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채널에서 방영된 <하이스쿨 뮤지컬>의 마지막 시즌이자 첫 번째 스크린판 <하이스쿨 뮤지컬: 졸업반>(이하, <졸업반>)은 국내 관객에게 분명 낯선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영미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한 TV시리즈라지만 생소하기 짝이 없다. 이스트 고등학교 농구부 결승전이 뭐가 그리 중요한지, 그리고 코트 위의 트로이(잭 애프론)를 바라보며 노래하는 객석의 가브리엘라(바네사 허진스)는 대체 어떤 사이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졸업반>을 두둔할 수 있는 건 이 작품의 발랄함이 그 생소함을 압도하는 까닭이다. 흡사 안무처럼 펼쳐지는 농구 코트 위의 플레이부터 뮤지컬의 양식을 노골적으로 선사하는 <졸업반>은 그 무대적 기능성을 과감하면서도 세련되게 구사한다. 여백이 뚜렷한 스토리 라인과 세심하게 다루어지지 못하는 몇몇 캐릭터의 허점이 여실함에도 완성도가 뛰어난 안무와 노래의 기능적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때때로 유치하다 싶은 틴에이저의 감수성이 직설적인 가사에 담겨 전달되지만 이에 동반되는 퍼포먼스의 원숙함이 단점을 보완한다.
사실 <졸업반>이 묘사하는 학창시절은 지나치게 낭만적이라 꽤나 동떨어진 세계처럼 보인다. 그건 흡사 <해리포터>의 호그와트 마법학교에서 마법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제외시킨 결과가 이스트 고교처럼 보일 정도로 <졸업반>은 꽤나 비현실적이다. 심지어 판타지라 여겨도 상관없다. 그리고 그 지점이 <졸업반>을 비롯한 <하이스쿨 뮤지컬>을 즐기는 묘미다. <하이스쿨 뮤지컬>은 그 이질적인 상황을 만끽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재미로 활용되는 작품이다. 공부 잘하고 춤 잘 추고 노래 잘하고 운동 잘하는 엄친아와 엄친딸들이 모여 환상적인 퍼포먼스를 펼쳐내는 곳이 바로 <하이스쿨 뮤지컬>이다. 물론 때때로 자신들의 진로와 미래에 대해 침울해지기도 하지만 이내 낭만적인 로맨스를 노래하고 혈기왕성한 청춘을 누린다. 그곳에서 심각한 고민은 불필요한 걱정이다. 때때로 마치 뮤지컬 <그리스>의 건전한 버전을 연상시킨다. 10대의 패기와 에너지가 말랑말랑하면서도 단단하게 분출된다.
<졸업반>이라는 부제는 <하이스쿨 뮤지컬>의 종막을 선언한다. 발랄하고 해맑은 청춘들의 사춘기가 지난 일기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에 다다랐음을 의미한다.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가브리엘라와 트로이가 이별에 대해 걱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좋은 시절은 끝났다, 는 어른들의 넋두리처럼 만만찮은 고민에 휩싸인다. 하지만 이런 고민 따위는 그냥 학사모를 던져버리듯 유쾌하게 날리고 그저 내일의 희망을 노래하며 즐겁게 춤춘다. 틴에이저의 감수성은 유치하기보단 명랑하고 끈적거리기 보단 담백하다. 뻔한 결말을 앞두고도 두려움 없이 경쾌하다. 뛰어난 가창력과 원숙한 무대 매너, 현란한 안무와 화려한 미장센에 눈과 귀가 즐겁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를 날리는 뻔뻔함을 보상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한다. 물론 지옥 같은 이 나라의 입시제도 하에서 이런 환상적인 학창시절 따윈 달나라 이야기 같아서 씁쓸하다만.
(최근 <원스>에서 연인으로 등장한 그와 그녀, 글렌 한사드와 마르케타 이글로바의 새로운 밴드 'Swell Season'이 내한 공연을 펼쳤고, 이에 맞춰 재개봉된 <원스>의 반응이 좋다고 합니다.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들은 실제 연인이며 뮤지션이기도 하죠. 이 글은 2007년 10월 1일에 작성된 기사입니다. 그 당시 추석 연휴 동안 <원스>를 2번 연일 관람하고 나서 써내려간 글을 포스팅합니다. 그저 당신이 이 영화를 꼭 볼 수 있길 바랍니다. 전 정말 좋았거든요. 진심으로 말이죠. 지금도 매우 좋아합니다.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하고 애잔해요. 그 마음이 당신에게도 전해지길 바라는 심정으로 이 글을 포스팅합니다. 조금 길어요. 염치없게도 말이죠.)
