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안온하게 내리쬐는 산뜻한 외관의 풍경과 달리 깊게 그늘지듯 침침한 내부의 정경이 대조적이다. 이런 철창이 있을 곳은 세상에서 2군데 밖에 없다. 동물원과 여기. 대사가 지칭하는 그 여기란 곳은 바로 교도소다.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교화시켜서 내보내는 곳이기도 하지만 어떤 범죄자는 그곳에서 걸어나갈 수 없다. 교도소는 사형을 집행하는 곳이기도 한 탓이다. 그리고 그곳은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거나, 실행하거나, 확인한 이가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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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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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자> 단평

cinemania 2009. 11. 5. 00:46

사형은 그 제도적 처벌이 부득이하게 제3자의 심리적 피해를 묵인하고 있다는 데서 보다 심각한 문제를 품고 있다. 사형이라는 제도의 존폐가 심각하게 고려돼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형수에 대한 인권을 논하기 이전에 그 제도적 행위를 지켜봐야 하고, 실행해야 하고, 확인해야 하는 3자의 인권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집행자>는 분명 특별한, 그리고 중요한 시각을 제시하는 영화다. 단순히 사형수에 대한 인륜적 동정에서 벗어나 사형을 집행하는 자들에 대한 인권을 조명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묵직한 소재를 다루는 <집행자>는 종종 그 무게감을 떨쳐내려는 듯 화기애애한 순간을 묘사하기도 하고 애틋한 감정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덕분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처럼 과한 웃음을 짊어지기도 하고, 지나치게 의미를 확장하는 상황으로 이야기를 벌려나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되레 영화는 상투적이다. 무언가 해보려고 애쓰기 때문에 오히려 식상해진다. <집행자>는 분명 의미 있는 영화다. 동시에 체제에 적응해가는 신참과 그 체제에 신참을 훈육시키는 베테랑의 관계가 흥미롭게 묘사되는 버디무비적 영화이기도 하다. 단지 교도소 안팎의 햇살과 그늘만큼이나 연출적 묘미와 의미적 전달을 잘 중화시키지 못했다는 게 흠이랄까. 보다 심플하게 서브 플롯을 자제했어야 하거나 인물들의 감정을 지나치게 일반화시키지 않았다면 좀 더 확고하고 흥미로운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이런 사족과 같은 감상이 남는 건 의미만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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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다는 말은 정말 그것이 어찌할 수 없어서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찌할 수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말이기도 하다. 다수의 편견과 고정관념은 때때로 전체적인 관습처럼 오용되어 개인의 특수한 취향을 제한하고 보편적 권리마저 포기하게 만드는 강압으로 작동한다. <날아라 펭귄>은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폭력들을 드라마투르기로 엮어낸 작품이다. 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4번째 영화 <날아라 펭귄>은 다양한 감독들의 옴니버스로 구성된 시선 시리즈들과 달리 순례 감독에게 전권을 위임한 첫 번째 장편 인권위 영화이기도 하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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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를 앞에 둔 신부는 기도를 거듭할 뿐이다. 기도는 환자는 살리지 못한다. 그저 무기력한 언어로서 환자를 배웅할 뿐이다. 신부는 환자를 살리고 싶다. 하지만 신부는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의 몸을 제단에 바친다. 백신개발실험에 참여해 자신의 육체를 바이러스의 볼모로 삼는다. 하지만 그 결과 신부는 뱀파이어가 된다. 죽음에 직면했던 신부는 뱀파이어의 피를 수혈 받고 살아난다. 스스로의 말처럼 그저 좋은 일을 하려 했을 뿐인데 운명은 가혹하다. 뱀파이어가 된 신부의 아이러니로부터 <박쥐>는 시작된다.

Posted by 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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