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뱀파이어물의 바로크 시대다. 고전적인 호러 장르의 유물이나 다름없었던 뱀파이어는 지금 과도기적인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새롭게 줄기를 뻗어나가는 뱀파이어물의 진화가 엿보이는 다섯 편의 계보를 소개한다.
<박쥐성의 무도회>
용감한 뱀파이어 킬러 혹은 실례합니다만, 당신의 이빨이 내 목을 물었어요(The Fearless Vampire Killers Or Pardon Me, But Your Teeth Are In My Neck). 고전적이면서도 음산한 한글 제목과 달리 긴 영문 원제는 모종의 위트를 품고 있다. 거장이라 불리는 로만 폴란스키가 연출과 출연을 겸한 1967년작 <박쥐성의 무도회>는 그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이례적이란 수사로 치장되는 작품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거듭하며 과감한 폭력 묘사조차 불사하는 그의 극단적인 연출 방식 안에서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유머를 만날 수 있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 B급 감수성으로 무장한 이 뱀파이어 영화는 중후한 서스펜스 대신 백치스러운 소동극을 곳곳에 포진시켰다. 이 영화는 비극적인 후일담을 낳았다. 여주인공 역의 샤론 테이트는 이 영화로 만난 로만 폴란스키와 결혼한 뒤 임신 8개월에 이른 당시 살인마 찰스 맨슨이 이끄는 광신도 집단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덕분에 이 영화에 박힌 유머들은 역설적인 비극으로 맺혔다.
<노스페라투>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나우르의 1922년작 <노스페라투>는 흡혈귀 문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브람 스토커의 <드라큐라>를 영화화한 작품으로서 독일 표현주의 고딕영화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성적인 메타포를 서스펜스와 연결하며 뱀파이어 영화의 섹스심벌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한 작품이자 뱀파이어라는 캐릭터의 묘사에 있어서 어떤 원형의 이미지를 제시한 작품이기도 하다. 뱀파이어 영화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이 작품을 동명 그대로 리메이크한 1979년작 베르너 헤어조크의 <노스페라투>는 원작의 성과를 훼손하지 않는 동시에 발전적 성과를 자랑하는 작품이다. 원작에 비해 보다 간결해진 캐릭터 관계를 통해 서사적인 몰입도를 높인 리메이크작은 시적인 영상미를 자랑하는 원작의 분위기를 보다 관념적인 형태의 메시지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중심 캐릭터로 등장하는 세 배우의 뛰어난 연기가 눈에 띄는 가운데 특히 강인한 이미지를 전하는 이자벨 아자니가 깊은 인상을 남긴다.
<드라큐라>
브람 스토커의 원작에서 영향을 받은 후대의 수많은 뱀파이어 영화 가운데 그 원작의 형태에 가장 충실하게 접근한 작품으로 꼽히는 건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1992년작 <드라큐라>다. 드라큐라의 고전적인 중후함이 잘 표현된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사악한 악의 상징으로서 드라큐라를 묘사해온 뱀파이어물의 관성에서 벗어나 그 이면에 놓인 인간적인 면모를 조명하며 이를 매혹적인 대상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제작된 의상이 시대극으로서의 사실감을 더하는 가운데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세트는 장르적인 위력을 더한다. 이는 관능적인 에로티시즘을 통해 강력한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동시에 궁극적으로 멜로적인 감성을 부각시킨 코폴라의 연출적 야심과 효과적인 시너지를 이룬다. 키아누 리브스, 위노나 라이더, 안소니 홉킨스 등, 화려한 출연진만으로도 호화로운 이 작품에서 드라큐라 역을 맡은 게리 올드만의 열연은 단연 돋보인다. 최초로 컴퓨터 편집을 시도한 작품으로서 영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 작품은 아카데미 3개 부문을 수상했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앤 라이스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는 낡은 유물처럼 여겨지던 캐릭터를 회춘시킨, 그러니까 보다 현대적인 배경 안에서 뱀파이어라는 캐릭터를 활용할 수 있는 여지를 확신하게 만든 작품이다. 할리우드의 꽃미남 스타에서 세계 영화시장을 선도하는 큰 손으로 자란 두 배우,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가 함께 출연한 이 작품은 당대 꽃미남 스타였던 두 배우의 외모만으로도 뱀파이어에 대한 판타지를 부추긴다. 영원히 늙지 않는 불멸의 존재로서의 영원성에 대한 환상과 고독한 존재에 대한 연민이라는 양면적 특성을 부여한 이 영화는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보다 입체적으로 치장하고 있다. 고전적인 캐릭터를 현대적인 배경에 녹여내며 악마적인 공포를 한 꺼풀 벗기고 한층 더욱 신비로운 캐릭터로서의 이미지를 덧씌우는데 성공함으로써 영화적 캐릭터로서 뱀파이어의 수명을 연장하는데 큰 기여를 한 작품이기도 하다.