추석 연휴 동안 <원스>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습니다. 한국영화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추석 극장가의 풍경 속에서 작게나마 제 자리를 마련하고 있던 <원스>는 이질적인 한 점의 여백 같아 보이더군요. 일단 제가 수많은 한국 영화들보다 <원스>를 택한 건 그 영화들을 이미 언론시사를 통해 봐버린 탓이기도 했고, 더욱 솔직해지자면 <원스>의 시사 일정을 놓쳐버린 것을 아쉬워하고 있던 차에 한가했던 추석 연휴는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원스>를 보기 일주일 전쯤에 이미 OST를 구매해서 듣고 있던 저로서는 이 영화를 보지 않고서야 버틸 재간이 없었죠. 결국 전 <원스>에 대한 갈증은 두 번에 걸친 연일 관람으로 해갈하게 됐습니다.
위에서 밝힌 바처럼 애초에 영화 관람의 의도는 이 글을 불러내고자 하는 기획적 움직임과는 무관했습니다. 단지 극장을 찾은 건 <원스>를 보고 싶다는 순수한 의욕에 불과했습니다. 이 글은 그 순수했던 욕망에 덧씌워진 어떤 불순한 의도를 위해서 작성된 것입니다. –그 불순한 의도는 글의 말미에 밝히겠습니다.- 어쨌든 개인적으로 고백하자면 <원스>의 언론시사회를 불가피하게 놓친 덕분에(!) 이 영화를 일반 상영관에서 접하게 된 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끔씩 언론 시사회를 통해서 접했던 영화들에 대해 리뷰란 형식으로 글을 쓰고 별점을 매기는 과정을 <원스>에 덧씌우지 않았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매우 뿌듯했기 때문이죠. 가끔씩은 그 책무가 저에겐 과분한 짐처럼 얹혀지는 까닭이며, 동시에 누군가의 고뇌에서 나왔을 창작물에 별점을 매기는 것에 대한 어떤 중압감을 느낄 때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박한 평가가 됐던, 후한 평가가 됐던 마찬가지로 말이죠.
처음 <원스>를 보기 위해 찾은 곳은 강남 코엑스의 메가박스였습니다. 극장에 가기 위해 올라탄 지하철의 한산함은 명절날 도시의 풍경 중의 하나로 낯설면서도 멋쩍지는 않았습니다. 해마다 명절이 오면 발견할 수 있는 이 도시의 풍경이자 이 당시에만 허락된 여유이기도 하니까요. 물론 코엑스엔 어김없이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메가박스에서도 티켓을 끊기 위한 늘어선 줄도 여전했습니다. 하지만 평소보단 전반적인 인파의 간격 차가 더욱 벌어졌음이 감지될만큼 코엑스에도 명절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는 듯 하더군요. 저는 코엑스 메가박스 10관에서 23일 2시 35분에 영화를 봤습니다. 상영 시간 10분 전, 상영관에 들어섰을 때 확연히 구별되는 공석의 자태는 이 영화가 확실히 소외될 것이란 예측에 맞아떨어지는 품세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관객들이 삼삼오오 상영관을 채우더니 종래엔 스크린에 가까운 앞줄 몇 곳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채워지더군요. <원스>에 대한 기대이상의 수요가 약간 놀랍기도 했고, <원스>가 어떤 특별한 수요를 위해서 존재하는 영화만은 아닐 수 있단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이는 물론 영화적 자질에 대한 우려가 아닌 그 자질을 수용하고자 하는 관객의 취향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였습니다. 한편으론 그런 취향을 존중한 멀티플렉스의 어떤 결정(?)이 먹혔다는 사실에서도 다행스러웠습니다. 상업적 마인드를 우선시하는 멀티플렉스 체인에서 큰 주목을 끌지 못하는 영화를 선택한 건 일종의 모험일테니까요. 그런 점에서 <원스>가 만들어 낸 상영관의 진풍경은 후에도 어떤 모험을 이끌어 낼 좋은 선례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두 번째로 <원스>를 보기 위해 찾은 곳은 명동CQN(씨네콰논)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추석 연휴 첫날이었던 24일 2시 50분 영화를 보기 위해 찾은 명동은 상당히 북적거리더군요. 다소 한산한 거리의 분위기를 기대했던 필자에겐 아쉬운 풍경이었지만 그것이 이 거리가 쉽게 보여줄 수 없는 이질적인 표정일 것이라 생각하곤 부질없는 기대감 따위는 접어둔 채 사람들을 피해가며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명동CQN 역시 멀티플렉스의 형태를 갖춘 극장이지만 전날 찾았던 코엑스 메가박스와는 확연히 대비되는 공간임은 확실했습니다. 