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이분법으로 나누던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시대적 유산으로 기억되고 있다 해도 대한민국은 여전히 냉전의 접경을 품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다. 물론 그 앙상한 경계 이남에서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이를 체감하지 못하는 불감의 시대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20대 초중반을 지나는 남성에게 날아올 입대영장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이데올로기의 현재를 일시적으로 자각하게 만든다. 이념의 대립이 만든 불길은 잦아들었음에도 그 불씨는 여전히 이 땅에 주거한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이념적 강압의 폐쇄성을 한번씩 경험케 한다.
공수창 감독은 전작 <알포인트>를 통해 베트남 참전이란 한국 근대사의 유물론적 트라우마를 소환시켜 외부에서 발생한 폭력의 전장에 내몰린 이들의 내면적 공포를 장르에 빙의시키며 그 공포를 야기시킨 실세들의 죄의식을 물었다. 이와 반대로 <GP506>은 그 구시대적 산물이 현전하는 이 땅의 구태의연한 지표로 침투해 들어가 시대적 흐름 속에 함몰됐을 뿐, 여전히 뇌관이 살아있는 한반도 이데올로기의 잠재적 실체를 추적한다.
GP(Guard Post)는 휴전선 남방한계선보다도 북에 가깝게 위치한 최전방초소로서 북의 동태를 살피는 최전선이라 할 수 있다. 비무장지대라는 명칭이 무색하게도 무장태세를 갖춘 병력들이 상주하는 GP는 결말을 보지 못한 유효한 전쟁이라는 잠재적 불안 속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한반도의 아이러니를 극단적으로 대변하는 영토에 가깝다. 구시대적 망각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문서적으로 유효한 이념적 폭력은 그곳을 거니는 소수의 청년들에게 일시적으로 묵언적 힘을 행사한다.
<GP506>은 그 불분명한 형태를 지닌 이념의 실체로부터 발생하는 살상의 정체에 대한 이야기다. 아들과 함께 죽은 부인의 영전을 지키던 국방부 군수사대 소속 노성규 원사(천호진)는 최전방GP에서 벌어진 소대원 몰살 사건 수사에 즉각 투입된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사건의 실체를 추적하는 동시에 고위 장성인 육군총장의 아들, GP506의 GP장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 후, GP에 도달한 그는 끔찍하게 살해당한 GP소대원들의 시신을 마주보며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라는 의문을 얻게 되지만 영문을 알 수 없는 생존자들의 묵묵부답은 이를 윽박지르게 만든다.
유일한 생존자였던 강진원 상병(이영훈)은 의식불명의 중태에 빠져있고, 그 와중에 본래 GP소대원의 수에서 하나가 모자랐던 시신의 수는 생존자의 발견으로 채워진다. 그는 자신이 GP장 유정우 중위(조현재)라고 주장하면서도 사건의 실체에 대해 묵묵부답이며 오히려 남몰래 증거를 파기시키려 한다. 결국 원인은 쉽게 규명되지 않고 사건은 점점 미궁에 봉착하며 그 와중에 GP로 들어선 새로운 병사들은 이상한 기운에 휩싸인다. 접점이 보이지 않는 난자된 의문의 더미 속에서 수사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며 그 사이에서 은폐의 의혹은 짙어진다. <GP506>은 미스터리를 표방하며 장르적 특성을 부각시키고 있지만 사실 그 외피가 감싸고 있는 본심은 정치적인 것에 가깝다.
소대원이 몰살당한 내무반의 참상은 결코 보편적이라 말할 수 없는, 특수 사례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군대라는 폐쇄적 체제가 유발할 수 있는 극단적 폭력의 잠재적 재현이란 점은 심상치 않다. 그들에겐 때로 실체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이북이란 객관적 주적보다도 배타적인 계급적 폐쇄성으로 이뤄진 내부적 체제에 대한 주관적 증오가 가깝게 도사린다. 폭력을 억누르기 위한 폭력의 방식으로 순환되는 체제의 유지는 개인적 자의식을 억압으로 은폐할 뿐, 개개인의 내면에서 남모르게 응축된 체제적 반감은 때로 한계치를 넘어 극단적으로 폭발되곤 한다. 영화와 직결된 사항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GP506>이 2005년에 발생했던 김일병 총기난사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건 소재의 연관성을 떠나서 일방적 통로에 놓인 한국의 징병 체제의 모순에서 비롯된 극단적 사례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칠갑이 된 청년들의 시체는 폐쇄적 체제의 한계성이 빚어낸 극단적 실패의 사례다. 하지만 그 체제의 상석에 앉은 지도부는 그 실상을 묵인하는데 급급할 뿐이다. 수사를 진두지휘하는 노성규 원사는 이에 맞서 의지를 표하지만 드러나는 단서들은 하나같이 새로운 의혹의 미로를 형성할 뿐, 사건의 갈피를 향한 출구를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GP506>은 복잡한 미로와 같은 사건의 실체를 추적하는 동시에 그 미로를 헤매는 이들의 혼란에 주목한다. 음습하게 내려앉은 GP에서 발생한 살상사건의 배후를 쫓는 수사가 좀처럼 진전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현장에 투입된 병사들은 폐쇄적 공포의 미궁으로 한발자국씩 들어선다. 사건에 한걸음씩 다가갈수록 의혹은 짙어지며 규정할 수 없는 새로운 의혹은 남몰래 진전되기 시작한다.