<렛 미 인>
자신의 방 안에서 칼을 꺼내든 소년은 허공을 위협한다. 매일 같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소년이 할 수 있는 건 대상이 없는 윽박 뿐이다. 어느 날처럼 홀로 집 앞의 나무를 대상으로 화를 풀던 소년은 등 뒤에서 기이한 인기척을 느낀다. 소년, 소녀를 만난다. <렛 미 인>의 원제 <Let the right one in>은 뱀파이어 소녀를 초대하기 위한 주문이다. 외로운 소년과 고립된 소녀는 해가 지고 어두운 밤이 찾아오면 밀회를 시작한다. <렛 미 인>은 아름답고 환상적인 로맨스이자 절절하고 시린 멜로의 감성을 품은 뱀파이어 호러다. 창백하듯 투명한 스웨덴 설원은 평화와 공포가 함께 머무는 중의적 공간이다. 새하얀 눈 위로 내려앉은 햇살이 사라지면 그 위로 피가 맺힌다. <렛 미 인>은 간혹 무덤덤하게 머리를 드는 긴장감에 심박이 뛰다가도 순수한 동심이 진지하게 반짝이는, 뱀파이어라는 소재에 깃든 악의적 관성을 천진난만하게 막아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비범한 재능으로 완성된, 실로 아름답고도 경악할만한 로맨스를 선사한다.
중세 유럽의 사실주의 화가들은 화폭에 현실을 옮겨 담고자 했다. 극사실주의적인 붓터치로 실사와 그림 간의 피아를 좁히고자 했다. 선명한 명암 속에서 드러나는 사물의 재질이 필사되듯 채워졌다. 크리스트교의 엄숙주의가 지배한 중세 바로크 미술은 우아함과 장엄함의 극치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눈이 호강하고 있는 것만 같다. 기계적인 인상도 느껴진다. 작은 포도알맹이에 맺힌 투명한 물기까지 화폭에 그려낸 사실주의적 색채감은 경외를 넘어 경악할 지경이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접근이다. 그 실재적인 색감을 구현하기 위한 끊임없는 실패의 경험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노력의 산물을 결코 간과할 순 없다. 하지만 중세 바로크 미술의 그림들은 아름다운 반면 떠오르지 않는다. 한 폭의 그림마다 경이로운 기교를 보여주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것들이 그러하여 어느 하나가 잡히지 않는다.
‘서양미술거장전-렘브란트를 만나다’란 타이틀은 무색한 일이다. 렘브란트가 유화뿐만 아니라 에칭으로도 유명하다지만 실상 유화 한 점뿐인 렘브란트 전시회란 에칭으로 구색을 맞춘다 한들 어딘가 석연찮은 게 사실이니까. 물론 그 밖에도 루벤스와 반다이크, 푸생, 브뤼헐, 부셰 등,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의 그림이 몇 점 자리잡고 있지만 그저 구색을 맞추는 느낌이다. 서양미술거장전이란 거창한 타이틀은 무색하지만 어쨌든 화려하고 우아한 중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묘한 감흥이 생김은 부정할 수 없다. 완벽하고 섬세한 디테일이 가득한 사실주의적 터치과 우아하고 장엄한 신 고전주의적 감성을 지켜본다는 건 실로 기이한 낭만임에 틀림없다. 호화스럽되 우아하며 예민하지만 섬세하다. 르네상스의 성취를 후퇴시킨 바로크 미술의 걸작들은 암흑 시대 속에서도 나름의 고민을 품었다. 고상함 속에 영험을 그려 넣기 위해서, 분명 그들은 노력했을 것이다. 물러서는 와중에도 성취는 발견된다. 바로크 시대는 분명 성취를 위한 퇴보의 시대였다.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그림은 프랑수아 부셰의 ‘헤라클레스와 옴팔레’다. 관능적인 에로티시즘 사이로 매혹적인 우아함이 깃든다. 격정적인 낭만 속에서 고상한 품위가 유지된다. 실로 사랑하고 싶어지는 그림이다. 헤라클레스와 옴팔레의 서사를 알고 본다면 어딘가 서글퍼지겠지만 적어도 그림 너머의 순간만큼은 황홀하다. 풍만한 육체 속에 낭만이 깃들고 입을 맞춘 찰나는 화폭에 담겨 영원을 누빈다. 영원한 시간, 영원 하고픈 시간. 관능과 순수 사이에 놓인 투명한 매혹이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