상영관의 객석 수와 스크린의 너비를 비교하지 않아도 다양한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메가박스의 광활한 풍경과 달리 여유롭게 자신의 영화를 기다리는 몇몇의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담한 실내의 모습은 이미 두 극장의 차이를 증명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전날과 마찬가지인 건 <원스>를 보기 위해 들어선 3관을 가득 채운 객석의 모습이었습니다. 소수의 수요를 만족시킬만한 특별한 영화들을 자주 상영하곤 하는 명동CQN의 특성상 이런 사실이 크게 특별할 이유는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원스>란 영화에 대한 수요층이 기대 이상이란 점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멀티플렉스 극장 체인인 코엑스 메가박스와, 그에 비하면 중소 규모라 할 수 있는 명동CQN에서 <원스>의 상영관을 가득 채운 관객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심정은 묘했습니다. 이는 극장 규모에 관계없이 <원스>란 영화가 어떤 수요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 즉 만족할만한 관객 점유율을 동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반가운 일이었죠. 이는 현재 멀티플렉스 극장들에 채워진 어떤 영화들을 통해선 경험할 수 없는 <원스>만의 순수한 외적 체험처럼 느껴졌으니까요. 특히나 작은 규모의 영화들이 외면받는 요즘같은 현실에선 고무적인 사실이며 한편으로 약간의 과장을 섞어 넣자면 다양한 영화의 수요를 원하는 일부 관객층의 열망을 극적으로 대변하는 사례처럼 보였습니다.
<원스>는 장르적으로 단순히 명명하면 뮤지컬(musical) 영화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이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대가, 혹은 우리가 아는 뮤지컬 영화와는 거리가 있는 작품입니다. 대부분의 뮤지컬 영화들은 음악을 위한 가상적인 공간을 마련하며 이를 장르적 특성으로 규정화하여 관객의 암묵적인 동의를 발생시킵니다. 그래서 뮤지컬 영화는 고유의 영화적 언약을 통해 관객과의 순수한 장르적 소통을 이루려는 의지의 산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역으로 관객의 동의 이전에 상황을 먼저 전시하고 그런 이색적인 상황을 관객에게 받아들이길 강요하는 셈이기도 하죠.
뮤지컬 영화에 대한 불결한 반감을 느낀다면 이런 까닭일 것입니다. 뮤지컬 영화들이 단순히 ‘뮤직’의 소재적 기능보단 ‘뮤지컬’이란 효과적 기능에 치중한 나머지 장르가 태생적으로 고스란히 떠안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한계가 발생하는 것이죠. 뮤지컬 영화의 영상은 음악을 위한 공간 마련을 축조하는 것으로 소비돼야 마땅한 것으로 인식되기도 하며, 때론 음악의 영상화를 위해 무모한 판타지를 연출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인식되기도 합니다. 만약 뮤지컬 영화를 싫어한다고 말한다면 이런 강박적인 장르적 연출로 인해 마련된 낯선 영화적 공간에 손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반발심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그것이 <원스>를 단순히 뮤지컬 영화라고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원스> 속의 음악들은 영화적 공간을 단지 음악을 위해 축조한 기능성의 역할로 국한시키지 않습니다. 이는 뮤지컬 영화들의 대다수가 취하는 어떤 강박 관념, 즉 뮤지컬이란 무대 위의 장르를 스크린 위에 재현하는 것이 장르적 의무라고 생각하는 방식에서 탈피하고 있기 때문이며, 혹은 애초에 <원스>가 그럴 의무가 없는 공간에서 연출되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원스>의 음악들은 어떤 특별한 공간을 마련할 의무감 따위에서 벗어나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에서 화음을 넣고 멜로디를 만들어냅니다. 이는 <원스>의 화음을 노래와 연주의 방식으로 직접 만들어내는 남녀가 영화 밖의 현실에서도 음악에 기반한 인생을 살고 있는 인물들인 덕분이기도 하지만 <원스>가 만들어내는 영화적 화음이 지극히 일상적인 평범함을 모태로 한 덕분이기도 합니다.
