 킬러로 육성된다.
<원티드>는 현실이란 중력에 저항하듯 무중력에 가까운 영화적 스타일을 구사하는 영화다. 손목의 스냅을 통해 곡선의 궤도를 그리고 날아가는 탄환, 동물적 본능에 가까운 주행실력으로 매섭게 달리는 스포츠카, 그 비상식적 행동반경을 과감히 돌파하는 캐릭터들의 반사신경은 가히 초인적이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거듭되는 살인적인 훈련을 통해 익혀지는 후천적 기능에 가깝다. 생의 의지를 질식시킬 정도로 무기력한 삶의 굴레를 되감아 돌리듯 살아가던 웨슬리가 자신의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깨닫고 뼈저린 고행 끝에 최고의 킬러로 성장한다는 설정은 성장스토리의 클리셰와 닮았지만 복제된 것이 아니다.
파격적인 액션의 미학적 양식은 <매트릭스>를 떠올리게 한다. 동시에 그 이미지로부터 구축되기 시작하는 세계관의 양태 역시 그것과 유사하다. 평범한 비즈니스맨의 일상을 두르던 일개 청년의 삶이 실은 위장된 것이며 그 잠재력을 은폐시키는 환경으로부터 깨어나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획득하게 된다는 일련의 과정이 그렇다. 다만 ‘매트릭스’라는 가상 시스템의 작동을 통해 초현실적 자아와 실존적 자아 사이의 간극적 물음을 방대하게 되새김질하던 <매트릭스>와 달리 <원티드>는 훈육을 통해 재발견되고 숙성되는 인물의 초자아성을 부각한다. 세련됨의 여부를 넘어 터무니없을 정도로 장황하게 느껴질 만한 액션에 설득력이 부여되는 건 그 덕분이기도 하다. 현실로부터 질식할 것만 같던 평범한 비즈니스맨이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자신을 붙잡고 있던 중력 같은 현실을 거부하며 운명에 눈뜬다는 스토리텔링이 식상함을 탈피할 수 있는 건 비상식에 가까운 스타일리쉬가 효과적인 기제로 작동하는 덕분이다. <원티드>에서 스타일리쉬한 이미지는 전시적 기능을 넘어 내러티브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도구적 기능으로써 작동된다.
소심하던 찌질이가 자신의 비범함을 깨닫고 용 된다, 가 <원티드>의 전부는 아니다. 그가 자신의 비범함을 깨닫게 되고 그를 통해 새로운 삶을 거머쥐게 되면서 이야기의 양상은 플러스 극에서 마이너스 극으로 부호를 바꾼다. 전반부가 웨슬리의 성취담이었다면 후반부는 웨슬리의 극복담이다. 그가 속한 결사단(The Fraternity Bible)은 방직공장을 아지트로 삼은 노동자 계급으로 이뤄져 있다. 그들의 암살 대상은 방직기계로부터 지정되며 이는 마치 신으로부터 내려오는 계시처럼 부여된다. 이를 해독하는 건 슬론(모건 프리먼)이다. 그 체계는 절대적인 것을 숭상하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그만큼 일방적이다. 사제와 신도의 관계처럼 묘사되는 그들의 하위 일방적 시스템은 그 첨탑에 선 자가 이를 남용하게 될 때의 폐해를 드러낸다. 권력에 대한 견제가 불가능한 체제가 지닌 모순은 <원티드>의 후반을 지탱하는 반전의 매개로 작동할 음모의 성립조건이기도 하다.
맹신과 복종으로 유지되는 체제의 음모에 맞서고 권력적 구조를 타파하는 건 체제에 대한 맹신을 통해 조직에 유입되지 않은, 오로지 자신에 대한 가능성과 목적의식을 통해 조직의 전체주의적 결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를 통해 이뤄진다. <매트릭스>의 네오와 <원티드>의 웨슬리가 각기 선택 받은 자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나 그들의 역할수행이 각각 내부를 위협하는 외부적 시스템에 대한 극복과 내부적 시스템의 오류를 파기로 엇갈리는 건 그 시스템이 갈망하는 발전양상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전자가 구원을 통해 시스템을 복원하고자 한다면 후자는 유지를 위해 시스템의 오류를 제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주문처럼 들리는 이름을 지닌 티무르 베크맘베토브(Timur Bekmambetov) 감독은 러시아 자국에서 큰 흥행을 거둔 <나이트 워치>와 <데이 워치> 시리즈로 독창적인 스타일을 인정받았다. 제작환경의 열악함을 감안한다면 두 작품에 담긴 묵시록적인 세계관과 스타일리쉬한 비쥬얼은 창조적 재능을 인정받을만한 매물이 되기 충분했나 보다. 할리우드로 건너간 그는 두둑한 명성을 자랑하는 배우를 캐스팅하고, 고가의 장비와 숙련된 기술을 활용하여 비현실의 오차범위를 확장시키는 영상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전작들에 비해 화려하고 깔끔해진 영상의 때깔이나 스타일의 세련미는 자본의 투자에 따른 결점의 보완 수준을 실감하게 한다. 또한 <원티드>는 안젤리나 졸리의 육중한 매력이 고스란히 발산되는 영화다. 그녀의 캐릭터는 그녀가 지닌 장점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그 매력을 완전히 담아낼 만한 그릇으로 완성됐다. 제임스 맥어보이보다도 그녀가 매력적으로 묘사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동시에 이는 그의 불찰이나 미숙에서 비롯된 바가 아니란 점에서 더욱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사안이다.
<원티드>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지막 물음에서 발생한다. 동명의 그래픽 노블에서 모티브를 얻은-그로부터 소스를 얻었을 뿐, 전체적인 컨셉은 확 바뀌었다 한다.- <원티드>는 만화적인 양식을 대거 차용하며 그것을 영화적 실사로써 능숙하게 다루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것이 과학적인 법칙과 현실적인 논리를 배반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이미지는 가히 공격적이며 매력적이다. 영화는 현실을 배제하지 않되 그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는 현실에 대한 스트레스와 자신에 대한 콤플렉스의 중력에 얽매여 살아가는 누군가를 위한 충고처럼 보인다. 영화는 자신만의 이미지를 완성하되, 관객에게 되묻는다. ‘너는 무엇을 했는가?’ 현실이라는 자신의 독자적 가능성을 간과하게 만드는 현실의 중력에 저항하듯 스타일리쉬한 액션은 무중력적 쾌감을 선사한다. 물론 그 현란한 이미지에 비해 단순해 보이는 내러티브가 그 물음을 간과하게 만들 수 있음을 배제할 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