(결정적인 스포일러라 직접 언급할 수 없는) 어떤 원인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GP506 병사들과 무관한 새로운 경계지원병들은 전자들이 맞이했던 파국을 고스란히 이어받는다. 전자와 무관했던 이들이 맞이하게 되는 상황의 반복은 GP라는 동일한 공간에 발을 들인 이들의 운명적 굴레를 상징하며 이는 체제의 유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프로파간다의 진실과도 같다. 국가의 위기를 강조하여 애국심을 권유하며 이를 볼모로 국가의 권위를 세우는 체제의 비열함은 폭력에 노출된 최전선의 젊은이들의 희생을 애국적 희생으로 미화함으로써 다시 한번 안보의 권위를 굳건히 다진다. 참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중첩되며 진행되는 새로운 파국의 진전은 <GP506>을 어지럽게 분산시킨다. 이와 함께 <GP506>의 미스터리는 쉽사리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끊임없이 이목을 분산시키고 어지러운 동선을 그려나간다. 그 과정에서 인과관계의 접점이 명쾌하게 맞아떨어지지 못하는 장르적 혼선이 발생하기도 하며 동시에 파국적 결말은 모호한 여운을 남기며 다시 원점으로 상황을 되짚게 만드는 무리수도 발생한다.
사실 <GP506>은 <알포인트>와 유사한 이야기 흐름과 캐릭터 구조를 지니고 있다. 군인이라는 동일한 신분의 인물들이 밀폐된 공간에 들어서서 파국을 맞이한다는 과정은 두 작품을 비교선상에 올려놓게 만든다. 다만 전작이 초자연적 현상이라는 심리적 공포를 장르적 매개로 삼았던 것과 달리 후작은 질환적 현상이라는 물리적 공포를 장르적 매개로 삼는다. 하지만 후작은 전작과 달리 원인의 발생지점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어떤 차이를 분명히 드러낸다. <알포인트>가 과거와 타국을 배경으로 하는 것과 달리 <GP506>은 현재와 국내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다. <알포인트>와 <GP506>의 인과적 명확성이 차이를 보이는 건 전자와 후자가 서로 다른 배경을 두르고 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전자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개인들의 죄의식을 다룸으로서 역사적 과오라는 고지를 명확하게 참배한다면 후자는 징병과 휴전이라는 불명확한 현재진행형의 관념적 전선에 내몰려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오류가 발생하고 있음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원인을 쉽게 규정할 수 없고, 해결책도-혹은 해결의지도- 불분명한 난제는 마치 이유를 알 수 없는 미궁의 사건처럼 불명확할 따름이다.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인과관계의 구조, 그리고 원인을 알게 된 순간 직감할 수 밖에 없는 파국의 결과. 마치 <GP506>의 미스터리는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의 난제를 보는 것처럼 어지럽다.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서 개인을 착복하는 권력의 수혜는 과연 어디로 방출되는가. 군대라는 체제에 편입되어 (상부에서 하부로 가는) 권력적 복무를 완수한 청년들이 만들어낸 사회적 체계는 어떠한가. 전쟁의 상흔으로부터 세월은 멀리 떠내려왔지만 이념의 선전을 통한 권력의 착취는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GP506>은 그 모순 같은 반복의 세월을 피칠갑된 청년들의 시체로서 반문한다. 그 죽음이 무엇을 위한 희생인가가 아니라 그 죽음을 착취하는 실체는 무엇인가. 젊은 병사들의 경계는 외면적으로 훈육된 주적을 향하고 있지만 실은 내부적인 강압이 만들어낸 폭력의 구조로 이미 뻗어나간 것임을, 그리고 결국 그 잠재적 가능성의 파국은 언제라도 발화점에 도달해있음을. 결국 권력의 도구로 변질된 이념의 그늘은 폭력적 세뇌를 통해 억압적 체제를 유지시키며 국가적 권력의 수하로서 국민을 몰락시킨다. 혼란을 가중시키는 흐름으로 인해 장르의 집중력이 미흡하다는 거슬림을 인지하면서도 <GP506>이 주목될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유는 이런 속성에서 기인한다. 거대한 국가적 사명감을 통해 개인을 억압하는 체제는 결국 괴질과도 같은 사회적 병폐를 야기시킨다. 결국 그에 종속된 개인들은 강압을 의무로서 수행하며 체제의 병세는 더욱 악화된다.
(무비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