처음 카메라를 통해 <원스>가 시작되는 지점은 더블린의 길거리이며, 영화가 본격적으로 사건을 형성하고 감수성이 본격적으로 제 색깔을 물들이는 지점, 즉 마지막까지 제 이름을 드러내지 않기에 그와 그녀라고 명명할 수 밖에 없는 남녀의 만남이 이뤄지는 공간 역시 그 길거리입니다. 결국 <원스>의 음악은 우리가 흔히 길거리에서 지나치며 들었던 누군가의 목소리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단지 그녀가 어둑해진 길거리를 지날 때, 그의 노래가 들렸고 그 멜로디가 그녀를 잡아 끌었기 때문에 <원스>라는 이야기가 발생한 것일 뿐입니다. 이 허구적인 만남은 멜로디를 통해 진짜처럼 일상으로 스며들었고 그 진짜 같은 만남은 악보에 음표를 새겨 넣듯 영화에 이야기를 그려 넣어 갑니다. 그 안에서 음악은 어떤 배경으로서 존재하기도 하고 그와 그녀의 일상에서 존재하는 삶의 구성원으로서 자리잡기도 합니다. 그와 그녀의 목소리로, 그의 기타음과 그녀의 피아노음으로, 종래엔 그들의 삶에 존재하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인 계시로 거듭나며 <원스>의 음악 영화적 가치는 소박하게 빛을 발합니다.
<원스>가 뮤지컬 영화라는 인식을 각인시키는 건 <원스>의 음악들이 하나같이 뇌리에 남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원스>의 음악들은 영상의 정서적 여백을 채우는 음향의 기능성, 즉 영화의 정서를 완성시키는 장치적 역할에도 충실하죠. 하지만 중요한 건 너무나도 평범하게 영화 속에서 빈 자리를 채우는 <원스>의 영화적 음표들이 자신을 부각시키기 위해 영상 속에 오선지 같은 공간을 창작하는 방식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난다는 것, 즉 기존의 뮤지컬 영화의 중력에서 해방된다는 점입니다. 기존의 뮤지컬 영화에 내장된 음악들이 그것에 어울리게 구성된 개별적인 영상들만을 부분적으로 각인시키며 작품의 외부에서 개별적인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과 달리 <원스>의 음악들은 영화의 파노라마를 재생시키며 전체적인 작품의 테두리를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영화의 요소로서 대변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원스>의 음악들이 단순히 그 자체만으로도 음악적인 순기능의 생명력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이 영화의 장면들 위에 얹혀졌을 땐 전체적인 정서의 흐름에 얹혀지는 상황 연출의 수단으로 활용되며 이는 전체적인 영화 안에서 떼어낼 수 없는 구성원의 일부로 뿌리를 내리는 덕분입니다. <원스>의 음악들은 뮤지컬 영화에서 장르적으로 소모되고 독립적으로 소비되는 부품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영화를 재생시키는 정서적 뼈대인 셈이죠. 그래서 <원스>는 뮤지컬 영화이면서도 뮤지컬 영화의 범주에서 은밀히 벗어납니다. 어찌보면 이는 박제처럼 굳어진 장르의 변형된 문법이 본질적인 장르의 정통성을 이색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박제처럼 굳어진 뮤지컬 영화의 변형된 문법이란 음악을 통한 장면의 재구성이 정형화된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단지 기교적인 측면에 불과한데 근래의 뮤지컬 영화들은 이것을 장르의 책무처럼 떠맡고 있습니다. 음악에 걸맞는 영상에 강박증을 느끼는 것이죠. 물론 이는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만이 지닐 수 있는 특화된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적 완성도가 좌우하는 법이죠. <원스>의 장점은 그런 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원스>는 음악을 위한 무대를 필요로 하는 영화가 아니라 음악이 있는 장소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음악 영화니까요. 처음 영화는 그의 노래로 시작됩니다. 이야기를 보여주기 전에 음악으로 관객을 무장해제시키고 스크린과 객석의 거리감을 좁혀나가죠. 흥겹거나 절절한 멜로디에 귀를 쫑긋 세우다보니 어느새 화면에 빠져들어가더란 식입니다. 음악을 통해 이야기가 형성되고 동시에 음악과 함께 이야기는 걸어나가죠. 그리고 영화 속 남녀는 노래를 통해 대화를 나누는 어색한 영화적 리얼리즘을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고서도 각자의 노래와 서로의 화음을 통해 교감을 나눕니다. 이는 음악이라는 예술적 장르가 인간과 교감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살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원스>는 이렇게 '뮤지컬' 영화가 아닌 뮤지컬 영화의 순수한 본질에 접근한 것이죠.
강박으로부터의 해방감은 단지 창작자의 짐을 덜어내는 성과에 국한된 것만이 아닙니다. 이는 관객이 짊어져야 하는 어떤 부담감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죠. 암묵적으로 관객에게 수용되어야 할 뮤지컬 영화에 적합한 어떤 연출들에 대한 어떤 거부감, 즉 배우의 노래가 대화로서 활용되고 뮤지컬의 본색이 드러나면 조명이 밝혀지고 군무가 완성되며 스크린이 무대로 치환된다는 뮤지컬 영화적인 허상이 강요되지 않아도 되는 덕분입니다. 이는 때때로 그런 방식을 통해 재생되는 영화 내의 장르적 공간의 전시가 단순히 시각과 청각적인 일시적 효과 이상의 성과를 넘지 못한다는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영상으로 재현된 감성이 단순히 음악적인 묘미를 구축하기 위한 구조물의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산물임을 관객이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원스>의 자연스러움은 관객에게도 뮤지컬 영화로서의 감상에 대한 어떤 부담감도 짊어지지 않게 합니다. 덕분에 음악에 걸맞은 공간을 마련하는 기존의 뮤지컬 영화와 달리 <원스>는 일반적인 영화적 감상법으로 관객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뮤지컬 영화들은 음악을 위해 플롯이나 내러티브의 일정 부분을 인위적으로 할애하지만 <원스>는 단지 상황에 걸맞은 음악이 들리거나 직접 노래를 부를 뿐입니다. 이는 결국 <원스>의 음악을 영화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게 하며 음악과 영화가 함께 공존하는 자연스러운 뮤지컬 영화의 화음을 완성시키며 이를 음미할 수 있게 합니다. 이는 부분적인 뮤지컬적 연출에 현혹되어 전체적인 영화 흐름에 집중하기 힘든 뮤지컬 영화들의 산만함과도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만한 사실이죠.
어쩌면 이는 <원스>라는 영화가 태어난 지정학적인 정서 덕분일 수도 있습니다. 아일랜드의 더블린을 배경으로 한 소박한 영화적 풍경은 너무나도 여유롭습니다. 특히나 이런 배경에서 형성되는 정적인 감수성은 국내에서 이 영화를 소비할 도시의 관객들-주로 서울이겠지만-에겐 상당히 이국적인 인상을 줄 것입니다. 시내 한복판에서 애완견처럼 진공 청소기를 끌고 다니는 여성의 모습은 너무나도 귀엽고, 마치 7~80년대 대한민국의 시골을 연상시키듯 TV를 보기 위해 여성밖에 없는 이웃집을 매일같이 방문한다는 사내들의 이야기는 이 땅에서 찾아보기 힘들 것 같은 인간적인 유대감을 발견하게 하니까요. 게다가 그들은 일상에서 음악을 향유할 수 있는 현명한 수용자의 삶을 누리기도 합니다. 각박한 도시적 감수성에서 짓눌려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적인 신뢰가 살아있고 예술적 향유를 즐길 줄 아는 그들의 모습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물론 <원스>의 음악들이 들려주는 그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빠뜨릴 수 없겠군요. 어두워진 광장에서 그가 열창한 ‘Say it to me now’는 그녀와의 10센트 짜리 인연을 맺고 그 인연은 <원스>의 감동으로 귀결됩니다. 그녀가 종종 피아노를 치기 위해 들른다는 악기상에서 그와 그녀가 이룬 첫 교감, 'Falling slowly'는 단순히 청각적으로 감지되는 아름다운 선율 이상의 두근거림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영화의 중간 중간마다 불려지거나 삽입되는 음악들은 각각 그 순간의 정서를 명료하면서도 절실하게 대변합니다. 남자가 자신의 옛 사랑에 대한 기억을 버스 뒤 칸에서 장난스럽게 기타선율에 얹혀서 여자에게 노래하는 ‘Broken hearted Hoover fixer sucker guy’의 발랄함도 즐거웠지만, 반대로 옛 연인의 영상을 보며 상기된 안색 속에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작사에 열중하는 남자의 ‘All the way down’은 깊게 침전한 그만의 슬픔을 막연히 짊어지게 합니다. 또한 그녀가 피아노를 연주하며 자신의 사연이 담긴 곡을 그에게 들려주는 ‘The hill’을 통해 흘러 넘친 아픔이 가슴으로 스며드는 느낌은 눈물로 확인되는 안타까운 슬픔 너머로 미약한 심적 통증의 체감마저 선사합니다. 또한 늦은 밤, 그의 멜로디에 가사를 붙이는 그녀가 CDP의 배터리를 갈아 넣기 위해 집을 나선 후 돌아오던 중, 정적이 깃든 길 위의 어둠 속에서 들려지는 ‘If you want me’의 투명한 감수성은 <원스>에 담긴 서정성의 극치를 느끼게 합니다. 또한 그의 데모CD를 녹음하기 위해 모인 밴드의 연주를 그의 방과, 스튜디오 안에서 각각 들려주던 ‘Trying to pull myself away’와 ‘When your mind’s made up’과 같은 넘버의 잔상 또한 잊을 수 없습니다.
<원스>에서 잊을 수 없는 또 다른 장면 중 하나는 그녀가 종종 피아노를 치기 위해 들른다는 악기상의 주인이 자신의 귀에 전달된 남녀의 화음에 빙긋이 미소 짓는 순간입니다. 그 장면은 <원스>가 지닌 따뜻한 체온이 순수한 감동으로 전해지는 아름다운 단면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원스>는 음악이, 영화가, 혹은 그 모든 것을 둘러싼 예술이 인간을 감화시키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하고 그것이 인간과 공존하고 있는 순간을 관객에게 목격하게 만들며 그 시각적 경험이 이뤄지고 있는 찰나의 순간을 순수한 감동적 체험으로 변모시킵니다. DV카메라가 잡아낸 열악한 화면으로 채워진 <원스>가 이상하게도 자꾸만 근사하게 보이는 건 이런 사소한 기적들을 영화의 중간중간에 매복시킨 덕분일지도 모르죠. 열악한 데모 테이프를 틀어놓으며 남자의 음악을 담보로 대출을 신청하는 그녀의 맹랑한 제안 앞에서 은행의 대출 관리자는 대뜸 쇼를 믿느냐고 말합니다.
그리곤 기타를 잡고 노래를 부르고 과감히 대출을 승인할 때, 영화적 허구는 진실한 감동의 낯빛을 띠게 됩니다. 또한 남자의 지인이 주최한 조촐한 파티에 초대된 하객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로 저마다의 노래를 부를 때, 풋내기에 불과할 것 같던 밴드의 녹음을 불성실한 태도로 바라보던 프로듀서가 그들의 음악을 통해 탄복한 표정을 짓기 시작할 때, 아들의 데모CD를 듣고 감탄하는 그의 아버지가 지어낸 만족스러운 웃음을 대면할 때, <원스>의 감동은 단순히 스크린에서 빚어지는 일회적인 기획적 허구에 머물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서 객석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가 관객을 품에 안는 감동의 진귀한 체험으로 승화됩니다. 그 장면들을 통해 예술은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원스>는 음악과 영화가 완벽하게 빚어낸 절묘한 화음의 결정체로서, 예술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감동의 원형에 가깝습니다. 소박한 삶의 방식 안에서 가장 순수한 목적으로 예술을 향유하는 그들의 현실은 인간의 창조력이 가장 아름답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며 그런 순간들로 이뤄진 <원스>의 시공간은 마치 영화적 연출에 의해 빚어진 산물이 아닌 자연스러운 관찰을 통해 얻어진 순수한 본질의 체득과도 같아 보입니다. 예술의 힘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예술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대중의 자본을 소비하고자 하는 욕구로 다다를 때, 예술의 순수함은 이미 퇴색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순간을 이기지 못하는 웃음과 깊게 침전할 수 없는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쓸려나가는 요즘의 극장가의 정서가 채우지 못한 넓은 여백을 <원스>의 투명한 가치는 가득 채우고 있는 것만 같아 보입니다.
프랑스 중세의 인상파 화가로 명성을 떨친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처럼 ‘세상에는 즐겁지 않은 일들이 너무 많으니 예술이라도 아름다워야 하지 않겠는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독한 허영심으로 물들고 진심이 결여된 화려함을 추구할 때 순결한 의미에서 예술적 미는 퇴색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예술이 존재하는 건 고된 현실에서 찌든 인간의 황폐한 영혼을 정화시키는 역할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예술적 미의 진정성은 인간을 압도하는 전율보단 인간에게 깃드는 소박함일 것입니다. <원스>는 인간에게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를 단명하면서도 차마 형용할 수 없게 보여줍니다. 그건 어떤 순간에 머무는 효과가 아니라 영원의 지속으로 유지되는 기억이 될 것이기 때문이죠.
글의 말미에 다다랐으니 필자의 불순한 의도를 밝히자면, 단순히 이 글의 말미에서 이 문장을 보게 될 그 누군가가 될 그대가 그저 <원스>를 보러 가겠단 결심을 세우길 바란다는 것뿐입니다. 혹은 어떤 막연한 관심이나마 거머쥐었기를 실로 갈망합니다. <원스>의 투명함은 홀로 간직하기엔 너무나도 아까워서 그 빛을 나눌 누군가를 절실히 떠올리게 하는 까닭입니다. 예술이 지닌 보편적 미덕은 범접할 수 없는 황홀한 체험의 산물이기보단 손을 맞잡고 싶은 소박한 정서적 동참이 아닐까요?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연유도 그 순수한 예술적 에너지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원스>의 가장 큰 미덕은 그 따스한 추억을 나누고 싶다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 이 글로 인해 당신의 마음이 정해졌다면(when your mind’s made up) 더 바랄 것이 없겠고요. 또한 <원스>를 관람한 후, OST를 통해 다시 영화를 거슬러가는 것 또한 좋은 추억이 될 것입니다. 분명 억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스러운 그녀(And love her so, I wouldn’t trade her for gold)만큼이나 <원스>는 영원히 잊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순간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것들은 음악과 함께 할 때 더욱 투명하게 빛나니까요. 전 예술이 줄 수 있는 궁극적인 가치는 바로 그런 소박한 감동의 결정체를 통한 행복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원스>를 통해 얻은 그 행복을 나누고 싶다는 소박한 의지가 이 부끄러운 문장을 감히 그대에게 내보일 수 있는 용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만큼이나 <원스>의 노래들은 잊을 수 없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 여운을 지속하는 방법은 그 음악을 다시 듣는 것이며 이는 동시에 영화를 재생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OST에 수록된 14곡은 다시 <원스>로 돌아가는 출구이자 영화 속의 기억을 되살리는 통로인 셈이다. 그 14곡에 담긴 그와 그녀의 사연, 그리고 <원스>가 선사한 감동의 시공간을 재생시켜보자. 물론 OST를 소장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추천한다.
1. Falling slowly_ 그녀가 피아노를 연습하기 위해 종종 들른다는 악기상을 함께 찾은 그가 그녀의 권유에 의해 합주하게 되는 그의 자작곡. 그의 보컬과 기타, 그녀의 코러스와 피아노 선율이 더해져 아름다운 화음을 형성한다. 그의 표정을 살피며 건반을 누르는 그녀의 곁눈질에서 미묘한 감정의 변화가 예감되기도 한다. 음악 영화로서 <원스>의 본질을 확실히 일깨워주는 장면이자 OST의 킬링 트랙으로 지정해도 손색없는 산뜻한 넘버.
2. If you want me_ 그가 작곡한 음에 자신의 작사를 붙이던 그녀는 CDP의 배터리를 갈아 끼우기 위해 늦은 밤 길을 나선다. 그리곤 집으로 돌아오던 중 재생시킨 CD에서 플레이 된 음원에 자신의 가사를 붙여 그녀가 직접 노래하는 곡. 그녀의 슬픔이 묻어나는 가사가 쓸쓸한 밤거리의 풍경과 맞물리며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더불어 자신의 감정에 대한 그녀의 내면적인 혼란이 살짝 드러난다. 재미있는 건, 롤러스케이트를 탄 아이들을 비롯해서 이 장면에서 발견되는 주변의 인물들은 아마도 영화에서 고용된 엑스트라가 아닌 일반인처럼 카메라를 의식한다. 저예산 영화의 열악함이 되려 영화의 신선함을 더해주는 효과를 거둔다. 개인적으로 <원스>의 하이라이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3. Broken hearted Hoover fixer sucker guy_ 그녀의 진공청소기를 수리해주기 위해 그가 자신의 귀갓길에 동행한 그녀에게 함께 동승한 버스 뒷 칸에서 들려주는 노래. 그의 옛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장난스러운 기타 리프로 발랄하게 연주된다. OST는 영화 중의 웃음소리를 거르지 않고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영화 중엔 과격(?)해진 그의 노래에 불편한 심기를 장난스럽게 전달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OST에 이 부분은 수록되지 않았다.
4. When your mind’s made up_ 그의 데모CD를 녹음하기 위해 결성된 밴드가 스튜디오에서 처음으로 녹음하는 곡. 밴드로서의 합주 형태를 가장 진지하게 보여주는 장면으로 녹음 후에 카테스트를 위한 드라이브 장면 중에서도 배경음으로 들려지며 엔딩씬의 배경음으로 활용된다. 다소 안일한 자세로 지켜보던 프로듀서가 이 한 곡으로 진지한 자세로 돌변하기도 한다. 매끄러운 피아노 선율이 쟁글거리는 기타의 리프를 타고 흐르듯 어울리며 차근차근 절정의 상태로 오르는 남자의 보컬이 절절함을 느끼게 하는 서정적인 곡. 영화 상에서 가장 자주 듣게 되는 곡이다.
5. Lies_ 노트북을 통해 옛 연인과의 추억을 담은 동영상을 보며 작사에 열중하는 그의 장면에서 깔리는 곡. 그의 애틋한 그리움과 슬픔이 담담한 표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전해진다. 참고로 영상 속의 여자는 <원스>의 메가폰을 잡은 존 카니 감독의 오랜 연인이라 한다.
6. Gold_ 그가 그녀를 데려간 지인들의 파티 중, 그가 지인들과 함께 연주하는 곡.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남녀 주인공 외의 타인이 보컬을 맡은 곡이기도 하다. 각자 돌아가며 한 소절이든, 혹은 악기를 동원한 합주든 저마다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서 생활 속에서 음악을 애호하는 아일랜드인들의 소박한 정서가 소박하게 보여진다. 또한 이 곡이 등장하기 전에 어느 중년 여성과 중년 남성의 짧막한 노래가 영화상에서 들려지는데 그 중년 여성은 '그'를 연기한 글렌 한사드(Glen Hansard)의 친어머니라고 한다. 아쉽게도 그녀의 노래는 영화상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7. The hill_ 늦은 새벽까지 데모CD를 녹음하던 중, 마지막 녹음을 앞둔 10분의 휴식 시간 중, 녹음실을 나온 그녀가 우연히 옆방에서 찾은 피아노를 연주한다. 그녀의 연주음을 듣고 찾아온 그의 권유로 그녀가 피아노를 연주하며 들려주는 자작곡. 곁에 없는 남편을 향한 진실된 사랑을 담고 있는 가사가 곁에 있는 그와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예감하게 한다. 부서질 것처럼 가녀린 그녀의 음성과 피아노 선율을 통해 내면에 깊게 침전한 그녀의 슬픔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넘버. 영화에서는 절제할 수 없는 감정에 노래를 중단한 그녀로 인해 중간에 완곡을 들려주지 못하지만 OST에는 완곡이 수록됐다.
8. Fallen from the sky_ 첫 곡 녹음 후, 녹음실의 풍경을 편집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장면에서 배경음으로 들려지는 곡. 장난스러우면서도 발랄한 공간의 여유와 즐거움이 한껏 묻어난다. 유일하게 신디사이저(synthesizer)음을 인트로에 도입한 넘버이기도 하다.
9. Leave_ 그녀의 청소기를 수리하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한 그녀가 그의 자작곡 데모테이프를 듣는 장면에서 플레이 된 테이프의 음질 형식으로 들려지는 곡. 후에 그의 CD를 녹음할 스튜디오 대실비를 마련하기 위해 방문한 은행의 대출 매니저(small loans manager)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장면에서 같은 방식으로 들려진다. OST엔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원곡이 수록됐다.
10. Trying to pull myself away_ 스튜디오 녹음에 들어가기 전, 밴드 멤버들이 그의 방에 모여 연습하는 장면에서 연주되는 곡. 경쾌한 넘버가 인상적이다. 위에 언급한 ‘When your mind’s made up’과 함께 밴드의 형태로 연주되는 방식으로 영화상에 보여지는 유일한 곡이기도 하다.
11. All the way down_ 영화 초반, 그가 방안에서 홀로 옛 연인을 생각하며 부르는 곡. 노래와 함께 옛 연인과 연결되지 못하는 통화를 시도하는 장면이 교차되며 전화기 옆에 놓인 그의 옛 연인 사진이 클로즈업되기도 한다. 그의 깊은 외로움을 느낄 수 있게 한다.
12. Once_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기다려야만 들을 수 있는 곡. 제목 그대로 영화의 타이틀롤 넘버로 남녀의 서정적인 화음이 인상적이다.
13. Say it to me now_ 어두워진 더블린의 시내에서 그가 열창하는 곡으로 그의 지르는 창법이 인상적이다. 그와 그녀의 인연의 계기가 되는 곡이자 <원스>의 본격적인 이야기를 여는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